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0/21

근본적 변화는 어디서 일어나는가?

변혁과 진보 (51)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북미관계의 본질은 외교가 아니다

백악관은 진실 감추기에 급급하고, 미국 언론계는 사실왜곡에 이골이 났지만, 그들이 아무리 감추고 왜곡해도 북미관계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통일뉴스>에 월요일마다 연재하는 나의 글들에서 북미관계 변화동향을 자세히 논해오고 있으므로, 이 글에서 그에 대한 분석을 재론할 필요는 없다. 이 글에서 논하는 것은 북측이 북미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북측이 북미관계를 변화시킨다면, 미국도 그 관계를 변화시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북미관계는 북측에 의해 일방적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미국은 북미관계의 변화를 거부하고 적대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데 집착하기 때문이다.

북측은 왜 북미관계를 변화시키려는 것일까?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58주년이 되던 2011년 10월 1일 <로동신문>에 실린 기사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기사 일부를 원문 그대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

"이 범죄적 '조약'에서 미국은 저들의 륙, 해, 공군을 남조선의 '령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규제하고 '본 조약은 무기한 유효하다'고 쪼아박았다. 이로써 미국은 남조선에 대한 영구강점을 합법화하고 조선반도와 동북아시아지역에서 패권적 지위를 공고히 하려고 꾀하였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기관지인 <로동신문>의 논조는 조선로동당의 의사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는데, 위의 기사에 따르면, 북측은 미국군이 남측에 주둔하는 것이 아니라 남측을 강점하였다고 보는 것이 확실하다. 위의 기사제목에 나와있는 북측 표현을 인용하면, 주한미국군 주둔은 "미제침략군의 남조선 강점"으로 된다.

주둔과 강점은 하늘과 땅만큼 커다란 차이를 지닌 개념들인데, 주둔이란 어떤 지역에 머문다는 뜻이고, 강점이란 강제로 차지하였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일제가 한반도를 강제로 식민지화한 것을 가리켜 강점이라 한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는 한반도를 강점한 자기 군대를 "조선주둔군"이라 부르면서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일본군의 조선 주둔이 아니라 일제침략군의 조선 강점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북측도 미국군의 남측 주둔을 "미제침략군의 남조선 강점"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미국군의 남측 주둔을 "미제침략군의 남조선 강점"으로 규정한 북측의 인식은, 북미관계의 근본성격을 결정하는 것이고, 북미관계의 변화방향과 변화방식을 결정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북측의 관점에서 보는 북미관계의 근본성격은 사회주의 대 제국주의의 불상용적인 적대성이다.

또한 북측이 북미관계에서 추구하는 변화방향과 변화방식은 국제관계에서 통용되는 외교활동이나 정치협상이 아니라 비타협적인 반제투쟁이다. 요컨대, 북측은 자기 영토를 강점한 제국주의국가를 상대로 외교활동이나 정치협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반제투쟁을 벌이는 것이다.


종전되지 않고 정지된 전쟁

사회주의국가가 제국주의국가에 맞서 싸우는 반제투쟁은 반제군사전선에서 전개되는 것이므로, 반제투쟁은 곧 반제무력투쟁이며, 반제무력투쟁의 최고 발전단계는 반제혁명전쟁이다.

세계혁명사에서 반제혁명의 두 가지 성격은 반제사회주의수호혁명과 반제민족해방혁명으로 나타나는데, 반제혁명전쟁이 사회주의수호전으로 되는 경우도 있고 민족해방전쟁으로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 글에서 논하는 북측의 반제혁명은 "미제침략군의 남조선 강점"을 종식시키는 것이므로, 북측이 말하는 그 혁명의 기본성격은 반제민족해방혁명이고, 그 혁명의 수행방식은 반제민족해방전쟁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전쟁관이다. 전쟁은 악이고 평화는 선이라는 이분법적 단순논리는, 일제침략군의 조선 강점을 종식시키고 나라의 자주독립을 실현하기 위해 조선독립군, 광복군, 조선인민혁명군이 각각 수행한 항일전쟁이 정의의 전쟁(just war)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커다란 오류를 불러온다.

개인의 정당방위가 합법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나라가 자위권을 발동하는 정의의 전쟁도 국제법적으로 합법화된다.

이러한 전쟁관의 시야에서 북미관계를 다시 바라보면, 북측은 "미제침략군의 남조선 강점"을 종식시키려는 자기들의 반제혁명전쟁을 정의의 전쟁으로 규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북한의 남침도발"을 규탄하는 남측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해하기 힘들지만, 남침도발이냐 아니면 정의의 전쟁이냐 하는 문제는, 미국군이 남측에 주둔하는 것인가 아니면 남측을 강점한 것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 3년 동안 북측과 미국이 벌인 격렬한 전면전을 남측에서는 6.25전쟁으로 부르지만, 북측에서는 조국해방전쟁으로 부른다. 북측이 6.25전쟁을 조국해방전쟁으로 부르는 까닭은, 그 전쟁의 성격을 "미제의 강점지역을 해방하기 위한 전쟁"으로 규정하였기 때문이다.

남측에서 6.25전쟁으로 부르고, 북측에서 조국해방전쟁으로 부르는 그 전쟁이 종전되지 않고 정지된 것은, 북측이 반제혁명전쟁을 아직 끝내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정전상태가 완전히 종식되고 국제법적으로 종전이 성립될 때 북측의 반제혁명전쟁도 끝날 것이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남일 조선인민군 대장과 미국 육군 해리스 중장.

전쟁위험을 안고 있는 불안정한 정전체제를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한반도 평화실현을 북측의 관점에서 해석하면, 북측이 반제혁명전쟁으로 "미제침략군의 남조선 강점"을 종식시킨다는 뜻이다.

북측은 "미제침략군의 남조선 강점"을 종식시켜야 한반도 평화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고 있으며, 따라서 북측은 1953년 정전체제 수립 이후 58년 동안 자기의 반제군사전선을 견고하게 구축하여 "미제침략군의 남조선 강점"을 종식시키기 위한 반제혁명전쟁을 계속 준비해온 것이다.

일제강점기 반제혁명전쟁의 전통을 계승할 뿐 아니라, 반제혁명전쟁을 수행하는 반제군사전선을 중심에 두고 사회주의건설을 추진하는 북측 특유의 사회주의정치방식을 가리켜 선군정치(Songun Politics)라 한다. 


수명 다한 버티기 수법, 다가오는 근본적 변화

며칠 뒤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2차 북미고위급회담이 열린다.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을 단장으로 한 북측 정부대표단과 이번에 교체된 글린 데이비스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를 단장으로 한 미국 정부대표단이 그 회담에서 북미관계 현안을 집중 논의할 것이다.

그런데 북측이 "미제침략군의 남조선 강점"을 종식시키기 위한 반제혁명전쟁을 준비해왔다면, 북미고위급회담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역사적 경험을 살펴보면, 외국군대의 영토강점이 격퇴전으로 종식되는 경우도 있었고 철군담판으로 종식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미제침략군의 남조선 강점"도 반제혁명전쟁으로 종식될 수도 있고, 철군담판으로 종식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릴 북미고위급회담은 철군담판을 준비하는 예비회담으로 볼 수 있다.

외국군대의 영토강점을 격퇴전으로 종식시키는 것보다 전쟁을 하지 않고 철군담판으로 종식시키는 것이 비할 바 없이 유리하다. 북측이 북미고위급회담을 미국에게 강하게 요구하여 기어이 관철시킨 까닭은, "미제침략군의 남조선 강점"을 반제혁명전쟁으로 종식시키는 것보다 철군담판으로 종식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세계전쟁사에서 외국군대의 영토강점은 어떤 조건에서 담판으로 종식되는 것일까? 다른 나라 영토를 무력으로 강점한 외국군대가 전쟁을 하더라도 이길 수 없고, 되레 혹심한 전쟁피해를 입게 되는 경우 전쟁을 피하고 담판으로 철군을 합의함으로써 영토강점이 종식된다.

이러한 경험을 한반도 정세에 대입해보면, 미국이 북측과 전쟁을 하더라도 이길 수 없고, 되레 미국이 혹심한 전쟁피해를 입게 된다는 점이 명백해질 때, 오직 그런 조건에서만 미국은 북측의 철군담판 요구에 응할 것이다.

이제껏 재래식 무기만으로도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였던 북측이 절대무기인 핵무기를 보유한 군사강국으로 등장한 현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천문학적인 재정적자로 파산위기에 내몰린 미국이 대폭적인 군비감축을 추진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거기에 더해진 오늘, 미국은 자기들이 북측과 전쟁을 하더라도 이길 수 없고, 되레 미국이 혹심한 전쟁피해를 입게 될 것임을 깨달았다. 이것은 미국이 북측이 요구하는 철군담판에 끌려나갈 수밖에 없음을 예고한다.
 
철군담판이란 북측의 표현을 빌리면 "미제침략군의 남조선 강점"을 종식시키는 담판이고, 미국의 표현을 빌리면 주한미군군 철군을 공약하는 담판이다. 그런 담판은 당연히 두 나라의 최고결정권자가 만나 대타결을 이끌어내야 성사되는 것이므로, 철군담판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오바마 대통령의 정상회담에서 비공개로 진행되리라는 점은 자명한 이치다.

그런데 1993년 이후 18년 동안 북측이 북미정상회담 개최를 미국에게 요구해왔는데도 그 회담은 열리지 않고 있다. 왜 열리지 않은 것일까? 간단히 말하면, 미국이 북미정상회담 개최를 회피하는 수법을 지난 18년 동안 계속 쓰면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버텨왔기 때문이다. 미국의 버티기 수법은 세 가지였다.

첫째, 미국은 요코하마에 배치한 7함대 항모강습단과 오키나와에 배치한 제3해병대원정군 상륙강습단을 동원한 대규모 북침전쟁연습을 주기적으로 벌여 북측과의 군사적 긴장을 유지함으로써 북미정상회담을 회피하는 버티기 수법에 매달렸다.

둘째, 미국은 양자회담, 3자회담, 4자회담, 그리고 나중에 급해지자 6자회담으로까지 회담범위를 확대하면서 북미정상회담을 회피하는 버티기 수법에 매달렸다.

셋째, 미국은 6자회담에서 합의한 9.19 공동성명을 자기들이 이행하지 못하게 되자, '전략적 인내'라는 거짓명분을 내걸고 회담 자체를 전면 거부함으로써 북미정상회담을 회피하는 버티기 수법에 매달렸다.
 
그러나 미국의 버티기 수법은 결국 18년 만에 수명을 다하고 말았다. 이번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2차 북미고위급회담은 미국이 18년 동안이나 줄곧 매달려온 세 가지 버티기 수법이 모두 통하지 않게 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미국이 버티기 수법을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북측이 우라늄농축시설을 공개하고 핵탄두를 장착하는 전략미사일을 공개한 것에 있었다. 북측은 언제 어디서 개발하였는지 미국이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최첨단 우라늄농축시설을 녕변 핵시설 단지에 전격적으로 건설하고 이를 미국에게 공개하였고, 언제 작전배치하였는지 미국이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최첨단 핵전략미사일을 인민군 열병행진 중에 전격적으로 공개하였다. 그 놀라운 광경을 본 백악관 국가안보회는 겉으로 애써 태연한 척하였으나, 경악과 충격에 빠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북측은 2010년 11월 방북한 지그프리드 헤커 박사 일행에게 영변 우라늄 농축용 원심 분리기를 공개했다. 사진은 북측 원심분기와 같은 기종인 네덜란드 알메로 원심분리기.

△북측은 2010년 10월 10일 '당 창건 65돐 기념 경축 열병식'에서 핵전략미사일을 공개했다. (<연합뉴스> 2010년 10월 보도사진)

이제 마지막으로, 미국에게 치명적인 공세기회가 북측에게 남아있다. 북측의 마지막 공세기회란, 녕변의 우라늄농축시설에서 고농축우라늄을 대량생산하였음을 전격 발표하고, 미국의 정찰위성을 따돌린 채 제3차 지하핵실험을 실시하고, 최첨단 핵전략미사일 발사훈련을 실시하는 3중압박을 2012년에 예정해놓은 것이다.

2011년 10월 말 현재, 버티기 수법을 놓아버린 미국이 북미고위급회담을 서두르는 까닭은, 북측의 2012년 3중압박 공세를 예상하고 공포를 느끼기 때문이다. 

누구나 예견하는 것처럼, 주한미국군 철군은 북미관계의 근본적 변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북미관계 정상화와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이 실현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근본적 변화다.

북미관계의 적대성을 전제로 유지되어온 '한미동맹'이라는 이름의 미국의 대남지배체제는, 북미관계의 적대성이 해소되는 북미관계의 근본적 변화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다. '한미동맹'이라는 이름의 미국의 대남지배체제는 주한미국군 철군과정에서 무맥하게 무너져내릴 것이다.

어느 정도 예상을 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도무지 예측하기 힘든 근본적 변화가 일어날 때, 우리 사회변혁운동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근본적 변화를 예고하는 2012년을 앞두고 있는 진보정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은 무엇을 준비해놓았는가? (2011년 10월 21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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