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9/14

42기의 미사일과 겁쟁이들

진실의 말팔매 <35>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미국의 제35대 대통령 존 케네디(John F. Kennedy, 1917-1963)의 부인이었던 재클린(Jacqueline L. B. Kennedy, 1929-1994)이 케네디 대통령의 보좌관이었던 역사학자 아서 쉴레진저(Arthur M. Schlesinger)에게 구술하였던 녹음자료가 세상에 공개되었다. 1964년 초에 8시간 30분 동안 녹음한 것인데, 47년만에 햇빛을 본 것이다. 그 녹음자료는 정치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하였던 대통령 부인의 수다스런 이야기로 가득 차있지만, 눈길을 끄는 대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눈길을 끄는 것은, 1961년 4월 말 어느 날 케네디가 백악관 침실에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울었다는 대목이다. 그는 왜 정신적 고통을 느꼈을까? 1961년 4월 17일 쿠바를 침공하여 신생 혁명정부를 전복하려고 기도하였던 군사작전이 완전히 실패로 끝났으니 케네디가 괴로워한 것은 당연하였다.

미국 중앙정보국 침투요원들과 그들이 훈련시킨 쿠바망명자로 편성된 '2506여단(Brigade 2506)' 병력 1,400명은 '쿠바원정군(Cuban Expeditionaty Force)'이라는 깃발을 들고 쿠바 남쪽에 있는 피그만에 기습상륙을 하다가 참패하였다. 1,400명 가운데 114명이 죽고, 1,202명이 쿠바혁명군에게 포로로 잡혔으며, 작전기를 타고 근접지원작전을 하던 미국군 공군조종사 4명, 미국군 공수부대원 1명도 피격, 사망하였다.

포로들 가운데 쿠바 침공 전에 쿠바에서 고문과 학살을 자행한 전과가 있는 중범죄자 5명은 사형에, 나머지는 30년 징역형에 처해졌다. 미국은 5,300만 달러에 이르는 식량과 의약품을 쿠바에 넘겨주고 포로들을 데려갔다.

미국의 쿠바 침공이 참패로 끝난 때로부터 약 넉 달이 지난 1961년 8월 우루과이 푼타 데 에스테에서 열린 미주기구(OAS) 경제회의에 참석한 쿠바혁명가 에르네스토 체 케바라(Ernesto Che Guevara, 1928-1967)는 회담장에서 만난 케네디 보좌관 리처드 굿윈(Richard N. Goodwin)에게 불쑥 쪽지 한 장을 건넸다. 케네디에게 전해주라는 그 쪽지에는 이렇게 씌여있었다. "침공을 당하기 이전에 쿠바혁명은 약했으나, 지금은 이전보다 더 강해졌다. 고맙다."

재클린이 남긴 구술녹음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1962년 10월 어느 날 미국 버지니아주에 있는 대통령 별장에 머물고 있던 재클린은 케네디의 전화를 받았다. "왜 워싱턴으로 돌아오지 않느냐?"는 평소와 다른 남편의 목소리를 들은 재클린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감하였다.

소련 미사일이 쿠바에 배치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알게 된 재클린은 케네디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우리는 당신과 함께 여기에 남겠어요. 나는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요. 당신 없이 사느니 차라리 당신과 함께 죽고 싶어요. 우리 애들도 함께..."라고 말했다. 구술녹음에서 재클린은 "그 순간부터 비몽사몽에 빠진 듯하였다"고 술회하였다.
'쿠바 미사일 위기'로 역사에 기록된 그 사건이 일어났던 1962년 당시 미국은 전략미사일 377기를 보유하였고, 1,000기를 추가로 생산하는 중이었다. 그에 비해 소련은 대륙간탄도미사일 44기, 중거리 미사일 17기, 준중거리 미사일 373기를 보유하였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가 시작됐다.
미국이 터키와 이탈리아에 전진배치한 전략미사일은 15분만에 모스크바를 타격할 수 있었으나, 소련이 자국 영토에 배치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이 워싱턴을 타격하는 데는 25분이 걸렸다. 그러한 전략적 불균형을 깨기 위해 소련이 생각한 군사적 방안은, 중거리 미사일과 준중거리 미사일 42기를 쿠바에 전진배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소련의 그러한 군사적 방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쿠바의 전략적 선택이었다. 쿠바 혁명의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Fidel A. Castro Ruz)는 쿠바에 소련 미사일 42기를 전진배치하는 것이 소련의 전쟁억제력 강화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계 사회주의 진영의 반제군사전선을 강화하는 것이라 여겼고, 그런 생각으로 그는 쿠바와 미국이 전면전을 벌일 위험을 무릅쓰고 소련의 미사일 전진배치 제안을 받아들였다.
 
△1962년 당시 소련이 보유했던 중거리 미사일.
미국은 세계 사회주의 진영의 반제군사전선을 강화하려는 쿠바의 전략적 선택에 격렬히 반발하였다. 케네디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전체 미국군에게 최고 수위의 경계태세명령을 내리고, 쿠바에 대한 해상봉쇄를 강행하였다. 20,980t급 중순양함 뉴포트 뉴스호(USS Newport News)와 3,460t급 구축함 리어리호(USS Leary)가 쿠바 해역으로 급파되었다. 미국의 그러한 전쟁위협에도 물러서지 않은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혁명군과 쿠바인민들에게 전시동원태세를 명령하고 미국에 맞선 결사항전을 결의하였다.

 케네디는 쿠바에 소련 미사일을 전진배치하는 작업을 중지하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전쟁을 일으킬 것처럼 위협하였으나, 사실 그는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케네디의 군사보좌관들은 쿠바 폭격계획을 제출하였으나, 죽음의 공포 앞에서 전쟁을 결심하지 못하고 안절부절하던 겁쟁이 케네디는 폭격작전계획을 승인하지 않고 해상봉쇄계획만 승인하였다. 시시각각 몰려오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비몽사몽에 빠진 자기 아내 재클린의 모습을 보면서 케네디 자신의 공포심이 더 커졌는지 모른다.



부카레스트호에 근접비행을 하고 있는 미국 초계기
 그런데 겁쟁이는 워싱턴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모스크바에도 있었다. 케네디가 27,100t급 항공모함 에쎅스호(USS Essex)와 2,616t급 구축함 기어링호(USS Gearing)를 쿠바 해역에 추가로 파견하여 소련 미사일을 싣고 쿠바로 향하던 화물선 부카레스트호를 나포할 것처럼 위협하자, 지레 겁부터 집어먹은 니키타 후르시쵸브(NIkita Khrushchev, 1894-1971)는 케네디에게 미국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이고 쿠바 미사일 기지를 철수하겠노라고 통보하였다.
 
 미국의 전쟁위협에 맞설 담력이 없었던 소련의 초라한 항복이었다. 워싱턴의 겁쟁이와 모스크바의 겁쟁이는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대결을 그렇게 끝내고 말았고, 세계 사회주의 진영의 반제군사전선을 강화할 결정적인 기회는 겁쟁이 후르시쵸브의 정치적 항복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쿠바에게 미안함을 느낀 소련 지도부는 쿠바대표단을 초청하였다. 피델 카스트로는 1963년 4월 29일 아직 잔설이 덮힌 무르만스크 해군기지에서 당시 소련 부수상 아나스타스 미코얀(Anastas Mikoyan, 1895-1978)의 영접을 받았다. 미코얀이 그에게 보여준 것은 무르만스크 해군기지에 정박된 핵추진 전략잠수함이었다. 피델 카스트로에게 첨단군사장비를 보여주면, 그가 소련 지도부를 겁쟁이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타산한 것일까?

이튿날 미코얀과 함께 항공편으로 모스크바에 간 피델 카스트로는 소련 지도부가 차린 성대한 환영만찬에 초대되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피델 카스트로가 쏟아내는 카랑카랑한 음성이 만찬장 공기를 뒤흔들었다. "나는 소련 미사일들을 쿠바에서 철수시킨 방식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가 핵전쟁 위기를 겪고 있을 때, (소련은) 우리와는 아무런 협의도 하지 않고, 우리의 등 뒤에서 (미국과) 타협하였습니다."
   
카스트로의 입에서 비겁한 소련 지도부를 질타하는 발언이 튀어나오자 기겁한 후르시쵸브는 그의 발언을 중간에 끊으면서 "우리는 쿠바에 대한 공격을 회피하도록 그렇게 하였고, 평화를 유지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고 소리쳤다. 그러자 피델의 노기어린 목소리가 겁쟁이의 비겁한 변명을 압도하였다. "헌신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정한 평화를 얻었을 뿐입니다. 만일 (소련이) 우리와 협의하였더라면 더 많은 성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참된 평화를 비롯한 많은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피델 카스트로가 갈파한 것처럼, 비겁한 소련 지도부는 반제군사전선을 강화할 결정적인 기회를 포기하고 미국에게 정치적으로 항복함으로써 불안정한 평화를 얻었지만, 그 불안정한 평화는 그로부터 28년 뒤에 소련을 몰락시켰고, 세계 사회주의 진영을 해체시켰다. 그로써 전 세계는 제국주의전쟁위험에 직접 노출되고 말았으며, 코소보전쟁, 이라크전쟁, 아프가니스탄전쟁이 연속적으로 일어나 인류를 전쟁공포 속으로 몰아갔다. 세계 사회주의 진영이 해체된 이후 북측과 쿠바는 단독으로 사회주의 수호전을 벌어야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의 제국주의전쟁위험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중무장 병력이 준전시상태 속에서 대치한 한반도로 몰려들었다. 1990년대에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사회주의 수호전을 벌여야 하였던 북측의 인민군과 인민들은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기에 불려졌던 노래 '적기가'를 다시 불렀다. "비겁한 자야 갈라면 가라. 우리들은 붉은 기를 지키리라..." (2011년 9월 14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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