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최대 555만 배로 벌어진 빈부격차
재산이 많다고 해서 누구나 부호가 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둔 초대형 투자은행 메릴린치(Merrill Lynch)가 펴내는 '세계 재부 보고서(World's Wealth Report)'가 해마다 부호의 기준을 정해 준다. 그들이 2009년도에 정해 놓은 기준에 따르면, 부호는 미화 10억 달러(1조원) 이상의 금융자산을 가진 사람이고, 자산규모가 그 보다 한 급 높은 초부호는 미화 30억 달러(3조 원) 이상의 금융자산을 가진 사람이다. 이것은 부동산과 비금융자산을 제외한 금융자산만 1조 원 이상 가지고 있어야 '세계 표준형 부호'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금융권에서 쓰는 용어로 표기하면, 부호는 고액 순자산보유자(high net worth individual, HNWI)이고, 초부호는 초고액 순자산보유자(Ultra-HNWI)다. 위의 보고서에 따르면, 2009년 현재 전세계적으로 고액 순자산보유자는 860만 여 명이고, 초고액 순자산보유자는 9,500여 명이다.
연합뉴스 2010년 9월 21일 보도기사에는 이 땅에 사는 초부호 30명의 자산형편이 공개되었데, 그들 30명이 보유한 금융자산 총액은 45조8,248억 원(458억2,400만 달러)이다. 또한 포브스(Forbes)가 선정한 2008년도 세계 초부호 명단에 코리언으로서는 가장 높은 순위인 412위에 오른 정몽준 전직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의 금융자산은 2조8,000억 원(28억 달러)이다.
자산이 전혀 없는 빈곤층에게는 최저생계비가 그나마 '생존자산'이라고 할 수 있는데, 2010년 현재 우리 사회에서 1인 가구 법정 최저생계비는 한 달에 50만4,344 원이다. 정몽준 전직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의 금융자산과 빈곤층의 '생존자산'을 비교하면, 우리 사회의 빈부격차는 최대 555만 배나 벌어진 셈이다.
유엔개발계획(UNDP)이 2009년 10월 5일에 발표한 '인간개발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빈부격차 순위에서 1위 홍콩, 2위 싱가포르, 3위 미국, 4위 한국이었다. 홍콩은 중국의 특별행정구역이므로, 우리 사회의 빈부격차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다.
우리 사회의 빈부격차가 최대 555만 배에 이르고, 빈부격차 순위가 세계 3위로 뛰어오른 극단적인 상황에서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는 사실상 껍데기만 남게 된다. 555만 배의 불평등이 존재하는 사회의 민주주의는 말 뿐인 가짜 민주주의이며, 빈부격차 순위가 세계 3위인 사회가 이루어냈다는 경제발전은 국민소득 2만 달러 달성이 아니라 빈부격차의 극대화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빈부격차가 세계 최악 수준으로 극단화된 원인
우리 사회를 양극단으로 갈라놓은 빈부격차를 해소하지 못하면, 경제발전도 민주주의도 한낱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의 극단적인 빈부격차를 경제발전의 부산물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착오다. 빈부격차는 경제발전의 부산물이 아니라, 사회체제의 주산물이다. 빈부격차는 자본주의체제에서 발생한 결과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체제를 개조하지 않으면 빈부격차를 해소할 수 없다는 점이다. 빈부격차 해소와 사회체제 개조는 서로 뗄 수 없는 상관관계로 결부되어 있다. 이것은 빈부격차 해소가 민주주의변혁의 핵심과제로 제기되었음을 말해 준다.
원래 빈부격차란 자본주의체제의 적대적 사회계급관계에서 생겨나는 일반적인 현실인데, 특이하게도 우리 사회의 빈부격차는 세계 최악 수준으로 극단화되고 말았다. 우리 사회에서 경제가 발전될수록 그처럼 극단적으로 빈부격차가 벌어진 까닭은 무엇일까?
이 물음에 단답형으로 말하자면, 자본주의체제의 계급모순과 반(半)자본주의예속경제의 변태성 및 불구성이 착종되었기 때문에 그처럼 극단적인 빈부격차가 생겨났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세계시장의 전반적 파산위기로 존립 자체가 불안정해진 국내자본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을 이전보다 더 심하게 착취하고, 거기에 더하여 외래침탈자본의 신자유주의적 이윤수탈이 이전보다 더 극대화되면서, 도시중산층 가운데 상당수가 도시빈민층으로 전락하고, 부실하기 짝이 없는 사회안전망조차 유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 사회의 빈부격차가 세계 최악 수준으로 극단화된 까닭이 거기에 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빈부격차 해소와 사회체제 개조가 서로 뗄 수 없는 상관관계로 결부되어 있으므로, 세계 최악 수준으로 극단화된 빈부격차를 해소하려면, 무엇보다도 국내자본의 가중된 착취를 저지하고 외래침탈자본의 이윤수탈을 차단하는 민주주의변혁을 실현해야 한다.
빈부격차는 자산격차다
한국씨티은행이 2010년 6월 6일에 발표한 '한국의 부자 보고서'에 따르면, 30억 원 이상 자산을 가진 부유층 가운데서 부동산 경기 상승으로 자산을 축적한 사람은 27%, 상속으로 자산을 축적한 사람은 21%, '근로소득'으로 자산을 축적한 사람은 24.1%다. 이러한 통계수치가 말해 주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빈부격차의 본질이 소득 불평등이 아니라 자산 불평등에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빈부격차는 소득격차가 아니라 자산격차인 것이다.
우리 사회의 자산격차에 대해 말할 때, 극소수 초부호들이 보유한 자산은 주로 금융자산이고, 자산규모가 초부호들보다 한 급 아래인 소수 부유층이 보유한 자산은 주로 부동산 자산이라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극소수 초부호들이 보유한 금융자산의 실태에 대해서는 위에서 언급한 바 있는데, 초부호를 제외한 소수 부유층이 보유한 부동산자산의 실태는 어떠할까?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남상호 연구위원이 2010년 5월 18일에 발표한 보고서 '우리나라 중.고령자 가구의 자산분포 현황 분석'에 따르면, 상위계층 자산점유율은 82.2%, 중위계층 자산점유율은 17.8%, 하위계층 자산점유율은 0%인데, 자산에서 부동산자산이 차지하는 비율은 92%, 금융자산이 차지하는 비율은 8%, 기타 자산이 차지하는 비율은 1%다.
위의 정보를 종합해 보면, 한 줌도 되지 않는 초부호들은 기업금융을 장악하고, 그 밖의 소수 부유층은 부동산시장을 장악하여 기하급수적으로 자산증식을 추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우리 사회를 양극으로 갈라놓은 빈부격차의 실상은, 초부호들의 기업금융 장악과 소수 부유층의 부동산 장악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경제발전을 가로막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주된 요인은 소득격차가 아니라 자산격차이므로, 소득세를 조절하여 부유층에게 증세부담을 집중시키는 대신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사회보장혜택을 주는 식으로는 빈부격차를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없는 것이다. 부유세, 상속세, 증여세를 누진세법으로 징수하고 사회복지목적세를 신설하며 빈곤층에게 세금감면혜택을 주는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정책으로는 빈부격차를 부분적, 일시적으로만 해소할 수 있다. 자산격차를 해소할 근본적인 정책이 따로 요구되는 것이다.
자산격차를 해소하는 근본적인 정책은 초부호들이 금융적으로 장악한 대기업과 소수 부유층이 투기적으로 장악한 부동산을 국유화하는 것이다. 이것을 중요산업 국유화라 한다. 중요산업 국유화만이 자산격차를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있다. 특히 국유화하여야 할 중요산업 가운데서 부동산 산업이 중요한 대상이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빈부격차를 해소하는 진보적 민주주의의 복지사회담론
민주주의변혁은 중요산업을 국유화하여 빈부격차를 해소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예컨대, 중요산업을 점진적으로 국유화하고 있는 베네주엘라의 경우, 1998년에 총인구 대비 17.1%이었던 빈곤계층 비율이 2007년에는 7.9%로 감소하였고, 차베스 정권 집권 10년 동안 절대빈곤율은 총인구 대비 20.3%에서 9.5%로, 실업률은 15%에서 7%로, 유아사망률은 21.4%에서 13.7%로 각각 감소하였다. 베네주엘라의 그러한 현실변화는 중요산업 국유화가 극심한 빈부격차를 해소하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객관적 현실로 입증한 것이다.
우리식 변혁담론에서 말하는 진보적 민주주의는, 전국민의 보편적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저소득층의 무상주거를 핵심내용으로 하는 진보적 사회안전망 확립을 요구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중요산업 국유화 강령을 추구하는 중도좌파정당이 집권하였을 때 비로소 중요산업을 국유화하여 빈부격차를 해소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장차 중도좌파정당이 집권하는 경우, 부실하기 짝이 없어 거의 있으나 마나 한 기존 사회안전망을 진보적으로 개혁하여야 하는데, 그렇게 개혁한 진보적 사회안전망을 가동하려면 천문학적인 자금이 있어야 한다.
진보적 민주주의의 사회복지강령을 구현하기 위한 천문학적인 자금을 마련하는 방도는 중요산업 국유화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나 민주당 일각에서만이 아니라 심지어 한나라당 일각에서도 복지사회담론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데, 천문학적인 자금을 마련할 방도를 제시하지 못하는 복지사회담론은 탁상공론처럼 들린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조세제도를 진보적으로 개혁하는 것만으로는 그처럼 천문학적인 자금을 마련할 수 없다. 조세제도를 진보적으로 개혁하여 높은 수준의 사회안전망을 완비하였다는 스웨덴식 복지사회담론은, 자본주의세계시장이 오늘처럼 전반적 파탄위기에 빠지는 경우 무의미해지는 실패담론이다.
국제사회에서 대표적인 복지국가로 알려진 스웨덴의 현실을 살펴보면, 그 나라는 1990년 이후 금융위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2008년에 미화 2,000억 달러를 쏟아부은 구제금융조치를 취하여 간신히 파산위기를 넘겼으나, 2009년 2월 초에 또 다시 60억 달러를 쏟아부은 구제금융조치를 긴급히 취하였다. 그러나 구제금융조치는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다르지 않다.
스웨덴 경제위기는 이처럼 지난 20년 동안 차츰 악화되어 오다가, 10년 전부터는 스웨덴의 사회복지제도를 밑둥부터 뒤흔들기 시작했다. 스웨덴의 사회복지제도를 뒤흔드는 불길한 파장은 정치권을 강타하였다. 복지사회담론을 중시하는 스웨덴 사회민주당이 녹색당과 정치적으로 연합하여 세운 적록연립정부(red-green coalition government)가 2006년 9월에 선거패배로 퇴장하고, 그 대신 온건당, 자유당, 중도당, 기독교민주당으로 이루어진 우파연합이 2006년부터 연속 두 차례 선거에서 승리하여 우파연립정부를 세웠으며, 거기에 더하여 극우정당인 스웨덴 민주당이 사상 처음으로 원내 진출에 성공하는 등 우파정당이 활개치고 있다.
스웨덴 우파연립정부가 지난 4년 임기에 수행하였고, 그리고 앞으로 4년 임기에 계속 수행할 과업은 복지사회의 점진적 해체다. 스웨덴 사회민주당 정권이 건설한 복지사회는, 우파연립정부가 부유세를 폐지하고, 보편적 복지정책을 후퇴시키며, 이른바 시장친화정책을 추진하고, 빈부격차를 키우면서 점진적으로 해체되는 중이다. 사회민주주의정책의 대명사로 인식되는 부유세는 오스트리아, 덴마크, 네덜란드, 핀란드, 스웨덴 순으로 폐지되는 중이다. 스웨덴 의료기관 민영화는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고, 스웨덴 공립학교 민영화는 1990년부터 시작되었다.
유럽연합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0년 3월 현재 스웨덴 청년 실업률은 26%로 상승하였는데, 이것은 스웨덴 1인당 평균소득의 60% 이하 임금을 받는 청년계층이 2001년에 비해 두 배로 급증한 것이다. 스웨덴의 청년실업률은 유럽연합에서 최고 수준이다. 스웨덴 사회민주당이 추구해온 스웨덴식 복지사회는 역사적 발전전망을 상실하였다.
경제위기 속에 복지사회를 점진적으로 해체하고 있는 스웨덴의 현실이 말해 주는 것은, 사회체제를 진보적으로 개조하지 않고 달랑 조세제도만 진보적으로 개혁한 복지사회의 불안정한 기반은, 자본주의세계시장의 전반적 파산위기로 무너지고 결국 복지사회 자체가 해체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세계시장의 전반적 파산위기가 우연한 시행착오가 아니라 불가피한 귀결인 것처럼, 스웨덴식 복지사회의 점진적 해체도 불가피한 실패의 결말로 다가오는 중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변혁과 무관한 스웨덴식 복지사회담론에 귀를 기울일 것이 아니라, 진보적 민주주의의 중요산업 국유화를 근간으로 하는 우리식 복지사회담론을 제기해야 한다. (2010년 11월 17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