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민보 2014년 06월 02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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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은 왜 일본의 극우정권을 상대로 협상을 벌인 것일까?
2014년 5월 26일부터 28일까지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송일호 조선 외무성 조일국교정상화교섭 담당대사를 단장으로 하는 북측 정부대표단과 이하라 준이치(伊原純一)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을 단장으로 하는 일본 정부대표단이 회담을 진행하였다. <사진 1> 이 회담은 지난 3월 31일부터 4월 1일까지 중국 베이징에서 북과 일본이 진행한 국장급 회담의 후속회담이다. 북일 스톡홀름 회담의 합의사항은 ‘조일 정부 간 회담에서 합의된 발표문’으로 정리되어 지난 5월 29일 평양과 도쿄에서 동시에 발표되었다. 이 글에서는 ‘조일 정부 간 회담에서 합의된 발표문’을 5.29 발표문으로 약칭한다.
5.29 발표문의 충격파는 동북아시아 정세를 흔들었고, 전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김정은시대에 북은 국제사회가 예측하기 힘든 사변을 연속적으로 일으키며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는데, 이번에 나온 북일 관계개선 합의도 그런 놀라운 사변들 가운데 하나다.
5.29 발표문에 담긴 합의사항들이 이행되는 경우 북일관계정상화라는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동북아시아 정세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도 불가피하다. 5.29 발표문을 정밀하게 분석해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5.29 발표문의 의의를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북일 스톡홀름 회담이 성사되기까지 북일관계의 흐름을 전반적으로 조망하면서 그 발표문을 정밀하게 분석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남측과 일본의 언론매체들에 떠돌아다니는 5.29 발표문에 대한 해설이나 분석은 천박한 수준에서 맴돌고 있다. 그런 해설이나 분석은 5.29 발표문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결정적인 요인을 파악하지 못하고, 어느 한 부문만 확대해석한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올해에 들어와서 북일 국장급 회담이 베이징과 스톡홀름에서 연속 진행되고 이번에 마침내 관계개선 합의에 이르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북의 외교술이다. 다시 말해서, 북이 외교술을 발휘하여 북일 관계개선 합의를 이끌어낸 것이다. <교도통신>은 2014년 5월 29일부 보도기사에서 “이번 협의(북일 스톡홀름 회담을 뜻함-옮긴이)는 북조선측으로부터 개최타진이 들어와 성사됐다”고 지적하면서, 북과 일본이 관계개선 합의에 이른 것은 “북조선이 전향적이라는 증거”라고 말한 일본 외무성 소식통의 발언을 인용하였다. 이번에 대일협상에 나선 북의 태도가 일본 외무성의 시각에 ‘전향적’으로 보일 만큼 북은 대일 관계개선 협상에 매우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문제가 시야에 들어온다. 북의 협상상대인 일본의 현 정권은 일본의 평화헌법에 대한 해석을 변경하겠다고 하면서 이른바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기 위한 준비를 막바지에서 다그치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집단적 자위권’이란 지난 시기 일본이 전범국으로 저질렀던 군국주의 죄악을 청산하기는커녕 전범국의 침략적 야욕을 계승하여 무력을 증강하고 전쟁권까지 행사하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북은 그처럼 위험천만한 일본의 극우정권을 상대로 국교정상화를 실현하기 위한 협상을 진척시켜 마침내 관계개선 합의를 이끌어낸 것이다. 북은 왜 일본의 극우정권을 상대로 관계개선을 하려는 것일까? 선뜻 풀기 힘든 이 수수께끼 같은 물음과 관련하여 요즈음 남측과 일본의 언론매체들에서 들을 수 있는 몇 가지 견해들은 아래와 같다.
첫째, <교도통신> 2014년 5월 30일 보도에 따르면, 2007년 7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대일관계개선을 추진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는데, 이를 변경하는 지시를 내리지 않은 채 서거하였으므로 대일관계개선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훈으로 되어 김정은 제1위원장에게 승계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대일외교를 담당한 북측 외무성 고위관리가 2012년 당시 일본 민주당 정권의 실세에게 전해준 것이라고 한다.
대일관계개선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훈이므로 북이 그 유훈을 관철해야 한다는 것은 이해되지만, 왜 하필이면 일본의 극우정권을 상대로 그 유훈을 관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기 힘들다. 북이 ‘선대수령의 유훈’을 관철하려 할 때에는 반드시 시기와 조건을 타산할 것으로 생각되는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대일관계개선 유훈을 왜 일본의 극우정권을 상대로 관철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둘째, 북은 요즈음 국가경제건설과 인민생활향상을 위해 막대한 재정을 마련해야 하는 요구를 받고 있는데, 북이 대일관계개선을 자금조달통로로 보기 때문에 일본의 극우정권을 상대로 국교정상화를 실현하기 위한 협상을 벌였다는 견해도 있다. <산케이신붕> 2012년 9월 18일 보도에 따르면, 2002년 9월 17일 조일평양회담에서 합의한, 북의 대일배상청구액 규모는 114억 달러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러나 북에게 자금조달요구가 절실해졌기 때문에 대일관계개선을 추진하였다고 보는 것은, 중대한 정치문제를 경제적 이해관계로 좁혀서 해석하는 천박한 견해로 보인다. 북은 돈에 눈이 팔려 정치적 결정을 함부로 내리는 나라가 아니다.
셋째, 북이 대일관계개선을 추구한 것은, 북에게 적대적인 한미일 삼각동맹관계에 균열을 내려는 목적에서 그렇게 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지금 오바마 정부와 박근혜 정부는 대북관계를 개선하기는커녕 기존 대북대화창구마저도 틀어막고, 대북전쟁연습을 앞세운 극단적인 대북적대정책을 밀고 나가고 있다. 이런 살벌한 판국에 북과 일본이 관계개선에 나선다면, 한미일 삼각동맹관계에 영향을 주게 되리라는 점은 누구나 예감할 수 있다.
그러나 북일관계개선이 파장을 발생시킨다 해도, 그 파장이 미일안보동맹, 한미안보동맹, 한일안보협력관계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일본의 현 정권은 자기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대북관계개선에 나선 것이므로, 그들이 대북관계를 개선하는 범위는 한미일안보동맹을 해치지 않는 ‘금지선’ 안에 한정되는 것이지 그 선을 절대로 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북이 일본의 극우정권을 상대로 관계개선을 합의한 까닭은 무엇일까? 일본의 극우정권을 상대해서라도 관계개선 협상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던 급박한 사정이 북에게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북이 직면한 급박한 사정은 무엇일까?
현재 북이 직면한 급박한 사정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산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말하는 유산은 북의 해외공민조직인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총련)를 뜻한다. 6.25전쟁 직후 혹심한 전쟁피해를 입은 북측 인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움막에서 살아야 했던 그처럼 어려운 시절에도 김일성 주석은 총련 산하 각급 조선학교의 민족교육을 위해 막대한 교육원조비를 보내주었는데, 전후복구기라서 국고에 현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북의 금광에서 캐낸 금덩이를 현금을 대신하여 보내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총련과 재일조선인들에 대한 김일성 주석의 각별한 사랑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로 이어졌다. 그러므로 북의 시각에서 보면, 총련은 단순한 해외공민조직이 아니라 ‘선대수령들의 유산’인 것이다. 김정은 조선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지난 5월 23일 일본 도쿄에서 진행된 총련 제23차 전체대회에 축하문을 보냈는데, 이것은 북이 총련과 재일조선인을 얼마나 중시하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그런데 지금 일본의 극우정권과 극우세력은 총련과 재일조선인에 대한 탄압과 차별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총련과 재일조선인들에 대한 그들의 탄압과 차별은 어제오늘에 있는 일이 아니지만, 지난 몇 해 사이에 전례 없이 난폭해졌다. 이를테면, 일본의 극우정권은 총련간부들이 자기들의 조국인 북을 왕래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고, 재일조선인들이 자기들의 조국인 북에 송금하지 못하도록 하고 어떤 물품도 반출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고, 재일조선인사회와 북을 연결해주는 만경봉호의 일본 입항을 금지시켰고, 일본전세기의 대북왕래도 금지시켰다. 그것만이 아니라 재일조선인사회의 후대를 길러내는 각지역 조선학교들을 무상지원대상에서 제외시킴으로써 민족교육을 재정난으로 떠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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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련과 재일조선인에 대한 그들의 탄압과 차별이 가장 집중적으로 표출된 사건은, 도쿄 중심부에 있는 총련중앙본부 청사와 부지를 강제로 매각하려는 책동이다. <사진 2> 총련 산하 신용조합의 파산으로 발생한 채권 약 627억 엔을 인수한 일본측 정리회수기구가 총련중앙본부 청사와 부지를 경매에 넘겼는데, 지난 3월 24일 도쿄지방법원은 그 청사와 부지를 일본 부동산 투자회사에 매각하도록 허가하였다. 그런데 경매의 제1낙찰자인 몽골법인의 입찰액에 비해 제2낙찰자인 일본 부동산 투자회사의 입찰액은 28억 엔이나 더 적었다. 그런 경우에는 도쿄지방법원이 또 다시 경매에 넘기도록 판결했어야 정상인데, 일본 부동산 투자회사에게 헐값으로 급히 처분하는 부당한 판결을 내린 것이다. 총련은 도쿄지방법원의 부당한 판결이 재일조선인에 대한 민족차별임을 지적하고 상급법원에 항고하였다.
총련중앙본부 청사와 부지가 일본 부동산 투자회사에 넘어가는 경우, 재일조선인사회가 겪게 될 정신적 충격과 실망은 너무 클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북은 총련중앙본부 청사와 부지의 강제매각을 시급히 차단하는 것이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산을 지키는 길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아래의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극우정객 아베 신조(安倍晋三)는 일본 총리직에 오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지마 이사오(飯島勳) 내각관방참여(행정자문관)을 2013년 5월 14일부터 17일까지 자신의 밀사로 평양에 보냈는데, <교도통신> 2013년 5월 25일 보도에 따르면, 북은 이지마 내각관방참여의 방북기간 중에 진행된 일련의 회담들에서 총련중앙본부 청사를 계속 사용할 수 있게 일본 당국이 조치해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또한 지난 3월 30일 중국 베이징에서 진행된 북일 국장급 회담에 참석한 송일호 조일국교정상화교섭 담당대사는 총련중앙본부 청사 매각문제는 북일관계를 개선하는 데서 “기본적인 문제”이므로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북일관계가 진전될 수 없다는 견해를 일본측에 전했다고 취재기자들에게 직접 밝힌 바 있다. 또한 <교도통신> 2014년 5월 30일 보도에 따르면, 북일 스톡홀름 회담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송일호 조일국교정상화교섭 담당대사는 중국 베이징 공항에서 취재기자들을 잠시 만난 자리에서 이번 북일 관계개선 합의에 총련중앙본부 청사 매각문제가 포함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해온 북일관계 12년의 굴곡진 경로
북과 일본이 관계개선으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전환점은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인 2002년 9월 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고이즈미 쥰이치로(小泉純一郞) 당시 일본 총리를 만난 정상회담에서 마련된 것이다. 그 정상회담에서 발표된 조일평양선언의 핵심내용을 요약하면, 지난 시기 조선을 식민지로 강점, 약탈한 범죄에 대해 일본이 “사죄의 뜻을 표명”한 조건에서 북과 일본은 “국교정상화를 빠른 시일 안에 실현”함으로써 전쟁배상금을 “무상자금협력”이라는 이름으로 북에 지불하는 문제와 “재일조선인들의 지위문제와 문화재문제” 등을 해결하기로 공약한 것이다. <산케이신붕> 2012년 9월 18일 보도에 따르면, 당시 정상회담에서 일본측은 전쟁배상이라는 말을 조일평양선언에서 사용하면 남측이 다시 대일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고 거듭 주장하는 바람에 북이 전쟁배상이라는 말을 삭제했다고 한다.
조일평양선언에 따라, 북과 일본은 2002년 10월 29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국교정상화협상을 진행하였고, 2006년 2월 4일 국교정상화협상을 재개하였고, 2007년 3월 7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제1차 국교정상화실무회담을 진행하였고, 같은 해 9월 5일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제2차 국교정상화실무회담을 진행하였으며, 2008년 8월 11일 중국 선양에서 제3차 국교정상화실무회담을 진행하였다. 북과 일본은 제3차 국교정상화실무회담에서 관계개선 합의에 이르렀다.
북과 일본이 2008년 8월 13일 제3차 국교정상화실무회담에서 관계개선을 합의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시 북미관계에서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성과가 나타난 긍정적 분위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를테면, 2008년 6월 26일 북은 녕변원자로 가동기록문서를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에 제출하였고, 미국은 그에 상응하여 북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해제하는 조치에 착수하였으며, 이튿날 북은 녕변원자로 냉각탑을 폭파하였다. 그런 긍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북과 미국은 2008년 10월 3일 평양에서 핵검증방식을 합의하였고, 미국은 10월 11일 북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해제하였던 것이다.
만일 북과 일본이 제3차 국교정상화실무회담에서 합의한 대로 관계를 개선하였더라면,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오늘 북일관계는 국교정상화를 실현하는 단계에 들어섰을지 모른다. 그러나 제3차 국교정상화실무회담에서 북과 일본이 합의한 관계개선은 전혀 이행되지 않았다. 왜 이행되지 않았을까?
북과 일본이 2008년 8월 13일 제3차 국교정상화실무회담에서 합의한 관계개선이 전혀 이행되지 않은 까닭은, 일본이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을 적극 추종하였기 때문이다. 2008년 8월 13일 북과 일본은 제3차 국교정상화실무회담에서 관계개선을 합의하였건만, 당시 미국은 북에서 채취한 핵시료를 자기들이 가져가 검사하겠다고 억지를 부리면서 2008년 10월 3일에 채택된 북미합의 이행을 고의적으로 지체시키다가 2009년 4월 5일 북의 인공위성 발사를 비난하는 유엔안보리 의장성명을 4월 14일에 채택하여 북미관계를 파탄으로 몰아갔다. 그에 대응하여 북은 6자회담 불참을 공식적으로 밝히고, 기존 핵억제력을 더욱 강화하겠다는 내용의 4.14 외무성 선언을 발표하였다. 그 선언에 따라 북은 2009년 5월 25일 제2차 핵실험을 실시하였는데, 일본은 그에 반발하여 자기의 독자적인 기존 대북제재조치를 더욱 강화하여 일본의 대북수출마저 금지함으로써 북일관계를 전면적으로 파탄시키는 극단적인 적대행위를 취하였다. 일본의 대북적대행위로 하여 북일교역이 완전히 끊어진 때는 2009년 7월이었다. 그런 적대행위로도 성에 차지 않은 일본은 북의 항구들에 출입하는 선박들 가운데서 자기들이 자의적으로 지목한 선박을 일본해상보안청이 공해상에서 정선시키고 강제로 검색하려는 이른바 ‘화물검사특별조치법’의 효력을 2010년 7월 4일부터 발생시켰다.
이처럼 일본이 미국의 대북제재조치를 추종하여 자체로 대북제재조치를 더욱 강화하는 극단적인 적대행위를 취한 때로부터 약 2년이 지난 2012년 8월 29일 중국 베이징에서 북측 외무성 유성일 일본과장과 일본 외무성 오노 게이이치(小野啓一) 북동아시아과장이 참석한 예비회담이 진행되었다.
그러는 동안 정세는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2012년 4월 15일 북은 도로이동식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3호를 공개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였고, 12월 12일에는 북의 첫 실용위성을 발사하여 또 다시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이것은 북이 그 동안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던 자기의 강력한 핵무력을 공개한 것이고, 위성발사능력을 과시한 것이다. 북의 핵무력 공개 및 위성발사능력 과시는 북의 핵무력과 미사일능력을 해체시키기 위해 미국이 집요하게 추구해온 대북정책이 2012년에 이르러 완전히 파탄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대북정책이 그처럼 완전히 파탄되자 미국을 추종해온 일본도 덩달아 곤경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 곤경에서 빠져나갈 탈출로를 모색한 사람이 바로 일본 총리 아베 신조다. 아베 총리의 구상은 일본이 대북관계를 개선함으로써 곤경에서 빠져나가려는 것이다.
아베 총리에게는 북일관계와 관련된 두 가지 중요한 정치적 경험이 있다. 그의 경험 가운데 하나는, 그 자신이 26년 전에 겪었던 극적인 경험이다. <조선일보> 2014년 5월 31일 보도에 따르면, 1988년 9월 일본인 피랍자 부모가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 당시 일본 자민당 간사장을 찾아가 영국 런던에서 5년 전에 행방불명된 자신의 딸이 북에 있다는 사실을 알렸는데, 그 때 아베 신타로를 대신하여 피랍자 부모를 일본 외무성과 경시청으로 직접 안내하며 도와준 사람이 아베 신조였다. 아베 신타로의 둘째 아들인 아베 신조는 당시 자민당 간사장이었던 자기 아버지의 비서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한 극적인 경험은 그가 정계에 입문한 직후 그로 하여금 일본인 피랍자 문제에 매달리게 하였고, 총리가 된 뒤에는 일본인 피랍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자신이 맡은 최우선 과제라고 여기며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 커다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게 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일본인 피랍자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함으로써 일본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어 2012년 12월 26일 제57대 일본 총리가 되었다. 그는 총리로 입각한 직후인 2013년 1월 14일 일본인 피랍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생존자를 즉시 귀국시켜야 하고, 생사가 불명한 사람들에 관한 진상을 규명해야 하고, 북에 망명한 요도호 납치범이 송환되어야 한다는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한 바 있다.
아베 총리가 언급한 요도호 납치사건은 이렇다. 1970년 3월 30일 일본 적군파 조직원 9명이 탑승객과 승무원 129명을 싣고 도쿄에서 후쿠오카로 날아가던 일본항공기 요도호를 납치하여, 김포공항에 비상착륙하였다. 그들은 김포공항에서 탑승객을 풀어주고 일본 운수성 차관을 인질로 잡고 다시 이륙하여 평양에 도착한 뒤 망명하였다. <마이니치신붕> 2014년 5월 16일 보도에 따르면, 44년 전 북에 망명한 일본 적군파 조직원들과 그 가족들은 평양에서 약 20km 떨어진 대동강 주변에 조성된 ‘일본혁명촌’에서 36명이 함께 살았는데, 지금은 6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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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총리의 두 가지 경험 가운데 다른 하나는, 고이즈미 당시 일본 총리를 수행한 부관방장관으로 2002년 9월 17일 조일평양선언이 발표된 역사적인 정상회담에 배석한 것이다. <사진 3> 이 경험은 일본인 피랍자 문제를 해결하려면, 싫건 좋건 대북협상을 벌이지 않을 수 없음을 그에게 가르쳐준 것이었다.
그런 경험을 지닌 아베 신조는 일본 총리직에 오른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본인 피랍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행동에 나섰다. <지지통신> 2013년 5월 16일 보도에 따르면, 아베 총리는 일본인 피랍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밀사를 북에 파견하는 비밀사업을 2013년 3월부터 추진했다고 한다. 당시 아베 총리가 대북밀사로 선택한 사람은, 2002년과 2004년 고이즈미 당시 일본 총리가 방북하였을 때, 총리비서관으로 수행한 이지마 내각관방참여였다. 그는 2013년 5월 14일부터 17일까지 아베 총리의 밀사로 평양을 방문하였다. 이지마 내각관방참여는 평양 체류 기간 중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영일 조선로동당 국제담당 비서, 송일호 외무성 조일국교정상화교섭 담당대사 등과 각각 회담하였다. 그는 평양을 방문하고 도쿄로 돌아간 직후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평양방문으로 북일 국교정상화협상 재개 등과 관련된 대북실무협의가 완료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가 북일 국교정상화회담 재개 등과 관련된 대북실무협의가 완료되었다고 밝힌 것은, 북과 일본이 국교정상화협상을 재개하기로 합의하였을 뿐 아니라 장차 재개될 협상에서 논의할 의제까지 합의하였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2014년 3월 31일부터 4월 1일까지 중국 베이징에서 북일 국장급 회담이 진행될 수 있었고, 2014년 5월 26일부터 28일까지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진행된 북일 국장급 회담에서 관계개선에 합의하여 5.28 발표문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사히신붕> 2014년 5월 30일 보도에 따르면, 5.28 발표문에 포함된, 일본의 독자적인 대북제재를 해제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일본 외무성은 신중한 태도를 취하였지만, 아베 총리가 일본의 독자적인 대북제재를 해제하는 문제를 대북교섭수단으로 사용하도록 사전에 승인하는 등 북일 스톡홀름 회담에서 관계개선을 합의하도록 적극 추동하였다고 한다.
주목해야 할 합의문과 발표문의 차이
주목하는 것은, 북일 스톡홀름 회담 합의사항이 ‘조일 정부 간 합의’라는 명칭으로 발표되지 않고, ‘조일 정부 간 회담에서 합의된 발표문’이라는 특이한 명칭으로 발표되었다는 점이다. 국제관계에서 나라와 나라 사이의 합의는 합의문으로 발표되는 게 상례인데, 북일 스톡홀름 회담에서는 왜 발표문을 내놓은 것일까? 그 까닭은, 북일 스톡홀름 회담에서 합의된 사항들 가운데는 외부에 공개하기 힘든 중대하고 예민한 사항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과 일본은 양측이 합의한 합의문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 아니라 양측이 외부에 공개하기로 합의한 발표문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조일 정부 간 회담에서 합의된 발표문’이라는 특이한 명칭이 생겨난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북일 스톡홀름 회담 합의문은 따로 있고, 언론보도를 통해서 발표문만 알려진 것이다.
5.28 발표문에 따르면, 북과 일본은 “조일평양선언에 따라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고 현안문제를 해결하며 국교정상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진지한 협의를 진행하였다”고 한다. 그 협의에서 북은 일본인 피랍자만이 아니라 일본인 행불자, 일본인 배우자, 1945년을 전후하여 북에서 사망한 일본인 유골 및 묘지, 잔류 일본인을 포함하여 “모든 일본인”에 대한 조사를 “포괄적으로 전면적으로 실시하기로 하였다.” 북이 모든 일본인에 대한 조사를 포괄적, 전면적으로 실시한다는 합의사항에는 44년 전 일본항공기 요도호를 납치하여 북에 망명한 일본인 4명을 일본으로 송환한다는 뜻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토머스 쉬퍼(J. Thomas Schieffer) 당시 주일미국대사가 작성하여 2008년 8월 13일 본국에 전송하였고, 나중에 ‘위킬릭스(Wikileaks)’의 폭로로 세상에 공개된 2급 비밀전문에 따르면, 2008년 8월 11일부터 13일까지 중국 선양에서 진행된 제3차 국교정상화실무회담의 합의사항 가운데는, 당시 일본 당국자들이 공개적으로 부인하였지만, 일본항공기 요도호를 납치하여 북에 망명한 일본인 4명을 일본으로 송환한다는 합의사항도 들어있었다. 이번에 북과 일본은 일본인 망명자 송환문제와 관련하여 6년 전에 합의했던 사항을 재확인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5.29 발표문에 따르면, 북은 북의 “모든 기관을 대상으로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특별조사위원회>를 내오기로 하였다.” 북은 “일본인 유골 및 묘지, 잔류 일본인 및 일본인 배우자를 비롯하여 일본인과 관련한 조사 및 확인정형을 수시로 일본측에 통보하며 그 과정에 발견되는 유골의 처리와 생존자의 귀국을 포함한 거취문제는 일본측과 적절히 협의하기로 하였”으며, 피랍자 및 행불자에 대한 조사정형을 수시로 일본측에 통보하며, 조사과정에서 일본인 생존자가 발견되는 경우 귀국시키는 방향에서 조치를 취하기로 하였으며, 일본측 관계자의 방북체류, 관계자와의 면담, 현장방문을 허용하고 관련자료를 일본측과 공유하기로 하였다.
위에 열거한 합의사항들도 이번에 처음 합의한 것이 아니라, 2008년 8월 11일부터 13일까지 중국 선양에서 진행된 제3차 국교정상화실무회담에서 이미 나왔던 합의사항들을 이번에 재확인한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위킬릭스’의 폭로로 세상에 공개된 주일미국대사관의 2급 비밀전문에 따르면, 제3차 국교정상화실무회담 셋째날인 8월 13일 아래와 같이 합의하였다.
첫째, 북은 일본인 피랍자 문제를 해결하는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기 위해 “전면적인” 조사를 실시하기로 합의하였다. 조사를 실시하는 목적은, 북에 생존하는 일본인 납치 피해자를 찾아내 일본으로 송환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둘째, 일본인 피랍자 문제에 대한 조사는 북이 설치하는 조사위원회가 실시하기로 합의하였다. 조사작업을 2008년 가을까지 완료하는 것이 좋겠다고 합의하였다.
셋째, 북은 조사과정에 찾아낸 일본인 생존자에 관한 정보를 일본에 제공하고 일본과 협의하기로 합의하였다.
넷째, 북은 조사활동에 관련된 인원, 자료, 현장에 일본 당국자들이 접근할 수 있게 허용함으로써 조사결과를 “직접 확인”하려는 일본 당국의 노력에 “협조”하기로 합의하였다.
2008년 8월 제3차 국교정상화실무회담에서 합의하였고, 이번에 북일 국장급 회담에서 재확인한 위의 합의사항을 보면, 일본은 조일평양선언에 따라 국교정상화를 실현할 의사를 밝히고 북일관계에서 신뢰조성과 관계개선을 추진하기로 공약하였다. 또한 일본은 북의 ‘특별조사위원회’ 조사작업이 개시되는 시점에 맞춰 인적 왕래를 금지한 조치, 대북송금보고 및 휴대수출신청금액과 관련한 대북제재조치, 북측 선박의 일본 입항을 금지한 조치를 모두 해제하기로 하였다. 특히 대북송금보고 및 휴대수출신청금액과 관련한 대북제재조치를 해제하기로 한 것은 제3차 국교정상화실무회담에서는 합의되지 않았던 것인데, 이번에 합의되어 북일관계개선에서 진일보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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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5.29 발표문에 따르면, 일본은 재일조선인의 지위와 관련한 문제를 “조일평양선언에 따라 성실히 협의해나가기로 하였다.” <사진 4> 북과 국교를 맺지 않은 일본은 재일조선인들이 북의 해외공민인데도 그들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재일조선인들이 지닌 ‘조선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이라는 뜻이 아니므로, 일본은 재일조선인들을 무국적자로 내몰았다. 무국적자는 아무런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으므로, 재일조선인들은 일본 극우정권과 극우세력으로부터 탄압과 차별을 겪고 있는 것이다. 식민지강점기에 사실상 무국적자로 전락한 조선인들에게 자행된 일제의 극악한 민족차별과 인권유린이 70년이 지난 오늘에도 일본에서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과 유엔인권이사회는 북을 헐뜯으려는 동기에서 ‘북한 인권문제’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재일조선인들이 겪는 민족차별과 인권유린을 시급히 해결해야 할 것이다.
재일조선인들의 법적 지위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도는, 북과 일본이 국교정상화를 실현함으로써 일본이 재일조선인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을 인정하는 길밖에 없다. 5.29 발표문에서 일본이 재일조선인의 지위와 관련한 문제를 조일평양선언에 따라 성실히 협의해나가기로 공약한 것은 일본이 재일조선인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을 인정하기 이전이라도 그들에 대한 민족차별과 인권유린을 중단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무국적자의 설움을 겪는 재일조선인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감싸안으려는 북의 해외동포정책이 두드러져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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