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6/23

창피스러운 정책당대회 구호

진실의 말팔매 <25>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2011년 6월 18일과 19일 '통합과 연대, 진보적 정권교체'라는 총주제로 민주노동당 2011 정책당대회가 열렸는데, 대회장소로 사용된 건물 정면에 내걸린 큼지막한 붉은색 바탕 현수막에 파란색 글씨체로 'Change 2012'라고 써놓았다.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 제522호 제1면에는 한 술 더 떠서 붉은색 글씨체로 '체인지 2012'라고 써놓았다.


△ 민주노동당 2011 정책당대회 대회장에 걸린 현수막 (사진 출처 http://spic.kr/3SMs)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 제522호 제1면
 국제행사가 아닌 정책당대회에서 난데 없이 'Change' 또는 '체인지'라는 막돼먹은 외국어 구호를 버젓이 쓰다니 이게 어디 제 정신인가! 이명박 정권이 출범하면서 영어공용화와 영어몰입교육 따위를 떠들어대며 세상을 크게 어지럽히더니, 이제는 민주노동당마저 저들의 추잡한 장단에 춤을 추려는 것인가?  영어원어민이 읽어봐도 무슨 뜻인지 아리송한 이상한 영어 구호를 민주노동당 정책당대회에 내건 것은 경악할 만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Change 2012'라는 구호에 나오는 Change라는 영어낱말은 바꾸다라는 동사나 교체라는 명사로 각각 쓸 수 있다. 정책당대회 총주제에 '진보적 정권교체'라는 내용이 들어있으므로, Change라는 영어 구호는 교체라는 뜻의 명사형으로 쓰인 것이 분명하다. 만일 Change라는 영어 구호를 바꾸다라는 뜻의 동사형으로 썼다면, "2012년에 정권을 바꾸라"는 뜻이 아니라 "2012년이라는 연대를 바꾸라"는 뜻이므로 말이 되지 않는다.

이 땅의 진보정당이 내거는 정책당대회 구호는 당연히 우리말로 써야 하므로, '정권교체 2012'라는 우리말 구호를 내걸었어야 옳다. 그런데 'Change 2012'라고 써놓았으니, 그것을 우리말로 옮기면 '교체 2012'라는 우스꽝스러운 구호를 내걸고 정책당대회를 진행한 것이다.


△민주노동당 홍보미디어실에서 배포한 2011 정책당대회 홍보물
 
세계 각국 진보정당들이 당대회를 개최할 때, 자기 모국어로 쓴 구호가 아니라 외국어로 쓴 이상한 구호를 우스꽝스럽게 내거는 사례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독일 좌파당( Die Linke)의 2009년 5월 당대회 모습                                                              

△ 2009년 11월 베네수엘라에서 31개국 55개 좌파정당이 모여 개최한 국제 좌파정당의 회합에서 우고 차베스가 연설하고 있다.

노동자, 농민, 서민을 위한 정당이라고 자처하는 민주노동당이 노동자, 농민, 서민이 읽어도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할 막돼먹은 외국어 구호를 내걸고 정책당대회를 열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처럼 창피하고 기가 막힐 짓을 하고도 그것을 바라본 수많은 당원들 가운데 아무도 창피함을 느끼지 못하였다면, 더 절망적이다.

창피와 절망은 거기만 있는 게 아니다. 민주노동당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면, 'Change 2012'라는 엉터리 구호를 내걸고도 왜 창피함을 느끼지 못하는 불감증에 걸렸는지 알 수 있다.

민주노동당 홈페이지에는 안내를 HELP로, 참여를 COMMUNITY로, 활동을 ACTION으로, 소개를 INTRO라고 써놓았다. 의원소식은 Member News로, 언론이 보는 민주노동당은 Media로, 홍보물은 Promotion으로 써놓았다. 아예 TV Zone이라고 쓰고 그 밑에 우리글자로 티브이존이라고 써놓기도 하였다. 영어를 제대로 공부한 중학교 학생에게 써넣으라고 해도 그렇게 엉터리 영어를 써넣지는 않을 것이다. 민주노동당 '얼굴'에 먹칠을 하는 짓은 바로잡아야 한다.

몇 일 전 나는 미국인들에게 민주노동당을 소개해야 할 기회가 있었으나 민주노동당 홈페이지에 영어판이 없어 좋은 기회를 포기하고 말았다. 영어낱말 몇 개 주워 들은 유아 수준의 영어구사력을 가지고 민주노동당 홈페이지를 창피하게 만들어놓을 것이 아니라, 민주노동당을 세계에 알리는 정식 영어판을 홈페이지 안에 따로 만들어야 한다. 민주노동당이 세계 각국의 진보정당들과 소통하고 협력하는 국제연대활동은 거기서 시작된다. 
   
민주노동당이 추구하는 사회변혁의 대상은, 남들보다 영어를 더 잘 해야 출세하는 더러운 세상이고, 영어 깨나 한다는 미국 유학파 먹물들이 자본과 권력을 독점해버린 낡고 썩은 세상이다. 그런데 세상을 바꾸자는 구호를 내건 민주노동당이 그런 더러운 세상, 낡고 썩은 세상의 흙탕물에 한 쪽 발을 질퍽하게 담그고 있다니 절대 아니 될 일이다.
 
민주노동당은 이번 기회에 깊이 반성하고 자주적 어문정책에 대해 관심해야 할 요구가 제기되었다. 장차 민주노동당이 집권하면 자주적 어문정책부터 실시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주적 어문정책은 장차 진보적 민주주의체제에서 살아갈 이 땅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새로운 세계관을 열어줄 통로가 될 것이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언어는 의사소통의 도구만이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세계관의 직접적 반영이다. 언어가 없으면 세계관도 세울 수 없다. 미국인과 영국인은 영어로 세계를 인식하고, 중국인은 중국어로 세계를 인식하고, 프랑스인은 프랑스어로 세계를 인식하고, 독일인은 독일어로 세계를 인식하고, 한반도의 주인들은 우리말로 세계를 인식한다.

국제과학주간지 <네이처(Nature)> 2011년 4월 관련보도에 따르면, 막스 플랑크 심리언어학연구소(Max Planck Institute for Psycholinguistics)가 진화생물학 연구방법으로 4개 어족 301개 언어의 문법발달과정을 연구하였더니, 각 언어가 각자 고유한 문화발전과정에서 생성, 발달하였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결론은 모든 사람의 두뇌에 내재된 어떤 보편적인 언어처리과정에 따라 언어가 생성,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사회집단의 사회역사적 현실 속에서 언어가 생성, 발달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세계적인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Noam Chomsky)는 보편적인 공통요인에 의해 언어가 생성, 발달한다고 주장하였지만, 그것은 오류다. 언어는 그 언어를 쓰는 사회집단의 사회역사적 현실 속에서 생성, 발달한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이다.

명백하게도, 언어는 두뇌 속에 선험적으로 내재하는 생물학적 산물이 아니라 사회집단의 사회역사적 산물인 것이다. 따라서 민족어의 고유성과 독자성을 보존하는 것은 고루한 국수주의의 발동이 아니라 과학적 언어관의 발현인 것이다.

길게 설명할 필요 없이, 영어가 지배하는 예속적 현실 속에서 민족어가 차츰 소멸해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를테면, 필리핀에서는 고유언어인 타갈로그어가 가정에서나 쓰는 생활언어로 전락하고, 영어가 사회적 공용어로 되었다.

부탄에서는 고유언어인 종카어가 가정에서나 쓰는 생활언어로 전락하고, 영어가 사회적 공용어로 되었다. 미국에게 사상문화적으로 예속된 이 땅에서 민주노동당마저 영어 홍수 속에 휩쓸리면, 우리말과 우리글을 누가 지킬 것인가.

우리말, 우리글을 외국어, 외국글자와 함께 마구 섞어쓰면서 영어문법에도 어긋나는 괴상한 영어를 남발하는 짓은 이 땅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자주적 세계관을 짓밟는 언어시장 자유화의 만행이다.

민주노동당에 결집한 진보정치활동가들이 '제국의 언어'가 아니라 민족의 고유한 언어로 세계를 인식할 때, 그 때 비로소 이 땅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이 자주적 세계관을 세울 수 있다. (2011년 6월 23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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