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3/23

그 간호원은 누구일까?

진실의 말팔매 <14>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201138일 남측의 주요 언론매체들은 그 전날 <조선중앙통신>에 실린 흥미로운 기사를 인용하여 보도하였다. <조선중앙통신>에 실린 기사의 제목은 '예쁜이로 불리우는 조선녀성들'이다. 제목만 보면 무슨 뜻인지 선뜻 알기 힘든데, 첫 줄은 이렇게 시작된다. "조선에서는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훌륭한 일을 한 녀성들을 예쁜이라고 부르고 있다."
 
남측과 북측의 말쓰임새가 너무 다르다는 점을 누구나 직감할 수 있다. 남측 국민들이 쓰는 예쁜이라는 말은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여성을 일컫는데,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여성을 실제로 예쁜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미인이라는 한자말을 쓴다. 남측에서는 예쁜게 생긴 아이를 예쁜이라고 부른는데, 북측에서는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훌륭한 일을 한 여성을 예쁜이라고 부른다.
 
2007730<로동신문>'예쁜이'라는 제목의 정론을 실었는데, 그 기사에 따르면, "녀성의 미는 용모에 앞서 사상정신의 미이며 그 생활과 인생의 아름다움"이라고 하였다. 만일 정신미라는 신조어를 이 글에서 쓸 수 있다면, 북측에서 말하는 예쁜이는 정신미의 전형적 형상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
 
'고난의 행군'이 막바지에 올랐던 19981225<로동신문>'예쁜이'라는 제목의 노래 악보가 크게 실렸다. 박영순이 노랫말을 짓고 안정호가 곡을 붙이고 보천보전자악단이 연주한 노래 '예쁜이'의 가사는 이렇다.
 
조국에 포연이 휘몰아칠 때 처녀는 전선에 탄원해왔네
어머니 조국 기어이 지키려 처녀는 전선에 탄원해왔네
그 이름 예쁜이 간호원 예쁜이
처녀는 전선에 처녀는 전선에 탄원해왔네
 
이 노랫말을 읽어보면, 자기 조국을 지키려 불타는 전선으로 자원해 나간 어느 이름 모를 처녀 간호원의 총 잡은 모습이 눈 앞에 선연히 떠오른다. 그 간호원은 누구였을까? 다음 절은 이렇게 이어진다.
 
바위도 불타던 전호가에서 처녀는 병사들 누이되였네
뜨거운 그 정성 고지의 꽃처럼 처녀는 병사들 누이되였네
간악한 원쑤의 무리를 맞받아 처녀는 나갔네 수류탄 안고
그 이름 예쁜이 간호원 예쁜이
처녀는 나갔네 처녀는 나갔네 수류탄 안고
 
탄우가 빗발치고 포화가 하늘을 찢는 결전의 마지막 순간, 처녀 간호원은 수류탄 묶음을 가슴에 안고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은 채 적진을 향해 달려나갔다. "영웅의 그 넋을 영원히 전하며 고운 새 우짖고 꽃은 만발"하였다는 마지막 절은, 처녀 간호원의 가녀린 몸이 육탄이 되어 적진을 타격하고 장렬히 전사하였음을 암시한다. 수류탄 묶음을 가슴에 안고 적진을 향해 달려나간 간호원 출신의 여병사가 북측 인민들의 가슴에 그려진 바로 그 예쁜이의 모습이다. 그 예쁜이 간호원은 누구였을까?

20101221일 북측에서 운영하는 웹싸이트 <우리민족끼리>에 게시된 '록화실황: 청년대학생들과 은하수 합동공연 <5월 음악회>'에는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차려입은 여대생 네 명이 출연하여 노래 '예쁜이'를 열창하는 장면이 나온다. 최근 북측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은하수 관현악단의 공연종목에 그 노래가 선택된 것을 보면, 그 노래가 북측 인민들 사이에서 평소에 애창곡으로 불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측과 북측이 공유한 우리나라 현대사에 등장한 여성들 가운데는 1920928일 서대문 감옥에서 왜놈들의 가혹한 고문을 받고, 열여덟 살 꽃다운 나이에 옥사한 류관순 열사가 있다. 조선 민중이 총궐기하여 일제의 식민지 강점을 반대하여 싸웠던 3.1운동 시기에 저들의 탄압만행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 어찌 류관순 한 사람 뿐이었으랴만, 후대는 류관순이라는 이름으로 3.1운동의 반일항쟁사를 기억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류관순은 류관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3.1운동에 참가하여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름 없는 여성열사들의 대명사로 기억되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북측 인민들의 가슴 속에 남아있는 '예쁜이 간호원'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에 자기 조국과 인민을 위해 청춘을 바친 모든 여성들의 대명사로 기억되는 것이다.
 
201117<로동신문>은 은률광산 노동자의 아내가 편집국에 보내온 눈물 겨운 편지 한 통을 소개하였다. 기사 제목은 '돌 우에도 꽃을 피우는 사랑의 힘'이다. 201010월 말, 은률광산에서 일하는 평범한 노동자가 불의의 사고로 심한 화상을 입고 은률광산병원으로 실려갔다. 환자는 소생할 가망이 거의 없어보였으나, 의사들과 간호원들은 "눈에 피발이 서고 입술까지 부르트는" 소생치료전투를 밤낮 없이 계속하였다.
 
위급한 순간, 화독이 퍼져 목숨이 경각에 달린 환자를 위해 의사들과 간호원들이 먼저 수술대에 올라 자기 피부를 떼어내고, "그 자리에서 곧장 수술칼을 쥐고 피부이식수술을 하였다." 그것은 실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북측 웹싸이트 <우리민족끼리>에는 수술대 위에 엎드려 자기 허벅지에서 살을 떼어내는 어느 여자 간호원의 모습을 찍은 사진 한 장이 실렸다. 피부미용에 무척 신경을 쓸 미혼여성이 생면부지의 노동자를 살리기 위해 서슴 없이 살을 떼어주는 참으로 놀라운 장면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간호원의 이름이 <로동신문>이나 <우리민족끼리>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은 것이다. 왜 그러했을까? 화상을 당한 노동자를 살리기 위해 자기 피를 주고, 자기 살을 떼어준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낯설은 사람들조차도 환자의 작은 어머니라고, 친척이고 형제라고 하면서 앞을 다투어 자기의 피와 살을 아낌없이 다바쳤다. 광산마을에서 함께 살면서 이름조차 익히지 못했던 사람들, 무릎 한 번 마주하고 정을 나눈 적도 없는 많은 사람들이건만 환자를 귀중한 혁명동지로, 한식솔로 여기며 진정을 바쳤다"<로동신문>은 전했다.
 
만일 남측에서 어느 여자 간호사가 생면부지의 환자를 살리기 위해 자기 피부를 떼어주었다면, 언론에서 그 미담을 크게 보도하면서 그 간호사의 이름과 사진까지 세상에 알렸을 것이고 정부에서 선행 봉사상까지 안겨주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북측에서는 의사들과 간호원들이 환자를 살리기 위해 자기의 피와 살을 환자에게 주는 경우가 각 병원마다 흔히 있는 일이라서, 그들의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는다.
그들의 정신세계는 어떠하길래 이처럼 믿어지지 않는 놀라운 일이 일상사처럼 일어나는 것일까? 지금도 자기 허벅지에 아름다운 상처가 남아있을 그 '예쁜이 간호원'은 누구일까? (2011323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