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과 진보 (57)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유로존 경제의 붕괴와 4.11 총선정국
친자본 반노동 성향의 선동가들은 '성장둔화'라느니 또는 '침체단계'라느니 하는 알량한 거짓말로 붕괴위험에 대한 공포심을 감춰보려고 발버둥치고 있으나, 지금 세계 자본주의시장경제가 전반적으로 붕괴위험에 빠져든 것은 분명하다.
그동안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수많은 개발도상국들을 지배하고 착취하여 이른바 '경제선진국'으로 올라섰던 미국, 서유럽, 일본 같은 자본주의 나라들의 국가재정파산이 시장경제 붕괴위험을 촉발시킨 결정적 요인이라는 점에서, 이번에 닥친 붕괴위험은 미국 금융권의 민간재정파산으로 촉발된 2008년의 시장경제 붕괴위험보다 한층 더 파괴적이다.
그러면 미국, 서유럽, 일본의 자본주의시장경제는 붕괴위험에서 탈출할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까? 잘라 말하면, 돌파구는 없으며, 붕괴위험은 불가피하게 붕괴재앙으로 이어질 것이다. 다만 붕괴충격을 조절하여 고통을 좀 덜 느끼도록 '진통제'를 처방하는 문제만 '경제선진국'들에게 남아있을 뿐이다.
2011년 11월 30일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크리스틴 라가드(Chistine Lagarde)가 미국의 취재기자에게 전해준 말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그녀는 국제통화기금이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국가재정위기에 대처할 긴급방책을 논의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국가재정위기가 얼마나 치명적이고, 그 두 나라의 국가재정파산이 세계 자본주의시장경제에 미치는 위험도가 얼마나 심각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녀가 긴급방책을 논의하지 않고 있다니, 그러면 위험을 방치한다는 건가? 그녀는 취재기자에게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지만,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국가재정위기에 대처할 긴급방책을 세우기에는 때가 너무 늦은 것이다.
파산위기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국가재정이 공식적으로 파산선고를 받는 날, 유로존 경제는 그 운명의 날부터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할 것이고, 유로존 경제가 무너지면 미국 경제나 일본 경제도 동반붕괴하게 되고, 중국 경제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세계 자본주의시장경제에 기생해온 남측 경제는 어떻게 되나? 국제결제은행(BIS)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남측 은행권이 걸머진 외화부채 3,494억6,700만 달러 가운데 유로존 금융권에서 빌려온 부채가 53.6%에 이르는 1,872억5,800만 달러다.
유로존 경제가 붕괴되면, 유로존 금융권이 남측에서 급히 거둬가는 엄청난 외화가 한꺼번에 썰물처럼 빠져나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미 비틀거리는 남측 경제는 몇 일 안에 쓰러질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무시무시한 공포와 충격을 몰고 올 자본이탈과 경제붕괴의 연동 시나리오가 이 땅에서 현실화되는 것이다.
1997년 11월부터 1998년 상반기에 걸치는 기간에 남측 경제는 이미 붕괴를 경험한 적이 있는데, 그 때는 국제통화기금에 경제주권을 넘겨주는 굴욕적인 대가로 긴급구제금융을 받아 간신히 연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국제금융권 사정이 전혀 다르다. 유로존 경제가 무너지는 것과 더불어 미국, 일본, 중국이 얼마 시차를 두고 동반적으로 붕괴위험에 빠질 것이므로, 이명박 정부는 어디 가서 긴급구제금융을 꿔달라고 구걸하지도 못할 것이다.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공포와 충격의 붕괴소식을 그냥 앉아서 멍하니 듣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유로존 경제가 하필이면 2012년 상반기에 붕괴할 것으로 예견된다는 점이다. 이 땅에서 전개되는 변혁과 진보의 발전과정에서 2012년 상반기라는 특정시점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유로존 경제의 예견되는 붕괴시점이 4.11 총선정국과 겹치게 될 가능성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2012년 4월 11일 이 땅에서 총선이 실시된다. 2012년 1월 15일에 창당될 통합진보정당이 처음 출전하는 총선이라는 점에서, 또한 그 총선에서 통합진보정당이 얻을 대중적 지지가 12.19 대선정국의 변화방향을 예고하는 객관적 지표로 될 것이라는 점에서, 2012년 총선은 역대 총선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대하고 결정적이다.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진보정치활동가들의 시야에서 2012년 상반기의 정세변화를 바라보면, 시장경제가 붕괴하는 충격과 혼란 속에서 4.11 총선에 대응해야 하고, 더 나아가 12.19 대선에도 대응해야 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그렇다면 시장경제 붕괴가 통합진보정당의 총선대응과 대선대응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꼼꼼히 따져묻지 않을 수 없다. 붕괴정국은 통합진보정당의 총선대응과 대선대응에 유리할까 아니면 불리할까?
아직 경험하지 못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좀 어려운 일이지만,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나라의 경험을 분석해보면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 글에서 관심을 끄는 대상은 스페인이다.
뜻 밖의 결과를 낳은 스페인의 5.15 운동
유로존 경제의 붕괴위험 속에서 그 위험과 피해를 고스란히 뒤집어쓴 유럽의 노동자, 농민, 서민들이 벌이는 생존권 투쟁은 실로 격렬하다. 영국과 그리스에서는 폭동이 일어났고,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는 격렬한 대중투쟁이 폭발하였다. 상대적으로 건전한 국가재정을 가지고 버티는 독일을 제외한 거의 모든 유럽국가들에서 크고 작은 대중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 글의 초점이 가닿는 대상은, 스페인에서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는 대중투쟁이다. 스페인에서 대규모 대중투쟁이 폭발한 때는 2011년 5월 15일이다. 그 날 스페인 전국 58개 도시들에서 폭발한 대중투쟁에 참가한 각계각층 대중은 연인원 650만명에서 800만명에 이르렀다. 스페인의 대중투쟁을 5.15 운동이라 부른다.
△2011년 5월 15일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 뿌에르따 델 쏠 광장에 집결한 시위대 |
스페인의 5.15 운동을 촉발시킨 원인은 무엇일까? 스페인은 유로존 나라들 가운데 실업율이 가장 높다. 2011년 3월 말 현재 스페인에서 실업율은 21.3%, 청년실업율은 43.5%이고, 실업자는 500만여 명으로 폭증하였다. 살인적인 대량실업으로 민생경제가 파탄되었으니, 민중들이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스페인의 대중투쟁은 5월에 10차례, 6월에 8차례, 7월에 2차례, 8월에 3차례, 10월에 1차례 일어났다. 스페인의 5.15 운동이 제기한 투쟁목표는, 대량실업과 민생경제파탄에서 스페인 민중을 보호해줄 사회보장대책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다른 유럽나라들에서 폭발한 대중투쟁들에서 그러한 것처럼, 스페인에서도 민생경제보장에 대한 절박한 요구가 터져나온 것이다.
그런데 그런 민생경제보장에 대한 요구보다 한층 더 중요한 정치적 요구가 제기되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스페인의 5.15 운동이 제기한 정치적 요구는 양당체제를 폐기하라는 것이다. 스페인 민중들이 5.15 운동에서 제기한, 양당체제를 폐기하라는 요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스페인 정치권에는 매우 오랫동안 번갈아 교차집권해온 두 개의 거대정당이 들어앉아 있다. 이 땅에서는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교차집권하면서 양당체제를 굳혀놓으려 하는데, 스페인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양당체제가 굳어져 버렸다. 스페인 정치권을 갈라먹은 거대정당은 스페인 사회노동당(PSOE)과 국민당(PP)이다.
원래 스페인 사회노동당은 1879년에 좌파정당으로 창당되었다. 이 땅에서 조선봉건왕조가 쇄국정책을 풀고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보내던 그 옛날에 스페인에서는 벌써 좌파정당이 등장하였으니 정치발전 격차가 너무 커 보인다. 스페인 사회노동당을 전폭적으로 지지한 세력은 1888년에 창설된 스페인 노동자총연맹(UGT)이다. 좌파정당과 좌파노조의 결합에 의거하여 변혁과 진보를 실현하려는 유럽형 변혁공식은 19세기말 스페인에서도 확정적이었다.
그러나 그 변혁공식은 유럽을 휩쓴 파시즘의 폭력 아래 짓밟히고 말았다. 스페인 내전 직후인 1939년부터 시작된 프랑코 파쇼통치는 스페인 사회노동당을 불법화하고 극심하게 탄압하였다. 그 당은 1977년에 가서야 합법화되었다. 그런데 오랜 탄압 아래서도 살아남은 스페인 사회노동당은 1979년 9월에 열린 임시당대회에서 당의 정치이념을 사회주의에서 사민주의로 바꿨다. 좌파정당에서 복지정당으로 전향한 것이다.
좌파정당에 중도우파정당으로 전향한 스페인 사회노동당은 1982년 10월 28일에 실시된 스페인 총선에서 48.5%의 득표율로 승리하여 집권에 성공하였다. 그 당은 1982년부터 1996년까지 15년 동안 집권하였고, 1996년에 실시된 총선에서 패하여 국민당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다.
국민당은 프랑코 파쇼독재의 유산을 물려받은 전형적인 우파정당이다. 1996년에 스페인 사회노동당을 꺾고 집권한 국민당은 2004년까지 9년 동안 집권하였다. 그리고 2004년부터 2011년까지 다시 사회노동당이 집권하였다.
이처럼 스페인 정치권을 장악한 중도우파정당과 우파정당은 주기적 교차집권으로 정권을 나눠먹으며 민중에게 환멸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우파정당들의 교차집권에 환멸을 느낀 스페인 민중이 양당체제 폐기를 정치적 요구로 제기한 것은 당연하고 또 정당하다.
이처럼 5.15 운동이 양당체제 폐기를 정치적 요구로 제기한 가운데, 2011년 11월 20일 스페인에서 총선이 실시되었다. 스페인 정치제도는 총선과 대선을 분리하지 않는데, 총선에서 이긴 정당이 내세운 총리후보가 자동적으로 총리에 당선되는 식으로 진행된다.
스페인 민중이 양당체제 폐기를 요구하는 가운데 실시된 스페인의 11.20 총선결과는 어떠했을까? 충격적인 사실은, 그 선거에서 44.62%의 득표율을 올린 국민당이 승리하였다는 점이다. 국민당은 하원 350석 가운데 186석을 차지하였다. 이것은 지난 30년 동안 스페인 총선에서 가장 높은 득표율로 집권한 것이다. 총선에서 패한 사회노동당은 28.73%의 득표율밖에 건지지 못했다. 사회노동당은 의석이 169석에서 111석으로 줄어들어 집권연장에 실패하였다.
그러면 좌파정당은 얼마나 선전하였을까? 좌파연합(IU-ICV)은 6.92%의 득표율로 겨우 10석을 차지하였을 뿐이다. 좌파연합은 1982년 총선에서 3% 득표율밖에 건지지 못한 스페인 공산당(PCE)이 자구책으로 칼리스트당(Carlist Party)과 휴머니스트당(Humanist Party)과 손잡고 건설한 좌파통합정당이다. 이 좌파통합정당은 1986년 4월에 창당된 이후 지금까지 총선 득표율을 10% 이상 올리지 못했다. 거대양당의 틈바구니에 끼어 자라지 못하는 정치적 발육부진증에 걸린 것이다.
그런 좌파연합에게 양당체제를 폐기하라는 민중의 요구가 제기된 이번 총선은 반전의 기회였으나,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양당체제 폐기를 요구하는 스페인 민중들은 좌파연합을 새로운 대안정당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좌파연합을 주도하는 스페인 공산당에게 일차적인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 스페인 공산당은 프랑코 파쇼통치 하에서 불법화되고 극심한 탄압을 받다가 1977년에 합법화되었는데, 합법화된지 몇 주만에 20만 명 이상의 각계각층 대중들이 입당하였다. 만일 그 기세로 나갔더라면, 아마 집권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스페인 공산당의 우경화된 지도자들은 합법화 정국에서 당을 사회주의에서 이탈시켜 사민주의로 끌고 가려고 획책하였다. 그로써 당내에서 치열한 노선투쟁이 벌어졌으며, 사회주의자들의 탈당사태가 계속되었다. 당을 우경화시킨 사민주의자들이 1985년에 출당조치를 당하고 혼란이 간신히 수습되었으나, 그 동안 안팎에서 받은 상처는 너무 컸다. 스페인 민중들은 스페인 공산당을 분열당이라고 손가락질하면서 외면하였고, 스페인 공산당의 주도로 건설된 좌파연합에 대해서도 냉담하였다.
사분오열된 정당을 지지할 사람은 세상 어느 곳에도 없다. 정치적 단결과 조직적 통합에 대한 민중의 요구는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불변의 진리와 통한다. 그 요구를 거스르는 분열당은 망하고, 그 진리를 구현하는 통합당은 흥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스페인 좌파연합의 좌절경험에서 배우는 뼈저린 교훈이다.
무너져야 할 낡은 양당체제
<동아일보>가 2011년 11월 23일부터 25일까지 여론조사기관에 의뢰해 휴대전화를 통해 실시한 여론조사결과가 나왔다. 그 조사결과에서 유달리 눈길을 끄는 것은,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양당체제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다.
놀랍게도, 응답자 가운데 70.9%가 양당체제가 바뀌어야 한다고 응답하였고, 바꿀 필요가 없다고 응답한 비율은 22.5%였다. 세대별로 구분하면, 20대 응답자 가운데 75.9%, 30대 응답자 가운데 77.5%, 40대 응답자 가운데 70.6%가 양당체제가 바뀌어야 한다고 응답하였고, 50대 응답자 가운데서는 58.6%만이 양당체제가 바뀌어야 한다고 응답하였다.
스페인 민중들이 스페인 사회노동당과 국민당의 양당체제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이 땅의 민중들도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양당체제에 환멸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위의 여론조사결과에서 입증되었다.
그러면 이 땅의 민중들은 창당을 눈앞에 둔 통합진보정당을 새로운 대안정당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2011년 11월 24일 한국여론조사연구소와 <시사인>이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창당을 앞둔 통합진보정당에 대한 대중적 지지율이 14.7%로 나왔다.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이 각각 얻은 지지율을 합해도 10%를 밑돌았는데, 아직 창당되지도 않은 통합진보정당이 10% 선을 훌쩍 뛰어넘은 것이다.
이러한 여론조사결과는 통합진보정당이 창당되면 그 당에 대한 대중적 지지율이 더 높아지리라는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민중의 정치적 요구가 그러하다면, 이 땅의 정치권이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낡은 양당체제에서 벗어나 3당체제로 전환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통합진보정당의 출범을 눈 앞에 두고 전국 순회활동을 벌이는 당 대표들 |
2011년 상반기에 시장경제 전반이 무너지는 경우, 출범 깃발을 높이 올린 통합진보정당이 붕괴의 충격과 혼란 속에서 대중으로부터 어떻게 자기의 정치실력을 인정받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당면과제로 되었다. "시장경제 붕괴를 돌파할 진보정당의 정치실력을 대중에게 보여드리자!" 이것이 통합진보정당의 당면한 투쟁구호가 되지 않겠는가. (2011년 12월 2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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