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시보 2018년 08월 13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태평양전쟁 종전, 태평양지배체제 성립
2. 퀘벡비밀군사회담의 내막
3. 전세를 바꿔놓은 미국군의 악전고투 118일
4. 미국이 규슈상륙 포기하고 핵폭탄개발에 매달린 사연
5. 소련의 대일전쟁, 조선의 조국해방전투, 미국의 핵폭탄투하
6. 73년 묵은 태평양지배체제가 흔들리고 있다
7. 모든 문제는 종전과 철군으로 귀결된다
1. 태평양전쟁 종전, 태평양지배체제 성립
해마다 8월 15일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강점에서 해방된 날이다. 일왕 히로히또(裕仁)는 1945년 8월 15일 정오 <NHK> 라디오방송을 통해 이른바 ‘대동아전쟁종결의 조서(詔書)’라는 문서를 읽어 내려간 녹음방송을 내보냈다. 사람들은 그 녹음방송을 일제의 항복선언이라고 알고 있지만, ‘조서’에서 항복이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다. ‘조서’는 어려운 한자말로 작성되었을 뿐 아니라, 1940년대의 저급한 라디오방송 송출기술 때문에 무슨 소리를 중얼거리는지 청취하기 힘들었고, 그래서 그 방송내용을 정확히 알아들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주목되는 것은, 그 ‘조서’가 대일전쟁에서 승리한 국제연합군에게 보내는 항복선언이 아니라 일본 국민에게 보내는 대국민담화였다는 사실이다. 그러했으니 항복이라는 단어가 ‘조서’에 들어있을 리 없었다.
그렇지만 항복의사를 간접적으로 표시한 것으로 해석될 만한 문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조서’에는 일왕 히로히또가 미국, 소련, 영국, 중국에게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할 것을 일본제국정부에게 지시하였다고 서술한 문구가 들어있었다. 그가 ‘조서’에서 언급한 공동선언이라는 것은 1945년 7월 26일 미국, 소련, 영국, 중국이 일제에게 항복을 요구하였던 포츠담선언(Potsdam Declaration)을 뜻한다. 하지만 당시 포츠담선언이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한 일본 국민들은 일왕 히로히또가 ‘조서’에서 간접적으로 항복의사를 표시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을 뿐이다. <사진 1>
그로부터 73년이 흘렀다.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끝난 그 전쟁을 오늘 다시 논하는 까닭은, 우리 민족이 겪는 고통과 불행의 화근인 한반도 분단을 태평양전쟁 종전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73년 전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종전된 그 전쟁은 어떤 전쟁이었던가? 일제가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때는 1940년 7월 26일이었다.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하여 일본을 점령한 미국 점령군사령부는 1945년 12월 15일부터 점령지에서 대동아전쟁이라는 말을 쓰지 못하게 금하면서 그냥 전쟁이라는 말만 쓰도록 조치하였다. 얼마 뒤부터 미국은 그 전쟁을 태평양전쟁(Pacific War)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고, 그 전쟁명칭은 굳어져버렸다.
전쟁명칭에 전쟁목적이 비껴있다. 미국이 그 전쟁에서 노린 목적은 일제를 패망시키고 태평양을 장악하여 그 대양을 자국이 지배하는 ‘미국해(American Sea)’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은 태평양과 아시아대륙을 모두 점령할 전쟁능력을 갖지 못했으므로, 미국의 야욕은 태평양을 지배하려는 것이었다. 1897년에 하와이왕국을 병탄한 미국은 당시 서태평양을 지배하던 에스빠냐(스페인이라는 미국식 국호를 쓰지 말고, 그 나라의 정식 국호를 써야 함)를 상대로 1899년부터 1902년까지 전쟁을 벌여 필리핀과 괌(Guam)을 점령하고 태평양지배권을 틀어쥐었다.
그런데 1941년 12월 1일 일왕 히로히또는 전시각료회의에서 전쟁을 태평양으로 확전하기로 결정하였고, 그 결정에 따라 일본군이 1941년 12월 8일 새벽 하와이 진주항(Pearl Harbor라는 지명은 진주만이 아니라 진주항으로 번역해야 함)을 기습공격하여 미국의 태평양지배권에 도전하였다. <요미우리신붕> 2018년 7월 23일 보도에 따르면, 일본군의 진주항 기습공격을 몇 시간 앞둔 1941년 12월 7일 오후 8시 30분경 일본 총리 도조 히데끼(東條英機)는 “(일본은) 이미 이겼다”고 떠들어대며 망상에 빠졌다고 한다. 망상은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그들은 태평양전쟁이 일본의 패망과 미국의 일본점령으로 끝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의 전략목표는 일본을 점령하고 태평양지배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미 필리핀과 괌을 점령하고 서태평양 남부해역을 장악한 미국은 일본점령을 태평양지배체제를 완성하는 마지막 단계라고 생각했다. 미국의 일본점령은 1951년 9월 8일 쌘프랜시스코 강화조약 이후 미국군의 무기한 일본주둔으로 변형되었다. 태평양지배체제는 지난 73년 동안 변함없이 유지되어왔다.
2. 퀘벡비밀군사회담의 내막
일본의 진주항 기습공격으로 선제타격을 받은 미국은 비밀군사회담에서 일본점령을 태평양전쟁의 전략목표로 확정하였다. 그 비밀군사회담은 1943년 8월 17일부터 24일까지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로저벌트(Franklin D. Roosevelt, 루즈벨트라는 한국식 발음표기는 오류)와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캐나다 퀘벡시에서 만난 퀘벡비밀군사회담(Quebec Secret Military Conference)이다. 원래는 이오시프 비싸리오노위쯔 쓰딸린(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 조섭 스탈린이라는 발음표기는 미국식으로 왜곡된 것)도 퀘벡비밀회담에 참석하기로 했으나, 소련군과 독일군이 격렬하게 싸운 쿠르스크전투(Battle of Kursk)가 1943년 7월 5일부터 8월 23일까지 계속되는 바람에 참석하지 못했다. 처칠은 캐나다 총리 맥켄지 킹(Mackenzie King)도 비밀회담에 참석시키려고 하였지만, 로저벌트가 반대하는 바람에 맥켄지 킹은 의전행사에만 얼굴을 내밀었다.
퀘벡비밀군사회담에서 로저벌트와 처칠은 전쟁수행에 필요한 일본의 전략자원(석유, 철강, 식량)을 소모시키기 위한 전쟁전략, 일본렬도상륙을 위한 공격거점을 확보하는 전쟁전략을 검토했다. 미영합동참모본부가 1942년 8월에 공동으로 작성한 ‘일본을 타파하기 위한 평가와 계획(Appreciation and Plan for the Defeat of Japan)’이라는 제목의 전쟁계획서에는 일본렬도에 상륙하는 작전계획이 들어있지 않았는데, 퀘벡비밀군사회담에서 일본렬도에 상륙하여 일본을 점령하는 것이 전쟁목표로 정해졌다. <사진 2>
당시 미영합동참모본부가 작성한 기밀문서에 따르면, 미국 전쟁부(War Department)에서는 독일이 항복하면 1년 안에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였지만, 미국 해군과 육군 사이에서 대일전쟁전략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당시 미국군에는 육군과 해군만 있었고, 공군은 없었다. 미국 해군은 일본에 대한 해상봉쇄와 공중폭격을 주장하면서, 중국 샹하이(上海)와 조선에 있는 일본군 항공기지들을 점령하여 일본렬도를 폭격하기 위한 공격거점을 확보하는 전략을 내놓았다. 하지만 미국 육군은 그런 전략은 전쟁의 장기화와 엄청난 인명손실을 불러올 뿐이라고 반대하면서, 대규모 공격력으로 일본렬도를 직접 타격하는 전략을 꺼내놓았는데, 전략논쟁은 결국 육군의 승리로 끝났다.
당시 미국군이 일본렬도에 상륙할 수 있는 지대는 두 군데였다. 하나는 일본렬도 서남부에 있는 규슈(九州)남부 해안지대였고, 다른 하나는 일본렬도 중앙부에 있는, 수도권으로 연결되는 간또(關東)지방 해안지대였다. 그래서 미영합동참모본부는 일본을 두 단계에 걸쳐 점령하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먼저 규슈를 점령하여 그 지역의 항공기지들을 장악한 다음, 그 항공기지들에서 출격한 폭격기들의 지원을 받는 25개 사단이 도꾜만(東京灣)에 상륙하는 작전계획이었다. 규슈점령작전을 올림픽작전(Operation Olympic)이라고 불렀고, 도꾜만상륙작전을 코로닛작전(Operation Coronet)이라고 불렀다. 규슈를 점령하는 올림픽작전 개시일은 1945년 11월 1일로 예정되었고, 도꾜만에 상륙하는 코로닛작전 개시일은 1946년 3월 1일로 예정되었다.
3. 전세를 바꿔놓은 미국군의 악전고투 118일
미영합동참모본부가 1945년 11월 1일과 1946년 3월 1일로 예정한 전쟁일정을 대폭 앞당겨야 하는 사정이 생겼으니, 그것이 바로 얄타회담(Yalta Conference)이다.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흑해 북쪽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로저벌트, 쓰딸린, 처칠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얄타회담에서 쓰딸린은 독일이 항복하는 경우 2~3개월 뒤에 대일전쟁을 개전하겠노라고 약속하였다. 유럽전선에 배치된 소련군 병력과 전투장비를 대일전쟁을 벌일 원동지역(Far East라는 지명에서 Far는 멀다는 뜻이므로 극동지역이 아니라 원동지역으로 번역해야 함)으로 이동시키려면 2~3개월 걸릴 것으로 예상한 것이었다.
쓰딸린이 대일전쟁 참전을 약속하자 미국은 불안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미국보다 한 발 앞서 소련이 일본을 점령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일본점령이라는 전쟁목적을 놓고 미국과 소련이 치열한 경쟁을 벌인 태평양전쟁 말기의 상황은 그렇게 조성되었다. <사진 3>
소련과의 경쟁을 의식한 미국은 규슈점령을 예정일보다 크게 앞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전황은 미국의 욕망을 따라주지 않았다. 미국군이 규슈에 상륙하려면 우선 오끼나와(沖繩)를 점령해야 했고, 오끼나와를 점령하려면 이오섬(硫黃島)부터 점령해야 했다. 이오섬은 도꾜에서 남쪽으로 1,050km 떨어진 태평양에 떠 있는, 면적이 21㎢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섬이다. 사정이 급해진 미국군은 얄타회담이 끝난 날로부터 8일이 지난 1945년 2월 19일 이오섬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10일이면 점령할 것으로 예상했던 그 섬에서 미국군은 고전하였다. 미국군이 병력 110,000 명과 각종 전투함선 500여 척을 동원하여 공격한 이오섬전투는 1945년 2월 19일부터 3월 26일까지 무려 36일 동안이나 격렬하게 계속되었다. 그 전투에서 미국군 6,821명이 전사하였고 21,865명이 전상했으며, 일본군 20,129명이 전사하였고, 1,083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조급증에 사로잡힌 미국은 태평양전쟁을 하루빨리 끝내기 위해 일본의 심장부를 공격하였다. 1945년 3월 10일 새벽 미국군 B-29 폭격기 344대가 3시간 동안 도꾜에 소이탄 2,400t을 퍼부었다. 거대한 폭탄화염 속에서 100,000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일제가 징용으로 그 지역 군수공장에 끌어간 조선인 10,000여 명도 미국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희생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무차별 폭격으로 끝나지 않았다. 일제는 이른바 ‘국체호지(國體護持, 나라를 보호하고 지킨다는 뜻)’를 부르짖으며 계속 버텼다.
더욱 다급해진 미국은 오끼나와(沖繩)공격을 서둘렀다. 1945년 4월 1일부터 6월 22일까지 82일 동안 계속된 오끼나와전투는 이오섬전투보다 훨씬 더 격렬하였다. 미국은 오끼나와전투에 육군 102,000명, 해병대 88,000명, 해군 18,000명을 동원하였으나 고전을 면치 못했다. 미국군 20,195명이 전사하였고 55,162명이 전상했으며, 일본군 77,166명이 전사하였고 7,000여 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오끼나와전투에서 미국군은 구축함 12척, 상륙함 15척, 전투기 768대, 전차 225대를 잃었다.
4. 미국이 규슈상륙 포기하고 핵폭탄개발에 매달린 사연
미국이 오끼나와전투에서 고전하고 있었던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이 미국과 소련에게 항복하였다. 나치 독일이 미국과 소련에게 항복하였으므로, 독일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동서로 분할점령되었다. 그와 달리 일본은 미국에게 항복하였으므로, 일본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점령되지 않고 미국에게 점령되었다. 일본을 단독으로 점령한 미국은 당시 일본의 식민지영토였던 한반도에 분할점령선으로 그었다. 우리 민족에게 고통과 불행을 강요하는 분단체제는 그렇게 생겨났다.
나치 독일의 항복은 쓰딸린의 얄타회담 약속이행을 추동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되었는데, 쓰딸린의 약속에 따르면 소련군은 1945년 7월 초순에, 아무리 늦어도 1945년 8월 초순에는 원동지역에 집결하여 대일전쟁을 개전하게 되어 있었다.
미국군은 소련군이 원동지역에 집결하기 전에, 그리고 여름철 일본렬도에 태풍이 불어오기 전에 서둘러 규슈를 점령해야 하였으므로, 1945년 7월 초에 규슈상륙전을 예정하였다. 당시 미국의 전쟁기획자들은 규슈 남부에 있는 35개 해안구역에 상륙하여 규슈 면적의 3분의 1을 점령하는 작전계획을 세워놓았다.
다른 한편, 당시 일본의 전쟁기획자들은 일본군이 결사항전으로 미국군의 규슈상륙을 저지하면 미국은 일본을 패망시키지 못할 것이고, 결국 정전협정을 체결하는 것으로 태평양전쟁이 끝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그리하여 일본군은 미국군의 규슈상륙을 저지하는 ‘게쯔고작전(決号作戰)’을 준비하였다.
1945년 2월 일본 해군연합함대 참모장 우가끼 마또메(宇垣纏)가 규슈에 주둔하는 제5항공함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제5항공함대는 오끼나와전투가 벌어졌을 때 전투기에 폭탄을 싣고 적함에 충돌하는 자살공격전술로 미국군 상륙함을 격침시켰었다. 1945년 7월 당시 10,000대 이상의 각종 군용기를 보유한 일본군은 규슈해안에 접근하는 미국군 군함 400척 이상을 자살공격전술로 격침시킬 수 있을 것으로 예견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은 1945년 3월부터 규슈의 전투부대를 대폭 증강했는데, 만주, 조선, 북부 혼슈(本州)에 배치된 전투부대들을 규슈로 집결시켜 3개 전차여단을 포함한 14개 사단 900,000명 대병력을 배치해놓고 미국군 상륙에 대비하였다.
일본군이 만주, 조선, 북부 혼슈에 배치된 전투부대들을 규슈로 집결시켰으니, 소련군은 만주와 조선반도를 파죽지세로 공격할 수 있었고, 사할린과 쿠릴렬도를 거쳐 혹까이도(北海道)에 상륙하고 곧바로 북부 혼슈를 점령할 수 있었다. 실제로 소련군은 매우 허술한 방어선밖에 없는 혹까이도를 1945년 8월 말까지 점령하는 작전계획을 세워놓았다. 그 작전계획이 실행되면, 일본이 소련에게 항복하게 될 것이고, 소련군이 일본의 중심부를 점령할 판이었다. 소련군이 일본을 점령하는 것은 미국에게 재앙이 아닐 수 없었다. <사진 4>
미국은 일본점령기회를 소련에게 빼앗길까봐 조바심하며 규슈상륙전을 준비하였으나, 일본이 규슈에 매우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을 알고 규슈상륙을 포기하였다. 그 대신 미국은 핵폭탄개발에 미친 듯이 매달렸다. 1943년 8월 17일부터 24일까지 진행된 퀘벡비밀군사회담에서 로저벌트와 처칠은 미국과 영국이 핵폭탄개발에 상호협력하기로 공약한 퀘벡합의(Quebec Agreement)를 채택하였다. 영국은 캐나다를 끌어들인, ‘튭 얼로이즈(Tube Alloys)’라는 암호명으로 불린 핵폭탄개발사업을 1941년 8월 30일부터 시작했었는데, 그 핵폭탄개발사업은 1942년 8월 13일 미국이 추진하기 시작한,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라는 암호명으로 불린 핵폭탄개발사업으로 흡수, 통합되었다.
일제가 규슈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을 알게 된 미국은 일제가 항복하지 않고 전쟁을 계속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핵폭탄을 투하하는 계획부터 서둘러 검토하였다. 미국은 일본의 어느 도시에 핵폭탄을 투하할 것인지를 검토하는 표적위원회(Target Committee)를 구성하였다. 표적위원회는 당시 미국이 개발 중이던 핵폭탄이 완성되면, 일본의 주요도시들을 핵폭탄으로 완전히 파괴할 수 있으므로 미국군이 규슈에 상륙할 필요가 없게 되리라고 예상했다. 표적위원회가 정한 핵폭탄투하대상목록에는 도꾜(東京), 요꼬하마(橫浜), 교또(京都), 히로시마(廣島), 고꾸라(小倉), 니이가다(新瀉) 등이 포함되었다.
5. 소련의 대일전쟁, 조선의 조국해방전투, 미국의 핵폭탄투하
누가 먼저 일본에 상륙하여 일본을 점령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소련과 경쟁하던 미국은 핵폭탄개발을 황급히 서두르던 중, 1945년 7월 16일 핵폭발시험에 성공하였다. 미국이 핵폭탄개발을 서두르는 사이에 소련군 전투부대들은 유럽전선에서 원동지역으로 이동, 집결하여 전쟁준비태세를 갖추었다.
소련군이 혹까이도에 상륙하여 일본의 중심부로 남하하지 않을까 하고 조바심하던 미국은 불과 며칠 전에 핵폭발시험을 마쳤으나 실전상황에서 제대로 터질지 아직 알 수 없는 첫 핵폭탄을 실전에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이 ‘태양의 힘을 끌어들인 무기’라고 불렀던 첫 핵폭탄은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되었다.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투하되기 6시간 전, 태평양 북서부에 있는, 괌(Guam)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화산섬 15개로 이루어진 마리아나제도(Mariana Islands)의 열세번째 섬 티니안(Tinian)에 건설된 활주로에서 B-29 폭격기 세 대가 이륙하였다. 한 대에는 핵폭탄이 실렸고, 다른 한 대에는 핵폭발측정기구들이 실렸고, 또 다른 한 대에는 관측기재와 사진촬영기가 실렸다.
B-29 폭격기에서 투하된 핵폭탄은 44.4초 동안 낙하하다가 지상으로부터 580m 상공에서 폭발하였다. 원래는 B-29 폭격기 탑승자들이 고공에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아이오이하시(相生橋)라는 다리를 향해 낙하했어야 하는데, 바람에 밀려간 핵폭탄은 그 다리에서 240m 떨어진 도병원(島病院) 상공에서 낙하하다가 폭발하였다.
히로시마 핵폭탄투하로 민간인 126,000여 명과 일본군 20,000여 명이 몰살당하는 핵참사가 일어났다. 조선인 30,000여 명도 목숨을 잃었는데, 조선인 희생자들 가운데는 의친왕의 아들로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군 중좌가 된 리우(李鍝)도 있었다.
일제는 히로시마가 날아갔는데도 항복하지 않았고, 소련은 1945년 8월 9일 대일전쟁을 개시하였다. 소련이 대일전쟁을 개시한 날, 이미 1930년대부터 만주에서 일제관동군과 싸워온 조선의 항일전쟁은 조국해방전투로 전개되었다. 조선의 역사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은 전황을 알 수 있다.
러시아-중국 국경으로부터 30km 떨어진 하바롭스크 부근에 임시군사기지가 있었다. 김일성 사령관의 지휘를 받으며 만주에서 일제관동군과 격전을 벌이던 조선인민혁명군은 1942년 7월 22일 그 군사기지에서 소련원동군, 동북항일련군 중국인부대와 함께 국제연합군을 결성하였다. 소련원동군은 3국 국제연합군을 독립88여단 또는 8461보병특별여단이라고 불렀다. 조선인으로 편성된 국제연합군 제1지대는 김일성 지대장이 지휘하는 조선인민혁명군이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30명 정도로 편성된 소부대들을 두만강 국경일대와 함경북도 북부지역에 출동시켜 일본군을 타격하는 습격전, 정찰활동, 지하정치활동을 계속하면서 조국해방전투를 준비해왔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소련군이 대일전쟁을 개시하기 하루 전인 1945년 8월 8일에도 비가 내리는 밤에 두만강을 도하하여 함경북도 웅기군 최북단에 있는 토리에서 조선주둔일본군을 습격하였으며, 중국 훈춘(琿春)현 남별리와 동흥진도 습격하였다. 이튿날 소련이 대일전쟁을 개시한 새벽, 조선인민혁명군은 소련군과 함께 총진격을 개시하였다. 두만강을 도하한 조선인민혁명군은 함경북도 은덕, 새별, 남양, 회령으로 진격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은 1945년 8월 11일 19시 함경북도 웅기만에 상륙하고 서수라항으로 진격하였으며, 이튿날에는 함경북도 라진만에 상륙하였다. <사진 5>
조선인민혁명군이 조국해방전투를 개시한 1945년 8월 9일, 미국은 일본 나가사끼(長崎)에 두 번째 핵폭탄을 투하하였다. 원래 미국은 1945년 8월 11일 기따규슈(北九州) 후꾸오까(福岡)현 고꾸라에 두 번째 핵폭탄을 투하하기로 예정하였는데, 소련군이 만주에서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전황에 놀라 투하날짜를 이틀 앞당겼다. 핵폭탄을 실은 B-29 폭격기가 고꾸라 상공에 도착하였을 때, 지상에서 짙은 연기가 피어올라 투하대상을 식별할 수 없었고, 일본군 전투기들이 접근하였다. 그래서 B-29 폭격기는 나가사끼로 기수를 돌렸다. 오전 11시 1분, B-29 폭격기에서 투하된 핵폭탄은 47초 동안 낙하하다가 원래 정했던 투하대상에서 약 3km 벗어난 정구장 상공에서 폭발하였다. 나가사끼 핵폭탄투하로 약 40,000여 명이 사망하였고, 약 60,000여 명이 부상당했다.
당시 핵폭탄제조기술자로 근무했던 미국 육군 소장 케네스 니콜스(Ken D. Nichols)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미국군의 일본상륙전에 사용하기 위해 핵폭탄 15발을 제조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미국의 핵폭탄제조사업을 총지휘한 육군 소장 레슬리 그로브스(Leslie R. Groves)의 보좌관이었던 육군 대령 라일 씨먼(Lyle E. Seeman)은 미국군이 일본상륙전을 개시하는 날까지 적어도 핵폭탄 7발이 준비될 것이라고 상부에 보고하였다.
두 차례 핵폭탄투하로 소련군의 혹까이도상륙을 미연에 중지시킨 미국은 1945년 9월 2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고 일본을 점령하였다. 그로써 미국은 태평양지배체제를 완성하였고, 일본은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를 지켜주는 군사거점으로 전락하였다. 미국이 태평양사령부를 창설한 때는 1947년 1월 1일이었다. 만일 미국이 핵폭탄을 1945년 8월 말까지 개발하지 못했더라면, 소련군은 혹까이도에 상륙했을 것이며,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분할하지 않고 일본을 분할했을 것이다. 그런 사정을 살펴보면,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는 처음부터 핵무력으로 건설되었고, 지난 73년 동안 핵무력으로 유지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6. 73년 묵은 태평양지배체제가 흔들리고 있다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를 위태롭게 만드는 거대한 ‘지각변동’이 두 방향에서 거의 동시에 밀려왔다. 조선의 국가핵무력 완성, 그리고 중국의 남중국해지배권 확립이 그것이다.
2017년 11월 29일 조선은 미국 본토 전역에 전략핵공격을 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5 시험발사에서 성공하였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8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조선의 국가핵무력이 완성되었음을 선포하였다. 조선이 미국의 방해를 물리치고 국가핵무력을 완성한 사연에 대해서는 내가 2017년과 2018년에 <자주시보>에 발표한 여러 글들에서 계속 논하였으므로, 재론하지 않는다.
미국 텔레비전방송 <CNBC> 2018년 5월 2일 보도에 따르면, 2018년 4월 중국은 남중국해 난사(南沙)군도에 건설한 세 개의 인공섬에 대함순항미사일 잉지(鷹擊)-12B와 지대공미사일 훙치(紅旗)-9B를 각각 실전배치하였다고 한다. 잉지-12B의 사거리는 550km이고, 훙치-9B의 사거리는 230km다. 중국은 그 인공섬들 가운데 메이지자오(美濟礁)에는 군사통신기지와 전자전기지도 건설하였다. 남중국해 시사(西沙)군도에 있는 융싱섬(永興島)에는 중국의 정규 항공편이 개설되었고 거주민과 주둔부대를 위한 해수담수화시설이 건설되었다.
미국은 2017년 한 해 동안 ‘항해의 자유 작전’을 벌이면서 구축함과 정찰기를 남중국해에 계속 들이밀었고, 나중에 사정이 급해지자 B-1B 전략폭격기까지 들이미는 소동을 일으켰으나, 중국의 남중국해군사기지 건설을 가로막을 수 없었다.
2018년 4월 12일 중국은 남중국해에서 항공모함, 이지스구축함, 핵추진잠수함을 비롯한 각종 전함 48척과 조기경보기, 전략폭격기, 전투기, 공중급유기를 비롯한 각종 작전기 76대와 해군병력 10,000여 명이 동원된 중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상열병식을 진행하였다. 전투복을 입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해상열병식을 직접 사열하고 훈시하였다. 그것은 중국이 미국의 방해를 물리치고 남중국해지배권을 확립하였음을 내외에 알린 사변이었다. 중국은 1988년 남중국해 난사군도에 군대를 파견한 때로부터 30년 만에 남중국해지배권을 확립한 것이다. <사진 6>
만일 미국이 위에 서술한 두 가지 ‘지각변동’을 방치하면, 73년 묵은 태평양지배체제는 심하게 흔들리다가 어느 순간 무너질 판이다. 미국은 흔들리는 태평양지배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위에 서술한 두 가지 ‘지각변동’에 전력으로 대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미국에게는 국가핵무력을 완성한 조선과 남중국해지배권을 확립한 중국을 상대로 3자동시대결을 벌일 능력이 없다. 조선과 중국 가운데 어느 한 쪽을 택하여 양자대결을 하는 수밖에 없다.
2017년 12월 28일 미국은 백악관이 발표한 ‘아메리카합중국의 국가안보전략’이라는 제목의 문서에서 인도양-태평양전략(Indo-Pacific Strategy)을 천명하였고, 2018년 1월 7일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조미정상회담을 제안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두 가지 조치는 미국이 흔들리는 태평양지배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중국에게는 대결정책을, 조선에게는 협상정책을 펼치기 시작하였음을 말해주는 사건들이다.
2018년 3월 22일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중국의 경제침략을 표적으로 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중국과 무역전쟁을 시작했는데, 미중무역전쟁의 본질은 흔들리는 태평양지배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중국을 상대로 벌이는 미국의 패권대결 이외에 다른 게 아니다. 그에 맞서 남중국해지배권을 확립한 중국은 동중국해지배권을 놓고 미국을 상대로 더 심각한 패권대결을 벌이게 될 것이다. 이것은 불가피하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일본을 끌어들여 중국과 대결할 것이다. 미일동맹의 강공에 홀로 맞서는 중국은 조선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 최근 중국의 대조선정책이 급변한 까닭이 거기에 있다.
7. 모든 문제는 종전과 철군으로 귀결된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018년 6월 20일 베이징에서 진행된 조중정상회담에서 “새로운 정세 하에서 두 당, 두 나라 사이의 전략전술적 협동을 더욱 강화해나가기 위한 문제들”을 논의하였다고 하는데, <아사히신붕> 2018년 7월 5일 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6.20 조중정상회담에서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을 교체되면 미국군이 조선반도에 주둔할 필요가 없으므로, 조선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미국에게 주한미국군 철수를 촉구하기 위해 조선과 중국이 전략적으로 협력하기로 합의하였다고 한다. <사진 7>
<워싱턴포스트> 2018년 6월 7일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주한미국군이 전략적으로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 자신은 동의하지 않는다고 지속적으로 말하고 있으며, 미국군을 한국에 계속 배치해야 하는 이유에 관한 미국군 지휘관들의 설명을 들을 때마다 그들의 설명에 불만을 표시한다는 것이다.
미국 텔레비전방송 <NBC> 2018년 5월 1일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국군 전원철수명령을 내리려고 하자, 존 켈리(John F. Kelly) 비서실장이 강하게 만류하였고, 그것으로 하여 트럼프 대통령과 켈리 비서실장 사이에서 열띤 언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 보도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국군 전원철수명령을 내리려고 하였던 때가 2018년 2월 9일에 개막된 평창동계올림픽 이전이라고 하였으므로,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 1월 중에 주한미국군 전원철수명령을 내리려고 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이런 정황은 트럼프 대통령이 2018년 1월 7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조미정상회담을 먼저 제안하기로 결정한 직후 주한미국군 전원철수명령을 내리려고 하였음을 말해준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머릿속에서 조미정상회담과 주한미국군 철수는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연관관계에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국군을 철수하려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흔들리는 태평양지배체제를 안정화시키기 위해 중국과 대결하려면 조선과의 대결을 멈추고 관계개선을 추진해야 한다는 전략적 인식을 갖고 있으며, 조선과 관계를 개선하려면 종전선언을 발표하고 주한미국군을 철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주한미국군은 미국의 태평양지배체제가 흔들리면서 전략적 가치를 잃어버렸다. 미국이 태평양지배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주한미국군을 계속 유지할 것이라는 생각은 조선이 국가핵무력을 완성하고, 중국이 남중국해지배권을 확립하기 이전의 정세를 반영한 고정관념이다. 조선이 국가핵무력을 완성하고, 중국이 남중국해지배권을 확립한 지금, 그런 고정관념은 설 자리를 잃었다. 정세는 정반대로 바뀌었다. 미국은 조선의 국가핵무력 완성과 중국의 남중국해지배권 확립으로 심하게 흔들리는 태평양지배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종전선언 발표에 동참하고, 주한미국군을 철수해야 하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있어서 조선반도의 비핵화는 언제가도 실현될 수 없는 조선의 국가핵무력 해체라는 뜻이 아니라, 종전선언을 발표하고 주한미국군을 철수하여 미국 본토에 대한 조선의 핵공격위험을 해소하기 위한 명분이다. 지금 그에게는 그 명분을 언제, 어떻게 실행하느냐 하는 문제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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