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29

강행군에 동참하는 심정으로 미래를 상상하라

변혁과 진보 (102)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절망의 땅 적시며 흘러라, 미래상상의 샘물이여
 
낡고 썩은 현실을 타파하고 새롭고 올바른 현실을 일으켜 세우는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은 미래에 대한 상상에서 그 첫걸음을 뗀다. 절망의 땅을 진보와 변혁의 보습으로 뒤집어엎고 민중이 함께 행복하게 사는 희망을 가꾸어가는 진보정치활동가들만이 미래를 동경하고 사랑한다. 민중이 함께 행복하게 사는 희망이 사회역사발전의 과학적 전망과 만날 때, 바로 그 때 진보정치활동가들의 미래상상은 진보의 신념으로, 변혁의 의지로 전화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진보와 변혁을 추구하는 유일무이한 정당인 통합진보당이 절망과 고통으로 시들어가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미래상상을 안겨주는 것은 그 당이 떠맡은 당면임무이며 그 당에게 주어진 고유한 역할이다.
 
진보와 변혁의 정적들과 싸워온 멀고 험한 길에서 다져지고 또 다져진 사회변혁운동의 땅밑에는 그 운동을 위해 목숨을 바친 투사들이 키워온 미래상상이 맥맥이 흐르고 있다. 진보적 민주주의와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해 싸우다 쓰러진 그 전선에서 후대에게 남겨준 목숨처럼 귀중한 미래상상이 오늘도 변함없이 철철 샘물처럼 그 땅밑에 흐르고 있다.
 
그래서 오늘은 진보당 대선후보가 상상의 샘물을 길어 올리고 있다. 진보당이 이정희 대선후보의 이름으로 함께 살자 대한민국!”상상하라 코리아연방이라는 선거구호를 제시한 것은, 그 땅밑에서 미래상상의 샘물을 한껏 길어 올려 메마른 이 세상을 적셔주려는 정치적 봉사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직은 강물이 되지 못하고 샘물로 흐르고 있다. 절망과 고통으로 메마른 이 세상은 넓고 넓은 데, 그 세상을 적실 미래상상은 아직 샘물처럼 흐르고 있다. 그러나 그 샘물이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서 모여들 듯 우리 사회 각계각층에서 자꾸 모여들어 물줄기가 점점 더 굵어지고 나중에는 큰 강이 되어 이 강산에 흐를 때, 바로 그렇게 넘실거리는 물줄기는 진보적 정권교체의 바다에 단숨에 이를 것이다.
 
진보당이 이번 대선국면에 제시한 선거구호가 웅변적으로 말해주는 것처럼, 이 땅의 민중이 함께 살아갈 미래세상은 진보적 민주주의가 실현된 새로운 세상이며, 이 땅의 민중이 상상하는 미래세상은 자주적 평화통일이 실현된 새로운 나라다. 진보당이 추구하는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과 자주적 평화통일 강령은 그 두 가지 선거구호에 간결하고 선명하게 담겼다.
 
 
전운 감도는 서부전선 애기봉에 올라간 대선후보
 
20121121일 이정희 대선후보는 서부전선 최전방에 있는 애기봉 전망대에 올라 자주적 평화통일에 관한 정책공약을 발표하였다. 서부전선 애기봉에 불어오는 찬바람을 맞으며 그녀는 말했다. 한미군사동맹을 해체하고 주한미국군을 철군시켜야 평화를 실현할 수 있고 통일도 실현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정희 후보의 그 말은, 두말할 나위 없이 진리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이 땅의 선열들이 피와 눈물과 땀으로 찾아내고 지키고 이루고자 애쓴 고귀한 진리다. 시시각각 전운이 감도는 서부전선 고지에 올라 그런 고귀한 진리를 대선공약으로 제시한 그녀의 목소리가 장차 이 땅에 펼쳐질 위대한 미래를 다 이야기해주고 있지 아니한가.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통령후보가 1121일 김포시 강화도 전방 애기봉 전망대에서 김선동, 이상규의원과
통일단체 원로 및 당원들과 함께 평화통일 대국민메시지 발표를 하고 있다. (<민중의 소리> 보도사진)
 
"상상하라 코리아연방"이라는 선거구호는 비록 두 마디 짤막한 낱말을 붙여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말 속에는 자주적 평화통일을 열망하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쿵쿵 울려줄 깊은 사연과 뜻이 담겨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무슨 사연이고, 무슨 뜻인가?
 
서부전선 애기봉에서 이정희 대선후보는 장차 진보당이 집권하면, 임기 5년 안에 민족통일기구인 코리아(Corea)위원회를 결성하여 자주적 평화통일의 결정적 국면을 열어놓겠다고 밝혔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코리아위원회는 연방의회와 연방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통일헌법을 제정하고 단일국호로 유엔에 가입하는 평화통일과업을 수행하는 정치기구이며, 연방의회와 연방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의 준비과정에서 남과 북의 정부 권능을 하나로 통합한 과도기구다.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것처럼, 코리아위원회에서 합의한 민주적인 절차와 방도에 따라 통일헌법 초안이 작성될 것이고 연방의회가 창설될 것이다. 연방의회가 창설되면, 그 의회에서 통일헌법 초안을 심의하고 제정할 것이다. 더 설명할 필요 없이, 그 헌법은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코리아연방정부를 세우기 위한 연방헌법이다. 코리아연방정부가 세워지면, 자주적 평화통일은 완성되는 것이다.
 
이 과정을 단순하게 정리하면, 코리아위원회 결성연방의회 창설연방정부 수립코리아연방 건국으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통일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정희 대선후보는 코리아위원회 결성이 자주적 평화통일 제1단계가 완성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지만, 코리아위원회 결성에서 코리아연방 건국으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과정은 몇 가지 발전단계를 거치며 점진적으로 전개되는 게 아니다. 코리아위원회 결성에서 코리아연방 건국으로 이어지는 통일국가 건설과정은 매우 짧은 기간에 무단계적이고, 급진적으로 추진될 것이 확실해 보인다. 그렇게 보는 까닭은, 한반도 통일과정을 극렬히 반대하는 미국과 일본의 준동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자주적 평화통일이란 우리 민족끼리는 평화적인 방도로 실현하는 통일을 뜻하지만, 통일국가 건설과정을 좌절시키려는 미일 외세의 개입과 간섭을 물리적으로 저지, 파탄시켜야 한다는 점에서는 평화통일이 아니다. 미국과 일본이 한반도의 통일국가 건설과정을 좌절시키려고 개입과 간섭을 들이대고, 코리아위원회가 그에 맞서 싸워야 하는 긴박한 격돌상황에서 통일국가건설을 몇 단계에 걸쳐 점진적으로 추진하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코리아연방 건국과정에는 단계론이 허용될 수 없으며, 자주적 평화통일을 김대중식 3단계 통일론으로 설명하는 것은 인식착오다. 김대중식 3단계 통일론은 통일국가건설을 좌절시키려는 미일 외세에 맞서 싸우는 코리아위원회의 반제자주화투쟁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미래상상 결핍증을 노출하였다.
 
 
1단계에서 광기를 제거하고, 2단계에서 물리력을 제거한다
 
이처럼 코리아위원회를 결성한 이후에 전개될 통일국가건설과정은 일사천리로 추진되는 무단계적이고 급진적인 과정인데, 정작 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코리아위원회를 결성하기까지 거쳐야 할 실로 복잡하고 어렵고 힘든 과정이다. 코리아위원회를 결성하기까지의 과정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더 정밀한 분석이 요구된다.
 
명백하게도, 코리아위원회는 분단체제를 타파할 때 결성될 수 있다. 분단체제가 여전히 남아 있는 데, 코리아위원회가 결성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코리아위원회가 분단체제를 타파하고 결성될 것이라는 점에서, 그 위원회 결성은 남과 북이 이미 통일과정에 들어섰음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서, 이 나라의 역사는 코리아위원회 결성을 기준으로 하여 분단시대와 통일시대로 갈라지게 될 것이다. 코리아위원회 결성 이전은 분단시대이고, 그 위원회 결성 이후는 통일시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문제는, 코리아위원회를 결성하기 전에 분단체제가 무너져야 한다는 점이다. 분단체제는 우연히, 자연발생적으로 무너지는 게 아니다. 그 낡은 체제를 유지해온 힘을 압도하는 힘을 그 체제에 집중하여야 그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다.
 
낡은 분단체제를 유지해온 힘을 압도하려면, 그 유지력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키는 수밖에 없다. 분단체제 유지력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키는 방도는,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과 국가보안법 철폐다. 평화협정 체결은 북침전쟁광기를 제거하는 것이고, 국가보안법 철폐는 반북대결광기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 두 가지 광기를 제거하면, 그 두 가지 광기에 전적으로 의존해온 분단체제 유지력을 일거에 꺾어버릴 수 있다. 지금 내외 반통일세력이 평화협정 체결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극렬히 반대하는 까닭은, 북침전쟁광기와 반북대결광기가 제거되는 순간 자기들의 분단체제 유지력도 다시 일어설 수 없을 만큼 완전히 꺾이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평화협정 체결로 북침전쟁광기를 제거하고, 국가보안법 철폐로 반북대결광기를 제거해야, 진보당이 단독집권하는 진보적 정권교체를 실현할 수 있다. 평화협정이 아직 체결되지 않고,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남아있는 한, 진보적 정권교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민주통합당이 이번 대선에서 승리하여 정권탈환에 성공하는 경우, 통합진보당은 그 당의 집권기간 5년 동안에 민주통합당 정권을 강하게 압박하여 평화협정을 체결하게 만들고 국가보안법을 철폐시키게 만들어야 한다.
 
평화협정을 체결하게 만들고, 국가보안법을 철폐시키게 만드는 과정은 북침전쟁광기와 반북대결광기를 부리는 수구우파세력과 맞서 싸우는 격전과정이 될 것이다. 그 격전에서 통합진보당을 중심으로 결집한 진보정치세력이 민주통합당 정권과 연대하여 무조건 이겨야 한다. 그렇게 해야, 2017년 대선에서 진보당 후보가 당선될 길이 열린다. 물론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국가보안법이 철폐되는 것만으로 진보적 정권교체가 자동적으로실현될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진보당은 평화협정 체결과 국가보안법 철폐라는 정세격변의 흐름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용하여,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지지와 신뢰를 받는 위력적인 대중정당으로 올라서야 하는 것이다.
 
민주통합당 집권평화협정 체결국가보안법 철폐로 이어지는 과정을 굳이 단계론으로 정리한다면, 코리아위원회를 결성하기 위한 준비과정 제1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코리아위원회를 결성하기 위한 준비과정 제2단계는 진보당의 대선승리로 진보적 정권교체가 실현된 이후에 전개되는 것이다. 이 제2단계에서는 자주적 진보정권이 주한미국군의 단계적 철군과 남북의 단계적 상호군축을 추진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제2단계에서는 제1단계보다 더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왜냐하면, 2단계에서는 분단체제를 유지해온 마지막 물리력을 제거하는 힘들고 어려운 투쟁이 벌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분단체제를 유지해온 광기를 제1단계에서 제거해야 한다면, 분단체제를 유지해온 물리력은 제2단계에서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것처럼, 새로 등장한 자주적 진보정권을 뒤집어엎으려는 미일 외세의 전복공작과 국내 수구우파의 난동이 폭발할 것이다. 그래서 광기 제거보다 물리력 제거가 더 힘들게 될 것으로 내다보는 것이다. 이것은 분단시대를 끝장내는 마지막 싸움, 곧 분단체제를 타파하는 최후 결전이다. 그런 전복공작과 난동이 벌어지는 소용돌이 속에서 자주적 진보정권이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강력한 지지와 신뢰를 받지 못하면, 정적들과 맞서 싸우는 최후 결전에서 승리하기 힘들다.
 
이런 맥락을 생각하면, 진보당이 노동자, 농민, 서민들 속으로 파고 들어가 그들의 지지와 신뢰를 받는 것은 진보적 정권교체를 위해서도 시급히 요구되는 당면과업이고, 자주적 진보정권을 세운 뒤에도 반드시 필요한 사활적인 정치과업이다. 지금 새누리당 대선후보나 민주통합당 대선후보가 취재진 앞에서 설전을 펼치고 방송국 출입에 매달리고 있을 때, 이정희 대선후보는 노동자, 농민, 서민들 속에 들어가 강행군을 하고 있다. 비록 이 땅의 수구언론들에게는 외면당하고 있지만, 그녀의 강행군은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의 미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미덥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녀의 당당한 강행군에 동참하는 심정으로 더 높이, 더 넓게 상상하라 코리아연방의 눈부신 미래를... (20121128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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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6

44년 만에 다시 보낸 최후통첩

<연재> 한호석의 진보담론(236)
통일뉴스 2012년 11월 26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미국군 71명 사망, 85명 부상, 85명 포로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올해까지 59년 동안, 한반도에서 전쟁이 다시 일어날 위험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해소되지 않았다. 이 시각에도 한반도 어느 지역에서는 전쟁에 대비한 군사활동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전쟁대비 군사활동은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첨예하게 대치 중인 정전의 땅에서 올해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데, 특히 정전협정 체결 60주년을 눈앞에 둔 올해 2012년은 전쟁재발위험이 매우 고조된 시기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미국군이 한국군을 참가시킨 가운데 은밀히 추진해오는, 북측 정권을 폭동과 변란으로 전복하려는 대북전쟁계획을 실제 행동에 옮기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난 것도 올해 2012년에 있었던 일이고, 인민군이 조국통일대전 준비태세를 갖추고 최고사령관의 총공격명령을 대기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 알려진 것도 올해 2012년에 있었던 일이다.

정전 59년 역사를 돌아보면, 전쟁재발위험이 매우 고조되었던 시기가 올해 말고도 한 차례 더 있었는데, 1967년부터 1969년까지 3년 동안이 바로 그런 시기였다. 특히 1968년 1월에 이틀 간격으로 연속발생한 인민군의 청와대 습격기도사건과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은 전쟁재발위험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청와대 습격기도사건과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을 바라보는 북측 외부의 인식은 이제껏 두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미국과 힘을 겨뤄보려는 북의 ‘군사모험주의’ 군사행동으로 인식되었는가 하면, 당시 미국과 전쟁을 하고 있었던 북베트남을 도와주는 북의 ‘국제주의’ 군사행동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군사모험주의 해석’이나 ‘국제주의 해석’은 당시 극도로 높아진 전쟁재발위험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한다. 그러한 해석은 이틀 간격으로 연속발생한 청와대 습격기도사건과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을 다른 무력충돌사건들과 떼어놓고 바라보는 인식오류에 빠진 것이다. 정전 59년 역사가 말해주는 것은, 그 두 사건이 1967년부터 3년 동안 인민군의 기습공격으로 벌어진 수많은 무력충돌사건들과 직접 결부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두 사건을 전후로 하여 인민군이 비무장지대에서 미국군 순찰병력, 전방초소, 군용차량을 기습공격하는 사건이 계속 일어났을 뿐 아니라, 미국 해군 정찰기를 청진 앞바다에서 격추하고, 비무장지대 상공에서 미국 육군 헬기를 격추하고, 임진강에서 미군 육군 정찰선박을 공격하는 사건도 있었다. 아래의 통계자료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1967년 한 해 동안 인민군의 미국군 순찰병력 기습공격은 4회, 미국군 전방초소 기습공격은 2회, 미국군 차량 또는 선박에 대한 기습공격은 3회였다. 1967년의 무력충돌에서 인민군은 6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당하는 인명손실을 입었으며, 미국군은 16명이 사망하고 51명이 부상당하는 인명손실을 입었다. 미국군 인명손실에는 미8군 한국군지원단 인명손실도 포함되었다.
미국군에 대한 인민군의 기습공격은 1968년에 더욱 확대되었는데, 미국군 순찰병력 기습공격 7회, 미국군 전방초소 기습공격 5회, 미국군 차량 기습공격 2회, 인민군과 미국군의 교전 5회였으며, 1968년 1월 21일 원산 앞바다에서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이 있었다. 1968년의 무력충돌에서 인민군은 13명이 사망하고 13명이 부상당하는 인명손실을 입었고, 미국군은 19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당하는 인명손실을 입었으며, 82명이 인민군에게 포로로 잡히는 패배를 겪었다.

미국군에 대한 인민군의 기습공격은 1969년에도 1968년과 같은 격렬한 양상으로 계속되었는데, 미국군 순찰병력 기습공격 7회, 미국군 전방초소 기습공격 3회, 미국군 차량 기습공격 1회였다. 또한 1969년 4월 15일 인민군 공군 전투기가 미국 해군 최신형 정찰기 EC-121를 함경북도 청진 앞바다 동해 상공에서 격추하여 탑승자 31명을 몰살시켰고, 8월 17일 인민군 방공포부대가 비무장지대 상공에서 미국군 OH-23 헬기를 격추하여 미국군 3명을 포로로 잡았다. 1969년의 무력충돌에서 인민군은 1명이 사망하는 인명손실을 입었고, 미국군은 36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당하는 인명손실을 입었으며 3명이 인민군에게 포로로 잡히는 패배를 겪었다.

위에 열거한 전과를 종합하면, 1967년부터 3년 동안 지속된 무력충돌에서 인민군은 20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당하는 인명손실을 입었고, 미국군은 71명이 사망하고, 85명이 부상당하는 인명손실을 입었으며, 85명이 인민군에게 포로로 잡히는 패배를 겪었다.

위에 열거한 인민군과 미국군의 무력충돌은, 인민군의 기습공격으로 전쟁재발위험이 극도로 높아지면서 당시 북미관계가 사실상 전시상황으로 전환되었음을 말해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문제는, 북이 왜 미국군에게 그처럼 3년 동안 기습공격을 가하여 전쟁재발위험을 극도로 높였을까 하는 것이다.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은, 미국의 우드로우 윌슨 국제학술센터(Woodrow Wilson International Center for Scholars)가 ‘북코리아 문서 사업(North Korea Documentation Project)’을 통해 발굴하여 2012년 4월에 공개한 비밀전문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대북 선제공격방안을 검토하고 있을 때

우드로우 윌슨 국제학술센터가 루마니아 외무성 문서보관소에서 발굴하여 영어로 번역한 이 비밀전문들은, 평양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이 1968년에 작성하여 본국 외무성에 보낸 것이다. 44년 전에 작성된 이 비밀전문들을 읽어보아야 하는 까닭은, 인민군 특수군의 청와대 습격기도사건과 인민군 해군의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으로 전쟁재발위험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당시 북의 단호한 결전의지가 엿보이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청와대 습격기도사건이 일어난 날로부터 불과 이틀밖에 지나지 않은 1968년 1월 23일 인민군이 미국의 통신감청첩보선 푸에블로호를 강원도 원산 앞바다에서 나포한 사건이 일어나자,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미국은 당장에라도 무력보복을 감행할 것처럼 날뛰었다. 미국의 대북무력보복은 선제핵공격으로 시작되는 격렬한 전면전을 뜻하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인민군이 푸에블로호를 나포한 이튿날, 미국은 이전에 미리 준비해둔 ‘자유의 투하(Freedom Drop)’라는 작전명의 대북공격계획을 즉각 가동하였다. 그에 따라, 일본에 전진배치된 미국 해군 제7함대 소속 핵추진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가 긴급출동명령을 받고 원산 앞바다에 나타났다. 그런데 엔터프라이즈호를 원산 앞바다에 배치한 북침준비태세는 시작에 불과하였다. 미국은 또 다시 항공모함 두 척을 추가로 동해에 배치하였고, 일본 오키나와에 있는 주일미공군 전투기 361대를 남측으로 이동배치하였다. 이러한 무력이동은 미국이 전면전을 하고도 남을 만큼 방대한 무력을 대북공격태세로 근접배치한 것이다.

1968년 1월 하순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북에게 무력보복을 감행할 다섯 가지 선제공격방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그것은 공습지원을 받으며 지상공격을 감행하는 방안, 특수전 부대를 침투시키는 방안, 북측 선박을 나포하는 방안, 원산항을 해상봉쇄하는 방안, 북의 군사시설을 선택적으로 공습파괴하는 방안이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위와 같은 대북 선제공격방안을 검토하고 있을 때, 미국군 지휘부는 공격명령이 떨어지면 즉각 전투에 돌입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평양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이 1968년 1월 29일 본국 외무성에 보낸 긴급극비전문에 따르면, 당시 주한미국군사령관 찰스 본스틸(Charles H. Bonesteel)은 한국군 전군에게 전투훈련과 전투준비에 돌입하라고 명령하였고, 원산항을 해상봉쇄하려는 목적에서 미국 해군 기뢰부설함 및 어뢰정 6척을 추가로 북측 영해 가까이 북상배치하였다.

위의 긴급극비전문에 따르면, 미8군 사령관 얼 프리먼(Earl Freeman) 중장은 판문점 정전위원회에서 북측 대표단 박충국 단장에게 만일 북이 남을 공격하면 미국은 핵폭탄을 포함한 가장 현대적인 군사수단과 무기를 대북전쟁에 사용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에 대해 북측 박충국 단장은 미국의 그런 협박은 조선인민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구두로, 그리고 문서로 응답하였다.

미국이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을 구실로 대북전쟁을 도발하려는 세계 최대 규모의 침공작전태세를 취하자, 당시 미국과 냉전상태에 있었던 소련도 그처럼 위험천만한 사태를 방관할 수 없었다. 평양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이 1968년 1월 29일 본국 외무성에 보낸 극비전문에 따르면, 동해에 진입한 미국 제7함대 가까이 접근하여 동향을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은 소련군 태평양함대는 군함 두 척을 미국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 인근에 배치하였고, 소련군 태평양함대 소속 군함들이 추가로 동해에 남진배치될 것이라고 하였다.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이 있었던 1968년 1월 당시, 소련은 미국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사회주의핵강국이었다. 당시 중국의 핵억지력은 미국에 맞설 수 있을 만한 수준에 아직 이르지 못했다. 중국은 1964년 10월 16일 첫 핵실험에 성공함으로써 소련에 이어 두 번째 사회주의핵강국으로 등장하였으나, 미국 본토까지 핵탄두를 날려 보낼 운반수단은 아직 갖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중소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바람에 자기의 주적을 미국이 아니라 소련으로 규정하였다. 중국이 사거리 12,000km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둥펑-5를 시험발사한 때는 1971년 9월이었고, 그것을 실전배치한 때는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81년이었다.

1968년 당시 미국은 대북전쟁이 벌어지는 경우 사회주의핵강국 소련의 군사개입 가능성을 우려하였다. 그래서 미국은 대북전쟁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소련의 발목을 붙잡아두려고 생각하였다. 평양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이 1968년 1월 29일 본국 외무성에 보낸, 평양 주재 체코슬로바키아 외교관의 말을 인용한 긴급극비전문에 따르면, 당시 미국의 저명한 정치인 로벗 케네디(Robert F. Kennedy) 연방상원의원은 린든 존슨(Lyndon B. Johnson)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소련이 개입하지 않겠다고 공약하는 미소 양자협정을 채택하는 문제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긴급히 검토할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소련이 미국의 대북전쟁에 개입하지 않을까 하는 미국 정가의 예상은 빗나간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소련은 미국과 전쟁을 벌일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재발위험이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가다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직후 발송된 평양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의 비밀전문들은 이상한 분위기가 감지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이상한 분위기 가운데 첫 번째는, 미국이 소련에게 푸에블로호를 송환하고 승무원들을 석방하도록 대북압박을 가해달라고 요청했다는 정보가 흘러나온 것이다. 평양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이 1968년 1월 27일에 본국 외무성에 보낸 긴급극비전문은, 평양 주재 아랍연합공화국 부대사 에스맛 나기브(Esmat Naguib)가 전해준 이른바 대북압박요청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다. 이를테면, 나기브 부대사는 1월 25일 북측 외무성 허담 제1부상을 만난 자리에서, 미국이 소련에게 푸에블로호 송환과 승무원 석방을 위해 대북압박을 가해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 사실인가고 물었다고 한다. 그 물음을 받은 허담 제1부상은 “조선의 배타적인 권한 아래에 있는 이 문제에 쓸데없이 참견하는 제3자는 그 누구도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그런 참견행위는 조선의 내정에 대한 간섭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이상한 분위기 가운데 두 번째는, 미국이 소련에게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을 중재해달라고 요청하였다는 정보가 흘러나온 것이었다. 평양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이 1968년 1월 29일 본국 외무성에 보낸 극비전문에 따르면, 당시 북측 박성철 부수상과 두 차례 면담한 평양 주재 소련 부대사는 미국이 소련에게 푸에블로호 사건을 중재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소련은 이를 거부하였다고 말했다고 하였다. 평양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이 1968년 1월 26일 본국 외무성에 보낸 극비전문에 인용된 북측 외무성 성명에 따르면, “우리(북을 뜻함 - 옮긴이)는 소련이 함정 나포 문제에 대한 중재를 거부한 것에 대해 만족한다. 우리는 이 문제를 중재해달라는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나라를 미국의 편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고 한다.

미국이 소련에게 대북압박을 요청하였다는 압박요청설과 소련의 중재를 요청하였다는 중재요청설 가운데 과연 어느 것이 진실에 가까운 정보였을까? 아랍공화국 부대사가 압박요청설이 사실인가고 북측 외무성 제1부상에게 물어본 것만 봐도, 압박요청설이 당시 평양 주재 외국인 외교관들 사이에 떠돌던 소문이었음을 직감할 수 있다.

평양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이 1968년 1월 26일 본국 외무성에 보낸 극비전문에 인용된 북측 외무성 성명은 “나포한 승무원들을 풀어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만이 결정할 것”이라고 언명하였다. 그처럼 북은 푸에블로호 송환문제와 승무원 석방문제에 대해 매우 단호한 태도를 취하였다. 결전의지를 갖고 미국에게 기습공격을 퍼붓고 있었던 북이 그처럼 단호한 태도를 취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작 이상한 분위기가 감지된 까닭은, 북이 그처럼 단호한 태도를 공개적으로 취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이 소련에게 중재를 은밀히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방대한 규모의 대북전쟁 침공무력을 한반도에 출동시키고 선제공격방안까지 검토하고 있었던 미국은 왜 갑자기 소련에게 중재를 요청한 것일까? 미국은 대북전쟁 준비태세를 갖추고 북을 위협하고 있었지만, 북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이는 경우 미국 자신도 엄청난 전쟁피해를 입게 되리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미국이 엄청난 전쟁피해를 각오하였더라면, 대북전쟁을 당장이라도 도발할 수 있었으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게는 그런 전쟁을 벌일만한 뱃심과 담력이 없었다. 그래서 미국은 푸에블로호를 반환받고, 승무원을 송환받는 선에서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을 끝내고 싶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소련에게 비밀리에 중재를 요청한 미국의 속셈이었다.

그러나 그런 속셈이 북에게 통할 것으로 보았던 미국의 예상은, 대북관계에서 패배를 불러온 심각한 상황오판이었다. 미국의 무력침공을 한반도 통일의 결정적인 기회로 전환시킬 통일대전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북이 미국의 막후협상 제안을 배격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미국의 상황오판과 북의 통일대전 준비태세는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을 계기로 조성된 전쟁재발위험이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갔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전쟁재발위험의 새로운 국면이란 북과 미국의 무력충돌이 임박한 사실상 전시상황에서 북이 정치군사적으로 주도권을 완전히 틀어쥐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전쟁재발위험이 고조된 사실상 전시상황에서 북이 취할 수 있었던 전략적 선택은 두 가지였다. 푸에블로호 나포사건과 관련하여 미국의 정치적 굴복을 받아 내거나, 아니면 미국이 끝내 정치적으로 굴복하지 않을 경우 조국통일대전을 개시하는 것이었다.

비밀전문이 전해주는 44년 전 북의 통일대전 준비태세

2010년 7월 14일 기밀해제된 미국 연방의회 외교위원회 1968년 1월 26일 비공개 회의 회의록에 따르면, 딘 러스크(David Dean Rusk) 당시 미국 국무장관은 미국이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을 구실로 삼고 북에게 군사보복을 가하는 경우 북이 미국과 전쟁을 할 가능성이 진지하게 검토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북이 미국과 전쟁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였지만, 실제로 그것은 가능성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아래의 정보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평양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이 1968년 1월 26일 본국 외무성에 보낸 극비전문에 인용된 북측 외무성 성명은 “만일 미국이 우리의 영토주권을 침해하는 위협행위나 무력행사를 취하는 경우, 우리도 무력사용을 포함하여 똑같은 수단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하면서, “분쟁의 해결은 전적으로 미국에게 달린 문제”라고 지적하였다. 여기서 북이 말하는 분쟁의 해결은, 미국이 북에게 정치적으로 굴복하여 사죄문에 서명하고, 침공무력을 철수하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북은 외무성 성명을 통해 통일전쟁과 정치적 굴복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고 미국을 강하게 압박하였던 것이다.

북의 그러한 압박은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결전의지의 실천이었다. 평양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의 비밀전문들은 북이 통일대전을 벌일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는 생생한 모습을 이렇게 전해주었다. 평양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이 1968년 1월 26일 본국 외무성에 보낸 긴급비밀전문에 따르면, “1968년 1월 10일부터 12일까지 인민군과 로농적위대(지금은 로농적위군으로 개칭됨 - 옮긴이)가 북측 남부지역에서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북측 지도부는 이 합동군사훈련 결과에 대해 만족하였다. 더욱이 1월 22일과 23일 인민군 부대들과 로농적위대가 평양에서 열차편으로 출발하였다”고 한다. 또한 평양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이 1968년 1월 29일 본국 외무성에 보낸 극비전문에 따르면, 북은 “비밀리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방대한 병력을 남부전선과 동부전선으로 이동 중”이라고 하였다. 비밀전문에 쓰여 있는 남부전선이란 군사분계선 부근 최전방을 뜻하는 것이고, 동부전선이란 함경남북도 해안에서 강원도 해안에 이르는 기나긴 해안방어선을 뜻하는 것이다.

평양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이 1968년 2월 27일 본국 외무성에 보낸 극비전문은 전시총동원령이 내려진 당시 평양 분위기를 이렇게 전해주었다. “병력이동과 평양 주민의 방공훈련이 계속되고 있다. 비행기와 탐조등을 동원한 야간방공훈련이 강화되고 있다. 평양 시내와 인근 지역에서는 6.25 전쟁 때 파놓았던 방공호가 복구되었고, 아파트 단지들과 모든 개별주택 인근에 새로 방공호가 건설되고 있다. 참호와 저격수를 배치할 엄폐호를 파고 있으며, 평양 시내 밖에서는 위장막을 설치한 트럭과 버스들만 운행할 수 있다. 평양과 다른 지방도시들에서 집중적인 주민대피훈련이 실시되고 있다. 중앙정부기관에 보관 중인 문서들, 국가도서관과 과학원의 중요한 문고들, 인쇄공장에 설치된 인쇄기계 가운데 절반 이상을 평양 밖으로 대피하였다.”

평양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이 1968년 1월 26일 본국 외무성에 보낸 긴급비밀전문에 따르면, 북은 평양 주재 폴란드 대사관에게 평양에 건설된 거대한 지하시설로 연결되는 지하갱도를 폴란드 대사관 앞에 건설할 것이라고 통보하였다. 그리고 평양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이 1968년 2월 27일 본국 외무성에 보낸 극비전문에 따르면, 북은 평양에 주재하는 모든 외국 대사관들에게 미국의 공습에 대비하여 자체로 방공호를 건설하도록 권고하였다.

또한 평양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이 1968년 3월 17일 본국 외무성에 보낸 긴급극비전문에 따르면, 야간에 차량이 평양 시내로 들어가지 못하게 출입을 금지하는 조치와 외국 외교관 차량을 포함해 모든 차량에 통과증을 붙이지 않으면 운행하지 못하게 하는 조치가 취해졌다고 한다.

위에 인용한 비밀문건들에 나타난 북의 통일대전 준비태세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북이 미국에게 전쟁징후를 사전에 노출하지 않기 위해 “비밀리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통일대전 준비태세를 갖추었다는 사실과 전국적인 공습대피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사실을 통하여, 북의 통일대전 결전의지가 얼마나 강하고 단호하였는지 알 수 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44년 만에 다시 보낸 최후통첩
북이 결전의지를 가지고 통일대전 준비태세를 다그치던 사실상의 전시상황으로부터 44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다. 오늘 북의 통일대전 준비태세는 어떠할까? 보나마나, 1960년대 후반의 통일대전 준비태세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도로 정밀하게 완성된 수준에 이르렀을 것이 분명하다. 40년 이상 장기간에 걸쳐 통일대전의 군사적 준비에 전당, 전군, 전민이 온힘을 기울여왔으니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다. 1968년에 일어난 전쟁재발위험에 대처하고 있었던 북의 통일대전 준비태세를 전해주는 위의 비밀전문들을 읽으면, 마치 ‘옛 이야기’를 읽는 것처럼 느껴지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오늘 북은 전쟁징후를 사전에 전혀 노출하지 않고 통일대전 준비태세를 완료하고 최고사령관의 총공격명령을 대기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전국적 범위의 공습대피계획도 완벽하게 준비하였을 것이다. 더욱이 1968년 당시 북의 국방공업은 아직 발전도상에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무기는 소련에서 도입한 것들이었고 전략무기는 갖지 못하였지만, 오늘 북의 국방공업은 핵탄두와 대륙간탄도미사일, 잠수함과 전투기를 자력으로, 마음먹은 대로 만들어내는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발전수준에 이르렀다. 바로 이것이 북의 통일전쟁 준비태세가 미국의 대북전쟁 준비태세를 완전히 압도하고 있다고 보는 근거이며, 북과 미국이 전쟁을 벌이면 인민군이 순식간에 미국군을 제압하고 이길 것으로 보는 근거다.

44년 전, 김일성 주석은 전군이 통일대전 준비태세를 완료하고 자신의 총공격명령을 기다리라고 지시한 뒤, 통일대전과 정치적 굴복 가운데 어느 하나를 택하라는 최후통첩을 미국에 보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와 똑같은 정치군사상황이 44년이 지난 오늘 북미관계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 김정은 제1위원장은 전군이 통일대전 준비태세를 완료하고 자신의 총공격명령을 기다리라고 지시한 뒤, 통일대전과 정치적 굴복 가운데 어느 하나를 택하라는 최후통첩을 미국에 보낸 것이다. 그것은 비록 문서화된 최후통첩은 아니지만, 그 어떤 문서보다도 더 명확하게 행동으로 이행되는 최후통첩이다.

44년 전, 김일성 주성이 보낸 최후통첩을 받고 결국 정치적으로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미국은, 푸에블로호가 북측 영해를 침범하여 불법정찰활동을 감행하였음을 인정하고 그런 범죄를 다시 저지르지 않겠다고 공약한 사죄문에 서명하였고, 동해에 배치한 항모강습단을 철수하였다.

44년이 지난 오늘 김정은 제1위원장이 통일대전과 정치적 굴복 가운데 어느 하나를 택하라고 미국에 보낸 최후통첩에서 미국의 정치적 굴복이란, 미국이 그토록 기피해오는 평화협정 체결과 주한미국군 철군을 뜻하는 것이다.
만일 미국이 이번에 상황을 또 오판하여 김정은 제1위원장의 최후통첩을 무시한다면, 미국에게 남게 될 선택은 북과 전쟁을 하는 것밖에 없다. 이미 북은 김정은 제1위원장의 명령에 따라 통일대전 결전의지를 행동에 옮기는 중이다.

김정은 제1위원장의 최후통첩을 무시한 미국이 결국 사회주의핵강국의 기상천외한 선제공격을 받고 손을 쓸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패하여 항복하는 것은, 푸에블로호가 대동강변에 전리품으로 전시된 지난 13년 간의 굴욕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난 100년 간의 굴욕으로 될 것이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44년 만에 다시 보낸 최후통첩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심사숙고해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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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5

무차별 공습에 맞서 싸우는 카쌈로켓

[한호석의 개벽예감] (38)
자주민보 2012년 11월 24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식기세척제와 아세톤으로 만든 카쌈여단의 신형 폭탄

30년이라는 짧은 한 생을 불꽃처럼 뜨겁게 살다가 자기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산화한 야히야 아이야쉬(Yahya Ayyash, 1966-1996)를 아는 사람이 이 땅에 얼마나 있을까? 중동의 깡패국가 이스라엘에게는 아이야쉬가 ‘테러범’으로 보일 테지만, 해방과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팔레스타인 인민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아랍민족의 눈에는 그가 영웅의 모습으로 비친다. 우리나라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항일투사들이 일제에게 ‘비적’으로 보였으나, 우리 민족의 기억 속에 영웅으로 살아있는 것처럼, 아이야쉬도 팔레스타인 인민의 기억 속에 바로 그런 모습으로 살아있는 것이다.

야히야 아이야쉬는 이스라엘이 강점한 팔레스타인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싸우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Gaza Strip)의 자치정부를 이끄는 하마스(Hamas) 산하 무장조직인 이즈 아띤 알 카쌈(Izz ad-Din al-Qassam)여단의 웨스트 뱅크(West Bank) 지역 대대장이었다.

어려서부터 전자제품이나 기계설비를 수리하는 데 뛰어난 소질이 있었던 아이야쉬는 팔레스타인 영토인 웨스트 뱅크에 있는 비르제이트(Birzeit)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인접국 요르단에 유학하려고 하였으나 이스라엘 정부당국이 그에게 출국허가를 내주지 않아 유학을 포기하였다. 이러한 개인적 좌절이 그를 팔레스타인의 사회정치적 현실에 눈을 뜨게 하였고, 그를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으로 이끌었다. 아이야쉬가 하마스에 가입한 것은 바로 그 무렵이다.

하마스에 가입한 그는 남다른 전자공학지식과 특기를 살려 무기개발사업 책임자가 되었다. 팔레스타인을 강점한 이스라엘의 악착스러운 감시망과 차단벽을 뚫고 하마스가 다른 나라에서 만든 폭약이나 관련물품을 입수하는 것은 매우 힘들었으므로, 아이야쉬는 자력갱생의 정신을 발휘하여 가정주부들이 쓰는 식기세척제와 아세톤을 혼합하여 폭발력이 강한 신형 폭탄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그가 만든 신형 폭탄은 카쌈여단의 공격력을 결정적으로 강화해준 무기로 되었다. 이전에 카쌈여단 전사들은 소형 폭탄 여러 개를 온몸에 칭칭 감고 자폭공격에 나서야 하였으나, 1993년부터는 아이야쉬가 만든 신형 폭탄을 가득 실은 차량을 몰고 돌진하는 강력한 차량폭탄 자폭공격으로 전환하였다. 이 위력적인 신전술은 이스라엘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차량폭탄 자폭공격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이스라엘이 그 신형 폭탄을 ‘악마의 어머니’라 불렀겠는가.

카쌈여단이 자가의 공격전술이 그처럼 전환한 이후 이스라엘에게는 아이야쉬가 눈엣가시처럼 되었으며, 이스라엘 국가정보기관 쉰 벳(Shin Bet)은 그를 살해하려고 혈안이 되어 날뛰었다. 고성능 폭약 15g을 넣은 손전화를 하마스 배신자를 통해 아이야쉬에게 넘겨준 쉰 벳의 암살공작단은, 무선신호감청기를 탑재한 정찰기를 팔레스타인 영토 상공에 띄워놓았다가 아이야쉬가 그 손전화로 통화하는 시간을 지상에서 대기 중인 자기들의 지령소에 알려주었다. 지령소는 아이야쉬 통화시간에 맞춰 원격조종으로 그의 손전화를 폭발시켜 통화 중인 그를 현장에서 폭살하였다.

아이야쉬를 떠나보내는 장례식에는 10만 명에 이르는 애도인파가 운집하였고, 하마스는 40일 추모기간을 선포하였으며, 카쌈여단 전사들은 그를 살해한 이스라엘에 대한 보복으로 차량폭탄 자폭공격을 가해 60명 이상의 인명피해를 입혔다.

화학비료와 설탕으로 만든 카쌈로켓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 세계 피압박민족 해방운동사가 한결같이 말해주는 것처럼, 제국주의침략자들이 반제투사를 살해한다고 해서 해방운동사가 자기의 운동을 멈추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만일 반제투사가 전선에서 희생되면, 그 뒤를 이어 투쟁에 나선 수많은 반제투사들에 의해 전선이 더욱 확대하고 강화되는 것은 피압박민족 해방운동의 합법칙적 발전이다. 하마스와 그 산하의 카쌈여단도 그러한 합법칙적 발전경로를 밟아왔다.

이스라엘은 아이야쉬를 살해하였지만, 그의 뒤를 이어 자력갱생의 정신에 불타는 카쌈여단의 전사들이 1990년대에 그가 만들었던 자폭공격용 폭탄보다 훨씬 더 강력한 신형 무기를 만들었으니 그것이 바로 카쌈 로켓(Qassam rocket)이다. 이 로켓은 카쌈여단 전사들이 사다리 같이 생긴 간단한 철제 발사대를 들고 다니다가 아무 데서나 세워놓고 발사하는 세계 유일의 수제품 로켓무기다.

카쌈여단이 손으로 만든 그 로켓무기는 농민들이 밭에서 화학비료로 쓰는 질산칼륨과 가정주부들이 부엌에서 조미료로 쓰는 설탕을 섞어 만든 추진제로 날아간다. 그런 수제품 추진제로 날아가는 카쌈로켓의 사거리는 짧은 것이 5km, 긴 것이 20km다. 또한 카쌈로켓은 철공소에서 쓰는 베어링을 넣고 그 주위에 폭약을 채워 넣은 소형 탄두를 탑재하였는데, 탄두 무게는 작은 것이 5kg, 큰 것이 10kg이다.

이 수제품 로켓무기를 2001년 9월부터 생산하기 시작한 카쌈여단은 2001년 10월부터 2012년 11월 현재까지 카쌈로켓 7,882발, 박격포 4,890발을 이스라엘에 발사하였는데, 이스라엘측에서 사망자는 61명, 부상자는 1,719명이다. 카쌈여단이 카쌈로켓을 여기저기서 밤낮으로 쏘아대면, 피격공포에 질린 이스라엘은 방공호로 대피할 수밖에 없으며, 그로써 이스라엘은 마비상태에 빠지게 된다. 카쌈로켓은 인명을 살상하는 무기라기보다 적에게 공포심을 주어 적진을 마비시키는 무기다.

피격공포에 질린 이스라엘은 카쌈로켓을 막아내기 위해 미국에게 황급히 도움을 요청하였고, 미국은 2009년에 2억400만 달러를 이스라엘에게 퍼주고 기술을 지원하여 로켓무기 요격체계를 개발하는 사업이 진행되었다. 이스라엘이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개발한 로켓무기 요격체계가 2011년 3월 처음으로 실전배치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요즈음 언론에 자주 보도되는 ‘철갑지붕(Iron Dome)’이다. 카쌈여단의 반격을 받고 있던 이스라엘은 2012년 11월 17일 다섯 번째 로켓무기 요격체계를 배치예정일보다 앞당겨 수도권 외곽에 허둥지둥 배치하였다.

‘철갑지붕’이라 부르는 로켓무기 요격체계는 최장 탐지거리가 64km인 방공레이더와 연결되었는데, 방공레이더가 날아오는 카쌈로켓을 포착하면 타미르(Tamir)라 부르는 요격미사일을 곧바로 발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날아오는 카쌈로켓을 명중시키는 게 아니라, 날아오는 카쌈로켓 가까이 날아간 타미르 요격미사일이 자폭한 폭풍파편으로 카쌈로켓을 파괴하는 것이다.

‘철갑지붕’은 카쌈로켓을 과연 잘 막아낼 수 있을까? 카쌈로켓은 화학비료와 설탕을 섞어 만든 추진제로 날아가므로 추진력이 약하며, 따라서 카쌈로켓의 비행속도는 일반 로켓무기의 비행속도보다 더 느릴 수밖에 없다. 또한 카쌈로켓 동체와 꼬리날개는 망치로 두드려 만든 것이어서 발사자가 의도한 방향으로 날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흔하다. 이스라엘이 ‘철갑지붕’의 카쌈로켓 요격률이 90%라고 주장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러나 지금 카쌈여단은 이스라엘의 공습을 피해 카쌈로켓을 한 두 발 씩 쏘고 있지만, 만일 하마스와 이스라엘이 전쟁에 돌입하는 경우 카쌈여단이 그 로켓을 일제사격으로 한꺼번에 동시다발로 쏘면, ‘철갑지붕’을 간단히 뚫어버릴 수 있다.

이스라엘군이 2012년 11월 15일부터 17일까지 사흘 동안 카쌈로켓 245발을 요격하였다고 주장하였는데, 그 발표를 그대로 인정한다면 하루 평균 80발씩 요격한 셈이다. 요격하지 못하고 빗나간 경우도 10% 정도이므로, 실제 발사한 타르 요격미사일은 하루 평균 약 90발씩이다. 타르 요격미사일 한 발은 약 5만 달러이므로, 이스라엘군은 하루 평균 450만 달러에 이르는 타르 요격미사일을 쏘았던 것이다. 그에 비해, 카쌈로켓 한 발은 약 800달러밖에 하지 않는다. 카쌈여단은 62배나 싼 카쌈로켓으로 이스라엘군의 5만 달러짜리 타르 요격미사일에 맞서고 있는 것이다.

중동지역 반제군사전선 뒤흔든 시리아 내전

이스라엘은 인구 45만 명이 사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대한 야간공습을 감행하였다. F-16 전투기를 동원하여 인구밀집도시를 무차별 야간공습으로 파괴한다는 점에서, 깡패국가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은 군사작전이 아니라 명백한 살육만행이다. 이스라엘의 살육만행에 맞선 카쌈여단은 카쌈로켓과 박격포를 몇 발 씩 쏘며 대항하고 있지만, 이스라엘군의 전투기 공습에는 속수무책이다. 그 전투기를 격추할 지대공 미사일이 카쌈여단에 없기 때문이다.

만일 팔레스타인이 주권국가로 독립하여 정규군을 가지게 되면, 그들도 지대공 미사일을 수입하여 실전배치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군 전투기는 팔레스타인 영토를 함부로 공습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독립을 방해, 저지하려고 날뛰는 것이다.

이번 사태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왜 가자지구를 공격하였을까 하는 문제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의 카쌈여단이 이스라엘을 먼저 공격하였기 때문에 대응차원에서 반격을 가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말하였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공격한 것은 가자지구 자치정부를 이끄는 하마스가 최근 정치적으로 고립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제국주의세력은 강적을 피하고 그 대신 약한 상대만 골라 기습하는 야수의 습성이 있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은 바로 그런 야수적 습성의 발로다.

그러면, 하마스는 왜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이전보다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을까? 그 까닭은, 하마스가 이제껏 자기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준 이란, 시리아, 헤즈볼라와 거리를 두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미국과 이스라엘에 맞서 싸우는 이란, 시리아, 헤즈볼라, 하마스의 반제공동전선에서 하마스가 한 걸음 벗어난 것이다.

이란, 시리아, 헤즈볼라, 하마스의 반제공동전선에서 하마스가 한 걸음 벗어나 공동전선이 흔들리게 된 원인은, 시리아 내전에 있다. 미국은 시리아의 아싸드 정권을 전복하기 위해 시리아 반정부세력의 폭동을 배후에서 조종, 지원하고, 그들의 폭동을 내전으로 격화시켰는데, 시리아 내전의 대결구도는 아랍민족권의 양대파벌인 수니파(Sunni)와 시아파(Shi'a)의 대결이라는 외피를 쓰고 있다.

원래 아랍민족성원 가운데서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수니파고, 시아파는 소수다. 그런데 이란이 유일하게 시아파가 다수인 아랍나라이고, 시리아는 소수인 시아파가 정권을 잡고 다수인 수니파를 통치하는 아랍나라이고, 헤즈볼라는 시아파 무장정파다. 그래서 이란은 시리아의 아싸드 정권과 헤즈볼라를 집중적으로 지원해주고 있는 것이다. 헤즈볼라는 이란과 시리아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으며 군사력을 줄곧 강화하여, 지금은 이스라엘과 맞서 싸워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강해졌다. 헤즈볼라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교전단체다.

여기서 눈여겨보는 것은, 시아파 정치세력은 미국과 이스라엘에 맞서 무장을 들고 싸우는 반제투쟁에 아주 적극적인 반면, 수니파 정치세력은 미국과 이스라엘에게 타협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심지어 친미화된 경우도 흔하다는 사실이다. 그와 달리, 수니파 무장정파인 하마스는 미국과 이스라엘에 맞서 싸우는 반제투쟁에 전력해왔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이란, 시리아, 헤즈볼라는 하마스와 단합하여 중동지역에 강력한 반제공동전선을 구축했던 것이다.

그런데 시리아에서 시아파 정권과 수니파 반란군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내전이 일어났다. 하마스가 통치하는 가자지구에서 하마스를 지지하는 주민들은 수니파이므로, 자연히 시리아의 수니파 반란군을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분위기가 가자지구 주민들 사이에서 생겨나게 되었다. 그런 주민들을 무시하고 하마스가 이전처럼 시리아의 시아파 정권과 밀착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시리아 내전이 일어나자, 이란은 당연히 아싸드 정권을 더욱 적극적으로 지지, 옹호하게 되었지만, 하마스는 아싸드 정권과 반란군 사이에서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다.

시리아 내전은 내전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반제공동전선에서 일어난 반제세력 대 제국주의세력의 격렬한 무력충돌이다. 그래서 이란은 반제공동전선을 함께 구축한 하마스가 당연히 아싸드 정권을 지지, 옹호할 줄 알았으나, 하마스는 시리아 내전에 대해 어정쩡한 중립을 지켰다. 시리아 내전에 대한 하마스의 중립적 태도에 실망한 이란은 2011년 8월 하마스에 보내주려던 3억 달러의 원조금을 중단하면서, 하마스와 경쟁관계에 있는 팔레스타인의 다른 소수파 무장세력인 이슬라믹 지하드(Islamic Jihad)와 유대를 강화하였다. 그러자 하마스는 이란 및 시리아의 아싸드 정권과 갈등관계에 있는 수니파 나라들인 이집트, 터키, 카타르와 유대를 강화하였다. 이란이 3억 달러의 원조금을 중단하면, 하마스는 45,000명에 이르는 자기 성원들에 대한 생활비를 지급하지 못한다.

하마스의 적인 이스라엘이 그처럼 시아파와 수니파의 갈등구도라는 외피를 쓴 시리아 내전의 영향에 휘말려 뜻하지 않게 발이 묶인 하마스가 진퇴양난의 질곡에 빠져든 사정을 간과할 리 만무하였다. 이스라엘은 2012년 11월 14일 이동 중이던 카쌈여단 사령관 아흐메드 알자바리(Ahmed al-Jabari, 1960-2012)의 탑승차량을 전투기에서 기습적으로 발사한 정밀타격미사일로 폭파하고, 가자지구에 무차별 야간공습을 퍼부으며 광란하였던 것이다.

승리는 또 다시 반제군사전선에게 돌아갔다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고립된 하마스를 반제공동전선에서 완전히 이탈시키려는 간교한 계락을 실행에 옮겼으나 실패했으며, 이스라엘군의 가자지구 무차별 공습도 사실상 실패하였다. 그렇게 보는 까닭은, 하마스가 반제공동전선을 이탈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무차별 공습도 카쌈여단의 강력한 반격과 아랍민족권 내부에서 폭발한 반이스라엘 연대투쟁, 그리고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살육만행을 규탄하는 국제적 압력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하마스와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정전중재안을 놓고 카이로에서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하마스는 이스라엘에게 가자지구 봉쇄를 해제하고, 하마스 요인암살과 가자지구 무력침공을 중지할 것을 정전조건으로 제시하였고, 이스라엘은 하마스에게 가자지구에 자기들이 불법적으로 설치해놓은 봉쇄수단인 ‘보안장벽’에 접근하지 말 것과 가자지구에서 이집트로 통하는 지하갱도시설로 무기를 반입하지 말 것을 정전조건으로 제시하였다.

그처럼 상충되는 정전조건을 놓고 쌍방이 어떤 합의점을 찾을지 알 수 없으나, 2012년 11월 20일 하마스는 이스라엘과 정전에 합의하였다고 자신만만하게 발표한 반면, 이스라엘은 아직 정전협상이 끝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것은 정전이 임박하였음을 알려준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정전협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발표한 까닭은, 그들이 이집트의 정전중재안에 대해 최종 답변을 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막바지에 이른 정전협상에서 전전긍긍하는 것은 패배를 자인한 것이며, 더욱이 공격자인 이스라엘이 정전협상에 나온 것 자체가 자기들의 정치군사적 목적달성에 실패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에 맞서 싸우는 아랍민족의 반제군사전선은 가자지구 방어전에서 또 다시 전술적 승리를 쟁취하였다.(2012년 1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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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1

미얀마에 던진 미국의 추파, 그리고 미얀마식 사회주의의 험로


변혁과 진보 (101)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미국은 왜 미얀마에 추파를 던지고 있을까?
 
미국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이 지난해 2011121일 미얀마를 공식 방문하더니, 2012711일에는 미국이 미얀마에 대한 경제제재를 대폭 완화해주었고, 재선에 성공한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올해 1119일 미얀마를 방문하였다. 미국과 미얀마의 관계개선속도가 이상하리만치 빨라 보인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세계 각국의 수구언론매체들은 이번 오바마의 미얀마 방문에서 그가 아웅산 수치와 만나는 장면만 대서특필하여 보도하였다는 점이다. 미국 대통령이 다른 나라를 공식 방문하는 경우, 당연히 그 나라 대통령과 만나는 장면이 언론보도에 크게 나와야 마땅한데, 미국 대통령의 이번 미얀마 방문에 대한 수구언론매체들의 보도행태는 야당대표와의 상봉만 의도적으로 부각시킨 것이다. 이것은 미얀마 정부를 사실상 모욕한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아웅산 수치의 자택을 방문, 대화를 나눈 뒤 수치의 뺨에 입을 맞추고
있는 모습 (AFP 보도 사진)


수구언론매체의 그런 편향보도는 미국이 미얀마에게 관계개선의 추파를 던지는 것만큼이나 이상한 일이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문제의 핵심은 수구언론매체들의 이상한 편향보도에 있는 게 아니라 미얀마에게 관계개선의 추파를 던지는 미국의 이상한 행동에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얀마 정권에게 독재인권탄압을 자행한다고 비난을 퍼부으며 경제제재를 가해왔던 미국이 지금은 태도가 돌변하여 추파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미국이 미얀마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보다, 미국이 미얀마 반정부세력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다고 말해야 옳다.
 
아웅산 수치를 자유인권의 화신으로 미화분장해놓은 미국이 그녀를 우두머리로 하는 미얀마 반정부세력에게 뜨거운 추파를 던지는 것은, 미국이 반정부세력을 지원하여 미얀마 정권을 퇴진시키고 아웅산 수치를 내세워 친미정권을 세움으로써 결국 미얀마 사회주의체제를 자본주의체제로 변질시키려는 음흉한 정권교체와 체제변질의 속셈을 드러낸 것이다. 이미 미국은 2008년에 아웅산 수치에게 미국 연방의회가 주는 최고 훈장인 의회금메달을 안겨주었고, 20129월 오바마는 그녀를 백악관에 불러들여 환대해주었다. 미얀마에서 친미정권 수립과 사회체제 변질을 노리는 미국의 공작은 중학생들도 알 수 있을 만큼 너무 노골적이다.
 
 
미얀마의 주요산업 국유화, 무엇이 문제였을까?
 
196232일 미얀마에서 진보적 성향의 군부세력이 군사정변을 일으켜 집권하였다. 군사정변을 이끈 18명의 군부인사로 구성된 단합혁명협의회(Union Revolutionary Council)’가 집권주체로 등장하였다. 196274단합혁명협의회가 집권당으로 확대개편되었으니, 그 때 창설된 사회주의집권당이 바로 미얀마사회주의강령당이다.
 
이 당은 당의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회주의정당이다. 미얀마사회주의강령당이 추구하는 강령은, 군사정변 직후인 1962428단합혁명협의회가 제시한 버마식 사회주의의 길(Burmese Way to Socialism)’이라는 사회주의강령이다. 이 사회주의강령은 서구식 사회주의가 아니라 미얀마식 사회주의를 추구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공동소유와 공동계획에 의한 사회주의경제를 건설하는 것이다.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국가경제의 중앙계획화가 그 강령에 명시되었다. 미얀마에서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란 국가적 소유와 협동적 소유를 뜻한다.
 
둘째, 서구식 의회민주주의를 역사적 실패로 규정하고 사회주의적 민주국가(socialist democratic state)를 창설하였다. 이것은 다당제에서 일당제로 전환한 것을 뜻한다.
    
셋째,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과도기 강령(programme for transition to socialism)’을 제시하였다. 미얀마식 과도기 강령에 포함된 전략적 과업을 열거하면, 미얀마 인민의 낡은 사상관점을 개조하는 문제, 관료주의 행정의 병폐를 제거하는 문제, 국방력을 강화하는 문제, 농업생산력을 높이는 문제, 교육제도를 개혁하는 문제, 보건 및 문화수준을 높이는 문제, 소수족들과 다수족 사이의 민족적 동질성을 확립하는 문제, 노농대중조직을 강화하여 정치적 주체로 세우는 문제 등이다.
 
 위와 같은 사회주의강령에 따라 미얀마 정권은 196361기업 국유화 법령을 선포하고 약 15,000개에 이르는 사유기업들을 국유기업으로 전환시키는 급진적인 주요산업 국유화를 단행하였고, 자본가가 새로운 기업이나 공장을 세우지 못하게 금지하였다. 미얀마 정권은 그러한 급진적인 주요산업 국유화로 미얀마 석유산업을 장악하였는데, 석유자원을 갈취해온 미국과 영국의 석유회사들을 미얀마에서 쫓아내고 그 대신 국유기업인 버마석유회사를 창설하였다. 미얀마 정권이 주요산업을 국유화하자, 미얀마의 시장경제를 좌우하던 인도계 자본들과 화교자본들이 한꺼번에 국외로 빠져나갔다. 이처럼 급격한 해외자본이탈은 취약한 미얀마 경제를 난관에 빠뜨렸다.
 
동남아시아에서 대표적인 쌀수출국인 미얀마에서 쌀생산량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쌀수출이 동반적으로 하락하자, 외환보유고마저 급격히 고갈되었다. 물가폭등과 소비품 부족으로 암시장이 창궐하게 되었다. 가격통제정책을 실시하였으나, 암시장 확산을 막지 못했다. 미얀마 국가경제에서 암시장이 차지하는 비율이 약 80%까지 높아졌다는 자료도 있다.
 
미얀마의 주요산업 국유화 정책이 그처럼 심각한 난관에 빠져들게 된 까닭은, 주요산업 국유화를 급진적으로 추진하였기 때문이다. 똑같이 주요산업 국유화를 추진하였지만, 미얀마에서는 사실상 실패한 반면에 베네주엘라에서는 성공한 까닭은 미얀마의 주요산업 국유화가 급진적이었기 때문이다. 베네주엘라에서는 주요산업 국유화의 비중을 30%로 제한하였으나, 미얀마의 주요산업 국유화는 그런 제한이 없었다. 좌경급진주의 오류가 사회주의를 망친다는 말은 미얀마의 역사적 경험에서도 진실로 입증되었다.
 
주요산업 국유화를 급진적으로 추진하는 것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주요산업 국유화를 요구할 때만 가능하다. 그러나 1960년대 미얀마에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사회정치의식은 주요산업 국유화를 요구할 만큼 성숙되어 있지 못하였다. 그런 조건에서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사회주의정치세력이 주요산업을 급진적으로 국유화하였으니, 실패를 예고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미얀마식 사회주의의 한계
 
 자본주의시장경제를 사회주의계획경제로 전환하는 것은 인민의 전폭적 지지를 받는 정권이라야 무리 없이 추진할 수 있다. 그런데 1962년에 군사정변을 통해 집권한 미얀마 정권은 그런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미얀마에서 사회변혁을 추진한 미얀마사회주의강령당 자체가 원래 대중정당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었고, 미얀마 인민들로부터 커다란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미얀마 정권은 1962년부터 1974년까지 계엄통치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주의정권이 무려 12년 동안이나 계엄통치를 계속하는 것은 사회주의 발전원리와 맞지 않는 것이다.
 
 베네주엘라식 사회주의는 베네주엘라 인민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서 시작되어 그 지지를 받으며 발전하고 있는 데 반해, 미얀마식 사회주의는 미얀마 인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그처럼 인민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 미얀마 정권은 반사회주의세력의 준동에 대응하여 계엄통치로 자신을 유지해왔으나, 미얀마 인민의 정치적 불만은 계속 쌓여갔다.
 
그런 정치적 불만이 폭발한 사건이 198888일 미얀마에서 일어난 대규모 폭동이다. 미얀마 정권은 유혈진압으로 폭동을 진압하였으나, 그것은 반정부세력을 진압하기는커녕 그 세력의 준동을 더욱 자극한 결과를 낳았으며, 반정부세력의 구심점인 아웅산 수키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사회주의의 길은 정권이 인민에게 강제로 시켜서 가는 길이 아니라 인민이 자발적으로 함께 가는 길인데, 미얀마에서는 그렇지 못하였다. 바로 이것이 미얀마식 사회주의가 뛰어넘지 못한 한계였다.
 
또한 베네주엘라의 우고 챠베스 대통령이 그러한 것처럼, 인민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와 추앙을 받는 지도자가 있어야 인민을 사회주의의 길로 이끌어 갈 수 있는데, 미얀마에서는 반대 현상이 나타났다. 오늘 미얀마에서 인민으로부터 지지와 추앙을 받는 쪽은 사회주의 정권의 지도자인 테인 세인 대통령이 아니라 그 정권을 반대하는 친미주의자이며 시장주의자인 아웅산 수키다. 인민의 지도자가 없다는 것이 미얀마식 사회주의가 뛰어넘지 못한 가장 결정적인 한계라고 말할 수 있다.
 
차츰 복잡해지는 미얀마의 현실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정권이 진보와 변혁의 길을 열어놓을 수 있다는 불변의 진리를 말해주고 있다. (20121119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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