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시보 2020년 03월 02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평양에 나타난 붉은 군대 백전로장
2. 야조브를 놀라게 한 105땅크사단
3. 개마무사 철마군단과 고속기동 천마군단
4. 돌격로 열어놓을 전투동원태세 갖췄다
1. 평양에 나타난 붉은 군대 백전로장
1997년 9월 초 어느 날, 나는 고려민항 여객기를 타고 압록강 상공을 지나 조선 영공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1997년이라고 하면, 조선이 건국 이래 가장 혹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었던 ‘고난의 행군’ 시기였다. 당시 미국과 한국의 언론매체들은 조선이 이르면 3개월 안에, 아무리 늦어도 3년 안에는 반드시 무너질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을 내돌렸고, 그런 소문을 듣고 심리적으로 동요한 일부 인사들은 조국통일운동에서 이탈하고 있었다. 그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조선의 현실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내 발걸음이 평양으로 향하게 되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갖가지 생각에 잠겨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고려민항 여객기는 어느덧 평양국제공항에 내려앉았다. 여객기가 활주로 끝에서 멈춰서고, 탑승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는데, “손님 여러분, 좌석에 앉아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라는 여성승무원의 낭랑한 목소리가 기내방송을 통해 들렸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궁금해진 탑승객들은 저마다 여객기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활주로에서는 특이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국빈급 방문객을 공항에서 영접할 때 사용하는 검은색 리무진 승용차 한 대가 여객기 앞으로 미끄러지듯 달려와 멈춰서더니, 영접을 나온 고위급 인사들이 여객기에서 내린 어떤 서양인 방문객과 환영인사를 나누는 장면이 펼쳐진 것이다. 그 서양인 방문객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던 나는 여객기 창문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물끄러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탑승객들 가운데 그 서양인 방문객을 알아본 누군가가 “야조브다”라고 큰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알려주는 바람에 나는 그 서양인 방문객이 야조브라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야조브가 누군지 알지 못했던 나는 야조브라는 이름을 가진 로씨야의 고위급 인사가 평양을 방문한 것이려니 생각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전혀 뜻밖의 목소리가 내 귓전에 울렸다. “쯪쯪 ... 나라 다 망해먹고...” 로씨야의 사회주의자들이 소련의 붕괴를 막지 못한 것을 두고 개탄하는 어느 젊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깜짝 놀란 나는 그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목소리의 주인공은 조금 전에 안내방송을 하였던 고려민항 여성승무원이 아닌가! 소련의 붕괴를 개탄하던 그 젊은 여성승무원의 강렬한 인상이 마치 어제 있었던 일이련 듯 내 기억에 아직도 선명하다. 야조브에 대한 나의 관심은 그처럼 우연한 계기에 시작되었다.
1924년 11월 8일 로씨야 옴스크 칼라찐스끼의 빈농에서 태어난 드미뜨리 찌모페예비치 야조브는 1941년 11월 나치도이췰란드의 무력침공에 맞서 혈전을 벌이고 있었던 소련의 붉은군대에 자원입대하였다. 당시 열일곱살 고등학생이었던 그는 모스크바고등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8월부터 현대전쟁사에 가장 처절한 전투로 기록된 레닌그라드전투에 보병부대 소대장으로 참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아직 끝나지 않았던 1944년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그는 전투 중에 두 차례나 부상을 당한 용맹한 군인이었다. 이 용맹한 군인은 1945년 8월 붉은군대의 전승과 더불어 붉은별훈장을 수여받은 것을 시작으로 그 이후 오랜 기간에 걸친 군사복무기간에 많은 무공훈장을 받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푸룬제군사학교를 1956년에 수석으로 졸업한 붉은군대 청년장교 야조브는 기계화보병사단 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970년대에 군단장으로, 집단군사령관으로 복무하였고, 1981년 2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980년대에 군구사령관으로 복무하다가 1987년 5월 30일 소련 국방장관의 중책을 맡았고, 1990년 4월 28일 소련군 원수칭호를 받았으며, 1990년 12월에는 소련국가안보회의 성원으로 선출되었다. <사진 1>
그러나 야조브가 그런 중책을 맡아보기 2년 전부터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쵸브는 이른바 ‘뻬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찌(개방)’라는 간판을 내걸고 소련의 사회주의체제를 점진적으로 와해시키기 시작하였다. 사태의 위험성을 뒤늦게 깨달은 드미뜨리 야조브 국방장관, 보리스 뿌고 내무장관, 울라지미르 크루쵸브 국가안보위원회(KGB) 의장, 왈렌찐 빠블로브 총리 등은 소련의 사회주의체제를 와해시키고 소련의 연방국가체제를 해체하려는 고르바쵸브의 반역책동을 반대하였다. 야조브를 비롯한 사회주의수호자들과 고르바쵸브를 우두머리로 하는 사회주의배신자들 사이에서 정치적 대립과 갈등은 날로 첨예해졌다. 1991년 8월 18일 야조브를 비롯한 사회주의수호자들은 국가비상위원회를 결성하고,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와해되어가던 소련의 사회주의체제를 지키고, 해체되어가던 소련의 연방국가체제를 되살리려던 군사정변은 3일 만에 실패로 끝났다. 군사정변을 주도한 야조브는 체포, 구속되었고, 소련공산당에서 출당되었으며, 국가반역죄로 기소되어 최단 15년형에서 최장 종신형에 처해질 위험에 빠졌다. 간신히 중형을 면한 그는 1993년 1월 26일 출옥하였다.
18살이 되던 해에 보병부대 소대장으로 레닌그라드전투에 참가하였고, 66살이 되던 해에 소련군 원수칭호를 받으며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온 야조브는 1991년 8월 무너져가는 소련의 사회주의체제를 지키려고 군사정변까지 일으켰지만 3일 만에 실패하였고, 사회주의배신자들에 의해 국가반역자로 몰려 옥고까지 치렀다. 한 편의 소설처럼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백전로장 야조브가 소련이 붕괴되고, 사회주의진영이 와해되는 광풍에 휩쓸리며 절망에 빠져있던 때, 반혁명의 어둠을 뚫고 환히 빛나는 희망의 불빛이 그의 망막에 비쳐들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를 평양으로 초청한 것이다. 1997년 7월 어느 날, 야조브는 자기에게 희망의 불빛을 비춰주는 사회주의조선을 향해 설레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첫 번째 조선방문은 그렇게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1997년 10월 7일 로씨야 통신사 <이따르 타스>는 야조브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으로 7월과 8월에 연속 조선을 방문하였다고 하면서, 9월 2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야조브를 접견하였다는 소식을 전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야조브를 평양으로 초청하였지만 접견은 뒤로 미루어졌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당시 ‘고난의 행군’으로 온갖 고생을 하고 있었던 조선에게 북침의 칼을 겨누고 위협하는 한미연합군의 전쟁연습에 대응하기 위해 전선길에서 매우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래서 9월 2일에 가서야 야조브를 접견할 수 있었다.
보도에 따르면, 야조브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접견을 받는 자리에 당시 소련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해 힘쓰던 정치활동가 올레그 쉐닌, 소련군 장성 출신 왈렌찐 와레니꼬브, 야조브의 부인 에마 에브게니브나도 동석했다고 한다. 올레그 쉐닌과 왈렌찐 와레니꼬브는 1991년 8월 말 거의 무너져가던 소련의 사회주의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함께 군사정변을 일으켰던 혁명동지들이었다.
1997년 조선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접견을 받은 야조브는 역사의 광풍을 혁명무력으로 다스려 사회주의조선을 수호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흠모하게 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 조선을 방문하면서 조로친선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해 힘썼다. 그러던 야조브는 2020년 2월 25일 파란만장했던 한생을 마감하고 모스크바의 하늘 아래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향년 95세였다.
2020년 2월 25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야조브의 유가족들에게 위로전문을 보냈다. 위로전문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야조브가 “파쑈도이췰란드침략자들을 반대하는 성스러운 조국전쟁에 참가하여 위훈을 세웠으며 한생을 나라의 방위력강화에 헌신하여온 저명한 군사정치활동가, 참다운 애국자, 로병의 귀감”이었다고 회고하면서, 그가 “김정일 동지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흠모하면서 조로 두 나라 인민들의 친선의 정을 두터이하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으며, “그가 남긴 공적은 로씨야인민과 우리 인민의 기억 속에 길이 남아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20년 2월 27일 야조브의 영전에 자신의 명의로 된 애도화환을 진정하였다.
2. 야조브를 놀라게 한 105땅크사단
야조브가 별세하기 10년 전인 2010년 9월 1일, 조선의 온라인 대외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에 그의 조선방문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야조브가 안고 간 <105호 땅크>’라는 흥미로운 제목이 붙은 기사였다. 2007년 7월 말 평양고려호텔에서 있었던 일을 서술한 그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1997년 9월 초 평양국제공항에 도착하여 고위인사들로부터 영접을 받았던 야조브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그런데 야조브가 조선방문일정을 마치고 ‘105호 땅크’를 안고 모스크바로 돌아갔다는 제목을 읽고서는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기사에는 조선방문일정을 마치고 평양국제공항으로 나가기 직전, 야조브의 출국을 도와주기 위해 호텔숙소에 찾아온 조선인민무력성 소속 안내원과 야조브 사이에 주고받은 이야기가 수록되었다.
당시 야조브는 조선에서 기념품을 몇 개 샀는데, 그 가운데는 장난감 땅크도 있었다. 나중에 커서 야조브처럼 ‘땅크대장’이 되겠다고 하면서 장난감 땅크를 매우 좋아하는 여섯 살짜리 막내손자에게 줄 장난감 땅크였다. 세상에서 가장 센 <땅크>를 사달라고 조르던 막내손자의 모습을 기억하며 평양의 어느 기념품상점에서 고른 장난감 땅크인데, 크기가 좀 커서 여행가방의 절반을 차지했다. 꽉 들어찬 여행가방에 더 이상 넣을 수 없는 다른 기념품들을 옆에 밀어놓고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당시 83살 백전로장 야조브와 조선인민무력성 소속 안내원은 군사용어를 사용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안내원 - “비행장에 나갈 시간이 다 되였습니다. 이 물품들은 내놓고 가실 작정입니까?”
야조브 - “예, 아무래도 그래야 할가 봅니다. <전선>에서 제외된 <예비물자>니까요.”
안내원 - “필요하다면 <배비변경>을 하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야조브 - “<배비변경>이라? 어떻게요?”
안내원 - “<땅크> 하나만 <뒤계선>으로 돌려놓으면 <전선>에 많은 <전술적 공간>이 생길 것 같습니다.”
야조브 - “아, 그건 걸대로 안 됩니다. <땅크>가 없는 <전선>은 아무런 필요도 없습니다. 그 <땅크>는 꼭 <주타격방향>에 있어야 합니다.”
안내원 - “모스크바에도 장난감 땅크가 있겠는데, 귀국하는 길에 사면 되지 않습니까.”
야조브 - “물론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우리 막내손자에게는 꼭 조선의 <땅크>가 필요합니다. (포장지함을 풀어헤치고 ‘105’라는 번호가 새겨진 장난감 땅크를 꺼내 보이며) 그것도 이 <105호 땅크>가 말입니다. 내가 이 <105호 땅크>를 꼭 가져가자고 하는 것은 단순히 막내손자와 한 약속을 지키자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난 이 장난감 땅크를 통해 손자녀석에게 조선인민군 땅크병들의 고귀한 넋을 심어주자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이것이 사탕알보다 더없이 소중합니다.”
위의 기사에 따르면, 야조브는 조선에 머물고 있었던 2007년 7월 27일 전승절을 계기로 조선인민군 105땅크사단 지휘부를 참관하였다고 한다. 105땅크사단의 공식명칭은 근위서울류경수제105땅크사단이다. 명칭은 땅크사단이지만, 실제로는 군단급 기갑부대다. 야조브가 105땅크사단을 참관한 뒤에, 평양의 어느 기념품상점에서 구입한 장난감 ‘105호 땅크’를 그토록 소중히 여기면서, 그것을 자기 손자에게 선물로 주려고 하였던 데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105땅크사단을 참관할 때, 그 기갑부대가 6.25전쟁 시기에 남진공격을 주도하면서 1950년 6월 28일 서울에 가장 먼저 진입하여 중앙청 꼭대기에 공화국기를 휘날린 부대라는 사실과 6.25전쟁 중에 공화국영웅 19명을 배출한 최정예부대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고, 로씨야군이 운용하는 땅크보다 더 우수한 성능을 지닌 조선인민군의 땅크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땅크와 함께 한평생 전선을 누비며 화약내를 맡았던 백전로장 야조브였다. 사회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군사정변을 일으켰을 때도 땅크부대를 모스크바에 출동시켰던 야조브였다. 그처럼 땅크에 대해 누구보다 정통한 백전로장의 눈에 비친 조선인민군 105땅크사단은 정신력에서도, 무장력에서도 최강이었다. <사진 2>
105땅크사단의 정신력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주는 자료를 찾지 못한 나는 그 문제에 관한 서술을 생략하는 대신, 105땅크사단의 무장력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주는 자료들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야조브가 2007년 7월 27일 105땅크사단을 참관할 때,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조선의 3세대 땅크들인 ‘천마-215’와 ‘천마-216’이었다. 내가 2013년 6월 5일 평양에 있는 조선인민군 무장장비관을 참관하면서 수첩에 적어놓았던 기록을 이 글을 집필하기 위해 다시 찾아보니, ‘천마-215’ 땅크는 2003년에 개발된 것이고, ‘천마-216’ 땅크는 2004년에 개발된 것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로씨야나 미국 같은 땅크선진국들이 신형 땅크를 만들려면 개발기간이 10년 정도 걸리는데, 조선에서는 불과 1년 만에 신형 땅크를 개발하였다. 이것은 판매리윤을 따질 필요가 없고, 오직 생산목표에만 충실하면 되는 사회주의생산체계의 우월성을 보여준다. 판매리윤에 얽매여 생산목표를 세워야 하는 자본주의나라들에서 1년 만에 신형 땅크를 개발하는 것은 상상하지 못할 일이다.
야조브가 105땅크사단을 참관하면서 놀란 것은, 2007년 당시 105땅크사단에 배치된 ‘천마-215’ 땅크와 ‘천마-216’ 땅크가 로씨야군이 운용하는 T-80 땅크보다 더 우수한 성능을 가졌을 뿐 아니라, 당시 로씨야가 자랑하던 T-90 땅크의 성능과 맞먹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T-80 땅크는 1975년에 생산되기 시작하였고, T-90 땅크는 1992년에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로씨야가 만든 땅크보다 더 우수한 땅크를 조선이 만들었다는 말을 믿지 못하는 독자들이라면, 다음과 같은 자료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조선일보> 2002년 6월 16일 보도에 따르면, 조선에서는 로씨야군이 운용하는 T-90 땅크의 성능과 맞먹는 신형 땅크를 2002년 초에 개발하였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조선이 T-90 땅크의 성능과 맞먹는 신형 땅크를 2002년 초에 개발하였다고 보도했지만, 내가 2013년 6월 5일 조선인민군 무장장비관을 참관할 때 수첩에 적어놓았던 기록에 따르면, ‘천마-215’ 땅크는 2002년이 아니라 2003년에 개발되었다. <조선일보>는 ‘천마-215’ 땅크의 첫 시제품이 나온 2002년 초를 개발시점으로 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2003년에 개발된 ‘천마-215’ 땅크가 T-90 땅크와 맞먹는 성능을 가졌으므로, 2004년에 개발된 ‘천마-216’ 땅크는 T-90 땅크보다 더 우수한 성능을 가진 것이다.
조선인민군 땅크의 성능이 로씨야군 땅크의 성능보다 못하다는 것이 국제사회에 퍼져있는 고정관념인데, 그런 고정관념은 2003년 ‘천마-215’ 땅크의 출현으로 깨져나갔으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위에 인용한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1년 7월 31일 모스크바를 방문하기 위해 특별렬차를 타고 씨비리지역을 지나는 길에 옴스크에 있는 군수기업 옴스크트란스마쉬에 들러 T-80 땅크생산공정을 참관하였다고 한다. 참관 중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T-80 땅크의 성능을 구체적으로 요해하였는데, 로씨야의 땅크개발기술수준이 조선의 땅크개발기술수준보다 그리 높지 않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로씨야 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류경수땅크공장을 찾아가 옴스크트란스마쉬에서 만든 T-80 땅크보다 더 우수한 신형 땅크를 만들라는 과업을 주었다. 과업을 받은 류경수땅크공장은 T-80 땅크의 성능보다 우수하고, T-90 땅크의 성능과 맞먹는 신형 땅크를 2003년에 만들어냈다. 그 신형 땅크가 바로 ‘천마-215’다.
그런데 류경수땅크공장에서 2003년에 개발된 신형 땅크의 공식명칭을 알지 못한 한국의 언론매체들은 그 신형 땅크를 ‘폭풍호’라고 불렀다. 내가 참관한 조선인민군 무장장비관에는 ‘폭풍호’ 땅크가 전시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폭풍호’라는 명칭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조선의 무기수출회사인 조광무역회사는 ‘폭풍호’ 땅크를 해외에 수출한다는 광고를 온라인에 게재했는데, 한국의 언론매체들은 그 광고를 보고 ‘천마-215’ 땅크를 ‘폭풍호’ 땅크로 오인한 것으로 보인다. ‘폭풍호’ 땅크는 해외수출용으로 만든 것이므로, 조선에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해외수출용 무기는 자국에서 사용하는 무기에 들어있는 핵심첨단장비를 제외하고 판매하는 것이므로, 해외수출용 ‘폭풍호’ 땅크는 ‘천마-215’ 땅크에 비해 성능이 떨어진다.
류경수땅크공장은 ‘천마-215’ 땅크를 만든 때로부터 불과 1년밖에 지나지 않은 2004년에 T-90 땅크보다 성능이 더 우수한 또 다른 신형 땅크를 만들어냈으니, 그것이 ‘천마-216’ 땅크다. 2007년 7월 27일 105땅크사단을 참관하면서 T-90 땅크보다 더 우수한 ‘천마-216’ 땅크를 본 야조브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야조브가 2007년 7월 27일 105땅크사단을 참관한 때로부터 2년이 지난 2009년에 조선은 신형 땅크를 또 개발하였다. 그것이 ‘선군-915’ 땅크다. 2013년 6월 5일 내가 조선인민군 무장장비관 중무장전시실을 참관할 때, 일렬로 전시된, 조선에서 만든 땅크 10대 가운데 “주체98년식 중땅크 <선군-915>”라고 쓰인 해설판 뒤에 우람한 모습으로 서 있는 세계 최강 땅크를 보면서 묘한 감흥을 느꼈던 기억이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다.
3. 개마무사 철마군단과 고속기동 천마군단
먼 옛날 고구려사람들이 강대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개마무사 철마군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자료에 의하면, 고구려의 개마무사 철마군단은 5,000명으로 이루어졌는데, 기마병과 말이 모두 비늘식 철제갑옷(찰갑)으로 무장했다고 한다. 중국 진시황의 병마총에서 출토된 유물은 기마병와 말을 가죽갑옷으로 무장시켰음을 보여주었는데, 고구려의 개마무사 철마군단은 비늘식 철제갑옷으로 무장했던 것이다. 당시 중국의 제철기술로는 비늘처럼 얇고 가벼우면서도 방호력을 가진 최첨단 철제갑옷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가죽갑옷을 사용했다. 전문가들이 서울 아차산에 있는 고구려시기의 군사유적에서 출토된 철기를 분석하였더니, 고구려사람들은 최첨단 제철기술인 관강법으로 강철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처럼 고구려는 독자적인 철강기술로 고도의 철기문명을 발전시켰고, 개마무사 철마군단을 일으켜 강대국을 건설하였던 것이다.
먼 옛날 고구려가 철마군단으로 군사강국을 건설하였다면, 오늘 조선은 ‘천마군단’으로 군사강국을 건설하였다. 조선의 ‘천마호’ 땅크는 말 그대로 ‘하늘을 나는 말(天馬)’이다. ‘천마호’ 땅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기동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는 데 있다. 조선의 땅크들은 고속기동전에 최적화된 ‘천마’들이다. 조선은 강력한 엔진과 고성능 변속기를 만드는 고도의 기술을 가졌기 때문에 그런 ‘천마’를 만들어낸 것이다.
2004년 7월 9일 한국의 언론매체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5세기 고구려의 개마무사 철마군단에 관련된 유물들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고구려의 개마무사 철마군단은 12행 행군대오를 모두 남쪽을 향해 배치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개마무사 철마군단이 남진공격선봉대였음을 말해준다. 먼 옛날 고구려의 개마무사 철마군단이 남진공격선봉대였던 것처럼, 오늘 조선의 고속기동 천마군단도 역시 남진공격선봉대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서술할 필요가 있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10년 1월 5일 105땅크사단 관하 구분대의 땅크기동훈련을 현지지도하였다고 한다. 당시 언론매체에 실린 보도사진들을 보면, ‘중앙고속도로 춘천-부산 374km’라고 쓴 표지판, ‘김해’, ‘부산’, ‘창원’, ‘삼랑’이라고 쓴 여러 표지판들, ‘호남고속도로’라고 쓴 표지판이 곳곳에 서 있는 땅크훈련장에서 땅크들이 기동훈련과 포격훈련을 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남진공격기동훈련이었다. <사진 3>
그런데 당시 한국의 언론매체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왜 하필이면 강추위가 몰아친 2010년 1월 8일에 105땅크사단의 남진공격기동훈련을 현지지도하였는지 그 의도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구구한 억측들이 분석기사라는 미명을 쓰고 헛소문처럼 나돌았다. 그러나 조선에서 나온 자료들을 살펴보면, 사정을 파악할 수 있다. 2010년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60년 8월 25일 105땅크사단을 현지지도한 때로부터 50주년이 되는 해이고, 1월 8일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탄생일이다. 또한 조선에서 나온 자료들을 살펴보면, 1950년 6월 28일 38도선을 넘어 진격하여 서울을 점령하고, 7월 5일 미국군 제24보병사단 산하 ‘스미스특공대’와 맞붙은 오산전투에서 상대를 괴멸시킨 다음 곧바로 대전으로 진격하여 7월 20일 그 도시를 점령하고, 8월 31일 낙동강도하전투에서 앞장에 섰던 남진선봉부대가 바로 105땅크사단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위에 열거한 사실들을 종합하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탄생일에 105땅크사단의 남진공격훈련을 현지지도함으로써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조국통일위업을 물려주었다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05땅크사단의 남진공격훈련을 현지지도하였던 때로부터 2년이 지난 2012년 1월 8일 <조선중앙텔레비죤방송>이 방영한 기록영화는 2년 전에 있었던 사실을 보여주었다. 기록영화에 따르면, 2010년 1월 8일에 있었던 105땅크사단의 남진공격훈련은 김정은 대장(당시 직책)이 김정일 국방위원장 앞에서 직접 지휘한 실사격기동훈련이었다는 것이다. 김정은 대장은 땅크기동훈련을 지휘하는 중에 제951호 땅크에 탑승하여 직접 조종하였고, 달리는 땅크에서 포를 연발로 사격하면서 타격표적들을 명중시켰다. <유투브>에서 ‘백두의 선군혁명위업을 계승하시여’라는 제목의 기록영화를 시청할 수 있는데, 그 기록영화 장면들 가운데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10년 1월 8일 105땅크사단의 남진공격훈련을 지휘하는 김정은 대장의 모습을 보고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음을 알려주는 자막이 나온다.
“오늘은 선군혁명력사에 특기할 참으로 의의 깊은 날입니다. 오늘 우리 대장이 근위서울제105땅크사단에 가서 훈련지도를 하면서 직접 땅크를 몰고 포사격을 하였는데 새해 첫 포성을 그가 울린 셈입니다. 우리 대장이 울린 포성은 조국통일위업과 주체혁명위업을 백두산 총대로 굳건히 계승, 완성해나갈 드팀없는 신념과 의지를 내외에 선언한 승리의 포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거한 이후 비통에 잠긴 조선이 처음으로 맞이한 새해 첫날인 2012년 1월 1일 아침,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105땅크사단을 또 다시 찾았다. 2년 전, 땅크를 직접 몰고 땅크포를 쏘면서 조국통일위업을 계승할 결의를 다졌던 바로 그 곳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조국통일위업을 성취하려는 새로운 결의를 다졌던 것이다.
4. 돌격로 열어놓을 전투동원태세 갖췄다
그로부터 어느덧 8년 세월이 흘렀다. 그 기간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평화통일이냐 무력통일이냐를 결정해야 할 중대한 기회를 여러 차례 맞고 보냈다. 2018년에 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대화와 협상이 여러 차례 진행되었지만, 평화통일의 길을 가로막고 북침전쟁연습과 대북제재강화에 매달리는 미국의 대결광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또한 평화통일에는 관심이 없고 분단체제를 평화적으로 관리하려는 문재인 정부의 망상도 사라지지 않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대화와 협상은 2019년에 이르러 결국 파탄되고 말았다.
한반도의 정치군사상황이 이처럼 심각한 지경에 이른 2020년 2월 28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포병부대들, 해군부대들, 항공군부대들이 참가한 군종합동타격훈련을 지도하였다. 이번 군종합동타격훈련에 참가한 자행포와 방사포는 모두 90여 문이었는데, 지난 시기 군종합동타격훈련에 300여 문이 참가한 것에 비하면 3분의 1로 줄었다. 이런 사정은 이번 군종합동타격훈련에 포병무력보다 해군무력과 항공군무력이 더 많이 참가하였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조선의 언론보도사진들에는 군종합동타격훈련에 참가한 포병부대들의 사격장면만 보였고, 그 훈련에 함께 참가한 해군부대들의 포격장면이나 항공군부대들의 폭격장면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왜 공개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으나, 외부에 공개할 수 없는 중요한 무기체계들이 등장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진 4>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언제 어느 시각에 명령이 하달되여도 즉시 전투에 진입할 수 있게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는 군종부대들과 전선과 동부지구 방어부대들의 전투력에 대하여 감탄을 표시”하였다고 한다. “언제 어느 시각에 명령이 하달되여도 즉시 전투에 진입할 수 있게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평가는 이번 군종합동타격훈련이 불시에 내린 긴급명령에 따라 진행되었음을 말해준다.
원래 한미연합군은 북침전쟁연습을 오는 3월 9일부터 시작하려고 하였지만, 뜻밖의 괴질재앙이 확산되는 바람에 북침전쟁연습을 무기한 연기한다고 2월 27일에 발표하였다. 조선인민군은 한미연합군이 오는 3월 9일부터 북침전쟁연습을 시작할 것으로 예견하고, 이번 주간에 선제적 대응전쟁연습을 하려고 준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 시기에 겪었던 경험을 돌이켜보면, 한미연합군이 북침전쟁연습을 감행하려고 할 때마다, 조선인민군은 전시동원태세에 돌입하고 선제적 대응전쟁연습을 진행하였었다.
김정은 최고사령관이 전군에 전투동원태세돌입명령을 내리면, 지하갱도에 은폐된 미사일발사대차, 자행포, 방사포, 땅크, 장갑차, 전투기, 폭격기, 전투함선, 잠수함 등 각종 전투장비들이 발사준비, 출격준비, 출항준비를 갖추고, 출장이나 휴가로 부대를 떠난 전투원들이 모두 자대로 복귀하고, 군사지휘관들은 자택에서 부대로 출퇴근하지 않고 부대에서 24시간 비상대기상태에 들어가고, 전투원들은 전투복장을 한 채로 숙식해야 한다.
그런데 지난 2월 27일 한미연합군이 괴질재앙 때문에 북침전쟁연습을 무기한 연기한다고 발표하였으므로, 조선인민군도 전투동원태세에 돌입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김정은 최고사령관은 군종합동타격훈련을 실시하라는 명령을 내려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이 임의의 시각에 전투동원태세에 돌입할 준비를 갖추었는지 검열하였던 것이다.
이전에 조선의 언론매체들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화력타격훈련을 현지지도한 소식을 전하면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전투부대들의 화력타격훈련에 “대만족을 표시”하였다고 보도하였는데, 이번에는 “감탄을 표시”하였다고 보도하였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감탄을 표시한 것은,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이 조국통일대전에 즉시 돌입할 격동적인 전투동원태세를 갖추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붉은 군대의 백전로장 야조브에게 놀라움을 안겨주었던 고속기동 천마군단도 돌격로를 열어놓을 전투동원태세를 갖추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