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군사학에서는 적국의 식량생산을 중단시키고 적군이 숨는 산림을 황폐화하는 것을 고엽전(herbicidal warfare)의 작전목표로 규정한다. 1960년대 초에 미국 군부는 고엽전을 벌이기 위해 다우 케미컬(Dow Chemical)을 비롯한 10개 대형 화학회사를 동원하여 일곱 종류의 맹독성 화학물질을 개발, 생산하였다.
그 가운데는 인체에 치명적인 맹독성 다이옥신(dioxin)이 들어간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라는 악명 높은 화학물질이 있다. 이 죽음의 화학물질은 단순한 화학물질이 아니라 미국군이 실제로 고엽전에 사용한 전쟁물자다.
베트남 전쟁사 자료를 읽어보면, 프랑스에 이어 베트남 전쟁을 도발한 미국은 1962년부터 1971년까지 10년 동안 무려 7천577만6,000 리터나 되는 각종 고엽제를 남베트남 각지에 마구 살포하는 끔찍스러운 화학전을 자행하였다. 미국군은 남베트남만이 아니라 인접국들인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들어가서도 고엽제를 살포하는 화학전을 자행하였다.
당시 미국군은 3,800리터가 들어가는 대형 저장탱크를 장착한 미국군 수송기(C-123) 편대를 출격시켜 작전목표 상공에서 나란히 비행하면서 드넓은 지역 상공에서 고엽제를 살포하였다. 그들은 수송기를 동원하여 공중살포만 한 것이 아니라, 미국군 기지 주변에 있는 숲을 제거하기 위해 지상에서도 분무기, 트럭, 헬기 등을 동원하여 고엽제를 마구 뿌렸다.
전쟁자료에 따르면, 미국군이 남베트남에서 자행한 고엽전으로 20,000㎢의 밀림과 2,000㎢의 농지가 황폐화되었다. 당시 남베트남 전체 밀림면적의 약 20%가 저들의 고엽전으로 황폐화된 것이다.
△베트남에서 고엽제를 살포하는 미국군수송기(C-123) |
전쟁자료에 따르면, 미국군이 남베트남에서 자행한 고엽전으로 20,000㎢의 밀림과 2,000㎢의 농지가 황폐화되었다. 당시 남베트남 전체 밀림면적의 약 20%가 저들의 고엽전으로 황폐화된 것이다.
미국군이 자행한 고엽전은 밀림과 농지를 황폐화한 것만 아니라, 베트남 민중에게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전쟁참화를 입혔다. 신경마비와 인체변형, 백혈병을 비롯한 각종 암 발병, 기형아 출산이 베트남 민중의 목숨을 앗아가며 참혹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고엽제로 인해 기형아로 태어난 베트남 어린이들 |
당시 기록에 따르면, 이처럼 인류가 겪은 최악의 화학전을 직접 지시한 사람은 1961년 1월부터 1963년 11월까지 재임한 미국의 제35대 대통령 존 케네디였다. 케네디는 암살로 생을 마쳤지만, 만일 그가 살았다면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고 극악한 화학전을 도발한 죄목 하나만으로도 전범으로 재판을 받아야 하였다.
그런데도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은, 집요하게 추진된 우민화 정책에 도취한 미국인들은 그런 흉악한 전범을 미국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서 훌륭한 대통령으로 우러르고 있다. 우민화 정책에 도취된 이 땅의 일반대중이 친일파 민족반역자이며, 독재자인 박정희를 경제개발을 성공시킨 훌륭한 대통령으로 칭송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더욱 충격적인 것은, 미국 군부가 베트남 전쟁에서만 고엽전을 자행한 것이 아니라 같은 시기에 한반도에서도 고엽전을 동시에 자행하였다는 사실이다. 그 동안 군사기밀로 은폐되었다가 이번에 드러난 것은, 미국이 1961년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다시 말해서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어 끝날 때까지 베트남과 한반도에서 동시에 고엽전을 자행해왔다는 충격적인 사실이다. 저들이 한반도에서 자행한 고엽전은 비무장지대와 주한미국군 기지 주변의 울창한 숲을 제거하는 화학전이었다.
베트남 전쟁은 1975년에 미국의 패배로 끝났는데, 패전하여 철군한 미국군은 남베트남에서 쓰다 남은 엄청난 분량의 고엽제를 그 땅에 버려두고 빠져나왔까? 그들은 값비싼 전쟁물자인 고엽제가 북베트남군의 손에 들어가도록 방치할 수 없었다. 패전한 미국군은 고엽제를 비롯한 화학전 전쟁물자를 모조리 한반도로 몰래 실어날랐다. 1975년 이후 주한미국군기지 보관창고들에는 베트남에서 밀려들어온 고엽제가 넘쳐났다.
△55갤런 드럼통에 가득 담긴 에이전트 오렌지 |
그런데 이상하게도, 베트남 전쟁 종전으로부터 3년이 지난 1978년에 주한미국군사령관은 전쟁물자 보관창고에 넘쳐나는 고엽제를 전량 폐기하라는 긴급명령을 내렸다. 베트남 전쟁에서 패전한 그들에게 잔인한 고엽전 범죄를 추궁하는 국제사회의 드센 규탄이 제기될 것을 두려워한 미국 군부는 이 땅에 보관 중이던 고엽제를 전량 폐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국군 지휘부의 갑작스러운 폐기명령에 따라, 주한미국군은 기지 밖에 나가 지역주민들의 눈을 피해 매립장소를 찾아볼 시간적 여유조차 갖지 못했다. 당시 주한미국군이 그처럼 독성이 강한 고엽제를 자기들 발밑에 서둘러 파묻은 까닭이 거기에 있다. 얼마나 다급했던지, 그들은 화학물질 보관창고에서 고엽제를 싣고 온 트럭까지 통째로 땅밑에 파묻어 버렸다.
지금까지 드러난 것은, 경상북도 왜관에 있는 미국군 기지 캠프 캐럴과, 경기도 부천에 있는 캠프 머서에서 에이전트 오렌지를 비롯한 고엽전 화학물질을 몰래 파묻은 매립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땅에 있는 90여 개나 되는 미국군 기지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기지들에서 고엽전 화학물질을 몰래 파묻는 범행이 저질러졌는지 기록에 남아있지 않으니 알 수 없다.
당시 고엽전 화학물질을 캠프 캐럴에 파묻는 작업에 동원되었던 미국군 출신자가 이번에 언론에 그 범행을 폭로하는 바람에, 33년 전에 있었던 미국군의 범행이 이제서야 세상에 드러났다. 중요한 것은, 미국군이 33년 전에 이 땅에 파묻은 것은 단순한 화학물질이 아니라, 베트남 전쟁에서 사용하고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사용한 화학전 물자라는 점이다.
△캠프 캐럴에 고엽제를 파묻은 사실을 폭로한 스티븐 하우스 전 주한미국군 사병 |
제네바 국제협약이 사용을 금지한 대량살상무기에는 핵무기만이 아니라 화학무기도 포함된다. 그러므로 이번에 일어난 고엽제 매립발각사건은 민간 화학공장이 폐기화학물질을 땅에 파묻은 환경범죄가 아니라 화학전 행위를 은폐한 전쟁범죄에 해당한다. 제네바 국제협정은 어떤 형태의 화학전도 금지하고 있으므로, 미국군은 제네바 국제협정을 위반한 화학전을 이 땅에서 자행하고 나서 자기들의 전쟁범죄를 은폐하려고 고엽제 잔여분을 몰래 땅에 파묻었던 것이다.
△캠프 캐럴을 둘러 보는 민관합동조사단. 가운데는 데이비드 폭스 주한 미 8군 준장(주한미국군 기지관리사령관) |
이런 맥락에서 보면, 미국군의 고엽제 매립을 환경재앙으로 규정하는 것은 핵심을 놓치고 변죽만 울리는 오류다. 미국군의 고엽제 매립은 명백하게도 화학전 범죄인 것이다. 지난 5,000년 동안 우리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아 대대로 살아온 이 땅에, 그리고 현 세대가 후대들에게 대대손손 물려줄 신성한 우리 강토에 집단발병을 일으킬 독극물을 주입한 미국군의 극악한 만행은 독극물 제국주의가 저지른 전형적인 화학전 범죄다.
그러므로 저들이 저지른 화학전 범죄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묻기 위해 주한미국군 기지 전체를 정밀조사하여야 한다. 그 조사결과에 따라, 미국 정부로부터 피해배상금을 받아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매립을 지휘한 당시 미국군 지휘관들을 군사법정에 세워 화학전 범죄로 기소, 처벌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그런 악질적 전범행위를 뻔히 보았으면서도 항변 한 마디 하지 못하고 파문이 커지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꼴이다. 친미굴종으로 뼛속까지 온통 순화된 저들의 입에서 미국에 대한 그 어떤 항변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해가 서쪽에서 뜨기를 기대하는 것 같은 어리석은 일이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미국군이 이 땅에서 저지르는 각종 범죄를 용인해주는 '주둔군지위협정(SOFA)'이 남아있는 한, 미국군 범죄를 처벌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주둔군지위협정'에 따르면, '성역'처럼 불가침을 보장받는 미국군 기지에 대한 조사는 사실상 불가능하고, 설령 범죄사실이 입증되었어도 미국군에 대한 사법처리는 불가능하고, 피해지역주민들이 고엽제 독극물에 죽어나갔어도 미국에게 아무런 피해보상도 청구할 수 없다. 어떻게 이런 굴욕협정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지구 위에 있는 수많은 나라들 가운데 그처럼 주권을 완전히 포기한 굴욕협정을 맺은 나라는 단 한 나라도 없다. 국제법은 그만두고 일반상식으로 판단해도, 주권국가가 아닌 식민지에서나 그런 굴욕협정이 허용되는 것이다. 독극물 제국주의가 전쟁범죄와 집단발병을 일으켰어도 '주둔군지위협정'이라는 족쇄가 이 땅에 단단히 채워졌기 때문에 항변 한 마디 하지 못하는 치욕과 굴종, 이것이 오늘 고엽제 매립발각사건에서 드러난 참담한 현실이다.
△서울 용산 한미연합사령부 앞에서 주한미국군 규탄, 진상규명촉구 기자회견을 갖는 민주노동당과 한국진보연대 (민주노동당 <진보정치> 2011년 5월 20일 보도사진) |
이번에 고엽제 매립발각사건을 겪으며, 한미동맹이 이 땅을 지켜준다는 거짓말에 속아온 60년 묵은 무지와 미몽에서 깨어나야 한다. 전쟁범죄와 집단발병을 일으키는 독극물 제국주의를 배격하고, 미국이 이 땅에 채워놓은 치욕과 굴종의 족쇄를 끊어버리는 반미자주화운동이 우리 자신과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죽음과 고통에서 건지는 재생의 활로다. (2011년 5월 26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