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시보 2018년 08월 27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중국은 미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어떻게 이겼나?
2. 동아시아 평화를 위협하는 전범국의 핵야망
3. 고용간첩 도미탈주극으로 파탄된 대만의 핵개발사업
4. 닉슨의 동아시아철군정책과 저우언라이의 오판
1. 중국은 미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어떻게 이겼나?
1964년 4월 14일 미국 정책기획협의회(Policy Planning Council) 의장 월트 로스토우(Walt W. Rostow)가 작성하여 맥조오지 번디(McGeorge Bundy) 국가안보보좌관에게 1964년 4월 22일에 보낸 극비문서가 기밀해제되어 세상에 공개되었다. 그 문서에는 ‘중국 공산주의 핵시설들에 대해 가능한 기본행동의 탐색(An Exploration of the Possible Bases for Action Against the Chinese Communist Nuclear Facilities)’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극비문서에 따르면, 1961년 1월에 출범한 케네디 행정부와 1963년 11월에 출범한 존슨 행정부는 중국의 핵무기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중국의 핵시설들을 예방타격(preventive strike)으로 파괴하는 공습계획을 검토해왔는데, 린든 존슨(Lyndon B. Johnson) 대통령은 미국이 중국의 핵시설들을 공습할 경우 중국이 대만을 공격할 것으로 우려한 나머지, 공습계획 대신에 특수부대를 중국에 침투시키는 급변사태계획들(contingency plans)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중앙정보국(CIA)과 다른 관련부서들에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은 중국의 핵시설들을 파괴하려는 각종 작전계획을 검토했으면서도 그 가운데 어느 것도 실행하지 못했다.
왜 실행하지 못했을까? 중국에게 섣부른 불질을 하는 경우 전면전으로 확전되면,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고 쩔쩔매다가 대만이 중국에게 넘어갈 것으로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우려는 미국이 겁쟁이여서 생겨난 것만이 아니었다. 1950년대에 일어난 대만해협위기가 미국에게 심각한 교훈을 안겨주었기 때문에 그런 우려가 생겨난 것이었다.
중국내전에서 패하여 대만으로 도주한 장졔스(蔣介石) 정권은 1954년 8월 중국 본토 앞바다에 있는 섬들에 방대한 규모의 군사기지를 건설하였다. 대만군 병력 58,000명이 진먼(金門)섬을 뒤덮었고, 15,000명이 마추(馬祖)렬도에 밀려들었다. ‘본토수복’에 광분하는 장졔스의 도발을 방치할 수 없었던 중국은 진먼섬과 마추렬도에 대한 맹렬한 포격과 폭격을 계속하였다. 그 전투에서 중국인민해방군은 이장산(一江山)섬과 다첸(大陣)군도를 점령하였는데, 이것이 1954년 9월 3일부터 1955년 5월 1일까지 계속된 제1차 대만해협위기다. <사진 1>
대만이 중국에게 넘어갈까봐 다급해진 미국은 1955년 3월 3일 대만과 상호방위조약을 허겁지겁 체결하였고, 중국인민해방군의 대만상륙을 막아줄 미국 해군 제7함대를 대만해협에 황급히 들이밀었으며, 미국산 전투장비들로 대만군을 무장시켰다. 대만을 중국에서 떼어내려는 미국과 대만의 국가분렬책동은 진먼섬과 마추렬도에 대한 중국의 집중공격을 또 다시 촉발하였는데, 이것이 1958년 8월 23일부터 9월 22일까지 계속된 제2차 대만해협위기다.
중국의 통일전쟁을 우려한 미국이 중국의 핵시설을 파괴하지 못하고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중국은 핵무기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하여 중국은 1964년 10월 16일 첫 핵시험에서 성공하였고, 1966년 7월 1일에는 전략미사일부대인 제2포병부대를 창설하였으며, 1980년 5월 18일에는 미국 본토 전역에 핵타격을 가할 수 있는 둥펑(東風)-5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에서 성공하여 마침내 국가핵무력을 완성하였다. 중국이 국가핵무력을 완성한 것은 적국의 핵무기개발을 저지하려던 미국의 계획이 파탄되고, 미국이 적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패한 역사상 첫 사례로 되었다.
미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승리한 중국은 자기의 핵무력을 더욱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2008년 3월 <중국중앙텔레비전방송(CCTV)>은 중국인민해방군 전략미사일부대가 주둔하는 거대한 지하핵기지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그 길이가 약 5,000km에 이른다고 보도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서울에서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까지 거리가 약 5,000km인데, 중국이 그렇게 긴 지하핵기지를 건설했다는 말은 누구도 선뜻 믿기 힘들었다. 그런데 2009년 12월 중국인민해방군 언론매체인 <중국국방일보>가 위의 보도내용이 사실이라고 확인해주었다.
길이가 약 5,000km라는 것은 지하핵기지를 한 줄 직선으로 길게 뚫어놓았다는 뜻이 아니다. 중국의 지하핵기지는 수많은 지하시설, 지하도로, 지하철도가 그물망처럼 서로 연결된 거대한 지하도시다. 험준한 타이항(太行)산악지대에 건설된 지하핵기지에는 미사일발사구 수 백 개가 지표면으로 나 있는데,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진짜 발사구이고 어떤 것은 가짜 발사구이므로 적국 정찰위성의 식별능력을 교란할 수 있다.
2017년 5월 22일 <중국중앙텔레비전> 온라인 보도매체는 1966년에 창설된 중국의 첫 전략미사일부대인 둥펑(東風) 제1여단이 허난(河南)성 쑹산(嵩山)에 있는 지하핵기지 미사일발사구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하는 놀라운 장면을 공개하면서, 만일 중국이 핵타격을 받으면 10분 안에 보복핵타격을 가할 수 있다고 밝혔다. <사진 2>
중국이 미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승리한 때로부터 37년이 흐른 2017년 11월 29일 조선은 미국 본토 전역에 전략핵타격을 가할 수 있는 화성-15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에서 성공하여 마침내 국가핵무력을 완성하였고, 미국과 맞선 운명적인 핵대결에서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승리를 거두었다. 조선의 승리는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뒤집어버린 엄청난 사변이었다.
중국은 첫 핵시험에서부터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로 국가핵무력을 완성하기까지 16년 걸렸으나, 조선은 첫 핵시험에서부터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로 국가핵무력을 완성하기까지 11년 걸렸다.
핵무기를 틀어쥐고 세계를 지배한다고 떠들어댔으나, 중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패한 핵제국은 조선과 맞선 핵대결에서 또 패했다. 지난날 중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패한 미국은 대만에서 미국군을 철수해야 했고, 오늘날 조선과 맞선 핵대결에서 패한 미국은 한국에서 미국군을 철수해야 하는 궁지에 빠졌다. 도널드 트럼프(Donald J. Trump) 미국 대통령은 핵무기현대화사업으로 “위대한 미국을 재건하겠노라”고 큰 소리를 치고 있지만, 지난 반세기에 걸쳐 힘이 차츰 약해지고 있는 핵제국의 몰골을 신형 핵무기로 감출 수는 없다.
2. 동아시아 평화를 위협하는 전범국의 핵야망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핵탄개발을 시도한 나라는 전범국 일본이다. 일본은 이미 1940년대에 핵탄개발에 손을 댔다. 당시 일본은 핵탄개발부문에서 미국과 경쟁하려고 하였다. 일제는 나치 독일과 협력하여 핵탄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미국은 영국과 협력하여 핵탄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일본과 미국 가운데서 어느 나라가 먼저 핵탄을 만드는가에 따라 태평양전쟁의 운명이 결정될 판이었다.
2015년 7월 26일 일본 언론매체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1944년 10월 4일 일본 해군은 교또제국대학(당시 명칭)의 핵과학자 아라까쓰 분사꾸(荒勝 文策) 교수에게 핵탄개발을 의뢰하였는데, 아라까쓰 교수와 도꾜계기제작소가 각각 작성한 우라늄농축 원심분리기 설계도면 두 점이 그 대학의 이전 방사성동위원소연구소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설계도면에는 원심분리기제작이 완성되는 날짜가 적혀있었는데, 일제 패망 나흘 뒤인 1945년 8월 19일이 완성예정일이었다. 그들이 거의 완성해가던 원심분리기는 미국군의 공습으로 파괴되었다.
일본 육군은 일본 해군보다 먼저 핵탄개발에 손을 댔다. 일본 육군은 1941년 도꾜제국대학(당시 명칭)의 저명한 핵과학자 니시나 요시오(仁科 芳雄) 교수에게 핵탄개발을 의뢰했고, 그로부터 2년 뒤 니시나는 폭발위력 10,000t급 핵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비밀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 보고를 받은 1급 전범 도조 히데끼(東條 英機) 일본 총리는 일본 육군항공본부에게 핵탄을 만들라고 지시했고, 핵탄개발사업은 1943년 9월부터 추진되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하여 일본을 점령한 미국은 일제의 핵탄연구시설들을 파괴하였고, 핵탄연구문서들을 압수하였다. 그 과정에서 미국은 일제의 핵탄개발기술이 어느 수준에 이르렀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일제가 패망한 직후 일제의 핵탄개발사업을 폐지하기 위해 미국이 일본에 급파한 핵공학전문가집단의 일원으로 일제의 핵탄개발사업을 현장에서 조사하였던 로벗 퍼먼(Robert R. Furman)은 2008년 미국 언론매체와 진행한 대담에서 1945년 8월 당시 일제의 핵탄개발기술은 초기단계에 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런 심층정보를 모르는 몇몇 미국인 연구가들은 1945년 8월 12일 새벽 일제가 식민지조선의 흥남 앞바다에서 감행한 수중대폭발시험이 핵시험이었다고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고성능폭약을 터뜨린 고폭시험이었다. <사진 3>
일제가 패망하여 핵야망이 사라지는 듯했지만, 패망 이후 일본은 전범국으로서 자기 죄행을 반성하고 자숙하기는커녕 핵야망을 버리지 않았다. 흉악한 1급 전범으로 마땅히 사형을 당했어야 하지만, 미국이 사형집행 직전에 극적으로 살려주어 전후 일본을 미국의 요구대로 재건하는 임무를 맡긴 기시 노부스께(岸 信介) 일본 총리는 1957년에 “현행 헌법 아래서도 자위를 위한 핵보유는 용인된다”고 하면서 핵야망을 드러냈다.
2013년 11월 29일 미국 노틸러스 연구소(Nautilus Institute)가 공개한, 미국 국무부 원동지역 연구부가 1957년 8월 2일에 작성한 보고서는 “1950년대 일본의 보수정권은 원동지역이 냉전적 긴장상태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핵무기를 생산하는 계획을 실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고 하면서 “기시 노부스께 일본 총리는 핵무기가 일본 방위의 핵심이 될 것이라고 믿었지만, 핵무기 생산을 반대하는 여론을 무마하여야 했기 때문에 핵무기를 만들지 못했다”고 지적하였다.
2014년 7월 24일 일본 텔레비전방송 <NHK>가 기밀해제된 일본 외교문서를 보도하였는데, 그 문서에는 기시 노부스께의 뒤를 이어 일본 총리가 된 이께다 하야또(池田 勇人)와 딘 러스크(David Dean Rusk) 미국 국무장관이 1964년 1월 28일 일본 도꾜에 있는 총리관저에서 진행한 회담내용이 담겼다. 회담에서 러스크 국무장관은 중국이 1~2년 안에 핵시험을 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그 말을 들은 이께다 총리는 중국이 한 두 차례 핵시험을 해도 정세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중국의 과학수준과 경제수준을 보면, 핵시험은 불가능하지 않지만 (실전에 사용될) 핵무기를 만드는 것은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께다는 당시 중국의 핵무기개발능력을 과소평가하였다. 이께다가 러스크 앞에서 과소평가발언을 늘어놓은 때로부터 9개월 만에 중국은 핵시험에서 성공하였고, 1966년 10월 27일에는 사거리가 1,250km인 둥펑-2 탄도미사일에 전술핵탄두를 장착하고 시험발사하여 기폭시켰으며, 1967년 6월 17일에는 3.3메가톤급 수소탄 기폭시험에서 성공하였다.
중국의 핵무기개발은 일본을 자극하였다. <NHK> 2010년 10월 4일 보도에 따르면, 1964년 중국의 첫 핵시험 직후 일본 정부는 비밀보고서에서 중국의 핵보유가 일본에 미치는 정치적, 심리적 영향이 크다고 하면서, 일본은 “언제라도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는 잠재능력을 중국보다 높은 수준에서 항상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고 한다.
일본의 핵야망이 꿈틀거리자 미국은 그것을 억제하기 위해 ‘핵우산’ 공약을 확인해주어야 했다. 일본 외무성이 2008년 12월 22일에 공개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당시 중국의 핵무기개발에 자극을 받은 사또 에이사꾸(佐藤 英作) 일본 총리는 1965년 1월 12일부터 13일까지 워싱턴을 방문하여 린든 존슨 대통령과 회담하면서 일본에 대한 핵우산 제공을 보증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존슨 대통령은 즉석에서 “내가 보증한다”는 확답을 주었다고 한다. 또한 사또 총리는 로벗 맥나마라(Robert S. McNamara) 미국 국방장관과 진행한 회담에서도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미국은 즉각 핵공격을 포함한 반격을 해주기 바란다”고 하면서, “해상에 배치된 핵무기탑재 함선이라면 즉각 핵공격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고 물었다. 이것은 ‘핵우산’ 공약을 보증해달라는 소리였다. 말귀를 금방 알아차린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해상에 배치된 핵무기탑재 함선이라면 기술적인 문제는 없다”고 맞장구를 쳤다.
2007년 9월 14일 기밀해제된 일본 외교문서에 따르면, 중국이 수소탄 기폭시험에서 성공한 직후인 1967년 11월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워싱턴을 또 다시 방문한 사또 총리와 회담하면서 그에게 “핵무기 사용이 중국의 핵위협을 저지하기 위한 방도로 간주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공약확인과 더불어, 미국은 일본과 핵밀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일본의 핵야망을 억제하였다. 1969년 11월 19일 워싱턴에서 진행된 미일정상회담에서 리처드 닉슨(Richard M. Nixon) 대통령과 사또 에이사꾸 총리는 긴급사태가 일어나는 경우 일본은 미국이 오끼나와 미국군기지에 핵무기를 반입하거나 미국의 핵전략자산이 오끼나와를 통과하는 것을 인정하고, 미국은 오끼나와에서 핵무기를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게 준비한다는 핵밀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과 핵밀약을 체결하였으면서도 핵야망을 포기하지 않고 은밀히 책동하였다. 독일 외무성의 기밀문서를 인용한 <NHK> 2010년 10월 4일 보도와 <요미우리신붕> 2010년 11월 20일 보도에 따르면, 1969년 2월 3일부터 5일까지 일본 도꾜에서 진행된 일본-서독 정책기획협의에서 일본 외무성 관리들은 “국제적으로 감시해도 핵분열물질을 5% 정도 추출하는 것을 차단하지는 못하므로, 핵탄생산기반을 구축할 수 있다. 일본은 핵무기 원료를 만드는 기술을 가졌다”고 밝히면서, 서독에게 핵공학기술협력을 요청했는데, 서독 외무성 대표단은 자기들이 그 문제를 결정할 수 없다고 하면서 발뺌하였다고 한다.
그보다 앞서, 1967년 12월 사또 총리는 일본 국회에서 의원들의 질문에 답변하던 중에 이른바 ‘비핵3원칙’이라는 것을 언급하면서 일본은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고, 반입하지 않고, 만들지 않겠다고 뇌까렸지만, 그것은 흑막 뒤에서 핵야망을 실현하려고 책동하면서, 무대 위에서는 마치 핵야망을 포기한 것처럼 연출한 희대의 사기극이었다. 사기극에 감쪽같이 속은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비핵3원칙’을 제시한 ‘공로’를 인정하여 1974년 3월 그에게 노벨평화상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일본이 핵야망을 실현하려고 책동해도, 미국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얼마 전, 조선이 국가핵무력을 완성한 직후 일본의 핵야망은 또 다시 꿈틀거렸지만, 일본은 중국이 핵무기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1960년대에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핵야망을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미국의 손아귀에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3. 고용간첩 도미탈주극으로 파탄된 대만의 핵개발사업
1988년 1월 9일 미국 서북단에 있는 워싱턴주 씨애틀-타코마 국제공항에 미국 중앙정보국 요원들이 모여들었다. 이윽고 홍콩발 미국 민항기에서 내린 중국인 한 사람이 특별입국절차를 마치더니 중앙정보국 전용차량을 타고 순식간에 공항을 빠져나갔다. 그 중국인은 미국 중앙정보국에게 포섭되어 오랜 기간 대만에서 고용간첩으로 암약해온 장셴이(張憲義)였다. 그는 당시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던 대만 중산과학연구원 제1연구소 부소장이었다. 1988년 1월 13일 장셴이는 미국 연방의회 비밀청문회에서 대만의 핵무기개발에 관한 극비정보를 털어놓았다. 첩보영화장면처럼 흘러가는 이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대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일본이 그러했던 것처럼 대만도 중국의 첫 핵시험에서 자극을 받고 핵야망을 품었다. 대만이 중산과학연구원을 설립하고 ‘신주(新竹)계획’이라는 이름의 핵무기개발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한 때는 1969년이었다. 당시 중산과학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던 장셴이는 미국에 유학하였는데, 그가 미국에서 핵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때는 1973년이었다. 미국 중앙정보국은 대만이 핵무기개발사업을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다시 말해서 장셴이가 1965년부터 1968년까지 대만 국립칭화대학에서 핵공학을 공부할 때부터 그를 포섭하여 고용간첩으로 육성하였다.
대만은 중국이 국가핵무력을 완성하였던 1980년에 기존 ‘신주계획’을 ‘타오위안(桃園)계획’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핵무기개발사업을 가속화하였는데, 대만의 핵무기개발사업이 가속화될수록 장셴이의 간첩활동도 더욱 대담해지고 활발해졌다. 대만은 핑둥(屛東)현에 건설된 주퍼(九鵬)지하시설 안에 각종 핵공학설비들을 들여놓고 플루토늄추출기술을 확보하였고, 연속적인 고폭시험으로 핵무기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핵탄두운반수단을 만들기 위해 ‘텐마(天馬)계획’이라는 이름의 탄도미사일개발사업도 병진시켰다. 그리하여 대만은 늦어도 1989년까지 핵무기개발을 완료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진 4>
만일 대만이 핵무기를 만들고 독립을 선포하면, 중국은 즉각 대만을 복속시키는 통일전쟁을 단행할 판이었다. 그렇게 되면, 핵보유국과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따르는 미국은 발만 동동 구르다가 대만을 중국에게 넘겨주게 될 판이었다. 1987년 중국-대만-미국 삼각관계는 극도의 긴장 속에 휘말렸다.
중국이 통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대만이 중국에게 넘어가는 씨나리오는 미국에게는 대재앙인데, 미국이 그런 재앙을 피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미국 중앙정보국이 20여 년 동안 대만 핵무기개발사업의 핵심부에 박아둔 고용간첩 장셴이를 미국으로 빼돌려 대만의 핵무기개발사업을 파탄시키는 것이었다.
결국 1988년 1월 8일에 일어난 장셴이와 그 가족의 극적인 도미탈주극으로 대만의 핵무기개발사업은 파탄되었다. 장셴이의 도미탈주극을 보고받고 심한 충격에 빠진 대만 총통 장징궈(蔣經國)는 병석에서 피를 토하다가, 장셴이가 미국 연방의회 비밀청문회에서 대만의 핵개발사업에 관한 극비정보를 털어놓은 바로 그날 숨을 거두었고, 그의 뒤를 이어 미국의 말을 잘 듣는 리덩후이(李登輝)가 권좌에 올랐다. 리덩후이는 미국이 정해준 비핵화씨나리오에 따라 대만의 핵무기개발사업을 폐기하였다.
그렇다면 대만은 핵야망을 영구히 포기하였던가? 리덩후이가 핵무기개발사업을 폐기한 때로부터 18년이 지난 2007년 11월 11일 중국 홍콩에서 발간되는 시사주간지 <아주주간>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대만이 핵보유국인 인도로부터 비밀리에 핵무기개발에 관련된 기술지원을 받고 있다는 폭로기사였다. 보도기사에 따르면, 1998년 5월 인도가 핵시험에서 성공하였을 때 인도 국방장관으로 재직하였으며, 평소에 중국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쉬리 조지 퍼난데스(Shri George Fernandes)는 2004년 11월 대만을 처음 공개적으로 방문하여 대만 총통 천수이볜(陳水扁)을 만난 이후 여러 차례 비공개로 대만을 방문하였는데, 대만에 갈 때마다 그는 총통의 안보자문기관인 국가안전회의 인사들을 비밀리에 만났고, 대만 국가안전회의 인사들도 여러 차례 인도를 비밀리에 답방하여 인도 국방부 관리들을 만났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대만의 야당인사는 2007년 10월 19일 대만 입법원에서 대정부질의를 하면서 천수이볜 정부가 인도의 전직 국방장관과 핵무기개발전문가들을 비밀리에 대만으로 초청하였다고 폭로하였다.
대만이 인도의 기술협력을 받으며 핵무기개발을 재개하였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는 보이지 않지만, 양자 사이의 비공개 교류는 의심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2020년까지 대만을 복속하겠다고 벼르고 있는 중국이 대만의 분리독립책동을 억제하려는 군사활동을 대만 주변에서 계속 벌이고 있는 오늘의 긴장된 정세에서 대만이 또 다시 핵야망을 추구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생긴다.
4. 닉슨의 동아시아철군정책과 저우언라이의 오판
1960년대 말에 핵탄두를 개발한 중국은 그것을 운반할 탄도미사일개발에도 박차를 가했다. 1970년 1월 30일 중국은 둥펑-4 중거리탄도미사일 시험발사에서 성공하였다. 2단형 로켓으로 설계된 이 중거리탄도미사일이 실전배치되면, 미국의 서태평양전략거점인 괌(Guam)을 사정권 안에 둘 수 있었다. 또한 중국은 1970년 4월 24일 중국의 첫 인공위성 둥팡홍(東方紅)-1호를 탑재한 위성운반로켓 창정(長征)-1호를 성공적으로 쏘아올렸다. 이것은 중국이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하기 시작하였음을 말해주는 사건이었다.
국가핵무력 완성을 향한 중국의 움직임을 감시해오던 미국은 국가안보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하였다. 그리하여 미국은 신흥 핵보유국 중국과 관계를 개선하는 수밖에 없었다. 닉슨 대통령은 자기의 심복 헨리 키씬저(Henry A. Kissinger) 국가안보보좌관에게 대중관계개선을 추진하라는 특명을 주고, 그를 베이징에 밀사로 파견하였다. 1971년 7월 9일 베이징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와 키씬저 미국 대통령 밀사의 비밀회담이 진행되었다. 회담에서 저우언라이는 철군지역들을 지적하였는데, 그가 중요순위에 따라 열거한 지역은 베트남, 대만, 한반도였다.
그런데 당시 중국은 닉슨의 동아시아철군정책에 관한 심층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닉슨의 동아시아철군정책은 베트남중부전선 케산전투에서 미국군이 패한 이후 베트남에서 미국군을 완전히 철수하고, 중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패한 이후 대만에서도 미국군을 완전히 철수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닉슨은 1968년 1월 23일 미국 첩보선 푸에블로호가 원산 앞바다에서 조선인민군 해군에게 나포된 사건, 1969년 4월 15일 미국 첩보기 EC-121이 동해 상공에서 조선인민군 공군 전투기에게 격추당한 사건으로 핵제국의 체면이 무참히 짓밟힌 한반도에서도 미국군을 완전히 철수하려고 생각하였다. <사진 5>
1969년 8월 21일 미국 쌘프랜시스코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닉슨은 박정희에게 “북의 도발이 계속되기 때문에 주한미국군을 철수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철군을 두려워하는 박정희를 속인 거짓말이었다. 닉슨은 자신을 수행하여 한미정상회담에 배석한 윌리엄 포터(William J. Poter) 주한미국대사를 한미정상회담 직후 따로 부르더니, 주한미국군 철수훈령을 곧 내리겠다고 그에게 말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국무부, 국방부, 중앙정보국은 닉슨 대통령의 철군준비지시를 받고 주한미국군 철수문제를 검토하였다.
그런데 키씬저가 철군을 강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닉슨은 주한미국군을 완전히 철수하려던 자신의 구상을 접고, 감군훈령을 내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닉슨의 감군훈령에 따라, 미국 국방부는 1971년 3월 27일 주한미국군 제7사단을 전격 철수하였고, 남겨둔 제2사단은 서부전선 방어임무를 한국군 전방사단에게 넘겨주고 뒤쪽으로 물러서게 조치하였다.
키씬저는 왜 닉슨의 철군구상을 반대하였을까? 이 물음에 명쾌한 해답을 주는 문서들은 찾아볼 수 없지만, 당시 그는 두 가지 반론을 제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주한미국군이 철수하는 경우, 박정희 정권이 붕괴되어 한국을 잃어버리게 될 것으로 우려하였기 때문에 키씬저는 닉슨의 철군구상을 반대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둘째, 주한미국군이 철수하고, 미국이 한국을 잃어버리는 경우, 정세급변으로 충격을 받은 일본이 핵야망을 다시 추구하게 될 것으로 우려하였기 때문에 키씬저는 닉슨의 철군구상을 반대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닉슨의 철군구상은 키씬저가 반대하는 바람에 흐지부지되고, 제7사단만 철수하였는데, 당시 그런 내막을 알지 못한 중국은 제7사단 철수가 주한미국군을 단계적으로 완전히 철수하는 ‘서막’인 것으로 오판하였다. 미국군이 베트남과 대만에서 각각 철수하기 훨씬 전에 한반도에서 먼저 제7사단이 전격 철수했으니, 중국이 그렇게 오판할 만도 했다.
중국이 그런 오판에 빠져 있었던 때, 다시 말해서 주한미국군 제7사단이 철수된 때로부터 약 석 달 뒤, 키씬저가 베이징에 나타났다. 그를 만난 저우언라이는 미국이 주한미국군을 철수하고 일본자위대를 한국에 파병하려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1971년 7월 11일 베이징에서 키씬저를 만난 저우언라이는 “25년 뒤 미국이 패권적 지위를 누리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일본은 강해졌다. 만일 지금 원동지역에서 미국군이 모두 철수하면, 일본을 강화시켜 아시아 나라들을 통제하는 데서 미국의 전위대로 내세우려는 것이 미국의 목적”이라고 지적하면서, 미국이 주한미국군을 철수하고 일본자위대를 한국에 파병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질문을 키씬저에게 들이댔다.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은 키씬저는 미국이 일본의 해외팽창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원론적인 답변만 꺼내놓았는데, 저우언라이의 의심은 그런 답변으로 해소될 수 없었다. 1971년 10월 22일 베이징에서 진행된 제2차 회담에서 저우언라이는 키씬저에게서 확답을 받아내기 위해 이렇게 다그쳤다. “나는 한 마디 덧붙고 싶다. 만일 당신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남조선에서 미국군을 철수하는 것이라면, 미국군을 일본군으로 대체하는 것도 당신들의 목표인가? 그런가, 그렇지 않은가?” 이 물음에 키씬저는 이렇게 답변했다. “주한미국군을 일본자위대로 대체하는 것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 일본자위대의 대만 파병에 대해 내가 어제 언급했던(반대했다는 뜻-옮긴이) 일반적인 원칙과 똑같다. 미국은 일본의 군사팽창을 반대한다.”
닉슨의 동아시아철군정책을 오판한 저우언라이는 주한미국군을 일본자위대로 대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키씬저의 답변을 믿을 수 없었다. 일본자위대가 한국에 파병되는 최악의 씨나리오를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 저우언라이는 키씬저에게 주한미국군 철수를 더 이상 요구하지 않았다.
만일 저우언라이가 정세를 오판하지 않고 키씬저에게 주한미국군 철수를 강하게 요구하였더라면, 중국과 맞선 핵대결에서 패해 수세에 몰린 닉슨은 자기의 철군구상을 실행에 옮겼을 것이며, 그런 정세급변에 대처하지 못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붕괴되고, 1971년 4월 27일 대선에서 ‘3단계 평화통일’을 천명한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김대중 정부와 북측 정부는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에서 김일성 주석이 제시한 조국통일 3대 원칙을 구현하여 통일공화국을 건설하였을지 모른다.
당시 베트남이 통일된 과정을 보면, 1968년 1월 21일부터 7월 9일까지 계속된 케산전투에서 패한 미국은 1973년 3월 29일 베트남에서 미국군을 철수했고,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75년 4월 30일 베트남민족은 통일공화국을 건설하였다. 베트남의 역사적 경험은 미국의 패배로부터 철군까지 5년, 철군에서 통일까지 2년밖에 걸리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1970년대 초 우리 민족에게 다가왔던 철군의 기회는 사라졌고, 전쟁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정전체제는 그대로 남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긴 세월이 흐른 오늘 우리 민족은 금은보화보다 더 귀중한 두 번째 기회를 맞았다. 어떤 기회인가?
조선의 국가핵무력 완성으로 미국이 조선과 맞선 핵대결에서 패하였고, 근 반세기 전에 닉슨 대통령이 주한미국군 철수를 구상하였던 것처럼 오늘 트럼프 대통령도 주한미국군 철수를 구상하고 있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조미핵대결에서 승리한 기세로 주한미국군을 철수시키고 자주통일을 실현하려는 전략구상을 추진하고 있고, 문재인 대통령은 그토록 험악했던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하에서도 3단계 평화통일론을 외쳤던 김대중 대통령을 따라가지는 못하지만 남북관계개선에는 상당히 적극적이다.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그런 변화들이 정전-분단체제를 뒤흔드는 가운데, 남북정상회담, 조미정상회담, 조중정상회담이 잇달아 성사되면서 종전선언 발표가 일정에 올랐고, 철군기회가 마침내 시야에 들어왔다.
위와 같은 정세인식에 이르면, 올해 1월부터 주체적 조건들과 객관적 조건들이 서로 착착 맞물리면서 조국통일정세가 성숙되어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나니, 8천만 우리 민족이 힘을 합쳐 몇 해 안에 통일공화국을 건설할 눈부신 내일을 뉘라서 감히 외면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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