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3/03

탈소비에트화가 IMF의 덫에 걸린 사연

변혁과 진보 (68)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한반도의 '38선'과 발칸반도의 '몰건선'

전쟁이 끝나면, 전승국은 패전국을 상대로 전후문제를 처리하면서 국제질서를 재편한다. 그런데 전승국이 자국 이익에 맞춰 배타적으로 전후문제를 처리하기 때문에 심각한 사태가 벌어진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그러하였다.

북위 38도선을 중심에 놓고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할한 것은, 전후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미국이 저지른 가장 악랄한 범죄행위였다. 미국은 아시아의 한반도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유럽의 발칸반도에서도 분할강점전략을 추구하였다.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할하는 '38선'을 그은 미국은 발칸반도 일부지역을 동서로 분할하는 '몰건선(Morgan Line)'도 그었다. 한반도의 '38선'은 미국이 주도하고 소련이 합의해주는 식으로 그어졌고, 발칸반도의 몰건 라인은 미국이 주도하고 이탈리아가 합의해주는 식으로 그어졌다.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할하고 남측을 점령한 미국은 1947년 9월 15일 전범국 이탈리아와 야합하여 '몰건선'을 그음으로써 '트리스티 자유령(Free Territory of Trieste)'을 조작하였다. 트리스티란 발칸반도 북서쪽에 유고슬라비아와 이탈리아 사이에 끼어있는 738㎢에 이르는 지역인데, 당시 그 지역인구는 33만 명이었다.
 
 
미국은 트리스티를 동서로 갈라놓고 거주인구가 26만 명이 되는 서부지역을 강점하고 군정을 실시하였다. 거주인구가 7만1,000명밖에 되지 않는 동부지역은 유고슬라비아가 군정을 실시하였다. 미국이 트리스티를 분할강점한 목적은 그 지역을 전범국 이탈리아에게 넘겨줌으로써 인민민주주의국가로 출현한 유고슬라비아를 견제하고 발칸반도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하려는 데 있었다.

미국의 의도가 그러하였으니, 유고슬라비아가 트리스티 영토문제를 놓고 미국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테면,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유고슬라브 인민군 전투기들이 그 지역을 비행하는 미국군 수송기 네 대를 격추하였다. 유고슬라비아가 그처럼 미국을 상대로 무력대결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강군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유고슬라브 인민군을 강군으로 키운 지도자는 조십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 1892-1980)다. 1941년 4월 6일 나치 독일이 주도하고 파쇼 이탈리아와 헝가리까지 가세한 3개국 연합군이 유고슬라비아 왕국(당시 국명)을 침공하고 강점하였을 때, 티토는 '노동계급여단(Proletarian Brigade)'이라는 이름의 반파쇼유격대를 조직하여 치열한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 침략군을 몰아낸 해방지역마다 '반파쇼민족해방위원회'라는 이름의 임시혁명정부를 조직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유고슬라비아민주연방(당시 국명)과 유고슬라브 인민군을 창설하였다.


조십 브로즈 티토


나치 독일, 파쇼 이탈리아, 헝가리가 연합한 강적과 맞서 반파쇼무장투쟁을 벌인 '노동계급여단'을 골간으로 하여 창설된 유고슬라브 인민군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한 군대들 가운데 하나였다.

티토는 왜 스탈린과 갈라섰을까?

당시 발칸반도의 정세는 매우 복잡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 4월 나치 독일이 주도하고 파쇼 이탈리아와 불가리아까지 가세한 3개국 연합군의 침공을 받고 강점당했던 그리스는, 티토 같은 걸출한 지도자를 만나지 못한 탓에 종전 직후부터 내부혼란을 겪다가 결국 1946년부터 1949년까지 내전에 휩싸이고 말았다.

이전에 나치 강점을 반대하여 반파쇼투쟁을 벌였던 그리스 공산당을 중심으로 결집한 무장세력인 그리스 민주군과 미국과 영국이 배후조종한 그리스 정부군의 충돌로 일어난 것이 그리스 내전이다. 민중의 지지를 받는 그리스 민주군에게 전세가 유리하게 돌아가자, 다급해진 영국과 미국이 차례로 파병하여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리스와 국경을 맞댄 유고슬라비아는 당연히 그리스 민주군의 투쟁을 적극 지원하였다. 종전 직후 인민민주주의국가로 등장한 유고슬라비아는 인접국 그리스에 친미정권이 들어서는 경우, 미국의 지배전략이 발칸반도 전역으로 파급될 것으로 우려하였다.

특히 당시 계급적 대립이 심각하였던 알바니아에서도 인민민주주의국가 건설을 반대하는 수구세력이 내전을 일으킬 조짐을 드러냈다. 그리하여 유고슬라비아는 즉각 알바니아에 파병하여 혁명세력을 지원하였다. 역사적으로 평가하면, 유고슬라비아의 그리스 민주군 지원과 알바니아 파병은 미국의 발칸반도 지배전략에 맞선 정당한 조치였다.

그런데 당시 소련은 발칸반도 정세에 대해 이상한 태도를 취하였다. 소련은 유고슬라비아가 트리스티 영토문제를 놓고 미국과 충돌하자, 유고슬라비아가 미국에게 도발하였다고 비난하였다. 그 뿐 아니라, 소련은 유고슬라비아가 자기들과 상의하지 않고 알바니아에 파병한 것을 비난하였고, 미영 제국주의연합세력에 맞서 싸우는 그리스 민주군을 지원하지 않고 모른 척 외면하였다.

소련이 그런 이상한 태도를 취하게 된 배경에는 1944년 10월 9일 조셉 스탈린(Joseph Stalin, 1878-1953)이 제국주의연합세력의 두목들 가운데 한 사람인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을 모스크바에서 만나 비밀합의를 맺은 말 못할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백분율 합의(Percentages Agreement)'가 그것이다. 그 합의의 골자는 소련과 영국이 종전 후 발칸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각각 50%씩 균등하게 행사한다는 것이다. 그 비밀합의에 따르면, 소련은 루마니아에 대한 배타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영국은 그리스에 대한 배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되었으니, 소련이 그리스 내전을 모른 척 외면하였던 것이다.

소련이 발칸반도의 자주화를 위해 투쟁하는 유고슬라비아를 지원해주지 못할망정 유고슬라비아를 비난한 처사는 유고슬라비아의 격분을 샀다. 바로 이것이 역사에 '티토-스탈린 결별(Tito-Stalin Split)'로 기록된, 세계 사회주의진영의 첫 내부갈등이었다.


사회주의시장경제의 설계자들은 이것을 알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소련은 세계 사회주의진영을 이끌어가기 위한 세 개의 국제동맹체를 창설하였다. 소련이 창설한 국제정치동맹은 1947년 9월 폴란드 남서부에 있는 스클라르스카 포렘바(Szklarska Poremba)에서 창설한 코민포름(Cominform)이다.

공산주의정보국(Communist Information Bureau)을 그렇게 약칭하였다. 소련공산당, 폴란드연합노동당, 체코슬로바키아공산당, 헝가리노동당, 루마니아노동당, 불가리아공산당, 프랑스공산당, 이탈리아공산당, 트리스티자유령공산당이 가입한 코민포름은 스탈린이 세상을 떠난 직후 소련공산당 안에서 스탈린 격하운동이 일어나자 1956년에 해체되었다. 유고슬라비아연방인민공화국(당시 명칭) 집권당인 유고슬라비아공산연맹도 코민포름에 가입하였는데, 티토-스탈린 결별 이후 1948년에 코민포름에서 쫓겨났다.

소련이 1955년 5월 14일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서 창설한 국제군사동맹이 바르샤바 조약기구(Warsaw Treaty Organization)다. '친선, 협조, 상호원조를 위한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그렇게 약칭한다. 미국이 주도하여 창설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대응하기 위한 그 국제군사동맹에는 소련, 동독,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알바니아, 불가리아가 가입하였는데, 사회주의진영이 무너지는 것과 함께 1991년 7월 1일에 해체되었다.

1949년 1월 모스크바에서 소련이 창설한 국제경제협력기구가 코메콘(COMECON)이다. '상호경제지원협의회(Council for Mutual Economic Assistance)'를 그렇게 약칭한다. 처음에 소련,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6개국으로 시작하였는데, 나중에는 알바니아, 동독, 몽골, 쿠바, 베트남도 가입하였다. 코메콘은 사회주의진영이 무너지는 것과 함께 1991년 6월 28일에 해체되었다.

유고슬라비아는 코민포름에서 일찌감치 쫓겨났고, 바르샤바조약기구와 코메콘에는 아예 가입하지 않았다. 유고슬라비아는 당시 사회주의진영을 이끌던 소련의 통제에서 벗어나 탈소비에트화(de-sovietization)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유고슬라비아의 그러한 독자노선을 티토주의(Titoism)라고 불렀다.

티토주의가 추구한 탈소비에트화는 소비에트형 국유화 및 계획경제를 중단하는 것을 뜻하였다.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국가경제의 중앙계획을 중단하고, 그 대신 노동자 자주관리(worker's self-management)와 대외무역 자유화를 도입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방향전환이 유고슬라비아의 미래를 망친 화근이 될 줄은 그 당시에 아무도 몰랐다.

국가경제의 중앙계획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생산자 대중이 생산현장에서 참여할 의사결정과정이 없는 것이 문제였으므로, 국가경제의 중앙계획을 그대로 두고 생산현장에 의사결정과정을 도입하면 사회주의계획경제를 망치지 않고 강화발전시킬 수 있었는데도 유고슬라비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소련의 통제에 대한 반감이 사회주의의 고유한 경제관리방식까지 내버리게 만든 것이다. 사회주의경제관리를 내버리고 노동자 자주관리와 무역자유화를 도입한 유고슬라비아의 경제를 가리켜 사회주의시장경제(socialist market economy)라고 부를 수 있는데, 사회주의와 시장경제는 양립할 수 없는 데도, 그런 형용모순을 인정한 것 자체가 이미 실패를 예고한 것이다.

모든 생산자 대중에게 투표권을 주어 생산현장에 노동자협의회(worker's council)를 내올 것이 아니라, 선진적인 생산자 대중으로 구성된 당위원회를 생산현장에 조직하여 생산자 대중 전체에게 생산의 주인, 인민의 충복이 되자는 자각을 불러일으키는 생산자 대중의 자주의식화를 추진하여야 하였다. 생산자에게 자주의식이 없으면, 투표권 행사는 형식적인 수준을 넘지 못한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시장경제의 설계자들은 이것을 알지 못했다.

생산자 대중의 자주의식화를 추진하지 않으면서, 생산현장에 생산자 대중의 의사결정과정만 도입해봐야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없다. 어떤 제도적 결함을 바로잡고 혁신하는가 그렇지 못하는가 하는 것은, 생산의 주인과 인민의 충복이라는 자각을 가진 선진적 생산자 대중의 자발적인 노력과 투쟁으로 해결하는 정치과업인 것이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시장경제의 설계자들은 이것을 알지 못했다.


국제통화기금의 '덫'과 미국의 '조용한 혁명'

반사회주의 선동가들은 유고슬라비아의 노동자 자주관리가 그 무슨 선진적인 경제관리방식인 것처럼 목청을 높혔지만, 그것은 허위선전이었다. 노동자 자주관리와 무역자유화는 유고슬라비아에서 생산자 대중의 집단이기주의를 통제할 수 없었다.

노동자 자주관리와 무역자유화를 도입하자 처음에는 생산력이 제법 증가하였지만, 경제활동에서 사리사욕의 집단화 현상이 차츰 만연되면서 사회계급적 모순이 재생되었으며 나중에는 국가재정마저 파산위기에 빠졌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유고슬라비아는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여러 차례 구제금융을 받으며 재정파산위기를 넘겼다. 국제통화기금은 결코 아무런 대가 없이 달러를 빌려준 것이 아니라, 유고슬라비아의 '시장자유화(market liberalization)'를 요구한 대가로 달러를 빌려주었다. 노동자 자주관리와 무역자유화가 사회주의시장경제마저 차츰 밀어내고 완전한 시장자유화를 불러들인 것이다.

국제통화기금의 덫에 걸린 유고슬라비아 경제는 밖으로는 대외부채위기를, 안으로는 대량실업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유고슬라비아 대외부채는 1954년에 4억 달러밖에 되지 않았는데, 1981년에는 1,990억 달러로 폭증하였고, 실업자수는 1980년에 100만명을 넘어섰다. 유고슬라비아는 대량실업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자국 노동자들의 해외이주를 허용하였다. 그에 따라 서독으로 '탈출'한 유고슬라비아 노동자는 1961년에 16,000명이었는데, 10년 뒤인 1971년에는 410,000명으로 급증하였다.

사회주의를 말살하려고 날뛰는 제국주의깡패국가들이 그처럼 곤경에 처한 유고슬라비아를 방관할 리 만무하였다. 1982년에 작성되고, 1990년에 기밀해제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결정서 제54호 문건에 따르면, 미국은 "동유럽 나라들을 시장경제로 다시 끌어들이는 한 편, 공산주의 정부들과 정당들을 전복하기 위한 '조용한 혁명(quiet revolution)'을 추진하는 노력을 확대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유고슬라비아는 미국이 은밀히 추진하는 '조용한 혁명'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미국이 유고슬라비아에서 '조용한 혁명'을 어떻게 자행하였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나, 6개 자치공화국과 2개 자치주로 구성된 유고슬라비아에서 쌓이고 쌓인 내부모순은, 국가적 단합의 중심이었던 티토가 1980년 5월 4일에 별세한 뒤에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1990년까지 유지된 유고슬라비아사회주의연방공화국(맨위 그림)은 1991년 연방이 해체되며 4개의 나라로 쪼개졌다. (중간 그림). 그리고 내전과 내분을 거듭한 끝에 2008년에 이르러 7개 나라와 분쟁지역(코소보)으로 분화되고 말았다. (맨 아래 그림)

1991년 6월 25일 슬로베니아가 유고슬라비아사회주의연방공화국(당시 국명)에서 탈퇴하자, 이튿날 유고슬라브 인민군이 무력을 행사하여 연방탈퇴를 저지하려고 하였다. 이것이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시작이었다. 티토가 '형제애와 단합(brotherhood and unity)'이라는 기치 아래 건설한 유고슬라비아연방은 그렇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 뒤로 크로아티아 독립전쟁과 보스니아 전쟁이 이어졌다. 1998년에 코소보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은 전투기를 동원하여 유고슬라비아를 공습하였다. '형제애와 단합'의 땅은 전쟁과 학살과 침략으로 분열되고 황폐화되었다. (2012년 3월 2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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