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호석의 개벽예감](225)
자주시보 2016년 10월 31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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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 백악관 파견원은 누구였을까? 2. 비공식대화가 성사될 수 있었던 배경 3.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전언, 조선 외무성 당국자들의 반응 4. 비공식대화 사흘 뒤에 나타난 세 번째 특이징후
1. 백악관 파견원은 누구였을까?
건물외부를 온통 흰색으로 칠해놓은 백악관을 얼핏 보면 깨끗한 인상을 받게 되지만,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세계를 지배하는 모략과 음모가 거기서 꾸며지므로 흑악관이라는 이름이 어울린다. 그런 백악관에서 요즈음 특이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특이징후라는 것은 대조선관계에서 기존 행동과 다른 미국의 특이한 행동을 뜻한다.
첫 번째 특이징후는 2016년 5월 4일 제임스 클래퍼(James R. Clapper, Jr.) 국가정보국장이 미국 대통령 밀사로 서울에 급파되어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비밀회동을 갖고 평화협정문제를 거론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2016년 10월 17일 <자주시보>에 실린 나의 글 ‘밀사의 청와대 비밀회동과 조선의 전략핵압박’에서 자세히 논하였다. 나는 그 글을 쓸 때까지만 해도 특이징후가 청와대 비밀회동으로 끝났다고 여겼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런 게 전혀 아니었다. 첫 번째 특이징후가 나타난 날부터 4개월 반 정도 지난 2016년 10월 21일 두 번째 특이징후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콸라룸퍼에서 진행된 비공식대화에서 두 번째 특이징후가 나타난 것이다. 콸라룸퍼(Kuala Lumpur)는 말레이시아 수도이다. 나는 외국어학습을 그르치는 불합리한 외래어표기법을 따르지 않고 원음에 가까운 소리를 우리글로 표기하기 때문에 쿠알라룸푸르라고 표기하지 않고 콸라룸퍼라고 표기한다. 콸라룸퍼에서 진행된 비공식대화에서 나타난 두 번째 특이징후를 분석하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과 미국이 2016년 10월 21일과 22일 콸라룸퍼의 어느 호텔에서 비공식대화(unofficial dialogue)를 진행하여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비공식대화라는 것은 정부대표들이 공식적으로 진행하는 회담보다 격이 한 급 떨어지는 외교협상의 한 형태다. 그러므로 비공식대화에는 정부대표가 아니라 정부당국자 출신 인사나 비정부기관 전문가들이 참석하는 것이 관례다.
그러면 콸라룸퍼 비공식대화에 참석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조선에서는 한성렬 외무성 부상과 장일훈 유엔주재 차석대사를 비롯한 외무성 당국자 5명이 참석했고, 미국에서는 조섭 디트라니(Joseph R. DeTrani) 대니얼 모건 전문학교(Daniel Morgan Academy) 교장, 로벗 갈루치(Robert L. Gallucci) 미국 국무부 전직 대조선핵협상 대표, 지난날 몇 차례 조미비공식대화를 주선한 토니 남궁(Tony Namkung) 박사, 리언 씨걸(Leon V. Sigal) 미국 사회과학원 동북아안보협력사업 국장 등 4명이 참석했다. 미국의 관영매체인 <자유아시아방송> 2016년 10월 24일부 보도기사에 따르면, 토니 남궁 박사는 취재기자와 대담하는 중에 콸라룸퍼 비공식대화의 내용을 미국 정부에 보고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였다. 이것은 미국 정부부서들 가운데 어느 특정부서가 선정한 사람이 콸라룸퍼 비공식대화에 참석하였음을 말해준다. 그는 누구였을까? 위에 열거한 미국측 참석자들 가운데 주목되는 사람은 조섭 디트라니 교장이다. 지금 그는 워싱턴 디씨에 있는, 국가안보 및 정보부문 관리를 육성하는 사립기관인 대니얼 모건 전문학교의 교장이지만, 2003년부터 2006년까지 6자회담 미국측 특사로 일했으며, 부쉬행정부가 2005년 4월 국가정보국장실(Office of the Director Of National Intelligence)을 신설한 직후 국가정보국장실에 들어가 2010년까지 북조선담당관(North Korea Mission Manager)으로 일했고, 2010년부터 2012년까지 국가정보국장실 산하 국가비확산센터 소장으로 일했으며, 2012년부터 2014년까지 국가정보국장 선임보좌관으로 일했다. 위에 적은 경력을 살펴보면, 조섭 디트라니는 조선에 대한 정보를 분석하는 데서 실력을 인정받은 ‘제1인자’로서 미국 국가정보기관들이 수집한 조선에 대한 정보들을 분석, 종합하여 자기 직속상관들인 국가정보국장과 대통령에게 직보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면서 2년 전까지만 해도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의 ‘오른팔’로 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위에 열거한 몇 가지 사실을 살펴보면,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은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디트라니 교장을 2016년 10월 21일과 22일 콸라룸퍼에서 진행된 조미비공식대화에 파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섭 디트라니는 미국 정부와 무관한 민간인 신분이 아니라, 미국 국가정보국장이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콸라룸퍼 비공식대화에 보낸 백악관 파견원이었던 것이다. 약 4개월 반 시차를 두고 나타난 두 개의 특이징후 중심에서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이 그림자처럼 움직이고 있다.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은 대통령 밀사로 청와대를 방문하여 박근혜 대통령과 비밀회동을 진행하였고, 그로부터 4개월 반 뒤에는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디트라니 교장을 콸라룸퍼에 파견하여 조선 외무성 당국자들과 비공식대화를 진행하게 한 것이다.
2. 비공식대화가 성사될 수 있었던 배경
주목되는 것은, 정보사업을 총지휘하는 국가정보국장이 직접 나서서 조선을 상대하는 비공개외교활동을 전개하는 특이징후가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외교활동은 국가정보국장실 소관이 아니라 국무부 소관이다. 그런데 어떻게 되어 국가정보국장이 국무장관을 제치고, 자기 소관 이외의 비공개외교에 깊숙이 개입한 것일까? 이런 특이징후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지금 조선의 강력한 전략핵압박을 받아 벼랑끝에 몰리며 다급해진 미국은 조선문제를 외교부문에 국한시켜 다룰 처지가 아니다. 미국에게 조선문제는 정치문제, 외교문제, 군사문제를 포괄하는 매우 심각한 국가안보문제로 제기된 것이다. 그처럼 심각한 국가안보문제는 외교부문을 넘어서는 것이므로 국무부가 다루지 않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나서서 직접 다룬다. 지난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심각한 국가안보문제를 처리할 적임자를 선정할 때, 국무장관이 아닌 다른 고위관리를 선정하는 사례가 있었다. 이를테면 미국이 중국과 적대관계를 청산하기 위한 비공식대화를 시작하였을 때, 또는 베트남전쟁에서 패한 미국이 북베트남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비공식대화를 시작하였을 때,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헨리 키신저(Henry A. Kissinger)를 적임자로 선정한 바 있다. 국무장관이 움직이는 경우에는 국제관례에 따른 외교절차를 밝아야 하므로 추진과정이 복잡해지지만,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나 국가정보국장은 외교절차를 생략하고 신속하고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으므로 비공개외교활동에서는 그런 고위관리들이 적임자로 선정될 수 있다. 2016년 10월 17일 <자주시보>에 실린 나의 글 ‘밀사의 청와대 비밀회동과 조선의 전략핵압박’에서 논한 것처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2016년 5월 6일부터 나흘 동안 평양에서 진행된 조선로동당 제7차 대회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미국에게 평화협정문제를 공식 제의할 것으로 예측하고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을 대통령 밀사로 청와대에 급파하였으나, 그들의 예측은 빗나가고 말았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예측을 뒤엎고, 조선은 강도를 더욱 높인 전략핵압박을 계속하였다. 조선이 평화협정을 제의할 줄 알았더니, 그런 게 아니라 전략핵압박을 강도를 높여가며 계속하자,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당황망조하였다.
자기들의 예측을 뒤엎고 전략핵압박의 강도를 높이는 조선의 단호한 행동 앞에서 당황망조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대응방침을 논의하였는데, 의견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두 갈래 대응방침 가운데 한 갈래는 평화협정을 제의하지 않고 강도 높은 전략핵압박을 계속하는 조선의 의도를 파악하려면 조선측 당국자들을 직접 만나야 한다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한 갈래는 비핵화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는 조선과의 대화는 필요하지 않으므로, 이란에게 적용했던 강경한 경제제재를 들이대어 조선을 더욱 압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강경한 대조선경제재재를 감행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강행론자들과 신중론자들이 격론을 벌였다는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른 팔러씨(Foreign Policy)> 2016년 10월 6일부 기사는, 조선의 전략핵압박에 맞서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대응방침이 두 갈래로 갈라져 양측이 격론을 벌였다는 나의 분석을 안받침해준다. 그런데 그 격론에서 신중론자들이 이겼고, 강행론자들이 졌다. 다시 말해서, 강경한 경제제재를 들이대어 조선을 압박하기 보다는 조선측 당국자들을 직접 만나보아야 한다는 신중론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채택된 것이다. 강도 높은 전략핵압박을 계속하는 조선의 의도를 파악하려면 조선측 당국자들을 직접 만나야 한다는 신중론의 채택, 바로 이것이 2016년 10월 21일과 22일 콸라룸퍼에서 미국이 오랜만에 조선과 비공식대화를 진행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다. 위와 같은 사정을 파악하면, 콸라룸퍼 비공식대화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조선에게 요청하고, 조선이 그 요청을 받아주는 형식으로 성사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콸라룸퍼 비공식대화 이전에 있었던 조미비공식대화에 참석한 경험이 있는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태평양연단의 칼 베이커(Carl W. Baker) 국장은 <연합뉴스> 2016년 6월 15일 보도기사에서 조선은 비공식대화에 관심이 없다고 했는데, 이번에 조선이 미국의 비공식대화 요청에 이례적으로 응한 까닭은 이전에 이른바 ‘트랙(Track) 2’라고 불렀던 비공식대화들과 달리 이번에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직접 나서서 요청한 특별한 비공식대화였기 때문이다. 이런 성사배경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미국의 견지에서 콸라룸퍼 비공식대화를 바라보면, 그것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조선의 전략적 의도를 알아보기 위한 탐색기회로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조섭 디트라니 교장은 2016년 10월 25일 미국의 관영언론매체 <미국의소리>와 진행한 전화통화에서 콸라룸퍼 비공식대화에 참석한 미국측 인사들이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탐색적 토론(exploratory discussions)”을 진행하였다고 말했던 것이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조선에게 비공식대화를 먼저 요청하였고, 그 대화에 백악관 파견원을 참석시킨 것은 미국의 ‘전략적 인내’ 정책의 패배, 그리고 그 대척점에 있는 조선의 ‘경핵병진노선’의 승리를 말해주는 또 하나의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른 한 편, 조선의 견지에서 콸라룸퍼 비공식대화를 바라보면, 조선은 자기의 ‘경핵병진노선’으로 미국의 ‘전략적 인내’ 정책을 꺾고, 미국에게 자기의 전략적 의도를 비공식대화를 통해 다시 한 번 명백하게 밝혔다고 볼 수 있다.
3.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전언, 조선 외무성 당국자들의 반응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콸라룸퍼 비공식대화를 통해 조선에게 무슨 전언(message)을 보냈을까? 이 민감한 물음에 해답을 찾으려면, 그 비공식대화에서 조섭 디트라니 교장이 한성렬 조선 외무성 부상을 대표로 하는 조선측 참석자들에게 무엇을 말했는지 알아보아야 하는데, 그가 비공식대화 직후 워싱턴 디씨에 돌아가 미국 언론매체들에게 밝힌 내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섭 디트라니 교장은 2016년 10월 25일 <미국의소리>와 진행한 전화통화에서 자신이 “북조선에 제안할 목록을 갖고” 콸라룸퍼 비공식대화에 참석하였는데, 그 목록은 “미국의 정부부처들과 사전 협의하거나 의견을 교환하지 않은”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것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미국 국무부와 협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작성한 중대제안들을 콸라룸퍼 비공식대화에서 꺼내놓았다는 뜻이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독자적으로 작성하여 꺼내놓은 중대제안들은 무엇이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디트라니 교장이 미국 통신사 <블룸벅통신(Bloomberg News)>과 주고받은 전자우편 내용을 보도한 그 통신 2016년 10월 25일부 기사에서 발견된다. 그 기사에 들어있는 디트라니 교장의 말에 따르면, 콸라룸퍼 비공식대화에서 “미국 대표단은 (조미) 양측이 신뢰를 구축하기 위한 초기행동들(initiatives)의 필요성과 더불어 조선의 핵시험 및 (장거리)미사일발사 일시정지(halt)를 권고(recommend)하였다”고 한다.
이 인용문을 읽으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다른 정부기관들과 협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작성한 제안은, 요즈음 미국 국무부가 목청을 높이는 대조선인권공세와 대조선경제재재, 그리고 미국 국방부가 감행하는 대조선핵타격위협 같은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적대행동과는 질적으로 다른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읽어보면, 위의 인용문은 불완전한 문장이다. 왜냐하면, 그 문장에서는 조선과 미국의 상호신뢰를 구축하기 위한 초기행동들 가운데 미국이 조선에게 권고한 사항만 언급되었고, 그에 상응하여 미국이 실행할 사항은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전략구상을 언론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디트라니 교장이 그 부분을 의도적으로 생략한 것으로 보인다. 의도적으로 생략된, 미국이 실행할 사항은 무엇일까? 그것은 조선이 핵시험과 장거리미사일발사를 일시적으로 정지하는 행동에 상응하여 미국이 취해야 하는 행동일 것이다. 디트라니 교장이 위에 인용한 <미국의소리> 보도기사에서 “북조선이 9.19공동성명으로 돌아갈 의지가 있는지 알아보는 데 초점을 맞춘 탐색적 대화가 있었다”고 말한 것을 보면, 미국이 취해야 할 상응행동은 9.19공동성명에 들어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2005년 9월 19일 중국 베이징에서 진행된 제4차 6자회담에서 채택된 9.19공동성명에서 미국의 상응행동과 관련하여 눈길을 끄는 것은 “직접 관련 당사국들은 적절한 별도포럼에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에 관한 협상을 가질 것”이라는 문장이다. 이 문장은 디트라니 교장이 자기의 전자우편 내용에서 생략한 미국의 상응행동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생략된 부분을 보충하여 완전한 문장을 만들면, 조선이 핵시험과 장거리미사일발사를 일시정지하면, 그에 상응하여 미국은 평화협정을 위한 협상을 시작한다는 내용이 드러나는데, 바로 이것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콸라룸퍼 비공식대화를 통해 조선에게 전한 제안이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조선이 핵포기를 단행하려는 태도변화를 먼저 보여야 한다는 기존 입장을 버리고, 조선이 핵시험과 장거리미사일발사를 일시정지하는 것과 동시에, 그에 상응하여 평화협정을 위한 협상을 시작하는 선으로 크게 후퇴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조선의 핵시험과 장거리미사일발사는 곧 미국에 대한 조선의 전략핵압박이므로, 미국은 조선이 전략핵압박을 일시정지하면, 평화협정을 위한 협상을 시작할 수 있다는 상호신뢰구축방안을 제안한 것이다. 이제껏 미국은 평화협정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도 않으면서 조선에게 무조건 핵포기를 강요해왔지만, 조선의 강력한 전략핵압박을 받으며 벼랑끝에 몰리게 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되었고, 그래서 조선이 전략핵압박을 일시정지하는 것과 동시에 평화협정을 위한 협상을 시작할 수 있다는 선으로 후퇴하였으니, 바야흐로 미국의 패색이 짙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콸라룸퍼 비공식대화에서 백악관 파견원이 제시한 위와 같은 제안을 들은 조선 외무성 당국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연합뉴스> 2016년 10월 22일 보도에 따르면, 콸라룸퍼 비공식대화에 참석한 미국측 인사들 가운데 한 사람인 리언 씨걸(Leon V. Sigal) 미국 사회과학원 동북아안보협력사업 국장은 그 호텔에서 취재기자와 만났을 때 “북측 참석자들이 북미평화협정과 한반도평화프로세스를 미국측에 요구했다”고 말했다. 조미평화협정과 한반도평화프로쎄쓰(peace process)를 요구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이 말은 핵시험 및 장거리미사일발사 일시정지와 평화협정을 위한 협상을 동시에 실행함으로써 상호신뢰구축을 시작하자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견해와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언제 다시 깨질지 모르는 상호신뢰구축을 시작하자는 것이 아니라, 조미평화협정을 체결함으로써 공고하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평화실현과정(peace process)을 시작하자는 뜻이다. 바로 여기서 두 가지 중대사안이 드러난다. 첫째, 평화협정을 위한 협상이라는 모호한 표현은 협정을 체결할 당사자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은 것이다. 미국이 말하는 평화협정을 위한 협상은 조선과 미국의 양자협상이 아니라 중국과 한국까지 포함되는 다자협상이므로 4자의 상충적인 이해관계를 조절하려고 허송세월하다가 결국 흐지부지 될 것이다. 클린턴 행정부 시기에 진행된 4자회담이 시간만 끌다가 결국 실종되어버린 실패경험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콸라룸퍼 비공식대화에 참석한 조선 외무성 당국자들은 조미평화협정을 명시함으로써 조선과 미국이 평화협정을 체결할 당사자이라는 점, 그리고 다자협상이 아니라 양자협상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재확인한 것이다. 둘째, 만일 조선과 미국이 평화협정을 위한 양자협상을 시작하더라도, 미국은 협상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끌어가려고 지연술책을 쓰면서 시간이나 질질 끌게 될 것으로 예견된다. 지난 20년 동안 중단과 재개를 반복해왔던 조미핵협상경험이 그런 예상을 충분히 뒷받침해준다. 조선의 전략구상에 따르면,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장기적인 협상으로는 언제 가도 한반도평화실현과정을 시작할 수 없으므로, 조미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으로 한반도평화실현과정을 시작하자는 것이다. 주목되는 것은, 조미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으로 한반도평화실현과정을 시작하자는 조선의 전략구상이 사실상 미국에게 정치적 굴복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콸라룸퍼 비공식대화에서 조선 외무성 당국자들이 미국에게 조미평화협정과 한반도평화프로쎄쓰를 요구한 것이 사실상 미국의 정치적 굴복을 요구한 것임을 디트라니 교장이 모를 리 없다. 그래서 그는 콸라룸퍼 비공식대화에서 협상재개의 돌파구가 열리지 못했음을 인정하였다.
위에 인용한 <블룸벅통신> 보도기사에서 디트라니 교장은 콸라룸퍼 비공식대화에서 조선 외무성 당국자들이 비록 추가 핵시험이나 추가 미사일발사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과거 경험을 보면, 핵시험과 미사일발사를 계속할 것으로 보인다고 하면서, 조선 외무성 당국자들이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조선은 “장기적으로(in the longer term)” 미국과의 탐색회담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것은 조선이 콸라룸퍼 비공식대화를 통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제안을 받고서도 그것을 일축하고 미국이 정치적으로 굴복할 때까지 기존 전략핵압박을 계속할 것으로 예견된다는 뜻이다. 나는 지난 10월 17일 <자주시보>에 발표한 글 ‘밀사의 청와대 비밀회동과 조선의 전략핵압박’에서 “조선의 전략핵압박은 미국의 억지와 전횡으로 중단된 핵협상으로 미국을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조선에게 정치적으로 굴복하여 평화협정을 간청하든지 아니면 조선의 강력한 핵압박으로 벼랑끝에 떠밀린 미국이 벼랑에서 떨어져 파멸하든지 하는 최후의 양자택일로 미국을 끌어가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는데, 그런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4. 비공식대화 사흘 뒤에 나타난 세 번째 특이징후
특이징후는 콸라룸퍼 비공식대화에서 끝난 게 아니었다. 콸라룸퍼 비공식대화가 끝난 날로부터 사흘이 지난 2016년 10월 25일 세 번째 특이징후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제임스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이 전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날 뉴욕 맨해튼에 있는 대외관계협의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에서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이 출연한 대화모임이 진행되었다. 95년 역사를 가진 대외관계협의회는 미국의 대외정책 및 국제관계부문에서 최고 권위와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비정부단체다. 그 날의 대화모임은 참석자들이 질문하고,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이 답변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주고받은 대화의 주제는 여러 가지였는데, 그 가운데 미국의 대조선정책에 관한 질의응답이 눈길을 끌었다. 한국 언론매체들이 아전인수로 사실을 왜곡하는 사례가 있으므로, 여기서는 그 질의응답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좀 길지만 해당부분을 원문 그대로 번역, 인용한다.
클래퍼 - “북조선을 비핵화하려는 생각은 헛일(lost cause)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비핵화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핵무기를 뜻함-옮긴이)은 그들의 생존수단이다. 내가 북조선을 방문하였을 때 세계가 어떻게 자기들의 유리한 위치에서 북조선을 바라보는지 알 수 있었다. 북조선은 포위공격을 받고 있으며, 공포를 느끼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핵능력을 포기한다는 생각은, 그것이 무엇이던 간에, 고려할 가치가 없는 생각(nonstarter)이다. 내 생각에는...”
질문자 - “핵프로그램을 중지시키는 것(suspending)은...” 클래퍼 - “무슨 말인지 제대로 듣지 못했는데?” 질문자 - “중지를 말했다.” 클래퍼 - “아마도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최선책은 글쎄 일종의 마개씌우기이다. (Well, the best we could probably hope for is some sort of a cap.) 하지만 우리가 그들에게 요구한다고 해서 그들이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참석자들 웃음) 어떤 중대한 유인책들(significant inducements)이 있어야 할 것이다.” (줄임) 사회자 - “당신의 외교경험에 따르면, 마개를 씌우거나 중지시키는 이란식의 협상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데...” 클래퍼 -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회자 - “그러면 스턱스넷 파괴활동(Stuxnet sabotage) 같은 것은 어떤가?” (스턱스넷 파괴활동이란 지난날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의 핵시설 전산망에 스턱스넷 바이러스를 침투시켜 그 핵시설을 일시 중지시켰던 사례를 말한다. - 옮긴이) 클래퍼 - “뭐라구?” 사회자 - “그들의 (핵)시설에 대한 파괴활동말이다.” 클래퍼 - “글쎄,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 (참석자들 웃음)
비록 참석자들의 웃음을 자아내며 즉흥적으로 답변한 것이지만,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의 답변은 초점을 잃지 않았다. 위에 서술한 그의 답변내용을 요약하면, 미국이 조선에게 핵포기를 요구하는 것도 비현실적이고, 핵시험 중지를 요구하는 것도 비현실적이므로, 마개를 씌우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책이라는 것이다.
마개를 씌운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핵시험 중지(suspension)보다 한 급 낮은 핵시험 유예(moratorium)를 뜻하는 말이다. 유예라는 말은 어느 때이건 재개할 수 있도록 일시적으로 중지하는 행위를 뜻한다. 한국 언론매체들은 마개를 씌운다는 말을 핵능력 제한이라는 뜻으로 해석했지만,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의 답변에 담긴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그 말은 핵시험 유예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2016년 10월 21일과 22일에 진행된 콸라룸퍼 비공식대화에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조선이 핵시험과 미사일발사를 일시정지하면 그에 상응하여 평화협정체결을 위한 평화회담을 시작할 수 있다고 제안하였고, 그로부터 사흘 뒤에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은 핵시험 유예가 미국의 최선책이라고 말하였다. 일시정지라는 말과 유예라는 말은 사실상 동의어이므로,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제안을 사흘 뒤에 재확인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답변은 미국의 대조선정책이 핵포기에서 핵시험 유예로 크게 후퇴하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말해준다. 클리퍼 국가정보국장의 답변이 언론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자, 워싱턴 디씨와 서울에서 큰 파문이 일었다. 조선의 핵포기를 끊임없이 주장해온 미국의 대조선정책을 뒤엎는 충격적인 발언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워싱턴 디씨에서는 미국 국무부 대변인이 직접 나서서 “미국의 목표는 아직도 북조선의 핵무기를 검증가능하게 포기시키는 것”이라고 하면서 파문을 가라앉히려는 수습발언을 꺼내놓았고, 서울에서는 외교부 당국자가 “한미는 물론 국제사회의 북핵 불용의지는 변함이 없을 뿐 아니라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런데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의 답변과 관련하여 조슈아 어니스트(Joshua R. H. Earnest) 백악관 대변인은 다른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그는 2016년 10월 27일 백악관 출입기자단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추진해오는 전략이 오바마 대통령의 임기 중에 북조선의 핵프로그램을 포기시킬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클래퍼 국장이 언급한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오랜 기간 동안 우리는 국제사회와 함께 북조선 정권이 여러 유엔안보리 결의들을 포함하여 국제적 의무들을 이행하도록 추가압박을 계속 가해왔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온 전략인데, 만일 차기 대통령이 그 정책의 변경을 택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문제로 될 것이다.” 미국 국무부 대변인이 꺼내놓은 위의 발언과 비교하면, 백악관 대변인이 꺼내놓은 위의 발언은 발언각도가 전혀 다르다. 백악관 대변인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은밀히 논의되는 대조선정책의 변화흐름을 알고 있으므로, 국무부 대변인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말하였던 것이다. 백악관 대변인은 위의 인용문에서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의 답변이 그의 개인견해인 것처럼 여겼으나, 그런 것은 아니다. 클래퍼 국가정보국장의 답변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은밀히 논의되는 대조선정책의 변화흐름을 반영한 것이지 그의 개인견해가 아니다. 위의 인용문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핵포기를 요구해온 오바마 행정부의 기존 대조선정책이 차기 행정부에서 뒤집어질 수 있음을 예견하였다는 점이다. 그런 예견은 미국의 차기 행정부가 새로운 대조선정책을 추진할 수 있음을 언급한 것이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임기가 거의 끝나가는 오바마 행정부가 콸라룸퍼 비공식대화에서 조선 외무성 당국자들을 만나 탐색대화를 진행한 목적은, 새로운 대조선정책의 방침을 정하여 차기 행정부에게 넘겨주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이 핵시험과 장거리미사일발사를 유예하면, 그에 상응하여 미국은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평화회담을 시작할 수 있다는 정책방침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2000년 10월 12일 워싱턴 디씨에서 채택, 발표된 조미공동코뮈니께에서 그런 정책방침을 찾아볼 수 있다. 그 문서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측은 새로운 관계구축을 위한 또 하나의 노력으로 미사일문제와 관련한 회담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모든 장거리미사일을 발사하지 않을 것이라는 데 대하여 미국측에 통보하였다”고 명시되었는데, 이것은 장거리미사일발사를 유예하는 조치를 뜻한다. 2000년 당시에는 조선이 핵시험을 하기 이전이었으므로, 핵시험 유예는 언급되지 않고 장거리미사일발사 유예만 언급되었다. 또한 그 문서에는 “쌍방은 조선반도에서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1953년의 정전협정을 공고한 평화보장체계로 바꾸어 조선전쟁을 공식 종식시키는 데서 4자회담 등 여러 가지 방도들이 있다는 데 대하여 견해를 같이하였다”고 명시되었다. 이것은 조선이 장거리미사일발사를 유예하면, 그에 상응하여 미국은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평화회담을 시작할 것임을 공약한 것이다. 위에 열거한 문서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임기가 거의 끝나가는 오바마 행정부가 ‘전략적 인내’ 정책이 완전히 파산되자 하는 수 없이 16년 전 클린턴 행정부가 추진하려고 했던 장거리미사일발사 유예와 한반도 평화회담 개최를 맞바꾸는 정책방침을 다시 꺼내놓으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클린턴 행정부가 16년 전에 꺼내놓았던 그 정책방침이 실패로 끝난 것이 언제인데, 오바마 행정부는 아직도 그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돌이켜보면, 16년 전 조선에게는 화성-13, 화성-14 같은 대륙간탄도미사일도 없었고, 핵시험도 하지 않았으며, 수소탄시험은 생각하지 못했고,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북극성’도 없었으므로, 미국에게 전략핵압박이 아니라 전술핵압박밖에 가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 조선은 위에 열거한 각종 전략타격수단들을 두루 갖춘 ‘동방의 핵강국’으로 등장하였다. 이처럼 역량관계에서 질적 변화가 일어났으므로 2016년 조미관계와 2000년 조미관계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16년 전 조선에게 제의하였다가 실패하여 폐기된 낡은 정책방침을 꺼내어 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제의하려는 미국의 행동이 조선에게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만일 미국의 차기 행정부가 새로운 대조선정책을 수립한다면, 그들은 무슨 유예조건 같은 것을 달지 말고 조선에게 조미평화협정 체결을 직접 제의하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만일 미국이 그것을 끝내 거부한다면, 조선의 강력한 전략핵압박을 받아 벼랑끝에 몰리다가 어느 날 벼랑에서 뚝 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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