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50m 걸어가다 가로막힌 발걸음
2011년 6월 15일 6.15 공동선언 발표 11주년을 맞이한 그 날, 6.15 남측위원회 대표단 100여 명이 서울 여의도에서 펼침막과 통일기를 들고 개성을 향해 출발하였다. 남, 북, 해외가 개성에서 개최하기로 예정한 평화통일민족대회에 참가하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그런데 경기도 파주시에 있는 통일대교에서 대표단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경찰 저지선이었다. 6.15 남측위원회 대표단은 통일대교 남단에서 50m밖에 걸어가지 못하고 경찰 저지선에 가로막혔다. 원래 대표단은 이명박 정부의 개성행 불허방침을 뚫고 걸어서 개성까지 가려고 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임진각 망배단으로 이동하여 200여 명이 조촐하게 평화통일민족대회를 진행하였다.
△ 경기도 파주시 '통일의 관문' 앞에서 6.15 남측위 대표단 1백여명의 발길이 묶이자 규탄 기자회견을 갖고 행진을 하고 있다. ( 통일뉴스 2011년 6월 15일 보도사진) |
임진각 망배단 앞에서 열린 평화통일민족대회에는 6.15 남측위원회에 속한 여러 사회단체 대표들과 손학규 민주당 대표,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 권태홍 국민참여당 최고위원 등이 참석하였으나 주류 언론은 외면하였고 국민들은 무관심하였다. 같은 날 민주당은 임진각 통일전망대에서 최고위원회의를 열고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전환을 촉구하였으나 아무런 관심을 끌지 못했다.
6.15 남측위원회 대표단 100여 명이 통일대교 남단에서 경찰 저지선에 가로막힌 시각을 전후하여, 이명박 대통령은 한국자유총연맹 회원 248명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오찬을 베풀며 극우인사들을 격려하였고, 한국 군부는 분쟁수역인 서해 5도에 무력을 증강하기 위한 서북도서방위사령부 창설식을 진행하였고, 남측 언론은 국정원의 기획탈북에 따라 추진된, 탈북자 가족이 서해 분쟁수역 우도로 월남한 사건을 집중적으로 보도하였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극우단체를 위한 청와대 오찬, 서북도서방위사령부 창설식, 탈북자 월남사건 집중보도는 의도적으로 6월 15일에 맞춰 남측 통일운동에 대한 대중의 시야를 가리고 북측을 자극하는 사건들이었다. 2011년 6.15 기념일은 남측 통일운동세력이 반통일세력의 준동에 압도당한 통한의 날로 기록되고 말았다.
진보적 민주주의강령과 함께 자주적 평화통일강령을 추구하는 진보정치활동가들은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분석할 필요가 있다. 여러 가지 각도에서 분석할 수 있겠으나, 진보정치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2000년 6월 15일 이후 2007년 12월까지 7년 동안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평화통일을 추진할 생각은 하지 않고 대북교류협력이나 추진하는 수준에서 맴돌다가 한나라당에게 정권을 내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자기들에게 강한 지배력을 발휘하는 백악관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으므로, 백악관이 그토록 싫어하는 평화통일을 추진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6.15 공동선언 이후 7년 동안 대북교류협력이라도 그만큼 추진하였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기며 위안을 받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
지금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추진하였던 대북교류협력의 정책적 맹점을 직시하는 비판적 인식이다. 그런 비판적 인식을 가져야 오늘 반통일세력에게 압도당한 남측 통일운동세력의 무기력증을 떨쳐내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비정치적 교류가 아니라 정치적 화해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김대중-노무현 정권에게 평화통일의지가 없었으므로 대북교류협력만 추진하였고, 정권교체 이후 정세가 악화되자 대북교류협력마저 중단되는 사태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주목하는 것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6.15 공동선언 이후 7년 동안 추진한 대북교류협력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교류협력은 무역, 투자, 문화, 관광 같은 부문에서 추진하는 비정치적 행위다. 이를테면, 중국과 대만이 양안교류협력을 아무리 심화발전시킨다 해도 그것으로는 통일을 실현하지 못한다. 교류협력은 평화통일로 나아가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므로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민족 내부의 특수관계에서는 교류가 아니라 화해를 추진해야 한다.
△ 한반도의 평화란 일반적인 뜻으로 말하는 평화가 아니라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정치적 화해를 통해 이루어지는 평화다. |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민족 내부의 특수관계에서 교류를 통해서든 아니면 화해를 통해서든 일차적으로 협력관계를 형성할 수 있지만, 교류를 통한 비정치적 협력관계는 평화통일로 나아가지 못하는 반면 화해를 통한 정치적 협력관계는 평화통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6.15 공동선언 발표 이후 7년 동안 대북관계를 개선하는 과정에서 교류가 아니라 화해에 강조점을 찍었어야 하는 것이다.
교류협력과 화해협력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교류는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정치과업과 무관하게 추진되는 비정치적 활동인 것에 비해, 화해는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정치과업으로 추진되는 정치활동이다. 적대관계 청산은 정치활동이므로,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화해는 정치적 화해를 뜻한다.
비정치적 교류협력이라도 자꾸 지속하다보면 적대관계가 점진적으로, 자연히 청산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생각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6.15 공동선언 이후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7년 동안 대북교류협력을 추진하였는데도, 남북이 이전에 함께해오던 6.15 민족공동행사마저 하지 못하게 되어버린 오늘의 현실은 교류협력으로 적대관계를 청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뚜렷이 실증한다.
그러므로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북측이 거부한 '햇볕정책' 따위를 들고 나와 교류협력에 힘쓰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민족화해정책을 추진했어야 하였다.
민족화해정책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이루어낼 수 있을까? 네 가지 중대한 정치과업을 수행할 수 있다. 상호비방 중지와 '국가보안법' 철폐, 그리고 적대적 군사행동 중지와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이다.
'햇볕정책'으로는 기껏 상호비방 중지밖에 실현하지 못하였는데, 그것마저도 정권이 바뀌자 원점으로 돌아갔다. '국가보안법' 철폐, 적대적 군사행동 중지,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은 민족화해정책으로 실현할 수 있는 정치과업들이다.
한반도의 평화란 일반적인 뜻으로 말하는 평화가 아니라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정치적 화해를 통해 이루어지는 평화다. 민족화해정책을 통해 평화통일로 나아갈 수 있으며, 평화통일은 민족화해정책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다. 60년 동안 굳어진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정치적 화해를 추진하지 않으면 교류협력을 7년이 아니라 70년 동안 계속해도 평화통일로 나아갈 수 없다.
민족화해방안은 이미 합의되었다
엄밀히 따지면, 노무현 정부가 민족화해정책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노무현 정부 시기 통일부는 2007년 7월 26일 남북관계발전위원회 1차 회의를 개최하여 '남북관계발전 기본계획'을 심의하였다. 당시 남북관계발전위원회는 통일부 장관을 위원장으로 관련부처 차관 15명, 국회에서 추천을 받은 전문가 9명으로 구성되었다. 그 위원회는 5년 동안 추진할 정책목표를 "한반도 평화정착과 남북화해협력 제도화로 설정"하였다.
2007년 10월 2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남북관계발전 기본계획'에 관한 구상을 가지고 평양을 방문하였고, 그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만난 남북정상회담에서는 '남북관계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이 발표되었다. 10.4 선언은 민족화해정책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 만일 이명박 정권이 반북대결을 중지하고 2007년에 채택된 10.4 선언을 충실히 이행하였더라면, 4년이 지난 오늘 한반도에는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는 통일의 기운이 넘쳐났을 것이다. |
10.4 선언 직후, 남북은 민족화해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각종 합의서를 채택하였다. 이를테면, 2007년 11월 16일 '남북관계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 이행에 관한 제1차 남북총리회담 합의서'와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추진위원회 구성, 운영에 관한 합의서'와 '남북경제협력공동위원회 구성, 운영에 관한 합의서'가 한꺼번에 채택되었고, 11월 29일에는 '남북관계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국방장관 합의서'가 채택되었고, 12월 6일에는 '남북경제협력공동위원회 합의문'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일 뒤에 실시된 대선에서 정권이 바뀌면서, 위의 모든 합의는 시작해보기도 전에 사실상 무효화되고 말았다. 노무현 정권 말기에 채택된 각종 남북합의가 이명박 정권의 대북적대정책에 의해 전면적으로 무효화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남북이 민족화해방안을 처음으로 합의한 때는 2007년 10월 4일이 아니라 1991년 12월 13일이다. 그 날 채택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는 민족화해방안을 8개조에 걸쳐 상술하였다.
남북은 아직 공동의 통일방안을 명시적으로 합의한 적은 없지만, 민족화해방안은 이미 여러 차례 명시적으로 합의하였다. 민족화해에 관한 한, 남북은 대동소이한 내용을 또 다시 합의할 필요가 없으며, 이미 합의한 것을 성실히 이행하기만 하면 된다.
남측 정권 문제에서 찾아야 할 해결책
공동선언이나 합의서를 발표하는 것은 고도의 정치활동이기는 하나, 그것의 이행을 강제할 구속력이 없다. 어느 한 쪽이 공동선언 또는 합의서를 무시하거나 폐기해버리면 그것으로 끝이다.
구속력이 있는 것은 협정 또는 협약이지만, 남북관계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국제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민족 내부의 특수관계이므로 협정이나 협약을 맺을 수는 없다.
구속력이 있는 것은 협정 또는 협약이지만, 남북관계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국제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민족 내부의 특수관계이므로 협정이나 협약을 맺을 수는 없다.
공동선언 또는 합의서를 이행하기 위한 공동기구를 창설하여 이행하는 방안도 있으나, 공동기구도 어느 한 쪽이 그것을 유명무실하게 만들거나 최악의 경우 일방적으로 거기에서 탈퇴해버리면 그것으로 끝이다.
지금까지 남북이 채택한 공동선언이나 합의서는 반북대결을 추구하는 남측 정권에 의해 무효화되었다. 만일 김영삼 정권이 반북대결을 중지하고 1991년에 채택된 '남북기본합의서'를 충실히 이행하였더라면, 20년이 지난 오늘 한반도에는 통일국가가 세워졌을 것이고, 만일 이명박 정권이 반북대결을 중지하고 2007년에 채택된 10.4 선언을 충실히 이행하였더라면, 4년이 지난 오늘 한반도에는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는 통일의 기운이 넘쳐났을 것이다. 그러나 남북기본합의서도 6.15 공동선언도 10.4 선언도 우파정권의 외면과 거부로 이행되지 못하였다.
핵심적인 문제는 남측 정권이 반북대결을 추구하느냐 아니면 민족화해를 실현하느냐 하는 것이다. 백악관의 눈치나 살피면서 그들이 허용하는 교류협력이나 추진하는 친미중도우파정권이 등장하면, 민족화해를 북측과 합의하였더라도 실제로는 교류협력 이상으로는 나아가지 못한다.
또한 백악관에 아부굴종하면서 그들이 선호하는 반북대결을 고집하는 친미우파정권이 등장하면, 오늘 현실이 보여주는 것처럼 대북교류협력마저 차단당하게 된다. 한반도 통일의 불가역적 실현경로는, 남측에 하루빨리 민족화해를 실현할 자주적 중도좌파정권이 등장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민족화해 실현은 남측 정권 문제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현재 남측에서 민족화해를 실현할 정치세력은 민주노동당밖에 없으므로,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이 평화통일을 지향하며 민족화해를 실현할 새로운 중도좌파정권을 세워야 문제가 풀릴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화해 실현은 남측 정권 문제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현재 남측에서 민족화해를 실현할 정치세력은 민주노동당밖에 없으므로,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이 평화통일을 지향하며 민족화해를 실현할 새로운 중도좌파정권을 세워야 문제가 풀릴 것이다.
민족화해를 실현할 정권을 먼저 세우고, 그 이후에 평화통일을 실현할 정권을 세우는 단계적 시나리오도 예상할 수 있다. 실제로 실현될 가능성은 없지만, 선거일정에 따른다면, 2012년에 민족화해를 실현할 새로운 정권을 세우고, 2017년에 평화통일을 실현할 정권을 세우는 단계적 시나리오, 이것이 한반도 통일의 불가역적 실현경로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은 그 경로로 다가가는 정치활동에 진력할 때를 맞았다. (2011년 6월 17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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