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8/13

일본은 독도에 대한 식민지 영유권을 포기하였는가?

<연재> 한호석의 진보담론(222)
통일뉴스 2012년 08월 13일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독도 영유권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끌고 가려는 일본의 흉심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방문이 한일관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미국의 3자군사동맹 추진을 사주받은 일본과 밀담을 나누며 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을 추진하더니, 갑자기 독도는 왜 찾아갔을까? 대일군사협정 체결추진과 독도방문은 서로 모순되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만일 이명박 대통령이 대일군사협정을 더 이상 추진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독도를 찾아갔다면 모를까, 막후에서는 일본을 상대로 여전히 반민족적인 대일군사협정을 체결하려고 기회를 노리면서, 무대 위에서는 독도방문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독도방문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집권 말기에 더욱 심각해진 민심이반을 돌려보려고 독도를 찾아간 돌출행동을 취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한 돌출행동도 눈길을 끌지만, 그 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그 돌출행동에 대한 일본의 어처구니 없는 반발행동이다. 특히 일본 외무상 겐바 고이치로(玄葉光一郞)의 반발이 돋보인다. 그는 긴급대책회의라는 것을 하고 나더니 취재진에게 “우선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는 방안을 포함해 국제법에 근거한 분쟁의 평화적 분쟁 해결 조치를 검토하겠다.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일본의 주장을 명확히 함으로써 국제사회에 일본의 주장을 이해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겐바는 독도 영유권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로 끌고 가서 국제법에 따라 ‘처리’해 보겠다는 흉심을 드러낸 것이다. 일본이 독도 영유권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끌고 가려는 흉심을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8년 9월 11일 <이코노미스트>에 실린 당시 외무장관 이동권의 회고담에 따르면, 박정희 정부가 망국적인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던 1965년 6월 22일, 조인식을 시작하기 직전에, 당시 일본 총리 사토 에이사쿠(佐藤英作)가 이동원을 잠깐 자기 방에서 만나자고 해서 들어갔더니, “다케시마는 일본 영토이지만, 한국 입장에서 국제재판소에 제소하는 것을 한일 양국이 합의한다”고 쓰인 문서를 꺼내놓고 거기에 서명하라고 요구하였다고 한다. 외무장관 이동원은 사토의 서명요구를 거절하였다고 회고하였지만, 한국해양수산개발원 부설 독도연구센터는 ‘한일기본조약’ 협상과정에 관한 1차 자료를 조사한 결과를 2008년 7월 31일에 기자회견을 통해 밝히면서, 일본이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협상기간 14년 동안에 독도 영유권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해결’하자고 집요하게 주장하였음을 지적하였다.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독도에 관한 수많은 역사자료들은 한결같이 그 섬이 한반도에 속해 있음을 입증하였고, 독도의 지리적 조건도 그 섬이 한반도에 속해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예컨대, 독도(獨島)라는 섬이름에서도 그런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독도는 돌섬 102개와 암초 78개로 이루어진 커다란 바위섬인데, 독도라는 섬이름은 먼 옛날 우리 선조들이 돌섬이라는 우리말을 한자로 음역한 것이지, 한자표기처럼 홀로 떨어져 있는 외딴 섬이라는 뜻이 아니다. 실제로 독도는 울릉도에서 87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서 울릉도 높은 지대에서 육안으로 보이는, 울릉도에 딸린 섬(屬島)이지 홀로 떨어져 있는 외딴 섬이 아니다. 영남대학교 부설 독도연구소가 2009년 2월에 발간한 ‘독도연구’ 제5집에 실린 정태만 용산세무서장의 논문에 따르면, 정상 높이가 해발 984m인 울릉도에서는 해발 88m 지대에 오르면서부터 독도가 육안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해발 524m 지대까지 올라가면 독도 전체가 보인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 ‘고려사지리지’, ‘신동국여지승람’ 같은 옛 문헌들에서도 맑은 날 울릉도에서 독도가 보인다는 기록이 나온다.

세종대학교 부설 독도종합연구소 소장 호사카 유지(保坂祐二) 교수의 자료조사에 따르면, 일본 메이지 정부가 1877년에 발표한 ‘태정관 지령문’에 나온 다케시마(竹島)는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의 일본식 지명이었고, 원래 독도의 일본식 지명은 마쓰시마(松島)였는데 1883년 이후에 마쓰시마라는 지명이 차츰 폐기되었다는 것이며, 메이지 정부는 독도를 한반도에 속한 영토로 공식 인정하였다고 한다. 또한 영남대학교 부설 독도연구소가 2010년 4월 1일에 공개한, 일본 제국육해측량부가 1903년에 편찬한 ‘일로청한명세신도(日露淸韓明細新圖)’에도 다케시마(울릉도)와 마쓰시마(독도)는 조선계(朝鮮界)에 속하는 것으로 명시되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독도는 한반도에 속한 영토라는 사실이 너무도 확실하므로, 만일 천백번 양보해서 독도 영유권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판결한다고 해도 일본이 이길 가망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도 일본은 왜 독도 영유권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끌고 가지 못해 안달하는 것일까?

물론 일본이 독도 영유권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려 해도,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는 쌍방이 합의해야 가능하기 때문에 이명박 정부가 제소를 거부하는 조건에서 제소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일본이 독도 영유권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려고 집요하게 책동하는 까닭은, 제소되면 자기들이 이길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독도는 한반도에 속한 영토라는 사실이 확실한데도, 독도 영유권 문제가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되는 경우 일본이 이길 수 있다고 믿는 근거는 무엇일까? 위에서 언급한 일본 외무상 겐바의 발언이 강하게 암시한 것처럼, 일본이 믿는 것은 독도에 관한 국제법적 근거다. 일본은 독도가 한반도에 속한 영토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모든 역사적, 지리적 근거를 뒤집어버릴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어떤 국제법적 근거를 움켜쥐고 있기 때문에 그처럼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우기며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려는 노골적인 강탈야욕을 드러내는 것이다.

1954년 9월 30일 당시 미국 대통령 특사 제임스 밴플리트(James A. Van Fleet)가 당시 미국 대통령 드와잇 아이젠하워(Dwight A. Eisenhower)에게 제출한 ‘밴 플리트 보고서’는 “그들(이승만 정부와 일본 정부를 뜻함-옮긴이)의 (독도에 관한) 영토분쟁은 국제사법재판소에 당연히 제소되리라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며, 제소에 관한 미국의 제안도 한국에게 비공식적으로 전달된 바 있다”고 하였다. 일본과 한통속인 미국도 독도 영유권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끌고 가서 일본이 독도를 국제법적으로 강탈하려는 것을 적극 지지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독도강탈야욕에 사로잡힌 일본이 움켜쥐고 있는 강력한 국제법적 근거는 무엇일까? 그들이 국제사법재판소에서 공개하려고 꽁꽁 감춰놓은 비밀문서가 무엇인지 추적하노라면, 아래와 같은 경악할 사실이 모습을 드러낸다.

독도 바닷속에서 발견된 녹슨 불발폭탄

2008년 7월 24일과 25일 <연합뉴스> 사진부 수중취재단이 독도 동쪽섬 선착장 부근에 있는 부채바위와 동쪽섬과 서쪽섬 사이에 있는 촛대바위 아래서 수중탐사를 벌였다. 수중탐사 결과, 부채바위 아래 수심 약 15m 해저에서 녹슨 불발폭탄 1발을 발견하였고, 촛대바위 아래 바닷속에도 녹슨 불발폭탄 2발을 발견하였다. 또한 2011년 10월 7일 국회에서 진행된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서도 독도 삼형제굴바위 인근 바닷속에 녹슨 불발폭탄 1발과 서쪽섬 북쪽 바닷속에 녹슨 불발폭탄 2발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녹슨 불발폭탄들은 모두 무게가 450kg이나 되는 같은 종류의 폭탄인데, 미국군 폭격기가 지상폭격에 사용하는 ‘AN-M-65 일반목적폭탄(general purpose bomb)’으로 판명되었다.

미국군 폭격기가 지상공격에 사용하는 폭탄이 왜 독도에 떨어졌을까? 일본의 독도강탈책동을 안받침해주는 비밀문서의 존재여부를 추적하는 데서 한 가지 단서를 밝혀줄 녹슨 불발폭탄의 존재는, 1948년 6월 8일에 있었던 미국군 폭격기 편대의 독도폭격사건을 기억 속에 불러일으킨다. 당시 서울에서 발행된 월간지 <신천지> 1948년 7월호에 따르면, 그 날 미국군 폭격기들이 갑자기 날아들어 독도를 폭격하고 기관포를 난사하는 바람에 그 일대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울릉도 어민 16명이 사망하고 3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어선 23척이 침몰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독도와 그 주변바다를 무차별 폭격하고 기관포를 난사하여 무고한 울릉도 어민들에게 대참사를 입힌 극악한 범죄자는, 그 날 아침 오키나와(沖繩)를 이륙한 B-29 폭격기 편대를 몰고 장거리 비행을 하여 독도 상공에 출몰한 미국 극동공군(Far East Air Force) 제93폭격대대였다. 그들은 왜 독도를 폭격하였을까? 당시 도쿄에 주둔하던 동맹국 최고사령부(Supreme Command of the Allied Powers)가 독도를 극동공군 폭격연습장으로 지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1947년 9월 16일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가 지휘하는 동맹국 최고사령부는 휘하 중앙연락실(Central Liaison Office)을 통해 일본 정부에게 공식문서를 보냈다. ‘리안커트 바위섬 폭격연습장(Liancourt Rocks Bombing Range)’이라는 제목이 붙은 통보서(SCAPIN) 제1778호가 오늘도 전해진다. ‘리안커트 바위섬’이라는 낯선 지명은 미국 정부가 독도를 표기할 때 고집하는 미국식 지명이다. 1849년 1월 독도를 탐사하고 독도 위치를 프랑스 정부에 보고하였던 프랑스 고래잡이배 리앙꾸르호가 그 바위섬을 자기 선박명칭에 따라 리앙꾸르(Liancourt)로 부르기 시작하였으므로, 일부 서양 나라들에서는 독도를 리앙꾸르 또는 리안커트라 부른다. 미국 정부는 모든 공식문서들에서 독도라는 지명이나 다케시마라는 일본식 지명을 쓰지 않고 ‘리안커트 바위섬’이라는 자의적 지명만 고집한다.

문제의 통보서 제1778호에는 세 문장이 적혀있다. “북위 37도 15분, 동경 131도 50분에 위치한 리안커트 바위섬(또는 다케시마)이 폭격연습장으로 지정되었다. 이 폭격연습장을 사용하기 전에, 오키레토(오키군도) 주민들과 북위 38도 이북 혼슈 서부해안 주민들에게 미리 통보할 것이다. 이 통보는 군정당국 관계부서들을 통해 일본의 지역민간당국자들에게 전파될 것이다.”

이 통보서가 작성된 1947년 무렵에 일본 영토는 대일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에게 점령당한 상태에 있었고, 한반도 북위 38도 이남지역도 역시 미국에게 점령당한 상태에 있었다. 미국 시각으로 보면, 한반도는 일본이 식민지로 강점한 일본의 ‘해외영토’였으므로, 미국은 한반도 38도 이남지역을 일본 영토와 똑같이 점령하였던 것이다. 점령지 통치권은 점령군사령관 맥아더가 지휘하는 군정당국이 행사하고 있었는데, 당시 도쿄에 있었던 동맹국 최고사령부는 일본과 한반도 북위 38도선 이남지역을 점령하고 통치하던 상급 군정기관이었다.

그런데 도쿄 군정당국이 독도를 극동공군 폭격연습장으로 지정하고, 그 지정사실을 이상하게도 일본 정부에게 통보한 것이다. 1947년 당시 한반도 북위 38도 이남지역에는 아직 정부가 세워지지 않았고, 미군정이 실시되고 있었으므로, 도쿄 군정당국은 독도를 폭격연습장으로 지정하였다는 사실을 독도를 행정적으로 관할하는 서울의 미군정당국에 통보하였어야 마땅한데, 그렇게 하지 않고 행정권 없는 일본 정부에 통보한 것이다. 이것은 도쿄 군정당국이 독도를 한반도에 속한 영토로 인정하지 않고 일본에 속한 영토로 인정하였음을 말해준다.

일본은 독도에 대한 식민지 영유권을 포기하였는가?

미국이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해오던 한반도 북위 38도 이남지역에서 1948년 8월 15일에 분단정부가 수립되자, 미국은 자국 군대를 철군하였다. 이처럼 1948년 8월 15일부터 1949년까지 기간에 미국 군정당국이 해산되고, 미국군이 철군하였으나, 일본이 식민지 영유권을 국제법적으로 포기하는 영유권 말소 문제는 1951년 9월까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영유권이 국제법적으로 말소된 것은, 1951년 9월 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체결된 대일강화조약에 의해서였다. 그 조약 제2조에는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면서, 퀄파트(Quelpart, 제주도의 서양식 표기-옮긴이), 포트 해밀튼(Port Hamilton, 거문도의 서양식 표기-옮긴이), 대즐릿((Dagelet, 울릉도의 서양식 표기-옮긴이)을 비롯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한, 소유를 포기한다”고 쓰여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본이 식민지 영유권을 포기한다고 명시한 조항에서 한반도의 주요 섬들을 열거하면서도 유독 독도만 빼놓았다. 놀랍게도, 그것은 실수로 빠뜨린 것도 아니었고, 편의상 생략한 것도 아니었다. 미국 국무부 실무작업반이 대일강화조약 제1차 초안을 작성한 때는 1947년 3월이고, 미군정당국이 독도를 극동공군 폭격연습장으로 지정한 때는 1947년 9월이다. 미국이 약 6개월 시차를 두고 대일강화조약 초안을 작성한 것과 독도를 극동공군 폭격연습장으로 지정한 것은, 미국이 대일강화조약 초안작성에서 독도를 실수로 빠뜨릴 수도 없었고, 편의상 생략할 수도 없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

이화여자대학교 정병준 교수가 2010년에 펴낸 책 ‘독도 1947’에 따르면, 일본 외무성은 미국이 독도를 극동공군 폭격연습장으로 지정하기 약 석 달 전인 1947년 6월에 미국에 보낸 소책자 ‘일본의 부속소도’에서 독도를 일본 영토로 규정하였고, 1949년 11월부터는 당시 일본 정부의 정치고문이었던 친일파 미국인 윌리엄 시볼드(William J. Sebald)를 앞세워 일본의 요구를 미국 정부에 파급시키는 대미외교공작을 벌였다. 이처럼 1947년부터 일본이 집중적으로 밀고 나간 독도 영유권 강탈책동은 미국 국무부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미국 국무부는 1949년 12월 15일에 작성한 대일강화조약 초안에서 독도를 일본 영토로 명문화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라, 대일강화조약 체결을 주도한 미국 특별고문 존 덜레스(John Foster Dulles)는 1950년 6월, 1951년 1월과 4월에 각각 일본을 방문하여 대일강화조약 체결에 관한 의견을 일본 정부와 ‘조율’한다고 하면서 일본의 요구를 들어주기에 바빴다.

대일강화조약 체결 직전에 이처럼 미국과 일본이 한통속이 되어 돌아가는 것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이승만 정부는 마냥 헛다리만 짚고 있었다. 이를테면, 1951년 7월 19일 당시 주미한국대사 양유찬은 국무부에 찾아가 덜레스를 만난 자리에서 이승만 정부의 다섯 개 요구사항을 전하였다. 5개 항 가운데서 마지막 항은 “대마도, 파랑도, 독도가 러일전쟁 중 일본이 점령하기 전에 한국 영토였으므로, 일본은 그 세 섬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요구였다.

일본과 한통속이 되어 돌아가는 미국이 독도에 대한 식민지 영유권을 인정한 판인데, 이승만 정부가 뒤늦게 독도 영유권은 말할 것도 없고 대마도 영유권까지 주장한 요구사항을 보내왔으니, 이승만 정부의 그런 헛다리 짚는 행동은 미국 국무부로부터 비웃음이나 샀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1951년 8월 10일 당시 미국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 딘 러스크(Dean Rusk)가 당시 주미한국대사 양유찬에게 보낸 답신에는 독도가 한반도에 속한 영토가 아니라 일본 영토라고 쓰여 있었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1951년 8월 13일 미국 국무부는 대일강화조약 최종 초안을 작성하였다.

이처럼 대일강화조약 체결과정에서 일본과 한통속이 되어 돌아간 미국은 독도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영유권을 국제법적으로 인정해준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질렀다. 미국이 대일강화조약 체결과정에서 독도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영유권을 국제법적으로 인정하였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확정적인 근거는, 그 조약이 체결된 때로부터 3년이 지난 뒤에 작성된 ‘밴 플리트 보고서’에 들어있다. 그 보고서는 “대일강화조약 문안을 작성할 때 한국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였으나, 미국은 독도가 일본의 주권에 속한다고 결론을 내렸고, 그 조약에 따라 일본이 영유권을 포기하는 섬들 가운데 독도를 포함시키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밴 플리트가 보고서에서 미국은 “일본이 영유권을 포기하는 섬들 가운데 독도를 포함시키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고 서술한 것은, 미국 국무부가 자기들끼리 내부회의에서 그런 결론을 구두로 내렸다는 뜻이 아니다. 미국 국무부가 그처럼 중대한 ‘결론’을 구두로 내렸을 리 만무하므로, 대일강화조약의 영유권 포기조항과 관련하여 일본이 독도에 대한 식민지 영유권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명문화한 대일강화조약 부속문서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확실하다.

대일강화조약을 체결하기 약 넉 달 전인 1951년 4월 23일 당시 미국 대통령 특사로 대일강화조약 체결을 주도한 국무부 특별고문 존 덜레스와 당시 일본 총리 겸 외상 요시다 시게루(吉田茂)가 그 부속문서에 서명하였을 것이다. 밴 플리트는 보고서에서 “미국은 독도문제에 대한 입장을 공개하지 않기로” 하였다고 서술하는데, 미국이 공개하지 않기로 한 입장을 비밀문서로 작성한 것이 바로 덜레스와 요시다가 서명한 대일강화조약 부속문서인 것이다. 일본이 독도 영유권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끌고 가면 자기들이 이길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대일강화조약의 영유권 포기조항에 독도를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를 확인해줄 부속문서를 움켜쥐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한일기본조약’ 체결과정에서 박정희 정부와 진행한 협상에 관한 방대한 외교문서를 2008년에 공개하면서도, 대일강화조약의 해석에 관한 사항과 독도문제에 대한 미국의 견해를 수록한 부분에 먹칠을 하고 공개하였다. 그 먹칠한 부분에 덜레스와 요시다가 서명한 대일강화조약 부속문서가 들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독도침탈야욕 배격하지 못한 이승만과 박정희

미국과 일본이 그처럼 서로 공모결탁하여 독도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강점 영유권을 국제법적으로 인정한 독도강탈책동이 벌어졌는데, 당시 이승만이 그것을 모르고 있었을까? ‘밴 플리트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독도문제에 대한 입장을 공개하지 않기로 하는 한편, 한국에게 은밀히 통보하였다”고 한다. 이 인용문에 나온, ‘미국이 공개하지 않기로 한 독도문제에 대한 입장’은,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정해준 미국의 입장을 말하는 것인데, 미국은 자기의 그런 입장을 이승만에게 은밀히 통보하였다는 것이다.

‘밴 플리트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독도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영유권을 국제법적으로 인정하였다는 내용이 담긴 통보문서를 이승만 정부에게 보냈다. 그렇다면 이승만 정부는 당연히 그 문서를 공개하면서 미국과 일본의 독도강탈밀약을 전면 백지화한다는 반박성명이라도 발표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일본의 독도강탈을 국제법적으로 인정한 미일공모에 관한 통보를 미국으로부터 받았으면서도 침묵하였다. 뼛속까지 친미적인 이승만 정부는, 일본의 독도강탈책동에 적극 호응한 미국의 범죄적 정체가 세상에 드러나지 않도록 은폐해준 것이다. 만일 그 때 이승만 정부가 일본의 독도강탈책동을 적극 호응한 미국의 공모범죄를 폭로, 배격하면서 독도가 한반도에 속한 영토임을 공식적으로 재확인하였더라면, 일본은 독도 영유권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끌고 가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승만 정부의 침묵은 일본의 독도강탈책동을 사실상 묵인해준 것이었다.

대일강화조약이 1952년 4월에 발효되면 독도를 일본에게 정말 빼앗기는 게 아닌가 하고 우려한 이승만은, 1952년 1월 18일에 독도 영유권을 확인한 ‘대한민국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의 선언(일명 평화선 선언)’을 발표하였으나 이승만의 그런 선언발표는 아무런 실효를 거두지 모했다. 1952년 1월 28일 일본은 “자국 영토인 다케시마를 평화선 안에 포함시킨 것은 영토침략”이라는 식의 망언을 늘어놓았고, 2월 12일 미국은 이승만의 평화선 선언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이승만에게 통보하였다.

이승만에게는 일본의 독도침탈책동을 배격하고 독도 영유권을 수호할 의지가 너무도 빈약하였다. 그는 아무런 실효도 없는 평화선 선언이나 발표해놓고, 독도에 대한 일본의 물리적 침입을 방치하였다. 이를테면, 1952년 6월 26일 일본 수산시험선을 타고 독도에 출몰한 일본인들이 불법상륙하여 조난어민위령비를 파괴하고 “시마네현 오키군 고카촌 다케시마(島根縣 隱岐郡 五箇村 竹島)”라고 쓴 큰 나무기둥을 세워놓은 만행을 저질렀고, 1954년에는 일본 참의원 쓰지 마사노부(辻政信)가 일본인 기자들을 데리고 독도에 침입해 암벽에 페인트로 일장기를 그려넣는 만행을 저질렀는데도, 이승만 정부는 단호한 대책을 취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가 독도에 경찰을 파견한 때는 1956년 12월 30일이다.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 영유권을 포기하였으면서도 독도를 한반도에서 떼어내어 그 섬에 대한 식민지 영유권을 국제법적으로 포기하지 않았다. 2011년 5월 서울에서 출판된 노다니엘의 책 ‘독도밀약’에 따르면, 1965년 1월 11일 당시 대통령 박정희의 특명을 받은 당시 국무총리 정일권과 당시 일본 총리 사토 에이사쿠의 특명을 받은 일본 자민당 의원 우노 소스케(宇野宗佑)의 비밀회담에서 “한일 두 나라는 독도를 각자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을 서로 인정하고, 어느 일방이 다른 일방의 영유권 주장에 반론하는 경우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고 합의하고, “한국은 독도에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시설을 증축하거나 신축하지 않는다”고 명시한 이른바 ‘독도밀약’을 작성하였고, 박정희와 사토 에이사쿠는 각각 양국 정부를 대표하여 ‘독도밀약’에 서명하였다. 박정희 정부가 채택한 반민족적인 ‘독도밀약’에 따르면, 독도는 영유권을 아직 확정하지 못한 ‘영유권 미정지’다. 이것은 일본이 독도 영유권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끌고 갈 또 하나의 결정적인 국제법적 근거를 마련해 준 것이다.

식민지 과거사 청산이 독도 영유권 수호하는 길이다

독도를 강탈하려는 일본의 집요하고 간교한 책동을 배격하고 독도 영유권을 어떻게 수호할 수 있을까? 세간에서 널리 이야기되는 것처럼, 뼛속까지 친일적인 이명박 정부는 일본의 독도강탈책동을 배격하지 못하며, 일본의 간계에 넘어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다. 독도 영유권을 수호하는 힘은 친일정부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반일의식과 독도수호의지를 지닌 이름 없는 대중들에게서 나온다.

이를테면, 2012년 8월 11일 런던 올림픽 남자축구 한일전에서 남측이 이겼을 때, 남측 축구선수 한 사람이 관중석 응원단에서 넘겨받은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크게 쓰인 손자보를 들고 관중들의 환호 속에 축구경기장을 뛰었고, 그 모습을 언론보도를 통해 알게 된 이 땅의 대중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지지와 공감을 보냈는데, 이러한 현상은 일본의 침탈야욕에 맞서 독도 영유권을 수호하려는 사회적 공감대가 남측에 널리 형성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 땅의 대중들이 지닌 반일의식과 독도수호의지는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서울에서 발행되는 인터넷 <독도신문>이 2012년 2월 말에 일반대중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결과에 따르면, 독도 영유권 문제를 수호하기 위해 남북이 공동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답한 응답비율이 56%로 가장 높게 나왔다. 이러한 응답은 이 땅의 대중들이 독도 영유권을 수호하는 데서 전민족적 단결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2012년 8월 12일 조국해방 67돐에 즈음하여 ‘해내외 온 겨레의 힘을 모아 일본의 재침책동을 배격하고 나라의 평화와 조국통일의 새 지평을 열어나가자’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공동호소문에서 6.15 공동선언 실천 남측, 북측, 해외측 위원회가 “일본은 과거의 침략전쟁과 식민지통치에 대한 사죄와 배상이 없이는 그 누구와도 평화, 협력의 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지적하고 “일본은 시대착오적인 망상에서 벗어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당장 철회하여야 한다”고 질타한 것은 독도 영유권을 수호하고 식민지 과거사를 청산하려는 전민족적 요구와 의지를 명백히 천명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현실이 말해주는 것처럼, 일본의 독도강탈야욕을 배격하고 독도 영유권을 수호하는 길은 전민족적으로 단결된 역량을 결집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에 따라 평화통일을 실현함으로써 강력한 자주역량을 지닌 통일정부를 세우는 것이다.

67년 묵은 한반도 분단이 식민지 과거사를 청산하지 못한 전민족적 불행인 것처럼, 67년 묵은 일본의 독도강탈책동도 식민지 과거사를 청산하지 못한 전민족적 불행이다. 식민지 과거사를 청산하기는커녕 그 불행과 비극에 우리 민족을 결박시키려는 미국과 일본의 정치폭거에 맞서 민족자주와 평화통일을 실현해야 할 역사적 과업은 그래서 더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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