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과 진보 (112)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사회계급적 관점을 세워야 진실이 보인다
미국 ABC 텔레비전방송의 일요일 아침 대담프로그램 ‘디스 위크(This Week)’를 진행하는 저명한 방송인 조지 스테파노풀로스(George R. Stephanopoulos)가 무식하게 떠들어댄 소리를 듣고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그리스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1993년에 출범한 클린턴 집권 1기에 백악관에 들어가 사실상 대변인으로, 정책 및 전략 선임국장으로 재직한 바 있었고, 백악관에서 나온 뒤에는 이제껏 방송인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그런 그가 최근 평양을 방문하고 미국에 돌아온 농구선수 출신 데니스 로드먼(Dennis Rodman)을 자기 방송대담에 출연시켜놓고 온갖 헛소리를 쏟아놓았다. 농구밖에 할 줄 모르고, 정치논쟁은 생각도 하지 못하는 로드먼에게 민감한 정치문제를 들이대면서 그의 방북활동을 어떻게 해서든지 깎아내리고 북에 대한 흑색선전을 늘어놓은 스테파노풀로스의 행동이야말로 야비한 짓이다.
사회주의가 뭔지도 모르고, 아니 사회주의에 대해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더욱이 북에서 말하는 ‘주체의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악담과 비방 밖에 들어보지 못한 스테파노풀로스가 방북은커녕 북의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채 북에 대해 뭐 좀 아는 것처럼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꼴은 역겨워 보인다. 무식쟁이 방송인 한 사람이 늘어놓은 횡설수설을 다시 끄집어내어 하나하나 비판하는 것은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독재와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스테파노플러스식 선동가들의 왜곡발언만 들어온 까닭에 사람들의 시야가 흐려진 경우가 적지 않으므로, 독재와 민주주의에 관한 문제를 이치에 맞게 정리해야 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모든 사회정치적 현상들을 인식할 때 그러하듯이, 독재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알려면 사회계급적 관점을 세워야 한다. 사회정치적 현상들은 사회계급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므로, 사회계급적 관점을 세우고 바라보아야 진실이 보이는 것이다.
스테파노풀로스 같은 선동가들이 대중을 기만하는 전형적인 수법은, 사회계급적 관점을 배제해놓고 자기들이 자의적으로, 습관적으로 쓰는 몇 가지 허구적 개념 또는 왜곡된 개념을 들고 나와 진실을 가리고 실체가 없는 허상을 꾸며내는 수법이다. 사회계급적 관점을 세우지 않으면, 그들의 말에 속아 넘어가기 쉽다.
사회계급적 관점은 어디서 주워올 수 있는 게 아니라, 진보적인 사회과학이론을 학습할 때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진보적인 사회과학이론을 학습하다보면 끝없이 깊어지기 마련인데, 그런 전문지식이 아니더라도 기초지식을 갖게 되면 사회계급적 관점을 능히 세울 수 있다.
계급독재의 실상과 ‘자유의 그림자’
이 글에서 논하는 독재라는 개념이나 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사회계급관계의 산물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형태의 독재는 계급독재(class dictatorship)이며, 모든 형태의 민주주의는 계급적 내용을 가진 민주주의다. 사회계급관계를 떠난 독재나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일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바라보면, 독재는 곧 자본가계급의 독재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독재, 바로 이것이 흔히 말하는 독재라는 말에 대한 사회과학적 의미규정이다.
예컨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으로 이어진 기나긴 독재의 역사를 지적할 수 있는데, 그 독재자들은 자본가들이 아니다. 이것은 현실 속에서 경험하는 계급독재가 몇몇 자본가들이 직접 집권하여 독재를 실시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게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 자본가가 집권하여 독재를 실시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현실 속에서 경험하는 계급독재는 자본가들의 계급적 요구와 이익을 위해 복무하는 수구정객들이 집권하여 독재를 실시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자본가들은 자기들의 계급적 이익을 위해 복무하는 수구정객의 소굴인 정치권을 적극 비호해주고, 수구정객들은 그런 소굴에서 자본가계급을 대신하여 그들의 계급적 요구와 이익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다.
원래 자본가계급은 공장, 기업체, 은행, 토지 같은 각종 사회적 생산수단을 배타적으로 장악하고, 그 생산현장들에서 생산자 대중을 지배하고 억압하고 착취하는 독재를 실시하는데, 그런 계급독재가 사회적 생산관계를 넘어 정치영역으로까지 확장될 때 독재정치가 출현하게 되며, 독재정치의 출현으로 자본주의국가체제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국가체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계급독재에 의해 형성되고 유지되는 것이며,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계급독재가 사회적 관계 전반을 조직하고 지배하는 것이다. 선동가들은 바로 이러한 진실이 대중에게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 진실을 꽁꽁 감추고 ‘자유’라는 허구적 개념을 조작해 내어 대중을 기만하고 있다.
예컨대 누가 식당에 가서 먹고 싶은 음식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시장에서 사고 싶은 물건을 자유롭게 골라 구매하고, 가고 싶은 곳을 자유롭게 여행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어느 개인의 그런 행동은 ‘자유’가 아니라 자유로운 선택행동이다. 명백하게도,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행동은 ‘자유의 실체’가 아니라, 각자 개인들에게 반영되는 ‘자유의 그림자’일 뿐이다. 선동가들의 기만에 넘어가 그림자와 실체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자유의 실체는 어디에 있을까? 개인의 선택적 행동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사회계급적 현실 속에 자유의 실체가 있다. 다시 말해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자기의 계급적 본성에 따라 자기의 계급적 요구와 이익을 완전히 실현할 때, 바로 그럴 때 진정한 자유가 실현되는 것이며, 그런 진정한 자유가 자유의 실체인 것이다.
사회적 생산활동을 담당한 주체로 일어서려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계급적 본성이 자본가계급에게 끊임없이 짓밟히는 생산현장에 무슨 자유가 있는가. 자주적인 사회정치적 활동을 하려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계급적 본성이 각종 법과 제도와 여론으로 억눌린 계급독재가 무슨 자유라는 말과 어울릴 수 있는가. 자기의 노동으로 창조한 가치를 사회적으로 공정하게 분배하며 살아가려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정당한 계급적 요구에 대해 강제해고, 대량실업, 살인적인 저임금, 노조탄압으로 대답할 뿐 아니라, 행복하고 화목해야 할 그들의 삶을 빈궁과 낙후, 자살과 범죄, 가정파탄과 정신질환으로 내모는 이 난폭한 현실 속에 무슨 자유가 있는가.
명백하게도, 우리 사회에는 각 개인의 선택적 활동이라는 ‘자유의 그림자’는 있지만,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마땅히 누려야 할 진정한 자유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자유의 그림자’에 마냥 도취되어 미처 알지 못하는 계급독재의 현실은 바로 그런 것이다.
사회역사발전의 특정단계에 출현하는 인민과 민주주의
자본주의사회에서 그러한 것처럼, 사회주의사회에서도 계급독재가 존재한다. 그런데 그 계급독재는 자본주의사회의 계급독재와는 정반대의 독재다. 그것은 계급적으로 이미 청산된 자본가계급이 남겨놓은 계급독재의 잔재가 다시 소생하지 못하도록 억누르고 제거하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독재이며,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자기를 위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독재다. 독재의 반대개념은 ‘자유’가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사회의 계급독재는 그 사회계급관계가 소멸될 때까지 지속되고 계급모순에 의해 갈수록 더 악화되지만, 사회계급적 모순이 소멸되고, 오직 근로형태에 따른 사회계급적 차이만 존재하는 단계에서 낡은 계급독재의 잔재마저 청산되면, 사회주의사회의 계급독재는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게 되고,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자신을 위해 실현하는 민주주의만 남게 된다.
이러한 사회역사발전의 특정단계에 출현하는 민주주의를 가리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socialist democracy)라 한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정치체제의 본성은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선동가들은 바로 이런 진실이 대중에게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 진실을 꽁꽁 감추고 ‘공산독재’라는 허구적 개념을 조작해내어 대중을 기만하고 있다.
사회주의사회에서 계급독재의 잔재가 청산되어 계급독재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을 때,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사회정치적 통합이 완성된다. 따라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사회정치적 통합에 의해서 실현되는 것이다. 북에서는 이러한 사회정치적 통합을 ‘일심단결’이라는 대중언어로 표현한다.
사회정치적 통합을 완성한, 그리하여 자기의 계급적 본성을 실현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바로 사회주의국가에 등장하는 ‘자주적 인민’이다. 국가발전단계론에 따르면, ‘자주적 인민’의 등장은 인민공화국이 사회주의공화국으로 발전되는 단계에서 가능하다.
사회주의적 발전의 높은 단계에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독재가 존재할 필요가 없게 되면,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제국주의세력에 대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반제투쟁만 남게 된다. 제국주의세력에 대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반제투쟁은 불가피하게 군사력을 수반하게 되므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반제투쟁은 군대가 앞장선 반제군사전선의 투쟁 곧 반제혁명전쟁으로 되는 것이다. 이런 단계에 이른 사회주의국가는 반제혁명전쟁의 직접적 담당자인 군대를 중심으로 재편되는데, 이런 정치방식을 북에서는 ‘선군정치’라 한다.
그런데 아직 사회주의사회를 경험하지 못하고 “직접 생산자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연합체”를 상상하는 수준에 머물렀던 19세기 고전이론가들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사회정치적 통합도 알지 못했고, 사회주의국가에 등장하는 ‘자주적 인민’도 알지 못했고, 제국주의세력에 맞서 군대가 주도하는 반제혁명전쟁과 그에 따른 정치방식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그러한 이론적 결함은 19세기를 넘지 못한 인식의 시대적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기까지 100년이 걸렸다. (2013년 3월 5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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