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6/30

한일관계 50년의 치욕, 언제까지 방치하는가?

[한호석의 개벽예감](165)
자주시보 2015년 06월 29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2중망언 계속 내뱉는 일본 극우정권
2. ‘이미 무효’ 네 글자가 불러온 재앙
3. 을사오적 매국범죄를 능가하는 매국범죄
4. 독도영유권 침해한 한일기본협정
5. 대일청구권마저 포기한 굴욕외교의 극치

▲ <사진 1> 2015년 6월 22일 서울과 도꾜에서 각각 진행된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행사들에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교차참석하여 축사를 하였다. 하지만 치욕으로 얼룩진 한일관계 50년 역사를 직시하면, 그것은 양국 국민을 속이는 교차기만극으로 보인다.     © 자주시보


1. 2중망언 계속 내뱉는 일본 극우정권
 
2015년 6월 26일 일본 중의원 평화안전법제 특별위원회에 출석한 아베신조(安培晉三) 일본 총리는 “전쟁 전 일한 사이의 여러 일들에 대해서는 1965년 일한기본협정으로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그가 일본 극우정권의 흉심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교묘한 어법으로 식민지조선-일제 관계와 한국-일본 관계를 압축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는 일제의 조선침략과 식민지강점을 “태평양전쟁 종전 이전에 일제와 식민지조선 사이에서 발생했던 여러 일들”이라는 식으로 모호하게 표현함으로써 일제의 극악한 범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일제의 조선침략과 식민지강점과 관련하여 한국이 일본에 제기한 문제들이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고 강변한 것이다. 

위에 인용한 아베의 발언에서 드러난 것처럼, 식민지조선-일제 관계와 한국-일본 관계에 대한 일본 극우정권의 망언은 반복적이며 2중적이다. 이를테면, 그들의 1차 망언은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강점하고 수탈한 범죄가 애초에 있지도 않았고, 일제는 일제와 조선이 합법적으로 체결한 조약들에 의거하여 조선에 정당하게 진출하여 조선을 근대화시켰다는 것이며, 그들의 2차 망언은 자기들의 1차 망언이 한일기본조약에 의해 망언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이 국제법적으로 확정되었다는 것이다. 주목하는 것은, 망언이 법적 근거와 결부되는 경우 망언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정치군사적 행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일본 극우정권이 반복적으로 내뱉어온, 식민지조선-일제 관계 및 한국-일본 관계에 관한 온갖 망언들을 용인해준 괴이한 행사가 2015년 6월 22일 서울과 도꾜에서 각각 진행되었다. 반세기 전에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된 것을 기념하는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 행사가 서울과 도쿄에서 각각 진행된 것이다. <사진 1>에서 보는 것처럼, 그 날 박근혜 대통령은 일본 정부가 서울에서 주최한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했고, 아베 일본 총리는 한국 정부가 도쿄에서 주최한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했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 체결부터 1945년 8.15 해방까지 40년 동안 이어진 식민지조선-일제 관계, 그리고 1948년 분단정부수립부터 오늘까지 67년 동안 전개된 한국-일본 관계를 올바로 아는 사람들은 그 두 정상이 기념식에 교차참석하여 축사를 한 것이 양국 국민을 속이는 교차기만극이라고 여길 터다. 무엇보다도 한일국교정상화라는 말부터 기만적이다. 50년 전에 체결된 한일기본조약으로 한일관계가 정상화되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한일기본조약 체결로 한국-일본 관계가 기형화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소급하여 식민지조선-일제의 관계까지 왜곡되고 말았다. 한일기본조약에 얽혀있는 치욕적인 사연들은 올해가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이 아니라 한일관계기형화 50주년임을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왜 한일관계정상화라는 말을 접고 한일관계기형화라고 말해야 하는가? 그 까닭은, 한국에서 정권을 잡은 친일세력이 일본에서 정권을 잡은 일제전범들의 강압과 회유에 굴복하여 일제의 조선침략과 식민지강점을 합법화, 정당화해준 것이 한일기본조약 체결의 내막이기 때문이다. 50년 전 한국과 일본이 대등하고, 정당하게 관계정상화를 실현하려고 하였다면, 한국에서는 친일세력이 아니라 항일세력이 나섰어야 했고, 일본에서는 일제전범들이 아니라 전범청산세력이 나섰어야 했다. 당시 한국의 친일세력과 일본의 일제전범들은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사법적 심판을 받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어야 하였는데, 그런 청산대상이 양국관계를 정상화하겠다고 나서서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였으니 그야말로 희대의 사기극을 공연한 것이다.

▲ <사진 2> 1963년 3월초부터 불붙기 시작한 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은 마침내 6월 3일에 이르러 각계각층 대중이 총궐기한 범국민적 항쟁으로 폭발하였다. 4.19항쟁이 일어난 때로부터 불과 3년 뒤에 일어난 대중항쟁이었다. 위의 사진은 당시 시청앞 광장에 진출한 시위대의 투쟁모습이다. 박정희 친일정권은 6.3항쟁을 경찰력으로 막지 못하게 되자 위수령을 발동하고 군대를 내몰아 국민의 정치적 요구를 짓밟는 폭거를 자행하였다.     © 자주시보

<사진 2>에서 보는 것처럼, 1963년 3월 초부터 한국에서는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를 중심으로 각계각층 대중이 궐기하여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배격하고 박정희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격렬한 대중항쟁을 벌였는데, 박정희 친일정권은 대일굴욕외교를 중단하라는 국민의 요구를 위수령으로 짓누르고,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였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가해범행에 대해 사죄해야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정상화될 수 있는 것처럼, 일본이 일제의 조선침략과 식민지강점에 대해 사죄한다는 조항이 한일기본조약에 들어갔어야 한일관계가 정상화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조약에는 사죄라는 말은커녕 반성이라는 말도 들어있지 않다. 한일기본조약을 인정해서는 안 되는 까닭, 그리고 한일관계가 정상화되었다고 볼 수 없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박정희 친일정권이 국민의 정당한 요구를 총칼로 짓누르고 일본으로부터 사죄는커녕 강압과 회유를 받으며 굴욕적으로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한 50주년을 ‘기념’하고 ‘축하’한다는 정부행사를 서울과 도쿄에서 각각 진행하면서, 그 자리에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총리까지 교차참석하여 ‘축사’를 한 것은 역사와 국민에 대한 우롱이 아닌가.

2. ‘이미 무효’ 네 글자가 불러온 재앙

한일기본조약 제2조는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미 무효”라는 네 글자는 박정희 친일정권이 일본의 강압과 회유에 굴복하였기 때문에 그 조약에 들어간 것이다. “원천 무효”라는 말을 넣자던 박정희 친일정권의 요구는 일본의 강압에 짓눌렸고 일본의 회유로 말살되고 말았다. <동아일보> 2015년 6월 22일 보도에 따르면, 박정희 친일정권 하에서 한일회담에 참석했던 외교관 출신자들은 “일본이 워낙 강경하게 ‘이미(already)’를 주장해 이를 받지 않고는 협정체결이 불가능했다”고 회고하였다. <사진 3>

▲ <사진 3> 젊은 시절 다까끼 마사오로 일제의 만주괴뢰군에 복무하기 위해 일왕에게 바치는 혈서까지 쓰며 충성을 맹약했던 박정희가 1965년 12월 17일 청와대에서 한일기본조약문에 서명하는 장면이다. 이후락(비서실장), 정일권(국무총리), 이동원(외무장관), 김동조(주일대사) 등 친일관리들의 모습이 보인다.     © 자주시보

일본이 “이미 무효”라는 네 글자를 한일기본조약에 기어이 집어넣은 까닭은 무엇일까? “이미 무효”라는 말은 일제가 조선을 상대로 체결한 식민지강점조약들이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한 1965년 6월 22일 이전의 어느 시점에 이미 무효화되었다는 것인데, 거기에 담긴 두 가지 뜻은 아래와 같다.

첫째, 한일기본조약 제2조에 들어있는 “이미 무효”라는 말은 일제의 식민지강점조약들이 국제법상 합법적으로 체결된 조약들인데, 과거 어느 시점에 이미 무효화되었다는 뜻이다. 그와 달리, “원천 무효”라는 말은, 일제의 식민지강점조약들이 국제법상 불법적으로 체결된 것들이므로, 애초에 조약으로 성립될 수 없었고 따라서 원천적으로 무효라는 뜻이다. 이처럼 “이미 무효”라는 말과 “원천 무효”라는 말 가운데 어떤 말을 택하는가 하는 문제는 식민지강점조약의 불법성을 인정하느냐 마느냐 하는 결정적으로 중대한 문제였다.

그런데 박정희 친일정권은 일본의 강압과 회유에 굴복하여 한일기본조약 제2조에 “이미 무효”라는 말이 들어가도록 용인함으로써 식민지강점조약의 불법성을 부정하려는 일본의 흉계를 국제법적으로 인정해주고 말았다. 사죄조항이 들어가기는커녕 흉계조항이 한일기본조약에 들어가고 말았으니, 그것을 어찌 조약으로 인정할 수 있겠는가!

둘째, “이미 무효”라는 말은, 일제의 식민지강점조약들이 1965년 6월 22일 이전의 어느 시점에 이미 무효화되었다는 뜻인데, 무효화된 시점은 구체적으로 언제인가? 한일기본조약에는 무효화시점이 명시되지 않았는데, 그 조약의 제3조가 무효화시점을 암시하고 있다.

한일기본조약 제3조는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연합총회의 결의 제195(III)호에 명시된 바와 같이 한반도에 있어서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확인한다”고 규정하였는데, 이 조항은 박정희 친일정권의 요구로 그 조약에 들어간 것이다.

한일기본조약에 왜 정권의 합법성에 관한 조항이 뚱딴지 같이 들어갔을까? 박정희 친일정권은 정권의 합법성이 대한민국 정부에게만 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게는 없다는 자기들의 반북대결정책을 한일기본조약을 통해 정당화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런데 박정희 친일정권이 정권의 합법성에 관한 조항을 한일기본조약 제3조에 집어넣음으로써 일제의 식민지강점조약들이 1948년 8월 15일에 무효화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법리적 근거가 생겨났다. 

그러므로 한일기본조약의 제1조와 제2조를 연결해서 읽으면, 일제의 식민지강점조약들은 을사조약이 체결된 1905년 11월 17일부터 이승만 정권이 등장한 1948년 8월 15일까지 43년 동안 유효하였는데, 1948년 8월 15일에 무효화되었고, 1965년 6월 22일에 이르러 무효가 국제법적으로 인정되었다는 것이다.

위에 서술한 몇 가지 사실을 살펴보면, 박정희 친일정권이 일제의 조선침략과 식민지강점을 합법화, 정당화하려는 일본의 범죄적 책동을 굴욕적으로 용인함으로써 일제의 조선침략과 식민지강점을 범죄로 규정할 수 없게 만들어놓았음을 알 수 있다.

▲ <사진 4> 이 사진은 KBS 일요스페셜에 방영된 화면들 가운데 한 장면이다. 그 화면에 나타난, 미국 중앙정보국이 1966년 3월 18일에 작성한 내부보고서는 일본의 6개 대기업들이 박정희 친일정권에게 6,660만 달러에 이르는 비밀자금을 제공하였음을 말해준다. 그 불법자금을 직접 수령한 사람은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이었다. 그 금액은 당시 민주공화당 예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는데, 이것은 박정희 친일정권이 일본기업들이 제공하는 불법자금으로 유지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 자주시보

박정희 친일정권이 일제의 조선침략과 식민지강점을 합법화, 정당화하려는 일본의 범죄적 책동을 굴욕적으로 용인한 까닭은 무엇일까?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1966년 3월 18일에 작성한 ‘한일관계의 미래’라는 제목의 내부보고서에서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사진 4>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굴하였고, 2004년 8월 12일 민족문제연구소에 의해 공개된 그 보고서에 따르면, 박정희 친일정권은 5.16병란을 일으킨 1961년부터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한 1965년까지 일본의 6개 대기업들로부터 6,600만 달러에 이르는 비밀자금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비밀자금을 직접 수령한 사람은 5.16병란의 주동자이며, 당시 한일회담의 막후실권자인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이었다. 놀랍게도, 박정희 친일정권은 일본기업이 제공하는 불법자금으로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3. 을사오적 매국범죄를 능가하는 매국범죄

태평양전쟁 종전 이후 미국의 배후조종과 비밀지원을 받으며 재기하여 정권을 잡은 일본 극우세력은 일제의 조선침략과 식민지강점에 대해 사죄하기는커녕 그 범죄를 정당화할 흉계를 품고 있었다. 예컨대, 6.25전쟁 직후인 1953년 10월 6일에 진행된 제3차 한일회담에서 일본측 대표 구보다 간이찌로(久保田貫一朗)는 “일본이 (식민지강점) 36년 동안 한국인들에게 많은 이익을 주었다. 일본이 (조선에) 진출하지 않았더라면 중국이나 러시아가 (조선을) 점령하여 더욱 비참한 상태에 놓였을 것”이라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고, 당시 일본 외상 오까자끼 가쓰오(岡崎勝男)는 “구보다의 발언은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말한 것일 뿐”이라는 망언을 늘어놓았다.

이처럼 조선침략과 식민지강점을 정당화하려는 일본의 흉계를 국제법적으로 인정해준 한일기본조약이 발효됨으로써 상상을 초월하는 재앙이 발생하게 되었다. 재앙의 내막을 밝히면 다음과 같다.

일제의 식민지강점조약들을 합법화해준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지난날 일제의 조선침략과 식민지강점에 반대하여 피흘려 싸운 우리 민족의 반일항쟁사가 통째로 부정당하게 되었다. 우리 민족의 반일항쟁사가 부정되면, 항일선렬들을 ‘폭도’ 또는 ‘불령선인’이라고 모독해온 일본 극우세력의 극악무도한 역사파괴만행이 국제법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이다. <사진 5>
 
▲ <사진 5> 조선을 강점한 일본군이 칼로 벤 사람의 머리를 손에 들고 웃으면서 찍은 살육만행사진이다. 무참히 살육당한 희생자들은 일제침략에 반대하여 싸운 항일투사들이었을 것이다. 일제는 악마 중의 악마였다. 그처럼 흉악한 일제에게 면죄부를 준 한일기본조약은 폐기되어야 마땅하다.     © 자주시보

박정희 친일정권이 저지른 반민족적이고, 반민중적이고, 반인권적인 범죄들이 숱하게 많지만, 식민지강점조약들을 합법화하려는 일본의 역사파괴만행에 굴복함으로써 천추만대 씻을 수 없는 일제의 조선침략과 식민지강점을 국제법적으로 인정해준 박정희 친일정권의 굴욕행위야말로 을사오적 매국범죄를 능가하는 극악한 매국범죄가 아닐 수 없다.

일제의 식민지강점조약들을 합법화한 한일기본조약을 존치시킨 상태에서 한국 민중이 일본에게 조선침략범죄와 식민지강점범죄를 사죄하라고 요구해도 그것은 저항적 의미만 지닐 뿐 정치적, 법리적 의미는 갖지 못한다. 
 
4. 독도영유권 침해한 한일기본조약

일제의 식민지강점조약들이 한일기본조약에 의해 합법화됨으로써, 일제의 한반도점령이 합법화되었는데, 일제의 한반도점령에 대한 합법화는 특히 독도영유권을 침해하는 계기로 되었다. 우리 민족성원이라면 누구나 독도가 우리나라의 고유한 영토라는 사실을 예나 지금이나 전혀 의심하지 않지만, 한일기본조약은 독도영유권에 대한 그런 확신을 무너뜨리고 있다. 이 심각한 문제를 파악하려면 아래와 같은 구체적인 설명이 요구된다.

일본이 ‘한일관계정상화’에 나설 수 있었던 국제적 환경은 1951년 9월 8일 미국 쌘프란시스코에서 체결된 대일강화조약에 의해 조성되었다. 패전국 일본을 점령했던 미국이 일본에게서 전범의 멍에를 벗겨준 것이 쌘프란시스코강화조약이다. 쌘프란시스코강화조약 체결로 전범국 신세에서 벗어난 일본은 ‘한일관계정상화’를 추진할 수 있었다. 제1차 한일회담이 1952년 2월 15일에 열린 까닭이 거기에 있다. 

쌘프란시스코강화조약은 태평양전쟁 승전국인 미국이 군정을 실시하였던 점령지역의 영토주권을 원상대로 복구하는 문제를 국제법적으로 확정하였다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조약이다. 미국이 군정을 실시하였던 점령지역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였다. 

미국은 쌘프란시스코조약을 체결하면서 이전에 자기들이 군정을 실시하였던 점령지역 가운데 한반도의 영유권이 한국에게 있음을 확인하였고, 일본 열도의 영유권이 일본에게 있음을 확인하였는데, 유독 두 섬의 영유권만은 예외로 처리하였다. 동해의 전략요충지인 독도의 영유권과 동중국해의 전략요충지인 오키나와의 영유권은 예외로 처리한 것이다. 미국은 오키나와를 일본에게 넘겨주지 않고 계속 점령지로 남겨두는 대신,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여 독도영유권이 일본에게 있음을 인정해준 것이다. 당시 미국과 일본은 1945년 9월 9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미국의 점령지역에 속했던 독도의 영유권이 일본에게 있다는 내용의 독도밀약을 체결하였고, 그 밀약은 쌘프란시스코강화조약의 점령지귀속조항에 반영되었다. <사진 6>

▲ <사진 6> 1951년 9월 8일 미국 쌘프란시스코에서 진행된 대일강화조약 조인식에서 당시 일본 총리 요시다 시게루가 조약문에 서명하는 장면이다. 이 조약에는 독도영유권이 일본에게 있음을 인정한 미국과 일본의 독도밀약이 반영되었다.     © 자주시보

미국과 일본의 공모로 쌘프란시스코강화조약의 점령지귀속조항에 독도밀약이 반영된 이후 일본은 한일회담과정 내내 독도강탈음모를 노골화, 행동화하였다. 2005년 8월 26일 외교통상부가 공개한, 한일회담에 관련된 36,000쪽 분량의 방대한 외교문서를 분석한 <신동아> 2005년 11월호 기사에 따르면, 1952년 2월 15일 제1차 한일회담이 진행된 때부터 1964년 12월 3일 마지막으로 제7차 한일회담이 진행된 때까지 회담 전기간에 걸쳐 일본은 독도를 강탈하려는 범죄적 의도를 지속적으로 드러냈다. 일본은 한일회담이 진행될 때마다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해야 한다”느니, “독도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국교정상화는 있을 수 없다”느니 하면서 박정희 친일정권을 압박하였다. 예컨대, 1962년 9월 3일에 진행된 제6차 한일회담 2차 정치회담 예비절충 4차 회의 회의록은 당시 상황을 아래와 같이 전해준다.

이세끼 아시아국장 - “사실상 독도는 무가치한 섬이다. 크기는 히비야공원(도꾜에 있는 일본 최초의 서양식 공원-옮긴이) 정도인데 폭파라도 해서 없애버리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최영택 참사관 - “회담 도중에 그 문제를 내놓겠다는 말인가?”
이세끼 아시아국장 - “그렇다.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기로 결정해야겠다.”

▲ <사진 7> 왼쪽은 1965년 당시 자민당 부총재 고노 이찌로의 밀사로 서울에 파견된 우노 소스께이고, 오른쪽은 당시 박정희 친일정권의 국무총리였던 정일권이다. 이 두 사람은 1965년 1월 11일 서울 성북구에 있는 범양상선 회장 박건석의 집에서 독도밀약을 합의하였다. 우노가 가져온 밀약서에는 한국이 독도영유권을 포기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박정희는 정일권-우노 밀담 다음날 독도밀약에 서명하였다.     © 자주시보

일본의 강압과 회유에 굴복한 박정희 친일정권은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기 6개월 전인 1965년 1월 11일 서울에서 정일권-우노 밀약을 체결하였다. <사진 7> 정일권은 당시 국무총리였고, 우노 소스께(宇野宗佑)는 당시 자민당 부총재 고노 이찌로(河野一朗)의 밀사였다. <월간중앙> 2007년 4월호 기사에 따르면, 4개항으로 된 정일권-우노 밀약은 “독도는 한국과 일본이 모두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며, 서로 이에 반론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장차 어업구역을 설정할 경우 양국이 독도를 각각 자국영토로 하여 선을 획정하고 두 선이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수역으로 한다. 현재 한국이 (독도를) 점거한 현상을 유지하지만, 경비원 증강이나 새로운 시설의 건축, 증축은 하지 않는다. 양국은 이 합의를 계속 지켜나간다”는 것이었다. 정일권-우노 밀담 이튿날 박정희가 정일권-우노 밀약에 서명함으로써 독도는 한국의 영토도 아니고 일본의 영토도 아닌 무국적섬으로 되었고, 한국은 자기 영토가 아닌 무국적섬을 점거한 것으로 되었으며, 일본은 그 무국적섬을 탈취할 기회를 노리게 된 것이다. 

일본은 한일기본조약에 체결되기 직전인 1965년 4월 ‘다케시마의 불법점거에 관하여 엄중 항의한다’는 외교서한을 박정희 친일정권에게 보내 또 다시 압박하였고,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조인식이 시작되기 직전에는 당시 일본 총리 사또 에이사꾸(佐藤榮作)가 조인식에 참석하러 도꾜에 간 당시 외무장관 이동원을 자기 집무실로 부르더니 “다께시마는 일본 영토라는 것과 다께시마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기로 합의한다”는 내용으로 작성된 밀약서를 꺼내놓고 서명을 요구하였다. <사진 8>
▲ <사진 8> 1965년 6월 22일 일본 총리관저에서 진행된 한일기본조약 조인식 장면이다. 조인식이 시작되기 직전 당시 일본 총리 사또 에이사꾸는 외무장관 이동원을 자기 집무실로 불러 독도영유권을 포기한다는 내용의 밀약서를 꺼내놓고 서명을 요구하였다.   ©자주시보

이동원은 그 밀약서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하였다지만, 한일기본조약과 함께 체결된 부속협정인 한일어업협정에 정일권-우노 밀약이 반영되었다. 그 협정에 의해 독도 영해가 한일공동어로구역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독도 영해를 한일공동어로구역 안으로 집어넣고, 독도 근해를 한일공동어로구역으로 바꿔놓은 협정을 체결한 것은, 독도영유권을 포기한 정일권-우노 밀약을 국제법적으로 확정한 것이었다. 박정희 친일정권이 일본의 강압과 회유에 굴복하여 독도영유권을 포기한 것이야말로 을사오적 매국범죄를 능가하는 극악한 매국범죄가 아닐 수 없다.
 
 
5. 대일청구권마저 포기한 굴욕외교의 극치

한일기본조약과 함께 체결된 또 다른 부속협정은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 및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다. 청구권이란 일제가 식민지조선에서 강탈, 침해한 재산, 권리, 이익에 대해 일본이 국가적으로 배상하며, 개인적으로도 보상하는 것을 일본에 청구하는 권리라는 뜻이다.

그런데 협정 명칭부터 이상하다.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협정’이라고 해야 정상인데,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 및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라는 이상한 명칭을 달아놓았다. 한국의 대일청구권을 규정한 협정에 왜 일본의 대한경제협력에 관한 조항까지 들어간 것일까?
1961년 11월 11일 도꾜에서 진행된 박정희-이께다 밀담에서 그렇게 된 내막을 알 수 있다.

▲ <사진 9> 1961년 11월 11일 일본총리관저에서 박정희-이께다 밀담이 진행되었다. 박정희는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고, 이께다 하야또는 당시 일본 총리였다. 사진은 박정희의 방일을 환영하는 만찬에서 박정희와 이께다가 통역 없이 일본말로 대화화며 웃는 장면이다. 당시 박정희는 한국의 대일청구권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하야또는     ©자주시보

 박정희는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고, 이께다 하야또(池田勇人)는 당시 일본 총리였다. <연합뉴스> 2012년 11월 5일 보도에 따르면, 밀담에서 박정희는 청구권을 주장하였고, 이께다는 경제협력을 주장하였는데, 결국 청구권이라는 말과 경제협력이라는 말을 함께 쓰기로 타협하였다. 밀담 다음날 진행된 한일정상회담에서 박정희는 “우리는 자유당 정권(이승만 친미정권을 뜻함-옮긴이)처럼 많은 청구권 자금을 요구할 생각은 없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배상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고 말했다. <사진 9> 일본의 마음에 드는 말만 골라서 꺼내놓으며 아부한 박정희를 그 이튿날 만나준 사람은 일본 정계의 거물 기시 노부스께(岸信介)였다. 그 날 박정희-기시 밀담에서 박정희는 “우리는 메이지유신 지사들의 마음과 같습니다. 앞으로 새로운 한국을 건설하기 위한 좋은 의견을 주십시오”라고 말하며 아부하였는데, 그 밀담을 계기로 기시는 박정희 친일정권에게 불법정치자금을 제공하는 든든한 후원자로 나서게 되었다.

이께다는 박정희와 밀담 중에 앞으로 청구권이라는 말과 경제협력이라는 말을 함께 쓰기로 타협하는 척하였지만, 그것은 속임수였다. 밀담 이후 일본은 표면적으로는 청구권이라는 말과 경제협력이라는 말을 함께 쓰면서도 실제 회담 중에는 한국이 대일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다고 강변하면서 대일청구권 자체를 부정하였던 것이다. 

1965년 5월 14일에 진행된 ‘청구권 및 경제협력위원회 제6차 회의록’에서 발췌한 일본측 발언이 2013년 11월 26일 <연합뉴스> 보도기사에 실렸다. 그들은 “한국에 대한 우리측의 제공은 어디까지나 배상과 같이 의무적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경제협력이라는 기본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 일본은 종래부터 한국의 경제개발을 위해 제공한다는 입장을 취해왔다. 일본의 생각은 어디까지나 경제협력이라는 입장에서 제공하려는 것”이라고 강변하였다. 이것은 일본이 한국의 대일청구권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박정희 친일정권은 한국의 대일청구권을 부정한 일본에게 굴욕적으로 애걸하였는데, 그 애걸발언은 이렇다. “이동원-시이나 외무장관 합의사항을 보면 청구권 및 경제협력으로 돼 있어 경제협력이라는 것도 있으나 청구권적인 성격이 엄연히 포함돼 있다. 문제는 청구권과 경제협력을 같이 협정문에 집어넣는 것인데 단순히 경제협력만을 한다는 것은 안 된다.” 

1965년 5월 당시 일본이 그처럼 한국의 대일청구권을 부정한 까닭은,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오히라 2차 밀담에서 한국의 대일청구권에 관한 밀약이 체결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김종필은 중앙정보부장이었고,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는 일본 외상이었다. <사진 10>
▲ <사진 10> 1962년 11월 12일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은 도꾜에서 당시 일본 외상 오히라 마사요시를 만나 2차 밀담을 진행하였다. 그 밀담 직전에 작성된 김종필-오히라 비망록은 청구권이라는 말을 쓰지 않은 채 일본으로부터 무상원조, 해외경제협력기금, 수출입은행차관을 받겠다는 내용으로 작성되었다. 이것은 박정희 친일정권이 일본에게 고작 3억 달러만 구걸하여 무상원조 명목으로 받아내면서 한국의 대일청구권마저 스스로 포기하였음을 말해준다. 굴욕외교의 극치였다.     © 자주시보

2차 밀담 직전에 작성된 김종필-오히라 비망록에는 다음과 같은 3개항이 들어있었다. “(일본이 한국에 공여하는) 무상원조와 관련하여 한국은 3억5천만 달러, 일본은 2억5천만 달러를 각각 주장하였는데, 일본이 3억 달러를 10년에 걸쳐 한국에 공여하기로 양측 수뇌에 건의한다. (일본이 한국에 빌려주는) 해외경제협력기금과 관련하여 한국은 2억5천만 달러, 일본은 1억 달러를 각각 주장하였는데, 일본이 2억 달러(이자율 3.5%, 7년 거치 20년 상환)를 10년에 걸쳐 제공하기로 양측 수뇌에 건의한다. (일본이 한국에 빌려주는) 수출입은행차관과 관련하여 한국은 별개로 취급하자고 주장했고, 일본은 1억 달러 이상을 프로젝트에 따라 늘릴 수 있도록 하자고 주장하였는데, 국교정상화 이전이라도 협력할 수 있도록 추진하기로 양측 수뇌에 건의한다.”

김종필-오히라 밀약과 관련하여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
첫째, 김종필-오히라 밀약에는 청구권이라는 말이 들어가지 않았고, 무상원조, 해외경제협력기금, 수출입은행차관이라는 말만 들어갔다. 이것은 박정희 친일정권이 한국의 대일청구권을 포기하였음을 의미한다. 박정희 친일정권이 대일청구권을 스스로 포기하기 훨씬 이전에 이승만 친미정권도 대일청구권을 스스로 포기하였다. 이동준 교수의 연구결과를 인용한 <연합뉴스> 2012년 9월 11일 보도에 따르면, 1952년 2월 20일에 진행된 제1차 재산 및 청구권 문제 분과위원회에서 이승만 친미정권은 일제의 조선침략과 식민지강점에 대한 피해보상청구를 포기할 뜻을 공식적으로 밝혔는데, 이런 태도는 이승만 친미정권이 수립 직후부터 추진한 대일정책이었다고 한다.  

둘째, <연합뉴스> 2012년 11월 5일 보도에 따르면, 1961년 11월 11일 박정희-이께다 밀담에서 이께다는 박정희에게 일본이 무상원조 5천만 달러를 한국에게 공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2013년에 공개된 일본의 외교문서를 인용한 <도꾜신붕> 2013년 2월 19일 보도에 따르면, 김종필-오히라 밀약이 체결된 1962년에 오히라는 외무성과 대장성(재무성의 전신)에 한국에게 공여할 무상원조금이 얼마인지 계산하라고 지시했는데, 외무성은 7,000만 달러로, 대장성은 1,600만 달러로 계산하였다고 한다.

<연합뉴스> 2012년 11월 5일 보도에 따르면, 일본이 한국에게 공여할 무상원조금을 그처럼 적게 계산한 까닭은 일제가 패망한 직후 식민지조선에 남겨두고 떠난 재산을 돌려받는 금액을 제외하고 한국에 공여할 무상원조금을 계산하였기 때문이다.

셋째, 김종필-오히라 밀담 중에 오히라는 김종필에게 “회담에서 합의해도 (합의사항을 언론에) 나타내면 안 되고, 정치회담(한일회담을 뜻함-옮긴이)에서 결정하는 형식을 취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박정희 친일정권이 한국의 대일청구권을 스스로 포기한 김종필-오히라 밀약을 언론에 공개해서는 안 되고, 나중에 열리게 될 한일회담에서 결정하는 것처럼 위장해야 한다는 뜻이다.

김종필-오히라 밀약이 체결된 때로부터 약 2년 6개월 뒤에 체결된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 및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제2조 1항은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런시스코우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규정함으로써 한국의 대일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김종필-오히라 밀약에서 합의한 대로 일본이 무상원조 3억 달러를 한국에 공여하는 것으로 이미 해결되었음을 공식화하였다.

일제식민지강점기 40년 동안 일제가 조선에서 수탈, 침해한 재산, 권리, 이익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천문학적인 액수일 것이다. 또한 2013년 11월 대일항쟁기조사지원위원회가 펴낸 자료에 근거하여 추산하면, 일제식민지강점기에 강제노역에 끌려간 조선인징용자는 모두 755만4,764명이었고, 일본의 역사학자 요시미 요시아끼(高見義明)의 추산에 따르면, 일제식민지강점기에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간 조선여성은 약 20만 명이었는데, 약 775만 명에 이르는 피해자들이 일본에게서 받아내야 할 보상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그것도 상상을 초월한 천문학적인 액수일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조선침략과 식민지강점을 합법화한 한일기본조약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침략과 식민지강점에 대한 배상문제와 보상문제를 규정하는 청구권협정은 애초에 성립될 수 없었다. 그래서 박정희 친일정권은 일본의 사죄를 받아내는 것을 포기한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일본에게 마땅히 행사하여야 할 청구권마저 스스로 포기하면서 고작 3억 달러만 구걸하여 받고 말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을사오적 매국범죄를 능가하는 매국범죄가 아닐 수 없다.

우리 민족에게 형언할 수 없는 재난과 고통을 들씌운 일제의 침략범죄와 식민지강점범죄는 영원히 망각될 수 없으며, 그런 범죄를 부정하려는 일본 극우정권의 난동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그런 난동을 불러일으킨 한일기본조약을 폐기하지 못하고 50년이나 방치해온 것은 민족사와 항일선렬들 앞에서 머리를 들 수 없는 치욕이다. 일제를 타도하고 조국을 되찾기 위해 고귀한 목숨을 바친 우리 항일선렬들이 후대에 위대한 유산으로 남긴 자주정신을 받들어 한일기본조약 폐기를 단행하는 것만이 지난 50년 동안 일본에게 당해온 수모와 치욕을 씻어 민족적 자존심을 세우고 자주권을 수호할 최후의 방책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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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6

습격기가 투하한 지뢰폭탄, 고속정이 발사한 금성-3호 대함미사일

[한호석의 개벽예감](163)
자주시보 2015년 06월 15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복엽습격기가 투하한 항공지뢰폭탄의 정체
2. 1킬로톤급 핵탄의 피폭구역
3. 군사대표단의 시선을 집중시킨 금성-2호
4. 최신형 고속공격정에 장착된 금성-3호 

▲ <사진 1> 조선이 100% 국산화한 복엽습격기가 비행장 활주로에 모습을 드러냈다. 조선은 초음속 스텔스 전투기들이 날아다니는 오늘날 내연엔진을 장착한 경비행기를 비대칭무기로 사용하고 있다. 실전환경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머리를 쓰면, 반세기 전에 퇴역된 구식 경비행기를 강력한 비대칭무기로 전변시킬 수 있는 것이다.     © 자주시보
 

1. 복엽습격기가 투하한 항공지뢰폭탄의 정체
 
2015년 3월 20일 조선의 언론매체들은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지도 밑에 진행된 조선인민군 항공 및 반항공군의 비행장타격 및 복구훈련에 대해 보도하였다. 3월 19일에 진행된 그 훈련은 “<적>비행장타격에 인입되는 비행대 력량할당과 타격순차와 방법, 전투비행사들의 폭격술과 사격술, 각종 항공무장의 성능, 파괴된 비행장복구능력을 실전환경 속에서 검열, 확정하는 데 목적을 두고 진행되였다”고 한다. 3.19훈련에는 근위 제1항공 및 반항공사단과 제5비행사단 관하 추격기, 습격기 폭격기련대들이 참가하였다.

3.19훈련에 참가한 작전기종들 가운데 눈길이 멎는 것은 습격기다. <사진 1>에서 보는 것처럼, 조선의 습격기는 내연엔진을 장착한 경비행기다.
조선의 습격기는 단엽기와 복엽기 두 종인데, 다른 나라들은 그 두 종의 군용 경비행기를 20세기 중반까지 사용하다가 제트엔진을 장착한 초음속 전투기가 등장하자 퇴역시켰고, 지금은 전쟁박물관에 전시하였다. 이런 사실 하나만 알고 조선의 기상천외한 공중전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초음속 스텔스 전투기들이 날아다니고, 지구 어디든 2시간이면 날아가는 극초음속 비행기의 출현을 앞둔 오늘날 반세기 전에 퇴역한 경비행기를 골동품으로 여기지만, 경비행기를 대하는 조선의 태도는 전연 딴판이다.
조선은 초음속 추격기 못지않게 경비행기를 중시한다. 왜 그럴까? 조선인민군은 교전상대가 갖지 못했거나 교전상대가 무시하는 특이한 무장장비를 독자적으로 개발함으로써 압도적인 비대칭무력을 건설하였는데, 경비행기도 그런 무장장비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3.19훈련에 참가한 습격기는 복엽기인데, 복엽습격기라고 부를 수 있다. 조선의 복엽습격기에 대한 미국 군사전문가들의 일반적인 인식은 조선이 항공륙전대를 후방구역에 기습적으로 침투시키기 위해 그 기종을 운용한다는 것이지만, 그런 기존 인식은 3.19훈련 이후 크게 수정되었다. 왜냐하면, 기습침투장비로 인식되어온 복엽습격기가 3.19훈련에서 폭격연습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복엽습격기가 침투비행과 폭격비행에 두루 출전하는 다재다능한 기종임을 말해준다.  

▲ <사진 2> 3.19훈련에 참가한 복엽습격기들이 지상의 타격목표를 향해 공대지로켓탄을 발사하는 장면이다. 공습훈련에서 값이 매우 비싼 공대지미사일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특별한 경우에 한정되고, 비유도무기들인 공대지로켓탄이나 폭탄을 일반적으로 사용한다. 조선에서는 공대지로켓탄을 항공비조종로케트라고 부른다.     © 자주시보

<사진 2>에서 보는 것처럼, 항공타격연습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타격수단은 유도조종기능이 없는 공대지로켓탄이다. 조선에서는 공대지로켓탄을 항공비조종로케트라고 부른다. 그런데 3.19훈련에서는 공대지로켓탄을 발사한 뒤에 연속적으로 항공지뢰폭탄을 투하하였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적>비행장의 정류장, 지휘소, 활주로들에 대한 항공기관포와 항공비조종로케트 사격에 이어 각종 항공지뢰폭탄 투하가 짧은 시간 안에 련속적으로 진행되였다”는 것이다.

3.19훈련 중에 복엽습격기가 사격한 항공기관포와 항공비조종로케트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데, 항공지뢰폭탄은 생소한 타격수단이다. 원래 지뢰는 대인지뢰, 대전차지뢰, 대차량지뢰로 구분되는데, 그런 지뢰들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널리 사용되는 통상무기들이다. 그에 비해, 항공지뢰폭탄을 사용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조선뿐이다. 조선의 항공지뢰폭탄은 전형적인 비대칭무기다.
항공지뢰폭탄은 지뢰와 폭탄을 하나로 합친 융합개념으로 설계된 폭탄인데, 일반폭탄과 달리 지상에 떨어지는 순간 자동폭발하지 않고, 복엽습격기의 원격조종으로 폭발하는 조종지뢰폭탄이다. 시한폭탄은 투하된 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폭발하지만, 항공지뢰폭탄은 원격조종으로 폭발하게 되므로 살상력이 시한폭탄을 훨씬 능가한다.

그런데 조선의 언론매체들은 항공지뢰폭탄이라 하지 않고 “각종 항공지뢰폭탄”이라 하였으니, 3.19훈련 중에 여러 종류의 항공지뢰폭탄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인민군 항공군이 보유한 항공지뢰폭탄은 두 종류인데, 하나는 고성능폭탄을 장착한 항공지뢰폭탄이고, 다른 하나는 소형전술핵탄을 장착한 항공핵지뢰폭탄이다. 3.19훈련에서는 모양과 무게가 항공핵지뢰폭탄과 똑같은 모의탄을 사용하였는데, 사안의 민감성을 의식한 조선의 언론매체들은 ‘핵’이라는 글자를 생략하고 항공지뢰폭탄이라고 보도한 것이다. 

<로동신문> 2013년 5월 21일부 기사는 핵탄의 소형화에 대해 설명한 대목에서 1킬로톤급 소형핵탄을 언급하였고, 핵탄의 다종화에 대해 설명한 대목에서 핵조종지뢰를 언급하였다. 그런 언급은 조선이 1킬로톤급 핵조종지뢰를 보유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인데, <사진 3>에서 보는 것처럼 3.19훈련 중에 복엽습격기가 투하한 항공지뢰폭탄이 바로 핵조종지뢰를 항공폭탄으로 변환시킨 항공핵지뢰폭탄 모의탄인 것이다.

▲ <사진 3> 3.19훈련에 참가한 복엽습격기 1대가 타격대상으로 정해진 비행장 활주로를 저공으로 날아가면서 항공지뢰폭탄을 투하하는 장면이다. 그 훈련에서 항공핵지뢰폭탄과 모양과 무게가 똑같은 모의탄을 투하하였는데, 사안의 민감성을 의식한 조선의 언론매체들은 '핵'이라는 글자를 생략하고 항공지뢰폭탄이라고 보도하였다. 전 세계에서 조선만 가지고 있는 항공핵지뢰폭탄은 핵조종지뢰를 항공폭탄으로 변환시킨 비대칭무기다.     © 자주시보

핵보유국들의 핵탄제조기술은 작게 만들고 가볍게 만드는 소형화-경량화추세에 의해 지속적으로 발전되어왔다. 예컨대, 핵탄의 소형화-경량화기술에서 가장 앞섰다는 미국이 핵탄을 소형화하기 시작한 때는 1953년 12월이다. 그처럼 오랜 기간에 걸쳐 핵탄소형화기술을 축적해온 미국이 1980년대 중반에 만든 B90은 그 나라에서 맨 마지막으로 만든 핵폭탄인데, 폭격기에서 낙하산에 매달아 투하하는 이 항공핵폭탄은 지름 33cm, 길이 3m, 무게 353kg, 폭발력 200킬로톤이다.

조선이 보유한 각종 핵폭탄의 성능기술지표는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투종심이 매우 짧은 한반도에서 대형핵탄으로 분류되는 200킬로톤급 핵폭탄을 사용하면 상상을 초월한 참화를 입게 되므로, 조선은 한반도에서 그런 대형핵탄을 절대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1945년 8월 초 미국은 15킬로톤급 핵폭탄을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하고, 21킬로톤급 핵폭탄을 일본 나가사끼에 투하하여 비전투원을 대량살육하였지만, 조선이 전시에 사용할 핵탄은 그런 대량살육과는 인연이 없다. 조선에서 말하는 조국통일대전은 민간피해를 최소화하고 교전상대만 족집게 식으로 선별, 파괴하여 항복을 받아내려는 전쟁이므로, 대량살육을 자행하는 제국주의침략전쟁과는 전쟁목적과 전쟁수행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조선은 1킬로톤급 소형전술핵탄을 사용하여 자기의 통일전쟁을 속결할 것으로 예견된다.

위와 같이 예견하는 근거는 조선의 지하핵실험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이를테면, 조선은 1998년 5월 30일 파키스탄에서 진행한 지하핵실험에서 2~6킬로톤급으로 추정되는 소형전술핵탄을 사용하였고, 2006년 10월 9일에 진행한 지하핵실험에서는 2킬로톤급으로 추정되는 소형전술핵탄을 사용하였고, 2009년 5월 25일에 진행한 지하핵실험에서는 1킬로톤급으로 추정되는 소형전술핵탄을 사용하였다. 그보다 앞서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 이르는 기간에 조선이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서 진행한 비공개 지하핵실험들에서도 그런 소형전술핵탄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조선은 1킬로톤급 항공핵지뢰폭탄을 이미 오래 전에 작전배치하였을 뿐 아니라, 전시에 그것을 사용할 것으로 예견할 수 있다.  

조선의 1킬로톤급 항공핵지뢰폭탄은 얼마나 크고 무거운가? 미국이 만든 1킬로톤급 핵포탄의 크기와 무게를 알아보면 조선의 1킬로톤급 항공핵지뢰폭탄의 크기와 무게도 짐작할 수 있다. 미국 군부가 8인치 핵포탄이라 부르는 1킬로톤급 핵포탄 W79는 길이 111cm, 폭 20cm, 무게 90kg이다. <사진 4> 미국이 W79를 만든 때는 1981년인데, 그보다 훨씬 뒤에 조선은 소형화-경량화기술을 이용하여 1킬로톤급 항공핵지뢰폭탄을 만들었다. 따라서 조선의 항공핵지뢰폭탄은 미국의 W79 핵포탄보다 더 소형화, 경량화된 핵탄이므로 복엽습격기가 투하하기에 적당하다. 

▲ <사진 4> 미국에서 8인치 핵포탄이라 부르는 1킬로톤급 핵포탄 W79는 이렇게 생겼다. 대구경 장거리포에서 발사하는 핵포탄으로 만든 것이다. 조선이 만든 1킬로톤급 항공핵지뢰폭탄도 저런 모양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조선은 투발오차가 너무 심해 민간피해를 가중시킬 핵포탄은 만들지 않는다. 그 대신 조선은 전시에 민간피해를 전혀 발생시키지 않으면서 타격대상만 선별, 파괴하는 정밀타격수단인 항공핵지뢰폭탄을 사용할 것으로 예견된다.     © 자주시보

 
2. 1킬로톤급 핵탄의 피폭구역

미국 보건부 산하 환경보건국 방사능방호실이 2002년 7월에 펴낸 자료 ‘핵무기 폭발(Nuclear Weapon Detonations)’은 1킬로톤급 핵폭발의 파괴력을 이렇게 예상하였다. 1킬로톤급 핵탄이 폭발하는 순간, 폭심점으로부터 직경 275m의 피폭구역이 핵폭풍으로 날아가고, 폭심점으로부터 직경 610m의 피폭구역이 핵화염으로 타버리고, 폭심점으로부터 직경 790m의 피폭구역이 방사능피해를 입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열거한 피폭구역들은 완전히 소멸되는 완파범위에 해당하는데, 그보다 덜 파괴되는 반파범위도 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전시에 조선의 복엽습격기가 1킬로톤급 항공핵지뢰폭탄을 투하하여 파괴할 피폭구역은 폭심점으로부터 직경 1.5km에 이르는 범위로 확대될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진 5> 

▲ <사진 5> 미국 서부 네바다주 사막지대의 핵실험장에서 1킬로톤급 핵탄이 폭발하는 장면이다. 군인들과 핵과학자들이 마치 강 건너 불구경을 하는 것처럼 핵폭발현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것은 1킬로톤급 전술핵탄의 피폭범위가 한정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전시에 교전상대의 군사기지를 단숨에 날려버리려는 조선이 복엽습격기를 동원하여 1킬로톤급 항공핵지뢰폭탄을 투하하는 것은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다. 1킬로톤급 항공핵지뢰폭탄을 사용하는 경우 용산기지에 2발, 군산기지에 3발, 오산기지에 7발, 평택기지에 10발을 투하할 것으로 예견된다.     © 자주시보

그런데 주한미국군기지 부지면적을 보면, 용산기지 2.7㎢, 군산기지 3.8㎢, 오산기지 9.6㎢, 평택기지 15.1㎢다. 따라서 전시에 조선이 1킬로톤급 항공핵지뢰폭탄을 사용하는 경우 용산기지에 2발, 군산기지에 3발, 오산기지에 7발, 평택기지에 10발을 투하할 것으로 예견된다. 전시에 조선이 1킬로톤급 항공핵지뢰폭탄을 투하하여 교전상대의 ‘급소’를 강타해야 민간피해를 최소화하고 단숨에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것이다.

복엽습격기가 3.29훈련에 참가한 것은, 달빛도 없는 캄캄한 밤에 엔진과 비행등을 모두 꺼버린 무소음-무조명 초저공 야간활강비행으로 교전상대의 방공레이더망을 뚫고 은밀히 침투한 복엽습격기들이 1킬로톤급 항공핵지뢰폭탄을 교전상대의 군사기지들에 투하하고 일정한 거리 밖으로 물러나서 원격조종으로 터뜨리는 핵폭격전을 연습한 것이다. 조선의 화력타격은 초정밀전술미사일, 무인타격기, 대구경 방사포, 대구경 장사정포를 총동원하는 무징후집중발사로 교전상대의 거점들을 1차 타격, 2차 타격, 3차 타격으로 파괴하는 연속타격으로 전개될 것이므로, 그런 연속타격에 복엽습격기의 항공핵지뢰폭탄 투하가 포함되는 것이다.   
3.19훈련 중에 추격기, 폭격기, 습격기가 투하한 고성능폭탄을 맞은 비행장 활주로에는 <사진 6>에서 보는 것처럼 거대한 분화구가 패였다. 전시에 1킬로톤급 항공핵지뢰폭탄을 맞은 피폭구역에는 위의 사진에서 보는 거대한 분화구보다 20배나 더 크고 깊은 분화구가 생길 것이다. 
 
▲ <사진 6> 3.19훈련 중에 추격기, 폭격기, 습격기가 투하한 고성능폭탄을 맞은 비행장 활주로에 거대한 분화구가 패였다. 전시에 1킬로톤급 항공핵지뢰폭탄을 맞은 피폭구역에는 위의 사진에서 보는 거대한 분화구보다 20배나 더 크고 깊은 분화구가 생길 것이다.     © 자주시보


3. 군사대표단의 시선을 집중시킨 금성-2호

육해공군 고위급 지휘관들로 구성된 미얀마 군사대표단이 2008년 11월 21일부터 12월 2일까지 조선과 중국을 순방하였다. 미얀마 군사대표단은 조선과 중국을 순방하면서 야전부대, 군사시설, 군수공장, 군사대학 등 여러 대상들을 참관한 경험을 장문의 보고서로 작성하였다. 미얀마 군사대표단을 맞은 조선과 중국은 자기들의 군사기지와 무장장비를 보여주었으므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군사정보가 그 보고서에 들어 있다. 보고서에서 이 글의 주제와 직접 관련된 부분은 군사대표단이 조선의 호위함과 중국의 호위함을 돌아보고 기록한 대목이다. <사진 7>

▲ <사진 7> 2008년 11월 26일 평양에서 김격식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이 당시 조선을 방문한 미얀마 군사대표단 단장 수라 쉬웨 만 미얀마군 총참모장과 함께 군사협력양해각서에 서명하는 장면이다. 미얀마는 조선에서 생산된 우수한 무장장비들을 많이 수입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아웅제야급 호위함에 장착된 첨단 함대함미사일 금성-2호도 있다.     © 자주시보

미얀마 군사대표단이 조선의 호위함과 중국의 호위함을 돌아볼 때 관심을 보인 것은 함대함미사일이다. 그들이 함대함미사일에 관심을 보인 까닭은, 당시 자기 나라에서 처음으로 건조된 호위함에 외국산 함대함미사일을 장착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얀마에서 처음 건조된 호위함인 아웅제야급(Aung Zeya-class) 호위함은 배수량이 2,500t, 길이가 108m이며, 해상작전헬기 1대를 탑재한다. 그런데 2008년 당시 미얀마는 그 호위함에 장착할 함대함미사일을 어느 나라에서 수입할 것인지 알아보고 있었다.

미얀마 군사대표단이 관찰한 조선의 호위함은 배수량 2,500t, 길이 108m, 폭 13.3m, 높이 8.2m인 호위함이다. 그들은 보고서에서 그 호위함의 공식명칭을 명시하지 않았고, 남포선박설계연구소에서 건조한 “2,500t급 연안경비함”이라고만 밝혔다. 주목하는 것은, 조선의 호위함과 미얀마의 호위함이 배수량, 길이가 똑같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미얀마의 아웅제야급 호위함이 조선의 기술지원으로 건조되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한다.
외부에 알려진 조선의 호위함들은 배수량이 1,500t인 라진급(Rajin-class), 배수량이 1,845t이며 해상작전헬기 1대를 탑재한 서호급(Soho-class), 배수량이 3,300t이며 해상작전헬기 1대를 탑재한 크라이박급(Krivak-class)인데, 미얀마 군사대표단이 돌아본 2,500t급 호위함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호위함인 것이다. <사진 8>

▲ <사진 8> 2015년 6월 8일 라진조선소를 촬영한 상업위성사진에서 조선의 호위함 1척을 찾아냈다. 호위함의 함미쪽에 둥그런 표식을 한 공간이 해상작전헬기가 이착륙하는 비행갑판이다. 조선인민군 해군은 5종의 호위함을 운용하고 있는데, 위의 사진에 나타난 호위함이 5종 가운데 어떤 종인지는 사진으로 식별하기 힘들다.     © 자주시보

또한 2014년 5월 15일 미국의 조선인민군 연구가 조셉 버뮤디즈(Joseph S. Bermudez)가 <38 노스(North)>에 발표한 글에 따르면, 배수량이 1,300t이고, 해상작전헬기 1대를 탑재하는 신형 호위함이 남포항과 라진항에 각각 정박된 모습을 상업위성이 촬영했다고 한다. 버뮤디즈는 남포항에서 촬영된 신형 호위함이 2011년 10월에 진수되었고, 라진항에서 촬영된 신형 호위함이 2012년 6월에 진수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지만, 그 두 신형 호위함은 이미 취역식을 마치고 실전배치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위와 같은 정보를 파악하면, 현재 조선인민군 해군이 5종의 호위함을 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얀마 군사대표단이 중국에서 돌아본 호위함은 053형 호위함이다. 이 호위함은 배수량 2,000t, 길이 112m, 폭 12m, 승선인원 200명이다.
그런데 미얀마 군사대표단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의 053형 호위함에 두 가지 결함이 있었다. 구식 함대함미사일이 장착된 것과 현대화된 수중무기가 없는 것이 결함이었다. 중국의 053형 호위함에는 미국 군부가 비단벌레(Silkworm)라고 자의적 명칭으로 부르는, 하이잉(海鷹)-1 함대함미사일이 장착되었는데, 이 미사일은 1980년대 초에 생산된 구식 미사일이다. 중국 측은 하이잉-1 함대함미사일이 C-802 함대함미사일로 대체될 것이라고 미얀마 군사대표단에게 말했다지만, C-802 함대함미사일도 1989년에 생산된 구식 함대함미사일이다.

미얀마 군사대표단은 조선의 2,500t급 호위함이 현대적인 무장장비를 갖춘 전투함이라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미얀마 군사대표단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의 2,500t급 호위함에 장착된 현대적인 무장장비는 정보수집장비, 함대함미사일, 사격통제장치로 작동하는 76mm 함포, 사격통제장치로 작동하는 30mm 6렬 고사포와 14.5mm 6렬 고사포, 533mm 중어뢰, 252mm 폭뢰발사기, 대형폭뢰와 기뢰, 82mm 기만탄발사기, 전자전장비 등이다. 중요한 것은, 위에 열거한 무장장비들이 모두 조선산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미얀마 군사대표단은 조선의 2,500t급 호위함에 장착된 각종 무장장비들의 조선식 명칭을 보고서에 기록하지 않았다. 그 까닭은, 당시 조선 측에서 미얀마 군사대표단에게 조선의 무장장비명칭을 외부에 공개하지 말라고 요청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사진 9> 미얀마가 건조한 자국산 첫 호위함인 아웅제야급 호위함이다. 이 호위함은 2010년에 취역하였는데, 미얀마 군사대표단이 2008년 11월 조선을 방문하였을 때 돌아본 조선의 2,500t급 호위함과 배수량과 길이가 똑같다. 아웅제야급 호위함에는 조선이 미얀마에 수출한 첨단 함대함미사일 금성-2호 8문이 장착되었다.     © 자주시보

<사진 9>에서 보는 것처럼, 미얀마가 건조한 아웅제야급 호위함은 2010년에 취역하였는데, 취역식에 모습을 드러낸 그 호위함에는 함대함미사일 8문이 어엿이 장착되어 있었다. 미국의 군사전문가들은 아웅제야급 호위함에 장착된 함대함미사일을 보더니 대뜸 러시아산 함대함미사일 Kh-35라고 지적하였다. 
우란(Uran)이라고 부르는 Kh-35 함대함미사일은 러시아 해군이 자랑하는 무장장비인데, 미얀마는 러시아에서 그 함대함미사일을 수입하여 아웅제야급 호위함에 장착한 것일까? 2008년에 조선을 방문하였을 때 2,500t급 호위함을 주의 깊게 돌아보면서 조선산 함대함미사일에 시선을 집중시켰던 미얀마 군사대표단이 러시아산 함대함미사일을 수입하였을 리 없다. 아웅제야급 호위함에 조선산 함대함미사일이 장착되었다는 사실은 2014년 6월 12일 미국의 온라인 군사평론매체 ‘오릭스 블럭(Oryx Blog)’에 현시된 분석기사에서 밝혀졌다. 분석기사에 따르면, 1990년대에 조선은 러시아산 Kh-35 함대함미사일을 수입하여 그 미사일과 성능이 비슷한 자국산 함대함미사일을 개발했고, 미얀마에 수출도 하였는데, 미얀마가 수입한 조선산 함대함미사일이 아웅제야급 호위함에 장착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이 만든 각종 함대함미사일들에는 금성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조선은 1997년경 독자적인 기술로 자국산 첫 함대함미사일을 개발하였는데, 그것이 금성-1호다. 미국 군부는 금성-1호를 AG-1이라는 자의적 명칭으로 부르다가 몇 해 전부터는 KN-01이라는 자의적 명칭으로 바꾸어 부른다. 사거리가 260km인 금성-1호는 저공비행으로 날아가다가 타격목표로부터 일정한 거리에 도달하는 순간, 높이 솟구쳐 올랐다가 초음속으로 내리꽂히는 종말단계의 하강비행으로 타격목표를 향해 돌진한다. <사진 10>

▲ <사진 10> 조선이 지대함미사일, 함대함미사일로 사용하는 금성-1호가 발사대에서 대기하는 장면이다. 조선은 사거리가 260km인 이 미사일을 1997년경 독자적인 기술로 개발하였다. 미국 군부는 이 미사일을 KN-01이라는 자의적 명칭으로 부른다.     © 자주시보

2014년 5월 31일 조선중앙텔레비죤이 방영한 기록영화 ‘백두산훈련열풍으로 무적의 강군을 키우시여’에는 금성-1호와 다른 신형 함대함미사일이 등장하였는데, 그것이 금성-2호다. <사진 11> 미국의 군사전문가들은 금성-2호가 러시아의 Kh-35 우란 함대함미사일과 비슷한 성능을 가진 것으로 추정한다. 2008년 11월 조선을 방문한 미얀마 군사대표단이 2,500t급 호위함을 돌아보면서 시선을 집중시킨 함대함미사일, 그래서 미얀마가 조선에서 직수입하여 아웅제야급 호위함에 8문을 장착한 함대함미사일이 금성-2호다.

▲ <사진 11> 위쪽 사진은 2014년 5월 31일 조선중앙텔레비죤이 방영한 기록영화 ‘백두산훈련열풍으로 무적의 강군을 키우시여’에 나온 금성-2호 발사장면이다. 아래쪽 사진은 러시아의 Kh-35 우란 함대함미사일이 해수면 위로 저공비행을 하는 장면이다. 미국의 군사전문가들은 금성-2호가 러시아의 Kh-35 우란 함대함미사일과 비슷한 성능을 가진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조선은 금성-2호를 설계할 때 러시아의 함대함미사일을 모방하지 않았고, 독자적으로 설계하였다. 그리하여 금성-2호의 사거리는 200km로 연장되었고, 엔진과 외형도 다르다. 2008년 11월 조선을 방문한 미얀마 군사대표단은 Kh-35 우란보다 우수한 금성-2호를 수입하기로 결정하였다.     © 자주시보

금성-2호의 특징은 지상에서 적함을 향해 발사하는 지대함미사일로, 함상에서 적함을 향해 발사하는 함대함미사일로, 그리고 전투기, 폭격기, 작전헬기, 무인항공기가 공중에서 적함을 향해 발사하는 공대함미사일로 다양하게 사용된다는 점이다. 조선이 폭격기를 동원하여 금성-2호 공중발사연습을 진행한 사실은 한국 언론에 몇 차례 보도되었다. 그와 달리, 금성-1호는 지대함미사일과 함대함미사일로 사용되지만, 너무 크고 무거워서 공대함미사일로 사용하지 못한다.

러시아산 함대함미사일 Kh-35 우란의 사거리는 130km이므로, 미국의 군사전문가들은 금성-2호의 사거리도 그와 비슷할 것으로 추정하였다. 하지만 자존심이 매우 강한 조선은 다른 나라에서 수입한 무기를 모방생산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기 때문에, 금성-2호를 설계할 때도 Kh-35 우란의 설계를 모방하지 않았다. 2014년 6월 12일 <오릭스 블럭>에 현시된 글은 금성-2호와 Kh-35 우란의 차이를 이렇게 밝혀주었다. Kh-35 엔진분사구와 달리 금성-2호 엔진분사구는 원뿔형이고, 금성-2호 발사관은 Kh-35 발사관보다 더 크고, 발사관 거치대도 다르게 생겼다는 것이다. 엔진분사구가 다르게 생겼다는 것은 금성-2호 로켓엔진이 Kh-35 로켓엔진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설계로 제조되었음을 뜻한다. 또한 발사관이 크다는 말은 미사일동체가 크다는 뜻이므로, 금성-2호의 사거리는 Kh-35보다 더 긴 200km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주요성능지표에서 금성-2호가 Kh-35보다 앞섰으니, 미얀마가 아웅제야급 호위함에 장착하는 함대함미사일을 금성-2호로 선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4. 최신형 고속공격정에 장착된 금성-3호

2015년 2월 7일 조선의 언론매체들은 김정은 제1위원장이 참관한 가운데 진행된 신형 반함선로케트 시험발사에 대해 보도하였다. 조선에서는 반함선로케트라 하고, 한국에서는 함대함미사일이라 한다.
2015년 2월 7일 조선의 언론매체들이 신형 함대함미사일 시험발사를 보도하였을 때, 한국의 언론매체들은 그 미사일이 러시아산 함대함미사일 Kh-35 우란을 복제한 것이라고 추정하였지만, 그것은 조선의 함대함미사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억측에 불과하다. 미국의 군사전문가들이 Kh-35와 성능이 비슷한 것으로 추정한 조선산 함대함미사일은 조선이 2000년대 중반에 실전배치한 금성-2호인데, 이 미사일은 2009년에 미얀마에 수출되어 아웅제야급 호위함에 장착되었다. 그런 금성-2호가 2015년 2월에 신형 함대함미사일으로 둔갑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2015년 2월 6일 김정은 제1위원장이 참관한 가운데 진행된 신형 반함선로케트 시험발사에 등장한 것은, 금성-2호보다 더 앞선 고도의 성능을 지닌 최첨단 함대함미사일 금성-3호인 것이다. <사진 12>

▲ <사진 12> 2015년 2월 6일 김정은 제1위원장이 참관한 가운데 진행된 신형 반함선로케트 시험발사현장에서 금성-3호를 발사한 장면이다. 금성-3호는 초정밀화, 지능화된 최첨단 함대함미사일이다. 5,000t급 구축함 정도는 금성-3호 한 발로 격침시킬 수 있다.     © 자주시보

조선의 언론매체들은 금성-3호가 “최첨단 수준에서 개발”되었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초정밀화”되고 “지능화”된 함대함미사일이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조선의 언론매체들은 2.6시험발사현장을 보도하면서, 초정밀화-지능화된 함대함미사일 금성-3호가 타격목표를 향해 “먼 거리”를 “안전하게 비행한 후 <적>함선을 정확히 탐색, 식별하여 명중하였다”고 묘사하였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

금성-3호는 위성항법장치로 날아가다가 타격목표로부터 20km 떨어진 상공에서 해수면 가까이 강하하여 해수면에서 15m 높이로 비행고도를 낮춰 저공비행을 하게 되는데, 타격목표로부터 7km 떨어진 상공에 이르러서는 추적레이더를 켜고 비행고도를 해수면에서 3~4m 높이로 더 낮춰 해수면밀착비행을 한다. 이것이 지능화되었다는 뜻이다. 지능화된 금성-3호는 적함의 레이더에 잡히지 않으며, 적함이 쏘는 교란전파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고 안전하게 비행한다. 금성-3호가 종말단계에서 해수면밀착비행으로 7km를 날아가는 시간은 약 25초밖에 걸리지 않으므로, 적함은 미처 대응할 시간이 없이 피격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금성-3호의 타격정밀도는 4~5m로 추정되는데, 이것이 초정밀화되었다는 뜻이다. 초정밀화-지능화된 금성-3호는 5,000t급 구축함 정도는 한 방에 격침시킬 수 있다.

▲ <사진 13> 금성-3호를 발사하는 농어급 수면효과고속공격정을 촬영한 장면이다. 조선이 최첨단 함대함미사일과 최신형 수면효과고속공격정을 결합시킨 것은 해상타격력을 최강수준으로 끌어올렸음을 의미한다. 조선은 이 고속공격정을 10척 이상 실전배치하였다.     © 자주시보

주목하는 것은, 금성-3호가 스텔스 기술을 적용한 조선의 농어급(Nongo-class) 수면효과고속공격정(surface-effect fast attack craft)에 장착되었다는 점이다. <사진 13>에서 보는 것처럼, 농어급 수면효과고속공격정은 배수량 300t, 길이 40m, 폭 12m인데, 바다 위를 나는 듯이 시속 90km로 항해한다. 이 최신형 공격정은 76mm 함포 1문, 30mm 속사포 1문, 14.5mm 속사포 2문, 최첨단 함대함미사일 금성-3호 4발, 함대공미사일로 무장하였다. 크기는 작아도, 매우 강력한 무장력을 갖춘 것이다. 조선이 최첨단 함대함미사일과 최신형 수면효과고속공격정을 결합시킨 것은 해상타격력을 최강수준으로 끌어올렸음을 의미한다.

미국의 군사전문가들은 조선의 군항들을 촬영한 상업위성사진들에서 농어급 수면효과고속공격정 6척을 식별하였다. 위성사진에 노출된 것만 6척이므로 실제는 10척이 넘는다. 작고 날렵한 선체, 날아가는 듯이 빠른 항해속도, 막강한 타격력, 위력적인 스텔스성능, 높은 타격정밀도를 두루 갖추었다는 점에서, 농어급 수면효과고속공격정은 세계 최강의 해상타격수단으로 인정받을 만하다. 이런 사실을 보면, 조선인민군 해군이 매우 강한 해상전투력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최첨단 함대함미사일 금성-3호를 장착한 최신형 수면효과고속공격정이 10척 이상 실전배치된 것은, 몸집이 비대하고 움직임이 굼뜬 항공모함과 순양함을 주축으로 편성한 항모타격단을 침략돌격대로 앞세워 다른 나라를 쳐들어가곤 하던 미국의 낡은 전법이 조선과 맞붙을 전쟁에서 패인으로 전락하게 될 것임을 예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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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9

미태평양사령관은 요즈음 밤잠을 설친다

[한호석의 개벽예감](162)
자주시보 2015년 06월 08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비결은 치밀한 작전계획과 압도적인 무력
2. 핵탄과 함께 기만탄 사출하는 다발식 재진입체
3. 너무 커서 자행발사대에 싣지 못하는 조선의 초대형 미사일
4. 미국 군부가 처음 보는 조선의 신형 미사일 10발 
5. 이미 시작된 전초전에서 어느 쪽이 이겼나? 

▲ <사진 1> 미국에서 통일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1862년 10월 3일 링컨 대통령과 조지 맥클릴런 북군사령관이 전선을 시찰하면서 찍은 사진이다. 통일전쟁에서 전술적 패배를 거듭하던 북군이 결국 승리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링컨의 신념인데, 그는 통일전쟁의 정당성에 대한 굳은 신념을 가짔기에 전투에서 계속 퍠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 이길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북군이 당시 최첨단통신수단인 전보를 사용한 것이다. 남군지휘부는 말을 타고 돌아다니는 연락병을 통해 지휘통신을 보장하였지만, 북군지휘부는 전보를 통해 신속하게 지휘통신을 보장하였다. 미국통일전쟁은 사상정신적으로, 군사기술적으로 준비되어야 승리할 수 있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 자주시보


1. 비결은 치밀한 작전계획과 압도적인 무력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2015년 2월 27일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에 새로 꾸린 근위부대관을 돌아보면서 “조국통일대전을 눈앞에 둔 오늘의 정세는 모든 부대들이 전쟁에 대처할 수 있는 정치사상적, 군사기술적, 물질적 준비를 충분히 갖춘 근위부대가 될 것을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인민군대의 모든 부대들이 근위부대운동을 힘있게 벌림으로써 미제와 반드시 치르게 될 앞으로의 싸움에서 미제의 성조기와 추종세력들의 기발을 걸레짝처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 인용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김정은 제1위원장의 정세인식은 조국통일대전이 임박했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고, 그 전쟁에 대한 전망은 조선인민군이 이길 것이라는 신념으로 요약될 수 있다. 바야흐로 조선은 통일전쟁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세계전쟁사에 통일전쟁의 전형으로 기록된 전쟁은 1861년부터 1865년까지 벌어졌던 미국내전(American Civil War)이다. <사진 1> 미국통일전쟁에서 62만~85만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그 전쟁이 잘못된 전쟁이었다고 생각하는 미국인은 한 사람도 없다. 만일 미국에서 통일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 나라는 남측의 아메리카연합국(CSA)과 북측의 아메리카합중국(USA)으로 영구분단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통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미국을 영구분단위기에서 구출한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을 미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위인으로 추앙하는 것이다.

150여 년 전 미국이 통일전쟁을 벌였던 것처럼, 지금 조선도 통일전쟁을 벌이려고 한다. 그런데 조선이 벌이려는 통일전쟁은 미국의 통일전쟁과는 생판 다른 전쟁이다. 당시 미국은 전쟁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탓에 4년 동안 격전이 지속되어 62만~85만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조선은 지난 60년 동안 계속해온 전쟁준비를 완료한 까닭에 압도적인 무력을 동원하는 순간충격전법으로 상대의 급소를 강타하여 단숨에 전쟁을 결속하고 전쟁피해를 극소화하려는 것이다. 조선의 주장에 따르면, 조국해방전쟁(6.25전쟁의 조선식 명칭)은 격전이 3년이나 지속되어 혹심한 전쟁피해를 입었으나, 조국통일대전은 3일 안에 금방 끝날 것이라고 한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전쟁을 72시간 안에 초고속으로 끝낼 비결은 치밀한 전쟁계획과 압도적인 무력인데, 조선에게 과연 그런 비결이 있다는 말인가?  

첫째, 조선이 치밀한 통일전쟁 작전계획을 가졌는가 하는 문제부터 고찰할 필요가 있다. 어느 나라에서나 전쟁계획은 극비사항이므로 외부에서 알 수 없지만, 한국 정부 당국자의 말을 인용한 <중앙일보> 2015년 1월 8일부 보도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그 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제1위원장은 2012년 8월 25일 강원도 원산에서 진행된 당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에서 “새로운 작전계획을 승인”하였고, 각급 부대들이 그 작전계획에 따라 “세부적인 작전계획을 수립하여 훈련을 실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이런 사실은, 조선의 조국통일대전 작전계획이 아주 치밀하게 수립되었고, 조선인민군 각급 부대들은 지난 3년 동안 치밀한 작전계획에 따른 실전연습에 열중하여 오늘에 이르렀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위의 보도기사에 따르면, 조선의 새로운 작전계획은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미국군 주력부대가 개입하지 못하도록 7일 안에 전쟁을 끝내려는 작전계획인데, 이를 위해 “핵, 미사일, 방사포, 특수전부대 등 비대칭전력을 동원하여 초기에 기선을 잡은 뒤에 재래식무력으로 전쟁을 마무리하게 된다”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보도기사에서 조선의 통일전쟁이 7일 전쟁으로 될 것처럼 말한 것은 착오다. 왜냐하면, 전시에 미국이 주력부대를 증원군으로 급파하면 4일 만에 한반도 전선으로 밀려들 것이므로, 조선인민군은 통일전쟁을 무조건 3일 안에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의 통일전쟁 작전계획은 작전시간을 72시간 이상 넘기지 않는 전대미문의 초단기작전계획이라고 보아야 이치에 맞는다. 만일 조선의 통일전쟁이 그런 작전계획에 따라 실제로 진행된다면, 그 전쟁은 세계전쟁사에 전무후무한 초단기속결전으로 될 것이다.

둘째, 조선이 통일전쟁 작전계획을 치밀하게 수립한 것과 더불어 압도적인 무력도 준비하였는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군부와 군사전문가들은 압도적인 무력이라는 말 대신에 교전상대가 갖지 못했거나 또는 교전상대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무력을 뜻하는 비대칭무력(asymmetric armed force)이라는 말을 쓰는데, 압도적인 무력이라는 말이나 비대칭무력이라는 말은 사실상 같은 뜻이다. 위에 인용한 <중앙일보> 2015년 1월 8일부 보도기사에서 한국 정부 당국자는 조선이 가진 비대칭무력을 핵무기, 미사일, 방사포, 특수전부대라고 열거하였다.
하지만 조선은 핵무기, 미사일, 방사포, 특수전부대를 가진 것 이외에도 네 가지 비대칭무력을 더 가졌는데, 그것은 항공연합부대, 잠수함연합부대, 고속기동함대, 싸이버전부대다. 그러므로 조선이 가진 비대칭무력은 여덟 가지나 되는 것이니, 미상불 압도적인 무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사진 2> 미국군이 보유한 전술핵탄 W70이다. 소형화, 경량화, 정밀화된 이 핵탄은 단거리전술미사일에 장착하여 발사된다. 이 핵탄의 폭발력은 1킬로톤에서 100킬로톤까지 다양하다. 이런 전술핵탄은 중성자탄으로 이용된다. 조선도 그와 같은 전술핵탄을 가졌다. 다시 말해서, 조선은 중성자탄을 장착한 초정밀전술미사일을 작전배치한 것이다. 1킬로톤급 중성자탄 1발의 파괴범위는 500-600m밖에 되지 않지만, 그 범위 안에 있는 적의 기갑무력은 모두 파괴된다. 조선인민군 전방부대가 주체포로 중성자탄 10발만 발사해도 전방에 배치된 미2사단은 순식간에 몰살당한다.     © 자주시보

조선이 가진 여덟 가지 비대칭무력 가운데 누구나 첫 번째로 손꼽는 것은 핵무력이다. 조선은 2013년 5월 21일 언론보도를 통하여 핵탄의 소형-경량-다종-정밀화를 이미 완성하였다고 언명하였는데, 그 말은 첨단핵기술로 개발한 강력한 핵무력을 가졌다는 뜻이다. <사진 2>

그런데 그 보도기사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오늘 우리는 소형화, 경량화, 다종화, 정밀화된 핵탄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고 쓰인 문장이다. 소형-경량-다종-정밀화된 핵탄을 가졌다고 쓰지 않고, 소형-경량-다종-정밀화된 핵탄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쓴 것은 소형-경량-다종-정밀화된 첨단핵탄보다 더 앞선 최첨단핵탄도 가졌음을 암시한 것이다.

지금 통일전쟁을 앞두고 있다는 조선이 그 전쟁을 72시간 안에 끝낼 수 있다고 공언하는 가장 유력한 근거는 교전상대를 압도하는 핵무력을 가진데서 찾을 수 있는데, 그런 압도적인 핵무력의 존재는 최첨단핵탄 보유사실을 암시한 위의 인용문에서도 엿볼 수 있다. 조선이 위의 인용문에서 보유사실을 암시한 최첨단핵탄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핵탄을 말하는 것일까?
 
 
2. 핵탄과 함께 기만탄 사출하는 다발식 재진입체
 
오늘날 핵탄공학부문에서 가장 앞선 최첨단기술은 다발각개조준식 재진입체를 만드는 기술이다. 그 이상의 핵탄공학기술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 러시아, 중국의 핵탄공학기술은 지난 반세기 동안 단발식 재진입체(Reentry Vehicle, RV)→다발식 재진입체(Multiple Reentry Vehicle, MRV)→다발각개조준식 재진입체(Multiple Independently Targetable Reentry Vehicle, MITRV)로 발전되어왔다.

핵탄공학기술의 최신, 최고결정체인 다발각개조준식 재진입체가 무엇인지 알려면, 대륙간탄도미사일의 탄도비행원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대륙간탄도미사일 추진로켓 3개가 차례로 연소, 분리되면서 외기권으로 상승한 핵탄이 대기권에 재진입하여 타격목표를 향해 내리꽂히는 극초음속하강비행을 하는 것이라고 간단히 상상하지만, 실제는 상상과 다르다.   
대륙간탄도미사일의 탄도비행과정을 세분하면, 추진단계→중간경로단계→하강단계→종말단계로 나뉜다. 추진단계에서는 단계적으로 연결된 3단 추진로켓들이 차례로 연소, 분리되면서 상승비행궤도를 타고 외기권으로 높이 올라가는데, 그 때 2단 추진로켓은 탄도를 수정하면서 상승비행을 한다. 중간경로단계에서는 외기권에 도달한 3단 추진로켓과 후추진체(post-boost vehicle)이 분리되는데, 사실상 4단 추진로켓으로 볼 수 있는 후추진체는 축고도제어장치(axial altitude control device)를 가동하여 비행자세를 잡으면서 재진입체를 탄도비행궤도에 진입시킨다. 하강단계에서는 재진입체에서 사출된 핵탄이 하강비행궤도를 타고 대기권에 재진입하여 극초음속하강비행을 한다. 종말단계에서는 핵탄이 타격목표를 향해 극초음속으로 돌진하여 폭발한다. <사진 3>

▲ <사진 3> 재진입체에서 사출된 핵탄이 하강비행궤도를 타고 대기권에 재진입하여 극초음속하강비행을 하는 장면을 컴퓨터그래픽으로 그린 상상도다.     © 자주시보

여기서 나의 체험담을 다시 꺼내놓게 된다. 2013년 6월 5일 나는 평양 만경대구역에 있는 조선인민군 무장장비관을 참관하였는데, 전략로케트관에 전시된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3호 실물을 직접 관찰할 수 있었다. 실물이라고 하지만, 신관, 폭탄, 산화제, 연료를 모두 제거한 전시용 실물이다. 강화유리로 만든 높이 30cm의 원형기단 위에 높이 2.5m의 굵은 불수강파이프 지지대가 V형으로 원형기단 외곽에 빙 둘러 설치되었는데, 화성-13호는 그 지지대 위에 얹혀 있었다. 나는 원형기단 중앙부에 들어가 로켓발동기 분사구  6개를 만져보았다. 그 때의 인상 깊은 체험은 2013년 7월 30일 <자주민보>에 실린 나의 글 ‘무장장비관 견문록(5) 내 손끝에 전해진 화성-13의 짜릿한 금속감촉’에 서술되었다.

그런데 그 때 나를 안내하던 무장장비관 해설강사는 화성-13호 앞에서 “이 전략로케트는 추진부가 3단, 전투부가 1단으로 구성된 4단형 로케트”라고 말했는데,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퍽 나중에 가서야 그 해설강사가 말한 전투부가 후추진체를 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리하자면, 조선에서는 3단 추진로켓으로 구성된 추진체(booster)를 추진부라 부르고,  재진입체와 탄두로 구성된 후추진체(post-boost vehicle)를 전투부라 부르는데, 바로 그 전투부에 다발식 재진입체가 들어가는 것이다. <사진 4>

▲ <사진 4> 8축16륜 자행발사대에 실린 화성-13호가 군사행진에 등장하였다. 그 전투부에 다발식 재진입체가 들어간다. 다발식 재진입체는 핵탄과 기만탄, 알루미늄박막을 사출하기 때문에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로는 막을 수 없다.     © 자주시보

그런데 하강단계에 들어선 재진입체에서 핵탄이 사출될 때, 기만탄과 알루미늄박막(chaff)도 함께 사출된다. 여러 발의 핵탄과 기만탄이 함께 사출되면 적의 식별레이더를 교란시킬 수 있고, 알루미늄박막까지 공중에 흩뿌려놓으면 핵탄을 향해 날아오는 요격체의 추적비행을 교란시킬 수 있다. 주목하는 것은,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에 배속된 고성능식별레이더가 제아무리 최첨단기술로 만든 것이라 해도 외형과 비행속도가 서로 똑같은 핵탄과 기만탄을 구분하는 초감도지능은 갖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런 지능은 영원히 갖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미국이 조선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요격해보겠다고 하면서 막대한 자금을 들여 만들어놓은 미사일방어체계는 다발식 재진입체 앞에서 무용지물이다. 그런데도 미국은 미사일방어체계의 요격능력을 강변하는 과장선전에 매달리고 있으며, 미사일방어체계의 기존성능을 개량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계속 퍼붓고 있다. 이미 막대한 개발자금과 운영자금을 먹어치운 무용지물이 막대한 개량자금을 추가로 먹어치우는 것은, 미사일방어체계를 개발한 미국 군수산업자본이 천문학적인 추가이윤을 가로채가는 갈취행위로 보인다.

원래 군수산업자본은 무기생산을 멈추는 즉시 몰락하기 때문에, 군수업체들은 새로운 무기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거나 기존무기체계를 자꾸 개량해야 자기 명맥을 유지할 수 있다. 군수업체의 생리는 그처럼 전쟁승리보다는 이윤추구에 맞춰져 있으므로,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무기가 실전에서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 별로 관심하지 않으며, 무기성능평가시험만 통과하면 무기조달비용을 걷어갈 수 있는 것이다.

돈만 밝히는 미국 군수업체들 속에 엄청난 부정비리가 만연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런 부정비리는 2012년 5월 21일 미국 연방상원 군사위원회 보고서에서 드러났는데, 미국 군수업체들이 각종 군용기를 제작하면서 중국산 짝퉁 전자부품을 100만 개 이상 사용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미국 군용기들이 자꾸 추락하거나 불타는 사고가 빈발한다. 이를테면, 2014년 6월 23일 이륙비행을 하다가 치명적인 엔진결함으로 불타버린 미공군 전투기 F-35A가 작전에 배치될 수 없게 된 사정, 미해병대가 보유한 전투기, 수송기, 헬기 가운데 19%에 이르는 159대가 각종 기계고장을 일으켜 84억 달러를 들여 대폭수리해야 하는 사정, 고성능수직이착륙기라고 자랑하던 아스프리(Osprey)가 너무 많이 추락하여 ‘과부제조기’라는 오명으로 불리는 사정, 미공군 주력전투기인 F-15의 빈번한 추락사고 등은 미국 군수업체의 비리가 미국군 무기체계 속에 얼마나 뿌리 깊이 들어박혔는지를 말해준다. 그런 부정비리의 온상에서 생산된 미사일방어체계로 조선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요격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어리석은 것으로 보인다. 
 
 
3. 너무 커서 자행발사대에 싣지 못하는 조선의 초대형 미사일

이 글의 관심사는 다발식 재진입체를 넘어 다발각개조준식 재진입체로 나아간다. 최첨단 기술이어서 5대 핵강국 이외에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한다는, 핵탄공학기술의 최신, 최고 결정체라는 다발각개조준식 재진입체를 조선에서 만들 수 있을까? 이 문제를 고찰하기에 앞서, 다발각개조준식 재진입체를 작전배치한 다른 핵강국들의 개발경험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발각개조준식 재진입체를 개발하는 데서 가장 앞선 나라는 미국과 러시아다. 이를테면, 미국의 잠대지탄도미사일 트라이던트(Trident)-II 1발은 각개조준식 핵탄 14개를 발사할 수 있는데, 사거리는 7,800km다. 러시아의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 RS-24 야르스(Yars)미사일 1발은 각개조준식 핵탄 10개를 발사할 수 있다. 야르스미사일의 사거리는 11,000km이며 8축16륜 자행발사대에 실리거나 수직갱발사대에 설치된다. 러시아는 2007년 5월 29일 이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처음 시험발사하였고, 2010년 7월 19일부터 작전배치하였다. 2015년 현재 러시아전략로켓군에 작전배치된 야르스미사일은 58발이다. <사진 5>

▲ <사진 5> 러시아가 2010년 7월부터 작전배치한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 야르스다. 이 미사일 전투부에 장착된 다발각개조준식 재진입체에는 핵탄 10발이 들어간다. 현재 러시아전략로케트군에는 이 미사일 58발이 작전배치되었다.     © 자주시보

중국도 미국과 러시아의 뒤를 이어 다발각개조준식 재진입체를 장착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이 둥펑(東風)-31B다. 중국이 이 미사일을 처음 시험발사한 때는 2014년 9월 25일이었으므로, 2015년 6월 현재 작전배치를 앞두고 있다. 
중국의 개발경험을 보면, 다발식 재진입체를 장착한 둥펑-31A를 작전배치한 때로부터 7년 뒤에 다발각개조준식 재진입체를 장착한 둥펑-31B를 시험발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개발경험은 다발식 재진입체를 개발하고 나서 다발각개조준식 재진입체를 개발하기까지 약 10년이 걸렸음을 말해준다.

그러면 지금 조선의 핵탄공학기술은 어느 단계에 와있을까? 조선이 다발식 재진입체도 아직 개발하지 못했고, 겨우 단발식 재진입체밖에 개발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조선이 다발각개조준식 재진입체를 개발하였는가 하고 묻는 물음이 어리석은 물음으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미국이 미사일방어망으로 포위하려는 조선에게, 그리고 미국 본토를 최후일격으로 멸망시킬 핵무력을 갖추었노라고 공언하는 조선에게 다발각개조준식 재진입체를 개발하려는 의사가 없었다고 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미국이 미사일방어망으로 포위하려는 러시아나 중국이 그 미사일방어망을 무력화하기 위해 그러했던 것처럼 조선도 오랜 기간에 걸쳐 단발식 재진입체→다발식 재진입체→다발각개조준식 재진입체 순으로 자기의 핵탄공학기술을 계속 발전시켜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이 다발식 재진입체를 개발한 시점을 파악하면, 다발각개조준식 재진입체를 개발한 시점도 산정할 수 있다. 러시아나 중국이 그러했던 것처럼 조선도 단발식 재진입체를 1세대 대륙간탄도미사일에 장착하였고, 다발식 재진입체를 2세대 대륙간탄도미사일에 장착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이 1세대 대륙간탄도미사일과 2세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각각 개발한 시점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미국에서 공개된 조선의 미사일개발경험에 관한 많은 자료들 가운데 조선의 1세대 대륙간탄도미사일과 2세대 대륙간탄도미사일의 개발시점을 말해주는 자료는 없다.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조선이 1세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언제 개발하였는지 모르는 것이다. 다만 미국 정찰위성이 조선의 1세대 대륙간탄도미사일과 2세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처음으로 포착한 시점, 다시 말해서 조선이 그 두 종의 미사일을 미국의 위성감시망에 처음으로 노출한 시점은 자료에 나와 있다. 미국 정찰위성이 그 두 종의 미사일을 처음 포착한 때는 1994년 2월이다. <사진 6>

▲ <사진 6> 이 위성사진은 2012년 4월 25일 평양에서 진행된 군사행진에 참가하기 위해 시내 도로에서 줄지어 대기하고 있는 화성-10호 자행발사대 8대와 화성-13호 자행발사대 6대를 촬영한 것이다. 미국 정찰위성이 조선의 1세대, 2세대 대륙간탄도미사일들인 목성-1호와 목성-2호를 처음 포착한 때는 1994년 2월이다. 사람들은 2012년 4월 15일 화성-13호가 군사행진에 참가한 것을 보고 조선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이 그 무럽에 개발되었겠거니 생각하지만, 조선의 1세대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시점은 그보다 20여 년 앞선다.     © 자주시보

위성영상자료를 통해 그 두 종의 미사일을 확인한 미국은 그 미사일들에 대포동-1호와 대포동-2호라는 자의적 명칭을 붙였지만, 그 미사일들의 공식명칭은 목성-1호와 목성-2호다. 조선이 목성이라는 명칭을 언론보도를 통해 알리지 않았으므로, 미국이 대포동이라는 자의적 명칭을 붙인 것은 그래도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두 종의 미사일들이 준중거리미사일들이라느니 또는 대포동미사일개발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느니 하는 허위사실을 오래도록 퍼뜨리면서 그 두 종의 미사일이 대륙간탄도미사일이라는 사실을 숨겨왔던 행동은 졸렬하다는 비난을 받을 만하다. 

목성-1호와 목성-2호가 대륙간탄도미사일들이라는 사실은, 권위 있는 군사정보전문매체라는 평판을 받은 <제인스 디펜스 위클리>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제인스 디펜스 위클리> 1994년 3월 12일 보도에 따르면, 대포동-2호는 길이가 32m이고, 지름이 1.3m이다. 이 보도자료를 보면, 목성-2호가 8축16륜 자행발사대에 싣는 화성-13호보다 약 10m나 더 긴 매우 거대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 군사정보전문매체는 1994년 5월 7일에 실은 보도기사에서 대포동-1호와 대포동-2호는 크기가 너무 커서 조선이 보유한 자행발사대에는 통째로 실을 수 없으므로 동체를 몇 개로 분리해서 대형수송차량에 실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8축16륜 자행발사대에 실을 수 없을 만큼 매우 거대한 목성 계열 대륙간탄도미사일들은 조선 북부 험준한 산악지대에 있는 지하요새기지들에 설치된 수직갱발사대에 세워져 있다. 나는 2013년 10월 1일 <자주민보>에 실린 글 ‘4대에 걸쳐 진보한 북의 대륙간탄도미사일’에서 목성-1호는 사거리 8,000km의 1세대 경량급 대륙간탄도미사일이고, 목성-2호는 사거리 15,000km의 2세대 중량급 대륙간탄도미사일이라고 서술한 바 있다.

1994년 2월 조선이 그처럼 두 종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미국의 위성감시망에 일부러 노출하여 그 존재를 알려주자, 화들짝 놀란 미국은 조선을 자기의 대화상대로 인정하는 정책적 전환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1994년부터 사상 처음 조미핵협상이 시작된 획기적인 정세변화배경에는 목성-1호와 목성-2호의 압도적인 힘이 작용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조선은 1994년 2월 어느 날, 아마도 조선에서 광명성절로 경축하는 2월 16일 직전에 목성-1호와 목성-2호의 존재를 미국 정찰위성에 일부러 노출함으로써 그때까지 조선을 대화상대로 인정하지 않고 줄곧 무시해왔던 미국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냈던 것이다.  
 
 
4. 미국 군부가 처음 보는 조선의 신형 미사일 10발

조선은 단발식 재진입체를 장착한 목성-1호와 목성-2호를 이미 1990년대 초에 개발하였고, 그 뒤를 이어 다발식 재진입체를 장착한 목성-3호를 개발하였다. 조선이 언제 목성-3호를 개발하였는지를 말해주는 중요한 정보는, 2003년 9월 9일 공화국 창건 55주년을 경축하는 군사행진을 며칠 앞두고 평양 동쪽에 있는 미림비행장에서 대규모 병력과 무장장비들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되었던 군사행진연습에서 찾을 수 있다. 그 군사행진연습에는 미국 군부가 처음 보는 두 종의 신형 미사일이 참가하였다. 당시 미림비행장 군사행진연습을 촬영한 미국 정찰위성의 영상자료에는 두 종의 미사일 10발과 자행발사대 5대가 위용을 드러냈는데, 그 미사일들은 모두 미국 군부가 처음 보는 신형 미사일들이었다. 

미국 군부가 처음 보는 그 신형 미사일의 정체는 2003년 10월 1일 미국 의회조사국(CRS)이 펴낸 논문 ‘미국에 대한 조선의 탄도미사일 위협’에서 밝혀졌다. 그 논문에 따르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중거리미사일”과 “대포동-X라는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이 2003년 9월 9일 군사행진에 참가하기 위해 미림비행장 군사행진연습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군사행진이 시작되기 직전에 그 미사일들이 철수되었다는 것이다. 미림비행장 군사행진연습을 촬영한 위성영상자료에 나타난, 미국 군부가 처음 보는 두 종의 신형 미사일 10발은 6축12륜 자행발사대 5대에 실린 화성-10호 중거리탄도미사일 5발과 대형트럭에 연결된 차량견인운반대 5대에 실린 목성-3호 5발이었는데, 바로 그 화성-10호와 목성-3호에 각각 다발식 재진입체가 장착된 것이다. <사진 7>

▲ <사진 7> 2003년 9월 초 미국 정찰위성은 미림비행장 군사행진연습에 참가한, 미국 군부가 처음 보는 두 종의 신형 미사일 10발을 촬영하였다. 그 미사일들 가운데 5발은 3세대 대륙간탄도미사일 목성-3호이고, 다른 5발은 중거리탄도미사일 화성-10호다. 위의 사진은 추진체 2단과 전투부 1단으로 구성된 화성-10호를 컴퓨터그래픽으로 그린 상상도다. 주목하는 것은, 목성-3호 전투부와 화성-10호 전투부에 다발식 재진입체가 각각 장착된다는 점이다.     © 자주시보

1994년 2월에 모습을 드러낸 조선의 1세대, 2세대 대륙간탄도미사일들인 목성-1호와 목성-2호는 각각 단발식 재진입체를 장착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인데 비해, 2003년 9월에 모습을 드러낸 조선의 3세대 대륙간탄도미사일 목성-3호는 다발식 재진입체를 장착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이다.
미국 군부는 목성-3호를 대포동-X라고 부른다. 미국이 대포동-1호, 대포동-2호라는 자의적 명칭을 붙여놓았으면, 그 이후에 등장한 3세대 대륙간탄도미사일에는 당연히 대포동-3호라는 자의적 명칭을 붙여야 일관성이 있는데, 대포동-X라는 돌출적인 이름을 붙여놓았다. 미국인들에게 X라는 글자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미지의 존재를 뜻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미국 군부가 대포동-3호를 대포동-X라고 부르는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미국 군부에게 대포동-3호는 예측할 수 없는 미지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이기 때문에 그런 돌출적인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미국 군부는 자기들을 공포로 몰아넣는 다발식 재진입체를 장착한 목성-3호에 대해 생각하기 싫은 것이다.

다발식 재진입체를 각각 장착한 화성-10호와 목성-3호가 2003년 9월 초 미림비행장 군사행진연습에 참가한 것은, 조선이 2002년에 다발식 재진입체 개발을 완료하였음을 말해준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조선은 다발식 재진입체 개발을 2002년에 완료한 뒤에 그보다 한 급 높은 다발각개조준식 재진입체를 개발하는 사업에 착수하였고, 아무리 늦어도 2013년에는 다발각개조준식 재진입체를 개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5. 이미 시작된 전초전에서 어느 쪽이 이겼나? 

주목하는 것은, 2015년 5월 8일 동해에 전개한 조선의 전략잠수함이 수중에서 시험발사한 북극성-1호의 전투부가 연필 끝부분처럼 생기지 않고 우유병 꼭지처럼 생겼다는 점이다. 그런 모양을 한 전투부에는 다발식 재진입체 또는 다발각개조준식 재진입체가 들어가기 마련인데, 조선이 2013년에 다발각개조준식 재진입체를 개발한 것으로 생각되므로, 북극성-1호에는 다발각개조준식 재진입체가 장착된다고 말할 수 있다. 미국 군사정보기관들은 북극성-1호의 외형만 보고서도 다발각개조준식 재진입체가 그 미사일 전투부에 장착된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2015년 5월부터 조선이 다발각개조준식 재진입체를 장착한 최첨단 잠대지탄도미사일의 계열생산에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사진 8>

▲ <사진 8> 2015년 5월 8일 동해에 전개된 전략잠수함이 수중에서 시험발사한 잠대지탄도미사일 북극성-1호가 해수면에서 출수하여 화염을 내뿜으며 하늘 높이 상승비행을 하고 있다. 사거리가 1,500km로 추정되는 북극성-1호 전투부에는 미국의 미사일방어망을 뚫고 들어가 미국 본토의 타격목표 3개 이상을 동시에 날려버릴 수 있는 다발각개조준식 재진입체가 장착된다. 미태평양사령관이 요즈음 피폭악몽에 시달리며 밤잠을 설치는 까닭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조선은 조국통일대전에 앞서 벌어진 전초전에서 미국을 이긴 것이다.     © 자주시보

전시에 태평양 또는 대서양의 수중매복구역에서 매복대기하는 조선의 전략잠수함이 해수면 아래 발사수심에서 불시에 북극성-1호 1발을 쏘면, 다발각개조준식 재진입체가 미국 본토 상공에 드리운 미사일방어망을 뚫고 들어가 서로 다른 3개 이상의 타격목표들을 동시에 날려버리게 될 것이다. 이런 상상을 할 때마다 미국은 소스라치게 놀라는 악몽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런 악몽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듯 미국은 조선의 북극성-1호 수중시험발사에 맞선 대응무력시위를 벌였다. <워싱턴타임스> 2015년 3월 4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2015년 2월 22일 서태평양에 전개한 전략잠수함에서 트라이던트-II 시험발사를 진행하였다. 이 시험발사는 2015년 1월 23일 조선이 동해에 전개한 전략잠수함에서 북극성-1호 수중시험발사를 진행한 것에 맞선 미국의 대응무력시위인 셈이다.  

조선이 다발각개조준식 재진입체를 개발한 데 이어 잠대지탄도미사일까지 개발한 것은 5대 핵강국 이외의 나라들은 엄두를 내지 못하는 핵탄공학기술의 최고봉에 올라섰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조선이 미국과 맞장을 뜰 강위력한 핵무력을 보유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니 미국이 깜짝 놀라 북극성-1호 수중시험발사에 맞선 대응무력시위를 벌일 만도 하였다. 하지만 대응무력시위를 벌인다고 해서 미국이 악몽을 떨쳐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 국방장관 자문위원을 지낸 신안보센터 연구원 밴 잭슨(Van Jackson)은 2015년 2월 26일 연방하원 외교위원회 동아시아태평양소위원회에 제출한 문서에서 “미국은 조선의 요구에 굴복할 수도 없고, 조선의 핵능력을 불능화하기 위해 예방전쟁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하면서 미국에게 닥쳐온 악몽 같은 상황을 개탄하였다.
미태평양사령관 해리 해리스(Harry B. Harris)는 2015년 5월 25일 미국의 유력주간지 <타임>에 실린 대담에서 “당신에게 가장 큰 걱정거리는 무엇인가? 당신의 밤잠을 설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기자의 물음을 받고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위협은 조선”이라고 지적하면서 “그런 조선 때문에 나는 밤잠을 설친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꼭 집어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조선의 전략잠수함이 발사할 북극성-1호의 각개조준식 재진입체에서 기만탄과 함께 사출되는 핵탄들이 언제 미국 본토에 떨어질지 알 수 없으니 밤마다 피폭악몽에 시달리며 잠을 설치는 것이다.

북극성-1호 수중시험발사를 목격한 미태평양사령관이 요즈음 피폭악몽에 시달리며 밤잠을 설치는 것은 조선이 조국통일대전에 앞서 벌인 전초전에서 미국을 이겼다는 말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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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2

오산세균실험실의 탄저균실험, 그 충격적인 내막

[한호석의 개벽예감](161)
자주시보 2015년 06월 01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충격사건의 중심에 있는 오산세균실험실
2. 오산세균실험실에 폴리메라제 연쇄반응기가 새로 들어간 까닭  
3. 미국이 꾸미는 세균전예비음모인가?

▲ <사진 1> 위쪽 사진은 탄저균을 전자현미경을 통해 촬영한 것이고, 아래쪽 사진은 탄저균감염증에 걸린 사람의 팔이 패혈증으로 괴사되는 상처부위를 촬영한 것이다. 탄저균이 인구밀집지역에 퍼지면 500만 명이 위와 같은 처참한 모습으로 몰살당하게 된다.     © 자주시보


1. 충격사건의 중심에 있는 오산세균실험실
 
충격적인 사건이 터졌다. 미국에서 탄저균 표본이 민간탁송업체 페덱스(Fedex)를 통해 18개 세균실험실들에 발송되었는데, 발송된 탄저균 표본들 가운데 살아있는 탄저균 표본이 섞여 있었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탄저균은 왜 위험한가? <사진 1>에서 보는 것처럼, 흔히 ‘공포의 백색가루’라고 불리는 탄저균은 피부, 호흡기, 소화기를 통해 사람에게 감염되어 패혈증을 일으키기 때문에 매우 치명적이다. 만일 탄저균이 인구밀집지역에 퍼지는 경우 500만 명이 탄저균감염증에 걸려 몰살당하게 된다. 이처럼 탄저균은 대재앙을 가져오는 병원체인 것이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살아있는 탄저균을 민간탁송업체를 통해 발송한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대형사고였는지 알 수 있다.

탄저균 같은 1급 병원체의 국내반입은 국내법과 국제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었다. 미국이 살아있는 탄저균을 오산미공군기지에 비밀리에 반입한 것은 국내법과 국제법을 위반하면서 한국 국민 다수의 생명과 안전을 위험에 몰아넣은 불법행위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한국 국민들은 미국에게 항의도 하지 않고 진상규명조차 요구하지 않고 있으니, 참 이상한 일이다.

이번 사건의 내막을 파악하려면 <한겨레>와 <경향신문>, 그리고 미국 <ABC> 텔레비전방송의 보도내용을 종합하여 분석할 필요가 있다. <한겨레>와 <경향신문>은 보건복지부 산하 질병관리본부가 발표한 사건조사결과, 주한미국군사령부가 발표한 보도자료, 그리고 이름을 밝히지 않고 취재에 응한 주한미국군 관계자의 발언을 종합한 보도기사를 내놓았는데, 그 내용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액체상태에서 냉동처리되어 3중으로 포장된 탄저균 냉동표본 1㎖가 2015년 4월 말 오산미공군기지에 있는 세균실험실에 도착했다. 오산세균실험실에는 미육군 전문병 10명, 미육군 군무원 3명, 미공군 전문병 5명, 미국인 계약직 근무자 4명을 합쳐 모두 22명의 전문요원들이 일하고 있다. 그들은 탄저균 냉동표본을 생물안전등급 냉동고에 보관하다가 2015년 5월 21일 생물안전작업대(BSC)에서 해동하였고, 해동된 탄저균을 가지고 탄저균실험을 진행하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엿새가 지난 5월 27일 미국 국방부는 탄저균을 폐기하라는 긴급지시를 오산미공군기지에 보냈고, 오산세균실험실은 그 지시에 따라 탄저균을 폐기하였다. 주한미국군 의료진은 오산세균실험실 근무요원 22명을 검진하고 예방약을 복용시켰는데, 그들에게서 아무런 병리증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른 한편, 미국 <ABC> 텔레비전방송은 미국 국방부의 발표내용과 미국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발표내용을 종합하여 다음과 같이 보도했는데, 그 내용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 <사진 2> 미국 유타주에 있는 덕웨이실험장 정문을 촬영한 사진이다. 73년 전 유타주 사막지대에 건설된 이 실험장은 미국 군부가 새로 개발한 각종 무기를 실험하거나, 새로 개발한 무기를 적재해두는 군사시설이다. 바로 이 실험장에서 개발된 무기들 가운데는 화학무기와 세균무기도 있다.     © 자주시보

▲ <사진 3> 미국 동부 매릴랜드주에 있는 미육군 애버딘실험장 정문을 촬영한 사진이다. 104년 전에 설립된 이 실험장도 덕웨이실험장처럼 신형 무기를 개발하고 실험하는 군사시설이다.     © 자주시보

<사진 2>에서 보는, 미국 서부 유타주에 있는 덕웨이실험장(Dugway Proving Ground)은 2015년 4월 30일 미국 동부 매릴랜드주에 있는 미육군실험장에 탄저균을 발송하였다. 탄저균을 받은 미육군실험장은 <사진 3>에서 보는 애버딘실험장(Aberdeen Proving Ground)이다.
애버딘실험장은 탄저균을 방사선으로 처리하는 안전조치를 취한 뒤에 캘리포니아주, 텍사스주, 위스컨신주, 테네씨주, 매릴랜드주, 버지니아주, 델라웨어주, 뉴저지주, 뉴욕주에 있는 18개 민간세균실험실들에 민간탁송업체를 통해 탄저균 안전표본을 각각 발송하였다.

그런데 매릴랜드주에 있는 민간세균실험실은 자기들이 받은 탄저균 안전표본 속에 살아있는 탄저균이 들어있음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이 사실을 미국질병통제예방센터에 신고하였다. 매릴랜드주 보건당국은 그 세균실험실에서 일하는 근무자 4명에게 탄저균감염증을 치료하는 항생제를 제공하였는데, 4명 가운데 3명만 항생제를 복용하였고 나머지 1명은 항생제 복용을 거절하였다.

위에서 재구성한 <한겨레>, <경향신문>, <ABC>의 보도내용을 읽어보면, 이번 사건의 윤곽만 드러난다. 사건의 윤곽만이 아니라 내막까지 파헤치려면 다음과 같은 심층정보를 추가할 필요가 있다.

첫째, 민간탁송업체는 민간세균실험실에 소포를 배달할 수 있지만, 오산미공군기지에서 비밀리에 운영되는 세균실험실에는 소포를 배달하지 못한다. 또한 민간탁송업체가 냉동처리된 1급 병원체 표본을 배달하는 것도 법으로 금지되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애버딘실험장은 방사선처리를 한 탄저균 표본을 미국 각지에 있는 18개 민간세균실험실들에 발송하였고, 그와 별도로 덕웨이실험장은 방사선처리를 하지 않은 탄저균 표본을 오산세균실험실에 발송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보도기사들은 두 종의 탄저균 표본이 두 갈래로 각각 배송된 과정을 구분하지 않고 뒤섞어놓아 독자들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그 두 배송과정을 분리하여 고찰해야 이번 사건의 내막을 파악할 수 있다.

둘째, 액체상태에서 냉동처리된 탄저균은 살아있는 세균이고, 분말상태에서 방사선처리된 탄저균은 죽은 세균이다. 덕웨이실험장이 오산세균실험실로 발송한 탄저균 냉동표본은 방사선처리를 하지 않은 것이므로 살아있는 탄저균이다. 그와 달리, 애버딘실험장이 18개 민간세균실험실들로 발송한 탄저균 안전표본은 방사선처리를 한 것이므로 죽은 탄저균이다. 탄저균 냉동표본과 탄저균 안전표본을 구분하여 고찰해야 이번 사건의 내막을 알 수 있다.

셋째, 애버딘실험장이 미국 각지에 있는 18개 민간세균실험실에 탄저균 안전표본을 발송한 목적과 덕웨이실험장이 오산세균실험실에 탄저균 냉동표본을 발송한 목적이 서로 달랐다. 전자의 목적은 미국 연방정부가 2009년에 발표한 ‘생물학 위협에 대처하는 국가전략(National Strategy for Countering Biological Threats)’에 따라 세균테러에 대처하기 위한 방역준비사업을 위한 것이고, 후자의 목적은 세균전준비사업을 위한 것이다. 탄저균 표본을 발송한 목적을 구분하여 고찰해야 이번 사건의 내막을 알 수 있다.

▲ <사진 4> 오산미공군기지 정문을 촬영한 사진이다. 이 기지 안에 문제의 세균실험실이 있다. 세균실험실을 설치해놓고 세균실험을 감행해도 한국 정부는 그런 불법행위를 법적으로 제지하지 못한다. 외국군대가 불법행위를 저질러도 못 본척 묵인해주어야 하는 기막힌 현실은 치욕과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 자주시보

넷째, 애버딘실험장이 매릴랜드주에 있는 어느 민간세균실험실에 탄저균 안전표본을 발송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살아있는 탄저균이 섞여 들어갔다. 바로 이것이 사건의 발단이다. 자기들에게 배달된 탄저균 안전표본 속에 살아있는 탄저균이 섞여있는 것을 발견한 그 민간세균실험실은 미국질병통제예방센터에 신고하였다. 미국질병통제예방센터는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탄저균 표본을 보낸 최초의 발송자가 덕웨이실험장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나, 그 실험장은 비공개 군사시설이므로 민간조사단이 들어가 현장조사를 진행할 수 없었다.  또한 덕웨이실험장이 탄저균 냉동표본을 발송한 곳이 <사진 4>에서 보는 오산미공군기지 안에 있는 세균실험실이라는 사실도 조사과정에서 드러났으나, 미국질병통제예방센터는 오산미공군기지에 있는 비공개 군사시설인 세균실험실에 조사단을 보내 현장조사를 진행할 수 없었다. 이처럼 민간조사단이 비공개 군사시설에 대한 현장조사를 실시할 수 없는 제약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이번 사건의 내막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것이다.

다섯째, 2015년 5월 27일 미국 국방부가 미국질병통제예방센터로부터 연락을 받고 탄저균 냉동표본을 폐기하라는 지시를 오산미공군기지에 보내려고 했을 때, 오산세균실험실은 이미 엿새 전에 해동한 탄저균을 가지고 탄저균실험을 한창 진행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미국 국방부는 탄저균실험을 중지시키고 실험 중인 탄저균을 폐기하라고 지시하였고, 오산세균실험실 근무요원 22명에게 “검진을 받고 예방약을 복용하도록 조치”하였다.

이번 사건은 극도로 위험한 1급 병원체인 탄저균 표본을 배송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으므로, 살아있는 탄저균을 접촉한 사람들을 무조건 격리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살아있는 탄저균을 취급한 오산세균실험실 근무요원들은 약식예방조치만 받았다. 이것은 오산세균실험실 근무요원들이 감염위험이 없는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탄저균 냉동표본을 접수하였고, 탄저균실험을 내부규정에 따라 정상적으로 진행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오산세균실험실에 탄저균 냉동표본이 전달된 것은 실수에 의해 발생한 사고가 아니라 내부규정에 따라 정상적으로 진행한 실험활동의 첫 공정이었다. 그런 까닭에, 2015년 5월 28일 미국 육군 참모총장 레이먼드 오디어노(Raymond T. Odierno)는 미국 국방부 출입기자들에게 탄저균 표본이 규정에 따라 배송되었고, 배송 이후에도 인위적인 실수가 없었다고 말했던 것이다.  
 
2. 오산세균실험실에 폴리메라제 연쇄반응기가 새로 들어간 까닭

덕웨이실험장은 왜 탄저균 냉동표본을 오산세균실험실에 보낸 것일까? 냉동처리된 탄저균 표본이 있어야 본격적인 탄저균실험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탄저균 냉동표본을 전달받은 오산실험실에서는 그 냉동표본을 해동하여 탄저균실험을 진행하였던 것이다. 

애버딘실험장이 18개 민간세균실험실들에 탄저균 안전표본을 발송하면서 살아있는 탄저균이 섞여 들어간 것을 모르고 그대로 보낸 것은 실수였지만, 덕웨이실험장이 오산세균실험실에 탄저균 냉동표본을 발송한 것은 정상적인 발송이었는데도 미국 국방부는 탄저균 냉동표본이 실수로 오산세균실험실에 발송된 것처럼 여론을 오도하였다. 이것은 오산세균실험실에서 탄저균실험이 진행된다는 사실을 은폐하려는 짓이다.

이번 사건과 관련된 미국 국방부의 진상은폐는 기만책동으로 확대재생산되었다. 이를테면, 2015년 5월 30일 애쉬튼 카터(Ashton B. Carter) 미국 국방장관은 싱가포르에서 진행된 제12차 아시아안보회의에서 한민구 국방장관을 만나 오산세균실험실에 탄저균 표본이 배달된 것에 대해 사과하면서 사고관련자에 대한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하고 재발방지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능청을 떨었다. 미국 국방장관의 공식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은 오산세균실험실에서 탄저균실험이 진행된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세상을 속이는 기만극이다.

▲ <사진 5> 열순환기라고도 불리는 폴리메라제 연쇄반응기를 사용하는 모습이다.     © 자주시보

그렇다면 오산세균실험실에서 탄저균실험을 진행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원래 세균실험이란 냉동처리된 세균 표본을 해동시켜 세균을 활성화시키고, 그렇게 활성화된 세균을 특수장치에 넣어 세균유전자를 분석하거나 세균을 대량증식시키는 분자생물학실험이다. 이러한 세균실험에는 <사진 5>에서 보는 폴리메라제 연쇄반응기(Polymerase Chain Reaction machine)가 사용된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세균유전자분석실험이나 세균증식실험은 세균무기를 개발하는데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주목하는 것은, 오산세균실험실이 폴리메라제 연쇄반응기를 사용하는 실험시범을 오는 6월 5일에 진행하려고 준비하였다는 점이다. <경향신문> 2015년 5월 29일 보도에 따르면, “신규 유전자분석장비(PCR)”가 얼마 전 오산미공군기지에 새로 들어왔는데, 오는 6월 5일 “주한미군 통합위협인식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그 장비를 사용한 실험시범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고, 이 실험시범을 위해 탄저균 냉동표본을 약 4주 전에 미국에서 반입했다는 것이다. 이 보도기사에서 언급한 유전자분석장비가 바로 폴리메라제 연쇄반응기다.

▲ <사진 6> 이 사진은 오산세균실험실에서 근무요원들이 세균실험을 진행하는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그들은 폴리메라제 연쇄반응기를 사용하여 탄저균 유전자를 분석하고, 탄저균을 대량증식시키는 실험시범을 2015년 6월 5일에 진행하려고 준비하였다.     © 자주시보

위의 정황은 미국 국방부가 탄저균 폐기지시를 내리기 전까지 <사진 6>에서 보는 것처럼 오산세균실험실에서 폴리메라제 연쇄반응기를 사용한 탄저균실험이 진행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데, 그들의 탄저균실험이 탄저균을 무기화하는 세균전준비사업의 일환이 아니냐는 강한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미국이 오산세균실험실에서 탄저균실험을 진행하던 중 미국의 민간세균실험실에서 탄저균표본배송사고가 일어나는 바람에 뜻밖에 세균전준비사업으로 의심되는 움직임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자 미국 국방부가 이번 사건을 탄저균표본배송사고로 축소하고 적당히 넘어가려고 하는 게 아닌가? 
  
미국이 오산미공군기지에 세균실험실을 설치한 때는 지금으로부터 27년 전인 1988년 9월이다. 27년 전, 미국은 세계 각국에 건설한 수많은 해외미국군기지들 가운데 오직 오산미공군기지에만 세균실험실을 설치했고, 해외미국군기지들 가운데 오직 오산미공군기지에만 화생방중대를 창설했다. 지난 27년 동안 오산세균실험실은 세균실험을 진행해왔고, 오산화생방중대는 세균전을 연습해왔다. 이처럼 미국이 오산미공군기지에 세균실험실을 설치하고, 세균전특수부대를 창설한 것은, 조선을 상대로 세균전을 감행하려는 미국의 적대감이 얼마나 심한지를 보여준다.

지금 미국 육군 연구개발 및 공병사령부(U.S. Army Research Development and Engineering Command)는 ‘공동 주한미국군 문맥 및 통합위협인식 첨단기술시범(Joint United State Forces Korea Portal and Integrated Threat Recognition Advanced Technology Demonstration)’이라는 긴 이름으로 불리는 특수사업을 추진하는 중이다. 미국 군부는 그 특수사업을 ‘주피터 에이티디(JUPITR ATD)’라고 약칭한다.

▲ <사진 7> 미국 육군이 생물학통합탐지체계(Biological Integrated Detection System, BIDS)로 사용하는 탐지장비를 실은 야전차량을 촬영한 사진이다.     © 자주시보

그 특수사업을 추진하는 데서 실무를 맡은 곳은 미국 육군 연구개발 및 공병사령부 산하 화학-생물학방호 공동사업실행실(Joint Program Executive Office for Chemical Biological Defense, JPEO-CBD)이고, 지원업무를 맡은 곳은 미국 육군 에지우드 화학-생물학센터(U.S. Army Edgewood Chemical Biological Center)다. 그 센터는 생물학통합탐지체계(Biological Integrated Detection System)를 개발했는데, <사진 7>에서 보는 군용차량은 그 체계의 실험장비를 실은 야전차량이다. 그 센터는 한국의 국방과학연구소와 합동으로 세균위험탐지기를 개발하였다.
‘주피터 에이티디’라는 특수사업이 세균전준비사업이라는 점은 명백하며, 그 특수사업을 추진하는 데서 오산세균실험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도 역시 명백하다.  

그런데 2013년 여름부터 미국의 세균전준비사업에서 특이한 움직임이 일어났음을 엿볼 수 있다. 미국 육군 연구개발 및 공병사령부 예하 에지우드 화학-생물학센터가 2014년 3월 7일 자기 웹싸이트에 현시한 자료에 따르면, 그 센터와 화학-생물학방호 공동사업실행실은 2013년 여름부터 2015년 여름까지 2년 동안 오산미공군기지에 전문인력을 주기적으로 파견하여 주한미국군 병사들을 위한 개별적인 세균전훈련을 진행해오고 있으며, 신형 생물정찰장비들을 보내주었다는 것이다.

주한미국군이 세균전훈련을 강화하고, 화생방중대가 신형 생물정찰장비를 도입하고, 오산세균실험실에서 탄저균실험이 진행되는 등 일련의 군사행동은 미국이 2013년 여름부터 조선을 상대로 하는 세균전준비사업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음을 말해준다.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 
 
▲ <사진 8> 일제 관동군사령부 예하 731부대 요원들이 1940년 11월 중국 지린성 농안현에서 페스트균을 사용한 생체실험을 자행하는 극악무도한 범행장면이다. 종전으로 일본을 점령한 미국은 731부대 지휘관들을 전범재판에 세우지 않고 전원 사면해주었다. 그로써 미국은 일제의 세균전을 계승하였고, 실제로 6.25전쟁 중에 조선을 상대로 세균전을 자행하였다.     © 자주시보


3. 미국이 꾸미는 세균전예비음모인가?

탄저균무기화실험을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감행한 나라는 전범국 일제였다. 일제는 731부대로 알려진 관동군 방역급수부라는 세균전특수부대를 1936년 하얼빈 부근에 설립하였는데, 731부대는 전쟁포로와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사진 8>에서 보는 것처럼 잔혹한 생체실험, 해부실험, 냉동실험을 감행하여 1만여 명을 살해하였고, 중국침략전쟁 중에 중국 각지에서 세균무기공격을 161차례나 감행하는 바람에 중국인 237만명이 세균에 감염되었고 그 가운데 27만명은 세균감염증에 걸려 사망하였다.

일제는 세균전실험을 중국에서만 감행한 것이 아니라 조선에서도 감행하였다. 일제식민지강점기에 도쿄 인근에 있었던 제9기술연구소는 1944년 5월 낙동강 하구의 삼각주에서 시한폭발물을 부착한 풍선에 세균탄을 매달아 미국 본토로 날려보내기 위한 세균전연습을 비밀리에 감행하였던 것이다.

세균무기까지 동원하며 발악하던 일제를 태평양전쟁에서 패망시킨 미국은 일본을 점령한 뒤에 일제의 세균전 범죄자들을 모조리 색출하여 처형해야 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흉계는 사람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미국은 잔인무도한 세균실험과 세균전을 감행한 731부대 지휘관들을 처형하기는커녕 대량학살의 피가 흐르는 그들의 세균무기실험자료를 상납받는 조건으로 세균전 범죄자들을 도꾜전범재판에 세우지 않고 전원 사면해주었다. 이것은 일제의 세균전 범죄를 계승하려는 의도가 미국의 흉심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미국이 살려준 일제의 세균전 범죄자 23명은 종전 후 15년 동안 교또대학에서 세균학을 연구하였고 박사학위를 받은 세균학자로 자기들의 신분을 세탁하였다. 

▲ <사진 9> 2014년 11월 미국 유타주에 있는 덕웨이실험장에서 전문요원들이 세균전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 자주시보

참혹했던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어 전 세계가 평화와 안전을 갈구하던 역사의 전환기에 미국은 일제 전범들로부터 넘겨받은 세균무기실험자료를 움켜쥐고 세균전준비사업에 매달렸는데, 당시 미국이 세균전준비사업을 진행한 비밀거점이 이번 사건에 나오는 덕웨이실험장이다. 
미국 서부 유타주 쏠트레익씨티(Salt Lake City)에서 남서쪽으로 145km 떨어진 외딴 사막지대의 방대한 부지에 건설된 덕웨이실험장은 미육군시험평가사령부(U.S. Army Test and Evaluation Command)가 관리하는 군사시설인데, <사진 9>에서 보는 것처럼 그 실험장에서 각종 세균실험과 세균전훈련이 진행되었고 각종 세균무기가 개발되었다. 덕웨이실험장에서 진행된 각종 세균실험과 세균무기개발에 731부대의 세균무기화실혐자료가 이용되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1943년 10월에 창설된 덕웨이실험장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6년에 잠시 운영을 중지하였다가, 6.25전쟁이 일어나자 운영을 재개하였고, 6.25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4년부터 항구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 <사진 10> 미국은 6.25전쟁 중에 조선의 수많은 민간인거주지들에 세균탄을 투하하였다. 이 사진은 미공군 폭격기들이 조선에 투하한 세균탄을 촬영한 것이다. 세균탄 내부는 네 개의 칸막이로 분할되었는데, 거기에 콜레라균을 비롯한 1급 병원균에 감염된 파리, 거미와 같은 유해곤충들을 무더기로 집어넣었다, 세균전을 감행한 사실 하나만 놓고 봐도, 미국은 조선에게 씼을 수 없는 전쟁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오늘 오산세균실험실에서는 탄저균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세균전 전과범인 미국이 세균전예비음모죄를 저지르고 있는 게 아니냐는 강한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 자주시보

그런데 미국은 바로 그 덕웨이실험장에서 개발한 세균탄을 사용하여 세균전을 감행하였다. <사진 10>에서 보는 것처럼, 6.25전쟁 중에 미공군 폭격기들이 조선의 수많은 민간인거주지들에 세균탄을 투하한 것이다. 6.25전쟁 중에 미국이 세균전을 감행하였다는 사실은, 1952년 9월 15일 조선과 중국에서의 세균전 관련 사실을 위한 국제과학위원회(International Scientific Commission for the Facts Concerning Bacterial Warfare in China and Korea)가 작성한 최종보고서에서 밝혀졌다. 이 보고서를 작성한 국제과학위원회는 세계평화협의회(World Peace Council)가 설립한 조사위원회였는데, 당시 세계평화협의회 회장은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프랑스의 저명한 물리학자 쟝 프레드릭 졸리오 뀌리(Jean Frederic Joliot-Curie)였다. 그는 세계과학사에 커다란 자취를 남긴 뀌리 부부의 사위다. 국제과학위원회만이 아니라 국제민주변호사협의회(International Association of Democratic Lawyers)도 1952년에 ‘조선에서 미국이 자행한 범죄에 관한 보고서’를 발표하여 미국의 세균전을 인류의 양심에 고발하였다.

일제식민지강점기에 하얼빈에 설립된 악명 높은 731부대의 사령관이었던 1급 전범은 육군중장 이시이 시로(石井四郞)인데, 미국은 6.25전쟁 중에 세균전을 감행하면서 그를 전선에 불러들였다. 이시이의 비밀방한은 1952년 초에 두 차례, 1953년 3월에 한 차례 있었다. 미국 군부와 731부대 출신 전범들의 은밀한 결탁은 731부대의 전쟁범죄를 계승한 미국이 6.25전쟁에서 세균전을 감행하였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위에서 논한 것처럼, 6.25전쟁이 불안정한 정전상태로 접어든 때로부터 60년이 지난 오늘 미국은 오산세균실험실에서 탄저균실험을 진행하면서 조선을 극도로 자극하고 있다. 오산세균실험실에서 진행된 탄저균실험은 탄저균방역사업이 아니라 세균전예비음모에 직결된  것으로 보인다.   

1972년 4월 10일에 국제적으로 채택된 생물무기협정은 세균무기의 생산, 보유, 사용을 엄격히 금지하였는데, 미국이 그 협정의 가맹국으로 된 때는 1975년 3월 26일이다. 그러나 미국은 생물무기협정 가맹국으로 된 이후에도 여전히 세균전예비음모에 해당하는 비밀세균실험을 계속해왔다. 바로 이것이 이번에 오산세균실험실 탄저균실험에서 드러난 아메리카제국의 숨겨진 모습이다.

6.25전쟁이 일어났던 1950년대에는 국제형사재판소가 없었기 때문에, 미국이 조선에서 세균전을 감행했어도 미국 군부 책임자들을 전범으로 제소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2002년 7월 1일 국제형사재판소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문을 열었다. 미국이 국제법으로 엄격히 금지된 세균전을 60년 만에 또 다시 감행하려는 움직임이 드러났으므로, 그 진상을 규명하는 조사가 필요하며, 진상조사결과에 따라 세균전예비음모가 확인되면 미국 국방장관, 미국군 합참의장, 주한미국군사령관을 국제형사재판소에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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