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6/30

철군은 사회변혁의 결정적 계기다

변혁과 진보 (38)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철군문제에 대한 발상을 확장하라

8.15 해방 이전 식민지 조선에서 일제의 조선주둔군이 그러하였듯이, 오늘 미국군도 이 땅에서 무기한 주둔을 획책하는 중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외국군이 주둔한 나라의 주권이 완전히 강탈당하거나 또는 심각하게 침해당하는 것은 복잡한 방정식으로 해명할 필요조차 없는 일반상식이다.

이 땅의 주인인 국민대중 모두가 전쟁반대와 평화실현을 절실히 요구하는 데도, 미국이 자국 군대를 동원하여 위험천만한 북침전쟁연습을 끊임없이 강행하면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는 것 자체가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범죄행위다. 미국의 그런 범죄행위를 뻔히 보면서도, 주한미국군 철군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지 않는 것은 주권문제에 대한 몰이해와 무지 때문이다.

△2010년 7월과 11월 북침전쟁훈련을 전개하기 위해 한반도해역에 출몰한 미국 해군 핵항공모함 조지 워싱턴호  (연합뉴스 보도사진) 

새삼스럽게 재론할 필요 없이,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은 주한미국군 철군을 반평화적 정전체제와 반통일적 분단체제를 해체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인식해왔다. 철군문제를 평화문제와 통일문제에 결부시켜 인식해온 것이다. 두루 알려진 바와 같이, 북측도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은 철군문제를 평화문제와 통일문제에만 결부시키는 견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변혁문제에 결부시키는 쪽으로 발상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에서 비핵평화를 실현하고, 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중심과업으로 철군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철군문제를 진보적 민주주의 변혁의 발전경로에 포함시킬 이론적 해명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땅의 좌파정치활동가들은 철군문제와 사회변혁문제를 결부시키지 않는다. 독일의 좌파당이 주독미국군 철군과 독일의 사회변혁을 서로 무관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유럽식 사회변혁론을 공부한 이 땅의 좌파정치활동가들도 주한미국군 철군문제가 사회변혁과 동떨어진 민족주의 정치과업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우리의 사회변혁문제를 정확하게 해명해주지 못하는 유럽식 사회변혁론을 비판적 검토 없이 받아들임으로써 생겨나는 오해와 편견이다. 이를테면, 미국-독일의 관계는 지배-예속관계가 아니라 전형적인 동맹관계이므로, 미국군의 독일 주둔이 독일의 사회변혁을 가로막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독일의 좌파당은 주독미국군 철군을 사회변혁경로에 포함시킬 필요가 없다. 독일의 좌파당만이 아니라, 이제까지 유럽에서 등장한 그 어떤 사회변혁론도 외국군 철군문제를 사회변혁론에 들여놓지 않았다. 그들의 사회변혁론은 외국군 철군문제를 시야 밖으로 밀어놓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사회변혁론은 우리 자신이 이 땅의 현실에 기초하여 주체적으로 탐구하는 것이지, 다른 나라의 사회변혁론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유럽의 좌파정당들과 좌파정치활동가들은 유럽주둔 미국군 철군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유럽식 사회변혁론을 따르고,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은 주한미국군 철군문제를 진보적 민주주의 변혁의 중요과업으로 제기한 우리식 사회변혁론을 따른다. 


자주적 선거를 향한 정치적 상상력

주한미국군 철군과 진보적 민주주의 변혁은 어떻게 결부되는 것일까? 블로그 '변혁과 진보'에서 여러 차례 논한 것처럼, 진보적 민주주의 변혁은 두 단계로 수행되는 사회변혁이며, 그 첫 단계는 사회성격을 개조하면서 사회체제개조를 준비하는 단계다.

사회성격을 개조하는 진보적 민주주의 변혁의 주체는 이 땅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며,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사회변혁역량은 그들의 정치세력화를 실현한 정당으로 존재한다. 정치이념지형으로 보면, 그런 정당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강령으로 제시한 중도좌파정당이다. 여기까지는 진보정치활동가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이다.

진보적 민주주의를 강령으로 제시한 중도좌파정당이 집권하여 새로운 정권을 세우면, 그 정권이 진보적 민주주의 변혁을 추진궤도에 올려놓게 되는데,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중도좌파정당의 집권경로에 대한 전망이다.

1960년 4월이나 1987년 6월에 이 땅에서 그러하였던 것처럼, 민중항쟁이 일어나 낡고 부패한 정권이 무너지고 새로운 정권을 세우기 위해 실시되는 선거는, 민중항쟁이 일어나건 일어나지 않건 관계 없이 그 어떤 경우에도 피할 수 없는 민주주의적 절차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정권은 선거라는 민주주의적 절차를 통해서 집권하는 것이며, 집권 이후 진보적 개헌을 추진함으로써 진보적 민주주의 변혁을 전면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도 진보정치활동가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글에서 제기하는 또 다른 문제는, 선거가 미국의 개입을 배제한 자주적 선거인가 아니면 미국이 개입한 비자주적 선거인가 하는 것이다. 미국이 개입한 비자주적 선거를 백 번 실시해도, 중도좌파정당은 선거를 통해 집권하지 못한다. 이것은 필연이다. 미국이 이 땅의 선거에 비밀리에 개입하는 목적은 중도좌파정당 집권을 저지하는 것에 집중되기 때문에 비자주적 선거는 언제나 무용지물인 것이다.

비록 미국이 개입하더라도 중도좌파정당이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비과학적인 전망이야말로 선거혁명론을 부추기는 우경적 공상과 다르지 않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이 선거혁명론이라는 우경적 공상을 거부하는 것은, 모든 선거를 무분별하게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중도좌파정당 집권을 저지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개입하는 비자주적 선거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미국의 개입을 차단한 자주적 선거는 어떤 조건에서 가능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미국의 개입을 차단한 자주적 선거는 철군 이후에나 가능하다. 그렇게 판단하는 까닭은 아래와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미국의 개입을 차단한 자주적 선거는 철군 이후에나 가능
다.  2011년 3월 키 리졸브/ 독수리훈련 중인 미국군 (합동뉴스
보도사진)
한 마디로 말해서, 철군은 동맹에서 벗어나는 탈동맹이다. 철군 이후 탈동맹상태에서도 여전히 주한미국대사관이 존재하고, 미국 중앙정보국 한국지부도 존재하겠지만, 그들의 정치개입과 비밀공작은 당연히 위축될 것이다.

지금 미국군을 주둔시킨 독일과 일본에서 간혹 드러나는 미국의 정치개입과 비밀공작보다 훨씬 더 미약한 수준으로 위축될 것이다. 미국의 정치개입과 비밀공작이 탈동맹 수준으로 위축된 조건에서 실시하는 선거라야 자주적 선거로 될 수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영구주둔을 요구해온 우파정당, 우파군부, 우파단체들이 매우 불리한 정세로 밀려가고, 전면철군을 요구해온 중도좌파정치세력이 매우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는 정치변화 속에서 자주적 선거를 실시하면, 중도좌파정당의 집권 가능성은 지금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높아진다. 그러므로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은 철군→탈동맹→자주적 선거→진보적 정권교체→진보적 민주주의 변혁으로 이어지는 발전경로를 그려보는 정치적 상상력을 가질 필요가 있다.


철군의 제3조건은 누가 해결하는가?

마지막으로, 주한미국군 철군의 조건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철군은 군사적 패배의 결과다. 전쟁에서 패하거나 또는 군사적 대치상태에서 패하는 경우 철군은 불가피하다.

그런데 이 땅의 중도좌파정당이 미국과 군사적으로 대결하여 이길 가능성은 전무하다. 미국과 군사적으로 정면대결하며 백악관을 궁지에 몰아넣는 쪽은 북측이다. 그러므로 현재진행형인 북미대결에서 미국이 군사적으로 완패할 때, 철군문제를 해결할 북미 철군협상이 열리는 것은 정해진 이치다.

철군협상은 북미국교수립을 합의하는 북미정상회담에서 담판형식으로 진행될 것이고, 그 담판에서 철군과 한반도 비핵화를 상호합의한 밀약을 채택할 것으로 예견된다. 북미담판에서 채택될 밀약은, 향후 5년 정도 기간에 걸쳐 한반도를 비핵화하는 것에 상응하여 3단계 철군을 추진하는 내용을 담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전에 내가 발표한 여러 글들에서 논한 바 있으므로 재론을 피한다.

이 글에서 논하는 것은 철군의 3대 조건이다. 철군의 제1조건은 현재진행형인 북미대결에서 미국이 군사적으로 완패하였음을 자인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군사정보를 분석하면, 앞으로 5년 안에 미국은 북미대결에서 완패하였음을 자인할 것으로 예견된다. 미국이 북미대결에서 완패하였음을 자인할 때, 그들은 북측과의 철군협상에 하는 수 없이 끌려나오게 된다.

철군의 제2조건은, 미국이 한미동맹체제를 포기하고서도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자기의 지배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럴 때, 그들은 북측과의 철군협상에 나설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역내정세의 변화추이를 살펴보면, 지금 미국은 미일동맹체제, 미국-오스트레일리아동맹체제, 미국-필리핀동맹체제를 이전보다 더 강화하는 중이며, 이전에 외면하였던 베트남, 인도, 몽골과도 군사협력관계를 맺으려 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주한미국군 철군으로 한미동맹체제를 포기한 뒤에라도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자기의 지배권을 계속 유지하려는 미국의 책략을 드러내는 것이다.  

철군의 제3조건은 남북관계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획기적으로, 공고하게 개선되어 남북 사이의 무력충돌위험이 사라지는 것이다. 남측과 북측의 무력충돌위험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미국이 철군명분을 찾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위에 열거한 철군의 3대 조건이 충족될 때, 실제로 철군이 추진되어 진보적 민주주의 변혁을 수행할 결정적 기회가 조성될 것이다. 위에 열거한 철군의 3대 조건 가운데서 제1조건은 북측이 해결하는 것이고, 제2조건은 미국이 해결하는 것이고, 제3조건은 남측 정권이 해결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철군문제는 '북미결정론' 따위의 조야한 단순논법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이 주목해야 하는 것은 철군의 제3조건이다. 철군의 제3조건을 조성하기 위한 남북관계 개선은,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을 이행할 정책적 의지가 있는 정당이 집권할 때 가능하다. 지금 이명박 정권 집권기에 겪고 있는 것처럼, 우파정권은 남북관계를 개선하기는 커녕 지난 시기 중도우파정권이 어느 정도 개선해놓은 남북관계마저도 대결의 원점으로 되돌려놓는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5년 안에 북측이 철군의 제1조건을 해결하고, 미국이 철군의 제2조건을 해결해도, 남측 정권이 철군의 제3조건을 해결하지 못하면 철군의 제1조건과 제2조건만으로는 철군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2012년 대선에서 중도우파정당이 집권해야 남북관계를 개선할 수 있고, 철군의 제1조건과 제2조건이 해결되는 향후 5년의 정세변화에 맞춰 철군의 제3조건을 해결할 수 있다. 물론 2012년 대선에서 중도좌파정당이 집권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그렇게 될 가능성은 없으므로 중도좌파정당 집권은 논하지 않는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2012년 대선에서 중도우파정당이 집권하려면 반드시 야권연대를 이루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제까지 여러 차례 경험한 것처럼, 그리고 누구나 예상하는 것처럼, 대선국면에서 야권분열은 중도우파정당의 집권을 가로막는 치명적 패인이다.

그러므로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은 야권연대의 정치적 의미를 반한나라당 연합전선 구축으로 좁혀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철군의 제3조건을 마련하여 철군을 촉진시키고, 그에 따라 2017년에 중도좌파정당이 집권할 자주적 선거를 준비하는 선결적 요인으로 넓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철군문제를 사회변혁론에 들여놓지 못한 유럽식 사회변혁론의 한계를 모르는 이 땅의 좌파정치활동가들은 지금 새로운 진보정당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야권연대의 기준을 신자유주의에 대한 찬반 입장만으로 규정하고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중도우파정당을 배척하지만, 그러한 배척은 현재진행중인 한반도 정세변화를 총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한 단견의 소산으로 보인다.

신자유주의 폐기는 중도우파정당을 배척하는 것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 중도좌파정당이 집권할 때 가능한 일인데, 중도좌파정당이 집권하려면 2012년 대선에서 야권연대라는 미흡하나 불가피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 진보적 민주주의 변혁을 하루라도 더 앞당기기 위해 투쟁하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은 2012년 야권연대 실현을 위해 전력해야 할 것이다. (민중의 소리 보도사진)

만일 2012년 대선에서 야권단일후보가 한나라당후보와 맞붙는 야권연대를 실현하지 못하면, 그 실패는 중도우파정당의 집권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철군의 제3조건이라는 결정적 기회를 잃어버리는 치명적 실패이며, 그로써 진보적 민주주의 변혁의 전망을 어둡게 만드는 전략적 실패인 것이다.

2012년 야권연대 실패→철군의 제3조건 해결 불가능→자주적 선거 불가능→진보적 정권교체 불가능으로 이어질 진보정치의 좌절기에 이 땅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겪을 고통은 또 얼마나 뼈저린 것인가. 진보적 민주주의 변혁을 하루라도 더 앞당기기 위해 투쟁하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은 이른바 '독자노선'의 좌경적 오류에 귀를 기울일 것이 아니라 2012년 야권연대 실현을 위해 전력해야 할 것이다. (2011년 6월 30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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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8

여운형과 레닌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진실의 말팔매 <27>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실로 상상도 못할 굉장한 환영이었다. 군악대를 앞세운 일대의 군대, 각 조직과 기관의 수많은 대표들과 노동자, 시민, 학생 등 모든 계층의 민중이 넓은 광장과 플랫홈을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 없이 뒤덮고 있었다. 멀리 극동의 피부빛 다른 동지들이 온다는 것이 이 군중의 대부분의 호기심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악수의 비가 한창 우리를 습격하고나서 환영 나온 각 기관과 조직의 대표들의 환영연설이 시작되었다. (줄임) 그들의 열렬한 환영사가 끝난 다음 나는 이 거의 영광에 가까운 환영에 대한 우리들의 마음 속으로의 감사와 기쁨을 전하기 위하여 연단에 올랐다. 정거장이 무너질 듯한 박수와 환호가 좀 진정된 틈을 타서 나는 영어로 우리들의 답사를 말하기 시작하였다. 말을 다 마치고 났을 때에는 영하 30도의 추위였으나 나는 전신에 상쾌한 땀이 촉촉이 젖은 것을 느겼다."

위의 인용문은 식민지 조선에서 발간된 <중앙> 1936년 6월호에 실린 여운형의 여행기 '모스크바의 인상'에 나오는 대목이다. 그는 1922년 1월 중순 중국 상하이를 떠나 유라시아대륙 횡단열차를 타고 원동피압박민족대표자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는데, 그곳에 도착한 날 겪은 일을 그렇게 술회하였다.

그가 식민지 조선을 대표하여 참가한 원동피압박민족대표자대회는 근동피압박민족대표자대회에 이어 개최된 국제대회였는데, 여운형의 표현을 빌리면, "아메리카의 수도에서 열리게 된 저 소위 워싱턴회의 곧 (줄임) 자본주의 국가의 회합에 대항하는 새로운 의미와 사명을 띄우게 된" 국제대회로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운동과 약소민족의 운동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키기 위한 제3인터내셔널의 실천적 사업의 하나"였다.

대회 기간 중 여운형은 레닌을 두 차례 만났다. 1936년 <중앙>에 연재한 자신의 여행기에서 여운형은 레닌과의 만남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른바 '치안유지법'을 동원하여 식민지 조선을 억누르던 일제에게 탄압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그렇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여운형과 레닌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이 흥미로운 물음에 대한 답변은 1930년 4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여운형에 대한 공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운형은 1929년 7월 10일 상하이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끌려와 제국주의자들이 조작해놓은 법정에 섰던 것이다.

여운형은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직접 모스크바에서 레닌과 만났소만 만나기 전까지는 사실 러시아가 조선에다 공산주의를 그대로 선전하려 들지 않나 적이 걱정하였으나 만나본즉 그는 조선의 특수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소. 조선의 교통과 국어를 묻기에 교통은 하루에 전통될 정도, 국어는 한 개 국어라 하니까 레닌은 '매우 좋다. 조선은 전에는 문화가 발달했지만 목하는 민도가 낮으므로 곧 공산주의를 실행하려 드는 것은 잘못이다. 지금은 민주주의부터 실행함이 현명할 것이다'고 말했는데 내 소신에 합치되매 나는 매우 만족하였소."

위의 인용문에 나타난 것처럼, 여운형은 레닌과의 만남에서 '조선의 특수성'을 반영한 민주주의변혁을 수행하려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이 정당하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의 법정발언에서 두 가지 물음을 끌어낼 수 있다. 하나는 그가 말한 '조선의 특수성'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생각한 민주주의변혁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다.

'조선의 특수성'에 대한 여운형의 생각은, 1945년 12월 7일 <조선인민보>에 실린 그의 기자회견문 '통일전선에 낙관'에 들어있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8.15 전까지의 우리의 역사적 특수성은 조선인 전체가 그 계급을 편성하여 일본 제국주의 압박 하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조선에 있어서의 공산주의 운동은 국내의 계급적 대립을 중심으로 한 투쟁은 비교적 적었고,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이 강렬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조선의 역사적 특수성으로 노동자, 농민은 프롤레타리아적 정치의식이 박약하다. 전 농민의 75%를 점하고 있는 빈농의 대부분은 금일 공산당의 전략과는 거리가 있다. 이러한 층을 계몽하여 다음에 오는 정치적 조직화에 대한 전(前)단계적 훈련을 하는 것이 우리 당의 역할이다."

위의 인용문에 따르면, 여운형은 노동자의 계급의식이 약하고, 빈농의 인구비율이 매우 높다는 점을 '조선의 특수성'으로 인정하였다. 그로부터 66년이 지난 오늘, 여운형은 '한국의 특수성'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노동자의 계급의식이 약하고, 중산층의 인구비율이 매우 높다는 점을 '한국의 특수성'으로 인정하였을 것이다.

66년 전 여운형이 '조선의 특수성'에서 사회변혁의 길을 찾았던 것처럼, 오늘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은 '한국의 특수성'에서 사회변혁의 길을 찾아야 한다. 노동자의 계급의식이 약하고 빈농의 인구비율이 매우 높았던 66년 전 조선에서 급진적 사회변혁을 수행할 수 없었던 것처럼, 노동자의 계급의식이 약하고 중산층의 인구비율이 매우 높은 오늘 이 땅에서 급진적 사회변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이 두 단계 사회변혁론을 더 깊이 연구해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여운형이 레닌을 만난 자리에서 의견일치를 보았던 식민지 조선에서의 민주주의는 무엇이었던가? 여운형은 1945년 12월 8일 <조선인민보>에 발표한 자신의 글 '인민당의 신념'에서 건국노선으로서의 민주주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말하는 진정한 민주주의는 경제적 민주주의를 그 전제로 하는 정치형태를 말함이니 즉 국민이 대다수의 노동층의 경제적 해방을 위하여 그것을 달성할 수 있는 정치방법으로서의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민주주의는 정치형태의 형식과정이 반드시 대중으로부터 조직되어 올라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니 대중에 뿌리박지 않고 위에서 형성된 정치의식을 민중의 이름을 빌어서 합리화하려는 일개 수단으로서의 민주주의는 이번 연합국의 힘으로 타도된 가면 쓴 파시즘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여운형은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된 새로운 해방세상을 꿈꾸었다. 그가 말한 진정한 민주주의는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경제적 해방을 실현하기 위한 민주주의를 뜻한다. 그러면 그가 말한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경제적 해방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1946년 신문화연구소 출판부에서 출판한 책 '인민당의 노선'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경제적 해방에 대해 여운형은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

첫째, 그는 "우리는 개로공영(皆勞共榮)하고 무이독존(無而獨存)하여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개로공영이란 모두 노력하여 함께 번영한다는 뜻이므로, 오늘 우리가 쓰는 표현법으로 바꾸면 빈부격차가 없는 평등하고 협동적인 세상을 건설하는 것이다. 무이독존이란 외부의 도움 없이 홀로 선다는 뜻이므로, 오늘 우리가 쓰는 표현법으로 바꾸면 대외종속에서 탈피하여 경제자립을 실현하는 것이다. 오늘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이 추구하는 평등과 협동에 기초한 경제자립을 이미 66년 전에 여운형이 설파하였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달리 표현하면, 66년 전 여운형이 제시한 그 목표는 아직도 실현되지고 진보정치의 과업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둘째, 그는 "현재 제일 중요한 것은 섬유공업, 화학공업, 식료품공업, 제약 비료공업 등이며 현재 시설 중에 대(大)는 국영으로 소(小)는 민영으로 하여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길게 설명할 필요 없이, 그는 중요산업 국유화와 중소기업 민영화를 새로운 경제건설노선으로 제시하였던 것이다. 여운형이 제시한 중요산업 국유화와 중소기업 민영화는 66년이 지난 오늘에도 아직 실현되지 못하였다. 중요산업 국유화와 중소기업 민영화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에게 주어진 진보정치의 과업이다.

셋째, 그는 "동척(일제 침략거점인 동양척식주식회사라는 뜻-옮긴이) 기타 일본 재벌 또는 군 등이 소유관리하였는데 그것을 몰수하야 농민에게 적정 분배하고 대농장은 국가가 경영하고 과학적 지도 하에 질과 양을 향상시킬 것이다"고 말했다. 길게 설명할 필요 없이, 그는 대농장 국영화와 민주적 토지개혁을 새로운 경제건설노선으로 제시한 것이다. 여운형이 제시한 대농장 국영화와 민주적 토지개혁은 66년이 지난 오늘에도 아직 실현되지 못하였다. 대농장 국영화와 민주적 토지개혁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에게 주어진 진보정치의 과업이다.

빈부격차 없는 평등하고 협동적인 세상, 대외종속에서 탈피한 경제자립, 중요산업 국유화와 중소기업 민영화, 대농장 국영화와 민주적 토지개혁, 바로 이것이 최근 수정, 채택한 민주노동당 강령이 지향하는 진보적 민주주의의 경제건설목표다. (2011년 6월 27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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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5

일본도를 휘두른 사단장들

진실의 말팔매 <26>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6.25전쟁 시기 한국군 제6사단 방첩부대(HID) 행정과장이었던 김용태가 <월간조선> 2002년 4월호에 실린 회고담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털어놓았다. 1952년 6월 19일, 그가 배속된 한국군 제6사단은 경기도 양평군에 있는 용문산에서 취침하던 중에 중국인민지원군 3개 사단의 야간기습공격을 받고 너무 경황이 없어 군화도 신지 못한 채 맨발로 도망갔다. 한국군 제6사단 사단장은 장도영이었는데, 그도 다른 사병들과 뒤섞여 산꼭대기로 도망갔다.

 중국인민지원군이 산아래에서 포위망을 좁히며 산꼭대기로 올라오는 것을 보며, 포로로 잡히게 된 절망적 상황에 빠진 장도영은 움켜쥐고 있던 일본도로 할복자살을 하려고 하였다. 그 때 곁에 있던 김용태가 "사단장 각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장수가 죽으면 부하들은 어떻게 합니까. 용기를 가지십시오"라고 말하며 일본도를 빼앗았다고 한다. 그의 회고담에 따르면, 한국군 제6사단 사단장 장도영이 일본도를 휘두르며 전투를 지휘하였음을 알 수 있다.

8.15 해방 전에 장도영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하급장교로 일제를 위해 충성한 친일반역자였으므로, 일본군에 있을 때 일본도를 휘두르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한국군 사단장이 되어서도 일본도를 허리에 차고 돌아다녔던 것이다.

그런데 충격적인 사실은, 장도영만 일본도를 휘두르며 전투를 지휘한 게 아니라, 당시 한국군 사단장들이 거의 모두 그러하였다는 점이다. 김용태는 6.25전쟁을 회고한 대목에서 "그 때 사단장들은 일본도를 갖고 다녔어요"라고 말했다. 이것은 6.25 전쟁 시기에 한국군 지휘관들이 거의 모두 일본군과 만주군에서 일제를 위해 충성한 친일반역자들이었음을 말해준다. 친일반역세력으로 구성된 당시 한국군 지휘부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국방장관 신태영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26기생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일본 육군 중좌였다. 국방차관 김일환은 만주군 군관학교 5기생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만주군 경리장교였다.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49기생으로 일본 육군병기학교 교관을 지냈고 일제 패망 당시 일본 육군 포병 중좌였다. 채병덕의 뒤를 이은 육군참모총장 정일권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55기생으로 만주국 헌병 상위(대위)로 간도헌병대 대장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만주군 고등군사학교 졸업예정자였다. 해병대사령관 신현준은 만주군 군관학교 5기생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만주군 대위였다.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장 김창룡은 일본 관동군 헌병교습소를 졸업하였으며, 일제 패망 당시 관동군 헌병 오장이었다. 육군보병학교 교장 박임항은 만주군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 56기생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만주군 항공부대 중좌였다. 1군단장 김백일은 만주군 군관학교 5기생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만주군 상위(대위)였다. 공군 비행단장 이근석은 일본 구마다니비행학교를 졸업하였고, 일제 패망 당시 일본 육군항공대 소위였다. 육군 준장 김석원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27기생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일본군 육군 대좌였다. 헌병총사령관 원용덕은 만주군 군관학교 교의였으며, 일제 패망 당시 만주군 중교(중령)였다.

△6.25 전쟁시기 백선엽 대령과 미군사고문 패리스 중령이 지도를 보며 626고지 공격을 계획하고 있다. 백선엽은 일제 시기 만주 군관학교 9기생 출신으로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 토벌에 앞장 선  간도특설대 소속 만주군 중위였다.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전선에 있었던 한국군 사단장들도 모두 친일반역자들이었다. 제1사단 사단장 백선엽은 만주군 군관학교 9기생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간도특설대 소속 만주군 중위였다. 제2사단 사단장 이형근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56기생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일본군 포병 대위였다. 제3사단 사단장 유승렬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26기생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일본군 육군 대좌였다.

제5사단 사단장 이응준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26기생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일본군 육군 대좌였다. 제6사단 사단장 김종오는 일제에 징병되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일본군 육군 소위였다. 제7사단 사단장 유재흥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55기생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일본군 육군 대위였다. 제8사단 사단장 이성가는 중국 남경군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일제 패망 당시 당시 중국 군벌 장교였다.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이종찬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49기생이었으며, 일제 패망 당시 일본 육군 소좌였다. 황해도 옹진반도에 배치된 제17독립보병연대 연대장 백인엽은 일본 육군항공학교를 졸업하였고, 일제 패망 당시 일본 육군항공대 소위였다.

이처럼 친일반역세력으로 구성된 한국군 지휘부에 맞서 6.25전쟁을 벌인 북측의 조선인민군 지휘부는 어떠하였을까? 조선인민군 전선사령관 김책과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은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중 8.15 해방을 맞았다. 인민군 제1군단장 김웅은 중국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신사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였고, 제2군단장 무정은 중국 보정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팔로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인민군 제1사단 사단장 최광, 제2사단 사단장 최현, 제3사단 사단장 리영호는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중 8.15 해방을 맞았다. 제4사단 사단장 리권무는 조선의용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중 8.15 해방을 맞았다. 제5사단 사단장 오백룡은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중 8.15 해방을 맞았다. 제6사단 사단장 방호산은 팔로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제7사단 사단장 전우, 제9사단 사단장 박효삼은 조선의용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제13사단 사단장 최용진, 제15사단 사단장 박성철, 제105전차여단 여단장 류경수, 776부대장 오진우는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중 8.15 해방을 맞았다.

위의 사실을 읽어보면, 6.25전쟁 시기 한국군은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친일반역자들이 지휘하였고, 조선인민군은 조선인민혁명군과 조선의용군 출신 항일혁명투사들이 지휘하였음이 명백히 드러난다. 8.15 해방 직후 일본군 군복과 만주군 군복을 벗어던지고 각처에 은신하며 친일반역죄 처벌을 모면하고 있었던 그들을 데려가 한국군 지휘관 모자를 씌워준 것은 미군정이었다. 미국이 친일반역죄를 덮어주고 그들을 한국군 지휘관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6.25전쟁의 성격을 동족상잔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은 부정확하며, 미국이 내세운 친일반역세력과 미국을 반대한 항일혁명세력의 전쟁이었다고 표현해야 정확하다. 미국이 내세운 친일반역세력이 6.25전쟁의 주역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한국군에게 씻을 수 없는 '원죄'로 되었다. 

미국이 내세운 친일반역세력은 '북진통일'을 위해 싸웠고, 미국을 반대한 항일혁명세력은 '조국해방'을 위해 싸웠다. 6.25전쟁이 일어난 때로부터 어언 61년 세월이 흘렀건만, 그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11년 6월 25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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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4

30년 전에 죽은 경제의 이름을 부른 강령

변혁과 진보 (37)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30년 전에 혼합경제를 죽인 살인자

진보적 민주주의를 우리식 사회변혁담론의 대안이념과 대안체제로 제시한 진보정치활동가들이 좌파성향 정치활동가들에 비해 경제이론에 약하다는 소문이 나돌았는데, 그것이 단지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었음이 이번에 밝혀졌다. 이번에 민주노동당 정책당대회에서 수정, 채택한 강령 중에서 경제강령이 그런 소문이 사실임을 입증하였다.

이번에 수정, 채택된 진보적 민주주의 경제강령은 "자주적, 다원적 민주경제체제"를 제시하였다. 여기서 자주적이라 함은 대외예속적 경제체제를 극복한다는 뜻인데, 강령에서는 이것을 "경제종속 극복과 자주적 발전노선"이라고 표현하였다.

경제강령에서는 자주라는 용어보다 자립이라는 용어를 선택하였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다원적이라 함은 "소유형태를 다양화"하고 "민중적 참여와 통제를 실현"한다는 뜻인데, 강령에서는 이것을 "민중참여가 보장되는 민주경제체제"와 "민중생존권이 보장되는 평등한 경제체제"라고 표현하였다. 민주노동당이 진보적 민주주의 경제강령을 그렇게 총론적으로 정리한 것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총론에서 각론으로 들어가면 사정이 확 달라진다. 각론적 개념으로 정리한 대목에서는 "사회적 소유와 사적 소유를 결합한 다원주의적 경제체제"와 "시장경제와 계획경제의 장점을 살리는 혼합경제체제"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여기서 다원주의적 경제체제라는 개념과 혼합경제체제라는 개념은 같은 뜻으로 쓰인 것으로 보이는데, 혼합경제라는 특정개념을 등장시켜 진보적 민주주의 경제강령을 설명하려고 한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강령작성자들이 혼합경제가 역사적으로 실존하였던 특정개념이라는 사실을 알고서도 그 개념을 경제강령에 등장시켰는지 아니면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그 개념을 등장시켰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혼합경제라는 개념을 가지고 진보적 민주주의 경제강령을 설명하는 것은 오류다.

결론부터 말하면, 혼합경제와 진보적 민주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 쟁점을 선명히 부각시키기 위해 이를 다시 표현하면, 진보적 민주주의는 혼합경제를 부정한다고 말할 수 있다. 왜 그런 것일까?

혼합경제는 이미 30년 전에 죽어버린 경제다. 혼합경제를 죽인 '살인자'가 바로 신자유주의다. 1980년대 초부터 서유럽 각국에 신자유주의가 등장하면서 혼합경제는 종말을 고했다. 혼합경제의 죽음과 신자유주의의 등장은 자본주의체제의 전반적 위기에 의해 발생한 전환적 사건이었다.

1980년대 초 광주민중항쟁을 겪고,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폭압에 짓눌려 있었던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은 혼합경제와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 당시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은 군사독재정권 타도와 민주정부 수립이라는 당면목표 이외에 별로 아는 것이 없었으니, 혼합경제와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사회변혁담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번에 민주노동당이 수정, 채택한 강령이 중요한 것은, 신자유주의 이후의 대안체제로 진보적 민주주의체제를 명시적으로 제시하였다는 데 있다. 그런데 새로운 강령이 신자유주의 이후의 대안경제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신자유주의의 등장으로 이미 종말을 고한 혼합경제를 무덤에서 불러낸 것은 30년 전의 경제체제로 돌아가려는 복고주의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경제사 박물관에 박제화된 유물로 보관되어 있는 20세기 혼합경제를 진열장에서 꺼내어 21세기 진보적 민주주의 경제강령을 설명하려 하다니, 경제이론에 정통한 지식인들이 알면 웃을 일 아닌가!


우파집권당이 추진한 혼합경제, 통제경제, 사회적 시장경제

누구나 아는 것처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서유럽 자본주의체제는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전쟁폐허에서 서유럽 자본주의체제가 재기를 모색한 사회민주주의 경제강령이 있었으니, 그것이 영국의 혼합경제, 프랑스의 통제경제,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다.

이 세 종류의 경제강령은 서로 이름이 달랐지만, 하나의 밑뿌리에서 자라난 것이다. 그 세 종류의 경제강령을 길러낸 사상조류의 뿌리가 바로 사회민주주의다. 사회민주주의 전통이 오랜 영국, 프랑스, 독일에서 전후 피폐한 시장경제를 짧은 기간에 살려낼 방도는 중요산업 및 공공부문 국유화와 보편적 복지실현 밖에 없었다. 
 
종전 직후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의 영국 보수당 장기집권에 마침표를 찍고 등장한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Attlee)가 추진한 것이 혼합경제(mixed economy)다. 애틀리는 1945년부터 1951년까지 영국 총리를 지냈고, 1935년부터 1955년까지 영국 노동당 당수를 지냈다.

△혼합경제를 추진한  클레멘트 애틀리(1883-1967)와
현 영국 총리인 영국 노동당의 데이비드 카메론.
영국의 혼합경제는 중요산업과 공공부문을 국유화하고, 무상의료제를 수립하였다. 이것은 전후복구기에 영국 노동당이 정치적으로는 사민주의, 경제적으로는 혼합경제, 사회적으로는 복지국가를 실현하였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미국, 서유럽, 일본의 시장경제가 '석유위기'라는 이름의 대공황으로 타격을 입고 비틀거리던 1979년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가 이끄는 영국 보수당이 정권을 탈환하였고, 그로써 영국은 신자유주의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혼합경제는 이미 1980년대 초에 신자유주의의 등장으로 사멸경로에 들어선 것이다.

영국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도 전후 피폐한 자본주의체제를 복구하기 위한 새로운 발전전략이 모색되었다.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과 조르주 뽕삐두(Georges Pompidou) 집권기에 프랑스에 등장한 통제경제(Dirigism)가 바로 그러한 새로운 경제발전전략이었다.

△통제경제를 실시한 샤를 드골(1890-1970)과
현 프랑스 대통령인 대중운동연합의 니꼴라 사르꼬지.
프랑스의 통제경제도 영국의 혼합경제와 꼭같이 중요산업과 공공부문을 국유화하고 보편적 복지를 실현하였다. 통제경제는 프랑스가 1945년부터 1975년까지 이른바 '영광의 30년(Les Trente Glorieuses)'이라고 부른 고도성장기에 프랑스 자본주의를 재생의 길로 이끌어준 기본동력이었다.

서독은 영국, 프랑스와 달리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고 전범국가로 전락하였다. 전범국가로 전락한 서독의 피폐한 경제를 복구하는 생존전략이 바로 사회적 시장경제(social market economy)였다.

전후 서독의 사회적 시장경제를 추진한 것은, 콘나르트 아데나우어(Konard Adenauer)가 이끄는 기독교민주당(CDU)이다. 서독이 한때 자랑하였던 이른바 '경제기적(Wirtschaftswunder)'이 바로 사회적 시장경제의 산물이다.

△사회적 시장경제를 추진한 콘나르트 아데나우어(1876-1967)
현 독일 총리인 기독교민주당의 앙겔라 메르켈.
정치이념지형을 살펴보면, 영국식 사민주의를 추종한 영국의 노동당, 드골주의를 추종한 프랑스의 공화국민주연합, 그리고 독일식 사민주의를 도입한 서독의 기독교민주당은 모두 서유럽의 대표적인 우파정당들이다.

영국의 노동당은 보수당과 경쟁하지만 보수당과 노동당의 차이는 샛강 수준의 차이다. 프랑스의 공화국민주연합은 드골 사망 이후 1976년에 자크 시라크(Jacques Chirac)가 이끈 공화국집결(RPR)로 변신하였다가, 2002년 대중운동연합(UMP)으로 당명을 바꾸었다. 프랑스 우익을 대표하는 대중운동연합이 등장시킨 프랑스 대통령이 니꼴라 사르꼬지(Nicolas Sarkozy)이고, 독일 우익을 대표하는 기민당이 등장시킨 독일 총리가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우경화된 이 땅에서는 중요산업과 공공부문을 국유화하고 보편적 복지를 실현하는 것이 마치 좌파강령인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키지만, 영국, 프랑스, 서독에서는 그것이 우파집권당들이 추진한 경제강령이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21세기 진보적 민주주의를 건설하려는 민주노동당이 영국, 프랑스, 독일의 우파집권당들이 전후복구기에 잘 써먹다가 수명이 다해 30년 전부터 내다버리기 시작한 혼합경제, 통제경제, 사회적 시장경제를 '새로운 경제강령'인 것처럼 들고 나오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알면, 민주노동당의 진보적 민주주의 경제강령에서 혼합경제, 통제경제, 사회적 시장경제라는 개념을 왜 써서는 안 되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


민주노동당이 그 이름을 지어야 한다

역사적 경험이 말해주는 것처럼, 영국의 혼합경제, 프랑스의 통제경제, 서독의 사회적 시장경제는 전후 자본주의체제 복구에 동원된 사민주의 경제강령이었다. 그러한 경제강령은 실제로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자본주의체제를 복구, 성장시켰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혼합경제, 통제경제, 사회적 시장경제가 복구, 성장시킨 시장경제가 결국 30년만에 무너지고 말았고, 이제는 신자유주의로 완전히 대체되었다는 사실이다.

지금 이 땅에서는 중요산업과 공공부문을 국유화하고 보편적 복지를 실현하기는커녕 우파세력이 날뛰는 통에 그런 말조차 공개적으로 꺼내기 힘든 판인데, 중요산업과 공공부문을 국유화하고, 보편적 복지를 실현한 그 나라들에서는 왜 30년만에 그 성과를 잃어버리게 되었을까?

그 까닭은, 영국, 프랑스, 서독에서 추진한 중요산업 및 공공부문 국유화와 보편적 복지가 자본주의체제를 넘어서는 경제발전단계로 설정된 아니라, 전후 피폐한 자본주의체제를 복구, 유지하기 위한 경제발전수단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진보적 민주주의 경제강령에서 중요산업과 공공부문을 국유화하고 보편적 복지를 실현하려는 것은 영국, 프랑스, 서독의 실패전철을 밟으려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유주의로 피폐해진 이 땅의 예속적 자본주의체제를 복구하고 유지하기 위해 중요산업과 공공부문을 국유화하고 보편적 복지를 실현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민주노동당이 진보적 민주주의 경제강령을 제시한 목적은, 중요산업 및 공공부문 국유화와 보편적 복지실현을 통해 신자유주의로 망한 예속적 자본주의를 넘어서 새로운 사회역사발전의 대안을 찾으려는 데 있다.

오래 전에 레닌은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라고 정의하였는데, 오늘 신자유주의야말로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를 무너뜨리면 사민주의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시장경제와 제국주의세계체제가 무너지게 되어 있다. 물론 붕괴의 경로와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장기적일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위기는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이며,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은 지금 그 위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혼란과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신자유주의 이후의 대안으로 제시한 진보적 민주주의는 영국의 혼합경제나 프랑스의 통제경제나 서독의 사회적 시장경제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로 망한 이 땅의 예속적 자본주의를 넘어서 새로운 사회역사발전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보적 민주주의 경제강령에서 혼합경제라는 사어(死語)를 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번에 수정, 채택된 민주노동당 경제강령을 좀 더 명시적으로 정리하면, 진보적 민주주의 경제체제에서 중요산업은 민중참여형 국유기업이 떠맡게 될 것이고, 중소기업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실현될 것이고, 대외적으로는 예속성을 청산한 민족자립경제가 실현될 것이고, 민족 내부에서는 남북경제협력으로 통일경제가 실현될 것이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이후의 대안으로 제시된 이 땅의 새로운 경제체제의 모습이다.

그러면 진보적 민주주의 경제강령에서 신자유주의 이후의 대안으로 제시된 새로운 경제체제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본질적 속성을 표현한다면, 민중참여형 국유기업 주도의 민족자립경제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신자유주의 이후의 대안으로 제시된 새로운 경제체제의 뚜렷한 상을 이번에 당강령 개정과정에서 갖게 되었으니, 아직까지 그 새로운 경제체제의 공식명칭을 생각해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민주노동당이 그 이름을 지어야 할 책임을 맡았다. (2011년 6월 24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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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3

창피스러운 정책당대회 구호

진실의 말팔매 <25>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2011년 6월 18일과 19일 '통합과 연대, 진보적 정권교체'라는 총주제로 민주노동당 2011 정책당대회가 열렸는데, 대회장소로 사용된 건물 정면에 내걸린 큼지막한 붉은색 바탕 현수막에 파란색 글씨체로 'Change 2012'라고 써놓았다.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 제522호 제1면에는 한 술 더 떠서 붉은색 글씨체로 '체인지 2012'라고 써놓았다.


△ 민주노동당 2011 정책당대회 대회장에 걸린 현수막 (사진 출처 http://spic.kr/3SMs)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 제522호 제1면
 국제행사가 아닌 정책당대회에서 난데 없이 'Change' 또는 '체인지'라는 막돼먹은 외국어 구호를 버젓이 쓰다니 이게 어디 제 정신인가! 이명박 정권이 출범하면서 영어공용화와 영어몰입교육 따위를 떠들어대며 세상을 크게 어지럽히더니, 이제는 민주노동당마저 저들의 추잡한 장단에 춤을 추려는 것인가?  영어원어민이 읽어봐도 무슨 뜻인지 아리송한 이상한 영어 구호를 민주노동당 정책당대회에 내건 것은 경악할 만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Change 2012'라는 구호에 나오는 Change라는 영어낱말은 바꾸다라는 동사나 교체라는 명사로 각각 쓸 수 있다. 정책당대회 총주제에 '진보적 정권교체'라는 내용이 들어있으므로, Change라는 영어 구호는 교체라는 뜻의 명사형으로 쓰인 것이 분명하다. 만일 Change라는 영어 구호를 바꾸다라는 뜻의 동사형으로 썼다면, "2012년에 정권을 바꾸라"는 뜻이 아니라 "2012년이라는 연대를 바꾸라"는 뜻이므로 말이 되지 않는다.

이 땅의 진보정당이 내거는 정책당대회 구호는 당연히 우리말로 써야 하므로, '정권교체 2012'라는 우리말 구호를 내걸었어야 옳다. 그런데 'Change 2012'라고 써놓았으니, 그것을 우리말로 옮기면 '교체 2012'라는 우스꽝스러운 구호를 내걸고 정책당대회를 진행한 것이다.


△민주노동당 홍보미디어실에서 배포한 2011 정책당대회 홍보물
 
세계 각국 진보정당들이 당대회를 개최할 때, 자기 모국어로 쓴 구호가 아니라 외국어로 쓴 이상한 구호를 우스꽝스럽게 내거는 사례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독일 좌파당( Die Linke)의 2009년 5월 당대회 모습                                                              

△ 2009년 11월 베네수엘라에서 31개국 55개 좌파정당이 모여 개최한 국제 좌파정당의 회합에서 우고 차베스가 연설하고 있다.

노동자, 농민, 서민을 위한 정당이라고 자처하는 민주노동당이 노동자, 농민, 서민이 읽어도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할 막돼먹은 외국어 구호를 내걸고 정책당대회를 열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처럼 창피하고 기가 막힐 짓을 하고도 그것을 바라본 수많은 당원들 가운데 아무도 창피함을 느끼지 못하였다면, 더 절망적이다.

창피와 절망은 거기만 있는 게 아니다. 민주노동당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면, 'Change 2012'라는 엉터리 구호를 내걸고도 왜 창피함을 느끼지 못하는 불감증에 걸렸는지 알 수 있다.

민주노동당 홈페이지에는 안내를 HELP로, 참여를 COMMUNITY로, 활동을 ACTION으로, 소개를 INTRO라고 써놓았다. 의원소식은 Member News로, 언론이 보는 민주노동당은 Media로, 홍보물은 Promotion으로 써놓았다. 아예 TV Zone이라고 쓰고 그 밑에 우리글자로 티브이존이라고 써놓기도 하였다. 영어를 제대로 공부한 중학교 학생에게 써넣으라고 해도 그렇게 엉터리 영어를 써넣지는 않을 것이다. 민주노동당 '얼굴'에 먹칠을 하는 짓은 바로잡아야 한다.

몇 일 전 나는 미국인들에게 민주노동당을 소개해야 할 기회가 있었으나 민주노동당 홈페이지에 영어판이 없어 좋은 기회를 포기하고 말았다. 영어낱말 몇 개 주워 들은 유아 수준의 영어구사력을 가지고 민주노동당 홈페이지를 창피하게 만들어놓을 것이 아니라, 민주노동당을 세계에 알리는 정식 영어판을 홈페이지 안에 따로 만들어야 한다. 민주노동당이 세계 각국의 진보정당들과 소통하고 협력하는 국제연대활동은 거기서 시작된다. 
   
민주노동당이 추구하는 사회변혁의 대상은, 남들보다 영어를 더 잘 해야 출세하는 더러운 세상이고, 영어 깨나 한다는 미국 유학파 먹물들이 자본과 권력을 독점해버린 낡고 썩은 세상이다. 그런데 세상을 바꾸자는 구호를 내건 민주노동당이 그런 더러운 세상, 낡고 썩은 세상의 흙탕물에 한 쪽 발을 질퍽하게 담그고 있다니 절대 아니 될 일이다.
 
민주노동당은 이번 기회에 깊이 반성하고 자주적 어문정책에 대해 관심해야 할 요구가 제기되었다. 장차 민주노동당이 집권하면 자주적 어문정책부터 실시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주적 어문정책은 장차 진보적 민주주의체제에서 살아갈 이 땅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새로운 세계관을 열어줄 통로가 될 것이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언어는 의사소통의 도구만이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세계관의 직접적 반영이다. 언어가 없으면 세계관도 세울 수 없다. 미국인과 영국인은 영어로 세계를 인식하고, 중국인은 중국어로 세계를 인식하고, 프랑스인은 프랑스어로 세계를 인식하고, 독일인은 독일어로 세계를 인식하고, 한반도의 주인들은 우리말로 세계를 인식한다.

국제과학주간지 <네이처(Nature)> 2011년 4월 관련보도에 따르면, 막스 플랑크 심리언어학연구소(Max Planck Institute for Psycholinguistics)가 진화생물학 연구방법으로 4개 어족 301개 언어의 문법발달과정을 연구하였더니, 각 언어가 각자 고유한 문화발전과정에서 생성, 발달하였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결론은 모든 사람의 두뇌에 내재된 어떤 보편적인 언어처리과정에 따라 언어가 생성,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사회집단의 사회역사적 현실 속에서 언어가 생성, 발달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세계적인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Noam Chomsky)는 보편적인 공통요인에 의해 언어가 생성, 발달한다고 주장하였지만, 그것은 오류다. 언어는 그 언어를 쓰는 사회집단의 사회역사적 현실 속에서 생성, 발달한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이다.

명백하게도, 언어는 두뇌 속에 선험적으로 내재하는 생물학적 산물이 아니라 사회집단의 사회역사적 산물인 것이다. 따라서 민족어의 고유성과 독자성을 보존하는 것은 고루한 국수주의의 발동이 아니라 과학적 언어관의 발현인 것이다.

길게 설명할 필요 없이, 영어가 지배하는 예속적 현실 속에서 민족어가 차츰 소멸해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를테면, 필리핀에서는 고유언어인 타갈로그어가 가정에서나 쓰는 생활언어로 전락하고, 영어가 사회적 공용어로 되었다.

부탄에서는 고유언어인 종카어가 가정에서나 쓰는 생활언어로 전락하고, 영어가 사회적 공용어로 되었다. 미국에게 사상문화적으로 예속된 이 땅에서 민주노동당마저 영어 홍수 속에 휩쓸리면, 우리말과 우리글을 누가 지킬 것인가.

우리말, 우리글을 외국어, 외국글자와 함께 마구 섞어쓰면서 영어문법에도 어긋나는 괴상한 영어를 남발하는 짓은 이 땅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자주적 세계관을 짓밟는 언어시장 자유화의 만행이다.

민주노동당에 결집한 진보정치활동가들이 '제국의 언어'가 아니라 민족의 고유한 언어로 세계를 인식할 때, 그 때 비로소 이 땅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자주적 세계관을 세울 수 있다. (2011년 6월 23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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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7

한반도 통일의 불가역적 실현경로

변혁과 진보 (36)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50m 걸어가다 가로막힌 발걸음

2011년 6월 15일 6.15 공동선언 발표 11주년을 맞이한 그 날, 6.15 남측위원회 대표단 100여 명이 서울 여의도에서 펼침막과 통일기를 들고 개성을 향해 출발하였다. 남, 북, 해외가 개성에서 개최하기로 예정한 평화통일민족대회에 참가하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그런데 경기도 파주시에 있는 통일대교에서 대표단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경찰 저지선이었다. 6.15 남측위원회 대표단은 통일대교 남단에서 50m밖에 걸어가지 못하고 경찰 저지선에 가로막혔다. 원래 대표단은 이명박 정부의 개성행 불허방침을 뚫고 걸어서 개성까지 가려고 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임진각 망배단으로 이동하여 200여 명이 조촐하게 평화통일민족대회를 진행하였다.

경기도 파주시 '통일의 관문' 앞에서 6.15 남측위 대표단 1백여명의 발길이 묶이자 규탄 기자회견을 갖고 행진을 하고 있다. ( 통일뉴스 2011615일 보도사진)


임진각 망배단 앞에서 열린 평화통일민족대회에는 6.15 남측위원회에 속한 여러 사회단체 대표들과 손학규 민주당 대표,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 권태홍 국민참여당 최고위원 등이 참석하였으나 주류 언론은 외면하였고 국민들은 무관심하였다. 같은 날 민주당은 임진각 통일전망대에서 최고위원회의를 열고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전환을 촉구하였으나 아무런 관심을 끌지 못했다.

6.15 남측위원회 대표단 100여 명이 통일대교 남단에서 경찰 저지선에 가로막힌 시각을 전후하여, 이명박 대통령은 한국자유총연맹 회원 248명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오찬을 베풀며 극우인사들을 격려하였고, 한국 군부는 분쟁수역인 서해 5도에 무력을 증강하기 위한 서북도서방위사령부 창설식을 진행하였고, 남측 언론은 국정원의 기획탈북에 따라 추진된, 탈북자 가족이 서해 분쟁수역 우도로 월남한 사건을 집중적으로 보도하였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극우단체를 위한 청와대 오찬, 서북도서방위사령부 창설식, 탈북자 월남사건 집중보도는 의도적으로 6월 15일에 맞춰 남측 통일운동에 대한 대중의 시야를 가리고 북측을 자극하는 사건들이었다. 2011년 6.15 기념일은 남측 통일운동세력이 반통일세력의 준동에 압도당한 통한의 날로 기록되고 말았다.

진보적 민주주의강령과 함께 자주적 평화통일강령을 추구하는 진보정치활동가들은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분석할 필요가 있다. 여러 가지 각도에서 분석할 수 있겠으나, 진보정치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2000년 6월 15일 이후 2007년 12월까지 7년 동안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평화통일을 추진할 생각은 하지 않고 대북교류협력이나 추진하는 수준에서 맴돌다가 한나라당에게 정권을 내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자기들에게 강한 지배력을 발휘하는 백악관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으므로, 백악관이 그토록 싫어하는 평화통일을 추진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6.15 공동선언 이후 7년 동안 대북교류협력이라도 그만큼 추진하였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기며 위안을 받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

지금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추진하였던 대북교류협력의 정책적 맹점을 직시하는 비판적 인식이다. 그런 비판적 인식을 가져야 오늘 반통일세력에게 압도당한 남측 통일운동세력의 무기력증을 떨쳐내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비정치적 교류가 아니라 정치적 화해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김대중-노무현 정권에게 평화통일의지가 없었으므로 대북교류협력만 추진하였고, 정권교체 이후 정세가 악화되자 대북교류협력마저 중단되는 사태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주목하는 것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6.15 공동선언 이후 7년 동안 추진한 대북교류협력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교류협력은 무역, 투자, 문화, 관광 같은 부문에서 추진하는 비정치적 행위다. 이를테면, 중국과 대만이 양안교류협력을 아무리 심화발전시킨다 해도 그것으로는 통일을 실현하지 못한다. 교류협력은 평화통일로 나아가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므로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민족 내부의 특수관계에서는 교류가 아니라 화해를 추진해야 한다.


△ 한반도의 평화란 일반적인 뜻으로 말하는 평화가 아니라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정치적 화해를 통해 이루어지는 평화다.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민족 내부의 특수관계에서 교류를 통해서든 아니면 화해를 통해서든 일차적으로 협력관계를 형성할 수 있지만, 교류를 통한 비정치적 협력관계는 평화통일로 나아가지 못하는 반면 화해를 통한 정치적 협력관계는 평화통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6.15 공동선언 발표 이후 7년 동안 대북관계를 개선하는 과정에서 교류가 아니라 화해에 강조점을 찍었어야 하는 것이다.

교류협력과 화해협력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교류는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정치과업과 무관하게 추진되는 비정치적 활동인 것에 비해, 화해는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정치과업으로 추진되는 정치활동이다. 적대관계 청산은 정치활동이므로,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화해는 정치적 화해를 뜻한다.

비정치적 교류협력이라도 자꾸 지속하다보면 적대관계가 점진적으로, 자연히 청산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생각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6.15 공동선언 이후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7년 동안 대북교류협력을 추진하였는데도, 남북이 이전에 함께해오던 6.15 민족공동행사마저 하지 못하게 되어버린 오늘의 현실은 교류협력으로 적대관계를 청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뚜렷이 실증한다.

그러므로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북측이 거부한 '햇볕정책' 따위를 들고 나와 교류협력에 힘쓰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민족화해정책을 추진했어야 하였다.
민족화해정책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이루어낼 수 있을까? 네 가지 중대한 정치과업을 수행할 수 있다. 상호비방 중지와 '국가보안법' 철폐, 그리고 적대적 군사행동 중지와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이다.

 '햇볕정책'으로는 기껏 상호비방 중지밖에 실현하지 못하였는데, 그것마저도 정권이 바뀌자 원점으로 돌아갔다. '국가보안법' 철폐, 적대적 군사행동 중지,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은 민족화해정책으로 실현할 수 있는 정치과업들이다.

한반도의 평화란 일반적인 뜻으로 말하는 평화가 아니라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정치적 화해를 통해 이루어지는 평화다. 민족화해정책을 통해 평화통일로 나아갈 수 있으며, 평화통일은 민족화해정책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다. 60년 동안 굳어진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정치적 화해를 추진하지 않으면 교류협력을 7년이 아니라 70년 동안 계속해도 평화통일로 나아갈 수 없다.


민족화해방안은 이미 합의되었다

엄밀히 따지면, 노무현 정부가 민족화해정책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노무현 정부 시기 통일부는 2007년 7월 26일 남북관계발전위원회 1차 회의를 개최하여 '남북관계발전 기본계획'을 심의하였다. 당시 남북관계발전위원회는 통일부 장관을 위원장으로 관련부처 차관 15명, 국회에서 추천을 받은 전문가 9명으로 구성되었다. 그 위원회는 5년 동안 추진할 정책목표를 "한반도 평화정착과 남북화해협력 제도화로 설정"하였다. 

2007년 10월 2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남북관계발전 기본계획'에 관한 구상을 가지고 평양을 방문하였고, 그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만난 남북정상회담에서는 '남북관계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이 발표되었다. 10.4 선언은 민족화해정책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이명박 정권이 반북대결을 중지하고 2007년에 채택된 10.4 선언을 충실히 이행하였더라면, 4년이 지난 오늘 한반도에는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는 통일의 기운이 넘쳐났을 것이다.

 10.4 선언 직후, 남북은 민족화해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각종 합의서를 채택하였다. 이를테면, 2007년 11월 16일 '남북관계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 이행에 관한 제1차 남북총리회담 합의서'와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추진위원회 구성, 운영에 관한 합의서'와 '남북경제협력공동위원회 구성, 운영에 관한 합의서'가 한꺼번에 채택되었고, 11월 29일에는 '남북관계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국방장관 합의서'가 채택되었고, 12월 6일에는 '남북경제협력공동위원회 합의문'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일 뒤에 실시된 대선에서 정권이 바뀌면서, 위의 모든 합의는 시작해보기도 전에 사실상 무효화되고 말았다. 노무현 정권 말기에 채택된 각종 남북합의가 이명박 정권의 대북적대정책에 의해 전면적으로 무효화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남북이 민족화해방안을 처음으로 합의한 때는 2007년 10월 4일이 아니라 1991년 12월 13일이다. 그 날 채택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는 민족화해방안을 8개조에 걸쳐 상술하였다.

남북은 아직 공동의 통일방안을 명시적으로 합의한 적은 없지만, 민족화해방안은 이미 여러 차례 명시적으로 합의하였다. 민족화해에 관한 한, 남북은 대동소이한 내용을 또 다시 합의할 필요가 없으며, 이미 합의한 것을 성실히 이행하기만 하면 된다. 


남측 정권 문제에서 찾아야 할 해결책

공동선언이나 합의서를 발표하는 것은 고도의 정치활동이기는 하나, 그것의 이행을 강제할 구속력이 없다. 어느 한 쪽이 공동선언 또는 합의서를 무시하거나 폐기해버리면 그것으로 끝이다.

구속력이 있는 것은 협정 또는 협약이지만, 남북관계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국제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민족 내부의 특수관계이므로 협정이나 협약을 맺을 수는 없다.

공동선언 또는 합의서를 이행하기 위한 공동기구를 창설하여 이행하는 방안도 있으나, 공동기구도 어느 한 쪽이 그것을 유명무실하게 만들거나 최악의 경우 일방적으로 거기에서 탈퇴해버리면 그것으로 끝이다.

지금까지 남북이 채택한 공동선언이나 합의서는 반북대결을 추구하는 남측 정권에 의해 무효화되었다. 만일 김영삼 정권이 반북대결을 중지하고 1991년에 채택된 '남북기본합의서'를 충실히 이행하였더라면, 20년이 지난 오늘 한반도에는 통일국가가 세워졌을 것이고, 만일 이명박 정권이 반북대결을 중지하고 2007년에 채택된 10.4 선언을 충실히 이행하였더라면, 4년이 지난 오늘 한반도에는 6.15 공동선언을 실현하는 통일의 기운이 넘쳐났을 것이다. 그러나 남북기본합의서도 6.15 공동선언도 10.4 선언도 우파정권의 외면과 거부로 이행되지 못하였다.

핵심적인 문제는 남측 정권이 반북대결을 추구하느냐 아니면 민족화해를 실현하느냐 하는 것이다. 백악관의 눈치나 살피면서 그들이 허용하는 교류협력이나 추진하는 친미중도우파정권이 등장하면, 민족화해를 북측과 합의하였더라도 실제로는 교류협력 이상으로는 나아가지 못한다.

또한 백악관에 아부굴종하면서 그들이 선호하는 반북대결을 고집하는 친미우파정권이 등장하면, 오늘 현실이 보여주는 것처럼 대북교류협력마저 차단당하게 된다. 한반도 통일의 불가역적 실현경로는, 남측에 하루빨리 민족화해를 실현할 자주적 중도좌파정권이 등장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민족화해 실현은 남측 정권 문제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현재 남측에서 민족화해를 실현할 정치세력은 민주노동당밖에 없으므로,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이 평화통일을 지향하며 민족화해를 실현할 새로운 중도좌파정권을 세워야 문제가 풀릴 것이다.
  
민족화해를 실현할 정권을 먼저 세우고, 그 이후에 평화통일을 실현할 정권을 세우는 단계적 시나리오도 예상할 수 있다. 실제로 실현될 가능성은 없지만, 선거일정에 따른다면, 2012년에 민족화해를 실현할 새로운 정권을 세우고, 2017년에 평화통일을 실현할 정권을 세우는 단계적 시나리오, 이것이 한반도 통일의 불가역적 실현경로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정치활동가들은 그 경로로 다가가는 정치활동에 진력할 때를 맞았다. (2011년 6월 17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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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5

길고 고통스러운 쇠퇴기

진실의 말팔매 <24>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최근 미국 언론에 나온 두 가지 정보가 눈길을 끈다.

하나는 미국의 대량실업에 관한 것이다. 2011년 6월 6일 미국 텔레비전방송 <cbs>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미국 전체 실업자 가운데 45.1%에 이르는 620여 만 명이 여섯 달 이상 일자리를 찾지 못한 장기실업자로 전락하였고, 6개월 이상 장기실업자 가운데 100만 명이 실업급여마저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1930년대 대공황기의 실업률을 넘어선 사상 최고의 실업률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 주택시장 붕괴에 관한 것이다. 2011년 6월 14일 미국 텔레비전방송 <cnbc>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2006년 이후 미국 주택가격이 33%나 떨어졌다는 것이다. 1930년대 대공황기에 주택가격 하락률은 31%였는데, 지금은 그보다 더 악화된 것이다.

실업률은 노동계급의 소득격감을 나타내는 지수이고, 주택가격 하락률은 중산층의 자산격감을 나타내는 지수다. 소득과 자산이 대공황기에 비해 더 줄어들었다는 것은, 미국의 노동계급과 중산층이 대공황기보다 더 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음을 말해준다. 미국의 혹심한 경제난은 아래 자료에서도 입증된다.
 
△1930년대 대공황 시기 빵을 타기위해 줄지어 선 뉴욕시민들 

<로이터 통신> 2010년 1월 26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 전체 가구 가운데 18.2%가 소득감소로 식량구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어린아이가 있는 가구 가운데 24.1%가 식량구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미국 농무부는 2008년 한 해 동안 미국인 4,910만 명이 일정 기간 식량구입을 하지 못해 고통을 겪었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월 스트릿 저널> 2009년 12월 18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에서 장기요금체납으로 전기, 가스, 수도가 끊긴 가구가 430만 가구에 이르렀다. 이것은 미국의 노동계급이 1930년대 대공황보다 더 심한 경제난에 겪고 있음을 말해준다.

 <월 스트릿 저널> 2010년 1월 5일 보도에 따르면, 2009년도 미국의 개인파산은 141만 건에 이르렀다. 이것은 미국에 금융위기가 몰아닥쳤던 2008년보다 32%가 늘어난 것이다. 2008년에 파산당한 미국인은 연소득 4만-8만 달러 수준의 빈곤층이었지만, 2009년에 파산당한 미국인은 연소득 10만-30만 달러 수준의 중산층이다.

이것은 미국의 중산층이 1930년대 대공황보다 더 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음을 말해준다. 미국의 근로대중과 중산층이 대공황기보다 더 심한 고통을 겪는 것은, 미국의 빈부격차가 사상 최대로 벌어졌음을 말해준다.

미국의 근로대중이 1930년대 대공황보다 더 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는 데도, 미국의 정부와 언론은 미국이 대공황에 빠졌다는 사실을 공식 인정하지 않고 있다. 대공황보다 더 심한 파국에 빠졌다는 사실이 각종 지표를 통해 드러났는 데도, 그들은 대공황(great depression)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대후퇴(great recession)이라는 어색한 신조어를 쓴다.

이것은 미국인들을 주저앉게 만들 심리적 공황(panic)을 피해보려는 궁여지책이다. 그렇지만 대공황이라는 말을 일부러 쓰지 않아도, 대공황이라는 현실은 그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객관적 현실로 존재한다.

△오늘의 미국 근로대중은 대공황기보다 더 심한 경제적 고통을 겪고 있다.

미국은 뉴딜정책과 전시경제로 1930년대 대공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정보통신산업과 군사비 삭감으로 1980년대 경제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2000년대에 또 다시 몰아닥친 대공황에서 벗어날 탈출구를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미국의 목을 조이는 경상수지적자와 재정수지적자와 국가채무가 이미 위험수위를 넘었고, 정보통신산업과 같은 새로운 경제성장동력이 없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대공황 탈출구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미국에게는 전시경제도 대책이 되지 못한다. 미국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지역은 한반도와 중동이지만, 한반도는 핵무장 군사강국으로 등장한 북측이 강력한 전쟁억지력을 보유하였으므로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고, 석유공급 중심지인 중동에서 전면전이 일어나면 미국 경제의 붕괴를 더 재촉하게 되므로 미국은 그 지역에서도 전쟁을 일으키지 못한다.

지난 10여 년 동안 미국은 '반테러전쟁'이라는 간판을 내건 저강도 전쟁에 줄곧 매달려왔는데, 오늘 재정수지적자에 허덕이는 미국은 '반테러전쟁'에 들어가는 전비를 대주기에도 숨이 찰 지경이다. 한 마디로, 미국을 붕괴위험에서 건져줄 대공황 탈출구는 없는 것이다.

대공황 탈출구가 없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미국 경제가 무너지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미국 경제가 무너진다는 말은 미국 경제를 중심으로 건설된 전 세계 자본주의시장경제가 함께 무너진다는 뜻이다.

1930년대나 1980년대에는 미국 경제가 무너져도 전 세계 자본주의시장경제가 동반붕괴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전혀 다르다. 미국발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 자본주의시장경제를 단일체제로 꽁꽁 묶어놓은 것이다. 세계화의 비극은 일찌감치 그렇게 잉태되었다.

이처럼 미국 경제가 무너지고 그에 따라 전 세계 자본주의시장경제가 무너질 붕괴위험이 눈에 보이는 데도, 어떤 사람들은 현재 위험을 신자유주의 붕괴위험 정도로 가볍게 생각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전 세계 자본주의시장경제가 전반적으로 무너질 위험이 존재하고 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명백하게도, 21세기 자본주의시장경제는 발전전망을 완전히 상실하고 붕괴위험에 빠져버린 것이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시장경제는 자본주의체제의 중핵이므로, 전 세계 자본주의시장경제가 대공황으로 무너지는 것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지배해온 자본주의세계체제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서 세 가지 문제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첫째, 19세기 고전이론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격화되어 자본주의체제가 필연적으로 멸망하고 사회주의체제로 이행할 것이라고 예상한 이론이다. 그러나 1930년대와 1980년대에 파국적 위기를 겪었으면서도 자본주의체제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 당시 미국이 파국적 위기를 피할 위기관리능력을 발휘하였기 때문이다.

미국의 위기관리능력은 1930년대의 뉴딜정책과 전시경제, 그리고 1980년대의 새로운 경제성장동력과 군사비 삭감으로 나타났다. 맑스가 아무리 뛰어난 분석력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거의 100년 뒤에 나타날 위기관리능력까지 예측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본주의 멸망론을 좌파적 상상력의 오류라고 생각하였다.

둘째, 2010년대에 겪고 있는 붕괴위험은 극적인 붕괴현상을 몰고 오지 않는다. 미국 경제가 무너지고 그에 따라 전 세계 자본주의시장경제가 무너져도, 1930년대 대공황 때처럼 몇 년 몇 월 몇 일에 붕괴될 것이라고 예측할 수는 없다. 붕괴를 막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기는 했어도 위기관리능력이 극적인 붕괴를 어느 정도 방지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 세계 자본주의시장경제의 붕괴를 종말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비과학적이다. 지금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시장경제가 길고 고통스러운 쇠퇴기를 지나며 무너져내릴 것이라는 점이다. 그 쇠퇴기가 30년 동안 이어질지 아니면 50년 이상 길어질지 예측하기 힘들다.

셋째, 19세기 고전이론은 자본주의 멸망이 사회주의 이행으로 직결된다고 예상하였다. 그러나 자본주의체제가 극적으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길고 고통스러운 쇠퇴기를 거치며 무너지기 때문에, 사회주의체제로 자동 이행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진보적 인류의 사회주의적 이상은 자동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역사발전을 긴 안목으로 바라보면, 자본주의체제가 길고 고통스러운 쇠퇴과정을 거치며 무너지는 한 편, 사회주의체제도 길고 복잡다단한 생성과정을 거치며 일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자본주의 쇠퇴기와 사회주의 생성기가 겹쳐지는 시대가 얼마나 길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다.

그런데 지구 위에서, 아니 인류 역사 전 기간을 통틀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적대적으로 대립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지역은 한반도다. 자본주의의 쇠퇴와 사회주의의 생성이 인류사에 던져주는 난해한 물음을 풀어줄 21세기의 해답을 한반도 통일에서 찾을 수 있을까?

 미국이 쇠퇴하는 시기에 실현될 한반도 통일은 민족사적 의의와 세계사적 의의를 함께 지니는 대사변이 될 것이다. 6.15 공동선언 기념일을 맞은 오늘 그 선언의 깊고 넓은 의미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2011년 6월 15일 작성)

*** 스마트폰 사용자는 모바일뷰로 보실 수 있습니다.

2011/06/11

필리핀 신애국동맹의 정체와 일본 사민당의 몰락

변혁과 진보 (35)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필리핀과 일본의 진보정당 경험을 주목하는 까닭

세계 각국에서 축적되어온 변혁과 진보의 다양한 경험들을 살펴볼 때, 우선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동아시아를 주시하게 된다.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 가운데 특히 필리핀과 일본을 주시하는 까닭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의 속국으로 전락한 그 두 나라가 예속자본주의의 길을 걸어온 역사적 경험을 지녔기 때문이다.

미국이 필리핀과 일본을 속국으로 만든 과정은 이른바 '안보조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완결되었다. 6.25 전쟁의 불길이 한반도를 휩쓸고 있었던 전시에 미국은 1951년 8월 30일 필리핀과 '상호안보조약'을 맺었고, 같은 해 9월 8일 일본과 '안보조약'을 맺었다. 미국은 필리핀, 일본과 더불어 남측과도 '안보조약'을 맺어야 했으나, 6.25 전쟁이 지속되는 바람에 뒤로 미루다가 정전협정에 조인한 직후인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안보조약'을 맺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논의의 배경에 두면서, 이 글의 관심사는 필리핀과 일본에서 진보정당들이 각기 겪어온 역사적 경험을 인식하는 문제에 집중한다.

이 땅에 민주노동당이 대표적 진보정당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처럼, 필리핀에는 신애국동맹이 있고, 일본에는 사민당이 있다. 물론 민주노동당, 신애국동맹, 일본 사민당이 넓은 의미의 진보정당이라 해도 정치노선은 서로 크게 다르다. 이 땅의 민주노동당은 중도좌파정당이고, 필리핀의 신애국동맹은 좌파연합정당이고, 일본 사민당은 중도우파정당이다.

정치이념지형을 보면, 민주노동당은 필리핀 신애국동맹과 일본 사민당의 중간쯤에 자리잡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정치이념지형의 차별성이 말해주는 것은, 필리핀에서 사회계급적 모순이 격화되고 중산층이 발달하지 못하였으므로 필리핀 진보정당이 좌파노선을 추구하고, 일본에서 사회계급적 모순이 상대적으로 느슨하고 중산층이 발달하였으므로 일본 진보정당이 중도우파노선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땅의 사회계급적 모순은 필리핀과 일본의 중간수준에 있으므로, 이 땅의 진보정당은 중도좌파노선을 추구하는 것이다.
  
만일 이 땅의 사회계급적 모순이 필리핀에서 그러한 것처럼 격화된다면,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은 민주노동당 이외에 새로운 좌파정당을 건설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 땅의 사회계급적 모순이 일본에서 그러한 것처럼 매우 느슨해진다면, 민주노동당은 중산층을 위한 정책을 더욱 강화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치현실, 사회경제적 지표, 사회계급구성 등을 비교해보면, 이 땅의 사회계급적 모순은 일본에서 그러한 것처럼 느슨해질 가능성은 보이지 않고, 되레 필리핀 쪽으로 기울어질 격화의 가능성이 보인다. 따라서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이 민주노동당을 건설하고 중도좌파노선을 추구하는 것은 현 시기 사회계급구성에 대한 사회변혁운동의 정합성을 정확히 반영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객관적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이 땅에서 좌파정당, 노동자계급정당, 사회주의정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급진좌파노선이나, 사회변혁전망을 내려놓고 사민주의정당, 중산층정당, 복지정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중도우파노선은 현 시기 사회계급구성에 대한 사회변혁운동의 정합성을 반영하지 못하는 오류가 아닐 수 없다. 

민주노동당은 2000년에 창당되어 중도좌파노선을 추구해왔는데, 필리핀 신애국동맹은 1985년에 결성되어 26년 동안 좌파노선을 추구해왔고, 일본 사민당은 1945년에 일본 사회당으로 창당되었고 1996년에 일본 사민당으로 당명을 바꾸었으니 당명 개정 이후 11년 동안 중도우파노선을 추구해왔다. 신애국동맹의 26년 좌파노선과 일본 사민당의 15년 중도우파노선이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민주노동당이 걸어온 11년 중도좌파노선을 성찰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신애국동맹은 왜 정체상태에 빠졌을까?

신애국동맹(New Patriotic Alliance)은 바얀(BAYAN)이라고도 불리는 데, 바얀이란 바공 알량상 마까바얀(Bagong Alyansang Makabayan)이라는 타갈로그어 조직명칭의 약칭이다. 신애국동맹이 결성된 배경사는 196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오른다. 당시 필리핀의 사회변혁운동가들은 필리핀 사회변혁운동의 성격을 "반제자주노선에 기초한 새로운 형태의 민족민주운동(national democratic movement)"을 규정하였다. 

박정희 친미독재정권이 1972년에 '유신체제'를 세우고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이 땅의 민족민주운동을 짓밟은 것처럼, 마르코스 친미독재정권도 1972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필리핀 민족민주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이 땅의 친미독재정권은 1979년 부마민중항쟁과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군부의 학살작전으로 진압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필리핀의 친미독재정권은 1983년 8월 21일 저명한 야당지도자 베니그노 아퀴노를 암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아퀴노 암살은 필리핀 민족민주운동을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는 기폭제로 되었다. 1985년 5월 1일 세계노동절을 맞으며 지역과 부문으로 분산된 민중운동세력이 총결집하여 연합전선체를 창설하였으니, 그것이 신애국동맹이다.

신애국동맹에는 18개 진보적 대중조직들이 결집되었는데, 5.1운동노동센터(KMU), 필리핀농민운동(KMP), 청년동맹(Anakbayan), 필리핀학생동맹(LFS), 필리핀기독교학생운동(SCMP), 여성단체전국동맹(Gabriela), 여성노동자운동(KMK), 여성농민연합(PWA), 도시빈민여성연합(Samakana), 민주의료동맹(HEAD), 정의평화일치운동(EMJP), 진보교원동맹(ACT), 어민연합(Pamalakaya), 단결, 인정, 진보를 위한 공무원협의회(COURAGE), 교회의 책임을 위한 진흥회(PCPR), 전국소수자연합(KAMP), 국제이민자(MI), 1/4분기 폭풍운동(FQSM)이다.

신애국동맹은 "민족해방과 사회해방을 성취하기 위해 미제국주의, 봉건주의, 관료자본주의를 반대하는 필리핀 민중의 투쟁을 힘있게 전개한다"고 선언하여 자기의 좌파노선을 천명하고 8대 강령을 제시하였다. 1994년 4월에 채택된 신애국동맹 8대 강령은 반제자주강령, 민중민주주의강령, 경제자립강령, 민중복지강령, 민족민주문화강령, 소수민족자결강령, 양성평등강령, 국제연대강령이다. 

민주노동당과 신애국동맹은 연합전선체 형태의 정당이라는 점에서는 똑같은데, 민주노동당은 개별당원들의 결합체인 것에 비해 신애국동맹은 대중조직들의 결합체다. 이 땅에서는 대중정당 형태의 연합전선체(민주노동당)과 대중조직 형태의 연합전선체('민중의 힘')로 역할이 분담되지만, 필리핀에서는 대중조직 형태의 연합전선체가 정당 역할까지 수행한다.
 
필리핀에는 신애국동맹이라는 진보적 대중정당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비합법 전위정당인 필리핀공산당(CPP)도 있고,  그 당이 이끄는 비합법 연합전선체 민족민주전선(National Democratic Front)도 있고, 그 당의 무장조직인 신인민군(New People's Army)도 있다. 필리핀공산당은 1968년 12월 26일에 창당되었고, 민족민주전선과 신인민군은 1969년 3월 29일에 각각 창설되었다. 이것은 진보적 대중정당만 존재하는 이 땅의 정치현실과 필리핀의 정치현실이 매우 다르다는 점을 말해준다.

어느 나라에서나 진보적 대중정당은 원내진출과 대선참여를 중심으로 합법정치활동을 전개한다. 따라서 대중정당의 정치활동을 평가하는 객관적 기준은 그 정당이 대중적 지지기반을 얼마나 광범위하게 구축하였는가 하는 것으로 설정되며, 대중정당의 대중적 지지기반은 원내진출 수준에 직접적으로 반영된다. 그러면 신애국동맹의 원내진출 수준은 어떠한가?

양원제로 운영되는 필리핀 의회는 상원 24석, 하원 287석으로 구성되었는데, 필리핀 정치권을 장악한 5대 정당의 의석수는 이렇다. 자유당(Liberal Party)은 상원 4석, 하원 118석을 차지했고, 민주당(Lakas Kampi CMD)은 상원 4석, 하원 45석을 차지했고, 민족주의당 (Nacionalista Part) 상원 4석, 하원 22석을 차지했고, 국민연합(Nationalist People's Coalition)은 상원 2석, 하원 32석을 차지했고, 필리핀 대중의 힘(Force of the Filipino Masses)은 상원 2석, 하원 5석을 차지했다.

그런데 신애국동맹은 상원에서 한 석도 차지하지 못했고, 하원 287석 가운데 7석을 차지하였을 뿐이다. 또한 지방자치단체장 79석 가운데 한 석도 차지하지 못했고, 지방의회 756석 가운데서도 한 석도 차지하지 못했다. 더욱이 독자 대선후보출마는 생각하기 힘들다. 신애국동맹이 26년 동안 대중적 진보정당으로 활동해왔는데도 대중적 지지를 그것밖에 얻지 못했다면 당의 발전이 정체된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그러한 정체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신애국동맹은 진보적 대중정당이면서도 결성 이후 오랫동안 총선과 대선에 참가하지 않았다. 민중항쟁노선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좌편향으로 흘렀던 것이다. 신애국동맹이 총선에 처음 참가한 때는 결성 이후 16년이 지난 2001년이었다.

필리핀에는 비합법 전위정당도 있고, 비합법 연합전선체도 있으므로, 진보적 대중정당인 신애국동맹이 선거참여를 거부하고 민중항쟁노선에만 의존할 필요는 없는데도 민중항쟁노선에 전적으로 의존해왔다. 또한 좌파노선을 추구하는 신애국동맹은 중도우파세력들과 정치적으로 연합하여 대중적 지지기반을 확대하고 정치역량을 강화하여야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않고 독자발전의 길만 모색해왔다. 신애국동맹의 이러한 좌편향 정치노선은 그 당을 정치적으로 고립시키고 그 당이 발전하는 길을 가로막은 전략적 오판이었다.


일본 사민당은 왜 몰락하였을까?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제가 패망하였던 1945년에 일본에서 사회주의 정치노선을 추구하는 사회당이 창당되었다. 창당 이후 일본 사회당은 진보적 노동운동을 기본으로 하는 대중적 지지기반을 꾸준히 확대하여 제1야당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일본이 겪은 사회계급구성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우편향 오류를 반복하다가 결국 몰락하고 말았다. 비극적인 몰락의 사연은 이렇다.

원래 일본 사회당의 대중적 지지기반은 일본노동조합평의회(총평)였다. 총평은 1950년 7월에 결성되어 한때 화학노조, 공무원노조, 교직원노조, 철도노조, 체신노조, 금속노조 등 노조원 550만 명을 망라하며 가장 강력한 조직력을 지녔으며, 1960년대에는 미일안보조약 페기투쟁, 주일미국군기지 철거투쟁을 주도하였다.

그런데 1970년대 이후 일본의 사회계급구성에 커다른 변화가 생겼다. 노동계급이 분화되고, 도시중산층이 인구구성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커다란 변화를 겪은 것이다. 일본 사회당은 그러한 사회계급구성의 변화를 주시하고 그에 대응해 새로운 전략을 모색해야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일본 사회당은 여전히 맑스주의 고전이론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총평을 자기의 유일한 지지기반으로 삼았다.

일본에서 사회계급구성이 변화하는 것에 따라 노동운동도 변화을 겪었다. 일본 사회당의 지지기반이었던 총평은 날로 쇠락하더니, 1989년 11월에 자진해산하고 새로 건설된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에 흡수통합되었다. 총평 해산은 일본 사회당을 지지해온 진보적 노동운동이 사라지고, 일본 사회당이 더 이상 좌파노선을 견지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말해주는 사건이었다. 총평 해산 이후 일본 사회당은 급속히 우경화되었다.

일본 사회당은 1990년 4월에 열린 당대회에서 좌파노선을 버리고 중도좌파노선을 뛰어넘어 중도우파노선으로 급전환하였다. 당의 정치이념을 사회주의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를 뛰어넘어 사회민주주의로 바꾼 것이다. 1996년에는 당명도 사회당에서 사민당으로 바꾸고 자위대, 미일상호방위조약, 한일국교정상화를 인정하는 우경화의 길로 나아갔다. 그러나 일본 사회당의 우경화는 당의 부흥이 아니라 당의 몰락을 재촉하는 지름길이었다.

일본 사회당이 좌파노선을 견지하고 있었을 때는 우파정당과의 정치연합을 생각하지도 않았으나, 일단 중도우파노선으로 급전향하자 우파정당과의 정치연합에 거리낌을 느끼지 않았다. 이를테면, 일본 사회당은 1993년에 호소카와 연립정권에 참가하였는데, 호소카와 연립정권은 호소카와가 자민당에서 탈당하여 창당한 일본신당을 중심으로, 사회당, 공명당, 민사당, 신당사키가케, 사회민주연합,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가 결성한 우파연립정권이었다.

일본 사회당은 호소카와 연립정권에 참가한 뒤로 얼마 가지 않아 그 연립정권에서 탈퇴하였고, 1994년 6월 30일에는 일본 우파정당의 대표격인 자민당, 그리고 신당사키가케와 정치적으로 연합하여 3당 연립정권을 세웠다. 이것이 사회당 출신 무라야마를 총리로 하는 3당 연립정권이다.

3당 연립정권에서 사회당 출신 무라야마가 총리직을 차지했으나, 일본 사회당이 우파정당들과 정치적으로 연합한 것은, 현재 이 땅의 정치권에 비유하면, 민주노동당이 한나라당과 정치적으로 연합하여 우파연립정권을 세운 것과 마찬가지였다. 무라야마 연립정권이 미일안보조약을 인정하고 일본의 비무장 중립노선을 폐기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총평 해산과 급속한 우경화 노선이 일본 사회당에게 안겨준 것은 대중적 지지기반의 급속한 붕괴밖에 없었다. 일본의 각계각층 근로대중은 우경화한 일본 사회당을 외면하였다. 그 결과, 일본 사회당은 1996년 7월 18일에 실시된 중의원(하원) 선거에 사민당으로 당명을 바꿔 참가하였으나 480석 가운데 2석밖에 얻지 못하고 완전히 몰락하였다.

 1990년 2월 18일에 실시된 중의원 선거에서 136석을 차지한 제1야당 사민당이 불과 6년만에 재기불능상태에 빠져버린 충격적인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그 이후 사민당의 중의원 선거결과를 보면, 일본 사민당 당수로 등장한 저명한 여성정치인 도이 다까꼬의 대중적 인기가 힘을 발휘하여 2000년에 19석으로 조금 증가하였다가, 2005년과 2009년에 각각 7석으로 다시 주저앉았다.

재기불능상태에 빠진 일본 사민당은 2009년 9월 16일 하토야마 3당 연립정권에 참가하였다. 하토야마 3당 연립정권은 민주당, 사민당, 국민신당이 결성한 연립정권이다. 그런데 간판은 연립정권이었으나, 민주당이 308석, 사민당이 7석, 국민신당이 3석을 각각 차지한 상태에서 정치적으로 연합한 것이었으니 실제로는 연립정권이 아니라 민주당 정권이었다.

일본 사민당은 오키나와 후텐마 미국군기지 이전문제를 둘러싸고 친미성향의 일본 민주당과 정면충돌하는 바람에 2010년 5월 28일 연립정권에서 탈퇴하였다.

일본 사회당이 사민주의 복지담론에 매몰되어 좌파노선에서 중도우파노선으로 급선회하고 당명을 일본 사민당으로 바꾼 것은 정치적으로 몰락하는 길을 재촉하였다. 1970년대 이후 일본에서 사회계급구성이 변화되고 중산층이 발달한 것은 일본 사회당이 좌파노선을 더 이상 유지하기 못하게 만든 요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좌파노선에서 중도좌파노선을 건너뛰어 중도우파노선으로 급전환한 것은 명백한 우편향 오류였다.

만일 1970년대 이후에 일본 사회당이 중도좌파노선을 견지하면서 중산층을 포섭하는 새로운 정책을 제시하고, 사민주의정치세력들과 연합전선을 구축하였더라면 집권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지 모른다.

 
민주노동당에게 필리핀 신애국동맹과 일본 사회당의 실패경험은 반면교사의 가르침을 준다

위에서 논한 것처럼, 필리핀 신애국동맹의 좌편향 오류와 일본 사회당의 우편향 오류는 그 두 나라에서 사회변혁의 앞길을 가로막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되었다.

노동계급이 분화되고 중산층이 발달했다는 점에서 필리핀보다 일본의 사회계급구성에 더 가까운 이 땅에서 민주노동당이 만일 필리핀 신애국동맹처럼 중산층을 외면하고 노동계급에만 의존하며, 중도우파정당들과의 정치연대를 거부하고 민중항쟁노선에만 의존하는 것은 정치적 고립을 자초하여 당의 발전을 스스로 가로막는 정체의 지름길이다.

또한 이 땅의 사회계급구성이 필리핀보다 일본에 더 가깝다고 해서, 민주노동당이 만일 일본 사회당처럼 사회변혁을 포기하고 사민주의 복지담론에 매몰되며, 무분별하게 우파정당과 정치적으로 연합하는 것은 자기의 대중적 지지기반을 스스로 허물어버리는 몰락의 지름길이다.

오늘 새로운 진보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노력하며 2011년 총선과 대선에 대처할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는 민주노동당에게 필리핀 신애국동맹과 일본 사회당의 실패경험은 반면교사의 가르침을 준다. (2011년 6월 11일 작성)

2011/06/07

밀란 공항에서 일어난 구두 60켤레 압수소동

진실의 말팔매 <23>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2011년 6월 1일 <로이터 통신>에 나온 뉴욕 유엔본부발 보도기사는, 유엔 제재위원회 소속 전문가 집단(Panel of Experts)이 작성한 대북제재 실태보고서를 읽어본 어느 유엔 주재 외교관이 <로이터 통신> 기자에게 흘려준 정보를 인용한 것이다. 인용보도에 따르면, 2010년 10월 이탈리아 밀란(Milan)의 오리오 알 쎄리오(Orio al Serio) 국제공항 세관당국이 북측으로 수출하기 위해 항공화물로 적재된 물품을 적발, 압수하였다.

<아사히신붕> 2011년 5월 31일 보도에 따르면, 압수물품은 미국산 수제품 탭댄스 구두 60켤레였다고 한다. 그들이 탭댄스 구두를 압수한 까닭은, 그 구두가 유엔 제재위원회 금수조치가 규정한 사치품목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국산 수제품 탭댄스 구두 한 켤레의 값은 180-200달러이므로, 북측은 약 12,000달러를 주고 미국산 탭댄스 구두 60켤레를 이탈리아를 거쳐 수입하려던 참이었다.

보도에 따르면, 밀란 공항에서 항공화물로 적재된 탭댄스 구두 60켤레의 행선지는 중국이었다. 북측은 중국을 통해서 그 물품을 우회수입하려고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탈리아 세관당국은 그 적재화물이 북측 수입품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냈을까? 중국에까지 침투하여 북측 동향을 감시하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아니면 그런 정보를 파악할 정보기관은 없다. 따라서 미국 중앙정보국이 이탈리아 세관당국에게 제보하여 압수조치를 강행한 것으로 짐작된다. 

자본주의나라의 부유층과 특권층은 품목당 수 만 달러 짜리 각종 사치품을 세계 각국에서 대량수입하여 향락과 방탕에 흥청망청 낭비하는데, 북측은 왜 200달러 짜리 탭댄스 구두를 수입해서는 안 되는가! 부유층과 특권층의 사치와 방탕이 극에 달한 미국이 유엔 간판을 빌려 대북금수조치를 조작해놓은 것이야말로 북측을 고립압살하려는 횡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탭댄스 구두 압수소동에서도 드러난다.



미국산 수제품 탭댄스 구두
 그런데 <아사히신붕>은 북측이 수입하려다가 압수당한 탭댄스 구두가 일반인들이 사용한다고 생각할 수 없는 사치품이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위한 무용단이 사용하는 것으로 판단하여 압수당했다는 '해석'까지 덧붙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그러면 일본에서는 탭댄스 구두를 일반인이 아무나 신는다는 말인가? 어느 나라에서나 탭댄스 구두는 전문무용수들이나 무용애호가들이 신는 특수신발이지 아무나 신는 일반구두가 아니다.

그것은 그렇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위한 무용단이 탭댄스 구두를 신든다는 말은 또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인가. 북측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무조건 비방중상하는 악습은 <아사히신붕>보다 <중앙일보>가 한층 더 심했다. <중앙일보> 2011년 6월 2일 단독보도에 따르면, "북한에서 탭댄스를 추는 사람은 이른바 기쁨조 멤버들 뿐이다. 북한이 공개하는 '아리랑' 등 각종 공연에서도 탭댄스는 없다"는 것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기쁨조'라는 것을 날조해놓고, 탭댄스를 '기쁨조'에 연결시키는 수법은 악의적인 비방중상의 극치다.   

북측 무용수들 가운데도 탭댄스를 추는 무용수들이 있을까? 대북정보에 밝은 사람이라면, 북측 무용계에서도 탭댄스를 공연하고 있음을 알 것이다. 북측에서는 탭댄스를 타프춤이라 한다.

남북을 가릴 것 없이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노래와 춤이 어울어진 멋과 풍류를 즐기는 민족인데, 특히 춤은 북측 군중문화에서 중요한 요소다. 예술선전대가 연주하는 흥겨운 선율에 신바람이 나서 춤판을 벌이는 인민들이나 군인들의 모습은 북측에서 일상적이다. 물론 타프춤은 특수신발을 신고 무대에 올라야 하고, 독특한 발동작을 배워야 출 수 있으므로, 전문성을 갖춘 무용수들이 공연하는 춤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북측에서 타프춤 무용수들은 인민군협주단 소속 무용수들이다. <조선중앙통신> 2009년 7월 26일 보도에 따르면, '조국해방전쟁 승리 56돐 기념 조선인민군협주단 경축공연'이 평양에 있는 4.25문화회관에서 7월 26일에 진행되었는데, 그 공연은 타프춤 '승리의 명절'로 시작되었다. 인민군협주단이 6.25전쟁 기념공연 첫 종목을 타프춤으로 정한 것은, 타프춤이 인민군대에서 자주 공연되는 무용종목임을 말해준다. ( * 당시 인민군협주단의 타프춤 공연은 남측의 <연합뉴스>에서도 동영상 보도를 했다. 동영상 보기http://app.yonhapnews.co.kr/YNA/Basic/OnAir/YIBW_showMPICNewsPopup.aspx?contents_id=MYH20090728006300038  )

 
더 흥미로운 사실은, 인민군협주단이 해외공연에서도 타프춤을 선보였다는 점이다. 인민군협주단은 2009년 12월 3일 중국 심양에서 진행된 '조선인민군협주단 초대공연'에서 타프춤 '영웅의 모습'을 공연하였다. 인민군협주단 공연에 관한 정보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출항의 아침', '샘물터에서' 같은 제목의 타프춤을 공연하였음을 알 수 있다.


2009년 11월 27일 중국 베이징 중국극원에서 공연을 펼치는 조선인민군협주단.
                          아래 사진은 타프춤 공연 '영웅의 모습'. (신화통신 2009년 11월 27일 보도 사진) 


또한 <조선중앙통신> 2011년 3월 13일 보도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정은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리영호 인민군 총참모장, 그리고 당과 군대의 책임간부들과 함께 해군협주단 공연을 관람하였는데, 그 공연에서 타프춤 '조국의 바다를 지킨 기쁨을 안고'가 종목에 올랐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북측에서 타프춤은 인민군협주단의 정식공연종목들 가운데 하나고, 특히 해군협주단이 타프춤을 공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타프춤은 왜 해군협주단과 연관되는 것일까? 해군협주단이 타프춤을 공연하는 까닭은, 해병(남측에서는 해병대원을 해병이라 하지만, 북측에서는 해군병사를 해병이라 한다)들이 전투함 갑판에서 추는 타프춤을 해군협주단 무용공연으로 형상화하였기 때문이다. 해병들의 전투적인 군무, 바로 이것이 북측에서 공연되는 타프춤인 것이다.

원래 타프춤은 아일랜드 민속무용에 기원을 둔 것인데, '신대륙 아메리카'로 건너간 아일랜드 이민자들에 의해서 미국식 탭댄스로 변환되었다. 미국식 탭댄스는 1930년대 뉴욕 연예계에서 재즈와 결합되어 최고 인기를 누린 공연종목이었다.

그런데 인민군협주단이 공연하는 타프춤은 재즈와 결합된 탭댄스가 아니다. 북측의 타프춤은 8.15 해방 직후 소련군으로부터 전해졌다. 소련 해군 소속 예술공연단이 전투함 갑판에서 바얀(Bayan)이라는 손풍금 비슷하게 생긴 러시아 전통악기로 연주하는 빠른 선율에 맞춰 타프춤을 추었다. 그 당시의 해군공연전통이 오늘 인민군에게 전승되어 인민군협주단이 타프춤을 공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는 유엔 제재위원회의 무식한 전문가들은, 북측에서 수입하는 타프춤 구두를 사치품목으로 규정하였고, 이탈리아 세관당국은 그 구두를 압수하는 소동을 피웠고, 남측 수구언론매체들은 악질적인 반북론자들이 날조한 '기쁨조'까지 들먹이며 정신착란에 가까운 비방중상기사를 써갈겼던 것이다.

관련보도에 따르면, 이탈리아 세관당국은 북측으로 수출하려던 영화상영설비, 음악녹음장비, 피아노도 압수하였다고 한다. 북측에서 수입하려던 그러한 수입품목들은 한결같이 인민들과 인민군대를 위한 문화예술공연에 필요한 물품들이다.

비열한 압수소동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탈리아 세관당국은 벤츠 승용차, 양주, 화장품도 압수하였다. 남측의 생활경험에 비춰보면, 벤츠 승용차, 양주, 외제 화장품은 부유층과 특권층이 수입하는 사치품의 대명사이지만, 똑같은 물품이라도 북측에 들어가면 쓰임새가 전혀 달라진다. 자기들이 사는 사회체제와는 전혀 다른 사회체제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자기들에게 한정된 경험과 정보만 가지고 자기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오해 중의 오해다.

이를테면, 남측에 들어간 벤츠 승용차는 부유층과 특권층만 소유하는 사치품으로 되지만, 북측에 들어간 벤츠 승용차는 관용차로 된다. 북측에서 벤츠 승용차를 관용차로 사용하는 까닭은, 그 승용차 부속품을 독일에서 수입하지 않고 북측에서 제작하여 정비비용을 절약하기 때문이다.

북측은 1980년대에 벤츠 승용차와 비슷하게 생긴 승용차 시제품을 자체 개발한 경험이 있으므로, 벤츠 승용차에 들어가는 웬만한 부속품은 자체로 제작할 수 있다. 북측은 화물차와 군용차를 중심으로 자동차산업을 발전시켜왔는데, 북측 각지에 있는 자동차부속품공장들에서 차량부속품을 생산하고, 자동차수리공장들에서 각종 차량을 정비한다.
 
또한 값비싼 양주가 남측에 들어가면 부유층과 특권층이 즐기는 사치품으로 되지만, 똑같은 양주가 북측에 들어가면 북측을 찾아간 외빈을 위한 연회나 만찬 같은 의전석상에 내오는 품목이 된다. 또한 외제 화장품이 남측에 들어가면 중산층 이상의 구매력을 가진 여성들이 소비하는 고급상품으로 되지만, 똑같은 외제 화장품이 북측에 들어가면 화장품 제조기술을 발전시키는 데 쓸 견본상품으로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미국의 배후조종을 받는 유엔 제재위원회가 일으킨 압수소동은 북측을 고립압살하려는 충동이 빚어낸 무지막지한 횡포였음이 드러난다. 자주와 평화를 수호하려는 나라들에게 제재의 칼날을 들이대면서 제국주의 지배야욕에 장단이나 맞춰주는 유엔 제재위원회는 하루속히 해체되어야 한다. (2011년 6월 7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