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2011년 12월 4일 북측 언론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오중흡 7련대 칭호를 수여받은 조선인민군 공군 제378군부대 비행훈련을 지도하는 현장보도사진과 보도기사를 실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인민군 부대들 가운데 오중흡 7련대 칭호를 수여받은 부대는 정예부대다.
위의 보도기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군부대를 시찰하였다고 서술하지 않고 군부대 비행훈련을 지도하였다고 서술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군부대 훈련을 지도하였다는 북측 언론의 보도는, 최고사령관 명령을 받은 군부대가 병종사령관 통제에 따라 최고사령관 앞에서 실전을 방불한 전투훈련을 실시하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위의 보도기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휘소에 오르시여 비행사들의 훈련을 지도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은 김정일 최고사령관 명령을 받은 공군 제378군부대가 공군사령관 리병철 대장의 통제에 따라 최고사령관 앞에서 비행훈련을 실시하였음을 말해준다.
그 비행훈련에 참가한 전투비행사들은 "평시의 훈련을 통하여 다져온 자기들의 높은 비행술을 남김없이 보여주었"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싸움맛이 나게 훈련을 진행하고 있는 비행사들의 과감하고 용맹스러운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아주시며 환한 미소를 지으시고 우리 비행사들이 정말 훈련을 잘 한다고, 대담하게 기동하는 것이 알린다고 높이 평가하시였다."고 보도했다.
그 비행훈련에 참가한 전투비행사들은 누구였을까? 현장보도사진 24장을 살펴보면,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 현장보도사진에 나타난 전투비행사들은 단발머리에 전투비행사 정모를 쓰고 가죽옷 입고 검은색 장화를 신은 17명 여성전투비행사들이었다.
인민군 여병사(남측에서는 여군)의 비율은 전체 인민군 가운데 10%를 넘는다. 인민군 병력이 117만 명이므로, 인민군 여병사는 약 13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다른 나라 여군은 병력수도 적을 뿐 아니라, 주로 통신병과나 의무병과 같은 비전투병과에 배치되지만, 인민군 여병사들은 다르다.
인민군에는 여병사들만으로 편성된 전투부대인 여성독립여단과 여성연대가 여러 개 있고, 전투기나 폭격기를 모는 여성전투비행사들이 많고, 특수전 병력 수송기나 군용헬기를 모는 여성비행사들이 많고, 대공포부대와 해안포부대에 배치된 포병은 모두 여병사들이며, 기차굴과 교량을 지키는 것도 여병사들의 몫이다.
인민군 전투비행사는 2,000명으로 추산되는데, 그 가운데 여성전투비행사 비율이 10%라고 하면, 여성전투비행사가 약 200명이나 있는 셈이다. 미국 공군 여성 전투기조종사는 70여 명이고, 한국군 공군 여성 전투기조종사는 14명이다.
어느 나라 군대에서나 전투비행사를 육성하는 문제는 간단치 않은데, 인민군 전투비행사는 어떻게 육성되고 있을까? 1개 군(행정단위)에서 후보생을 3명씩, 총 600명 후보생을 선발하여 교도연대에서 1년 동안 기술교육을 받고 시험을 친다. 시험에 합격한 후보생은 공군대학에서 3년 교육을 받은 뒤에 일반 병사로 입대하는데, 일반 병사로 3년 동안 각종 훈련을 받아야 '붉은 비행사'가 된다.
현장보도사진에 나온 인민군 공군 제378군부대 여성전투비행사 17명도 그처럼 7년 동안 고된 훈련과정을 거치며 단련된 정예비행사들이다. "녀성비행사들에게 야간비행훈련을 많이 시켜야 하겠습니다"라고 쓰여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교시판이 보도사진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인민군에서는 여성전투비행사들도 야간비행훈련을 많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성전투비행사 17명이 준비한 예술소품공연은 아주 소박한 것이어서, 기타 한 개, 손풍금 한 개, 북 두 개, 그리고 각각 다른 양의 물을 채워넣고, 줄에 매단 여러 개 유리병을 두들기며 연주하는 즉흥악기 한 개가 반주악기의 전부였다. 전문 음악인이 아닌 병사들이 공연무대가 아닌 나무발판 위에서 노래를 불렀으면 얼마나 잘 불렀겠는가.
△<로동신문> 2011년 12월 4일 보도사진 |
그러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군사부문 지도에서 병사들의 예술공연은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평소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아무리 바빠도 만사를 제쳐놓고 군인예술공연을 반드시 관람한다.
왜 그럴까? 반북수구언론들은 전혀 이해하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겠지만, 병사들이 김정일 국방위원장 앞에서 펼치는 소박한 예술공연은 최고사령관과 병사대중의 사상정신적 일체감을 확인하고 강화하는 매우 특유한 소통방식인 것이다. 병사들을 아끼는 최고사령관의 사랑과 최고사령관을 믿고 따르는 병사들의 경모심이 오가는 소박한 예술공연, 바로 이것이 전 세계 수많은 군대들 가운데서 오직 인민군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특유한 소통방식이다.
그런데 남측 언론매체들이 주목한 것은, 바로 그 다음에 나온 사진이었다. 그 사진은 예술소품공연이 끝났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와락 달려간 여성전투비행사들이 그의 양팔을 붙들고 있는 모습을 찍은 것이다. 북측에 대해 무지하고, 특히 인민군에 대해 더 무지한 남측 언론매체들은 그 사진을 전재보도하면서 그것이 어떤 장면을 찍은 것인지 알지 못해 어리둥절하고 헷갈렸다.
△<로동신문> 2011년 12월 4일 보도사진 |
그러나 병사들을 아끼는 최고사령관과 최고사령관을 믿고 따르는 병사들이 만나는 순간을 찍은 사진이라고 보면 금방 이해된다. 비유로 말하면, 그 사진은 친정아버지가 먼 곳에 시집보낸 딸을 찾아가 처음 만나는 장면이며, 친정아버지를 그리워하던 시집간 딸이 자기 집을 처음 찾아온 친정아버지를 만나는 장면이다.
그 사진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양팔을 붙들고 무엇인가를 절절히 말하는 여성전투비행사들의 눈물 젖은 표정은 그들의 진실하고 애틋한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로동신문> 보도기사는 "공연이 끝나자 비행사들은 최고사령관 동지의 자애로운 품에 안기여 격정의 눈물을 흘리였다"고 서술하였다.
가정에 가풍이 있고, 학교에 학풍이 있고, 문필가에게 문풍이 있는 것처럼, 군대에는 군풍이 있다. 바람을 뜻하는 풍이라는 말이 그런 낱말들에 들어있는 것은, 바람처럼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집단의 정신상태와 생활방식을 규정하고 그 집단의 활력을 분출하는 어떤 에너지의 존재를 가리킨 것이다.
인민군의 정신상태와 생활방식을 규정하고 그들의 집단적 활력을 분출하는 군풍은, 위에서 언급한 사진들이 말해주는 것처럼, 아버지와 아들딸 사이에 맺어진 것과 같은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맥락을 알아야, 북측에서 자주 쓰는 관병일치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북측에서는 그 군풍을 혁명전통으로 본다.
관병일치 혁명전통은 김일성 주석이 영도한 일제강점기 항일무장투쟁에서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동안 계승되고 다져진 것이다. 2011년 12월 6일 <자주민보>에 실린, 중국조선족 역사학자인 리송덕 연변박물관 혁명사부 전 주임이 쓴 글 '장백현에 깃든 항일투쟁사'에 이런 기록이 있다.
12살 어린 나이에 자기 형들을 따라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던 중국인 교방신은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손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는데, 김일성 사령관이 밀림 속에서 마취약과 수술칼을 구할 길이 없어 면도칼로 수술을 해줄 때 소년병에게 우스개소리를 하여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면서 부러진 뼈조각을 뽑아주었다.
김일성 사령관은 붕대를 감은 손을 쓰지 못하는 그 소년병이 소변을 볼 때마다 바지를 내려주고 입혀주었고, 행군으로 땀젖은 양말을 벗겨 모닥불에 말려주었다. 뜨거운 사랑에 감동한 소년병이 울음을 터뜨리자, 김일성 사령관은 "울지 말라. 중국사람이나 조선사람은 모두 함께 일본놈을 치는데 내가 사령관이라고 해서 경위대원의 바지와 양말도 말려주지 못하겠는가"고 말해서 울음을 그쳤다. 어느 추운 겨울날 김일성 사령관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이겨 전리품으로 얻은 모피를 절반 잘라서 그 소년병에게 덮어주었다.
조선족 역사학자는 김일성 사령관이 중국인 소년병을 친동생처럼 아껴주고 보살펴준 관병일치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전해주었지만, 김일성 사령관과 조선인민혁명군 병사들 사이에서 맺어진 관병일치의 눈물겨운 이야기는 또 얼마나 많은가. 조선인민혁명군 병사들이 그런 사령관의 명령을 관철하기 위해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였겠으며, 그런 사령관을 옹위하기 위해 어찌 목숨을 바치지 않았겠는가.
조선인민혁명군이 밀림의 병기창에서 맨손으로 두들겨 만든 '연길폭탄'으로 당시 항공모함과 잠수함까지 보유한 강적 일본군과 맞서싸운 미증유의 전투에너지, 그것은 바로 관병일치 군풍이 발산한 강력한 에너지였던 것이다.
김일성 주석의 관병일치 혁명전통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 나라 천만 어머니들이 아들딸을 잘 키워 조국보위초소에 세우며 나에게 맡겼는데 최고사령관인 내가 그들을 아들딸처럼 돌봐주지 않으면 누가 돌봐주겠는가"라고 말하며 군부대들을 찾아가고 있다.
북측 언론보도를 읽어보면, 그는 군부대에 찾아가서 병사들의 훈련상태, 사상교양, 문화정서생활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병실(남측에서는 내무반)의 실내온도가 적당한지, 침대위치가 바로 놓였는지, 콩나물이나 치즈 같은 식품을 공급하는지, 전기공급이 잘되고 있는지, 산악지대에서 텔레비전 시청에 장애가 없는지, 세목장(남측에서는 목욕탕)에 더운 물이 나오는지 등등 아주 세심하게 돌아보며 병사생활을 보살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70여 년 전 만주의 숲 속에서 김일성 사령관의 사랑에 감격하여 엉엉 소리내어 울던 중국인 소년병처럼, 단발머리 여성비행사 17명도 자기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김정일 최고사령관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2011년 12월 14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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