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23

일본의 비수가 한국의 급소를 찔렀다

[한호석의 개벽예감](357)
자주시보 019년 07월 22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일본의 비수가 한국의 급소를 찔렀다
2. 트럼프의 단계적 압박수법 따라하는 아베
3. 109년 동안 계속되는 싸움 
4. 미국과 일본의 공모로 조작된 강화조약 
5. 다가끼와 사또가 체결한 불법조약
6. 한일기본조약을 파기해야 하는 이유
7. 부속협정을 파기해야 하는 이유


1. 일본의 비수가 한국의 급소를 찔렀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으로 광분하고 있었던 1943년 9월, 평양에 있는 어느 이발소에서 이발사 조수로 일하던 17살 소년은 월급도 많이 주고, 학교에도 갈 수 있다는 거짓말에 속아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가 도착한 곳은 오사까에 있는 일본제철소였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한 직후 소년은 월급도 많이 주고, 학교에도 갈 수 있다는 거짓말에 속았다는 사실을 이내 알았다. 그곳은 생지옥이었다. 일본인 관리자들은 조선인 징용자들에게 하루 먹을 식량을 사흘분으로 나눠주면서 하루 10시간씩 혹사시켰는데, 야구방망이처럼 생긴 ‘정신봉’으로 때리며 노예노동으로 내몰았다. 월급은 적금했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찾아갈 수 있다고 속이면서, 담배 두 갑을 살만한 돈만 월급으로 주었다. 

일제가 패망하고 노예노동에서 풀려나 서울에 돌아간 그 소년은 일흔 살이 넘은 노년기에 이르러서야 충격적인 사실을 알았다. 그것은 자신이 강제징용으로 노예노동을 했던 오사까 일본제철소가 자신에게 지급하지 않은 미불임금 460엔이 오사까공탁소에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이었다. 460엔을 당시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소를 열 마리를 살 수 있는 돈이다. 미불임금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74살이 되던 1997년 12월 다른 강제징용피해자 8명과 함께 미쯔비시중공업과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손해배상과 미불임금을 청구하는 소송을 벌였다. 그러나 일본 최고재판소는 그들에게 패소판결을 내렸고, 심지어 부산고등법원과 서울고등법원마저도 그들에게 패소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2012년 5월 24일 한국 대법원은 일본 최고재판소의 부당판결과 한국 고등법원의 부당판결을 뒤엎고, 강제징용피해자들에게 일본 기업이 배상해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그 역사적인 판결은 일제식민통치가 국가범죄라는 사실을 한국 대법원이 법적으로 공인한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일본 정부는 일제식민통치범죄를 공식적으로 사죄해야 하는 법적 의무가 생길 뿐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강제징용을 당했다고 한국 정부에 신고한 22만4,835명 피해자들에게 배상하고, 일제강점기에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갔던 한국인 피해자들에게도 배상해야 하는 법적 의무가 생기는 것이다. 

식민통치범죄를 영원히 덮어버릴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일본 정부는 당황하였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일제식민통치범죄를 드러내고 그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는 한국을 억누르기 위한 공격조치를 검토했다. 그들이 검토한 공격조치는 무엇인가?    

2013년 11월 14일에 발매된 일본의 우익주간지 <슈간분슌(週刊文春)>에 ‘한국의 급소를 찌른다’라는 매우 선정적인 제목의 특집기사가 실렸다. 특집기사는 한국인 강제징용피해자들에게 일본 기업이 배상해야 한다는 한국 대법원의 판결이 나온 것과 관련하여 “일본 기업이 손해배상금을 강제적으로 징수당하면 (일본의) 대항조치는 금융제재밖에 없다. 한국에는 대형은행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이 한 곳도 없고, 가장 큰 우리은행의 재정규모는 미쯔비시 도꾜은행의 10분의 1 이하다. 일본의 금융기관들이 한국에 대한 지원과 협력을 끊으면, 삼성도 하루 만에 무너질 수 있다”는 폭언을 늘어놓았다.

이 폭언에서 드러난 것처럼, 지금으로부터 6년 전에 벌써 아베 정권은 한국의 정당한 배상요구를 억누르기 위한 공격조치를 검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오늘 아베 정권은 날카로운 비수로 한국의 ‘급소’를 찌르기 시작하였다. <사진 1> 

▲ <사진 1> 2019년 7월 4일 아베 정권이 한국에 대한 경제재재를 발동하였다. 일본은 경제제재라는 비수로 한국의 급소를 찔렀다. 일본이 비수로 찌른 한국의 급소는 한국 경제의 대일종속이다. 일본이 대일종속이라는 급소를 비수로 찌르면 대일종속이 죽는 게 아니라 삼성전자가 쓰러지고, 종당에는 한국 경제가 죽게 된다. 사태는 심각하다. 이에 당황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7월 7일부터 11일까지 일본을 급히 방문하였다. 그는 도꾜에 머무는 동안 일본 은행가들과 만나 한일관계가 더욱 악화되는 것을 우려하였다고 한다. 위의 사진은 그런 사정을 보도한 일본 텔레비전 보도화면이다.     

6년 전, 일본의 주간지가 특집기사에 ‘한국의 급소를 찌른다’는 제목을 달아놓은 우연이 아니었다. 2012년 12월 26일에 집권한 아베 신조 총리와 그의 각료들은 일본이 덮어버린 일제의 식민통치범죄를 한국이 다시 들춰내어 한일관계가 정면충돌로 치닫게 될 때, 한국의 ‘급소’를 찔러버리면 한국을 간단히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것은 오판이 아니다. 불행하게도, 한국에게는 일본의 비수공격에 거의 무방비로 노출된 ‘급소’가 있다. 일본의 비수는 무엇이고, 한국의 ‘급소’는 무엇인가? 

일본의 비수는 경제제재이고, 한국의 ‘급소’는 한국 경제의 대일종속이다. 한국의 ‘급소’에 대해 말하자면, 한국 경제의 대들보라고 할 수 있는 전자산업이 일본의 전자산업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전자산업의 핵은 반도체다. 반도체산업이 발전해야 전자산업 전반이 발전하는 법이다. 한국 경제에서 그처럼 중요한 자리인 반도체산업의 형편은 어떠한가? 2019년 6월 25일 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가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도 한국의 반도체생산액은 122조9,084억원이고, 반도체소자생산액은 2조7,024억원이다. 또한 2018년도에 한국의 반도체부문수출액은 1,260억 달러에 이르렀는데, 이것은 전체 수출액 6,049억 달러의 20%를 차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2017년을 기준으로 한국에서 반도체장비를 국산화한 비률은 18.2%밖에 되지 않고, 반도체소재를 국산화한 비률도 50.3%에 그쳤다. 2017년을 기준으로 세계 반도체장비시장 점유률을 보면, 일본은 28.2%인데, 한국은 3.6%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커다란 격차는 한국이 일본산 반도체장비를 대량으로 수입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일본이 한국의 반도체산업을 좌우할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수출물량만 생각하면, 한국은 반도체강국으로 보이지만,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정반대의 상황이 보인다. 한국의 반도체산업은 체격이 크지만 체질과 체력은 매우 허약하다. 체질과 체력이 허약한 사람이 외부공격을 받으면, 어이없게 쓰러진다. 만일 한국의 허약한 반도체산업이 일본의 집중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면, 한국 경제 전반이 시들어 죽게 된다. 그런데 2019년 7월 4일부터 일본은 그런 한국의 반도체산업을 비수로 찌르는 치명적인 공격을 개시하였다. 사태는 심각하다. 

(2)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한국의 전자산업은 일본에게 종속되었다. 대일종속이라는 말은 한국의 전자제품생산업체들이 일본에서 수입한 핵심소재와 핵심부품을 조립하여 완제품을 만들고, 거기에 자기 상표를 붙여 세계시장에 판매한다는 뜻이다. 세계시장에서 가장 잘 팔린다는 삼성전자제품들을 뜯어보면, 일본산 핵심소재들과 핵심부품들이 들어있다. 이를테면, 액정텔레비전화면의 경우,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가 세계수출시장에서 1위와 2위를 각각 차지하지만, 거기에 핵심부품으로 들어가는 편광판의 소재로 쓰이는 필름(TAC)의 세계수출시장은 일본 기업들인 후지필름과 고니까 미놀타가 100% 장악하였다. 또한 세계수출시장에서 1위를 차지한 품목인 삼성전자의 지능손전화기(smart phone)를 보면, 터치패널은 스미또모화학의 제품이고, 적층쎄라믹콘덴서와 무선랜모듈은 무라다제작소의 제품이다. 또한 반도체 원판인 씰리콘 웨이퍼의 경우, 일본의 세계수출시장점유률은 70%인데, 한국이 수입하는 씰리콘 웨이퍼 수입량 중에서 일본산 수입량은 34.6%다.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한국 자동차기업들이 자동차에 들어가는 차량반도체를 국산화한 비율은 2~3%밖에 되지 않지 않고, 차량반도체에서 핵심부품인 전자제어장치(ECU)는 일본 덴소에서 수입한다.   


2. 트럼프의 단계적 압박수법 따라하는 아베

한국 경제는 속이 비어있는 강정을 닮았다. 기술자립도가 매우 낮고, 수출의존도가 너무 높아 대일종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일본이 대일종속이라는 급소를 더 강하게 찌르면, 한국의 경제는 쓰러질 것이다. 대일종속이라는 급소를 강하게 찔린 한국 경제가 쓰러지는 불길한 예상씨나리오는 한국에게 악몽이지만, 2019년 7월 4일 아베 정권이 한국의 반도체산업을 찌르는 경제제재를 발동한 것으로 하여 그 악몽은 현실로 다가섰다. 긴박해진 사정은 다음과 같다.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진 것처럼, 2019년 7월 4일 일본 경제산업성은 반도체생산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일본산 3대 핵심소재를 한국에 수출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경제제재를 발동하였다. 일본의 경제재재는 반도체생산에서 필수적인 3대 핵심소재인 감광액(포토 리지스트), 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 불화폴리이미드에 대한 수출허가절차를 까다롭게 만들어놓고 엄격히 관리하는 것이다. 일본 경제산업성이 까다로운 수출허가절차를 통해 엄격히 관리하는 것은 수출을 사실상 금지한다는 뜻이다.  

감광액을 생산하는 도꾜오까공업, JSR, 신에쯔화학, 고순도 불화수소를 생산하는 스텔라 케미파, 모리따화학공업, 그리고 불화폴리이미드를 생산하는 스미또모화학은 60~103년 전에 창설된 세계 굴지의 일본 기업들인데, 한국에 자회사나 합작사로 생산공장을 차려놓고 일본의 첨단기술로 반도체 핵심소재를 생산하여 삼성전자, SK하이닉스, LG디스플레이에 판매해왔다. 그러나 일본 경제산업성은 한국에 있는 일본 반도체기업의 자회사나 합작사가 생산하는 핵심소재를 한국에 판매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았으며, 다급해진 한국의 반도체기업들이 제3국에 설립한 생산공장을 통해 우회적으로 수입하는 것도 가로막았다. <사진 2>

▲ <사진 2> 위의 사진은 2018년 9월 25일 유엔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현지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진행하는 장면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일관계는 심각하게 악화되지 않았다. 그런데 2019년 6월 28일 일본 오사까에서 진행된 주요20개국 정상회의에서 두 정상은 싸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회의에 참석한 각국 정상들이 모여 기념사진을 촬영할 때,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8초 동안 악수만 하고 헤어졌다. 한일정상회담은 없었다. 한국을 외교거래를 할 수 없을 만큼 어리석은 나라라고 모욕하고 멸시하는 망언을 사석에서 늘어놓은 아베를 만나 정상회담이나 한다고 뭐가 해결될까? 일본이 경제재재라는 비수로 한국의 급소인 대일종속을 찔렀으니, 이제는 속 빈 강정 같은 수출강국타령은 그만하고, 대일종속에서 벗어나는 경제자립전략을 서둘러야 할 때다. 남과 북이 힘을 합하면 민족경제를 자립화하고, 자주통일강국의 민족자립경제체제를 구축할 수 있다. 굴욕적이고 불안정한 대일종속경제는 자주적이고 안정적인 민족자립경제로 대체되어야 한다. 민족공동번영의 길이 거기에 있다.     

이러한 경제제재로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된 것은 삼성전자다. 삼성전자는 네덜란드의 세계적인 기업인 ASML이 2018년에 생산한, 대당 가격이 1,500억원이나 하는 극자외선(EUV)설비 12대를 1조8000억원을 들여 수입하였다. 이 초고가 극자외선설비는 삼성전자가 차세대반도체(시스템반도체)를 생산하는데 필수적인 최첨단 설비다. 차세대반도체는 4차 산업혁명을 추진하기 위한 필수품목이다. 현재 차세대반도체부문에서 대만적체전로제조공사(TSMC)는 세계시장점유률을 49%로 끌어올려 세계 1위이고, 시장점유률이 19%인 삼성전자는 세계 2위다. 대만적체전로제조공사와 경쟁하는 삼성전자는 극자외선설비를 가동하여 2030년까지 차세대반도체부문에서 세계 1위로 올라서려는 야심만만한 도전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삼성전자가 극자외선설비를 가동하려면 자체로 만들지 못하는 감광액을 도꾜오까공업, JSR, 신에쯔화학에서 전량 수입해야 한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일본의 경제제재에 가로막혀 감광액을 수입하지 못하게 되었고, 1조8000억원을 들여 수입한 극자외선설비들도 멈춰서 있다. 

삼성전자가 주도하는 전자산업만 피해를 입는 게 아니다. 2019년 7월 9일 한국의 중소기업중앙회가 269개 중소기업들을 상대로 진행한 설문조사결과를 공개하였는데, 일본의 경제제재가 지속되면 한국의 중소기업 가운데 5.9%는 1개월도 버틸 수 없고, 23%는 1개월 이상 3개월까지 버틸 수 있고, 30.1%는 3개월 이상 6개월까지 버틸 수 있고, 40%는 6개월 이상 버틸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의 중소기업 가운데 46.8%는 일본의 경제제재에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일본 경제산업성이 지난 7월 4일에 발동한 경제제재는 2단계 조치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한국이 1단계 제재를 받고서도 계속 버티면, 2단계 제재를 발동하겠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아베 정권은 한국이 굴복할 때까지 추가제재를 가중시키면서 최대압박을 가하려는 것이다. 평소에 트럼프에게 붙어 돌아가며 아첨하는 아베는 경제제재에서도 트럼프의 단계적 압박수법을 따라하고 있다. 

일본이 노리는 2단계 제재 가운데서 한국 경제에 치명적인 것은 돈줄을 끊어버리는 금융제재다. 2019년 7월 9일 한국의 경제전문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 기업들이 일본 금융기관들로부터 빌린 융자액은 2018년 9월 현재 586억달러(69조1773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한국에 있는 일본금융기관들로부터 248억달러를 빌렸고, 해외에 있는 일본금융기관들로부터 338억달러를 빌린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일본이 금융제재를 발동하여 한국의 돈줄을 끊어버리면, 한국 경제는 수습하기 힘든 혼란에 빠질 것이다. 지금 아베 총리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한국 경제가 무너지는 꼴을 보든지 아니면 일본에게 굴복하든지 양자택일을 하라고 압박하는 것이다. 사태는 심각하다.   


3. 109년 동안 계속되는 싸움   

2013년 11월 14일에 발매된 일본우익주간지 <슈간분슌>에 실린 ‘한국의 급소를 찌른다’라는 선정적인 제목의 특집기사에는 아베 총리 주변에 있는 어느 소식통이 전한 이야기가 있다. 소식통의 말에 따르면, 언젠가 아베 총리는 “중국은 어처구니없는 나라지만, 아직은 이성적인 외교거래를 할 수 있으나, 한국은 단지 어리석은 나라일 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망언은 일본이 한국과 중국을 각각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그들의 시각으로 보면, 중국은 어처구니없지만 외교거래는 할 수 있는 존재로 보이고, 한국은 외교거래마저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리석은 존재로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지난날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조선민족을 멸시하였던 일제침략자들의 범죄심리가 아베 총리에게 전이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중국 대륙에 침략전쟁의 불을 지르고 중화민족을 멸시하였던 일제전범들의 범죄심리가 아베 총리에게 전이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일본의 범죄심리에 따르면, 한국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일제식민통치범죄를 지적하면서 일본을 자극하고 있으므로, 그처럼 어리석게 구는 한국을 경제제재로 압박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일본은 일제식민통치범죄를 사죄하고 그에 합당한 배상을 하기는커녕 되레 한국을 멸시하고, 한국 경제를 질식시키려는 경제제재를 발동하였다.   

그런 멸시와 압박을 받은 한국은 격분했지만, 격분만으로는 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 한일관계에서 파열음을 일으키는 근본원인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해결방도를 찾아야 할 것이다. 

한일관계에서 파열음을 일으키는 근본원인은 한일관계사에서 찾을 수 있다. 한일관계사를 돌이켜보면, 한일관계를 국제법적으로 규정한 세 개 조약이 눈길을 끈다. 한일관계는 바로 이 조약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이 1910년 8월 22일에 조인하고, 8월 29일에 발효시킨 한일병합조약이 있다. 창덕궁에서 진행된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에서 한일병합조약체결문제가 논의되었다. 그 문제에 대해 각료 8명은 찬성하였고, 각료 1명은 반대하다가 퇴장당했다. 그 직후, 일왕 메이지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조선통감 데라우찌 마사다께는 순종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자기 관저로 불러 한일합병조약문을 함께 조인하였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생각하면, 한일합병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조약을 체결한 형식과 절차에서 불법성이 없었던 듯하다. 

그런 까닭에 한일병합조약에 따르면, 일본제국이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탄한 것이 아니라, 대한제국이 자진해체되고 일본제국에게 자발적으로 통합되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일본은 바로 그런 논리를 들고 나와 한일병합조약체결이 합법이었다고 강변한다. 

만일 일본이 강변하는 것처럼 한일병합조약체결이 합법이라면, 일제식민통치도 합법으로 되고, 조선인들을 징병, 징용, 학병, 종군위안부로 끌어간 것도 합법으로 되는 것이다. 만일 일본이 강변하는 것처럼 한일병합조약체결이 합법이라면, 일제식민통치체제를 타도하기 위해 목숨 바쳐 투쟁한 조선의 항일무장투쟁과 항일독립운동은 모두 불법으로 되는 것이며, 항일선렬들도 불법행위자로 되는 것이다. 만일 일본이 강변하는 것처럼 한일합병조약체결이 합법이라면, 한국은 일본에게 식민통치피해를 사죄하고 배상하라고 요구하지 못하게 된다. <사진 3>

▲ <사진 3> 위의 사진은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이 1910년 8월 22일에 조인한 한일병합조약문 일부를 촬영한 것이다.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의 서명날인과 조선통감 데라우찌 마사다께의 서명날인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러나 한일병합조약은 조약으로 성립될 수 없는 불법조약이다. 왜냐하면, 조약체결당사자인 이완용이 조약을 체결할 법적 자격과 권한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순종이 그를 내각총리대신에 임명했어야 적법인데, 이또 히로부미가 그를 임명했으니 임명 자체가 불법이다. 또한 이완용은 당시 일제의 무력강점과 식민통치를 반대한 조선민족 절대다수의 의사를 배반한 매국역적이었으므로 조약을 체결할 법적 자격과 권한을 갖지 못했다. 조약을 체결할 법적 자격과 권한을 갖지 못한 부적격자가 체결한 한일합병조약은 원천무효다.     

한국에서는 한일합병조약이 합법이라고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일본에서는 한일합병조약이 합법이라는 인식이 일반화되었다.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된 때로부터 109년이 지난 오늘 한국은 조약체결이 불법이라고 주장하고, 일본은 조약체결이 합법이라고 주장한다.  

가장 큰 쟁점은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한 당사자에게 조약을 체결할 수 있는 법적 자격과 권한이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이 입증하는 것처럼, 조약체결당사자인 이완용은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할 법적 자격과 권한을 갖지 못했다. 왜냐하면, 일제가 조선을 강점, 병탄하기 위해 그를 내각총리대신에 불법적으로 임명하였기 때문이다. 순종이 임명했어야 적법인데, 이또 히로부미가 임명했으므로 불법이다. 이완용은 불법적으로 내각총리대신에 임명되었으므로, 조약체결당사자로서 법적 자격과 권한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조선민중은 이완용이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이전, 친일반민족행위를 자행하기 시작한 직후부터 그를 매국역적으로 심판하고, 그를 처단하려고 하였다. 그의 매국역적행위를 보고 격노한 민중은 1907년 6월과 7월 두 차례나 이완용의 집에 몰려가 불을 지르면서, 그를 체포, 처단하려고 하였다. 그 때마다 이완용과 그의 가족은 남산 왜성대로 피신하여 목숨을 건졌다. 민중은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매국역적 이완용을 처단하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가두시위, 허수아비화형식, 규탄집회를 계속 진행하였고, 열혈청년들은 그를 처단하기 위한 암살단을 곳곳에서 조직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항일의병장 안중근은 중국 하얼빈 역두에 나타난 이또 히로부미에게 정의의 총탄을 발사하여 그를 처단하였고, 1909년 12월 22일 항일투사 이재명은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벨지끄황제추도식에 참석하고 나오는 이완용의 가슴팍에 정의의 칼을 꽂았다. 치명상이었는데, 당시 서울을 방문 중이던  일본인 외과의사들이 두 달 동안 치료해주는 바람에 겨우 목숨을 건졌다. 자상후유증에 시달리던 이완용은 1926년에 죽었다.

위와 같은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완용은 당시 조선민족 절대다수의 의사를 배반한 매국역적이었고, 일제침략자들이 불법적으로 임명한 허수아비 내각총리대신이었으므로, 그에게는 조약을 체결할 법적 자격과 권한이 없다. 조약을 체결할 법적 자격과 권한을 갖지 못한 부적격자가 체결한 한일합병조약은 원천무효다.  


4. 미국과 일본의 공모로 조작된 강화조약    

1951년 9월 8일 미국 쌘프랜시스코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교전국 48개국과 패전국 일본이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강화조약이 체결된 것으로 하여 제2차 세계대전의 교전관계가 국제법적으로 종식되었다. 교전국과 패전국이 교전관계를 국제법적으로 종식시키는 것은, 전쟁 중에 패전국이 강점했던 점령지를 교전국에게 되돌려주는 영토귀속문제를 국제법적으로 해결하는 것이고, 전쟁 중에 패전국이 교전국에게 입힌 전쟁피해에 대한 배상문제를 국제법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그처럼 중대한 조약을 체결하는 당사자로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교전국이 아니라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비록 교전국 지위를 갖지 못했더라도, 교전단체 지위를 가졌더라면, 조약체결당사자로 될 수 있었지만, 쌘프랜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되던 1951년 당시 한국 정부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각료가 한 명도 없었다.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과 초대 무임소장관 지청천이 대일전쟁에 참전한 적이 있었지만,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인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초까지 대일전쟁에 참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던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에서 광복군이 창설되었을 때, 이범석과 지청천은 광복군 고위지휘관으로 취임하였지만, 그들이 지휘한 광복군은 일본군과 한 번도 교전하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군과 교전하였던 조선의 유일한 교전단체는 조선인민혁명군이었고, 그 교전단체의 주체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건하였으므로, 쌘프란시스코 강화조약체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교전국으로 참가하여야 마땅한 일이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미국과 국교를 맺지 않았으므로, 조약체결을 주도한 미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조약체결에 참가시키지 않았다. <사진 4>

▲ <사진 4> 위의 사진은 1951년 9월 8일 일본 총리 요시다 시게루가 쌘프랜시스코 강화조약문에 서명하는 장면이다. 이 강화조약이 체결된 것으로 하여 제2차 세계대전의 교전관계가 국제법적으로 종식되었고, 전후 영토귀속문제와 전후 전쟁피해배상문제가 국제법적으로 해결되었다. 그런데 일제침략전쟁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우리 민족이 배제된 채 쌘프랜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쌘프랜시스코 강화조약체결은 전쟁범죄국이며 식민통치범죄국인 일본에게 행운이었고, 그들의 침략전쟁과 식민통치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우리 민족에게는 불운이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 민족에게 불운을 안겨준 쌘프랜시스코 강화조약이 박정희 친일독재정권과 사또 우익정권이 체결한 한일기본조약의 모체조약으로 되었다는 사실이다. 미국과 일본의 공모로 조작된 강화조약은 오늘도 우리 민족에게 불행과 고통을 강요하고 있다.     

일제침략전쟁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우리 민족이 배제된 채 쌘프랜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되었으므로, 그 조약에서 한반도 영토귀속문제(독도를 한국 영토로 귀속시키는 문제)에 관한 논의, 그리고 일제침략전쟁에서 우리 민족이 입은 막대한 전쟁피해를 배상하는 문제에 관한 논의는 완전히 배제되거나, 일본의 의사대로 부당하게 처리되고 말았다. 쌘프랜시스코 강화조약체결은 전쟁범죄국이며 식민통치범죄국인 일본에게 행운이었고, 그들의 침략전쟁과 식민통치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우리 민족에게는 불운이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 민족에게 불운을 안겨준 쌘프랜시스코 강화조약이 박정희 친일독재정권과 사또 우익정권이 체결한 한일기본조약의 모체조약으로 되었다는 사실이다. 미국과 일본의 공모로 조작된 강화조약은 오늘도 우리 민족에게 불행과 고통을 강요하고 있다. 


5. 다가끼 마사오와 사또 에이사꾸가 체결한 불법조약

한반도에서 전쟁의 불길이 치솟고 있었던 1951년에 시작된 이후 장장 14년 동안 실무협상을 무려 1,500여 차례나 진행한 끝에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었다. 한국에게 불행만을 안겨준 그 조약이 체결된 날은 1965년 6월 22일이다.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실무협상이 그처럼 오랜 기간 지속되었던 까닭은 이승만 친미독재정권이 일본에게 강경한 태도를 취하는 바람에 협상이 진척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그런 게 아니다. 1949년에 이승만 친미독재정권이 처음으로 작성한 ‘배상조서’에는 일제식민통치범죄에 대한 배상을 청구하는 문제가 전혀 기록되지 않았고, 1950년 10월 주일대표부 대일강화조사위원회가 작성한 ‘대일강화조약에 대한 기본태도와 그 법적 근거’라는 제목의 문서에는 일제의 식민통치조약들이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일제식민통치에 대해서는 “선택적으로 추인 또는 묵인”할 수 있다고 서술되었다. 이승만 친미독재정권은 1952년 2월 20일에 진행된 한일 재산 및 청구권 문제 분과위원회 제1차 회의에서 일제식민통치피해에 대한 배상청구를 포기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일제강점기에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하면서 일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를 써서 바쳤고, 졸업 후에는 일제침략군에 입대하여 복무하였던 친일민족반역자 박정희(다가끼 마사오)가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찬탈하였다. 그때부터 한일관계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1962년 11월 11일 미국 대통령 존 케네디의 초청을 받고 워싱턴으로 가는 길에 도꾜를 방문한 박정희는 일본 총리 이께다 하야또와 비밀회담을 진행하였다. 케네디가 박정희를 백악관에서 만나주는 조건으로 요구한 것은, 이께다를 먼저 만나보고 자기에게 오라는 것이었는데, 박정희는 그 요구를 따랐다. 도꾜 비밀회담에서 이께다는 식민통치피해배상금이 아닌 경제협력자금을 주겠다고 하면서, 그것도 5,000만 달러밖에 주지 않을 것이며, 현찰지급이 아니라 산업시설을 건설해주겠다는 망언을 늘어놓았다. 

1962년 11월 박정희의 심복인 김종필(당시 중앙정보부장)과 일본 관방장관 오히라 마사요시가 밀약을 맺었다. 밀약은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무상자금 3억 달러, 정부 차관 2억 달러, 민간신용공여 1억 달러를 받는다는 것이었는데, 밀약문서에는 대일청구권이라는 말이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이것은 박정희 친일독재정권이 배상금을 받아내려던 것을 포기하고, 일본의 요구에 굴복하여 경제협력자금을 받아내기로 밀실담합하였음을 뜻한다. <사진 5> 

▲ <사진 5> 위의 사진은 1965년 12월 17일 박정희가 청와대에서 한일기본조약 협정비준서에 서명하는 장면이다. 한일기본조약은 1965년 6월 22일에 체결되었고, 협정비준서는 12월 17일에 조인되었고, 이튿날 조약체결쌍방이 교환하였다. 위의 사진에는 협정비준서에 서명하는 박정희 곁에 국무총리 정일권, 비서실장 이후락, 외무장관 이동원, 주일대사 김동조 등이 둘러서있는 모습이 보인다. 박정희는 일제강점기에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군 육군소위로 복무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고, 정일권은 봉천군관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군 장교로 복무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고, 이후락은 일본항공기정비학교를 졸입하고 일본 육군 하사로 복무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고, 김동조는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의 저항을 일본인들에게 밀고한 공로로 조선인들에게 식량과 생필품을 배급하는 전시책임자가 된 친일반민족행위자다.     

박정희 친일독재정권은 굴욕적인 한일기본조약체결을 반대하는 민중의 투쟁을 경찰폭력으로 짓누르고 1965년 6월 22일 사또 우익정권과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였다. 

1962년 11월 박정희-이께다 비밀회담으로 한일기본조약체결을 위한 협상이 재개되었는데, 그로부터 불과 3년 뒤인 1965년 6월에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된 것은 협상이 매우 신속하게 마무리되었음을 말해준다. 신속하게 마무리된 원인은 무엇인가? 그 원인은 배상을 포기하고 경제협력자금을 받아내 경제개발을 추진하려는 박정희의 무분별한 욕망, 또는 한일관계를 정상화하여 미국이 관리하는 동북아시아 반공반소진영을 강화하려는 백악관의 전략 등으로 설명되는데, 거기에 더하여 일본의 뇌물을 받아먹고 매수된 박정희가 일본의 요구를 받아주는 바람에 한일기본조약이 그처럼 신속히 체결되었다는 설명도 가능하다.  

일본이 박정희를 뇌물로 매수하였다는 사실은 미국 중앙정보국이 1966년 3월 18일에 작성한 비밀보고서에 들어있다. ‘한일관계의 미래’라는 제목의 비밀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은 1961년부터 1965년까지 민주공화당(당시 총재는 박정희)에게 총 6,600만 달러를 주었고, 한국 정부가 방출한 쌀 60,000톤을 일본에 수출한 한국 기업 8개도 민주공화당에 115,000달러를 상납했다고 한다. 한일기본조약은 뇌물수수와 검은 뒷거래로 체결된 불법조약이다.  


6. 한일기본조약을 파기해야 하는 이유

한일기본조약은 일제식민통치범죄를 사면해주고, 한국의 독도영유권을 포기하게 만들고, 일본에게 받아내야 할 식민지피해배상청구를 포기하게 만든 불법조약이며, 민족의 존엄과 자주성을 훼손한 반민족적 조약이다. 개정협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불법적이고 반민족적이다. 그 불법조약 중에서 이 글의 주제에 맞춰 일제식민통치범죄 및 한국의 대일청구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박정희 친일독재정권은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할 때, 일본의 강도적 요구를 받아주면서 일제식민통치범죄를 합법화하였다. 이것은 용납할 수 없는 반민족적 죄악이다. 한일기본조약 제2조에는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명기되었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일제가 조작한 식민통치조약 및 협정은 처음부터 무효인데도, 박정희 친일독재정권은 “이미(already) 무효임을 확인한다”라고 명기하려는 일본의 교활한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미 무효”라는 말은 “처음부터 무효”라는 말을 쓰지 않기 위해 일본이 의도적으로, 교묘하게 집어넣은 대체용어다. 다시 말하면, 일제가 조작한 식민통치조약 및 협정은 원래 합법적으로 체결된 것인데,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망으로 무효화되었다는 일본의 강도적 요구를 박정희 친일독재정권이 받아들인 것이다. <사진 6>  


▲ <사진 6> 위쪽 사진은 1944년 어느 날 일본 홋까이도 비바이탄광에 끌려가 노예노동을 강요당한 조선인 강제징용피해자들이 찍은 기념사진이고, 아래쪽 사진은 일제강점기에 생지옥 같은 탄광노동에 내몰린 광부가 막장에서 채탄작업을 하는 장면이다. 일제강점기에 악명 높은 전범기업이었던 미쯔비시가 운영한 비바이탄광에는 조선인 75명이 징용으로 끌려가 노예노동을 강요당했는데, 그 가운데서 7명은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었다. 위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은 10대 소년들이다. 일제는 조선인 780만명을 12,627개소의 작업장에 끌어가 노예노동을 강요하였다. 강제징용으로 혹사당하다가 억울하게 희생된 조선인은 15만명에 이른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을 강제징용한 전범기업들 가운데 지금도 남아있는 기업은 미쯔비시, 미쯔이, 스미또모, 히다찌, 닛산, 마쯔다, 도요다, 니콘, 도시바, 가네보, 기린, 파나소닉 등 299개나 된다. 우리는 일제침략자들이 우리 선조에게 자행한 극악하고, 야만적인 식민통치범죄를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하며, 자주통일강국을 세워 반드시 결산해야 한다.     

박정희 친일독재정권과 사또 정권이 한일기본조약 제2조에서 식민통치조약 및 협정체결을 합법화하였기 때문에, 조선을 무력으로 강점하고 폭압과 약탈을 자행한 일제식민통치는 국가범죄가 아니라 합법통치로 되었고, 그에 따라 일본은 식민통치범죄를 한국에게 공식적으로 사죄해야 할 법적 책임에서 벗어났고, 일제가 조선에게 입힌 식민통치피해를 배상해야 할 법적 책임에서도 벗어났다. 바로 이것이 한일기본조약체결 이후에 등장한 일본의 역대 정권들이 식민통치범죄를 공식적으로 사죄하라는 한국의 요구를 무시하는 국제법적 근거이며, 식민통치에서 발생한 피해에 대한 배상을 거부하는 국제법적 근거다.  

그러므로 한일기본조약이 존치되는 한, 일본은 식민통치범죄를 사과하라는 한국의 요구도 받아주지 않을 것이고, 식민통치피해를 배상하라는 한국의 요구도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한국이 대일관계에서 민족적 존엄과 자주권을 수호하려면, 그리고 한일관계를 올바르게 재정립하려면 불법조약을 파기해야 마땅하다.


7. 부속협정을 파기해야 하는 이유

박정희 친일독재정권과 사또 우익정권은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면서, ‘한일 재산 및 청구권문제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을 부속협정으로 체결했다. 당시 체결된 다른 부속협정들도 몇 개 있지만, 이 글에서는 글의 주제에 맞춰 이 부속협정에 대해서만 논한다. 

협정명칭부터 반민족적이다. 협정명칭을 ‘식민통치피해배상청구에 관한 협정’이라고 해야 공명정대하고 정당한데, 느닷없이 ‘재산’이라는 말이 협정명칭에 들어갔다. ‘재산’은 무엇을 뜻하는가? 여기서 말하는 ‘재산’은 패망한 일제가 식민지조선에서 떠나갈 때, 미처 가져가지 못한 자기들의 부동산과 대형 설비를 뜻한다.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협상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에 박정희 친일독재정권이 대일청구권을 거론하면, 일본은 그에 맞서 패망한 일제가 식민지조선에 남겨둔 재산반환권을 들고 나왔다. 그들은 일제가 소유한 ‘재산’과 한국이 청구한 배상을 맞바꿔 상쇄하자는 궤변을 늘어놓았는데, 박정희 친일독재정권은 그 궤변을 받아주었다. 그래서 일본이 한국에게 요구한 재산문제와 한국이 일본에게 요구한 청구권문제가 상쇄되는 방식으로 해결되었다는 내용이 부속협정에 들어간 것이다. <사진 7>

▲ <사진 7> 이 사진은 1945년 5월 28일 미국 대중잡지 '라이프'에 실린 사진이다. 사진에 보이는 것은 일본 오끼나와 어느 바닷가에 서 있는 강제징용피해자들의 합동묘지 나무표말이다. 일제강점기 남양군도에 강제징용된 조선인은 5,000명 이상이었다. 조선총독부는 남양군도로 이주하면 10년 뒤에 농지를 주겠다고 속여 그들을 배에 태웠다. 남양군도로 끌려간 조선인들은 비행장건설, 요새건설, 사탕수수재배에 동원되어 노예처럼 혹사당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남양군도의 조선인 징용피해자들은 뱃길이 끊긴 작은 섬들에 고립되어 미국군의 폭격으로 죽고,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었다. 지금도 남양군도에는 아이고다리라고 부르는 다리들이 여러 개 있다. 남양군도로 끌려간 조선인 장제징용피해자들이 교량건설의 고된 노역으로 너무 지치고 힘들 때마다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끝없이 탄식하였는데, 그 탄식소리를 들은 원주민들은 다리이름을 아이고다리라고 붙인 것이다. 1945년 3월 18일 간악한 일제는 남양군도 마셜제도에 끌려가 노예노동을 강요당하던 조선인들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저항하자, 중무장한 토벌대를 보내 집단학살하는 극악무도한 만행을 저질렀다.     

거기에 더하여, 일본은 한국에게 식민통치피해를 배상하는 게 아니라, 한국에게 그 무슨 ‘독립축하금’이라는 것을 주겠다는 황당한 궤변을 꺼냈는데, 그것이 통하지 않자, 나중에는 경제협력자금을 주겠다는 또 다른 궤변을 꺼내놓았다. 일본이 꺼내놓은 그 궤변도 그 부속협정에 들어갔다.  

부속협정에 따르면, 일본은 1,080억엔(3억달러)을 향후 10년 동안 무상으로 한국에 제공하고, 720억엔(2억달러)를 향후 10년 동안 유상으로 한국에 빌려주는 것으로 한일청구권문제를 “완전히, 동시에, 최종적으로” 해결했다는 것이다. 이런 황당한 궤변을 합법화해준 부속협정이 존치되는 한, 한국은 일본에게 식민통치피해를 배상하라는 요구를 하지 못하게 된다. 한국이 일본에게 식민통치피해를 배상하라고 요구할 때마다, 일본은 1965년에 체결된 한일기본조약 부속협정에서 “완전히, 동시에, 최종적으로” 해결된 문제를 왜 자꾸 번복하면서 성가시게 만드는가 하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한국이 대일관계에서 민족적 존엄과 자주권을 수호하려면, 그리고 한일관계를 올바르게 재정립하려면, 불법협정을 파기해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