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통합진보당 건설의 의의를 인식하려면
이 땅의 진보정치는 10개월 산고 끝에 마침내 옥동자를 낳았다. 옥동자의 이름은 통합진보당으로 정해졌다. 통합진보당 건설이 이 땅의 진보정치사에 주는 의의는, 진보정치를 실현하는 사회변혁운동에서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변혁관점과 변혁노선을 지워버린 채 통합진보당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은 바람결에 스치는 풍문에 지나지 않는다.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이 통합진보당 건설의 의의를 변혁관점에서 인식하고, 그 당을 변혁노선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관심을 끄는 문제는 어떤 변혁관점, 어떤 변혁노선이냐 하는 데 있다. 만일 이 땅의 현실에 맞지도 않고, 21세기의 변화된 정세에도 맞지 않는, 그래서 참고서에서나 잠깐 읽어보면 되는 유럽식 변혁관점과 유럽식 변혁노선에 의거하여 통합진보당 건설의 의의를 인식하려 한다면, 그것은 오해와 몰이해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통합진보당 건설의 의의를 올바로 인식하려면, 우리식 변혁관점과 우리식 변혁노선에 의거하여야 마땅하다. 우리식 변혁관점과 우리식 변혁노선이란 우리식 변혁사상에 근거한 관점과 노선이다.
통합진보당을 건설한 진보정치활동가들이 이제까지 견지해왔고 또 앞으로도 변함 없이 견지하여야 할 변혁관점과 변혁노선은,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유럽에서 수입해온 외래종 변혁사상이 아니라 '국가보안법'으로 짓눌린 분단과 예속의 척박한 토지 위에 강인한 자생력으로 자라난 우리식 변혁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외래종 변혁사상이 혁명적 사회주의를 말할 때, 우리식 변혁사상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말하였고, 외래종 변혁사상이 급진적인 사회변혁을 논할 때, 우리식 변혁사상은 단계적인 사회변혁을 제시하였다. 또한 외래종 변혁사상이 노동정치 세력화에 기초한 계급정당을 건설하자고 주장할 때, 우리식 변혁사상은 각계각층 대중의 정치역량을 결집한 진보적 대중정당을 건설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통합진보당이다.
양자택일로 취사선택할 수 없다
외래종 변혁사상에 심취한 일부 정치활동가들과 지식인들은 통합진보당이 노동정치 세력화를 포기한 우경화의 질곡에 빠졌다고 생각한다. 이전에 민주노동당은 당강령에 사회주의라는 낱말을 넣었지만, 통합진보당 강령에는 사회주의라는 낱말이 들어가지 않았고, 또한 민주노동당과 달리 통합진보당은 당명에 노동이라는 말도 넣지 않았으니 우경화라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는 '낱말찾기 우경화론'보다 한 술 더 떠서, 진보정당을 진보좌파당와 진보우파당으로 구분하는 자의적인 분류법을 들먹이며 통합진보당을 진보우파당으로 규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인식과 평가는 급진적인 사회변혁만 알고 단계적인 사회변혁에 대해서는 모르는, 다시 말해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일부 정치활동가들과 지식인들의 주관적 상념일 뿐이다. 명백하게도, 통합진보당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할 사회변혁의 낮은 단계가 요구하는 대중정당이지, 혁명적 사회주의를 실현할 사회변혁의 높은 단계가 요구하는 계급정당이 아니다.
△이정희, 유시민, 심상정 공동대표를 비롯한 통합진보당 지도부가 2011년 12월 5일 오후 경기 마석 모란공원 전태일 열사 묘소를 참배했다. 같은 날 오전 통합진보정당의 당명과 강령 및 당헌, 그리고 신설합당을 의결한 뒤 이뤄진 첫 공식행보다. (<진보정치>보도사진) |
만일 통합진보당을 건설한 진보정치활동가들이 우리식 변혁사상을 외면하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사회변혁의 종착역으로 생각한다면, 통합진보당 건설에 대해 노동정치 세력화를 포기하고 우경화의 질곡에 빠졌다고 평가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우리식 변혁사상의 변혁관점과 변혁노선을 견지하는 진보정치활동가들에게 통합진보당은 진보정치를 대중화하는 도약대이며, 진보적 정권교체를 실현하는 강력한 지렛대이며,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전략거점이며, 사회변혁의 낮은 단계로 진출하는 교두보다. 이 점을 명확하게 지적할 필요가 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통합진보당 건설의 의의를 인식하려 할 때, 진보정치 대중화 변혁노선이 옳은가 아니면 노동정치 세력화 변혁노선이 옳은가 하는 쟁점이 드러난다. 당연한 말이지만, 진보정치를 대중화하면 이 땅의 통합진보당 같은 대중정당을 건설하게 되고, 노동정치를 세력화하면 유럽의 좌파당 같은 계급정당을 건설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위에 제시된 쟁점을 양자택일로 취사선택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진보정치 대중화와 노동정치 세력화 가운데 어느 것을 버리고 어느 것을 택하는 것도 아니고, 대중정당과 계급정당 가운데 어느 것을 버리고 어느 것을 택하는 것도 아니다.
진보정치 대중화는 우리식 사회변혁의 낮은 단계에서 실현해야 하고, 노동정치 세력화는 우리식 사회변혁의 높은 단계에서 실현해야 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우리식 사회변혁의 발전경로는 진보정치 대중화를 먼저 실현한 뒤에 노동정치 세력화로 발전해 나아가는 것이며, 우리식 사회변혁의 당건설노선은 대중정당을 먼저 세운 뒤에 그 당을 계속 강화발전시켜 계급정당으로 개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외래종 변혁사상에 심취한 일부 정치활동가들과 지식인들은 진보정치 대중화를 거부하고 노동정치 세력화를 선호하고, 대중정당 건설을 외면하고 계급정당 건설만 외친다. 왜 그렇게 편협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노동정치 세력화와 계급정당으로 추진하는 급진적인 사회변혁만이 가능하다고 믿어버리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0.16%의 노동자는 계급정당을 건설하지 못한다
외래종 변혁사상에 심취한 일부 정치활동가들과 지식인들이 지닌 고정관념은 이 땅의 현실에 들어맞지 않는 비현실적 관념이다. 그들의 고정관념이 이 땅의 현실에 들어맞지 않는 논리적 맹점과 결함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려면 다음과 같은 논점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첫째, 외래종 변혁사상에서 말하는 진보노조→계급정당→집권성공→사회변혁으로 이어지는, 단선적이고 고정적인 발전공식대로 실현된 사회변혁은 역사적으로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까지 세계 각국의 사회변혁은 단선적이고 고정적인 발전공식대로 실현된 것이 아니라, 복합적이고 가변적인 발전경로에 따라 실현되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진보정권이 등장한 라틴아메리카 몇몇 나라들에서도 진보노조가 계급정당을 건설하고, 계급정당이 집권하여 좌파정권을 세우고, 좌파정권이 사회변혁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각계각층 대중을 결집하여 대중정당을 건설하고, 대중정당이 집권하여 진보정권을 세우고, 진보정권이 사회변혁의 낮은 단계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중이다.
현재 라틴아메리카 몇몇 나라들에서 추진 중인 사회변혁은, 전반적 계획경제를 아직 실시하지 못하고, 중요산업 핵심부분만 국유화하였다는 점에서, 혁명적 사회주의가 아니라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낮은 단계의 사회변혁이며, 그런 사회변혁을 추진하는 주체도 유럽식 좌파정권이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식 진보정권인 것이다.
둘째, 노동계급을 노조조직화하고 진보의식화하여야 노동정치를 세력화할 수 있다. 노조조직화와 진보의식화를 실현하지 못하였는데, 노동정치 세력화부터 추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된 주장이다.
그러면 오늘 이 땅의 노동계급이 처해 있는 현실은 어떠한가? 1989년에 19.8%까지 올라갔던 노조조직률은 1990년대 이후 경향적으로 하락하더니 지난 해 2010년에는 9.8%로 내려앉았다. 2010년 현재 노조단위는 4,420개이며, 노조에 가입한 노동계급은 164만3,113명밖에 되지 않는다. 2011년 초를 기준으로 이 땅의 노동계급(임금노동자)은 1,751만명이다.
그런데 위의 전반적 통계에서 중요한 것은 민주노총과 관련된 통계수치다. 전체 노조 조합원 가운데서 민주노총 조합원은 35.3%(58만64명)이고, 한국노총 조합원은 44.3%(72만8,649명)이고, 상급단체에 가입하지 않은 미가맹노조 조합원은 20.4%(33만4,400명)다. 또한 전체 노조 가운데 민주노총 노조는 9.8%(432개)이고, 한국노총 노조는 51.8%(2,292개)이고, 미가맹노조는 38.4%(1,696개)다.
2011년 11월에는 한국노총 이외에 이른바 '온건과 합리'를 표방한 국민노총까지 등장하여 노동계급 진보의식화에 장애물을 하나 더 놓았다. 이런 난감한 실정을 살펴보면, 민주노총이 왜 총파업을 하지 못할 만큼 무력한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민주노총 지도부는 432개 산하노조와 58만명 산하노조원들을 얼마나 진보의식화하였을까? 지난 시기 민주노동당에 노동자 당원이 가장 많았던 때에도, 민주노동당에 입당한 민주노총 조합원은 전체 민주노총 조합원 가운데 5%밖에 되지 않았다.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한다고 선언하자 어떤 사람들은 민주노동당을 '민주노총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불과 5%밖에 입당하지 않았다니, 노동계급 진보의식화는 넘지 못할 한계상황에 있었던 것이다.
△민주노총이 2011년 11월 13일 서울 시청광장에서 개최한 '한미 FTA 저지,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2011 전국노동자대회'에 참가한 4만 여 노동자, 시민들. |
이 땅에서 사회변혁을 추진할 가장 강력한 기본동력인 진보의식화된 노동계급은 노조조직화된 노동계급 164만명 가운데 겨우 1.7%를 차지하는 29,000명밖에 되지 않았다. 1,751만명에 이르는 전체 노동계급 가운데서 0.16%밖에 되지 않는 29,000명 노동자가 중심이 되어 계급정당을 건설하겠다는 것은 무지가 아니면 만용일 것이다.
그처럼 어려운 처지에 있는 민주노총이 노동정치 세력화를 추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따라서 진보노조에 기반을 둔 계급정당을 현 단계에서 건설할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하다. 노동계급의 노조조직화와 진보의식화가 부진한 현상은 이 땅에서만 나타나는 특별한 현상이 아니며, 세계 각국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노동정치 세력화와 계급정당 건설을 언제 어떻게 추진할 것인가? 이 중요한 전략과제도 당연히 우리식 변혁사상에 의거하여 해명해야 하는데,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는 노동계급의 노조조직화와 진보의식화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이 지난 11년 동안 쌓아온 정치경험은, 진보정치활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진보정당을 건설했어도 진보노조의 실질적인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이 11년 전부터 추진해온 노동정치 세력화는 실패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집권하지 못한 진보정당은 진보노조 조직화를 추진하지 못하고, 기존노조를 진보의식화하기도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명백하게도, 노동정치 세력화를 추진하기 이전에 진보정치 대중화부터 추진해야 한다. 이번에 건설된 통합진보당이 진보정치를 대중화하는 새로운 출발점에 새로운 결심을 안고 서 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11년 경험에서 실증된 것처럼, 집권하기 전에는 통합진보당이 진보노조 조직화와 기존노조 진보의식화를 추진하기 힘들다. 진보노조 조직화와 기존노조 진보의식화는 진보정권이 세워진 이후에 자주적 민주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통합진보당과 민주노총이 함께 추진하는, 변혁적 주체역량을 일으켜세우는 거창한 과업이다.
그러므로 장차 세워질 진보정권이 수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임무는, 중요산업을 국유화하는 것와 함께 중요산업부문에 망라된 노동계급의 노조조직화와 진보의식화를 추진하는 것이다. 진보정권 집권기는 이 땅에서 100년 이상 오랜 기간 동안 억압과 차별과 착취를 받아온 노동계급이 사회변혁의 중심동력으로 등장하는 역사적 전환기이며, 진보적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사회변혁의 낮은 단계는 노조조직화된 노동계급의 거대한 잠재적 변혁역량을 정치현실로 이끌어내어 노동정치를 본격적으로, 전면적으로 세력화하는 새로운 변혁단계다.
진보적 민주주의가 높은 수준에서 성숙되었을 때, 그리하여 사회변혁이 낮은 단계의 과업을 빛나게 수행하고 바야흐로 높은 단계로 이행할 때, 그리고 이 땅에서 주한미국군을 철군시키고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였을 때, 바로 그러한 위대한 변혁의 시대에 통일공화국 남측 지역에 등장할 사회변혁의 주체가 바로 수백만 명 노동계급을 결집한 강력한 계급정당인 것이다. 높은 단계의 사회변혁은 눈부신 역사의 무대 중심부에 당당하게 등장할 계급정당에 의해 추진될 것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 땅의 진보정치세력은 자주파와 평등파로 갈라져 있다. 그 분화의 기원은 1980년대로 거슬러올라가지만, 지금까지 반독재민주화 단계에서 반미자주화 단계를 거쳐 진보정치 대중화 단계로 지속적 발전을 거듭해온 진보정치세력은, 우리식 변혁사상을 자기 머리로 탐구하며 진보적 민주주의와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해 투쟁해온 진보정치활동가들이다. 그런 그들을 자주파라고 부른다. 그에 비해, 평등파는 어제도 오늘도 외래종 변혁사상에 심취하고 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자주파와 평등파가 정치적, 조직적으로 갈라진 분화의 뿌리는 현실주의적 과학과 급진주의적 공상 사이의 사상적 차이에 있다. 2011년 말에 이르러 진보정치세력이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으로 갈라진 것은, 그러한 사상적 차이가 당건설 과정에서 불러일으킨 불가피한 분화현상이었다. (2011년 12월 9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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