2011/11/04

새로운 민주공화국 건설과 진보적 민주주의 실현

변혁과 진보 (53)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민주공화국의 통치형태에 관한 역사학계의 논쟁

언론보도를 통해 것처럼, 역사교과서 집필기준 개발 공동연구진이 작성한 중학교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을 놓고 역사학계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주요쟁점은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 전두환 정권으로 이어진 40년 동안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는가 아니면 독재가 자행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수구파는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는 궤변을 늘어놓았고, 중도파는 독재가 자행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 논쟁은 단순히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에 관한 역사학계의 내부논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논쟁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하는 근본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이 외면할 수 없는 정치문제다.

아쉬운 것은, 그 논쟁이 수구파와 중도파의 어설픈 논쟁으로 지속되는 통에 정작 진보파가 끼어들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언론매체들은 '보수 대 진보의 논쟁'이 벌어졌다고 보도하였으나, 그것은 언론매체들이 보수와 진보라는 통속적 유행어를 습관적으로 들고나와 논쟁에 혼란을 부채질한 것이다.

△2011년 10월 28일 4. 19혁명기념도서관에서 열린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이론, 헌법, 역사'토론회에서 수구파와 중도파 학자들이 논쟁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2011년 10월 28일 보도사진)

이론적 정합성을 가지고 민주주의와 독재에 관한 논쟁을 제대로 하려면, 우선 국체와 정체를 헷갈리는 인식의 혼동을 피해야 한다. 국체는 국가형태를 뜻하는 것이고, 정체는 통치형태를 뜻하는 것이다. 국가형태와 통치형태를 혼동하면 민주주의와 독재에 관한 논쟁이 오리무중에 빠진다.

서구정치학 이론에서 국가형태를 구분할 때, 공화국과 입헌군주국으로 나누는 오래된 관행이 있다. 이를테면 프랑스, 미국, 독일 같은 나라들이 대표적인 공화국들이고, 영국, 스페인, 일본 같은 나라들이 대표적인 입헌군주국들이라는 식이다.

그런 식의 고전적 분류법이 오류는 아니지만, 변화발전된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19세기에나 통했던 낡은 인식이다. 20세기를 지나 어느덧 21세기로 넘어가고서도 10년을 더 보낸 오늘, 현실 속에 존재하는 국가형태를 19세기식 낡은 분류법으로 파악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19세기에 출현한 세계 각지의 공화국들이 20세기 100년 동안 급속히 진척된 사회역사발전에 따라 다양하게 변모되었기 때문이다.

세계 각지의 공화국들이 20세기 100년 동안 다양하게 변모되었지만, 오늘날 현실 속에 존재하는 공화국의 두 형태는 사회주의공화국(socialist republic)과 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이다. 

그런데 지금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을 둘러싸고 벌어진, 민주주의와 독재에 관한 논쟁은 사회주의공화국이냐 아니면 민주공화국이냐 하는 국가형태에 관한 국체논쟁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의 통치형태에 관한 정체논쟁이다.


압제에서 비자유민주주의로 이동한 통치형태

서구정치학계가 그들 나름대로 규정해놓은 개념정의에 따르면, 민주공화국의 통치형태에서 대비되는 두 개념은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와 비자유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다. 전자를 실질적 민주주의(substantive democracy)라고도 부르고, 후자를 절차적 민주주의(procedural democracy)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누구나 아는 것처럼, 이승만 정권에서 전두환 정권에 이르기까지 40년 동안의 통치형태는 절차적 민주주의도 실현되지 못한 최악의 압제(despotism)였다. 다시 말해서, 자유민주주의는 고사하고, 비자유민주주의도 되지 못한 독재정치의 전형이었던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와 비자유민주주의를 가르는 기준은 자유선거를 실시하고 자유시장경제를 실현하는가 그렇지 못한가에 따르는데, 이승만 정권에서 전두환 정권에 이르기까지 40년 동안 이 땅에서는 자유선거가 아니라 폭압선거, 부정선거, 금권선거가 계속 자행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나중에는 심지어 '체육관 선거'까지 자행되었다.

이승만 정권의 폭압선거를 반대하여 일어난 1948년의 단선단정반대투쟁,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를 반대하여 일어난 1960년 4.19 민주항쟁, 박정희 정권의 '체육관 선거'를 반대하여 일어난 1970년대의 유신철폐투쟁, 그리고 전두환 정권의 '체육관 선거'를 반대하여 일어난 1987년의 6월 민주항쟁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처럼 자유선거가 없었으니, 자유시장경제가 실현될 리 만무하였다. 이승만 정권에서 전두환 정권까지 40년 동안 이 땅에서는 자유시장경제가 아니라 관치경제와 재벌경제가 판을 쳤다. 이 땅에서 줄기차게 벌어진 생존권투쟁은 관치경제와 재벌경제가 강요한 착취와 궁핍에서 벗어나려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피눈물 흐르는 투쟁이었다.
 
그렇다면 노태우 정권에서 이명박 정권에 이르는 23년 동안 이 땅에서 자유선거와 자유시장경제에 의거한 자유민주주의가 실현되었을까? 이 땅의 국민들이 선거철마다 투표장에 가서 자유롭게 투표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을 자유선거라고 생각하면 오판이다.

얼마 전 위킬릭스(Wikileaks) 폭로문건들에서 드러난 것처럼, 이 땅의 대통령 선거는 미국의 정치공작에 의해 좌우되어 왔으니, 이 땅의 국민들은 미국의 선거공작이 허용한 범위 안에서 자기의 정치의사를 표현한 것 뿐이다. 그처럼 미국의 '보이지 않은 손'이 은밀히 조종하는 선거를 자유선거라고 하는 것은 궤변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이 땅의 자유시장경제도 미국, 일본, 유럽연합의 경제적 지배권에 편입되어 있다. 구조적으로 보면, 삼성, LG, 현대 같은 대기업들도 미국, 일본, 유럽연합의 '보이지 않는 손' 안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것 뿐이다.

예를 들어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에서 주택가격이 1% 떨어지면, 이 땅의 소비는 0.13% 위축되고, 경기는 0.09% 침체되고, 금융시장이 요동하여 결국 이 땅의 경제성장률이 0.04%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미국에게 경제적으로 예속되어 있는 판에, 이명박 정권이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까지 체결해놓으면 어떤 끔찍스런 결과가 나올 것인지 너무 뻔하다. 이것을 어찌 자유시장경제라 하겠는가!

△2011년 11월 3일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열린 한미 자유무역협정 저지 긴급 국민 행동 촛불문화제에서 5천여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민중의 소리> 2011년 11월 3일 보도사진)

위와 같이 실상과 내막을 알아보면, 노태우 정권에서 이명박 정권에 이르는 23년 동안에도 그 이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자유민주주의가 실현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전환점으로 하여 이 땅에 '민주화'가 실현되었다는 주장은, 지배와 예속의 진실을 감추는 거짓선동이다.

굳이 서구정치학계의 개념정의를 빌어서 말하자면, 노태우 정권에서 이명박 정권에 이르는 23년 동안 이 땅에 실현된 민주주의는 대미예속적 비자유민주주의다.

요컨대, 이 땅의 통치형태는 대미예속적 비자유민주주의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대외예속적 비자유민주주의를 타파하여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통치형태를 실현하는 것,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 사회변혁운동에 맡겨진 당면과제이며, 그 중심과제의 실현방도가 진보적 정권교체인 것이다.


민주공화국의 사회성격은 진보적 민주주의다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에 대해 헷갈리기 쉬운 까닭은, 그 개념이 민주공화국의 통치형태를 규정하는 개념으로도 쓰이고 민주공화국의 사회성격을 규정하는 개념으로도 쓰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유민주주의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 개념이다. 예컨대, 미국은 통치형태도 자유민주주의이고, 사회성격도 자유민주주의인데 비해, 영국, 독일, 프랑스 같은 서유럽 나라들은 통치형태는 자유민주주의이지만 사회성격은 사회민주주의다.

물론 민주공화국이라는 국가형태가 자유민주주의라는 사회성격과만 결합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공화국이라는 국가형태는 네 가지 사회성격들과 각각 결합될 수 있다. 네 가지 사회성격을 각각 규정하는 요인들은 민주공화국 사회경제의 네 가지 형태다.

이를테면,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시장경제가 규정한 민주공화국의 사회성격이고,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는 사회적 시장경제(social market economy)가 규정한 민주공화국의 사회성격이고, 인민민주주의(people's democracy)는 민주적 토지개혁(democratic land reform)이 규정한 민주공화국의 사회성격이고, 진보적 민주주의(progressive democracy)는 중요산업의 자립적 계획경제(self-reliant planned economy in major industry)가 규정한 민주공화국의 사회성격이다.

1948년 8월 이승만 정권이 등장한 이후 이명박 정권이 존재하는 2011년 11월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서는 위의 네 가지 사회성격들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 땅의 헌법에는 민주공화국이라는 국가형태가 명시되었으나, 그 민주공화국은 위의 네 가지 사회성격 가운데 어느 것과도 무관한, 사실상 무늬만 민주공화국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민주노동당이 얼마 전 개정한 강령에서 자기의 정치이념을 진보적 민주주의로 명시한 것은,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사회성격이 실현된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재건하겠다는 정치적 의지의 표출인 것이다.

그러면 왜 21세기 민주공화국의 사회성격이 진보적 민주주의로 되어야 하는 것일까? 자유민주주의의 파산에서 사회민주주의의 실패경험을 딛고 일어나 진보적 민주주의에로 나아가는 길고 험난한 사회변혁의 역사적 발전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

첫째, 자유민주주의는 자본주의체제의 모순을 격화시킴으로써 이미 오래 전에 파산한 민주주의다. 경험은, 민주공화국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사회성격에 의존하는 한, 발전은커녕 쇠락과 퇴행을 거듭하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를테면, 미국에서 사회성격으로 고착된 자유민주주의가 얼마나 위태로운 파산위기에 빠졌는지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둘째, 사회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의 결함과 모순을 극복하려는 정치적 동기에서 출발하였으나, 극복이 아니라 일정 기간 동안 변형 또는 완화시켰을 뿐이다. 오늘 사회민주주의를 실현한 서유럽 나라들이 내부 모순과 혼란에 빠져 허덕이고 있는 실패경험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사회민주주의는 더 이상 민주공화국의 발전대안이 아니다.

셋째, 인민민주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제국주의나라들의 억압과 착취에서 해방된 약소민족들이 제각기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면서 택한 사회성격이다. 당시 신생 민주공화국들은 공업화되기 이전 낙후한 농업국들이었으므로 당연히 민주적 토지개혁이 가장 중요한 과업으로 제기되었다.

그런데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각국에서 민주공화국이 건설된 이후 60여 년이 지난 오늘 사회역사적 현실은 크게 바뀌었다. 지금 3개 대륙에 존재하는 민주공화국들이 실현해야 할 새로운 사회성격은, 중요산업의 자립적 계획경제가 규정하는 새로운 사회성격, 곧 진보적 민주주의다.

3개 대륙의 민주공화국들이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사회성격을 가질 때, 민주헌법에 명시된 주권재민사상이 꽃펴나는 참된 민주공화국으로 거듭날 것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진보적 민주주의 실현은 곧 새로운 민주공화국 건설이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도 그 건설대오에 그들과 함께 있다. (2011년 11월 4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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