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시보 2017년 07월 31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조선에서 7월 27일은 정전의 날이 아니라 전승의 날 2. 조선은 왜 ‘조국해방전쟁’을 ‘조국통일대전’으로 종식시키려 하는가? 3. ‘조국통일대전’에 필요한 네 가지 준비를 완료한 조선 4. 화성-14형 출현으로 다시 써야 할 72시간 전쟁씨나리오
1. 조선에서 7월 27일은 정전의 날이 아니라 전승의 날
미국에서 6.25전쟁은, 미국 언론의 표현을 빌리면, ‘잊혀진 전쟁’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잊어버리고 싶은 전쟁이다. 그래서 해마다 7월 27일은 미국인들의 무관심 속에 평범한 날로 흘러간다. 도널드 트럼프(Donald J. Trump) 미국 대통령은 지난 7월 26일에 발표한 백악관 공보문에서 7월 27일을 ‘전국 코리아전쟁 참전노병 정전의 날(National Korean War Veterans Armistice Day)’이라고 선포하였지만, 그 선포를 귀담아 들은 미국인은 없다. 명백하게도, 미국은 7월 27일의 역사적 의미를 망각하였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해마다 7월 27일이 오면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진다. 지난 7월 27일은 조선이 전승절 64주년을 성대히 기념한 날이었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조선인민군 지휘관들을 대동하고 조국해방전쟁참전렬사묘를 찾아 화환을 진정하고 인민군 렬사들에게 경의를 표하였다고 한다. 또한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당일 조선 각지에서는 각계층 인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승절 경축집회, 인민군렬사묘 참배, 전승혁명사적지 참관, 전쟁노병들과의 상봉모임, 전승절 경축 음악무용공연, 전승절컵 쟁취 체육경기 등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조선에서 7월 27일은 정전의 날이 아니라 전승의 날이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으니 교전쌍방이 무승부로 비겼다고 볼 수 있는데, 조선은 왜 전쟁에서 이겼다고 하는 것일까? 조선을 모르는 사람들은 조선이 정전 이후 퍽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무승부를 승리라고 재해석하여 7월 27일을 전승절로 기념하기 시작한 게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른다. <사진 1>
하지만 그런 생각은 착오다. 조선은 정전협정을 체결한 다음날인 1953년 7월 28일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경축하는 평양시 군중대회와 열병식’을 성대히 진행하였고, 사흘 뒤에는 제1차 전국전투영웅대회를 성대히 진행하였다. 조선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당시 조선은 전쟁승리에 크게 기여한 공화국영웅 533명과 로력영웅 16명을 비롯하여 전쟁유공자 809,896명에게 각종 훈장과 메달을 수여하였고, 13개 군부대들에게 근위부대칭호를 수여하였으며, 14개 군부대들에게 국기훈장 또는 자유독립훈장을 수여하였다고 한다. 이런 사실만 봐도, 조선이 왜 7월 27일을 전승절로 기념하는지 알 수 있다.
전쟁명칭은 전쟁의 성격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미국에서는 6.25전쟁을 코리아전쟁(Korean War)이라고 부르는데, 그런 명칭에서는 전쟁의 성격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와 달리, 조선에서는 6.25전쟁을 조선전쟁이라고 부르지 않고,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 그 전쟁명칭은 전쟁의 성격을 명백히 밝혀준다.
조선이 6.25전쟁을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자기 영토의 절반을 점령한 것도 성차지 않아 북위 38도선을 넘어 조선 전역을 점령하려는 미국의 무력침공을 반대하여 싸운 해방전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세계전쟁사에서 제국주의국가의 무력점령과 식민통치를 반대하여 싸운 전쟁을 해방전쟁 또는 독립전쟁이라 하는데, 원래 해방전쟁이나 독립전쟁은 혁명전쟁범주에 속하는 정의의 전쟁이다. 예컨대, 북아메리카 13개주가 대영제국의 식민통치를 반대하여 1775년 4월 19일부터 1783년 9월 3일까지 지속한 8년 전쟁은 영국의 시각에서 보면 식민지무장반란이지만, 미국의 시각에서 보면 미국혁명전쟁(American Revolutionary War)인 것이다.
18세기 후반 북아메리카 13개주가 연합하여 대영제국의 식민통치와 무력점령을 반대하여 싸운 8년 전쟁이 미국인들에게 위대한 미국혁명전쟁인 것처럼, 20세기 중반 신생독립국 조선이 아메리카제국의 식민통치와 무력침공을 반대하여 싸운 3년 전쟁은 조선인민에게 위대한 조국해방전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조선은 “남조선을 강점하고 북조선까지 점령하려던 미제의 무력침공”을 북위 38도선 근방에서 패퇴시키고, 미국에게 막대한 인명손실과 전쟁피해를 입혔으므로 ‘조국해방전쟁’에서 승리하였다고 믿는 것이다.
미국인들이 기억하기 싫은 6.25전쟁 기록사진들이 오늘도 전해진다. 이 흑백사진들은 6.25전쟁에서 조선이 승리하였고, 미국이 패배하였음을 말해주는 증언록이다.
<사진 2>는 1950년 7월 말 미국군 전쟁포로들이 서울 시내를 행진하는 장면이다. 그들이 들고 가는 여러 가지 펼침막들에는 “평화를 사랑하는 미국과 조선의 친선 만세!!”라고 영어로 쓴 글발, 그리고 “미국의 조선침략은 세계평화의 위협이다!”라고 우리말로 쓴 글발 등이 적혀있다. 행진대오 맨 앞에 걸어가는 전쟁포로는 1950년 7월 20일 대전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조선인민군에게 투항하여 전쟁포로가 된 미국 육군 제24사단 제34연대 제3대대 대대장이다. 대전전투에 참가한 미국군 11,400명 중에서 922명이 사망했고, 228명이 부상당했으며, 2,400여 명이 실종되었는데, 실종자 대부분은 전쟁포로다.
<사진 3>에서 보는 것처럼, 6.25전쟁에 미국군 주력부대로 참전하였던 미국 육군 제8군을 지휘한 군단장 월튼 워커(Walton H. Walker)는 제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전선에서 싸웠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제20군단장으로 노르망디 상륙전에서 군공을 세웠으나, 6.25전쟁 중에는 조선인민군의 공격으로 악전고투하다가 1950년 12월 23일 경기도 의정부 부근에서 작전 중 불의의 사고로 황천객이 되었다. 워커 밑에 있었던 미국 육군 제24사단 사단장 윌리엄 딘(William F. Dean)은 자기가 지휘하던 보병사단이 대전전투에서 조선인민군에게 포위, 궤멸되자 산으로 도망쳤다가 생포되었는데, 정전 후 1953년 9월 4일 판문점을 통해 미국으로 송환되었다.
6.25전쟁 중 오산전투, 금강도하전투, 대전전투 등에서 미국군과 한국군을 무찌르며 파죽지세로 남진공격을 몰아치던 조선인민군은 하루에 20km씩 진격하는 고속기동전을 벌여 1950년 8월 15일 조국해방 5주년 기념식을 부산에서 진행하려고 하였다. 만일 미국이 대규모 증원부대를 한반도에 보내지 않았다면, 그런 전쟁방침이 실현되었을 것이다.
<사진 4>는 정전협정이 체결된 날로부터 여섯 달이 지난 1954년 1월 28일 미국 송환을 거부한 미국군 포로들이 화물차를 타고 밝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평양으로 떠나는 장면이다. 평양행 화물차에는 조선 국기가 펄럭이고, “우리는 평화를 위해 남는다”라고 영어로 쓴 펼침막이 내걸렸다. 정전 이후 미국 송환을 거부하고 조선에 남은 미국군 전쟁포로는 23명이다. 하지만 그들은 격렬했던 3년 전쟁으로 국토가 거의 폐허로 변했을 뿐 아니라, ‘미국놈’이라면 치를 떠는 조선에 정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갔다. 중국 정부는 그들을 베이징대학에 보내 중국말을 배우게 하는 등 생활조건을 마련해주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12년간의 중국생활을 접고 1966년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2. 조선은 왜 ‘조국해방전쟁’을 ‘조국통일대전’으로 종식시키려 하는가?
우리나라를 둘로 갈라놓은 분단체제는 6.25전쟁이 일어났던 1950년대 초에 아직 장기화되지 않았다. 분단체제가 70년 이상 장기화될 것으로 생각한 사람은 당시에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둘로 갈라놓은 분단체제는 3년간의 격전으로 급속히 고착되었으며, 정전 이후 64년 세월이 흐르면서 뜻하지 않게 장기화되었다. 민족분열의 고통과 불행이 거기서 시작되었다. 분단체제가 70년 넘게 지속되면서 우리나라가 한국과 조선이라는 두 나라로 갈라져버릴 수 있는 위험이 조성되고 있다. 분단체제를 영구화시킬 위험요인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이 분열되기를 바라는 미국과 일본은 우리나라를 한국과 조선이라는 두 나라로 영영 갈라놓으려는 정전고착화정책과 분단영구화정책에 집요하게 매달리고 있으며, 중국과 러시아는 한반도의 정전체제와 분단체제가 평화적으로 유지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국가보안법’을 틀어쥔 반통일세력은 정권이 교체되는 것과는 무관하게 조국통일운동을 ‘종북’으로 몰아가며 통일의 길을 가로막고 있다.
이런 상황에 처한 조선은 ‘조국해방전쟁’이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다. 정전은 전쟁이 종식된 것이 아니라 교전행동을 정지한 것이므로, 조선이 그렇게 믿는 것은 당연하다. 조선이 정전 이후 64년 동안 가장 중요하게 여겨오는 의무는 아직 끝나지 않은 ‘조국해방전쟁’을 종식시키는 것이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전쟁을 끝내는 유력한 방도들 가운데 하나는 교전쌍방이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은 정전 이후 64년 동안 미국에게 평화협정을 체결하자는 제의를 여러 차례 보냈건만, 오만한 미국은 그 제의를 거들떠보지 않고 번번이 묵살해버렸다.
정전 이후 64년 동안 교체를 거듭해온 미국의 역대 행정부들 가운데 평화협정 체결과 주한미국군 철수를 추진하려 했던 매우 예외적인 경우는 카터 행정부였다. 지미 카터(Jimmy E. Carter) 당시 미국 대통령은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한반도에서 전쟁위험이 사라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주한미국군도 주둔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고,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핵무기 개발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서울을 공식 방문하는 기회에 김일성 주석을 서울로 초청하여 3자 정상회담을 진행하고, 그 회담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할 수 있게 준비하라는 지시를 당시 주한미국대사였던 윌리엄 글라이스틴(William H. Gleysteen, Jr.)에게 보냈다. 글라이스틴은 그 지시를 받고 너무 놀라 의자에서 굴러떨어질 뻔 했다고 한다. <사진 5>
그러나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주한미국군을 철수하고,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핵무기 개발을 저지하려던 카터 대통령은 1979년 6월 30일 청와대에서 진행된 한미정상회담에서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정상회담 중에 철군문제를 거론하지 말라는 백악관의 사전 요구를 무시한 박정희는 장장 45분 동안 철군반대론을 늘어놓았고, 카터는 노여움을 간신히 참으며 그의 장황한 ‘안보연설’을 들어야 했다. 그렇게 되어 여느 정상회담에서는 볼 수 없는 말싸움까지 벌어졌으나, 가까스로 잠정적인 타협에 이르렀다.
카터-박정희 정상회담 직후인 1979년 7월 20일 백악관은 주한미국군 철수를 1981년까지 연기한다고 발표하였는데, 1980년 11월 4일에 실시된 대선에서 카터는 재선에 실패하였고, 로널드 레이건(Ronald W. Reagan)이 이끄는 극우 성향의 행정부가 등장하는 바람에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주한미국군을 철수하려던 카터 행정부의 정책은 폐기되었다. 이처럼 카터 행정부를 제외한 역대 미국 행정부들이 정전 이후 64년 동안 한결같이 평화협정체결문제를 외면해온 까닭은, 주한미국군을 주둔시켜 한국지배체제를 영구히 유지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20년, 30년도 아니고 64년이 넘도록 평화협정 체결과 주한미국군 철수를 반대해오는 미국이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주한미국군을 철수할 가능성은 없다. 조선이 그런 미국을 설득하여 평화협정을 체결하게 만들어 ‘조국해방전쟁’을 종식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조건에서 조선에게는 미국을 굴복시켜 강제로 평화협정을 체결하게 만드는 선택방안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조선의 전략적 핵압박공세는 미국을 굴복시켜 강제로 평화협정을 체결하려는 것이었고, 그래서 지난 24년 동안 조미핵대결이 벌어진 것이다. <사진 6>
그런데 조선이 미국 본토 심장부를 타격할 수 있는 화성-14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두 차례 시험발사하여 전략적 핵압박공세를 최고 수위로 높였는데도, 트럼프 행정부는 조선에 맞서 압박강도를 극도로 끌어올리면서 끝까지 대결해보려는 태도를 굽히지 않고 있다. 이런 심각한 대결상황은 전략적 핵압박공세로 미국을 굴복시켜 평화협정을 강제로 체결하려던 조선의 전략구상이 더 이상 실현되기 힘들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오늘날 조선에게 있어서 ‘조국해방전쟁’을 종식시키는 길은 평화협정 체결이 아니라 ‘조국통일대전’이라는 사실이 자명해졌다. 그들에게는 다른 방도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시각에서 보면, 통일전쟁은 해방전쟁이나 독립전쟁처럼 혁명전쟁범주에 속하는 정의의 전쟁으로 인정되는데, 그런 점에서, 조선은 ‘위대한 조국해방전쟁’을 ‘위대한 조국통일전쟁’으로 종식시키려 한다고 말할 수 있다.
3. ‘조국통일대전’에 필요한 네 가지 준비를 완료한 조선
정전 이후 조선이 걸어온 길은 ‘조국통일대전’을 준비해온 길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런데 어느덧 조선은 그 기나긴 길의 종착점에 이르러, 조국통일대전준비를 완료하였다. 전쟁준비가 완료되었다는 말은 전쟁이 임박했다는 뜻인데, 지금이 바로 그런 때다. 아래에 서술한 몇 가지 사실들이 그런 긴박한 정세를 말해준다.
첫째, 조선은 ‘조국통일대전’에 필요한 사상정신적 준비를 완료하였다. 조선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결정적인 요인을 강력한 무장장비보다도 강의한 사상정신에서 찾는다. 이것은 조선이 건국 이래 줄곧 견지해오는 특유한 전쟁관이다. 그래서 정전 이후 ‘조국통일대전’을 위한 사상정신적 준비를 다그쳤는데, 특히 6.25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후대들을 사상정신적으로 준비시키는 일은 절실한 과업으로 되었다.
조선에서 6.25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의 사상정신상태를 말해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참군열풍이다. 2016년 2월 23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가 최후결전을 언급한 중대성명을 발표하였을 때, 불과 48시간만에 전국 각지에서 청년남녀 150만 명이 입대와 복대를 탄원하였다고 한다. 폭발적으로 일어난 참군열풍은 ‘조국통일대전’에 필요한 사상정신적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말해준다.
둘째, 조선은 ‘조국통일대전’에 필요한 물질적 준비를 완료하였다. 전시에 사용할 식량, 유류, 탄약을 비축해놓은 것이다. 한국 정부 고위당국자의 말을 인용한 <조선일보> 1997년 10월 30일 보도에 따르면, 당시 조선은 전시식량 120만t, 전시유류 146만t, 전시탄약 187만t을 비축해놓았다고 한다.
‘기름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현대전에서 가장 중요한 전시물자는 유류다. 전투부대들에 휘발유, 항공유, 경유를 공급하지 못하면, 전투기, 군함, 전차가 멈추게 되고, 레이더도 꺼지고, 미사일도 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지금 미국은 조선의 원유공급선을 끊어버릴 제재조치를 발동하려고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게 있다.
미국의 온라인매체 <NK NEWS> 2016년 11월 1일 보도에 따르면, 중국석유천연가스공사(CNPC)가 14,000t급 원유채굴시설(jack-up rig)인 중요우하이(中油海) 17호를 조선의 배타적경제수역(EEZ) 안으로 3km 들어간 서해 대륙붕에 끌어다놓고 원유를 퍼올리고 있다고 한다. 그 보도기사에 따르면, 조선 서해 대륙붕 606호 유정의 연간생산량은 19,700t이고, 609호 유정의 연간생산량은 152,000t이라고 한다. 조선 서해에서 조선의 배타적경제수역 또는 영해에 속한 대륙붕에는 그런 유정들이 적어도 10개 이상 널려 있고, 조선 내륙 각지에도 유정들이 있다. 중국해양석유총공사(CNOOC)는 조선 서해 대륙붕에 71억5,400만t에 이르는 엄청난 분량의 원유가 묻혀있다고 발표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사진 7>
조선이 1990년도에 수입한 원유는 220만t이었는데, 이것은 당시 아직 원유를 생산하지 못하던 조선에게 필요한 연간수요량이다. 1990년 이후 오늘까지 27년 동안 조선의 산업생산력과 군사력이 크게 증대되었으므로, 현재 조선의 연간원유수요량은 250만t 정도로 추정된다. 그런데 조선은 중국에서 해마다 50만t씩 들여오던 원유수입을 2013년 말에 전면 중단하였다. 조선이 2015년에 러시아에서 들여온 연간원유수입량은 95,000t밖에 되지 않았다. 이런 사정은 현재 조선이 약 240만t에 이르는 연간원유수요를 국내원유생산으로 충당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조선의 원유생산량이 해마다 늘어나자, 조선은 서해 대륙붕 유전에서 퍼올린 원유를 들여오는 남포항에 부두와 부두 사이의 바다를 메운 간척지를 조성하여 거기에 송유시설(oil terminal)을 크게 증설하고, 거대한 원통형 저유시설 8개를 추가로 건설하는 중이다.
서해 대륙붕에서 진행되는 원유생산은 조선과 중국의 합작사업이므로, 조선은 원유공동개발협정에 따라 거기서 생산되는 원유 가운데 일부를 중국으로 보내야 한다. 그래서 조선의 원유운송선들이 조선산 원유를 가득 싣고 저유시설이 있는 중국의 여러 항구들을 분주히 드나드는 모습이 요즈음 위성사진에 종종 나타나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하는 미국 연방의회는 최근 다른 나라들이 조선에 원유를 수출하지 못하게 막는 결의안을 채택하였으니, 이것은 조선을 자극하여 ‘조국통일대전’을 촉발시킬 요인으로 된다. 조선에 대한 미국의 오판은 너무 심하다.
셋째, 조선은 2016년 5월 6일과 7일에 진행된 조선로동당 제7차 대회에서 ‘조국통일대전’을 수행하기 위한 정치적 준비를 완료하였다. 김정은 조선로동당 위원장은 제7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사업총화보고를 하면서 “나라의 통일을 이룩하는 데는 평화적 방법과 비평화적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다 준비되여 있다”고 지적하고, “전체 인민이 우리의 철천지 원쑤인 미제국주의자들과는 반드시 결판을 내야 한다는 각오를 가지고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침략자들을 격멸하고 조국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전민항전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서야 합니다”고 말했다. <사진 8>
‘조국통일대전’을 수행하기 위한 조선의 정치적 준비들 가운데는 전시에 ‘1호작품’을 우선적으로 보위하기 위한 준비가 있다. 조선의 ‘전시사업세칙’ 제13항을 원문대로 인용하면, “모든 부문, 모든 단위들은 자기 단위에 모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 동지의 초상화, 석고상, 동상, 혁명 일가분들의 동상, 백두산 3대 장군을 형상한 미술작품들을 갱도모심실을 비롯하여 안전한 곳에 옮겨 모시고 보위한다”고 명시되었다.
그런데 <자유아시아방송> 2016년 11월 20일 보도에 따르면, 제7차 당대회 직후 조선에서는 혁명사적물을 긴급히 대피시키는 준비를 전국적으로 갖추었다고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에 대비하여 전국 각지 혁명사적관들에 있는 혁명사적물들을 안전하게 보위하기 위해 길이, 너비, 높이가 각각 1m인 방수천을 만들었고, 방수천으로 감싼 혁명사적물들을 안전하게 보위할 지하시설을 건설했으며, 긴급대피에 필요한 운반수단을 마련해두었다는 것이다.
넷째, 조선은 ‘조국통일대전’을 수행하기 위한 군사적 준비를 완료하였다. 2010년 6월 8일 한국 육군본부가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진행한 ‘육군토론회’에 이상우 당시 국방선진화추진위원장이 기조연설자로 출연하였는데, 그는 조선인민군이 “장거리투발수단에 장착한 대량살상무기로 전략중심을 강타하는 타격전을 준비하고 있으며, 대규모 정규군으로 전선을 돌파해 전략목표를 신속히 점령하는 기동전을 준비하고 있으며, 20만 명에 달하는 특수전력을 투입하는 특수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조선인민군이 타격전, 기동전, 특수전을 준비하는 중이라고 말했지만, 그 발언이 나온 때로부터 7년이 지난 오늘 조선인민군은 공격준비를 이미 끝냈다.
그래서 그의 지적에 공감한 나는 2013년 3월 16일 <자주민보>에 실린 ‘3일 만에 끝날 단기속결전’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무징후 선제타격전, 전선돌파 고속기동전, 사전침투 후방습격전, 전방위 포위섬멸전으로 전개될 조선인민군의 72시간 전쟁씨나리오를 서술한 바 있다. 그로부터 6일이 지난 2013년 3월 22일 조선의 웹싸이트 <우리민족끼리>는 그 글의 집필자인 나의 실명을 밝히고, ‘3일 만에 끝날 단기속결전’이라는 원제목을 달아놓은 4분 18초 분량의 동영상 편집물을 웹싸이트에 올려놓았다.
그랬더니 한국에서 파문이 일었다. 한국 주요언론매체들이 제각기 그 동영상 편집물에 관해 보도했을 뿐 아니라, 2013년 10월 11일 국회 국방위원회는 최윤희 당시 합참의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그 동영상을 시청하였다. 그 동영상을 국회의원들과 함께 시청한 합참의장 후보자는 동영상에 나오는 72시간 전쟁씨나리오가 실현될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물론 합참의장 후보자로서는 그런 중대하고 민감한 문제에 대해 그런 식으로 답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인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4. 화성-14형 출현으로 다시 써야 할 72시간 전쟁씨나리오
조선인민군의 72시간 전쟁씨나리오를 논할 때, 세 가지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첫째, <TV조선> 2015년 3월 10일 보도에 따르면, 조선인민군은 2013년 3월에 배포된 문건에서 “군인들이 김정은 최고사령관 동지의 무력통일구상을 실천으로 받든다”고 명시하였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3년 4월 “당의 무력통일사상을 신념으로 삼아야 한다”고 전군에 지시하였다고 한다. 이런 보도내용을 읽어보면, 김정은 최고사령관의 확고한 통일대전의지를 알 수 있고, 자기들의 최고사령관이 천명한 통일대전의지를 실행에 옮기려는 조선인민군의 각오를 엿볼 수 있다.
둘째, <조선일보> 2013년 11월 14일 보도에 따르면, 조보근 당시 국방정보본부장은 11월 5일 국회 정보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하여 조선인민군은 군사분계선에서 북쪽으로 150km 떨어진 평양-원산계선 이남지역에 배치해두었던 전체 병력의 70%(약 70만명)와 전체 화력의 80%를 군사분계선에서 북쪽으로 100km 떨어진 사리원-통천계선 이남지역으로 50km나 남하하여 재배치하였다고 지적하였고, 2012년에 조선인민군은 기존 21개 군단을 15개로 대폭 감축하는 대신에 기존 63개 사단을 90개로 대폭 증대하였다고 말했다.
조선인민군의 공격준비태세가 크게 강화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한 한국군 국방정보본부장의 발언은 조선인민군이 무징후 선제타격전, 전선돌파 고속기동전, 사전침투 후방습격전, 전방위 포위섬멸전을 실행에 옮길 전투준비를 완료하였음을 말해준다. <사진 9>
거기에 더하여, 조선인민군의 공격준비태세는 2017년 7월 중에 두 차례 진행된 화성-14형 시험발사로 최종 완결되었다. 조선은 이른바 ‘확장억제’를 감행하고 증원부대를 한반도에 급파하는 미국의 무력개입을 미국 본토 심장부에 대한 핵타격위협으로 원천차단할 최강의 타격수단인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가졌으므로, 그들의 공격준비태세가 최종적으로 완결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셋째, <동아일보> 2013년 8월 22일 보도에 따르면, 조선은 2004년 4월에 제정된 ‘전시사업세칙’을 2012년 9월에 개정하였는데, 개정본에는 조선이 ‘조국통일대전’에 돌입하는 세 가지 개전조건이 명시되었다고 한다. 그 문서에 서술된 세 가지 개전조건을 인용하면, “미제와 남조선괴뢰들의 침략전쟁의도가 확정되거나 공화국 북반부에 무력침공했을 때”, “남조선애국력량의 지원요구가 있거나 국내외에서 통일에 유리한 국면이 마련될 때”, “미제와 남조선괴뢰들이 국부지역에서 일으킨 군사적 도발행위가 확대될 때”라고 한다.
그런데 요즈음 트럼프 행정부가 모략선전, 외교고립, 경제제재, 인권공세, 전략자산투입 등으로 조선을 극도로 자극하면서, ‘평양점령’과 ‘참수작전’까지 들먹이는 전쟁연습을 멈추지 않는 것은, 조선의 시각에서 보면, 위에 인용한 ‘전시사업세칙’ 개정본에서 ‘조국통일대전’에 돌입할 개전조건으로 언급한 “미제와 남조선괴뢰들의 침략전쟁의도가 확정”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2013년 11월 5일 국회 정보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한 조보근 당시 국방정보본부장은 “군사력을 비교하면 우리가 열세”라고 인정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핵무력을 가진 군대와 재래식 무력밖에 없는 군대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지만, 핵무력을 논외로 치고, 재래식 무력만 비교해도 한국군의 전투력은 조선인민군의 전투력에 비해 절대적으로 열세다. 왜 그런가? 한국군 전방부대들은 말할 것도 없고 후방부대들까지 조선인민군의 선제타격위험, 기습공격위험에 거의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한국군이 조선인민군의 화력타격에 맞설 대응수단은 전투기밖에 없다. 그런데 한국군 전투기들은 작전 중에 고온발열탄(섬광탄)을 마구 쏘아도 조선인민군이 발사한 지대공미사일을 피할 수 없다. 한국군 전투기들에는 근적외선을 방출하는 낙후한 고온발열탄밖에 없는데, 조선인민군이 발사하는 지대공미사일은 고온발열탄의 근적외선을 외면하고 전투기 엔진에서 방출되는 중적외선(mid-infrared)을 감지, 추적하는 우수한 성능을 가졌다. 이것은 전투기, 수송기, 정찰기, 공중조기경보통제기, 해상초계기, 작전헬기를 포함한 한국군 항공무력을 구성하는 모든 기종이 사실상 무방비상태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전시에 한국군 공군기지들과 주한미국군 공군기지들은 조선인민군의 선제기습타격으로 가장 먼저 파괴될 것인데, 그런 불바다를 피해 전투기 몇 대가 살아남아도 5분 안에 격추될 것으로 예견된다. <사진 10>
전방에 공격형으로 배치된 조선인민군 70만 명의 남진공격을 막아내야 할 한국군이 전방에 배치한 방어병력은 24만 명밖에 되지 않아 한국군 지상군은 3대 1로 열세인데, 게다가 항공무력까지 상실하면, ‘반신불수’가 된 한국군은 전쟁을 어떻게 할 셈인가?
미국신안보센터(Center of a New American Security)는 2014년 3월 27일에 발표한 ‘만일 억제하지 못하면: 한반도 갈등을 다시 생각한다 (If Deterrence Fails: Rethinking Conflict on the Korean Peninsula)’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한국군은 전시에 사용할 기본탄약마저 충분히 보유하지 못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통일뉴스> 2009년 8월 3일 보도에 따르면, 당시 한미군수협력회의(LCC)에서 한국 국방부는 미국 국방부에게 한국군이 보유한 탄약이 부족하니 지원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미국은 “당신들이 탄약을 더 생산하든지 아니면 우리에게서 사가라”고 응답했다고 한다. 다급해진 한국 국방부는 미국 국방부의 대외군사판매(Foreign Military Sales) 절차를 협의하자고 하면서 탄약지원을 다시 요청하였으나 미국 국방부는 그런 절차는 없다고 잡아떼었다고 한다. 탄약이 부족한 한국군은 전쟁을 어떻게 할 셈인가?
<경향신문> 2017년 2월 19일 보도에 따르면, 한국군 중에 실전에 참가할 수 없는 ‘도움배려병사’가 40,000여 명이고, 특히 육군의 ‘도움배려병사’는 전체 병력의 10%에 이른다고 한다. 실전에 참가할 수 없는 병사가 그처럼 많은 한국군은 전쟁을 어떻게 할 셈인가?
정전 이후 6.25전쟁의 전투경험을 분석, 검토한 조선은 미국의 증원부대가 한반도에 도착하기 전에 전쟁을 속결하는 새로운 전법을 개발하였고, 그런 전법에 요구되는 전투력과 무장장비를 갖추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인민군이 준비한 초단기속결전은 6.25전쟁에서처럼 고속으로 종심 깊이 진격하여 적을 부산까지 밀어내는 3단계 공격전략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남측 전역을 동시에 포위하고, 집중타격과 전면공격, 사전침투와 후방습격으로 안팎에서, 전방위적으로 협공, 습격, 교란함으로써 짧은 시간 안에 적을 포위, 섬멸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국에 체류하는 미국인 비전투원 약 20만명은 일본으로 대피하는 탈출로가 끊겨 모두 억류당하게 될 것이 뻔하다. 전시에 그런 사태가 일어나면, 트럼프 대통령은 ‘확장억제’도 결정하지 못하고 증원부대도 출동시키지 못한 채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항복서한을 보내는 것으로 억류된 미국인 20만여 명을 구출하는, 세계전쟁사에서 전무후무한 대사변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 72시간 전쟁씨나리오의 마지막 장면이다.
김영환 국가정보대학원 교수가 2009년 초에 발표한 ‘대국민 안보보고서’에 서술한 바에 따르면, 1994년 4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인민무력부 작전지휘관들에게 “우리 인민들이 밤에 잠든 사이에 공격을 개시하여 순식간에 남조선을 해방하여 아침에 잠에서 깬 인민들이 남조선해방을 확인하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고 한다. 이 인용문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생전에 12시간 전쟁씨나리오를 구상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생전에 구상하였던 12시간 전쟁씨나리오를 실행하려는 조선인민군의 공격준비는 최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영도에 의해 완결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보는 까닭은 올해 7월 조선이 두 차례에 걸친 화성-14형 시험발사로 미국 본토 심장부를 타격할 전략적 핵공격력을 완성함으로써 미국의 ‘확장억제’를 억제할 수 있게 되었고, 미국군 증원부대의 한반도 출동을 차단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성-14형이 출현한 이후 조선인민군의 전쟁씨나리오를 72시간 이하로 단축한 개정본을 다시 써야 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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