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8/11

해방은 1945년 8월 16일 하루뿐이었다

[한호석의 개벽예감](168)
자주시보 2015년 08월 10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1945년 8.15 이후 38도선 이남의 민심
2. 두 차례 연속 핵참화를 입고서도 즉각 항복하지 않은 일제
3. 일왕의 8.15 라디오방송은 항복방송이 아니었다
4. 미주리호 함상의 항복문서조인식은 희대의 기만극
5. 점령군 군용기편으로 귀국한 조선총독
6. 포츠담 회의에서 미국이 꾸민 음모
7. 미국을 위해 총을 쏘고, 미국인보다 앞서 피 흘리는 군사기지

▲ <사진 1> 이 사진은 1945년 8월 16일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의 당시 명칭)에서 석방된 항일운동가들이 환영인파 속에서 만세를 부르는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석방이 해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안재홍의 말대로, 남조선에서 해방은 항일운동가들이 석방된 바로 그날 하루뿐이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1. 1945년 8.15 이후 38도선 이남의 민심

올해도 어김없이 8.15가 다가왔다. 해마다 8.15를 맞는 한국인들은 일제식민통치로부터 1945년 8월 15일에 해방되었다고 믿고 있지만, 그것은 주관적 믿음이지 객관적 사실은 아니다. 한국인들은 올해 70번째 8.15를 맞았으나, 한국에서 광복절이라고 부르는 8.15는 해방의 날이 아니다. 8.15가 해방의 날이라고 가르쳐온 주입식 역사교육에 의해 한국인들은 8.15를 해방의 날이라 믿는 것이지, 실제로 그날은 해방의 날이 아니었다. <사진 1>

8.15가 해방의 날이 아니었다는 말은 1945년 8월 15일이 해방의 날이 아니었으나 그날 이후 일정한 시기가 지난 뒤에 해방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1945년 8월 15일로부터 70년이 지난 오늘까지 여전히 해방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왜 그런 것일까?
아래에 인용하는 두 사람의 발언은 이제껏 8.15에 대해 알고 있었던 한국인들의 역사인식이 무지와 오해에 지나지 않았음을 드러내준다.

여기에 인용하는 첫 번째 발언은 일제강점기에 항일운동가로 활동하였고 8.15 직후 38도선 이남에서 우파정치인으로 활동하였던 안재홍이 남긴 말인데, 그는 “남조선에서 해방은 1945년 8월 16일 하루뿐이었다”고 말했다.

여기에 인용하는 두 번째 발언은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2006년에 발굴한 2,000여 장의 편지들 가운데 어느 편지의 일절인데, 그 편지들은 1947년 8월 미국 대통령 특사자격으로 사절단을 이끌고 서울을 방문했던 앨벗 웨드마이어(Albert C. Wedmeyer)에게 38도선 이남에 살던 일반인들이 보낸, 당시의 민심을 직접적으로 반영한 자료다. 그 편지에는 “1945년 8월 15일 이후 순간적으로 해방의 맛을 보았으나 이제 와서는 구속과 고통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고 쓰여 있다.

위의 두 인용문이 말해주는 것처럼, 1948년 8월 15일 38도선 이남에 분단정부가 세워지기 전 남조선이라 불렀던 지역의 민심은 8.15를 해방의 날이라고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1945년 8월 15일을 해방의 날로 여기지 않은 남조선의 민심은, 1945년 8월 15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남조선이 여전히 식민통치를 받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1948년 8월 16일부터 오늘까지도 그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1948년 8월 15일부터 오늘까지 대한민국에서 자유를 누려왔다고 생각하는 한국인들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8.15가 해방의 날이 아니라는 말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8.15가 해방이 아니라고 여겼던 70년 전 남조선의 민심이 한국인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져서 그 말이 이해되지 않는 것이지, 당시의 그런 민심은 8.15를 전후하여 복잡하게 전개된 사회정치상황을 정확히 반영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8.15를 전후하여 복잡하게 전개된 사회정치상황을 살펴보면, 8.15를 해방의 날로 여기지 않았던 당시 남조선의 민심을 넉넉히 이해할 수 있다.
 
 
2. 두 차례 연속 핵참화를 입고서도 즉각 항복하지 않은 일제

1945년 3월 10일 미국은 B-29 폭격기 344대를 동원하여 일본 도꾜를 맹폭하였다. 도꾜대공습으로 10만 명 이상이 사망하는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었지만 일제는 ‘국체호지(國體護持)’를 외치고 발악하면서 순순히 항복하지 않았다. 미국은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핵탄을 투하하였고, 그로부터 사흘 뒤 일본 나가사끼에 두 번째 핵탄을 투하하였으나, 일제는 두 차례 연속 핵참화를 입고서도 즉각 항복하지 않았다. 미국의 핵탄투하에 놀란 일제가 무조건 항복하였다는 기존 인식은 미국식 역사교육에 의해 주입된 착오다. 일제가 항복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미국의 핵탄투하가 아니라 소련의 대일전쟁이었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은 대일선전포고를 내고 대일전쟁에 돌입하였는데, 2014년 9월 9일 일본 궁내청이 공개한 ‘쇼와천황실록’에 따르면, 일왕 히로히도(裕仁)는 1945년 8월 9일 오전 9시 37분 소련군이 대일전쟁을 개시하였다는 긴급보고를 받은지 18분 만에 다급하게 종전을 결정하였고 한다. 일왕 히로히도가 항복결정이 아니라 종전결정을 내렸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사진 2> 1945년 8월 9일 대일전쟁에 돌입한 소련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며 일제관동군과 만주제국을 궤멸시켰고, 일제는 패주하고 투항하기에 바빴다. 이 사진은 1945년 8월 중순 만주해방전투에서 소련군에 투항한 관동군병사들이 무장해제를 당하는 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대일전쟁에 돌입한 소련군은 만주방면과 한반도방면으로 각각 진격하였다. 그야말로 파죽지세의 진격이었다. <사진 2> 소련군 본대가 만주해방전투를 개시한지 이틀만인 1945년 8월 11일 소련군 선발대가 함경북도 라진에 상륙하였다. 조선의 역사자료에 따르면, 소련군이 대일전쟁에 돌입하였던 1945년 8월 9일 김일성 사령은 조선인민혁명군에게 대일공격명령을 내렸고, 그 명령에 따라 조선인민혁명군은 라진에 상륙한 소련군 선발대와 함께 8월 12일 라진해방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소련군이 경성(서울의 당시 명칭)에서 북동쪽 직선거리로 약 370km 떨어진 라진에 상륙하였을 때, 미국군은 경성에서 남서쪽 직선거리로 약 780km 떨어진 일본 오끼나와를 점령하고 있었다. 소련군의 맹렬한 진격속도를 가늠해보면, 라진에 선발대를 상륙시킨 소련군은 미국군이 인천에 상륙하기 훨씬 전에 한반도를 종단, 남진하여 부산과 목포에 각각 도달할 수 있었다. 소련군의 맹렬한 진격속도를 보고 다급해진 미국의 전쟁지휘부는 소련군 선발대가 라진에 상륙한 바로 그 날 미10군에게 조선을 점령하라는 긴급작전명령을 내렸다.

실제로 소련군이 한반도에 상륙한 날은 8월 11일이었고, 미국군이 한반도에 상륙한 날은 9월 7일이었다. 남조선점령군사령관 존 하지(John R. Hodge)가 지휘하는 제7상륙부대와 미해군제독 토머스 킨케이드(Thomas G. Kincaid)가 지휘하는 제7함대로 구성된 25척의 함대가 인천에 들어간 날은 1945년 9월 7일이었다. 만일 미국이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분할하지 않았더라면 소련군은 부산과 목포까지 곧바로 진격하였을 것이다.
 
 
3. 일왕의 8.15 라디오방송은 항복방송이 아니었다

주목하는 것은, 조선인민혁명군과 소련군이 라진해방전투에서 승리한 1945년 8월 12일부터 일제가 항복문서에 조인한 9월 2일까지 실로 급박하고 격동적이었던 그 기간에 일제가 취한 괴이한 행동들이다. 당시 일제가 어떻게 행동하였는지를 말해주는 역사적 사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왕 히로히도는 1945년 8월 15일 정오에 라디오방송을 통해 ‘대동아전쟁종결조서(大東亞戰爭終結詔書)’라는 것을 읽어 내려간 육성녹음을 내보냈다. 그것은 명백하게도 항복방송이 아니라 종전방송이었다. 일제가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하였다는 것은 무지가 빚어낸 인식착오다. 일제는 1945년 9월 2일 오전 9시 도꾜만에 정박해있던 미해군 전함 미주리호 함상에서 항복문서에 조인할 때까지 항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제는 왜 8월 15일에 항복하지 않고 계속 버티다가 9월 2일에 항복하였을까? 그 까닭은 미국군이 일본에 상륙하기를 기다렸다가 미국에게 항복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미국군 7,300명과 영국군 450명으로 구성된 미영연합함대가 일본 도꾜만에 있는 요꾜스까에 입항한 날은 1945년 8월 30일이었다. 

일왕 히로히도의 종전방송이 나오기 13시간 전인 1945년 8월 14일 오후 11시경 조선총독부는 소련군의 경성점령에 대비하는 비상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심야회의를 진행하였다. 심야회의 결정에 따라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또 류사꾸(遠藤柳作)는 일왕의 종전방송이 나오기 6시간 전인 1945년 8월 15일 오전 6시 여운형을 급히 만났다. 일제가 패전하는 위기상황에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저명한 항일운동가 여운형을 급히 만난 까닭은, 만일 소련군이 경성을 점령하면 여운형을 내세워 전후처리문제를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1919년 말에 일제의 초청을 받고 도꾜를 방문하는 중에 일제의 회유를 물리치고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설파하여 일본정계를 뒤흔들어놓았고, 1922년 초에는 동방민족대표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소련 모스끄바를 방문하는 중에 레닌을 만나 조선독립에 관한 소련의 지지를 이끌어낸 여운형의 특별한 경력 때문에 조선총독부가 위기상황에서 그의 도움을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엔또 류사꾸는 여운형에게 8월 17일 오후 2시경에 소련군 선발대가 경성에 들어올 것이라고 말했고, 이튿날인 1945년 8월 16일 여운형을 다시 만난 자리에서는 미국군이 한반도 남단의 부산과 목포를 점령할 것이며, 소련군은 한반도의 나머지 지역을 점령할 것이라고 말했다.

엔또 류사꾸가 여운형에게 그런 정보를 알려준 날, 일제가 괴뢰국으로 조작해놓은 만주제국의 수도 신경(오늘의 장춘)으로 진격한 소련군은 그 도시에 주둔한 관동군사령부를 점령하였다. 소련군이 진격해오자 사령부를 버리고 달아났던 관동군사령관 야마다 오또조(山田乙三)는 1945년 8월 23일 소련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 <사진 3> 이 사진은 일제가 1926년에 준공한 조선총동부 청사를 촬영한 것이다. 지금 광화문이 있는 자리에 이 건물이 있었다. 악랄한 식민통치의 총본산이었던 조선총독부는 1945년 8월 14일 밤 소련군의 경성점령을 예상하고 공포와 불안에 빠져들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만주에서 일제의 식민통치기구와 침략무력이 소련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급속히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에 접한 조선총독부는, 위에 인용한 엔또 류사꾸의 발언에서 드러난 것처럼, 소련군이 경성을 점령하여 조선총독부의 항복을 받아내고 조선주둔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할 것으로 예상하면서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혔다. <사진 3>

미국의 시사주간지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U.S. News & World Report)> 1959년 11월 2일부에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의 전후처리를 주도한 조지 마샬(George C. Marshall)이 노환으로 사망하기 직전에 남긴 대담기록이 실렸는데, 마샬은 일제가 패전하기 직전 조선주둔일본군사령관의 동향에 대해 이런 회고담을 남겼다.
“우리는 일본의 연락문을 감청하였다. 그 연락문은 조선주둔일본군사령관이 그들의 본국에 있는 대본영으로 보낸 것이다. 연락문은 공산주의자들이 조선으로 밀려오고 있는 상황이므로, 미국이 조선을 공격할 때 미국군에게 항복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자기들에게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두려워하였는데, 그것은 응당한 걱정이었다.”

조선총독부와 조선주둔일본군사령부가 소련군의 경성점령을 예상하고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소련군의 맹렬한 진격속도를 보고 다급해진 일왕 히로히도는 1945년 8월 17일 미국이 제시한 항복조건을 수락하겠다는 항복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당시 필리핀 마닐라에 있던 미극동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에게 자신의 밀사를 급파하였다. 원래 일왕 히로히도는 일제가 식민지로 강점한 모든 해외영토를 포기하되 자기들에게 식량과 자원을 보급해주는 조선과 대만은 종전대로 식민지로 보유하는 조건으로 항복함으로써 일제의 완전파멸을 방지하고 소련의 참전 이전에 종전한다는 조건부 항복의사를 미국에게 전달한 바 있었는데, 소련군의 맹렬한 진격으로 전황이 자기들에게 매우 불리해지자 무조건 항복의사를 타진한 것이었다. 어째든 일왕 히로히도는 막전에서 종전방송을 내보내면서도 막후에서는 항복의사를 타진한 것인데, 그의 종전방송은 막후에서 은밀히 미국에게만 항복의사를 밝히려는 교활한 연막전술이었다. 
 
 
4. 미주리호 함상의 항복문서조인식은 희대의 기만극

소련군이 강원도 원산에 상륙하였던 1945년 8월 18일 일제가 괴뢰국으로 조작해놓은 만주제국이 멸망하였다. 소련군의 맹렬한 진격속도를 보고 다급해진 맥아더는 바로 그날 일본군과 일제식민통치기구에게 “공인되지 않은 현지 세력에게 항복하지 말고, 기존의 법과 질서를 유지하라”는 긴급성명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일제가 미국군에게 항복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만주해방전투에서 승리한 소련군이 1945년 8월 21일 만주 지린성 옌지(延吉)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무장해제협정을 맺기 하루 전날인 8월 20일 맥아더는 일본군 육군대장 가와베 또라시로(河邊虎四郞)를 단장으로 하여 16명으로 구성된 일제의 사절단을 만난 자리에서 그들에게 미국의 전략방침을 하달하였다. 그 전략방침은 미국이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분할할 것이므로, 미국군은 이남지역에서 조선주둔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게 되고 소련군은 이북지역에서 조선주둔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게 된다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38도선 이남의 경성에 있는 조선주둔일본군사령부가 미국군으로부터 무장해제를 받게 되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맥아더를 통해 미국의 전략방침을 받고 안심하게 된 히로히도는 1945년 8월 28일 일본은 미국군의 “조속한 조선상륙을 열렬히 기다린다”는 내용의 전문을 맥아더에게 보냈다. 히로히도의 전문을 받은 맥아더는 미국군이 8월 30일 일본에 상륙하고, 9월 8일에 조선에 상륙할 것이므로, 8월 31일부터 조선주둔일본군사령관이 조선에 상륙할 미국군사령관에게 직접 연락하라는 내용의 답신을 히로히도에게 보냈다. 그리하여 1945년 8월 31일부터 9월 4일까지 조선주둔일본군사령관 고즈끼 요시오(上月良夫)와 남조선점령임무를 맡은 미24군사령관 존 하지(John R. Hodge) 사이에서 40차례 이상의 비밀전문이 오갔다.

▲ <사진 4> 1945년 9월 2일 오전 9시 도꾜만에 정박한 미해군 전함 미주리호 함상에서 일본 외상 시게미쯔 마모루가 점령군사령관 맥아더가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문서에 조인하고 있다. 하지만 그 항복문서조인식은 소련에게 항복하지 않으려는 일제가 미국에게 항복하는 척하였던 희대의 기만극이었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적군의 조속한 상륙을 열렬히 기다리면서, 자국 영토를 무력으로 점령할 적군 사령관과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은 일제의 행동은 세계전쟁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참으로 괴이한 행동이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1945년 9월 2일 오전 9시 도꾜만에 정박한 배수량 45,000t급 미해군 전함 미주리호 함상에 나타난 점령군사령관 맥아더 앞에서 패전국 외상 시게미쯔 마모루(重光葵)가 항복문서에 조인한 것은, 소련에게 항복하지 않으려는 일제가 미국에게 항복하는 척하였던 희대의 기만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4> 미국과 일제가 미주리주 함상에서 연출한 기만적인 항복문서조인식은 그 두 나라가 더 이상 적대국이 아니며, 공동의 적인 소련과 대결하고 한반도의 통일독립을 저지하기 위한 은밀한 결탁관계에 빠져들었음을 말해준 사건이었다. 
 
 
5. 점령군 군용기편으로 귀국한 조선총독

승전국 미국과 패전국 일제가 공동의 적인 소련과 대결하고 한반도의 통일독립을 저지하기 위해 은밀히 결탁한 것은, 남조선점령군사령관이 조선총독의 식민통치권을 넘겨받는 충격적인 사건을 일으켰다. 1945년 9월 9일 오후 3시 45분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진행된 조인식이 바로 그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조인식장에는 미24군사령관 존 하지, 미7함대사령관 토머스 킨케이드, 미70사단 사단장 아취볼드 아놀드(Archibold V. Arnold)가 참석하였고,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끼(阿部信行), 조선주둔일본군사령관 고즈끼 요시오, 경비사령관 야마구찌 기이찌(山口儀一)가 참석하였다.

그런데 그 조인식은 항복문서조인식이 아니라 일제식민통치권을 미국이 넘겨받는 통치권이양식이었다.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끼와 남조선점령군사령관 하지는 조선총독의 남조선 식민통치권을 남조선점령군사령관에게 넘겨주는 통치권이양문서에 서명하였다. 통치권이양식을 마친 남조선점령군과 조선총독부는 당일 오후 4시 35분 조선총독부 앞마당에서 국기교체식을 진행하였다. 조선총독부 국기게양대에서 일장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올라갔다.

▲ <사진 5> 1945년 9월 9일 오후 3시 45분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조선총독의 식민통치권을 남조선점령군사령관에게 이양하는 통치권이양식이 진행되었고, 곧이어 4시 35분에는 조선총독부 앞마당에서 국기교체식이 진행되었다. 일장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올라갔다. 미군정 3년은 일제식민통치의 연장이었다.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조선총독부의 식민통치권을 넘겨받은 남조선점령군사령관 존 하지는 1945년 9월 14일 총독을 비롯한 조선총독부 관리들을 사법처리하지 않고 해임하였고, 남조선 각 지방의 일제 관리들을 10월 17일에 해임하였다. 그런 까닭에 경성의 조선총독부에서는 일장기가 성조기로 교체되었어도 남조선 지방관청들에서는 10월 10일까지 일장기가 여전히 게양되어 있었다. 남조선점령군에게 식민통치권을 넘겨준 조선총독과 휘하 관리들은 남조선점령군사령관이 친절하게 마련해준 군용기에 몸을 싣고 9월 19일 일본으로 돌아갔다.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끼는 점령군 군용기를 타고 경성을 떠나면서 이런 끔찍한 저주를 내뱉었다고 한다.

“우리가 패했지만 조선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우리 대일본제국은 조선인들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놓았다. 결국 그들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의 삶을 살 것이다. 과거의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오늘의 조선은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한 것이다. 나 아베 노부유끼는 반도에 다시 돌아올 것이다.”

남조선점령군사령관 존 하지가 조선총독부로부터 이양받은 식민통치권을 행사할 군정청이 설립된 날은 1946년 1월 4일이었는데, 명백하게도, 미군정 3년은 일제식민통치의 연장이었다.
 
 
6. 포츠담 회의에서 미국이 꾸민 음모

미국과 일제의 은밀한 반소반공결탁은 일제식민통치권이 미군정으로 이양된 것으로만 귀결되지 않았다. 미군정은 3년 만에 종식되었고 이 땅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미국과 일제의 반소반공결탁은 두 가지 비극적 사태로 귀결되었다. 첫째는 38도선을 가운데 두고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라진 비극적 사태이고, 둘째는 38도선 이남지역이 미국의 반공군사기지로 전락된 비극적 사태다.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분할한 미국의 음모는,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2013년 서울에서 펴낸 책 ‘한반도 분할의 역사’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 책에는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발굴한, 미국의 한반도 분할음모에 관한 새로운 자료가 실렸다. 그 새로운 자료는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 중에 한반도 분할선을 구상한 미국군 작전국장 존 헐(John E. Hull)이 1949년 6월 17일 미국군 대령 해리스와 전화로 통화한 내용을 녹취한 것이다. 헐은 전화통화에서 이런 회고담을 늘어놓았다. “제임스 번스(James F. Byrnes)는 (미국이) 소련과 함께 조선을 분할하기를 원했다. 번스는 미국이 조선에 상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 전략가들은 3개의 주요항구를 주목했고, 이 중 2개의 항구(부산과 인천)를 우리쪽에 포함시켜야 하며, 서울 바로 북쪽에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38도선을 따라 선을 긋는 것이 가장 좋은 위치라고 판단했다.”

▲ <사진 6>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미국, 소련, 영국이 동아시아와 유럽의 종전문제 및 전후처리문제를 포괄적으로 논의한 포츠담 회의가 진행되었다. 이 사진은 포츠담 회의에 참석한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 소련공산당 서기장 조셉 스탈린(왼쪽부터)이 회담장 출입구에서 악수하며 촬영한 것이다. 미국은 그 회담에서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분할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당시 미국 국무장관 제임스 번스는 당시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을 수행하여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진행된 포츠담 회의에 참석하였는데, 위에 인용한 헐의 회고담은 포츠담 회의에서 미국이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분할하려는 음모를 꾸몄음을 말해준다. <사진 6>

미국, 소련, 영국이 동아시아와 유럽의 종전문제 및 전후처리문제를 포괄적으로 논의한 포츠담 회의에서 8.15와 직결된 것은 1945년 7월 26일에 발표된 포츠담 선언이다, 그 선언은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라고 촉구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는데, 위에 인용한 헐의 회고담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서로 연결하여 생각하면 미국은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면서 속으로는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분할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의 38도선 분할에 대한 기존 학설은 1945년 8월 9일 대일전쟁을 개시한 소련군이 관동군을 파죽지세로 격파하며 한반도를 향해 남진하자, 소련군의 진격속도에 놀란 미국 3부조정위원회 산하 전략정책단이 1945년 8월 11일 소련군의 남진을 저지하려는 긴급대책으로 38도선을 그어 한반도를 서둘러 분할하였다는 것인데, 미국은 소련이 대일전쟁을 개시하기 훨씬 전인 1945년 7월 17일 포츠담 회의가 시작될 때부터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분할하려는 음모를 품었던 것이다. 이것은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분할하고 영구분단을 획책한 장본인이 미국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반도의 38도선 분할은 미국이 주도하고 소련이 멋모르고 동의해준 것이라는 기존 인식은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 착오다. 한반도를 38도선으로 분할한 분단의 원죄는 미국이 독단적으로 저지른 것이었음을 명백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미국이 이 민족의 염원과 요구를 짓밟고 폭력적으로 저지른 분단의 원죄는 70년 전 역사 속에 과거사로 박제화된 게 아니다. 분단의 원죄는 6.25전쟁을 거치면서 분단체제로 고착되었고, 그렇게 고착된 분단체제는 이 민족을 말할 수 없는 불행과 치욕, 고통과 재앙 속에 빠뜨렸다.
“남조선에서 해방은 1945년 8월 16일 하루뿐이었다”는 안재홍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한국인들이 분단체제를 거부하고 자주통일위업을 실현할 때 8.15는 비로소 해방의 날로 될 것이다.
 
▲ <사진 7> 이 사진은 미국 군사고문단 청사를 촬영한 것이다. 미국 군사고문단은 38도선 이남지역을 미국의 반공군사기지로 전락시키는 임무를 현지에서 직접 수행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제공


7. 미국을 위해 총을 쏘고, 미국인보다 앞서 피 흘리는 군사기지

미국과 일제의 반소반공결탁은 38도선 이남지역을 미국의 반공군사기지로 전락시켰다. 당시 38도선 이남지역을 미국의 반공군사기지로 전락시키는 임무를 현지에서 직접 수행한 기관은 남조선국방경비대의 군사훈련을 지도한 임시군사고문단이었는데, 임시군사고문단 단장 윌리엄 로벗츠(William L. Roberts)는 “미국을 위해 총을 쏘고, 미국인보다 앞서 피를 흘리게 하기 위해 우리가 자기들을 훈련시키고 있는지를 한국인들은 알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윌리엄 로벗츠의 이 발언은 미국의 38도선 분할에 의해 38도선 이남지역이 미국의 반공군사기지로 전락되고 말았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준 말이다. <사진 7>

<뉴욕헤럴드> 1949년 6월 5일 보도기사에 따르면, 1949년 10월 한국군 육군사령부에서 진행된 사단장회의에서 한국군사고문단(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 단장 윌리엄 로벗츠는 38도선 이북지역에 대한 수많은 공격은 자기 명령에 의해 수행되었고 앞으로 더 많은 공격이 있을 것이라고 예견하면서 “많은 경우에 한국군 부대들은 제멋대로 공격하고 아무런 전과도 없이 막대한 탄약만 허비하였으며 치명적인 인명손실까지 입었다. 앞으로 38도선 이북에 대한 한국군의 진공은 군사고문단의 명령에 의해서만 수행되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미국이 정전체제에 결박된 한국을 반공군사기지로 전락시켜 대북군사대결로 끌어갔음을 말해주는 윌리엄 로벗츠의 이 발언은 위에 인용한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끼가 경성을 떠나면서 내뱉은 저주발언과 일맥상통한다. 

70년 전 조선총독부에 게양된 성조기 아래서 조선총독으로부터 식민통치권을 이양받은 남조선점령군사령관은 용산미군기지에 게양된 성조기 아래서 한국군으로부터 이양받은 작전통제권을 틀어쥔 주한미국군사령관으로 교체되었다.

하지만 남조선점령군사령관이 주한미국군사령관으로 교체되었다고 해서, 한국을 자기들의 반공군사기지로 전락시킨 미국의 지배정책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최근 미국 언론의 폭로기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대로, 주한미국군은 존 하지로부터 물려받은 점령군의 군기 아래서 탄저균실험을 감행하며 국제법적으로 금지된 세균전까지 준비해왔던 것이다.

“남조선에서 해방은 1945년 8월 16일 하루뿐이었다”는 안재홍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한국인들이 주한미국군을 철군시키고 한반도의 평화를 실현할 때 8.15는 비로소 해방의 날로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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