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민보 2014년 07월 07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 <사진 1>이 사진은 1972년 5월 4일 0시 15분 김일성 주석이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접견하는 장면이다. 이후락은 박정희 대통령의 특사로 1972년 5월 2일 판문점을 지나 평양에 도착하여 3박4일 체류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후락을 자신의 특사로 파견하면서 북측과의 회담에서 평화통일원칙에 대해서만 합의하라고 지시하였으나, 김일성 주석은 이후락 특사를 몸소 두 차례나 접견하면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을 제시하였고 그 원칙을 명시한 7.4 공동성명을 발표하도록 이끌었다. © 자주민보 |
왜 2014년 7월을 ‘운명적인 7월’이라고 하였을까?
북측 국방위원회는 지난 6월 30일 남측 정부에게 보내는 ‘특별제안’을 발표하였다. ‘특별제안’의 제목은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을 틀어쥐고 북남관계개선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나가자’라고 되어 있다. ‘특별제안’에서 북측 국방위원회는 남과 북이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에 따라 민족공동이익에 맞게 남북관계개선을 추진하자고 남측 정부에게 제안하였다.
그런데 남측 정부는 북측 국방위원회의 ‘특별제안’을 즉각 거부하였다. 요즈음 남측 정부가 대북적대감을 표출하며 북을 자극하고 있는 점을 생각하면, 그들이 북측 국방위원회의 ‘특별제안’을 “얼토당토(하지) 않은 주장과 진실성이 결여된 제안”이라고 받아치며 거부한 것은 뜻밖의 일로 보이지 않는다. 정작 뜻밖의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남측 정부가 북측 국방위원회의 ‘특별제안’을 거부한 행동이 아니라 북측 국방위원회가 남측 정부에게 ‘특별제안’을 보낸 행동이다. 북측 국방위원회는 남측 정부가 거부할 것이 뻔한 ‘특별제안’을 왜 이 시점에 보낸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아래와 같은 사실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특별제안’에 나오는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은 1972년 7월 4일 남과 북이 분단 이후 최초로 합의, 발표한 7.4 공동성명에 명시된 조국통일 3대 원칙이다. 7.4 공동성명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전격적으로 발표되었던 42년 전 그 날, 이 민족의 통일열망은 그야말로 열화처럼 끓어올랐으며 국제사회로부터도 적극적인 지지와 찬동을 받았는데, 특히 유엔총회 정치위원회는 7.4 공동성명을 지지하는, ‘코리아문제에 관한 합의’라는 제목의 성명을 1973년 11월 21일에 채택한 바 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40여 년 전에도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말 자체를 거부하였고,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활동하는 진보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으며, 국민들에게 ‘멸공통일사상’을 주입하며 대북적대감을 고취하고 있었다. 그런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었지만, <사진 1>이 말해주는 것처럼, 당시 김일성 주석이 제시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을 반대할 수 없어 그 원칙을 인정하였고, 그에 따라 7.4 공동성명이 합의, 발표되었던 것이다.
해마다 7월 4일이 오면 북측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에 따라 남북관계를 개선하자고 제의하는 내용의 대남성명을 발표해왔는데, 특별히 올해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아니라 북의 국정최고기관인 국방위원회가 ‘특별제안’이라는 전례 없는 발표형식으로 남측 정부에게 그 3대 원칙에 따라 남북관계개선에 나서자고 제안한 것이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북측 국방위원회가 이번에 발표한 ‘특별제안’은 북측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의 대남성명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북의 최고영도자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김정은 제1위원장의 의사가 ‘특별제안’에 담겼음을 직감할 수 있다.
주목하는 것은, ‘특별제안’의 마지막 문장이 “운명적인 7월이 남조선당국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되어 있다는 점이다. 왜 2014년 7월을 ‘운명적인 7월’이라고 하였을까?
시간흐름을 꽤 거슬러 올라가 지금으로부터 42년 전에 펼쳐졌던 복잡한 정세를 되짚어보면, 남과 북이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을 합의하고 7.4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던 1972년 7월도 이 민족에게 ‘운명적인 7월’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72년 7월이 이 민족에게 ‘운명적인 7월’이었기에, 남과 북은 분단 이후 최초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을 천명한 7.4 공동성명을 발표한 역사적 사변을 이룩하였던 것이다. 1972년 7월이 이 민족에게 ‘운명적인 7월’이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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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공동성명’과 ‘파리평화합의’, 그리고 7,4 공동성명
역사적인 7.4 공동성명이 발표되기 약 넉 달 전에 또 다른 역사적인 공동성명이 발표되어 세상에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1972년 2월 28일 미국과 중국이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던 것이다. 리처드 닉슨(Richard M. Nixon) 당시 미국 대통령은 <사진 2>에서 보는 것처럼 1972년 2월 21일부터 28일까지 중국을 방문하였고, 그의 중국 방문 중에 ‘상하이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도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고, 미국과 중국이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관계개선을 추진한다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한 것도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주목하는 것은, ‘상하이 공동성명’이 미중관계개선에 대해서만 밝힌 것이 아니라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는 점이다. 관련부분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중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1971년 4월 12일에 발표한 조선의 평화적 통일에 관한 8개항을 확고히 지지하며,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U.N.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 철폐를 요구하는 조선의 입장을 확고히 지지한다.” ‘상하이 공동성명’에서 중국이 확고히 지지한다고 밝힌 ‘조선의 평화적 통일에 관한 8개항’이란, 허담 당시 북측 외무상이 1971년 4월 12일 최고인민회의에서 발표한 조국통일방침인데, 그 내용을 원문 그대로 축약,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남조선에서 미제침략군을 철거시키는 것”
둘째, “미제침략군이 물러간 다음 남북조선의 군대를 각각 10만 또는 그 아래로 줄이는 것”
셋째,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일조약>을 비롯하여 남조선 괴뢰정권이 민족의 리익에 배치되게 외국과 체결한 모든 매국적이며 예속적인 조약들과 협정들을 폐기하며 무효로 선포하는 것”
넷째, “자유로운 남북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적인 중앙정부를 세우는 것”
다섯째, “자유로운 남북총선거를 위하여 남조선 전지역에서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며, 남조선에서 체포, 투옥된 모든 정치범들과 애국자들을 무조건 석방하는 것”
여섯째, “현재와 같은 남북의 각이한 사회제도를 그냥 두고 과도적 조치로서 남북조선련방제를 실시하는 것”
일곱째, “남북 간의 통상과 경제적 협조, 과학, 문화, 예술, 체육 등 여러 분야에 걸친 호상교류와 협조를 실현하며 남북 간의 편지거래와 인사래왕을 실현하는 것”
여덟째, “이상의 과업을 실현하기 위하여 각 정당, 사회단체들과 인민적 성격을 가진 사람들로서 남북조선정치협상회의를 진행하는 것”
미국은 위에 열거한 8개항을 거부하였다. 1971년 10월 22일 중국 베이징에 있는 인민대회당에서 진행된 저우언라이(周恩來) 당시 중국 총리와 헨리 키신저(Henry A. Kissinger) 당시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담록을 읽어보면, 저우언라이 총리는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에게 북이 발표한 ‘조선의 평화적 통일에 관한 8개항’ 전문을 읽어주었는데, 키신저는 그 8개항이 발표된 것조차 알지 못하였으며, 8개항에 나오는 ‘남조선 괴뢰정권’이라는 용어를 지적하며 강한 거부감을 표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중국은 ‘조선의 평화적 통일에 관한 8개항’을 적극 지지하였고, 미국은 그것을 전면 거부하였으니, 그 두 나라가 발표한 공동성명에는 한반도 문제에 관한 어떤 합의도 담을 수 없었다. 그래서 ‘상하이 공동성명’은 중국과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 대한 각자의 견해를 별도항목으로 병기한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상하이 공동성명’에서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밝힌 부분을 원문 그대로 인용하면 이렇다. “미국은 대한민국에 대한 지지와 대한민국과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할 것이며,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남북교류증대를 추구하는 대한민국의 노력을 지지할 것이다.”
1971년 10월 22일에 진행된 저우언라이-키신저 회담에서 저우언라이 총리가 지적한 것처럼, 당시 미국과 중국이 상호관계개선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해결해야 할 3대 문제는 베트남 문제, 대만 문제, 한반도 문제였는데, 미국과 중국은 1972년 2월 28일에 발표한 ‘상하이 공동성명’에서 베트남 문제와 대만 문제는 해결하였으나, 한반도 문제는 미해결로 남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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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국과 중국이 상호관계개선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베트남 문제와 대만 문제를 각각 해결한 방식은 종전과 철군이었다. 그에 따라, 미국과 북베트남은 <사진 3>에서 보는 것처럼, 1973년 1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 ‘베트남전쟁 종식과 베트남에서의 평화회복에 관한 합의’(파리평화합의)를 발표함으로써 1955년부터 1975년까지 20년 동안 지속된 베트남전쟁을 끝냈고, 미국은 대만에 주둔시켜온 미국군을 1973년 8월 26일부터 철군하기 시작하였다.
주목하는 것은, 1972년 2월 28일 ‘상하이 공동성명’이 발표되고, 1973년 1월 27일 ‘파리평화합의’가 발표되고, 1973년 8월 26일 대만 주둔 미국군 철군이 시작된 대격동기에 7.4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7.4 공동성명 발표는 당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며 미중관계개선, 베트남전쟁 종식, 대만 주둔 미국군 철군으로 이어진 동아시아의 격동적인 정세변화에 남과 북이 공동으로, 주체적으로 대응한 역사적 사변인 것이다. 동아시아의 격동적인 정세변화가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던 1972년에 만일 남과 북이 공동으로, 주체적으로 대응한 7.4 공동성명을 발표하지 못한 채 맥을 놓고 방관하였더라면, 이 민족은 동아시아 정세변화의 구석으로 밀려나 자괴감과 열패감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그러나 남과 북이 공동으로, 주체적으로 동아시아의 격동적인 정세변화에 대응하여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을 합의하고 역사적인 7.4 공동성명을 발표하였으니, 1972년 7월을 어찌 ‘운명적인 7월’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미국과 중국이 ‘상하이 공동성명’을 발표한 격동적인 사변은 미중관계개선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 격동적인 사변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거대한 변화의 결과였으며, 동시에 동아시아 정세에 미증유의 위험이 임박하였음을 예고한 것이었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거대한 변화가 한반도 정세에 충격을 안겨주는 것은 불가피하였으며, 거기에 더하여 동아시아에 임박한 미증유의 위험이 한반도에 파급되리라는 것도 명백하였다. 이처럼 한반도 정세가 거대한 변화와 임박한 미증유의 위험으로부터 각각 충격과 동요를 받고 있었다는 점에서, 1972년의 7월은 이 민족에게 그야말로 ‘운명적인 7월’이었다. 그리하여 당시 남과 북은 한반도 정세변화를 민족공동이익에 맞게 추동하기 위한 공동지침을 시급히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것이 바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이었으며, 남과 북이 그 3대 원칙을 공동으로 천명한 역사적인 합의가 바로 7.4 공동성명이었던 것이다.
미국의 중국봉쇄전략 파탄과 일본의 무력증강책동
1972년 2월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으로 절정에 올랐던 미국의 대중관계개선 움직임은 이미 1970년 하반기부터 조용히 준비되고 있었다. 이를테면, 1970년 11월 10일 야히아 칸(Yaya Khan) 당시 파키스탄 대통령이 닉슨의 친서를 들고 중국을 방문하였고, 1970년 12월 18일 마오쩌뚱(毛澤東) 당시 중국 국가주석은 일찍이 중국혁명을 서방에 알린 저명한 미국인 문필가 에드가 스노우(Edgar P. Snow)와 회견하는 자리에서 닉슨의 중국방문을 환영한다는 의사를 표명한 바 있었다. 그에 화답하여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은 1971년 4월 14일 중국에 대한 미국의 경제제재를 완화하고 중국과의 인사교류를 확대한다는 내용이 담긴 새로운 중국정책을 발표하였고, 이틀 뒤인 4월 16일에는 기자회견을 통해 중국과의 국교수립이 미국의 목표라고 언급하면서 중국을 방문하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1970년에 자기의 중국정책을 급전환하여 대통령의 중국 방문이라는 당시로서는 매우 충격적인 정치적 결정을 내렸던 것일까? 거기에는 아래와 같은 사연이 있었다.
1971년 6월 13일 <뉴욕 타임스>는 ‘베트남 기록문서: 30년 동안의 미국의 개입을 추적한 펜타곤의 연구(Vietnam Archive: Pentagon Study Traces Three Decades of Growing US Involvement)’라는 제목으로 작성된 장문의 기사를 실었다. 미국 현대사에 ‘펜타곤 문서(Pentagon Papers)’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충격적인 문서는 존슨 행정부 시기에 로벗 맥나마라(Robert McNamara) 당시 국방장관의 특별지시로 1967년 6월 17일 미국 국방부에 설치된 실무진이 작성한 비밀문서다. 그 비밀문서가 언론에 유출, 공개됨으로써 미국이 베트남전쟁을 도발한 목적이 중국을 봉쇄하려는 데 있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미국 언론에 유출, 공개된 ‘펜타곤 문서’를 일고 커다란 충격을 받은 미국의 각계각층은 베트남전쟁을 즉각 중지하고 미국군을 철군하라는 반전여론으로 더욱 들끓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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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타곤 문서’에 따르면, 미국의 중국봉쇄전략은 일본-한국 전선, 인도-파키스탄 전선, 동남아시아 전선을 반원형으로 구축하여 중국 포위망을 치는 것은 물론이고 당시 중국과 격돌하고 있었던 소련까지 대중포위망에 끌어들여 중국을 세계적 범위에서 봉쇄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 포위망을 치려던 미국의 봉쇄전략은 결국 완전히 파탄되고 말았다. <사진 4>에서 보는 것처럼, 1955년부터 1975년까지 장장 20년 동안이나 지속된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이 패하여 퇴각함으로써 미국이 구축해오던 중국봉쇄포위망이 찢어지고 말았다. 더욱이 중국을 포위하려던 미국의 중국봉쇄전략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여 결정적으로 파탄시킨 놀라운 사변은, 1971년 9월 중국이 사거리가 15,000km에 이르는 첫 자국산 대륙간탄도미사일 둥펑(東風)-5호를 시험발사한 것이었다. 이미 1970년 4월 24일 첫 자국산 인공위성(東方紅-1호)을 성공적으로 발사하였고, 1971년 3월 3일 두 번째 자국산 인공위성을 성공적으로 발사하였던 중국은 1971년 9월 대륙간탄도미사일까지 시험발사함으로써 마침내 핵강국으로 세계무대에 등장하였던 것이다. 중국의 대륙간탄도미사일 보유는 그 나라의 국제적 지위를 단번에 격상시켰으니, 1971년 10월 25일 유엔총회 제26차 본회의에서는 대만을 유엔에서 추방하고 중국을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영입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핵강국으로 세계무대에 등장한 중국이 대만을 밀어내고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영입된 1971년에 미국은 결국 자기의 중국정책을 급전환하여 중국봉쇄를 포기하고 중국과 관계개선을 추진하는 길로 떠밀려 갈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러한 일련의 사변들이 당시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거대한 변화였던 것이다.
그러면 1972년의 동아시아에 임박하였던 미증유의 위험은 무엇인가? ‘상하이 공동성명’에는 그 문제에 대해 이렇게 쓰여 있다. “중국은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과 대외팽창을 강하게 반대하며, 독립적이고 민주적이며 평화롭고 중립적인 일본을 건설하려는 일본 인민들의 열망을 확고히 지지한다.” 여기에 인용한 ‘상하이 공동성명’의 관련문장에 따르면,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과 대외팽창이 1972년 동아시아에 임박하였던 미증유의 위험이었던 것이다.
1971년 7월 10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진행된 저우언라이-키신저 회담에서 저우언라이 총리는 “우리의 견해에 따르면, 일본 군국주의는 현재 되살아나고 있다.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은 미국과 일본이 1969년에 발표한 공동성명에 의해 촉진되고, 뒷받침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가 언급한, 1969년에 발표된 미일공동성명은 1969년 11월 21일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과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당시 일본 총리가 워싱턴 디씨에서 진행한 미일정상회담에서 발표한 공동성명을 뜻한다.
주목하는 것은, 그 공동성명에 이런 구절이 들어있다는 점이다. “미국 대통령은 극동국가들이 지역의 안전을 위해 노력할 것을 기대하면서, 미국이 극동에서 자기의 방위공약의무를 존중함으로써 극동의 평화와 안전을 계속 유지하리라는 확신을 표명하였다.” 이 문장에 따르면, 미국은 앞으로 동아시아의 안전문제를 일본에게 맡기고 자기는 미일상호방위조약의 의무를 이행(implement)하는 게 아니라 존중(honor)하겠다는 것이다. 1969년에 발표된 미일공동성명을 읽어보면, 미국의 동아시아 지배력이 이전보다 약화되면서 재기한 일본 군국주의세력이 동아시아를 위협하게 될 가능성이야말로 당시 중국이 우려한, 동아시아에 임박한 미증유의 위험이었던 것이다.
중국의 그러한 우려는, 저우언라이-키신저 회담에 키신저의 특별보좌관으로 배석한 윈스턴 로드(Winston Lord)가 작성하여 키신저에게 제출한, 저우언라이-키신저 1971년 7월 29일 회담록에서 더 뚜렷이 나타났는데, 그 회담에서 저우언라이 총리는 “일본의 국력이 강화된 판국에 미국이 극동에서 철군하는 것은, 미국의 목적이 일본을 강화시켜 다른 아시아 나라들을 지배하는 데서 일본을 미국의 전위대(vanguard)로 내세우려는 데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당시 중국이 심히 우려하였던 것은, 미국군이 동아시아에서 철군하는 경우 무력증강을 다그치고 있는 일본 자위대가 동아시아의 새로운 위험요인으로 등장하게 되리라는 점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은 특히 한반도와 대만에 대해 우려하였는데, 1971년 10월 22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진행된 저우언라이-키신저 회담에서 저우언라이 총리는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에게 한반도 문제는 “오늘날 새로운 위기를 발생시키는 문제”라고 하면서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조선과 대만을 자기들의 대외팽창을 위한 도약대로 삼았는데, 이것은 세상에 이미 알려진 사실”이라고 지적하고 “중국은 미국이 대만 주둔 미국군을 일본 자위대로 대체하는 것을 반대하고, 남조선 주둔 미국군을 일본 자위대로 대체하는 것도 반대한다. 만일 미국이 남조선의 군사력을 전례 없이 증강시켜놓고 철군한다면, 미국군이 철군한 이후 더욱 심각한 무력충돌이 일어날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극동에서 긴장완화를 크게 저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위에 인용한 각종 역사자료들은 1970년대 초 베트남전쟁에서 패하여 퇴각을 앞둔 미국의 동아시아 지배력이 이전보다 상당히 약화되었고, 그 틈을 노린 일본이 무력증강을 다그쳐 미국의 돌격대로 변신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복잡하고 위험한 정세에 처해 있었던 남과 북이 민족공동이익에 맞게 남북관계를 개선해야 할 긴급한 상황이 조성되었다는 점에서 1972년 7월은 ‘운명적인 7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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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운명적인 7월’에 얼마나 심각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가?
베트남전쟁에서 패하여 퇴각을 앞둔 미국의 동아시아 지배력이 이전보다 상당히 약화되었고, 그 틈을 노린 일본은 무력증강을 다그쳐 미국의 돌격대로 변신하고 있었던 1972년의 ‘운명적인 7월’로부터 어느덧 42년 세월이 흘러 2014년 7월이 되었다. 그 7월을 하루 앞둔 지난 6월 30일 북측 국방위원회는 남측 정부에게 보낸 ‘특별제안’에서 “운명적인 7월이 남조선당국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북측 국방위원회가 ‘특별제안’에서 2014년 7월을 ‘운명적인 7월’이라고 한 까닭은, 42년 전과 마찬가지로 오늘 또 다시 ‘운명적인 7월’을 맞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펼쳐지고 있는 정세변화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북측 국방위원회가 ‘특별제안’을 발표하기 나흘 전인 지난 6월 26일 미국이 주도하는 ‘환태평양합동군사훈련(RIMPAC)’이 하와이 인근해역에서 시작되었다. 수상전함 47척, 잠수함 6척, 각종 작전기 200여 대, 병력 25,000명이 참가한 세계 최대 규모의 해군훈련이다. 미국은 항공모함 1척, 순양함 4척, 구축함 4척, 호위함 2척, 공격잠수함 3척, 수륙양용공격함 1척, 상륙함 1척, 연안전투함 1척, 긴급전투지원함 1척, 보급함 2척, 구난함 1척, 예인선 1척, 병원선 1척, 연안경비함 1척으로 편성된 대규모 해군무력을 참가시켰다.
그런데 ‘환태평양합동군사훈련’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던 지난 7월 1일 미국과 일본은 매우 이례적으로 몇 가지 움직임을 한꺼번에 연출하여 국제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하와이 카네오헤만(Kaneohe Bay)에 있는 미국 해병대기지에서 일본 육상자위대 서부방면연대 소속부대가 상륙전연습을 실시한 것이다. 일본 자위대 중에서 육상자위대가 ‘환태평양합동군사훈련’에 참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처럼 일본 육상자위대가 사상 처음으로 ‘환태평양합동군사훈련’에 참가하여 상륙전연습을 벌이고 있었던 시각, 그 상륙전연습현장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미국 국방부 산하 아시아태평양안보연구소(APCSS)에서는 미국, 일본, 한국의 합참의장들이 3자 군사회담을 진행하고 있었다. <사진 5>에서 보는 것처럼, 최윤희 한국군 합참의장, 마틴 뎀프시(Martin E. Dempsey) 미국군 합참의장, 이와사키 시게루(岩崎茂) 일본 자위대 통합막료장이 한 자리에 모인 3자 합참의장 군사회담은 이번에 사상 처음으로 열렸다.
하와이에서 일본 육상자위대가 상륙전연습을 실시하고, 미국, 일본, 한국의 합참의장들이 3자 군사회담을 진행하였던 지난 7월 1일은 일본 자위대가 발족한지 60주년이 되는 날이었는데, 일본 도쿄에서는 바로 그 날 아베 신조(安培晋三) 총리가 이끄는 내각이 일본의 집단자위권 행사에 관한 헌법해석을 변경하는 조치를 결정하였다.
일본의 집단자위권 행사에 관한 헌법해석을 변경하는 조치는 아베 내각이 단독으로 추진한 게 아니다. 집단자위권 행사로 동아시아 침략전쟁의 길을 터놓은 일본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이미 50년 전에도 일본이 집단자위권을 행사하기를 바랐던 ‘전과’가 있다. 2013년 11월 30일 기밀해제된 일본 외교문서에 따르면, 1964년 6월 30일 로벗 맥나마라 당시 미국 국방장관은 워싱턴 디씨를 방문한 후쿠다 도쿠야스(福田篤泰) 당시 일본 방위청 장관과 회담하면서 “일본에서 헌법 9조를 개정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미국은 이 움직임이 일본의 경제력에 비해 최소한의 조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후쿠다 방위청 장관은 “헌법 9조는 일본을 약체로 만들려는 점령정책의 유산이다. 경찰예비대, 보안대, 자위대 등의 단계를 거치며 실질적으로는 (헌법 9조를) 변경하고 있다. 여론조사에서도 개헌을 찬성하는 비율이 늘어나고 있다”고 화답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꼭 50년이 지난 2014년 7월 1일 일본 자위대는 재한일본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한반도에 출병하여 미국군사령관의 지휘를 받으며 한국군과 대북합동작전에 나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난 7월 1일 하와이와 도쿄에서 일어난, 마치 치밀하게 짜인 각본에 따라 움직인 것 같이 보이는 일련의 맞물린 사건들을 살펴보면, 북측 국방위원회가 6월 30일에 발표한 ‘특별제안’에서 2014년 7월을 왜 ‘운명적인 7월’이라고 하였는지 이해할 수 있다. 1972년의 ‘운명적인 7월’에 그러했던 것처럼, 2014년의 ‘운명적인 7월’에도 미국은 일본을 돌격대로 앞세워 동아시아에서 차츰 쇠퇴하는 자기의 지배력을 유지해보려고 획책하는 중이고, 그 틈을 노린 일본은 집단자위권을 틀어쥐고 무력증강을 다그치면서 한반도 출병기회를 노리게 된 것이다.
동아시아 정세를 심층적으로 분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일본의 집단자위권 행사와 무력증강책동이 중일전쟁 가능성에 대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오판이다. 미국군이 본진으로 출전하고, 일본 자위대가 돌격대로 앞장서고, 한국군이 선견대로 동원되는 ‘미일한 3자 군사동맹’의 1차적인 공격대상은 중국이 아니라 북이다. 미국과 일본에게 중국은 공격대상이 아니라 견제대상이다. 댜오위다오 주변해역에서 중국과 일본의 영유권 분쟁이 국지적 무력충돌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지만, 중일전쟁의 가능성은 없다.
중국와 달리, 북은 미국과 일본에게 있어서 견제대상이 아니라 공격대상이다. 2004년 12월 12일 <아사히신붕> 보도에 따르면, 미국과 일본은 한반도 유사시에 대처하는 ‘작전계획 5055’를 2002년에 공동으로 작성하였고, 일본이 2004년 12월 10일 채택한 ‘신방위계획대강’은 ‘작전계획 5055’에 기초하여 작성되었다고 한다. 미국과 일본은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에 대북전쟁계획을 세워놓았고, 전시에 한반도에 출병할 미국군을 신속기동군으로 재편하고 일본 자위대의 무력증강을 추진하면서, 2자로 변형된 ‘미일한 3자 합동전쟁연습’을 끊임없이 벌여오더니 이번에 결국 일본이 집단자위권이라는 위장명칭을 달아놓은 대외침략의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미국과 일본의 대중군사준비태세는 중국과 전면전으로 맞붙지 않고 견제하는 데서 멈추기 때문에 중국 유사시에 대처할 작전계획이 필요하지 않으나, 북을 전면적으로 침공할 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한반도 유사시에 대처할 ‘작전계획 5055’를 이미 12년 전에 만들어놓고 그 동안 무력증강과 전쟁연습을 계속해오면서 집단자위권을 틀어쥘 기회를 이제껏 기다려온 것이다. 지난날 한반도에서 저지른 전쟁범죄청산을 거부한 일본의 극우정권이 집단자위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은, 그들이 재한일본인 보호라는 구실을 내걸고 미국의 지휘에 따라 일본 자위대를 이 땅에 출병시켜 미국의 대북전쟁 돌격대로 나서겠다는 한반도 재침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지금 일본의 극우정권이 주장하는 ‘적극적 평화주의’라는 것은 1880년대에 ‘미개한 조선을 정벌하자’고 떠들어댄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망령을 무덤에서 불러낸 것이며, 1960년대에 ‘평화헌법 개정, 군국주의 부활, 핵무기 개발’을 노렸던 1급 전범 출신 일본 총리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침략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에 집단자위권 행사를 결정한 아베 신조의 사상적 원류는 후쿠자와 유키치에게서 시작되었고, 그의 정치적 스승은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다.
2014년 7월에 들어오면서 전개되기 시작한 위와 같은 심각한 사태는, 일본이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를 넘어 침략만행을 노리는 흉악한 전범국가로 회귀하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한반도와 동아시아가 일본의 재침위험에 대비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운명적인 7월’에 벌어진 사태가 얼마나 심각했으면, 지난 7월 3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평양을 먼저 방문하였던 외교관행을 변경하여 황급히 서울에 가서 박근혜 정부에게 중국과 한국의 대일공조를 제안하였겠는가.
그러나 “운명적인 7월이 남조선당국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북측 국방위원회의 충고도 청와대의 ‘불통 대통령’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는 북측 국방위원회가 발표한 ‘특별제안’을 즉각 거부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의 ‘중한대일공조’ 제안도 거부하였다. 박근혜 정부는 자기에게 모처럼 찾아온 정책적 방향전환의 기회를 모두 내던지고 ‘운명적인 7월’에 성큼 들어선 것이다. 미국이 장악, 주도하는 ‘미일한 3자 전쟁체제’에 깊숙이 끌려들어가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에 편입되려는 박근혜 정부가 그 ‘전쟁체제의 늪지대’에서 자기 몸을 빼내 남북관계개선과 ‘중한대일공조’를 추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42년 뒤에 다시 찾아온 ‘운명적인 7월’에 박근혜 정부가 보여준 일련의 언행은 일본이 미국의 계략에 따라 한반도를 향해 집단자위권을 행사하게 된 사태의 위험성을 간과한 채 제 손으로 제 무덤을 파는 자멸행위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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