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2/31

사회주의국가에는 사회주의의 고유한 기준이 있다

변혁과 진보 (60)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사회주의국가의 국상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

전 세계에 방영되는 미국의 보도전문 텔레비전방송 CNN은 2011년 12월 28일 <조선중앙텔레비죤>이 실시간 송출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영결식 현장을 '긴급보도(breaking news)'로 장시간 중계하였다. 중국 국영 텔레비전방송 CCTV도 김정일 국방위원장 영결식 현장을 중국 전역에 생방송으로 중계하였다. 미국과 중국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자본주의국가들의 주요언론매체들도 국상을 당한 북측 인민들이 비통한 심정으로 오열하는 모습을 전 세계에 알렸다.

그러나 자본주의국가들의 주요언론매체들은 국상을 당한 북측 인민들이 왜 그처럼 비통한 심정으로 오열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반사회주의 선동가들이 토해내는 억측과 비방을 여과 없이 그대로 보도하기도 하였다. 북측을 헐뜯는 갖가지 비방과 중상만 들려오는 자본주의국가에서 북측의 국상기간에 인민들이 오열하는 슬픔의 의미를 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북측의 국상기간에 인민들이 오열하는 모습을 보며 상기하게 된 것이지만, 인민들이 자기 영도자의 서거를 애도하는 것은 사회주의국가의 국상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이다. 이를테면, 1953년 4월 5일 스탈린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서거하였을 때 소련 인민들이 애도하였고, 1969년 9월 2일 호치민 베트남 국가주석이 서거하였을 때 베트남 인민들이 애도하였고, 1976년 9월 9일 마오쩌뚱 중국공산당 주석이 서거하였을 때 중국 인민들이 애도하였고, 1980년 5월 4일 티토 유고슬라비아공산당 위원장이 서거하였을 때 유고연방 인민들이 애도하였다.


마오쩌뚱 중국공산당 주석의 서거를 애도하는 중국 인민들

그런데 주목하는 것은, 자본주의국가의 통치자가 재임 중 서거하였을 때는 그의 유가족들만 슬퍼하지만, 사회주의국가의 영도자가 서거하였을 때는 전체 인민이 애도한다는 사실이다. 사회주의국가의 국상과 자본주의국가의 국상에서 슬픔의 의미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 크다. 왜 그처럼 커다란 의미격차가 생기는 것일까?

그런 격차가 생기는 까닭은, 자본주의국가에서는 상상하기 힘들고 사회주의국가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영도자와 인민의 특별한 관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4-5년 정도 지나면 선거를 통해 다른 통치자로 갈아치우는 자본주의국가의 임기제 정치제도에서는 통치자가 국민들과 어떤 깊은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자본주의국가의 통치자는 짧은 재임기간 동안 국무회의나 주재하고 비서실에서 보내오는 문건에 결재나 하고 때로 외국방문이나 하다가 임기를 채우면 조용히 퇴임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나 사회주의국가에서는 전혀 다른 현실이 펼쳐진다. 사회주의국가는 건설되기 이전부터 간고한 혁명과정을 거쳐야 하며, 그런 혁명과정을 거쳐오는 동안 혁명을 이끄는 영도자와 혁명을 지지하는 인민들 사이에 강한 결속관계가 형성된다.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간고한 혁명과정에서 영도자와 인민들 사이에 필연적으로 형성된 동지적 결속관계, 바로 그 관계 위에 사회주의국가가 건설되는 것이다.

혁명에서 퇴장이라는 말을 쓸 수 없는 것처럼, 혁명영도에서도 퇴임이라는 말을 쓸 수 없다. 사회주의국가의 영도자는 생전에 혁명을 영도하는 것은 물론이고, 서거 이후에도 유훈을 통해 혁명을 지속적으로 추동한다. 혁명은 어떤 임기 안에 결코 가둘 수 없는 영속적인 운동과정이다. 현실이 그러한 데도, 반사회주의 선동가들은 사회주의국가의 영도자가 장기집권으로 '철권통치'를 한다느니 또는 '일인독재'를 한다느니 하는 악담과 모욕을 늘어놓는다.

명백하게도, 사회주의국가의 영도자는 어떤 공식직책을 뜻하는 개념이 아니라 혁명과정에서 형성된 인민들과의 관계를 뜻하는 개념이므로, 영도자는 선거를 통해서 선출될 수도 없고, 임기제로 복무할 수도 없다. 따라서 사회주의국가의 영도자는 간고한 혁명과정을 함께 걸어온 인민들에 의해 추대되고, 인민들이 추대한 영도자는 사회주의국가건설의 완성을 위해 무임기로 복무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스탈린은 1922년부터 1953년에 서거할 때까지 31년 동안 소련공산당 서기장으로 사회주의국가건설을 완성해나가는 혁명과정을 영도하였고, 호치민은 1945년부터 1969년에 서거할 때까지 24년 동안 베트남 국가주석으로 그 과정을 영도하였고, 마오쩌뚱은 1943년부터 1976년에 서거할 때까지 33년 동안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그 과정을 영도하였고, 티토는 1936년부터 1980년에 서거할 때까지 44년 동안 유고슬라비아공산당 위원장으로 그 과정을 영도하였다.


마오쩌뚱과 후계자 화궈펑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 겸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의 초상을 담은 포스터 (1976년 12월)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간고한 혁명과정에서 영도자와 인민들 사이에 필연적으로 동지적 결속관계가 형성된다는 것, 그리고 바로 그러한 동지적 결속관계 위에 사회주의국가가 건설되고 그것을 완성해나가는 과정이 진척된다는 것을 이해하여야 사회주의국가의 영도자가 서거하였을 때, 그 나라 인민들이 왜 그처럼 애도하는지를 알 수 있다. 못된 통치자의 감언이설에 속아 대선투표를 잘못하는 바람에, 계속해서 고생만 하는 자본주의국가의 국민들은 북측 인민들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거에 왜 그처럼 오열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반사회주의 선동가들이 떠드는 것처럼 만일 사회주의국가의 인민들이 '철권통치'와 '일인독재' 아래서 억눌려왔다면, 자기 영도자가 서거하였을 때 애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회주의국가에서 영도자의 서거에 대한 인민들의 애도는 진실한 감정표현이다. 그 슬픔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인민들이 평소에 자기 영도자를 얼마나 믿고 따랐는지를 알지 못한다. 사회주의국가의 국상기간에 나타나는 인민들의 슬픔의 깊이는 그들의 영도자에 대한 인민들의 사랑과 신뢰의 깊이다. 


슬픔의 깊이가 다르다

사회주의국가의 국상에서 인민들이 애도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는 있지만, 국상기간에 북측 인민들처럼 비통한 심정으로 오열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다른 사회주의국가의 국상은 전체 인민이 애도하는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으나, 북측의 국상은 전체 인민의 오열과 통곡 속에서 진행되었다.

△ 2011년 12월 28일 평양 시내에서 진행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영결식. 평양시민들은 오열과 통곡을 하기도 하고, 도로로 나와 운구차량을 에워싸기도 했다. (<조선중앙통신> 보도 사진)


슬픔의 깊이가 다른 것이다. 같은 사회주의국가의 국상인 데도, 왜 그처럼 슬픔의 깊이가 다른 것일까? 그것은 사회주의국가의 건설방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북측의 사회주의국가 건설방식이 다른 나라의 사회주의국가 건설방식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근본적 차이는, 사회주의의 본질에 대한 인식의 차이이며, 사회주의국가의 발전수준을 가늠하는 기준의 차이다. 이 문제에 대해 아래와 같이 논할 수 있다.
 
다른 사회주의국가들에서는 사회주의를 경제체제로만 이해하고, 인간관계로는 이해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사회주의국가가 사회주의경제체제 위에 건설된다는 생각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는 사회주의국가에 대해 절반만 아는 것이다. 물론 사회주의국가는 새로운 경제체제 위에 건설되지만, 사회주의국가가 새로운 경제체제만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관계 위에서도 건설된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사회주의경제체제만이 아니라 사회주의인간관계가 무엇인지 알아야 사회주의국가의 본질을 전면적으로 이해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소련식 사회주의국가와 유고식 사회주의국가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중국식 사회주의국가와 베트남식 사회주의국가는 자본주의시장경제의 도입으로 상당부분 변질되었다. 왜 그런 소멸과 변질이 있었을까? 그것은 사회주의의 본질을 사회주의경제체제로만 좁혀서 이해하고, 사회주의인간관계로까지 넓혀서 이해하지 못한 사상적 한계에 갇혀있었기 때문이다.

그 나라들은 사회주의경제체제를 세워놓으면 사회주의국가건설을 완성한 것으로 생각하는 토대-상부구조론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회주의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과업에 대해 무지했던 것이다. 사회주의인간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사회주의국가에서 사회주의경제체제가 정상 작동할 수 없었고, 사회주의경제체제가 오랫동안 정상 작동하지 못하면 결국 사회주의국가가 무너지거나 변질되는 것이다.
 
그런데 세계사에 등장하였던 여러 사회주의국가들 가운데 북측은 달랐다. 북측에서는 사회주의경제체제 성립과 더불어 사회주의인간관계 형성을 매우 중시하였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사회주의경제체제보다 사회주의인간관계를 훨씬 더 중시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김일성 주석이 창시하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정식화한 주체사상은 사회주의국가 건설과정에서 사회주의인간관계를 어떻게 형성하고 그 관계가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 하는 혁명의 새로운 운명문제를 제기하고 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였다.

북측이 자국의 사회주의를 다른 나라의 사회주의와 구별하여 '주체의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북측에서 말하는 주체라는 개념은 사람과 세계의 관계문제를 해명한 철학적 세계관의 핵심개념이기도 하지만, 기성 인간학이 결코 해명하지 못하는 사회주의인간관계를 규정하는 새로운 철학개념이기도 하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사회주의국가의 본질적 특성은 사회주의계획경제에서 나타난다. 국가경제 계획화는 사회주의와 비사회주의를 가르는 명백한 기준이다. 그런데 국가경제를 계획화하였다고 해서 사회주의국가건설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국가경제를 계획화할 뿐 아니라 인간관계를 주체화하여야 사회주의국가건설이 완성된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와 비사회주의를 가르는 또 다른 중요한 기준은 주체화된 인간관계다.


아무도 먹지 못한 초코파이 한 개

주체화된 인간관계는 무슨 뜻일까? 주체화된 인간관계를 표현하는 개념이 집단주의(collectivism)다. 반사회주의 선동가들은 집단주의를 가리켜 개인을 잃어버리고 개성을 파괴한 전체주의라고 왜곡하고 비난하지만, 집단주의는 사회주의국가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인간관계의 총체다.

주체화된 인간관계는 서로 떨어질 수 없고 누가 나눌 수도 없는 하나의 집단으로 형성된 새로운 인간관계다. 그러한 인간관계는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하는 혁명과정에서 생성되고, 사회주의국가건설을 완성해나가는 더 높은 혁명과정에서 더욱 공고화되고 지속적으로 발전된다. 그러므로 주체는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집단이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1980년대 후반 학생운동 사례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당시 반독재민주화투쟁에 앞장선 대학생들을 체포하려고 대학 교정 안으로 쳐들어온 난폭한 진압경찰과 격렬한 전투를 벌이다가 대학건물 안으로 밀려들어가 농성투쟁에 돌입한 대학생들이 있었다.

진압경찰은 농성투쟁이 벌어진 건물를 완전포위하고 전기와 물을 끊었다. 먹을 것은 고사하고 마실 물조차 없는 농성투쟁현장에서 어떤 대학생의 책가방에 우연하게도 초코파이 한 개가 있었다. 진압경찰의 공격을 막아내는 최후 결전을 앞둔 긴장된 시각, 농성투쟁현장에서는 마지막 식량으로 남은 초코파이 한 개를 나누어 먹기로 하였다. 평소에는 한 입에 들어갈 조그만 초코파이였지만,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치며 분배원점으로 돌아온 초코파이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자신도 허기와 갈증으로 쓰러질 지경이었건만, 곁에서 함께 싸우는 동지를 위해 차마 입에 대지 못한 것이다. 나누어 먹기로 하고서도 아무도 먹지 못한 초코파이 한 개, 바로 그 조그만 물체야말로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투쟁 속에서 서로 떨어질 수 없고 누가 나눌 수도 없는 하나의 집단으로 존재하는 새로운 인간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들이 먹지 못한 초코파이는 순결한 사랑과 믿음의 결정체였다.
  
주체화된 인간관계는 바로 그런 것이다. 사회주의국가건설을 완성해나가는 과정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영도자와 인민들이 하나의 집단으로 형성하는 사회주의인간관계이며, 또한 그 과정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인민들 상호 간에 하나의 집단으로 형성되는 사회주의인간관계다. 그러한 새로운 인간관계 속에는 당연히 사랑과 믿음이 흐른다. 만일 그러한 사회적 집단 속에 사랑과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간고한 혁명과정을 거쳐올 수 있겠는가.

북측에서 쓰는 표현을 빌리면, 영도자가 인민을 하늘처럼 위하는 이민위천의 인간관계, 그리고 인민들이 영도자를 하늘처럼 믿고 사는 혼연일체의 인간관계, 바로 이것이 하나의 집단으로 형성된 사회주의인간관계다. 북측에서 말하는 이민위천과 혼연일체는 집단주의의 실체인 것이다. 또한 북측에서 쓰는 표현을 빌리면, 인민들이 형제자매처럼 협동하며 살아가는 대가정의 인간관계, 바로 이것이 하나의 집단으로 형성된 사회주의인간관계다. 이민위천, 혼연일체와 함께 대가정도 집단주의의 실체다.

사회주의국가건설을 완성해나가는 과정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영도자와 인민들 사이에 하나의 집단으로 형성된 사회주의인간관계,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인민들 상호 간에 하나의 집단으로 형성된 사회주의인간관계 가운데서 전자가 후자보다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영도자와 인민들의 관계가 하나의 집단으로 형성되어야 인민들의 상호관계도 하나의 집단으로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북측에서 왜 이민위천과 혼연일체를 그처럼 중시하고 강조하는지 알 수 있다.


그가 유산으로 남긴 야전열차와 야전복

사회주의국가건설을 완성해나가는 과정에서 영도자와 인민들 사이의 사회주의인간관계는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위에서 사례로 든 초코파이에 얽힌 사연은 불과 10여 명의 대학생들이 짧은 기간 동안 농성투쟁현장에서 겪은 일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 비해, 사회주의인간관계는 수 천만 명에 이르는 인민들이 세대와 세대를 이어 벌이는 혁명과정에서 형성해야 하는 매우 힘들고 어려운 과업이다. 그 혁명과업의 성패는 전적으로 영도자에게 달렸다. 영도자가 집무실에서 문건을 결재하고 전략회의를 주재하는 것만으로는 어림도 없고, 집무실에서 나와 인민의 생산현장과 생활현장 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진정 사랑과 믿음으로 아끼며 보살필 때, 바로 그렇게 할 때만이 사회주의인간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

△서거 이틀전인 2011년 12월 15일발 <조선중앙통신>에 보도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평양 광복지구상업중심 현지지도 모습.

김일성 주석이 그러한 것처럼,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인민들의 생산현장과 생활현장을 찾아가 방방곡곡에서 현지지도를 끊임없이 이어간 것은, 영도자가 인민들과 사상과 감정이 통하는 하나의 집단으로 사회주의인간관계를 형성하고 그것을 더욱 강화발전시키기 위한 필생의 혁명과업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유산으로 남긴 야전열차와 야전복은 그가 생전에 인민들과 사상과 감정이 통하는 하나의 공고한 집단을 형성하고 그것을 더욱 강화발전시키기 위해 얼마나 큰 노고를 바쳐왔는가를 말해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거로 국상을 당한 북측 인민들이 마치 자기의 친부모를 여읜 것처럼 오열과 통곡을 터뜨린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인민들과 하나의 집단으로 형성하고 더욱 강화발전시켜온 사회주의인간관계가 얼마나 진실하고 공고한 관계였는지를 말해준다.

국가경제 계획화만 실현해놓았던 다른 사회주의국가들과 비교할 때 북측이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까닭은, 국가경제 계획화만이 아니라 인간관계 주체화를 더 중시하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부단히 애써왔기 때문이다. 사회주의국가의 발전단계를 논할 때, 국가경제 계획화를 사회주의국가건설의 1단계라 한다면 인간관계 주체화는 사회주의국가건설의 2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사회주의계획경제만 알고 사회주의인간관계를 알지 못한 사회주의국가는 사회주의국가건설의 1단계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좌절하였지만, 북측은 사회주의계획경제보다 사회주의인간관계를 더 중시하였기 때문에 사회주의국가건설의 2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북측에 건설된 '주체의 사회주의'는 다른 사회주의국가들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높은 단계의 사회주의다. (2011년 12월 30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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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6

민주주의 본질, 코뮌주의 이상, 사회주의 미래

변혁과 진보 (59)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민주주의 본질을 재해석한다

역사적 견지에서 바라보면, 이 땅에서 추진되던 공화국 건설이 일제의 식민지강점과 미국의 분할지배로 좌절되고 100년 동안 지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제의 1910년 강제병합 이후 이 땅에서 100년 동안 그 건설이 지체되고 있는 공화국이란 민주주의를 실현한 민주공화국이며, 동시에 분할지배를 청산한 통일공화국이다. 현 시기 이 땅에서 전개되고 있는 사회역사발전과정에서 민주공화국과 통일공화국은 그래서 동의어다.

통합진보당에 결집한 진보정치활동가들에게 중요한 것은 공화국 건설과업을 끝까지 완수하는 것이다. 이 땅의 헌법에 민주공화국이 명시되었지만, 그것은 헌법조항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현실이 아니다. 민주공화국 건설은 아직 완성되지 못하였다.

민주공화국 건설이 아직 완성되지 못하였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이해된다. 하나는, 민주주의의 본질인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지 못하였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의 한반도 분할지배를 청산하지 못하였다는 뜻이다. 수구세력들은 그 무슨 '자유민주주의'를 자꾸 떠들지만, 그렇게 떠드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본질이 뭔지 모르는 무지의 노출이며, 자기들의 반민주적 정체를 감추려는 위선과 위장이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민주주의가 실현하는 가치는 자유와 평등이다. 민주주의는 자유라는 가치를 실현할 뿐 아니라, 평등이라는 가치도 실현한다. 다시 말해서, 이 땅에서 민주공화국 건설을 완성하면, 자유민주주의와 평등민주주의가 함께 실현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본질인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가 듣기에 따라서는 좀 진부한 느낌을 주지만, 100년 동안 지체되고 있는 민주공화국 건설과업을 수행하는 진보정치활동가들은 그 양대 가치를 해방이라는 사회정치적 개념으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해방이라는 사회정치적 개념으로 재해석한 자유란 '제멋대로 자유롭게 살아가기'가 아니라, 낡은 사회체제가 강요한 억압과 소외에서 벗어난 해방이다. 또한 평등이란 사회적 획일화가 아니라, 낡은 사회체제가 강요한 차별과 착취에서 벗어난 해방이다.
 
억압과 소외를 강요하는 낡은 사회체제에서 민중이 자신을 해방하여 자유를 실현하고, 차별과 착취를 강요하는 낡은 사회체제에서 자신을 해방하여 평등을 실현한 공화국, 그런 나라가 바로 자유민주주의와 평등민주주의가 실현된 진보적 민주공화국이다.

 자유민주주의와 평등민주주의의 완성태가 바로 사회주의이며, 자유민주주의와 평등민주주의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진보적 민주공화국의 현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자본주의는 자유를 실현하였으나 평등은 실현하지 못했고, 사회주의는 평등을 실현하였으나 자유는 실현하지 못했다는 말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관계에 대해 무지한, 이치에 맞지 않는 허튼 소리다.

이 땅의 사회변혁운동이 실현하려는 진보적 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와 평등민주주의를 아직 완성하지는 못하였지만, 그것의 완성에 근접한 발전단계의 민주주의, 다시 말해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이행단계의 민주주의다.

이 땅의 사회변혁운동이 진보적 민주주의강령과 자주적 평화통일강령을 제시하고, 그 양대 강령을 구현할 정치주체인 통합진보당을 건설한 것은, 100년 동안 지체되고 있는 민주공화국 건설과업을 수행하는 정치적, 조직적 태세를 이제야 비로소 갖추었음을 말해준다. 우리식 두 단계 사회변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허균, 맑스, 엥겔스, 까베

변혁과 진보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현실로 바꾸는 투쟁이며 운동이므로, 미래를 그려보는 정치적 상상력을 요구한다. 진보정치활동가들은 과학적 변혁사상과 정치적 상상력을 합성하여 변혁과 진보의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다.

억압과 소외, 차별과 착취를 강요하는 낡은 세상을 등지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미래사회를 그렸던 동서고금의 사상가들과 문필가들의 발자취가 인류역사에 남아있다.


△허균의 홍길동전(왼쪽)과 호민론(오른쪽)

우리 역사를 읽어보면, 호민론을 주장하며 진보정치활동을 펼친 허균(1569-1618)의 발자취가 돋보인다. 그가 후세에 남긴 명작 '홍길동전'은 봉건체제의 억압과 차별에 맞서싸우던 홍길동이 노비인 자기 어머니를 모시고 새로운 세상으로 떠나는 마지막 장면으로 끝나는데, 그가 찾아가는 새로운 세상이 바로 율도국이다.

당대의 뛰어난 진보적 사상가이며 문필가이며 정치활동가였던 허균은 결국 봉건수구세력에게 체포되어 49살에 능지처참형을 받고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가 400여 년 전에 문학적 상상력으로 그렸던 미래사회 율도국의 꿈은 사라지지 않았고, 사회주의 이상을 향한 영감을 후대에 안겨주었다.
  
서양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고전사상가를 손꼽으면, 칼 맑스(1818-1883)와 프리드릭 엥겔스(1820-1895)가 있다. 칼 맑스는 1871년에 쓴 저서 '프랑스 내전'에서 자본가계급의 억압적 통치체제를 뒤집어엎고 새로운 민주적 통치체제로 인류역사에 처음 등장한 파리코뮌(Paris Commune)을 미래 이상사회의 정치체제로 생각하였다.

그가 파리코뮌에서 얻은 정치적 상상력은 계급사회의 몰락과 함께 국가도 불가피하게 조락할 것이라고 예견한 '국가조락설'을 제기하였다. 칼 맑스가 파리코뮌에서 정치적 상상력을 얻었던 때로부터 13년이 지난 1884년 그의 사상적 동지였던 프리드릭 엥겔스는 자신의 저서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서문에서 "사회계급과 함께 국가가 불가피하게 무너질 때, 생산자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연합체의 기반 위에서 생산을 재조직할 사회"가 출현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그 두 고전사상가는 사회계급이 철폐되고 국가가 조락하면서 출현하는, 생산자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연합체가 조직하는 미래사회를 꿈꾸었던 것이다. 계급철폐와 국가조락을 전제한, 자유롭고 평등한 생산자 공동체를 상상하는 그들의 사상을 코뮌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맑스와 엥겔스는 코뮌주의 이상을 설파하였지만, 그들이 설파한 코뮌주의 이상은 과학적으로 정밀하게 설계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한계와 그들 자신의 사상적 제한성 때문에 그들은 코뮌주의 이상을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한 추상화처럼 그려놓았다. 추상화된 코뮌주의 이상을 과학적으로 설계하려는 사상이론적 노력이 그들의 사후에 끊임없이 뒤따랐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

억압과 소외, 차별과 착취를 강요하는 낡은 세상을 등지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실천가들이 나타나 코뮌주의 이상을 실천에 옮기려고 애썼다. 그렇게 애쓴 동서고금 실천가들 가운데 두 사람을 손꼽으면, 프랑스의 코뮌주의 사회운동가였던 에띠엔느 까베(Etienne Cabet, 1788-1856)와 남미식 사회주의를 실현하고 있는 베네주엘라 대통령 우고 챠베스(Hugo Chavez)가 있다.


에띠엔느 까베

에띠엔느 까베는 자신과 뜻을 같이한 코뮌주의 동료 69명을 이끌고 1848년에 프랑스를 떠나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코뮌건설의 힘겨운 노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가 미국 뉴올리언즈에 상륙한 그들은 텍사스를 거쳐 미시시피강변에 있는 일리노이주 나우부에 정착하였다.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1850년대에 그곳에서 코뮌건설에 성공하였으니, 그들이 미국땅에 건설한 코뮌을 아이캐리언 공동체(Icarian Community)라 부른다.

당시 그 코뮌에서는 505세대가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 아이캐리언 공동체는 재정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미주리주 세인트 루이스로 다시 이주하였으나 결국 재정파산을 당했으며, 때마침 미국에서 일어난 내전(남북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바람에 1898년에 와해되었다. 미국에 건설되었던 코뮌의 수명은 50년이었다.


진보적 민주공화국에 건설된 사회주의 코뮌

2011년 8월 17일 현재 전 세계에 존재하는 코뮌은 186개다. 세계 각국에 산재한 코뮌들은 종류와 형태가 매우 다채롭지만, 공동노동과 공동소유, 공동의사 결정과 상하위계 축소, 가사 및 육아 공동책임과 양성평등, 생태환경 보전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러나 현존하는 코뮌들은 낡은 사회체제를 바꾸려는 변혁운동을 외면하고 낡은 사회체제 안에서 자기들끼리 폐쇄적인 공동체생활을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맑스와 엥겔스가 꿈꾸었고, 까베가 실천에 옮겼던 코뮌주의 이상은 비좁은 폐쇄공간에 들어앉아 왜소화된 것이다.

그런데 21세기 초에 이르러 코뮌주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민주공화국이 출현하였으니, 그 나라가 바로 베네주엘라다. 베네주엘라에 사회주의 코뮌(socialist commune)이 건설된 것이다. 베네주엘라의 사회주의 코뮌이 맑스와 엥겔스가 상상하고, 까베가 시도하였던 이상주의 코뮌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코뮌주의 이상을 사회주의 미래로 바꾸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민주주의 현실과 코뮌주의 이상을 결합하여 사회주의 미래를 건설하고 있는 것이다. 베네주엘라 각지에 건설된 사회주의 코뮌이 추구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와 평등민주주의의 코뮌적 완성이다.

△도시에 건설된 베네주엘라 사회주의 코뮨

진보적 민주공화국 안에 건설된 사회주의 코뮌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떠할까? 베네주엘라의 사회주의 코뮌은, 최대 400가구가 한 단위로 결집하여 건설되었는데, 2010년 현재 농촌코뮌 93개, 도시코뮌 65개, 도농코뮌 26개가 건설되었다. 사회주의 코뮌에 망라된 가구는 총 5,900가구다. 그 코뮌들은 총액 2,300만 달러를 투자한 706개의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베네주엘라의 사회주의 코뮌은 자본주의시장경제에서 이탈한 사회적 생산체제(social-productive system), 자급자족하는 농업생산체계, 그리고 코뮌협의회(communal council)이라 부르는 독자적 지방행정조직과 재정운영체계를 갖추었다.

베네주엘라의 코뮌건설에서 주목하는 것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는 민주공화국 안에 사회주의 코뮌이 건설되었다는 점이다. 진보적 민주공화국을 건설하여야 사회주의 코민을 건설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베네주엘라의 코뮌건설은 진보적 민주공화국 중앙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지도를 받아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추진되었다. 베네주엘라 의회는 '대중권력법(Law of Popular Power)'을 제정하여 사회주의 코뮌의 행정기관인 코뮌협의회에 더 많은 자치권을 이양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2011년 12월 16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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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4

단발머리 여성비행사 17명이 흘린 눈물

진실의 말팔매 <46>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2011년 12월 4일 북측 언론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오중흡 7련대 칭호를 수여받은 조선인민군 공군 제378군부대 비행훈련을 지도하는 현장보도사진과 보도기사를 실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인민군 부대들 가운데 오중흡 7련대 칭호를 수여받은 부대는 정예부대다.

위의 보도기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군부대를 시찰하였다고 서술하지 않고 군부대 비행훈련을 지도하였다고 서술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군부대 훈련을 지도하였다는 북측 언론의 보도는, 최고사령관 명령을 받은 군부대가 병종사령관 통제에 따라 최고사령관 앞에서 실전을 방불한 전투훈련을 실시하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위의 보도기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휘소에 오르시여 비행사들의 훈련을 지도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은 김정일 최고사령관 명령을 받은 공군 제378군부대가 공군사령관 리병철 대장의 통제에 따라 최고사령관 앞에서 비행훈련을 실시하였음을 말해준다.

그 비행훈련에 참가한 전투비행사들은 "평시의 훈련을 통하여 다져온 자기들의 높은 비행술을 남김없이 보여주었"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싸움맛이 나게 훈련을 진행하고 있는 비행사들의 과감하고 용맹스러운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아주시며 환한 미소를 지으시고 우리 비행사들이 정말 훈련을 잘 한다고, 대담하게 기동하는 것이 알린다고 높이 평가하시였다."고 보도했다.

그 비행훈련에 참가한 전투비행사들은 누구였을까? 현장보도사진 24장을 살펴보면,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 현장보도사진에 나타난 전투비행사들은 단발머리에 전투비행사 정모를 쓰고 가죽옷 입고 검은색 장화를 신은 17명 여성전투비행사들이었다.
   
△<로동신문> 2011년 12월 4일 보도사진

인민군 여병사(남측에서는 여군)의 비율은 전체 인민군 가운데 10%를 넘는다. 인민군 병력이 117만 명이므로, 인민군 여병사는 약 13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다른 나라 여군은 병력수도 적을 뿐 아니라, 주로 통신병과나 의무병과 같은 비전투병과에 배치되지만, 인민군 여병사들은 다르다.

인민군에는 여병사들만으로 편성된 전투부대인 여성독립여단과 여성연대가 여러 개 있고, 전투기나 폭격기를 모는 여성전투비행사들이 많고, 특수전 병력 수송기나 군용헬기를 모는 여성비행사들이 많고, 대공포부대와 해안포부대에 배치된 포병은 모두 여병사들이며, 기차굴과 교량을 지키는 것도 여병사들의 몫이다.

인민군 전투비행사는 2,000명으로 추산되는데, 그 가운데 여성전투비행사 비율이 10%라고 하면, 여성전투비행사가 약 200명이나 있는 셈이다. 미국 공군 여성 전투기조종사는 70여 명이고, 한국군 공군 여성 전투기조종사는 14명이다.

어느 나라 군대에서나 전투비행사를 육성하는 문제는 간단치 않은데, 인민군 전투비행사는 어떻게 육성되고 있을까? 1개 군(행정단위)에서 후보생을 3명씩, 총 600명 후보생을 선발하여 교도연대에서 1년 동안 기술교육을 받고 시험을 친다. 시험에 합격한 후보생은 공군대학에서 3년 교육을 받은 뒤에 일반 병사로 입대하는데, 일반 병사로 3년 동안 각종 훈련을 받아야 '붉은 비행사'가 된다.

현장보도사진에 나온 인민군 공군 제378군부대 여성전투비행사 17명도 그처럼 7년 동안 고된 훈련과정을 거치며 단련된 정예비행사들이다. "녀성비행사들에게 야간비행훈련을 많이 시켜야 하겠습니다"라고 쓰여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교시판이 보도사진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인민군에서는 여성전투비행사들도 야간비행훈련을 많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성전투비행사 17명이 준비한 예술소품공연은 아주 소박한 것이어서, 기타 한 개, 손풍금 한 개, 북 두 개, 그리고 각각 다른 양의 물을 채워넣고, 줄에 매단 여러 개 유리병을 두들기며 연주하는 즉흥악기 한 개가 반주악기의 전부였다. 전문 음악인이 아닌 병사들이 공연무대가 아닌 나무발판 위에서 노래를 불렀으면 얼마나 잘 불렀겠는가.

△<로동신문> 2011년 12월 4일 보도사진

그러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군사부문 지도에서 병사들의 예술공연은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평소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아무리 바빠도 만사를 제쳐놓고 군인예술공연을 반드시 관람한다.
 
왜 그럴까? 반북수구언론들은 전혀 이해하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겠지만, 병사들이 김정일 국방위원장 앞에서 펼치는 소박한 예술공연은 최고사령관과 병사대중의 사상정신적 일체감을 확인하고 강화하는 매우 특유한 소통방식인 것이다. 병사들을 아끼는 최고사령관의 사랑과 최고사령관을 믿고 따르는 병사들의 경모심이 오가는 소박한 예술공연, 바로 이것이 전 세계 수많은 군대들 가운데서 오직 인민군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특유한 소통방식이다.

그런데 남측 언론매체들이 주목한 것은, 바로 그 다음에 나온 사진이었다. 그 사진은 예술소품공연이 끝났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와락 달려간 여성전투비행사들이 그의 양팔을 붙들고 있는 모습을 찍은 것이다. 북측에 대해 무지하고, 특히 인민군에 대해 더 무지한 남측 언론매체들은 그 사진을 전재보도하면서 그것이 어떤 장면을 찍은 것인지 알지 못해 어리둥절하고 헷갈렸다.

△<로동신문> 2011년 12월 4일 보도사진

그러나 병사들을 아끼는 최고사령관과 최고사령관을 믿고 따르는 병사들이 만나는 순간을 찍은 사진이라고 보면 금방 이해된다. 비유로 말하면, 그 사진은 친정아버지가 먼 곳에 시집보낸 딸을 찾아가 처음 만나는 장면이며, 친정아버지를 그리워하던 시집간 딸이 자기 집을 처음 찾아온 친정아버지를 만나는 장면이다.

그 사진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양팔을 붙들고 무엇인가를 절절히 말하는 여성전투비행사들의 눈물 젖은 표정은 그들의 진실하고 애틋한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로동신문> 보도기사는 "공연이 끝나자 비행사들은 최고사령관 동지의 자애로운 품에 안기여 격정의 눈물을 흘리였다"고 서술하였다.

가정에 가풍이 있고, 학교에 학풍이 있고, 문필가에게 문풍이 있는 것처럼, 군대에는 군풍이 있다. 바람을 뜻하는 풍이라는 말이 그런 낱말들에 들어있는 것은, 바람처럼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집단의 정신상태와 생활방식을 규정하고 그 집단의 활력을 분출하는 어떤 에너지의 존재를 가리킨 것이다.

인민군의 정신상태와 생활방식을 규정하고 그들의 집단적 활력을 분출하는 군풍은, 위에서 언급한 사진들이 말해주는 것처럼, 아버지와 아들딸 사이에 맺어진 것과 같은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맥락을 알아야, 북측에서 자주 쓰는 관병일치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북측에서는 그 군풍을 혁명전통으로 본다.

관병일치 혁명전통은 김일성 주석이 영도한 일제강점기 항일무장투쟁에서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동안 계승되고 다져진 것이다. 2011년 12월 6일 <자주민보>에 실린, 중국조선족 역사학자인 리송덕 연변박물관 혁명사부 전 주임이 쓴 글 '장백현에 깃든 항일투쟁사'에 이런 기록이 있다.

12살 어린 나이에 자기 형들을 따라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던 중국인 교방신은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손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는데, 김일성 사령관이 밀림 속에서 마취약과 수술칼을 구할 길이 없어 면도칼로 수술을 해줄 때 소년병에게 우스개소리를 하여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면서 부러진 뼈조각을 뽑아주었다.

김일성 사령관은 붕대를 감은 손을 쓰지 못하는 그 소년병이 소변을 볼 때마다 바지를 내려주고 입혀주었고, 행군으로 땀젖은 양말을 벗겨 모닥불에 말려주었다. 뜨거운 사랑에 감동한 소년병이 울음을 터뜨리자, 김일성 사령관은 "울지 말라. 중국사람이나 조선사람은 모두 함께 일본놈을 치는데 내가 사령관이라고 해서 경위대원의 바지와 양말도 말려주지 못하겠는가"고 말해서 울음을 그쳤다. 어느 추운 겨울날 김일성 사령관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이겨 전리품으로 얻은 모피를 절반 잘라서 그 소년병에게 덮어주었다.

조선족 역사학자는 김일성 사령관이 중국인 소년병을 친동생처럼 아껴주고 보살펴준 관병일치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전해주었지만, 김일성 사령관과 조선인민혁명군 병사들 사이에서 맺어진 관병일치의 눈물겨운 이야기는 또 얼마나 많은가. 조선인민혁명군 병사들이 그런 사령관의 명령을 관철하기 위해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였겠으며, 그런 사령관을 옹위하기 위해 어찌 목숨을 바치지 않았겠는가.

조선인민혁명군이 밀림의 병기창에서 맨손으로 두들겨 만든 '연길폭탄'으로 당시 항공모함과 잠수함까지 보유한 강적 일본군과 맞서싸운 미증유의 전투에너지, 그것은 바로 관병일치 군풍이 발산한 강력한 에너지였던 것이다.

김일성 주석의 관병일치 혁명전통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 나라 천만 어머니들이 아들딸을 잘 키워 조국보위초소에 세우며 나에게 맡겼는데 최고사령관인 내가 그들을 아들딸처럼 돌봐주지 않으면 누가 돌봐주겠는가"라고 말하며 군부대들을 찾아가고 있다.

북측 언론보도를 읽어보면, 그는 군부대에 찾아가서 병사들의 훈련상태, 사상교양, 문화정서생활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병실(남측에서는 내무반)의 실내온도가 적당한지, 침대위치가 바로 놓였는지, 콩나물이나 치즈 같은 식품을 공급하는지, 전기공급이 잘되고 있는지, 산악지대에서 텔레비전 시청에 장애가 없는지, 세목장(남측에서는 목욕탕)에 더운 물이 나오는지 등등 아주 세심하게 돌아보며 병사생활을 보살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70여 년 전 만주의 숲 속에서 김일성 사령관의 사랑에 감격하여 엉엉 소리내어 울던 중국인 소년병처럼, 단발머리 여성비행사 17명도 자기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김정일 최고사령관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2011년 12월 14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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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9

노동정치 세력화와 계급정당 건설은 어떻게 가능한가?

변혁과 진보 (58)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통합진보당 건설의 의의를 인식하려면

이 땅의 진보정치는 10개월 산고 끝에 마침내 옥동자를 낳았다. 옥동자의 이름은 통합진보당으로 정해졌다. 통합진보당 건설이 이 땅의 진보정치사에 주는 의의는, 진보정치를 실현하는 사회변혁운동에서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변혁관점과 변혁노선을 지워버린 채 통합진보당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은 바람결에 스치는 풍문에 지나지 않는다.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이 통합진보당 건설의 의의를 변혁관점에서 인식하고, 그 당을 변혁노선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관심을 끄는 문제는 어떤 변혁관점, 어떤 변혁노선이냐 하는 데 있다. 만일 이 땅의 현실에 맞지도 않고, 21세기의 변화된 정세에도 맞지 않는, 그래서 참고서에서나 잠깐 읽어보면 되는 유럽식 변혁관점과 유럽식 변혁노선에 의거하여 통합진보당 건설의 의의를 인식하려 한다면, 그것은 오해와 몰이해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통합진보당 건설의 의의를 올바로 인식하려면, 우리식 변혁관점과 우리식 변혁노선에 의거하여야 마땅하다. 우리식 변혁관점과 우리식 변혁노선이란 우리식 변혁사상에 근거한 관점과 노선이다.

통합진보당을 건설한 진보정치활동가들이 이제까지 견지해왔고 또 앞으로도 변함 없이 견지하여야 할 변혁관점과 변혁노선은,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유럽에서 수입해온 외래종 변혁사상이 아니라 '국가보안법'으로 짓눌린 분단과 예속의 척박한 토지 위에 강인한 자생력으로 자라난 우리식 변혁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외래종 변혁사상이 혁명적 사회주의를 말할 때, 우리식 변혁사상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말하였고, 외래종 변혁사상이 급진적인 사회변혁을 논할 때, 우리식 변혁사상은 단계적인 사회변혁을 제시하였다. 또한 외래종 변혁사상이 노동정치 세력화에 기초한 계급정당을 건설하자고 주장할 때, 우리식 변혁사상은 각계각층 대중의 정치역량을 결집한 진보적 대중정당을 건설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통합진보당이다. 


양자택일로 취사선택할 수 없다

외래종 변혁사상에 심취한 일부 정치활동가들과 지식인들은 통합진보당이 노동정치 세력화를 포기한 우경화의 질곡에 빠졌다고 생각한다. 이전에 민주노동당은 당강령에 사회주의라는 낱말을 넣었지만, 통합진보당 강령에는 사회주의라는 낱말이 들어가지 않았고, 또한 민주노동당과 달리 통합진보당은 당명에 노동이라는 말도 넣지 않았으니 우경화라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는 '낱말찾기 우경화론'보다 한 술 더 떠서, 진보정당을 진보좌파당와 진보우파당으로 구분하는 자의적인 분류법을 들먹이며 통합진보당을 진보우파당으로 규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인식과 평가는 급진적인 사회변혁만 알고 단계적인 사회변혁에 대해서는 모르는, 다시 말해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일부 정치활동가들과 지식인들의 주관적 상념일 뿐이다. 명백하게도, 통합진보당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할 사회변혁의 낮은 단계가 요구하는 대중정당이지, 혁명적 사회주의를 실현할 사회변혁의 높은 단계가 요구하는 계급정당이 아니다.

△이정희, 유시민, 심상정 공동대표를 비롯한 통합진보당 지도부가 2011125일 오후 경기 마석 모란공원 전태일 열사 묘소를 참배했다. 같은 날 오전 통합진보정당의 당명과 강령 및 당헌, 그리고 신설합당을 의결한 뒤 이뤄진 첫 공식행보다. (<진보정치>보도사진)

만일 통합진보당을 건설한 진보정치활동가들이 우리식 변혁사상을 외면하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사회변혁의 종착역으로 생각한다면, 통합진보당 건설에 대해 노동정치 세력화를 포기하고 우경화의 질곡에 빠졌다고 평가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우리식 변혁사상의 변혁관점과 변혁노선을 견지하는 진보정치활동가들에게 통합진보당은 진보정치를 대중화하는 도약대이며, 진보적 정권교체를 실현하는 강력한 지렛대이며,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전략거점이며, 사회변혁의 낮은 단계로 진출하는 교두보다. 이 점을 명확하게 지적할 필요가 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통합진보당 건설의 의의를 인식하려 할 때, 진보정치 대중화 변혁노선이 옳은가 아니면 노동정치 세력화 변혁노선이 옳은가 하는 쟁점이 드러난다. 당연한 말이지만, 진보정치를 대중화하면 이 땅의 통합진보당 같은 대중정당을 건설하게 되고, 노동정치를 세력화하면 유럽의 좌파당 같은 계급정당을 건설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위에 제시된 쟁점을 양자택일로 취사선택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진보정치 대중화와 노동정치 세력화 가운데 어느 것을 버리고 어느 것을 택하는 것도 아니고, 대중정당과 계급정당 가운데 어느 것을 버리고 어느 것을 택하는 것도 아니다.

진보정치 대중화는 우리식 사회변혁의 낮은 단계에서 실현해야 하고, 노동정치 세력화는 우리식 사회변혁의 높은 단계에서 실현해야 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우리식 사회변혁의 발전경로는 진보정치 대중화를 먼저 실현한 뒤에 노동정치 세력화로 발전해 나아가는 것이며, 우리식 사회변혁의 당건설노선은 대중정당을 먼저 세운 뒤에 그 당을 계속 강화발전시켜 계급정당으로 개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외래종 변혁사상에 심취한 일부 정치활동가들과 지식인들은 진보정치 대중화를 거부하고 노동정치 세력화를 선호하고, 대중정당 건설을 외면하고 계급정당 건설만 외친다. 왜 그렇게 편협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노동정치 세력화와 계급정당으로 추진하는 급진적인 사회변혁만이 가능하다고 믿어버리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0.16%의 노동자는 계급정당을 건설하지 못한다

외래종 변혁사상에 심취한 일부 정치활동가들과 지식인들이 지닌 고정관념은 이 땅의 현실에 들어맞지 않는 비현실적 관념이다. 그들의 고정관념이 이 땅의 현실에 들어맞지 않는 논리적 맹점과 결함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려면 다음과 같은 논점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첫째, 외래종 변혁사상에서 말하는 진보노조→계급정당→집권성공→사회변혁으로 이어지는, 단선적이고 고정적인 발전공식대로 실현된 사회변혁은 역사적으로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까지 세계 각국의 사회변혁은 단선적이고 고정적인 발전공식대로 실현된 것이 아니라, 복합적이고 가변적인 발전경로에 따라 실현되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진보정권이 등장한 라틴아메리카 몇몇 나라들에서도 진보노조가 계급정당을 건설하고, 계급정당이 집권하여 좌파정권을 세우고, 좌파정권이 사회변혁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각계각층 대중을 결집하여 대중정당을 건설하고, 대중정당이 집권하여 진보정권을 세우고, 진보정권이 사회변혁의 낮은 단계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중이다.

현재 라틴아메리카 몇몇 나라들에서 추진 중인 사회변혁은, 전반적 계획경제를 아직 실시하지 못하고, 중요산업 핵심부분만 국유화하였다는 점에서, 혁명적 사회주의가 아니라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낮은 단계의 사회변혁이며, 그런 사회변혁을 추진하는 주체도 유럽식 좌파정권이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식 진보정권인 것이다.

둘째, 노동계급을 노조조직화하고 진보의식화하여야 노동정치를 세력화할 수 있다. 노조조직화와 진보의식화를 실현하지 못하였는데, 노동정치 세력화부터 추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된 주장이다.

그러면 오늘 이 땅의 노동계급이 처해 있는 현실은 어떠한가? 1989년에 19.8%까지 올라갔던 노조조직률은 1990년대 이후 경향적으로 하락하더니 지난 해 2010년에는 9.8%로 내려앉았다. 2010년 현재 노조단위는 4,420개이며, 노조에 가입한 노동계급은 164만3,113명밖에 되지 않는다. 2011년 초를 기준으로 이 땅의 노동계급(임금노동자)은 1,751만명이다.
 
그런데 위의 전반적 통계에서 중요한 것은 민주노총과 관련된 통계수치다. 전체 노조 조합원 가운데서 민주노총 조합원은 35.3%(58만64명)이고, 한국노총 조합원은 44.3%(72만8,649명)이고, 상급단체에 가입하지 않은 미가맹노조 조합원은 20.4%(33만4,400명)다. 또한 전체 노조 가운데 민주노총 노조는 9.8%(432개)이고, 한국노총 노조는 51.8%(2,292개)이고, 미가맹노조는 38.4%(1,696개)다.

2011년 11월에는 한국노총 이외에 이른바 '온건과 합리'를 표방한 국민노총까지 등장하여 노동계급 진보의식화에 장애물을 하나 더 놓았다. 이런 난감한 실정을 살펴보면, 민주노총이 왜 총파업을 하지 못할 만큼 무력한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민주노총 지도부는 432개 산하노조와 58만명 산하노조원들을 얼마나 진보의식화하였을까? 지난 시기 민주노동당에 노동자 당원이 가장 많았던 때에도, 민주노동당에 입당한 민주노총 조합원은 전체 민주노총 조합원 가운데 5%밖에 되지 않았다.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한다고 선언하자 어떤 사람들은 민주노동당을 '민주노총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불과 5%밖에 입당하지 않았다니, 노동계급 진보의식화는 넘지 못할 한계상황에 있었던 것이다.

△민주노총이 2011년 11월 13일 서울 시청광장에서 개최한 '한미 FTA 저지,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2011 전국노동자대회'에 참가한 4만 여 노동자, 시민들.

이 땅에서 사회변혁을 추진할 가장 강력한 기본동력인 진보의식화된 노동계급은 노조조직화된 노동계급 164만명 가운데 겨우 1.7%를 차지하는 29,000명밖에 되지 않았다. 1,751만명에 이르는 전체 노동계급 가운데서 0.16%밖에 되지 않는 29,000명 노동자가 중심이 되어 계급정당을 건설하겠다는 것은 무지가 아니면 만용일 것이다.

그처럼 어려운 처지에 있는 민주노총이 노동정치 세력화를 추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따라서 진보노조에 기반을 둔 계급정당을 현 단계에서 건설할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하다. 노동계급의 노조조직화와 진보의식화가 부진한 현상은 이 땅에서만 나타나는 특별한 현상이 아니며, 세계 각국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노동정치 세력화와 계급정당 건설을 언제 어떻게 추진할 것인가? 이 중요한 전략과제도 당연히 우리식 변혁사상에 의거하여 해명해야 하는데,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는 노동계급의 노조조직화와 진보의식화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이 지난 11년 동안 쌓아온 정치경험은, 진보정치활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진보정당을 건설했어도 진보노조의 실질적인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이 11년 전부터 추진해온 노동정치 세력화는 실패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집권하지 못한 진보정당은 진보노조 조직화를 추진하지 못하고, 기존노조를 진보의식화하기도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명백하게도, 노동정치 세력화를 추진하기 이전에 진보정치 대중화부터 추진해야 한다. 이번에 건설된 통합진보당이 진보정치를 대중화하는 새로운 출발점에 새로운 결심을 안고 서 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11년 경험에서 실증된 것처럼, 집권하기 전에는 통합진보당이 진보노조 조직화와 기존노조 진보의식화를 추진하기 힘들다. 진보노조 조직화와 기존노조 진보의식화는 진보정권이 세워진 이후에 자주적 민주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통합진보당과 민주노총이 함께 추진하는, 변혁적 주체역량을 일으켜세우는 거창한 과업이다.

그러므로 장차 세워질 진보정권이 수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임무는, 중요산업을 국유화하는 것와 함께 중요산업부문에 망라된 노동계급의 노조조직화와 진보의식화를 추진하는 것이다. 진보정권 집권기는 이 땅에서 100년 이상 오랜 기간 동안 억압과 차별과 착취를 받아온 노동계급이 사회변혁의 중심동력으로 등장하는 역사적 전환기이며, 진보적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사회변혁의 낮은 단계는 노조조직화된 노동계급의 거대한 잠재적 변혁역량을 정치현실로 이끌어내어 노동정치를 본격적으로, 전면적으로 세력화하는 새로운 변혁단계다.

진보적 민주주의가 높은 수준에서 성숙되었을 때, 그리하여 사회변혁이 낮은 단계의 과업을 빛나게 수행하고 바야흐로 높은 단계로 이행할 때, 그리고 이 땅에서 주한미국군을 철군시키고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였을 때, 바로 그러한 위대한 변혁의 시대에 통일공화국 남측 지역에 등장할 사회변혁의 주체가 바로 수백만 명 노동계급을 결집한 강력한 계급정당인 것이다. 높은 단계의 사회변혁은 눈부신 역사의 무대 중심부에 당당하게 등장할 계급정당에 의해 추진될 것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 땅의 진보정치세력은 자주파와 평등파로 갈라져 있다. 그 분화의 기원은 1980년대로 거슬러올라가지만, 지금까지 반독재민주화 단계에서 반미자주화 단계를 거쳐 진보정치 대중화 단계로 지속적 발전을 거듭해온 진보정치세력은, 우리식 변혁사상을 자기 머리로 탐구하며 진보적 민주주의와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해 투쟁해온 진보정치활동가들이다. 그런 그들을 자주파라고 부른다. 그에 비해, 평등파는 어제도 오늘도 외래종 변혁사상에 심취하고 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자주파와 평등파가 정치적, 조직적으로 갈라진 분화의 뿌리는 현실주의적 과학과 급진주의적 공상 사이의 사상적 차이에 있다. 2011년 말에 이르러 진보정치세력이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으로 갈라진 것은, 그러한 사상적 차이가 당건설 과정에서 불러일으킨 불가피한 분화현상이었다. (2011년 12월 9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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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7

그 대학생들은 어디로 가고 있었을까?

진실의 말팔매 <45>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2011121<연합뉴스>"평양 건설현장 공개...대학생 동원 확인"이라는 이상한 제목의 기사 한 편을 실었다. 그 기사는 평양에서 찍은 사진 몇 장을 '해설'한 것이다. 그 사진들은 지난 여름 평양에서 진행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을 관람하고 평양과 지방 명승지를 관광하던 외국인관광단 일원인 미국인 레이 커닝햄(Ray Cunningham)201195일 평양에서 길을 가다가 우연히 찍은 것들이다.
 
지금 평양은 엄청난 건설열기에 휩싸여있으므로, 곳곳의 건설현장들이 외국인관광객의 눈에 띈 것은 당연하다. 레이 커닝햄은 자기가 북측 각지를 관광하는 도중에 찍은 수 백 장 사진들 가운데 특히 평양의 여러 건설현장 주변을 지나면서 찍은 사진 30장을 '2011년 평양 건설(Pyongyang Construction 2011)'이라는 소제목으로 분류하여 사진 전문 웹사이트 '플리커(Flicker)'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그 사진들 가운데는, 맨 앞에 큰 깃발을 들고 평양 시내 어느 아파트 앞길을 행진하는 김책공업종합대학 재학생들의 행진대오를 먼 거리에서 촬영한 것이 있다. 사진을 확대해보면, 붉은 깃발에 "김책공업종합대학 응용화학00대대, 정보과학기술00대대"라고 쓰인 노란색 글씨가 보인다.
 
레이 커닝햄은 그 사진의 제목을 "일터로 행진하는 김책공대 학생들(Students of Kim Chaek University of Technology march to work)"이라고 붙이고 그 밑에 "그곳 대학교들은 휴교하였는데, 대학생들은 평양의 건설현장에 일하러 가는 것으로 보인다(The universities are dismissed and students can be seen heading to work on the construction sites of Pyongyang)"는 사진설명을 달아놓았다. 그가 행진 중인 대학생들에게 다가가 어디로 가는가고 물어보지 않고, 그냥 자기의 추측을 그렇게 써넣은 것이다.
   
△ 미국인 레이 커닝햄이 '플리커(Flicker)'에 올린 사진과 사진 설명

물론 그의 추측은 빗나갔다. 그 대학생들은 평양의 건설현장에 동원되어 행진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의 추측이 틀렸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다음의 사실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첫째, 행진하는 대학생들의 모습은 건설현장에 험한 일을 하러 가는 차림새가 전혀 아니다. 그들은 모두 흰 색 상의에 검은 색 바지를 입었다. 여기에 실린 다른 사진을 보면, 그런 옷차림은 그 대학교의 여름 교복이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흙먼지 펄펄 날리는 험한 건설현장에 흰색 정복차림으로 노동하러 가는 사람은 없다. 북측에서 건설현장에 일하러 가는 사람들은 여기에 실은 다른 사진에 나타난 것처럼, 노동복을 입는 게 정상이다.

△ 또 다른 외국인이 찍은 사진. 노동복 차림의 노동자가 평양시내를 걷고 있다.
프랑스인 에릭 라포그(Eric Lafforgue)가  '플리커(Flicker)'에 올린 사진.

또한 행진 중인 대학생들은 모두 손에 책가방을 들었거나 등에 책가방을 메었으며, 책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으면서 걸어가는 대학생들도 여러 명이 있다. 만일 건설현장에 노동하러 간다면, 무거운 책가방을 왜 가지고 가겠는가.
 
둘째, 레이 커닝햄이 '플리커'에 실은 여러 장 사진들 가운데는 김책공대 행진대오가 대동강에 놓인 다리를 건너가는 장면을 찍은 것도 있다. 위의 행진대오 사진보다 훨씬 더 먼 거리에서 찍은 이 사진에는 더 긴 대학생 행진대오가 나타나있고, 깃발도 하나 더 보인다. 커닝햄은 이 사진에 "양각다리 위의 노동여단(Work Brigades on Yanggak bridge)"이라는 제목을 달아놓았다. 사진설명은 없다.

△ 미국인 레이 커닝햄이 '플리커(Flicker)'에 올린 사진과 사진 설명
 
그런데 바로 이 사진이 커닝햄의 추측이 틀렸음을 말해주는 결정적인 증거다. 왜냐하면 김책공대에서 만수대지구 아파트 건설현장으로 가려면 대동강을 건널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대동강변에 있는 김책공대에서 대동강을 건너가면 평양의 서부지역에 들어서게 되는데, 김책공대에서 직선거리로 측정하면 만수대지구 아파트 건설현장은 북쪽으로 약 2km 떨어진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그러면 사진에 나온 김책공대 행진대오는 대동강 다리를 건너 어디로 가고 있었던 것일까? 그 사진만 봐서는 그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기 힘들지만, 서평양에 있는 어느 생산현장으로 현장실습을 가는 길이 아니었을까?
 
셋째, 레이 커닝햄이 '플리커'에 실은 사진들 가운데는 평양에 있는 어떤 건물 신축공사장을 찍은 또 다른 사진 한 장이 들어있다. 이 사진에 그가 달아놓은 제목은 "북코리아 평양의 새 아파트 건설(New Apartment Construction in Pyongyang North Korea)".

△ 미국인 레이 커닝햄이 '플리커(Flicker)'에 올린 사진과 사진 설명

그 사진을 보면, 붉은 색 글씨로 "결사관철"이라고 쓴 커다란 구호판이 신축 중인 건물 정면에 걸려있고, 여기 저기에 붉은 깃발이 꽂혀있는데, 조금 작은 글씨로 "중국어학부"라고 쓴 글씨판도 보인다. 중국어학부라 했으니, 중국어학부 재학생들이 그 건설공사에 참가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김책공대에는 중국어학부가 없고, 평양외국어대학에 중국어학부가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사진에 나온 어떤 건물 신축공사장은 만수대지구 초대형 아파트 공사장이 아니라는 점이다. 골조공사를 지상 6층에서 진행 중인 것으로 보나, 정면에서 바라본 건물 폭이 좁은 것으로 보나, 만수대지구 초대형 아파트가 아니라 어떤 다른 지역의 소형 아파트로 생각된다.

더 결정적인 사실은 그 사진 오른쪽에 류경호텔이 멀리 보인다는 점이다. 평양외국어대학에서 류경호텔까지 직선거리는 남서쪽으로 4.5km이므로, 그 사진은 평양외국어대학 부근에 있는 대학 부속건물 공사현장을 찍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공사장에는 일하는 사람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대학생들이 자기 대학 부속건물 공사장에 자원봉사하러 나간다면, 하루일과를 마치고 저녁시간에 나갈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진을 촬영한 낮시간에는 그 공사장에 아무도 없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틈만 나면 북측을 중상비방하는 <연합뉴스>는 레이 커닝햄이 잘못 추측한 사진 세 장을 가지고 너절한 헛소문을 퍼뜨렸고, 그 헛소문이 다른 언론매체들의 전재보도를 타고 흘러나가 일파만파로 번졌다.

그들이 퍼뜨린 너절한 헛소문에 따르면, 평양에서 진행되는 아파트 10만 세대 건설현장에 "대학생들을 동원한 사실이 확인됐다"는 것이며, "그 동안 공사에 동원된 대학생 가운데 200여 명이 각종 사고로 숨졌다는 얘기가 정통한 대북소식통 등에 의해 전해진 바 있다"는 것이며, "(평양 대학생들의) 부모가 골재를 상납하면 (건설현장) 동원을 면제해준다는 얘기도 있었다"는 것이다.
 
원래 평양의 대학들이 휴교하고 대학생들을 건설현장에 동원하였다는, 말이 되지 않는 헛소문은, 201175<미국의 소리>가 가장 먼저 퍼뜨렸다. <미국의 소리>는 평양의 대학생들이 2011627일부터 무려 10개월 동안 건설현장에 동원되고 있다는 헛소문을 날조한 것이다.
 
900억 달러에 이르는 거창한 아파트 공사가 예정대로 진척되는 것을 보고 밸이 꼴려 헛소문을 퍼뜨린 것이라 해도, 이쯤되면 흔히 떠도는 헛소문이 아니라 대북혐오에 중독되어 이제는 아예 이성적 판단기능이 마비된 정신질환자의 헛소리가 아닌가. 통신사나 방송이라는 간판을 달아놓고, 기자라는 명함을 들고 다니며, 하루가 멀다하고 정신질환자의 헛소리를 보도기사라고 써갈기는 그들의 처지가 참 가련해 보인다.
 
<로동신문> 2011124일 보도에 따르면, 자진하여 야간지원돌격대를 결성한 평양의 각계각층 시민들이 자기 직장에서 퇴근한 뒤에 만수대지구 아파트 건설현장을 돕고 있는데, 야간지원돌격대로 건설현장에 달려나간 연인원은 7월부터 10월말까지 10만여 명이나 된다.
 
201110월 초 평양을 방문한 재미동포 김현환 박사가 쓴 '방북기'에 따르면, 9시쯤 만수대지구 아파트 건설현장에 나가보았더니 평양의 청년들이 저녁마다 건설장에 달려와 야간청년돌격대에 가담하여 건설공사를 도와주고 있다고 한다.

김책공대를 비롯한 평양의 각 대학들에서 공부하는 대학생들 가운데 상당수가 그 야간청년돌격대에 자진 탄원하여 구슬땀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어떤 보수를 받는 것도 아닌데, 사회와 집단을 위해 청춘의 열정을 불태우는 그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어디 없을까? (2011127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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