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0/30

안철수 포퓰리즘과 진보정치의 위기

변혁과 진보 (52)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강한 유혹을 느끼는 야당의 변신

2012년 총선과 대선의 전초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서울시장 보선이 2011년 10월 26일에 실시되었고, 박원순 후보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정치평론가들과 언론매체들은 이번 서울시장 보선결과에 따라 정치권이 전면 개편될 것으로 예견하였다. 그들이 예견하는 정치권 개편이란 야권 개편을 뜻한다. 민주당이 개편되어 새로운 야당이 등장할 것이라는 뜻으로 읽힌다.

새로운 야당이 창당될 것으로 예견하는 근거는, 서울시장 보선후보를 뽑는 야권단일후보 경선에 나왔던 민주당 후보가 무소속 박원순 후보에게 패하였고, 이번에 실시된 지자체 재보선에서 민주당이 패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거결과는, 제1야당인 민주당이 현재 상태로 남아있다가는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한나라당에게 패할 수밖에 없다는 심각한 위기감을 안겨주었다.

그런 위기감을 느끼는 민주당은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혁신과 통합'을 끌어들여 새로운 통합야당을 창당하려는 노력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이 민주당과의 통합을 거부하고, 국민참여당마저도 민주당과의 통합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기 때문에 민주당이 요구하는 단일야당통합은 실현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민주당이 내년 선거국면에 다가가면서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면, 이루어질 수 없는 단일야당통합을 포기하는 대신 '혁신과 통합'과 통합하여 새로운 야당을 창당할 것으로 보인다.

선거국면을 앞둔 시한부 정치일정을 살펴보면, 민주당과 '혁신과 통합'이 지금부터 급하게 서둘러야 내년 총선에 대응할 새로운 야당을 창당할 수 있다. 창당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당의 구성부분이 변형될 가능성은 있지만, 어째든 새로운 야당의 출현은 불가피하다.

그런데 민주당과 '혁신과 통합'의 통합으로 창당된 새로운 야당이 내년 총선에서 좋은 성적표를 거둘 가능성은 그리 높아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민주당과 '혁신과 통합'의 통합이 국민들에게 새로운 야당의 참신한 인상을 주기에 매우 미흡하기 때문이다.

사회현실에 불만을 느끼는 응답자가 67.2%인데, 지지할 정당이 없다는 응답자가 무려 73.6%나 되는 최근 여론조사결과는, 한나라당에 대한 대중적 거부감이 커질수록 민주당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런 맥락에서 예견하면, 내년 4월 총선 직후 새로운 야당은 자기들이 얻은 총선결과를 반성하면서 12월 대선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승리하기 위해 비상대책을 세울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민심얻기에 실패한 새로운 야당이 정권교체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비상대책은 포퓰리즘적 변신술이다. 포퓰리즘(populism)이라는 말은 대중인기영합주의로 번역되는 외래어인데, 이 글에서는 이미 통용되고 있는 포퓰리즘이라는 외래어를 우리말로 번역하지 않고 편의상 그대로 쓴다.


△ 2011년 9월 20- 22일 서울지역 유권자를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연합뉴스> 2011년 9월 23일 보도)
새로운 야당이 포퓰리즘적 변신술에 강한 유혹을 느낄 수밖에 없는 까닭은, 이번 서울시장 보선과정에서 안철수 포퓰리즘의 엄청난 위력을 실물로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2011년 10월 16일과 17일 KBS, MBC, SBS 방송3사가 여론조사업체들에 의뢰해 실시한 여론조사결과에 따르면, 내년 대통령선거가 양자대결구도로 실시될 경우 지지율은 안철수 대학원장이 44.2%,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가 36.4%로 나왔다.

기존 정치권에 불신과 환멸을 보내는 각계각층 대중이 안철수 대학원장에게 기대와 희망, 호응과 지지를 몰아주는 현상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은 새로운 야당은 절박한 정권교체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안철수 포퓰리즘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주목하는 것은, 포퓰리즘 정당으로 변신한 새로운 야당이 안철수 대학원장을 대선후보로 영입하여 정권을 교체하려는 집권 시나리오를 예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안철수 대학원장이 새로운 정당을 창당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야당이 포퓰리즘 정당으로 변신하면서 그를 대선후보로 영입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 서울시장 보선에서 박원순 후보가 그러했던 것처럼, 안철수 대학원장도 무소속 대선후보로 나서기는 하되 새로운 야당에 입당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야권단일후보 경선을 거쳐 무소속 대선후보 안철수가 반한나라당 야권단일후보로 나설 수 있다.

어째든 위의 두 가지 경우 모두 안철수 포퓰리즘을 대중적 지지기반으로 하는 포퓰리즘 정권의 등장을 예고한다.

만일 안철수 포퓰리즘의 집권 시나리오가 현실화된다면, 한나라당의 집권연장은 파탄될 것이고, 다른 한 편 민주노동당의 집권전망도 사라질 것이다. 대중적 지지기반이 미약한 민주노동당이 대중적 지지를 무시무시한 흡입력으로 빨아들이는 포퓰리즘 정당에 맞서 경쟁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한나라당의 집권연장이 파탄되는 것은 크게 반길 일이지만, 그와 더불어 민주노동당의 집권전망도 사라진다면, 이 땅의 진보정치가 치명상을 입고, 사회변혁운동이 쓰라린 좌절을 겪는 불행 중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서울시장 보선과정에서 느닷없이 돌출한 안철수 포퓰리즘이 말해준 것처럼, 포퓰리즘은 사회변혁운동을 불능화시키는 치명적 독소다. 세계 각국의 사회변혁운동사가 겪은 경험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회변혁운동을 내부에서 와해시키는 독소가 종파주의라면, 사회변혁운동을 외부에서 불능화시키는 독소는 포퓰리즘이라는 사실이다.

진보적 민주주의의 미래를 전망하며 사회변혁을 위해 투쟁하는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이 안철수 포퓰리즘의 돌비현상을 목격하고 불길한 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신화와 현실을 오가는 포퓰리즘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불붙고 있었던 1943년 6월 4일 아르헨티나에서는 연합장교단(GOU)이 군사정변을 일으켜, 집권한지 1년밖에 되지 않은 부패무능한 까스띠요 정권을 뒤집어엎었다. 군사정변을 일으킨 연합장교단 주동자들 가운데는 환 도밍고 페론(Juan Domingo Peron, 1895-1974) 대령이 있었다.

군사혁명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맡은 페론 대령은 노조의 편을 들어주면서 노동복지정책을 시행하여 아르헨티나 노동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1944년 1월 15일 아르헨티나 중서부에 있는 싼 환(San Juan)에서 대지진으로 10,000여 명이 사망한 참사가 일어났는데, 페론 장관은 지진참사 구호활동에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어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처럼 페론이 노동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고, 국민적 신망을 받게 되자, 그와 정치적 경쟁관계에 있는 군사혁명정부 우파세력이 그를 전격 체포하고 노동부 장관직을 사임하라고 협박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노동자들과 각계각층 대중이 페론의 석방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투쟁을 벌이는 바람에, 그는 체포된지 나흘 만에 풀려났다. 페론 체포사건은 그의 대중적 지지기반을 되레 더 강화, 확대하였다.
 
1930년에 창설된, 300만 명의 노조원을 거느린 아르헨티나 노동총연맹(CGT)을 중심으로 각계각층 대중이 페론을 내세워 창당한 새로운 야당이 노동당(Labour Party)이다. 1946년 2월 24일 아르헨티나에서 실시된 선거는 페론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운 노동당과 호세 탐보리니(Jose Tamborini)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운 민주연합(Democratic Union)의 대결이었다.

노동당에 맞선 민주연합은 사회당과 공산당, 그리고 중도우파당인 급진시민연합과 우파당인 국민자치당까지 폭넓게 결집한 선거연합이었다. 그 선거에서 노동당이 대승을 거두었다.

페론 정권은 1947년부터 1951년까지 국가발전계획인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면서, 중앙은행, 철도, 도시교통, 대외무역, 대학, 공공시설 국유화를 단행하였다. 중요산업의 국유화 조치 가운데서도 특히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농축산물 수출국이었던 아르헨티나의 곡물시장을 국유화하였고, 곡물수출로 벌어들인 막대한 이윤으로 노동자 임금 인상과 전 국민 무상의료를 실시하였다.

중요산업을 국유화한 페론 정권의 진보적 민주개혁은 민주노동당이 추구하는 진보적 민주주의와 매우 흡사하다. 당시 미국은 아르헨티나가 사회주의진영으로 넘어가는 게 아닌가 하고 우려하였을 정도다.

그런데 페론 정권의 진보적 민주개혁을 함정에 빠뜨린 결정적인 요인이 있었으니, 그것이 페론의 두 번째 아내 에바 페론(Eva Peron, 1919-1952)의 등장이다. 뛰어난 미모와 언변술을 타고난 에바 페론은 자기 남편이 대선후보로 출마하였을 때부터 포퓰리즘을 선동하였다.

기존 정치권에 불신과 환멸을 보내며 '대중의 우상'이 나타나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당시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에바 페론의 등장은 강력한 포퓰리즘 돌비현상을 일으켰다.


에바 페론 추모 50주년 기념 우표
지금 이 땅의 대중들이 안철수 대학원장의 성공신화에 현혹되었듯이, 당시 아르헨티나의 대중들은 에바 페론의 성공신화에 현혹되었다.

의상계에서 잘 나가는 모델로, 언론계에서 인기 있는 라디오방송 진행자로 성공한 에바 페론이 대통령 영부인이 되었으니 대중들이 그녀의 성공신화에 현혹될만도 했다.

지금 이 땅의 안철수 포퓰리즘이 사회연계통신망(SNS)을 통해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는 것처럼, 당시 아르헨티나에서 에바 페론 포퓰리즘은 라디오방송을 통해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에바 페론 자신이 인기 있는 라디오방송 진행자였으니 그럴만도 했다.

에바 페론 포퓰리즘은 1951년 8월 22일 각계각층 대중들이 그녀에게 부통령 후보로 나서주기를 요구한 대규모 군중집회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그녀의 이름을 연호하며 열광하는 군중들 앞에 나타난 에바 페론은 치명적인 암에 걸려 남편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마이크 앞에 설 수 있었는데, 건강악화로 부통령 출마를 고사한 그녀는 자기 남편이 대선에서 이겨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자 곧 사망하였다.

열광적인 포퓰리즘의 절정에서 숨을 거둔 그녀의 최후는 더욱 극적으로 신화화되었고,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그녀를 "나라의 정신적 지도자"로 추앙하였다. 에바 페론은 포퓰리즘 신화의 영원한 주인공으로 대중문화 속에 부활한 것이다. 

주목하는 것은, 에바 페론의 등장으로 페론 정권의 진보적 민주개혁이 포퓰리즘의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이다. 페론주의(Peronism)는 포퓰리즘의 대명사가 되었다. 포퓰리즘 정권은 민주개혁을 단행하여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인기를 얻으면 그 뿐이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지도 않고, 사회변혁으로 나아가지도 않는다.

1955년 9월 16일 아르헨티나 우익군부세력은 군사정변을 일으켜 포퓰리즘 정권을 뒤집어엎었고, 페론 대통령은 해외로 탈출하였다. 1973년 10월 12일 오랜 해외망명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노쇠한 페론이 두 번째 집권하였으나, 1974년 6월 28일 심장병으로 사망하였다.

페론의 뒤를 이어 그의 세 번째 아내인 이사벨 페론(Isabel Peron)이 사상 처음으로 여성대통령이 되었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에바 페론의 신화에 도취된 최면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1976년 3월 24일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Jorge Rafael Videla)가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탈취하여 극우정권을 세웠다. 비델라 군사독재정권은 1982년 4월 2일 포클랜드 영유권을 놓고 아르헨티나와 영국이 벌인 전쟁에서 아르헨티나가 패한 여파로 정권을 내놓기까지 보안군과 살인부대(death squad)들을 동원하여 악명 높은 폭압통치를 자행하였다.

당시 미국의 배후조종을 받은 콘돌 작전(Operation Condor)이라는 이름의 반공폭압으로 아르헨티나, 칠레, 브라질, 우루과이, 파라과이, 볼리비아에서 납치, 고문, 암살, 집단학살이 계속되었는데, 60,000여 명의 진보정치활동가, 노조지도자, 진보언론인들이 무참히 살해되었다.

아르헨티나의 포퓰리즘 정치는 진보적 민주개혁을 파탄시켰고, 포퓰리즘 정권을 뒤집어엎은 반공폭압의 광풍은 아르헨티나 사회변혁운동의 뿌리를 뽑아버렸다. 현재 아르헨티나 집권당은 페론주의라는 이름의 아르헨티나식 포퓰리즘을 따르는 정의당(Justicialist Party)이다.

전형적인 포퓰리즘 정당인 정의당은 창당되었던 1946년 이후 지금까지 1983년과 1999년 대선에서만 패하였을 뿐 지속적으로 집권당의 지위를 잃지 않고 있다.

포퓰리즘 정당이 판치는 아르헨티나에서 사회당은 상원 72석 가운데 겨우 1석, 하원 257석 가운데 겨우 6석을 차지한 왜소정당으로 전락하였다. 사회당이 그처럼 왜소정당으로 전락하였으니, 좌파정당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정통사회당, 노동자당, 광폭전선(Broad Front), 1918년에 창당된 아르헨티나 공산당, 1996년에 창당된 아르헨티나 공산당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외면하는 존재감 없는 원외좌파정당들이다. 좌파정당과 사회당의 왜소화, 바로 이것이 포퓰리즘이 진보정치에 안겨준 비극이다.


우리에게 다른 길은 없다

이 땅에 몰려오고 있는 포퓰리즘 암운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는 것은 과장도 아니고 기우도 아니다. 포퓰리즘이 사회변혁운동을 초토화시킨 아르헨티나의 뼈저린 경험을 분석하면, 민주노동당이 안철수 포퓰리즘에 어떻게 맞서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노동당이 안철수 포퓰리즘에 맞서 싸우는 것은 내년 선거전략에 한정되는 문제가 아니라, 포퓰리즘 암운을 밀쳐내고 이 땅의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운동을 지키는 변혁수호전략이다.

민주노동당이 그 수호전에서 이겨야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사회변혁운동을 전진시킬 수 있다. 그런데 누구나 아는 것처럼, 대중적 지지기반이 허약한 정파통합당으로는 포퓰리즘 정당에 맞서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운동을 수호하지 못한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위력적인 진보통합 돌풍만이 포퓰리즘 암운을 밀쳐낼 수 있다.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통합과 연대'가 3자 통합으로 새로운 진보정당을 창당하여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우리에게 다른 길은 없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아있는 시간도 없다. 암운이 몰려오고 있다. (2011년 10월 30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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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26

1939년의 혈서, 1979년의 암살

진실의 말팔매 <39>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1939년의 혈서

1939년 2월 29일 만주국 치안부 군정사 징모과에 박정희가 제출한 두툼한 지원서류가 들어갔다. 박정희의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박정희가 쓴 지원서가 나왔다.

지원서에서 그는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은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의 굳은 결심을 하였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할 각오를 하였습니다. 만주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을 뜻함-옮긴이)을 위해 일신의 영달도 바라지 않겠습니다"고 절절히 썼다.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하기 위해 두 번째로 보낸 그 지원서와 함께 "죽음으로 봉공하리라 박정희"라는 뜻으로 쓴 혈서가 들어있었다. 박정희의 지원서와 혈서는 1939년 3월 31일 <만주신문>에 보도되었는데, 거기에 나타난 그의 열렬한 충성심이 "징모과 계원들을 감격시켰다"고 하였다.
 
1939년 2월 경상북도 문경을 떠나 만주로 간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지원서류를 두 번 제출하였는데, 두 번째로 그가 쓴 지원서와 혈서를 읽고 감동한 사람들 가운데는 당시 만주군 간도특설대 대위 강재호도 있었다.

강재호가 만주군관학교 입학시험장까지 데리고 가서 입학을 추천하였던 박정희는 1940년 4월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하였고, 1942년 10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편입하여 1944년 5월 졸업과 함께 소위로 임관하였다.

1938년 9월 15일 창설된 만주군 간도특설대 지휘관은 일본군이었고 대원들은 거의 조선인이었는데, 만주군관학교 생도들은 재학 중에 만주군 간도특설대에서 이른바 '토벌작전' 실전훈련을 받는 견습생이었으며, '토벌작전'이 벌어지는 경우 만주군 간도특설대 예비병력으로 실전에 동원되었다.
 
만주군 간도특설대는 1938년 9월 15일 창설되어 같은 해 12월부터 1943년 말까지 간도에서 항일무장부대를 '토벌'한다고 날뛰면서, 조선인 마을에 들어가 민간인 학살, 부녀자 강간, 재물 약탈, 방화를 일삼은 극악무도한 살인집단이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문제는, 만주군 간도특설대의 극악무도한 '토벌작전'에 만주군관학교 생도들이 예비대로 동원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만주군관학교 생도였던 박정희가 만주군 간도특설대의 '토벌작전'에 예비대 병력으로 동원되었음을 말해준다.

만주군 간도특설대는 조선인민혁명군과 두 차례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1939년 8월 23일 안도현 대사하와 대장강지구에서 벌어진 전투를 대사하전투라 한다. 만주군 간도특설대는 대사하전투에서 500여 명이 살상되거나 포로로 잡혀 거의 궤멸되다시피 하였다.

그런데 대사하전투가 벌어졌던 1939년 8월 박정희는 아직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하기 전이었으므로, 그가 대사하전투에 예비대 병력으로 동원되었을 가능성은 없다.

대사하전투에서 참패하고 복수심에 사로잡힌 일제는 관동군과 만주군, 그리고 만주군 산하 간도특설대를 총동원하여 1940년 봄부터 만주 각지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을 상대로 대규모 '춘계토벌작전'을 벌였다.

1940년 6월 연길현과 안도현에서 군사활동을 벌이던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가 대사하치기에서 만주군 간도특설대와 불의의 조우전을 벌이게 되었으니, 이것이 대사하치기전투다. 당시 만주군 간도특설대는 만주군 군관학교 생도들로 편성된 예비대까지 '토벌작전'에 동원하였는데, 거기에 박정희도 있었다.

<세계일보> 취재기자들이 2006년 5월 29일부터 6월 5일까지 중국 동북지방 각지에서 취재하면서 만난 조선족 함형도의 증언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1941년 그의 부친은 안도현 명월구에서 아사히사진관 사진기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일본도를 허리에 차고 군복을 입은 조선인 장교가 사진을 찍으러 그 사진관에 오곤 하였다.

막걸리를 좋아하고 경상도 말씨를 쓴 그 조선인 장교는 당시 어린애였던 함 씨를 귀여워하여 사탕을 사먹으라고 돈도 주었고, 간도특설대로 가는 길에 그를 졸졸 따라가면 부대 정문 앞에서 "너는 여기 있거라"고 말하고 부대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와 자신을 사진관으로 데려다주기도 하였다.

함 씨는 훗날 흑룡강성 신문에 보도된 남측의 역대 대통령 사진들을 우연히 살펴보다가, 지난 날 아사히사진관을 드나들던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었음을 알았다고 한다.


1979년의 암살

이처럼 일제강점기에 민족반역자였던 박정희는 미국육군방첩대 한국현지사무소 책임자 제임스 하우스만의 배후조종으로 일어난 5.16 군사반란의 지도자로 집권한 뒤에는 한일국교수립과정에서 독도 영유권을 포기하였으며, 산업화를 위해 대일경제예속화를 추진하였으며, 미국의 베트남침략전쟁을 추종하여 파병하였으며, 폭압통치로 민주주의를 짓밟았다.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하려고 지원혈서를 썼던 때로부터 40년이 지난 1979년 10월 26일 서울 종로구 궁정동 청와대 경내에 있는,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는 '안가'에서 비밀주연이 벌어졌다.

만찬이 차려진 커다란 교자상 앞에 박정희가 앉았고,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가 '함구각서'를 받고 불러온 인기가수 심수봉과 모델 신재순이 유행가를 부르며 박정희의 술잔에 값비싼 양주를 연신 따르고 있었다. 


<한겨레> 2011년 10월 24일 부에 실린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의 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황음'에 빠진 박정희는 외부와는 완전히 차단된 이들 안가에서 주연을 벌이고 주흥을 돋우기 위해 젊은 여자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이런 술판은 소행사와 대행사로 구분되는데, 대행사는 두 명 이상의 여인과 비서실장, 경호실장, 정보부장 등 권력자 3-4명이 참석해 벌이는 연회였고, 소행사는 대통령 혼자서 한 여인만 불러서 즐기는 밀회를 말한다. 한 달에 대행사가 2-3회, 소행사가 7-8회, 도합 10회 안팎의 대소연이 벌어졌다. 이 자리에 여인을 공급하는 것도 의전과장의 몫이었다. 당시 의전과장 박선호가 서울 장충동에 있는 요정의 한 마담에게 소개받아 공급한 여인만도 100명을 넘는다."

김재홍 경기대 교수가 2011년 10월 19일 <오마이뉴스>에 발표한 글에는 김재규가 사형 당하기 전에 변호사에게 털어놓은 이야기가 인용되었는데, 박정희의 비밀안가에 불려간 여자는 200명이 넘는다. 그 가운데는 "누구나 한 번 듣기만 하면 입을 딱 벌릴 만한" 여자탤런트와 여자배우들이 있었다. 이러한 증언은 박정희가 타락한 인격파탄자였음 말해준다.

이 땅에 진정한 자주적 민주정권이 세워져 부패하고 피묻은 과거사를 청산하였더라면, 박정희는 사후에라도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고 사라져야 했을 것이다. 


최면에 걸린 국민들

충격적인 사실은, 2011년 5월 한국정당학회와 <조선일보>가 공동기획한 여론조사에서 드러났다. 여론조사결과에 따르면, 이 땅의 국민들 가운데 무려 82.6%가 박정희가 "국가발전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하였다.

"경제발전"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92.1%, "국민의식변화"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66.6%, "외교안보"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64.8%, "정치민주화"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38.3%로 나타났다. 자신을 진보라고 생각하는 응답자 가운데서도 박정희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 비율이 76.5%나 되었다.

박정희가 민족과 역사 앞에 저지른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을 은폐하고, 그의 행적을 미화분식한 속임수에 넘어간 국민들이 '박정희 향수'라는 최면에 걸려있는 것이다. 그렇게 최면에 걸린 사람에게 투표용지를 주고 대통령을 뽑으라고 하면, 박정희의 딸에게 투표할 것으로 예상된다.

 '박정희 향수'라는 최면에 걸린 이 땅의 국민들은 1939년의 혈서와 1979년의 암살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아야 최면에서 깨어날 것이다. (2011년 10월 26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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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21

근본적 변화는 어디서 일어나는가?

변혁과 진보 (51)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북미관계의 본질은 외교가 아니다

백악관은 진실 감추기에 급급하고, 미국 언론계는 사실왜곡에 이골이 났지만, 그들이 아무리 감추고 왜곡해도 북미관계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통일뉴스>에 월요일마다 연재하는 나의 글들에서 북미관계 변화동향을 자세히 논해오고 있으므로, 이 글에서 그에 대한 분석을 재론할 필요는 없다. 이 글에서 논하는 것은 북측이 북미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북측이 북미관계를 변화시킨다면, 미국도 그 관계를 변화시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북미관계는 북측에 의해 일방적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미국은 북미관계의 변화를 거부하고 적대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데 집착하기 때문이다.

북측은 왜 북미관계를 변화시키려는 것일까?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58주년이 되던 2011년 10월 1일 <로동신문>에 실린 기사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기사 일부를 원문 그대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

"이 범죄적 '조약'에서 미국은 저들의 륙, 해, 공군을 남조선의 '령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규제하고 '본 조약은 무기한 유효하다'고 쪼아박았다. 이로써 미국은 남조선에 대한 영구강점을 합법화하고 조선반도와 동북아시아지역에서 패권적 지위를 공고히 하려고 꾀하였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기관지인 <로동신문>의 논조는 조선로동당의 의사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는데, 위의 기사에 따르면, 북측은 미국군이 남측에 주둔하는 것이 아니라 남측을 강점하였다고 보는 것이 확실하다. 위의 기사제목에 나와있는 북측 표현을 인용하면, 주한미국군 주둔은 "미제침략군의 남조선 강점"으로 된다.

주둔과 강점은 하늘과 땅만큼 커다란 차이를 지닌 개념들인데, 주둔이란 어떤 지역에 머문다는 뜻이고, 강점이란 강제로 차지하였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일제가 한반도를 강제로 식민지화한 것을 가리켜 강점이라 한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는 한반도를 강점한 자기 군대를 "조선주둔군"이라 부르면서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일본군의 조선 주둔이 아니라 일제침략군의 조선 강점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북측도 미국군의 남측 주둔을 "미제침략군의 남조선 강점"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미국군의 남측 주둔을 "미제침략군의 남조선 강점"으로 규정한 북측의 인식은, 북미관계의 근본성격을 결정하는 것이고, 북미관계의 변화방향과 변화방식을 결정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북측의 관점에서 보는 북미관계의 근본성격은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불상용적인 적대성이다.

또한 북측이 북미관계에서 추구하는 변화방향과 변화방식은 국제관계에서 통용되는 외교활동이나 정치협상이 아니라 비타협적인 반제투쟁이다. 요컨대, 북측은 자기 영토를 강점한 제국주의국가를 상대로 외교활동이나 정치협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반제투쟁을 벌이는 것이다.


종전되지 않고 정지된 전쟁

사회주의국가가 제국주의국가에 맞서 싸우는 반제투쟁은 반제군사전선에서 전개되는 것이므로, 반제투쟁은 곧 반제무력투쟁이며, 반제무력투쟁의 최고 발전단계는 반제혁명전쟁이다.

세계혁명사에서 반제혁명의 두 가지 성격은 반제사회주의수호혁명과 반제민족해방혁명으로 나타나는데, 반제혁명전쟁이 사회주의수호전으로 되는 경우도 있고 민족해방전쟁으로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 글에서 논하는 북측의 반제혁명은 "미제침략군의 남조선 강점"을 종식시키는 것이므로, 북측이 말하는 그 혁명의 기본성격은 반제민족해방혁명이고, 그 혁명의 수행방식은 반제민족해방전쟁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전쟁관이다. 전쟁은 악이고 평화는 선이라는 이분법적 단순논리는, 일제침략군의 조선 강점을 종식시키고 나라의 자주독립을 실현하기 위해 조선독립군, 광복군, 조선인민혁명군이 각각 수행한 항일전쟁이 정의의 전쟁(just war)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커다란 오류를 불러온다.

개인의 정당방위가 합법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나라가 자위권을 발동하는 정의의 전쟁도 국제법적으로 합법화된다.

이러한 전쟁관의 시야에서 북미관계를 다시 바라보면, 북측은 "미제침략군의 남조선 강점"을 종식시키려는 자기들의 반제혁명전쟁을 정의의 전쟁으로 규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북한의 남침도발"을 규탄하는 남측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해하기 힘들지만, 남침도발이냐 아니면 정의의 전쟁이냐 하는 문제는, 미국군이 남측에 주둔하는 것인가 아니면 남측을 강점한 것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 3년 동안 북측과 미국이 벌인 격렬한 전면전을 남측에서는 6.25전쟁으로 부르지만, 북측에서는 조국해방전쟁으로 부른다. 북측이 6.25전쟁을 조국해방전쟁으로 부르는 까닭은, 그 전쟁의 성격을 "미제의 강점지역을 해방하기 위한 전쟁"으로 규정하였기 때문이다.

남측에서 6.25전쟁으로 부르고, 북측에서 조국해방전쟁으로 부르는 그 전쟁이 종전되지 않고 정지된 것은, 북측이 반제혁명전쟁을 아직 끝내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정전상태가 완전히 종식되고 국제법적으로 종전이 성립될 때 북측의 반제혁명전쟁도 끝날 것이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남일 조선인민군 대장과 미국 육군 해리스 중장.

전쟁위험을 안고 있는 불안정한 정전체제를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한반도 평화실현을 북측의 관점에서 해석하면, 북측이 반제혁명전쟁으로 "미제침략군의 남조선 강점"을 종식시킨다는 뜻이다.

북측은 "미제침략군의 남조선 강점"을 종식시켜야 한반도 평화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고 있으며, 따라서 북측은 1953년 정전체제 수립 이후 58년 동안 자기의 반제군사전선을 견고하게 구축하여 "미제침략군의 남조선 강점"을 종식시키기 위한 반제혁명전쟁을 계속 준비해온 것이다.

일제강점기 반제혁명전쟁의 전통을 계승할 뿐 아니라, 반제혁명전쟁을 수행하는 반제군사전선을 중심에 두고 사회주의건설을 추진하는 북측 특유의 사회주의정치방식을 가리켜 선군정치(Songun Politics)라 한다. 


수명 다한 버티기 수법, 다가오는 근본적 변화

며칠 뒤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2차 북미고위급회담이 열린다.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을 단장으로 한 북측 정부대표단과 이번에 교체된 글린 데이비스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를 단장으로 한 미국 정부대표단이 그 회담에서 북미관계 현안을 집중 논의할 것이다.

그런데 북측이 "미제침략군의 남조선 강점"을 종식시키기 위한 반제혁명전쟁을 준비해왔다면, 북미고위급회담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역사적 경험을 살펴보면, 외국군대의 영토강점이 격퇴전으로 종식되는 경우도 있었고 철군담판으로 종식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미제침략군의 남조선 강점"도 반제혁명전쟁으로 종식될 수도 있고, 철군담판으로 종식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릴 북미고위급회담은 철군담판을 준비하는 예비회담으로 볼 수 있다.

외국군대의 영토강점을 격퇴전으로 종식시키는 것보다 전쟁을 하지 않고 철군담판으로 종식시키는 것이 비할 바 없이 유리하다. 북측이 북미고위급회담을 미국에게 강하게 요구하여 기어이 관철시킨 까닭은, "미제침략군의 남조선 강점"을 반제혁명전쟁으로 종식시키는 것보다 철군담판으로 종식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세계전쟁사에서 외국군대의 영토강점은 어떤 조건에서 담판으로 종식되는 것일까? 다른 나라 영토를 무력으로 강점한 외국군대가 전쟁을 하더라도 이길 수 없고, 되레 혹심한 전쟁피해를 입게 되는 경우 전쟁을 피하고 담판으로 철군을 합의함으로써 영토강점이 종식된다.

이러한 경험을 한반도 정세에 대입해보면, 미국이 북측과 전쟁을 하더라도 이길 수 없고, 되레 미국이 혹심한 전쟁피해를 입게 된다는 점이 명백해질 때, 오직 그런 조건에서만 미국은 북측의 철군담판 요구에 응할 것이다.

이제껏 재래식 무기만으로도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였던 북측이 절대무기인 핵무기를 보유한 군사강국으로 등장한 현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천문학적인 재정적자로 파산위기에 내몰린 미국이 대폭적인 군비감축을 추진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거기에 더해진 오늘, 미국은 자기들이 북측과 전쟁을 하더라도 이길 수 없고, 되레 미국이 혹심한 전쟁피해를 입게 될 것임을 깨달았다. 이것은 미국이 북측이 요구하는 철군담판에 끌려나갈 수밖에 없음을 예고한다.
 
철군담판이란 북측의 표현을 빌리면 "미제침략군의 남조선 강점"을 종식시키는 담판이고, 미국의 표현을 빌리면 주한미군군 철군을 공약하는 담판이다. 그런 담판은 당연히 두 나라의 최고결정권자가 만나 대타결을 이끌어내야 성사되는 것이므로, 철군담판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오바마 대통령의 정상회담에서 비공개로 진행되리라는 점은 자명한 이치다.

그런데 1993년 이후 18년 동안 북측이 북미정상회담 개최를 미국에게 요구해왔는데도 그 회담은 열리지 않고 있다. 왜 열리지 않은 것일까? 간단히 말하면, 미국이 북미정상회담 개최를 회피하는 수법을 지난 18년 동안 계속 쓰면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버텨왔기 때문이다. 미국의 버티기 수법은 세 가지였다.

첫째, 미국은 요코하마에 배치한 7함대 항모강습단과 오키나와에 배치한 제3해병대원정군 상륙강습단을 동원한 대규모 북침전쟁연습을 주기적으로 벌여 북측과의 군사적 긴장을 유지함으로써 북미정상회담을 회피하는 버티기 수법에 매달렸다.

둘째, 미국은 양자회담, 3자회담, 4자회담, 그리고 나중에 급해지자 6자회담으로까지 회담범위를 확대하면서 북미정상회담을 회피하는 버티기 수법에 매달렸다.

셋째, 미국은 6자회담에서 합의한 9.19 공동성명을 자기들이 이행하지 못하게 되자, '전략적 인내'라는 거짓명분을 내걸고 회담 자체를 전면 거부함으로써 북미정상회담을 회피하는 버티기 수법에 매달렸다.
 
그러나 미국의 버티기 수법은 결국 18년 만에 수명을 다하고 말았다. 이번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2차 북미고위급회담은 미국이 18년 동안이나 줄곧 매달려온 세 가지 버티기 수법이 모두 통하지 않게 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미국이 버티기 수법을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북측이 우라늄농축시설을 공개하고 핵탄두를 장착하는 전략미사일을 공개한 것에 있었다. 북측은 언제 어디서 개발하였는지 미국이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최첨단 우라늄농축시설을 녕변 핵시설 단지에 전격적으로 건설하고 이를 미국에게 공개하였고, 언제 작전배치하였는지 미국이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최첨단 핵전략미사일을 인민군 열병행진 중에 전격적으로 공개하였다. 그 놀라운 광경을 본 백악관 국가안보회는 겉으로 애써 태연한 척하였으나, 경악과 충격에 빠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북측은 2010년 11월 방북한 지그프리드 헤커 박사 일행에게 영변 우라늄 농축용 원심 분리기를 공개했다. 사진은 북측 원심분기와 같은 기종인 네덜란드 알메로 원심분리기.

△북측은 2010년 10월 10일 '당 창건 65돐 기념 경축 열병식'에서 핵전략미사일을 공개했다. (<연합뉴스> 2010년 10월 보도사진)

이제 마지막으로, 미국에게 치명적인 공세기회가 북측에게 남아있다. 북측의 마지막 공세기회란, 녕변의 우라늄농축시설에서 고농축우라늄을 대량생산하였음을 전격 발표하고, 미국의 정찰위성을 따돌린 채 제3차 지하핵실험을 실시하고, 최첨단 핵전략미사일 발사훈련을 실시하는 3중압박을 2012년에 예정해놓은 것이다.

2011년 10월 말 현재, 버티기 수법을 놓아버린 미국이 북미고위급회담을 서두르는 까닭은, 북측의 2012년 3중압박 공세를 예상하고 공포를 느끼기 때문이다. 

누구나 예견하는 것처럼, 주한미국군 철군은 북미관계의 근본적 변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북미관계 정상화와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이 실현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근본적 변화다.

북미관계의 적대성을 전제로 유지되어온 '한미동맹'이라는 이름의 미국의 대남지배체제는, 북미관계의 적대성이 해소되는 북미관계의 근본적 변화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다. '한미동맹'이라는 이름의 미국의 대남지배체제는 주한미국군 철군과정에서 무맥하게 무너져내릴 것이다.

어느 정도 예상을 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도무지 예측하기 힘든 근본적 변화가 일어날 때, 우리 사회변혁운동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근본적 변화를 예고하는 2012년을 앞두고 있는 진보정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은 무엇을 준비해놓았는가? (2011년 10월 21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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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18

다섯 가지 괴담유형과 소식통의 정체

진실의 말팔매 <38>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다섯 가지 괴담유형이 떠돌고 있다.

어느 때부터인가 이 땅의 언론매체들은 '북한소식'을 쏟아놓기 시작하였는데, 누구나 아는 것처럼, '북한소식'은 악독하고, 고통스럽고, 추악하고, 절망적인 모습으로 묘사된 괴담이다.

그런데 언론매체들이 거의 날마다 쏟아놓는 갖가지 '북한소식'을 뜯어보면 무정형적으로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정한 유형에 따라 계속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북한소식'은 다섯 가지 괴담유형으로 반복되는데, 폭압괴담, 기근괴담, 부패괴담, 범죄괴담, 타락괴담이 그것이다. 이 땅의 언론매체들이 쏟아내는 갖가지 '북한소식'들은 모두 이 다섯 가지 괴담유형 가운데 어느 한 유형에 속한다.

최근 남측 언론에서 나돌았던 것은 타락괴담이다. 이를테면, 북측 여학생들이 값비싼 휴대전화를 사려고 성매매를 한다느니, 또는 북측 여성들이 생활비나 용돈을 마련하기 위해 성매매에 나선다느니 하는 식의 타락괴담이 '북한소식'으로 둔갑하여 언론보도에 나온 것이다.

그러나 2011년 10월 17일 국방부에서 진행된 국회 정보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한 국방정보본부 관계자는 위의 괴담보도에 대한 국회의원들의 질문에 "사실무근이며, 루머에 불과하다"고 답변하였다.
 
다섯 가지 유형의 괴담보도를 읽어보면, "알려졌다", "파악됐다", "전해졌다", "했다고 한다"는 표현이 계속 나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남측 언론매체가 '북한소식'을 직접 취재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전해들은 괴담을 기사로 써냈음을 말해준다.

언론사 기자가 방북하여 취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언론사 기자가 누군가로부터 괴담을 제공받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명백하게도, 그 괴담들은 언론사 기자의 창작물이 아니라, 누군가가 다섯 가지 유형에 맞춰 체계적으로 꾸며내어 언론사 기자에게 정기 제공해오는 것이다.


드러난 괴담 제공자의 정체

괴담 제공자는 누구일까? 괴담 제공자의 정체는 대북소식통, 중간소식통, 내부소식통 세 부류로 나뉜다. 대북소식통이란 남측에 있는 소식통이고, 중간소식통이란 중국에 있는 소식통이고, 내부소식통이란 북측에 있는 소식통이다.

2011년 10월 10일 인터넷매체 <미디어오늘>의 고승우 전문위원이 쓴 폭로기사에 따르면, 대북소식통은 국정원 요원이다. 국정원이 대북정보를 독점한 유일한 기관이므로, 괴담도 거기서 만들어져서 언론사 기자에게 정기적으로, 반복적으로 제공되는 것이다.

국정원 소속 대북소식통은 내곡동에 있는 국정원 청사에 들어박혀 엽기적인 상상력을 동원해 괴담을 써내는 것이 아니다. 작가적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문인들도 작품 한 편을 구상하기 위해 기초자료를 수집하거나 현장을 답사하는 발품을 파는데, 상상력에서 문인보다 한참 뒤떨어지는 국정원 소속 대북소식통이 내곡동 청사에 들어박혀 끊임없이 괴담을 써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서울 내곡동 국정원 청사.

그래서 그들은 이따금씩 대북정보를 얻기 위해 모험을 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모험적 첩보활동을 감행하는 곳은 북측에 가까운 중국 국경지대다. 국정원 요원들은 여행객으로 위장하여 중국에 입국한 다음, 중국 공안기관의 눈을 피해 국경지대로 잠입하여 그곳에서 암약하는 중간소식통과 비밀접선을 한다. 중간소식통이란, 국정원에 매수된 중국 장기체류 남측 사람이나 국정원에 매수된 중국 조선족이다.

국경지대에서 암약하는 중간소식통은 북측을 오가는 보따리장수, 방문자, 관광객 등에게 은밀히 접근하여 떠도는 소문을 듣거나, 북측에 불법적으로 밀반입시킨 위성전화 또는 중국 유통 휴대전화를 통해 북측에 심어둔 내부소식통과 불법통화하는 식으로 첩보활동을 벌인다.

쉽게 말하면, 중간소식통은 중국에서 암약하는 고정간첩이고, 내부소식통은 북측에서 암약하는 고정간첩이다. 이 두 부류의 고정간첩이 암약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위성전화와 휴대전화의 보급이다. 그들에게 위성전화나 휴대전화는 유력한 간첩활동장비인 것이다.

이런 사태와 관련해, 아래와 같은 사례가 눈길을 끈다. 2011년 7월 20일 남측 언론매체들이 일제히 보도한 바에 따르면, 2010년 8월 국정원 4급 간부 2명이 중국 선양에서 조선족들을 매수해 북측 지도부의 정보를 수집하려다가 중국 국가안전부에 검거되었다.

이명박 정부는 중국에서 검거된 국정원 파견요원들을 남측으로 추방하는 식으로 석방해달라고 중국 정부에 요청하였으나, 중국은 그 요청을 거부하였다. 다급해진 국정원은 해외담당 1차장 전재만 씨를 중국에 급파해 중국 국가안전부 차장을 직접 만나 사과하고 추방형식으로 석방해달라고 간청하였어도, 중국 정부는 국정원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검거된 국정원 파견요원들은 간첩죄로 중국 창춘 감옥에 수감되었다.

또한 2010년 9월에도 중국에 잠입하여 간첩활동을 벌이던 한국군 정보기관 소속 현역장교가 검거되어, 1년 넘게 수감되었다가 범인 인도 형식으로 추방되어 남측에 돌아갔다. <도쿄신문> 2011년 10월 6일 보도에 따르면, 2011년 6월 국정원 요원 3명이 관광객으로 위장해 중국에 들어가 지린성 옌볜 조선족 자치주에서 대북첩보공작을 벌이다가 검거되어 간첩죄로 수감되었다.

원래 국정원이나 군첩보기관에 소속된 요원은 첩보공작을 훈련받고 중국에 잠입하므로, 중국 공안당국에 검거되는 경우보다 검거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따라서 국정원과 군첩보기관이 얼마나 많은 요원을 중국에 잠입시키는지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위의 정보를 종합하면, 내부소식통→중간소식통→국정원 파견요원→국정원 소속 대북소식통→언론사 기자→언론매체→남측 국민들로 이어지는 괴담조작유포경로가 드러난다.


괴담유포와 그 종말

위와 같은 조작유포경로를 통해 남측 사회에 퍼지는 괴담은 국민들에게 과연 먹혀들어가는 것일까? 황당무계하게 날조, 왜곡한 엽기적 유언비어이므로, 남측 국민들에게 먹혀들어가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게 아니다. 남측 국민들은 국정원이 조작유포하는 괴담에 기만당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첫째, 옛말에 열 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가 없다고 한 것처럼, 아무리 새빨간 거짓말이라도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들려주면 이성적 판단력이 차츰 잠식당해 어느 순간에 거짓말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나찌 독일의 패망과 함께 가족동반자살로 생을 마친 극악한 전범자 조셉 괴벨스(Joseph Goebbels)가 1933년부터 1945년까지 히틀러 밑에서 선전상을 지내는 동안 독일 국민들에게 끊임없이 괴담을 유포하여 그들을 파시즘체제에 순응하게 만들었던 끔찍한 과거경험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국정원 대북소식통은 괴벨스식 선전수법을 모방하여 대북괴담을 지속적으로 언론매체를 통해 유포하면 남측 국민대중의 두뇌 속으로 침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둘째, 편견을 가진 사람은 자기의 편견과 반대되는 정보를 들어도, 그것을 믿으려 하지 않고 기존 편견을 여전히 고수하면서, 편견에 부합하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 편견이 사람의 두뇌 속에 고착되어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국정원이 노리는 것이 바로 그러한 편견고착에 따른 바보 만들기다.

국정원의 괴담선전에 기만당한 사람은 괴담과 반대되는 객관적 사실을 물증으로 보여주어도 믿으려 하지 않으며, 심지어 북측에 가서 직접 자기 눈으로 괴담과 반대되는 현실을 목격해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 평소에 국정원 대북소식통으로부터 괴담을 제공받아 기사를 써온 남측 언론사 기자들이 평양을 다녀온 뒤에 쓴 기사를 읽어보면, 대북편견 고착현상이 사람을 어떻게 바보로 만들어 버렸는지 알 수 있다.

남측에서 민생경제파탄과 빈부격차 극대화가 국민대중을 고통과 불행으로 끌고 갈수록, 국정원은 내부소식통, 중간소식통, 대북소식통을 총동원하여 대북괴담을 더욱 광란적으로 조작유포할 것이다. 왜냐하면 민생경제파탄과 빈부격차 극대화로 고통과 불행을 겪는 남측 국민대중이 북측의 사회주의체제를 동경하지 않을까 하는 국정원의 걱정이 자꾸만 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괴담은 괴담일 뿐 현실이 아니다. 국정원의 괴담이 세상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나찌 선전상 괴벨스의 괴담유포가 결국 비참하게 종말을 고한 것처럼, 국정원의 괴담유포도 파멸될 것이다. (2011년 10월 18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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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15

어떤 성격의 당이 진보적 민주주의 실현하는가?

변혁과 진보 (50)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저평가된 민주노동당 강령개정의 의의

2011년 6월 19일 민주노동당 정책당대회에서 강령을 개정하였다. 민주노동당 강령개정의 의의는 당의 정치이념을 진보적 민주주의로 정식화하였다는 데 있다. 사회변혁을 포기하고 개량에 안주하는 비변혁적 사민주의도 아니고, 현실과 동떨어진 급진적 사회변혁을 꿈꾸는 좌파적 사회주의도 아니고, 오직 이 땅의 현실에 부합되는 과학적 사회변혁사상인 진보적 민주주의를 당의 정치이념으로 채택한 것은 거대한 정치적 의의를 가진다.

그런데 참 아쉽게도, 그처럼 거대한 강령개정의 정치적 의의가 저평가되어 있다. 민주노동당 당원들과 지지자들에게 알려져야 하는 것은, 강령개정을 통해 민주노동당이 진보적 민주주의를 정치이념으로 채택한, 전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정당으로 등장하였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자본주의를 사회적 시장경제와 보편적 복지로 개량하였다고 큰 소리를 쳐오던 세계 각국의 사민주의정당들이 자본주의세계체제를 강타한 대공황에 빠져 사회개량마저 중지한 채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이 땅의 민주노동당은 진보적 민주주의의 기치를 든 우리식 사회변혁의 새로운 전망을 제시한 것이다.

다른 한 편, 사회주의진영이 무너진 때로부터 20년 동안 세계 각국의 급진좌파정당들이 사회주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못한 대중의 처지를 외면한 채 자기들끼리 모여앉아 밀교적 언어를 속삭이고 있을 때, 이 땅의 민주노동당은 진보적 민주주의의 기치를 든 우리식 사회변혁의 새로운 전망을 제시한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강령을 개정하여 진보적 민주주의를 당의 정치이념으로 정식화하였을 때, 당내 좌파는 사회주의적 요소를 제거하는 우경화라는 논리를 들고나와 반대하였지만,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인식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당내 좌파가 모르고 있는 것은, 진보적 민주주의가 사회주의에서 이탈한 우경적 정치이념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실현해가는 긴 노정에서 사회주의 초급단계를 규정한 정치이념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진보적 민주주의를 당의 정치이념으로 정식화한 것은, 당의 강령에서 사회주의적 요소를 제거한 것이 아니라 당의 기존 강령에 들어있었던 사회주의적 요소를 이 땅에 전개될 사회변혁단계에 맞게 정식화한 것이다.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당의 강령에 집어넣느냐 마느냐 하는 용어선택문제만 지적하면서 우경화라고 비판한 것은 인식의 한계를 넘지 못한 오류였다.

  
왜 5% 선을 넘지 못하는가?

누구나 아는 것처럼, 모든 유형의 사회체제는 각기 그 사회체제에 부합하는 특정한 정치이념에 의해 구성되고 수립되고 유지되고 발전되는데, 그처럼 중대한 역할을 하는 정치이념을 실현하는 조직이 바로 정당이다.

그러므로 사회변혁사상을 해명한 정치이념을 실현하려는 정당이 없으면, 다시 말해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자기의 정당을 갖지 못하면, 낡은 사회체제를 새로운 사회체제로 바꾼다는 말은 공리공담으로 된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낡고 썩은 세상을 바꾸려 한다면 우선 자기의 정당부터 세워야 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만고불변의 진리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성격의 정당을 건설할 것인가 하는 데 있다. 당건설에서 과오를 저지르면 사회변혁의 길이 막혀버리고, 당건설에서 시행착오가 생기면 사회변혁이 지체되거나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성격의 당을 건설하는가 하는 것은 사회변혁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적으로 중대한 문제다.

민주노동당은 어떤 성격의 당으로 건설되었는가? 11년 전 민주노동당을 창당할 때, 당의 성격을 규정한 개념은 노동계급의 중심성이었다. 민주노동당은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창당된 정당인 것이다. 

 당내 좌파는 노동계급의 중심성이라는 개념을 노동자당의 성격을 나타낸 것으로 과도하게 해석하였지만, 노동계급의 중심성을 실현한 당과 노동자당은 동일하지 않다. 노동자당은 사회주의를 당의 정치이념으로 제시한 정당이므로, 노동계급의 중심성을 실현한 정당보다 더 '왼쪽'에 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 건설에서 중심이 된 노동계급이란, 이 땅의 노동계급 일반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노동자들, 구체적으로 말하면 진보의식화된 민주노총 조합원들을 뜻한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민주노동당 건설의 기초로 되었던 노동계급의 중심성이란 진보의식화된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중심성을 뜻한다.

여기서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는, 민주노동당 건설의 중심으로 되었던 민주노총이 이 땅의 노동계급 가운데 불과 5% 남짓밖에 포괄하지 못하는 약체노조이며, 진보의식화된 조합원은 그런 약체노조 안에서도 소수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민주노동당은 약체노조의 소수 조합원들을 중심으로 창당된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강력한 대형노조의 다수 조합원들이 아니라 약체노조의 소수 조합원들을 중심으로 창당된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적 한계였다.

그런 한계를 안고 있는 민주노동당이 각계각층 대중을 이끌어 갈 정치적 영도역량을 발휘해주기를 누군가가 바란다면, 그것은 현실적 한계를 무시한 너무 무리한 기대가 아닐 수 없다. 약체노조의 소수 조합원들이 창당기에 축성한 당의 기초는 각계각층 대중을 포괄하기에는 너무 협소하고 취약했다.

그런 한계를 돌파하여 진보적 대중정당으로 장성, 발전되기 위해 민주노동당에게 절실히 요구된 것은 각계각층 대중의 포괄성이었으나, 민주노동당은 각계각층 대중의 포괄성을 실현하지 못했다. 왜 실현하지 못하였을까?

민주노동당은 노동자당도 아니면서 노동자당처럼 국민대중에게 알려졌기 때문에 각계각층 대중이 민주노동당에 대해 거리감을 느낀 것이다. 이 땅의 대중들이 민주노총에게 느끼는 거리감과 민주노동당에 대해 느끼는 거리감은 정비례한다.

이러한 두 종류의 거리감은 그 당의 대중적 지지기반을 결정적으로 제약하였다. 노동계급의 중심성을 실현한 정당이라는 자부심을 안고 창당된 민주노동당이 11년이 지나도록 고작 5% 지지율을 맴도는 정파통합당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

10년이 넘게 정파통합당 수준이라도 꾸준히 유지해온 것이 장하다고 여기는 자화자찬을 늘어놓을 때가 아니다. 그런 자화자찬에 만족하는 것은 앞으로도 여전히 정파통합당 수준에 머물러도 좋다는 식의 자기 혁신 포기와 다르지 않다. 두 말할 나위 없이, 진보가 자기 혁신을 포기하면 정체와 퇴보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면 현 시기 민주노동당에게 요구되는 자기 혁신은 무엇일까? 명백하게도, 그것은 노동계급의 중심성과 각계각층 대중의 포괄성을 상호결합시키는 혁신이다. 민주노동당은 그런 자기 혁신의 길로 나아가야 정파통합당 수준을 뛰어넘어 위력적인 진보적 대중정당으로 강화, 발전될 수 있다.

민주노동당은 노동계급의 중심성과 각계각층 대중의 포괄성 가운데서 전자만 생각하고, 후자를 망각하는 전략적 오판에서 벗어나야 한다.

  
당이 자기를 혁신하는 길, 대중에게 물어보라

문제의 핵심은, 각계각층 대중의 포괄성을 실현하는 민주노동당의 자기 혁신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논할 때 우선 주목하는 것은, 당의 자기 혁신이란 당지도부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각계각층 대중의 객관적 평가에 따라 실현된다는 점이다. 당이 자기를 혁신할 때 빠지기 쉬운 주관주의 함정을 피하고 대중적 관점에 자기를 세워야 할 필요가 있다.

대중적 관점에 자기를 세우고, 각계각층 대중의 객관적 평가에 따라 실현하는 민주노동당의 자기 혁신은 다른 것이 아니라 민주노동당을 각계각층 대중의 포괄성을 실현하는 새로운 정당으로 재창당하는 것이다. 그런 재창당이 자기 혁신의 실천적 내용이다.

민주노동당이 각계각층 대중의 포괄성을 실현하는 새로운 정당으로 재창당되려면, 지금으로서는 국민참여당과 합당하는 수밖에 없다. 다른 대안은 찾을 수 없다.

현실이 그러한 데도, 민주노동당의 재창당 문제를 논하면서 민주노총을 택할 것이냐 아니면 국민참여당을 택할 것이냐는 식의 양자택일을 강박하는 것은, 민주노동당이 왜 자기 혁신을 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한심한 넋두리다.

△2011년 9.월 25일 개최된 민주노동당 임시당대회 대회장 모습 (<진보정치> 2011년 9월 25일 보도사진)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과 국민참여당 사이에서 그 무슨 양자택일 따위를 고민할 것이 아니라, 정파통합당으로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국민참여당과 합당하여 자기를 혁신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사리분별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전자를 버리고 후자를 택할 것이다.

그런데 민주노동당 안팎에서는 국민참여당과의 합당을 반대하거나, 또는 진보신당 탈당파와 먼저 통합하고 국민참여당과 나중에 합당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견해들은 대중적 관점이 아니라 주관주의적 관점에 자기를 세운 판단착오다.

△2011년 9월 25일 개최된 민주노동당 임시당대회 안건 표결 장면 (<진보정치> 2011년 9월 25일 보도사진)

참여당과의 합당 반대론이나 진보신당 탈당파와의 통합 우선론은 대중의 의사와 동떨어진 주장이다. 광화문로에서 불특정 행인들에게 물어봐도 그렇고, 민주노총 일반 조합원들에게 물어봐도 그렇다. 이처럼 명백한 현실을 외면하고 대중의 기대와 요구와 어긋나는 주장을 고집하는 것은 당의 자기 혁신을 사실상 거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민주노동당이 각계각층 대중의 포괄성을 실현하는 새로운 정당으로 재창당되어 자기 혁신의 길로 힘있게 전진할 때, 바로 그렇게 할 때 민주노동당의 정치이념으로 정식화된 진보적 민주주의의 실현을 현실적으로, 구체적으로 전망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노동당 안팎의 좌파들이 진보적 민주주의를 당의 정치이념으로 정식화한 것을 우경화라고 비난한 것이 오류인 것처럼, 노동계급의 중심성과 각계각층 대중의 포괄성을 상호결합시킨 당건설노선을 두고 노동계급의 중심성을 폐기한 우경노선이라고 비난하는 것도 오류다.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할 진보적 대중정당은 노동계급의 중심성과 각계각층 대중의 포괄성을 상호결합한 새로운 진보통합당이다. 진보적 민주주의의 기치를 든 당원들과 지지자들은 그 두 가지 성격을 상호결합한 재창당에 추진동력을 불어넣어야 할 것이다. (2011년 10월 15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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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14

뒤륌이 밀쌈으로 바뀐 사연

진실의 말팔매 <37>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패스트 푸드(fast food)를 북측에서는 속성음식이라 한다. 남측에서는 간편식이라는 말을 쓰는데, 간편식은 재빨리 만들어 먹거나 또는 이미 조리되어 있어서 간편하게 먹는 모든 식품을 가리키는 개념이므로 속성음식보다 더 넓은 개념이다.

따라서 패스트 푸드를 간편식이라는 말보다 속성음식이라는 말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발음하기 힘든 FP로 발음하여 past pood라고 엉터리로 발음하는 한심한 짓은 그만두고, 남측에서도 북측에서 그런 것처럼 속성음식이라는 우리말을 쓰면 말하기도 쉽고 듣기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남측 국민들에게 속성음식이라면 대뜸 햄버거나 핏자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핏자(pizza)를 남측에서는 피자라고 읽고 쓰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낱말 앞에서 된소리(accent)가 나기 때문에 피자가 아니라 핏자라고 읽고 써야 옳다. 북측에서는 삐짜라고 읽고 쓰는데, 그것은 이탈리아 원어음에 가장 가깝게 나는 소리다.

원래 핏자는 이탈리아 음식이므로 그 나라 발음으로 삐짜라고 읽고 써야 옳다. 예컨대, 미국사람들이 우리 민족음식인 김치를 일본식으로 kimuchi라고 읽고 쓰면 잘못이고, 김치라는 발음에 가장 가깝게 kimchi라고 읽고 써야 옳은 것과 같은 이치다.

이탈리아 음식이 그 나라에서 남측에 전래된 것이 아니라, 미국사람들이 미국식으로 변조한 사이비 이탈리아 음식을 남측에 전해준 것인데도, 그런 사연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삐짜를 핏자라고도 발음하지 못하고 피자라는 엉터리 발음으로 부르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다.

속성음식에는 미국식으로 변조된 햄버거나 핏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식 속성음식만 아는 사람들의 시야가 좁아서 그렇지, 세계 각국의 음식문화를 살펴보면, 제각기 독특한 맛을 자랑하는 고유한 속성음식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세계 각국의 여러 속성음식들 가운데서 뒤륌(dürüm)이라는 속성음식을 맛본 사람은 남측에서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햄버거나 핏자와 마찬가지로 뒤륌도 속성음식들 가운데 하나다. 뒤륌은 어느 나라의 전통적 속성음식일까?

뒤륌은 터키 국민들이 즐겨 먹는 속성음식이다. 여기서도 터키라는 나라이름이 눈에 거슬린다. 원래 그 나라사람들은 자기 나라를 뛰르끼예(Türkiye)라고 부르는데, 무식한 미국사람들이 뛰르끼예라고 발음하기 힘드니까 제멋대로 터키(Turkey)라고 부른다.

원래 터키는 미국의 최대 명절인 추수감사절에 잡아 요리하는 칠면조라는 뜻이다. 남측에서 미국식 엉터리 발음을 따라 터키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이고, 북측에서 현지 나라이름을 따라 뛰르끼예라고 부르는 것은 옳다.

우리 민족의 고유한 음식인 김치나 비빔밥이 지방에 따라 특색있게 분화, 발전되어온 것과 마찬가지로, 터기의 고유한 속성음식인 뒤륌도 지방적 특색을 지니고 분화, 발전되었다. 터키 수도인 앙카라에서는 소슬루 뒤륌(Soslu dürüm)을 즐겨먹고, 이스탄불에서는 까살리 뒤륌(Kasarli dürüm)을 즐겨먹는다.
 
소슬루 뒤림(Soslu dürüm)

곧추 세워놓은, 길이가 긴 쇠꼬챙이에 양고기 또는 닭고기를 썰지 않고 통째로 끼워 빙빙 돌려가면서 오랜 시간 동안 불에 구워낸 고기가 뒤륌에 들어가는데 그렇게 구운 고기를 되너 케밥(düner kebab)이라 한다.

잘 구워진 되너 케밥을 칼로 잘게 썰어서 토마토, 홍당무, 양파, 다른 채소들과 함께 얇은 빈대떡처럼 생긴 쌈에 말아서 내오면 그게 바로 뒤륌이다. 터키 국민들이 즐겨먹는 뒤륌은 식당에서만 파는 것이 아니라 노점상들도 파는 대중음식이다.

2011109<조선중앙텔레비죤>이 방영한 8시 보도시간에 놀라운 광경이 나타났다. 평양 시민들이 터키 국민들이 즐겨먹는 뒤륌을 맛있게 먹는 장면이 나온 것이다. 북측의 인민봉사총국에서 운영하는 이동식 판매대에서 뒤륌과 똑같이 생긴 속성음식을 팔고 있었다. 그 속성음식에 붙인 우리말 이름은 밀쌈이다.

평양 곳곳에 등장한 이동식 밀쌈봉사매대들에서는 얼굴에 흰 마스크를 쓰고, 양손에 하얀 고무장갑을 끼고,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산뜻한 판매원 복장을 한 봉사원들이 밀쌈을 팔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줄을 지어 밀쌈을 사 먹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평양 창광음식점거리 야외밀쌈매대 봉사원과 밀쌈을 사러 온 시민들
(<조선중앙통신> 2011년 9월 27일 영상보도 장면)

현장에 나간 여성 방송원이 인민봉사총국 관리와도 대담하고, 이동식 밀쌈봉사매대에서 일하는 봉사원과도 대담하고, 밀쌈을 사 먹는 각계층 시민들과도 대담하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관리하는 사람이나 봉사하는 사람이나 시민들에게서 즐거움과 만족감이 넘치고 있었다.

북측에서는 어떻게 뒤륌을 밀쌈으로 만드는 기발한 착상을 하였을까? <조선신보> 2011921일 보도에 따르면, 20113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뒤륌을 우리식 밀쌈으로 개발하여 인민들에게 속성음식으로 공급하자고 제안하였고, 그에 따라 뒤륌을 우리식 밀쌈으로 개발하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되너 케밥 조리법을 습득하기 위해 터키에서 요리사를 평양으로 초청하여 강의를 받았다고 한다. 북측에서는 양고기 대신 닭고기를 되너 케밥으로 조리한 뒤에, 양배추, 토마토, 홍당무 같은 채소를 넣고 단된장으로 간을 맞춘다고 한다. 그렇게 우리식으로 만들어내었으니 그것은 터키식 뒤륌이 아니라, 우리식 밀쌈이다.

원래 밀쌈은 이번에 북측에서 뒤륌을 우리식으로 개발한 새로운 속성음식이 아니라 오래 전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전통음식이었다. 우리 민족의 풍습을 적은 고서 '동국세시기'에는 음력 66일 유두에 연병(連餠)을 먹는 풍습이 있다고 씌여있는데, 그것이 밀가루로 만든 전병(煎餠)을 부치고 거기에 소를 넣어 만든 밀쌈이다.

밀쌈에는 고기와 각종 채소가 들어가므로, 고기가 귀했던 조선왕조시기에는 대중음식이 아니라 궁중음식이었다. 2011103일 뉴욕 맨해튼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열린 '조선의 왕, 뉴욕에 가다'라는 제목의 행사에서 미국사람들에게 선보인 조선왕조 궁중음식들 가운데 밀쌈이 들어있다.

지금 북측에서는 그런 밀쌈을 대량생산하여 북측 인민들에게 공급하고 있다. 평양시 만경대구역에 있는 금성식료공장에 첨단설비로 꾸려놓은 현대적인 생산공정에서 대량생산된 밀쌈은 평양 시내 각 식당들과 이동식 봉사매대로 수송되고, 거기서 일하는 봉사원들이 즉석에서 다시 가열하여 북측 인민들에게 판매하는 것이다.


△밀쌈을 생산하는 금성식료공장 (<조선중앙통신> 2011년 9월 27일 영상보도 장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우리식 밀쌈을 만들어보라고 지시한 때로부터 밀쌈이 생산되기 시작한 815일까지 다섯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1198일 금성식료공장을 현지지도하면서 밀쌈의 생산현황과 공급체계, 밀쌈에 대한 인민들의 평가 등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 맛과 영양이 풍부할 뿐 아니라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우리식 밀쌈이 북측 인민들 속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는 현장 간부들의 보고를 받고 생산증대에 더 많은 힘을 넣도록 독려하였다.

그리하여 올해에 매일 밀쌈 4,000개씩 생산하여 판매봉사시설로 공급하는 것을 내년 4월부터는 매일 10,000개씩 생산하여 공급하게 된다고 한다. 또한 내년부터는 밀쌈에 들어가는 되너 케밥을 닭고기만이 아니라 소고기, 돼지고기, 오리고기로도 만들게 된다고 한다.

△전용 꼬치구이로 구워지는 분육된 닭고기 덩어리(<조선신보> 2011년 9월 21일 보도사진)

옛날에는 궁궐에서 왕족들이나 맛보던 궁중음식 밀쌈이 이제는 터키식 조리법으로 개량되어 북측 인민들이 즐겨먹는 대중음식으로 다시 태어났으니 세상이 바뀌었어도 크게 바뀌었다. 2012년을 앞두고 북측 인민들의 식생활이 풍부해지고 다양해지고 있다. (20111013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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