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2/05

세 가지 과도강령과 두 군데 전략공간

변혁과 진보 (64)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대중이 알아듣지 못하는 좌파적 정치암호

극도로 우경화된 우리 사회에서 대중언론이 좌파의 목소리를 전달하지 않지만, 요즈음 자본주의시장경제의 위기와 극단적인 빈부격차가 사회정치적 관심사로 떠오르고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는 분위기에서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좌파적 발언이 간혹 보도되는 경우가 있다.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발언에서 극복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악조건을 이겨낸다는 뜻인데, 자본주의체제의 악조건을 이겨낸다고 표현하는 것은, 체제는 그대로 놔둔 채 체제의 악조건을 이겨낸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으므로,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말은 정확한 용어가 아니다.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말은 자본주의체제 변혁이라는 뜻으로 다시 가다듬어야 할 필요가 있다.
 
세계적 범위에서 자본주의체제가 지배적인 이 시대에 모든 형태의 진보와 변혁이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가 자본주의체제 변혁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리다. 낡은 자본주의체제를 새로운 사회체제로 바꾸어가는 각이한 단계의 사회역사적 발전과정을 통틀어 사회변혁이라 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체제 변혁이라는 말은 좌파의 전유물이 아니라, 진보와 변혁을 위해 투쟁하는 모든 정치활동가들의 지향을 표현하는 공유물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체제를 변혁해야 할 필요성을 아직 알지 못하는 대중에게 자본주의체제 변혁이라는 구호나 강령을 제시하는 것은 대중의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에 무의미하다. 구호는 정치조직 또는 개인이 제기한 정치적 요구와 주장이고, 강령은 정치조직이 대중에게 공약한 기본방침이다.

그러므로 우리식 사회변혁의 현 단계에서 자본주의체제 변혁은 급진주의자들끼리 주고받으며, 대중이 알아듣지 못하는 좌파적 정치암호가 로 들린다. 이 땅의 사회변혁과 진보정치가 그처럼 대중이 알아듣지 못하는 좌파적 정치암호를 피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회변혁과 진보정치는 진보변혁세력이 단독으로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변혁세력이 대중과의 관계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며,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진보변혁세력의 주관적 요구가 아니라 대중의 지지를 받는 진보정당의 정치역량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보변혁세력은 대중으로부터 동떨어진 비좁은 공간에서 좌파적 언사를 꺼내놓을 것이 아니라, 대중의 정치적 요구를 정확히 반영한 강령을 가진, 그리하여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는 진보정당을 건설하고 그 정당 안에서 적극 활동함으로써 그 정당을 사회개혁에서 사회변혁으로 전진시키는 것이다.  


최소강령, 과도강령, 최대강령

자본주의체제는 급진적으로 단번에 변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사회변혁은 급진적으로 단번에 완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변혁의 먼 앞길에는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이 가닿지 않는 뜻밖의 난제들이 수없이 제기되고 돌출될 것이다. 우리식 사회변혁을 단계별로 추진해야 좌절위험을 피하고 승리의 고지에 다가설 수 있다.

그런데 우리식 사회변혁의 단계적 추진은 강령문제에 직결된다. 이를테면, 낡은 자본주의체제를 새로운 사회체제로 변혁하는 것은 사회변혁이 궁극적으로 추구하여야 할 최대강령(maximum program)이므로, 우리식 사회변혁의 현 단계에서는 자본주의체제 변혁을 강령으로 조급하게 제기할 수 없다.

최대강령과 대비되는 것은 최소강령(minimum program)인데, 최소강령은 사회개혁을 사회변혁으로 전진시키는 첫 단계에서 제기되는 강령이다. 그래서 최소강령은 사회개혁과 사회변혁의 중간선에 자리잡는다. 2010년 12월 15일 블로그 '변혁과 진보'에 게시된 나의 글 '중간강령(interim program)을 위하여'에서는 최소강령을 중간강령이라고 불렀다.

최소강령은 대중의 지지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강령, 그리하여 통합진보당이 당장 추진할 수 있고, 또 마땅히 추진해야 하는 강령이다. 예를 들면, 통합진보당이 제시한 재벌해체와 전민복지실현, 노동악법 및 '국가보안법' 폐지,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에 따른 남북화해협력 추진 같은 대중의 정치적 요구들을 반영한 강령들은 최소강령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생기는 문제는, 최소강령과 최대강령 사이에 걸쳐있는 넓은 간격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제시되는 것이 바로 과도강령(transitional program)이라는 개념이다.

원래 과도강령이라는 개념은 리온 트로츠키(Leon Trotsky, 1879-1940)가 1938년에 발표한 고전문헌 '자본주의의 소멸고통과 제4인터내셔널의 임무: 권력장악을 준비하기 위한 과도적 요구에 부응하는 대중동원(The Death Agony of Capitalism and the Tasks of the Fourth International: The Mobilization of the Masses around Transitional Demands to Prepare the Conquest of Power)'에 나왔던 것이다.

그 고전문헌에서 트로츠키는 자본주의체제가 붕괴위기에 빠진 당대 유럽과 미국의 혁명정세를 고찰하면서 낡은 최소강령이 새로운 과도강령으로 대체되었다고 지적하고, 혁명을 위해 각계각층 대중을 조직적으로 동원하는 것을 당면임무로 규정한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경제공황 발생과 자본주의체제 붕괴위기, 파시즘 대두와 제국주의침략전쟁 도발, 유럽의 인민전선 형성과 아시아의 식민지민족해방혁명 활성화 등으로 전 세계가 그야말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던 1930년대 후반기에 살았던 트로츠키의 급진적 사고가 빚어낸 논리다. 오늘 이 땅의 정세는 1930년대 후반기 정세와 크게 다르기 때문에, 최소강령이 과도강령으로 대체되었다고 보는 급진주의적 발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지금 이 땅에서 최소강령이 과도강령으로 대체된 급진적인 정세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최소강령에만 몰두하고 과도강령을 외면하는 것은 현실에 안주하면서 사회변혁의 발전전망을 포기하는 우경적 오류다.

극도로 우경화된 이 사회에서 최소강령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대중과 함께 힘있게 밀고 나가면서, 그 투쟁의 지향점을 언제나, 변함없이, 그리고 한 치의 착오없이 과도강령에 집중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최소강령을 실현하기 위한 당면투쟁이 과도강령에 집중된 지향성을 놓쳐버리는 순간, 사회변혁과 진보정치는 우경의 늪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우리식 변혁담론이 제시하는 최소강령이 사회개혁을 사회변혁으로 전진시키기 위한 중간강령이라면, 우리식 변혁담론이 제시하는 과도강령은 사회변혁을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전진시키기 위한 과도강령이다. 우리식 사회변혁의 과도강령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이 전에 발표한 여러 글들에서 지적한 것처럼, 우리식 사회변혁의 과도강령도 최소강령과 마찬가지로 진보적 민주주의강령과 자주적 평화통일강령이라는 큰 양대 범주 안에 들어있는 것이다. 또한 이 땅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진보적 민주주의강령과 자주적 평화통일강령을 실현하는 주체가 될 것이며,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강력한 지지기반 위에 세워지는 진보정권이 그 양대 강령을 실현하는 직접적 수행자가 될 것이다.

전망적으로 말하면, 진보적 민주주의강령을 실현해가는 과정에서 주요산업을 국유화하고 민족자립경제와 민족통일경제를 확립하는 사회경제적 변혁이 추진될 것이다. 또한 자주적 평화통일강령을 실현해가는 과정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주한미국군 철군, 남북 군사적 긴장 해소, 한미동맹 폐기를 추진할 것이고, 남북 각계각층 대표자들이 참가하는 민족통일회의와 남북 최고위급 지도자의 통일회담을 성사시켜 통일공화국을 건설할 것이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강력한 지지기반 위에 세워진 진보정권이 그처럼 사회경제적 변혁을 추진하고,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할 때, 우리식 사회변혁은 짧은 기간에 낮은 단계를 통과하여 마침내 더 높은 단계로 전진할 것이다. 


점령해야 할 전략공간이 두 군데 있다

사회변혁과 진보정치의 설계도를 그리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건축설계사들이 설계도면만 말끔하게 그려놓는다고 해서 건설공사가 실제로 진척되는 것은 아니다. 설계공정도 건설공정의 일부이지만, 그것은 길고 복잡한 여러 공정들 가운데 첫 공정일 뿐이다.

비유로 말하면, 설계도면에 따라 건설공사를 밀고 나갈 건설기사가 있어야 하고, 건설기사와 함께 공사를 떠맡을 건설근로자가 있어야 하고, 건설공사가 설계도면에 따라 올바르게 진척되도록 이끌어가는 현장감독이 있어야 한다. 설계도면을 손에 쥔 건설기사가 바로 통합진보당이고, 건축공사를 떠맡은 건설근로자가 바로 대중이고, 건설공사를 이끄는 현장감독이 바로 통합진보당에 속한 진보정치활동가들이다.

그런데 지금 이 땅의 사회변혁과 진보정치는 건설기사와 현장감독을 만나기는 했으나 정작 가장 중요한 역할과 임무를 맡아야 할 건설근로자를 만나지 못해 건설공사를 아직 본격적으로 추진하지 못하는 형국이다. 아무리 유능한 건설기사와 현장감독이 있더라도, 건설공사를 실제로 떠맡을 건설근로자가 없으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당면문제는 대중을 어디서,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통합진보당이 만나야 할 대중은 누구이며 그들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식 변혁담론에서 말하는 대중은 불특정 다수를 뜻하는 개념이 아니다. 진보의식화된 대중과 지지기반화된 대중이 우리식 변혁담론에 나오는 대중개념이다.

진보의식화된 대중은 통합진보당 당원들 또는 진보적 대중단체 성원들이고, 지지기반화된 대중은 평소에 통합진보당을 지지하고 선거국면에 그 당에게 지지표를 안겨주는 각계각층 대중이다. 진보의식화된 대중의 역할과 임무는 최소강령을 실현하는 강력한 투쟁전선을 구축하는 것에 집중되고, 지지기반화된 대중의 역할과 임무는 그 전선에 전략물자와 증원병력을 공급하는 전략적 후방사업에 집중된다.

전선구축을 담당한 진보의식화된 대중의 수가 10이라면, 후방사업을 담당한 지지기반화된 대중의 수는 100 정도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후방이 든든할수록 전선의 투쟁력이 강해지는 법이다.

통합진보당과 진보의식화된 대중의 관계는 조직관계이고, 통합진보당과 지지기반화된 대중의 관계는 소통관계다. 진보의식화된 대중은 각 부문별 및 지역별로 엮어지는 각양각색 현장조직들에 망라되고, 지지기반화된 대중은 각종 언론매체들과 현대적 통신수단들을 통해 통합진보당과 일상적으로 상호소통을 진행한다. 우리식 변혁담론에서 말하는 진보정치의 대중화란 어떤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그러한 현장조직과 상호소통을 끝없이 확대해가는 전략사업을 뜻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통합진보당이 풀어나가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대중과의 관계다. 어려움을 무릅쓰고 통합진보당을 건설한 것 자체가 당과 대중의 관계를 확장하기 위한 정치적 노력이었다. 통합진보당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려는 당면목표를 설정한 것도, 진보정치를 대중화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지 단순히 의석수나 몇 석 더 얻어보려는 것이 아니다.

지금 한나라당이나 민주통합당이 국회를 양분하여 의석을 대부분 차지하였지만, 현장조직과 상호소통에서는 상당히 무기력하고 어떤 측면에서는 심지어 불능화된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통합진보당이 그 두 당과 근본적으로 다른 길을 가는 전략적 차별성은, 현장조직과 상호소통을 끝없이 확대하여 진보정치의 대중화를 실현하려고 애쓰는 전략사업에서 뚜렷이 발현된다. 지금 통합진보당의 의석수는 비록 적지만, 현장조직과 상호소통에 당력을 집중하여 정력적으로 추진하면, 장차 의석판도를 뒤집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원내교섭단체 구성이란 우리식 사회변혁의 초기단계에서 통합진보당이 취하는 의회전술이다. 그에 비해, 현장조직과 상호소통은 사회변혁의 초기단계에서는 물론이고, 사회변혁을 수행하는 전 단계에서 전략적 사고의 출발점, 정치적 판단의 기준점, 변혁실현의 핵심문제으로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통합진보당 일각에서는 원내교섭단체 구성이라는 의회전술을 판단과 행동의 중심에 놓으려는 편향이 드러나고 있다. 우리식 변혁담론에 대한 학습부족이 그런 편향을 불러온 것으로 보인다.

뉴욕 맨해튼에 있는 주코티 공원에 몰려간 미국의 진보활동가들은 '월가를 점령하라!'는 구호를 외쳤지만, 이 땅의 통합진보당이 진보정치로 점령해야 할 전략공간은 두 군데다.

'대중의 생활공간을 점령하라!'
'대중의 소통공간(SNS)을 점령하라!'
(2012년 2월 3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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