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민보 2013년 05월 26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어느 쪽이 특사파견을 요청하였을까?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자신의 특사로 중국에 파견한 최룡해 인민군 총정치국장이 2013년 5월 24일 중국 베이징에 있는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예방하고 김정은 제1위원장의 친서를 전하였다.
최고지도자가 파견한 고위급 특사가 방문국의 최고지도자를 예방하고 친서를 전하는 것은 국제적으로 공인된 외교관례다. 그런 외교관례의 의전절차는 특사파견 이전에 양측 사이에서 합의되어야 하며, 만일 의전절차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특사를 파견하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도 남측 언론매체들은 이번에 북의 고위급 특사가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그런 ‘예측’이야말로 국제적 외교관례도 모르고, 북과 중국의 특별한 우호관계도 모르는 무식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만일 중국 국가주석이 파견한 특사가 평양에 가는 경우에도, 김정은 제1위원장을 예방하고 친서를 전하게 되는 것이다. 북과 중국의 관계는 대등한 관계이기 때문에 그 두 나라 사이의 특사파견이 국제적으로 공인된 외교관례에 따라 진행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번에 김정은 제1위원장이 최룡해 총정치국장을 자신의 특사로 중국에 파견한 것은 국제적 외교관례에 따른 특사파견을 사전에 요청하고 그 요청이 수락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북과 중국 가운데 어느 쪽이 특사파견을 요청하였고, 어느 쪽이 특사파견 요청을 수락하였을까 하는 문제다.
2013년 5월 24일 <뉴욕 타임스>는 중국 분석가들의 견해인 것처럼 얼버무리면서 “지난 몇 달 동안 북이 베이징 회동을 요청해왔으나, 중국 지도부가 그 요청을 거부해왔다”고 서술함으로써 마치 북이 중국에게 특사파견을 간청해오다가 이번에 중국의 허락을 받아 특사를 보낸 것처럼 보도하였지만, 그것은 사실과 전혀 다른 엉터리 보도다. 그런 엉터리 보도와는 정반대로, 특사파견을 요청한 쪽은 중국이었고, 특사파견 요청을 수락한 쪽은 북이었다.
이번 특사파견을 어느 쪽에서 요청하였는지에 관한 정보는 북에서나 중국에서 전혀 보도되지 않았지만, 아래와 같은 작금의 동향을 분석해보면 중국이 북에게 특사파견을 요청한 것이 자명해진다.
북은 중국에 특사를 파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북은 이미 ‘조국통일대전’을 선포하였고, 그것을 위한 결전돌입태세를 취하고 있으며,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을 병진시키는 전략노선을 내외에 천명한 바 있다. 북의 이러한 단호한 태도와 결심은 북이 중국에 특사를 보내는 외교적 행동단계를 완전히 넘어섰음을 뜻한다. 하지만 그러한 북과 달리, 중국은 북을 상대로 특사외교를 펼쳐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 떠밀려갔다. 중국이 처한 상황은 아래와 같이 설명된다.
첫째, 누구나 짐작하는 것처럼, 중국은 북에서 말하는 ‘조국통일대전’을 지지하지 않는다. 물론 중국은 미국의 북침전쟁도 당연히 반대한다. 전형적인 양비론이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은 자기의 양비론을 공개적으로 천명하지는 못한 채, 북과 미국이 서로 충돌을 자제하면서 대화와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자는 식으로 말해왔다.
그런데 중국은 자기의 양비론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고 말았다. 그렇게 된 까닭은, 미국이 지난 몇 달 동안 대북적대정책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면서 북을 극도로 자극하였고, 미국의 그런 극단적인 적대행위를 보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북은 미국과 최후 결전을 벌일 태세를 취하였기 때문이다.
미국과의 최후 결전에 관한 북의 발언들이 결코 빈말이 아니라는 점을 간파한 중국은 얼마 전 미국이 두 달에 걸쳐 감행한 대북전쟁연습을 끝내자, 이제 북이 최후 결전을 개시할 때가 임박하였구나 하는 심각한 우려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절감한 당면과제는,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대화와 협상을 재개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보다도 북미관계에 조성된 전쟁위험부터 일단 막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긴박한 상황에 처한 중국으로서는 북측 고위급 특사의 중국 방문을 요청하여 물리적 충돌 직전에 이른 북미관계의 살벌한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는 수밖에 없었다.
둘째, 2013년 5월 23일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박근혜 대통령이 오는 6월 하순 중국을 방문하게 된다고 발표하였고, 이튿날 청와대도 같은 내용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중국이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방문에 관해 발표하기 하루 전인 5월 22일 김정은 제1위원장이 특사로 파견한 최룡해 총정치국장이 베이징에 도착하였다. 이것은 우연하게 이어진 시간적 연속이 아니다.
중국이 김정은 제1위원장의 특사가 자국에 도착한 직후에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방문이 예정되었음을 발표한 것은 계산된 행동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대북관계와 대남관계를 적절히 조절하는 중국의 외교술이었던 것이다.
2013년 5월 15일 박근혜 대통령은 언론사 정치부장들과 함께 만찬을 나눈 자리에서 “중국이 방문해줬으면 좋겠다는 뜻을 여러 경로를 통해 전달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한 이른 시점에 중국을 방문하려고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방문은 박근혜 대통령도 바라고 있었던 일이고 중국도 바라고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만일 북과 중국이 고위급 회담을 진행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중 정상회담이 열리면, 중국의 입장은 매우 난처해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아도 북의 6자회담 폐기와 핵보유 문제를 둘러싸고 북과 중국이 갈등을 빚고 있다고 하면서 두 나라 사이를 이간하려는 여론이 미국과 남측에서 일렁이고 있는 판에, 만일 북과 중국이 고위급 회담을 진행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중 정상회담이 열리면 미국과 남측은 북과 중국의 전통적 우호관계가 완전히 깨졌다는 선전공세를 퍼부을 것이고, 중국으로서는 그 공세에 반박할 도리가 없게 될 것이다.
북의 6자회담 폐기 및 핵보유 문제와 ‘조국통일대전’ 선포 문제를 둘러싸고 북과 중국 사이에 심각한 이견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두 나라 사이에서 그런 외교갈등은 이번에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또 그 두 나라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특별한 일도 아니다. 비록 전통적인 우호관계라고 하더라도 양측의 국가적 이해관계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 외교갈등을 겪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일상사’라고 말할 수 있다. 지난 시기 북과 중국 사이에서는 오늘 양측이 겪고 있는 견해충돌보다 훨씬 더 심각한 갈등도 여러 차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외교갈등을 겪는다고 해서 북과 중국이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저버리는 것은 아니며, 두 나라는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저버리고 싶어도 저버릴 수 없는 ‘숙명적 관계’에 있다.
그렇지만 북을 고립상태에 몰아넣으려는 미국은, 이번에 북과 중국 사이에서 일어난 견해충돌을 전통적 우호관계의 파탄이라고 왜곡선전하여 북을 고립시키려는 의도를 감추지 않고 있다. 중국이 미국의 그런 속셈을 모를 리 없으며, 미국의 그런 속셈을 못 본 척하고 방치할 리도 없다. 바로 이것이 중국이 남측과 한중 정상회담 개최문제를 합의하는 과정에서 북에게 고위급 특사방문을 서둘러 요청한 배경이며, 북의 고위급 특사가 베이징에 도착한 이튿날 중국이 한중 정상회담이 예정되었다는 사실을 발표한 배경이다.
셋째, 중국의 <인민일보> 2013년 1월 24일 보도에 따르면, 시진핑 국가주석은 지난 1월 23일 박근혜 당선인 특사의 예방을 받은 자리에서 “6자회담의 조속한 재개를 희망한다. 중국은 대화와 협상을 통해 당사국들의 관심사가 균형 있게 해결되고 반도의 비핵화와 장기적 안정이 실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비록 넉 달이라는 시차를 두고 있지만, 중국은 자기의 6자회담 재개의사에 대한 동의를 남과 북 양측으로부터 모두 받아내고 싶었던 것이다.
넷째, 시진핑 국가주석은 2013년 6월 7∼8일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오바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게 되는데, 그 회담은 그가 국가주석에 취임한 이후 처음으로 되는 미중 정상회담이다. 따라서 시진핑 국가주석은 첫 미중 정상회담에서 북미관계에 조성된 전쟁위험을 완화하고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다시 협상으로 끌어낼 어떤 현실적인 제안을 꺼내놓아야 할 필요를 절실히 느끼고 있다. 그런 제안을 꺼내놓으려면, 오바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기 전에 우선 북과 의견을 교환해야 하며, 북으로부터 6자회담 재개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야 하였다. 그래서 중국은 북에게 고위급 특사파견을 서둘러 요청한 것이다.
중국의 건의를 받아들인 북의 외교술
위에서 언급한 맥락을 살펴보면, 이번에 남측과 한중 정상회담 개최문제를 합의하는 과정에서 북에게 고위급 특사방문을 서둘러 요청한 중국이 북의 고위급 특사방문에서 기대한 것은 북의 고위급 특사가 중국의 6자회담 재개의사에 동의를 표시해주기를 바라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중국이 북에게 그런 기대를 하지 않았다면, 중국은 북에게 고위급 특사파견을 요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은 자기의 필요에 따라 북에게 고위급 특사파견을 요청하였으므로, 베이징에 도착한 북의 고위급 특사를 최상의 예를 갖춰 맞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룡해 총정치국장이 김정은 제1위원장의 특사로 특별비행기를 타고 베이징 국제공항에 도착하였을 때, 중국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대외연락부 부부장을 공항에 보내 영접하게 하였고, 대외연락부 부장과 회담하고, 정치국 상무위원과 회담하고,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과 회담하고, 시진핑 국가주석을 예방하는 순으로 방문일정을 진행하였다. 중국으로서는 최상의 예를 갖춘 것이다.
중국으로부터 고위급 특사를 파견해달라는 긴급 요청을 받은 북은 중국이 특사파견에서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최룡해 인민군 총정치국장은 2013년 5월 23일 인민대회당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류윈산 상무위원을 만나 회담하면서 “조선은 중국과 함께 조중관계를 부단히 발전시켜나가기를 희망한다. 중국이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 조선반도 문제를 대화의 궤도로 올려놓기 위해 기울인 거대한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 조선은 중국의 건의를 받아들여 관련국들과 대화에 나서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북이 중국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화에 나서기를 바란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북이 최후 결전 태세에 진입한 상태에서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의 병진노선을 흔들림 없이 추구하겠지만, 중국의 건의를 받아들여 중국이 바라는 대화에 나설 용의가 있음을 밝힌 것이다. 이 발언에 담긴 뜻은, 만일 중국의 건의가 없었다면, 북은 대화에 나설 용의를 표명하지 않았을 텐데, 중국이 대화를 재개할 것을 북에게 건의하였기 때문에 대화에 나설 용의를 표명한다는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최룡해 총정치국장의 그 발언은 대화 재개를 요청한 중국의 체면을 세워준 외교적 발언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
최룡해 총정치국장은 이튿날 시진핑 국가주석을 예방하면서 “조선은 유관국들과 공동으로 노력하여 6자회담 등 각종 형식의 대화와 협상을 통해 관련 문제를 적절하게 해결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최룡해 총정치국장이 “6자회담을 통해 조선반도 비핵화 문제를 적절하게 해결하기 바란다”고 말하지 않고, “6자회담 등 각종 형식의 대화와 협상을 통해 관련 문제를 적절하게 해결하기 바란다”고 말한 것이다. 6자회담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발언과 6자회담 등 각종 형식의 대화와 협상을 통해 관련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발언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최룡해 총정치국장이 6자회담 등 각종 형식의 대화와 협상을 통해 관련 문제를 해결하기 바란다고 말한 것은, 6자회담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해결하기 바라는 중국의 입장에 부합되는 게 아니다.
북은 이미 오래 전에 6자회담이 영원히 끝났다고 선언하고, 6자회담에 다시는 참가하지 않겠다고 공언하였으므로 6자회담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또한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의 병진노선을 채택하고, 핵보유국의 지위를 자국법으로 공고히 하였으므로 미국과 중국이 바라는 북의 핵무기 폐기는 북으로서는 상상하지도 못할 일이다.
그렇지만 북은 6자회담 재개를 절실히 바라는 중국의 요구를 외교석상에서 전면 거부할 수는 없으므로, 문제 해결의 방식을 거론하면서 “6자회담 등 각종 형식의 대화와 협상”을 외교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그렇게 해석하는 논거는, 2000년 10월 12일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자신의 고위급 특사로 미국에 파견한 조명록 인민군 총정치국장이 워싱턴 방문 중에 미국 측과 합의하여 발표한 북미 공동코뮈니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북미 공동코뮈니케에는 “쌍방은 조선반도에서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1953년의 정전협정을 공고한 평화보장체계로 바꾸어 조선전쟁을 공식 종식시키는 데서 4자회담 등 여러 가지 방도들이 있다는 데 대하여 견해를 같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4자회담 재개는 당시 미국이 북에게 요구한 것인데, 북은 미국의 요구로 진행하다가 미국의 무성의한 태도로 중지된 4자회담을 재개할 의사가 조금도 없었지만, 고위급 특사를 워싱턴에 파견한 외교활동에서는 미국의 4자회담 재개의사를 전면 거부하지 않는 듯이 보이는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4자회담 등 여러 가지 방도들”이라는 문구를 북미 공동코뮈니케에 집어넣는 데 동의했던 것이다.
2000년 10월의 대미 특사파견에서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 대중 특사파견에서도 북은 6자회담을 재개할 의사가 전혀 없지만, 고위급 특사를 파견한 외교활동에서 중국의 6자회담 재개의사를 전면 거부하지 않는 듯이 보이는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어째든 중국의 6자회담 재개의사를 전면 거부하지 않는 듯이 보이는 외교적 발언으로 북은 6자회담 재개의사에 동의를 표시해주기 바라는 중국의 기대에 외교적으로 부응한 셈이다.
최룡해 총정치국장은 시진핑 국가주석을 예방한 자리에서 김정은 제1위원장의 친서를 전하였는데, 위에서 언급한 최룡해 총정치국장의 외교적 발언은 김정은 제1위원장의 친서 내용을 사실상 대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통적 우호관계에 있는 중국을 대하는 북의 세련된 외교술이 돋보인다.
북은 중국의 기대에 외교적 발언으로 부응함으로써 중국의 체면을 세워주었고, 시진핑 국가주석이 며칠 뒤 오바마 대통령을 만날 때 6자회담을 재개해야 한다고 강력히 요구할 근거를 마련해주었다. 이로써 미국은 중국으로부터 강력한 정치적 요구를 받게 될 상황으로 밀려간 것이다. 전통적 우호관계에 있는 중국을 움직여 전통적 적대관계에 있는 미국을 압박하는 북의 세련된 외교술이 돋보인다.
미국이 직면한 양자택일, 정치적 항복이냐 군사적 항복이냐
외교적 발언은 어디까지나 외교술에 한정되는 것이므로, 최룡해 총정치국장의 외교적 발언을 6자회담 재개의 가능성이 살아났다는 식으로 확대해석하는 것은 북의 의중을 읽지 못하고 엉뚱한 상상에 빠지는 어리석은 짓이다. 고위급 특사의 외교적 발언이 북측 최고영도자의 결심이 바뀌었음을 말해주는 것도 아니고, 북을 이끄는 조선로동당의 정치노선과 북측 정부의 대외정책이 바뀌었음을 말해주는 것도 아니다. 외교술은 외교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상황을 아전인수 격으로 읽기 좋아하는 남측 언론매체들은 중국을 방문한 최룡해 총정치국장의 외교적 발언으로 마치 한반도 정세가 대결에서 대화로 돌아서는 극적인 전환국면에 들어서기 시작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다. 그러나 심지어 미국의 주요 언론매체들과 미국의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도 이번에 북의 고위급 특사가 중국을 방문한 것으로 하여 6자회담이 재개될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2013년 5월 10일 북측 외무성 대변인은 <조선중앙통신> 기자가 제기한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조선반도 정세격화의 책임을 모면하려는 미국 대통령의 궤변을 비난”하면서 “미국이 우리에 대한 적대행위를 그만두고 적의를 버리지 않는 한 긴장의 근원은 없어질 수 없으며 정세악화와 충돌의 위험은 반드시 재발될 수밖에 없다. 미국의 대통령이라면 다른 누구의 <변화>를 칭얼거릴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그릇된 관점부터 제때에 돌이켜보고 교정할 대담성 정도는 가져야 할 것”이라고 따끔하게 책망하였다.
그보다 앞서 북측 국방위원회 정책국은 2013년 4월 18일에 발표한 성명에서 미국이 “진실로 대화와 협상을 바란다면 다음과 같은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는 용단부터 내려야 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전제조건을 제시하였다.
북이 미국에게 제시한 첫 번째 전제조건은, 미국이 북에 대한 “모든 도발행위들을 즉시 중지하고 전면 사죄”하고, “유엔안전보장리사회 <제재결의>들을 철회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북이 미국에게 제시한 두 번째 전제조건은, 미국이 북을 “위협하거나 공갈하는 핵전쟁연습에 매달리지 않겠다는 것을 세계 앞에 정식으로 담보”하는 것이다.
북이 미국에게 제시한 세 번째 전제조건은, 미국이 “남조선과 그 주변지역에 끌어들인 핵전쟁수단들을 전면적으로 철수하고 재투입 시도를 단념할 결단을 내”리는 것이다.
누구나 직감할 수 있는 것처럼, 위에 열거한 세 가지 전제조건은 북이 미국에게 정치적 항복을 요구한 것이다. 세계 정치사에서 미국에게 정치적 항복을 요구하면서 최후 결전 태세에 진입한 나라는 오직 북밖에 없다.
6자회담을 재개하기 전에 북이 먼저 핵무기 포기의사부터 밝혀야 한다고 요구한 미국의 전제조건을 북이 받아들일 리 만무한 것처럼, 미국도 북이 미국에게 정치적 항복을 요구하는 세 가지 전제조건을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 북과 미국의 적대관계에서 대화와 협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어느 한 쪽이 정치적으로 항복하는 길밖에 보이지 않는다. 지금 북에서는 최후 결전 진입태세를 갖추고 모란봉악단과 은하수 관현악단을 내세워 ‘결전의 노래’를 계속 부르는 중이고, 그에 맞선 미국은 북에서 예고한 ‘최후 결전의 날’에 하루하루 다가서는 참으로 고달픈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정치적 항복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쪽이 마지막에 취하는 행동이다.
그런데도 미국이 북의 정치적 항복 요구를 끝내 거부한다면, 미국에게는 북에서 말하는 최후 결전에서 패하여 군사적으로 항복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미국이 대북관계에서 직면한 양자택일은 정치적 항복이냐 군사적 항복이냐 하는 것으로 정해졌다.(2013년 5월 25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자신의 특사로 중국에 파견한 최룡해 인민군 총정치국장이 2013년 5월 24일 중국 베이징에 있는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예방하고 김정은 제1위원장의 친서를 전하였다.
최고지도자가 파견한 고위급 특사가 방문국의 최고지도자를 예방하고 친서를 전하는 것은 국제적으로 공인된 외교관례다. 그런 외교관례의 의전절차는 특사파견 이전에 양측 사이에서 합의되어야 하며, 만일 의전절차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특사를 파견하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도 남측 언론매체들은 이번에 북의 고위급 특사가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그런 ‘예측’이야말로 국제적 외교관례도 모르고, 북과 중국의 특별한 우호관계도 모르는 무식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만일 중국 국가주석이 파견한 특사가 평양에 가는 경우에도, 김정은 제1위원장을 예방하고 친서를 전하게 되는 것이다. 북과 중국의 관계는 대등한 관계이기 때문에 그 두 나라 사이의 특사파견이 국제적으로 공인된 외교관례에 따라 진행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번에 김정은 제1위원장이 최룡해 총정치국장을 자신의 특사로 중국에 파견한 것은 국제적 외교관례에 따른 특사파견을 사전에 요청하고 그 요청이 수락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북과 중국 가운데 어느 쪽이 특사파견을 요청하였고, 어느 쪽이 특사파견 요청을 수락하였을까 하는 문제다.
2013년 5월 24일 <뉴욕 타임스>는 중국 분석가들의 견해인 것처럼 얼버무리면서 “지난 몇 달 동안 북이 베이징 회동을 요청해왔으나, 중국 지도부가 그 요청을 거부해왔다”고 서술함으로써 마치 북이 중국에게 특사파견을 간청해오다가 이번에 중국의 허락을 받아 특사를 보낸 것처럼 보도하였지만, 그것은 사실과 전혀 다른 엉터리 보도다. 그런 엉터리 보도와는 정반대로, 특사파견을 요청한 쪽은 중국이었고, 특사파견 요청을 수락한 쪽은 북이었다.
이번 특사파견을 어느 쪽에서 요청하였는지에 관한 정보는 북에서나 중국에서 전혀 보도되지 않았지만, 아래와 같은 작금의 동향을 분석해보면 중국이 북에게 특사파견을 요청한 것이 자명해진다.
북은 중국에 특사를 파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북은 이미 ‘조국통일대전’을 선포하였고, 그것을 위한 결전돌입태세를 취하고 있으며,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을 병진시키는 전략노선을 내외에 천명한 바 있다. 북의 이러한 단호한 태도와 결심은 북이 중국에 특사를 보내는 외교적 행동단계를 완전히 넘어섰음을 뜻한다. 하지만 그러한 북과 달리, 중국은 북을 상대로 특사외교를 펼쳐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 떠밀려갔다. 중국이 처한 상황은 아래와 같이 설명된다.
첫째, 누구나 짐작하는 것처럼, 중국은 북에서 말하는 ‘조국통일대전’을 지지하지 않는다. 물론 중국은 미국의 북침전쟁도 당연히 반대한다. 전형적인 양비론이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은 자기의 양비론을 공개적으로 천명하지는 못한 채, 북과 미국이 서로 충돌을 자제하면서 대화와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자는 식으로 말해왔다.
그런데 중국은 자기의 양비론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고 말았다. 그렇게 된 까닭은, 미국이 지난 몇 달 동안 대북적대정책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면서 북을 극도로 자극하였고, 미국의 그런 극단적인 적대행위를 보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북은 미국과 최후 결전을 벌일 태세를 취하였기 때문이다.
미국과의 최후 결전에 관한 북의 발언들이 결코 빈말이 아니라는 점을 간파한 중국은 얼마 전 미국이 두 달에 걸쳐 감행한 대북전쟁연습을 끝내자, 이제 북이 최후 결전을 개시할 때가 임박하였구나 하는 심각한 우려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절감한 당면과제는,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대화와 협상을 재개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보다도 북미관계에 조성된 전쟁위험부터 일단 막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긴박한 상황에 처한 중국으로서는 북측 고위급 특사의 중국 방문을 요청하여 물리적 충돌 직전에 이른 북미관계의 살벌한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는 수밖에 없었다.
둘째, 2013년 5월 23일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박근혜 대통령이 오는 6월 하순 중국을 방문하게 된다고 발표하였고, 이튿날 청와대도 같은 내용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중국이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방문에 관해 발표하기 하루 전인 5월 22일 김정은 제1위원장이 특사로 파견한 최룡해 총정치국장이 베이징에 도착하였다. 이것은 우연하게 이어진 시간적 연속이 아니다.
중국이 김정은 제1위원장의 특사가 자국에 도착한 직후에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방문이 예정되었음을 발표한 것은 계산된 행동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대북관계와 대남관계를 적절히 조절하는 중국의 외교술이었던 것이다.
2013년 5월 15일 박근혜 대통령은 언론사 정치부장들과 함께 만찬을 나눈 자리에서 “중국이 방문해줬으면 좋겠다는 뜻을 여러 경로를 통해 전달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한 이른 시점에 중국을 방문하려고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방문은 박근혜 대통령도 바라고 있었던 일이고 중국도 바라고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만일 북과 중국이 고위급 회담을 진행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중 정상회담이 열리면, 중국의 입장은 매우 난처해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아도 북의 6자회담 폐기와 핵보유 문제를 둘러싸고 북과 중국이 갈등을 빚고 있다고 하면서 두 나라 사이를 이간하려는 여론이 미국과 남측에서 일렁이고 있는 판에, 만일 북과 중국이 고위급 회담을 진행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중 정상회담이 열리면 미국과 남측은 북과 중국의 전통적 우호관계가 완전히 깨졌다는 선전공세를 퍼부을 것이고, 중국으로서는 그 공세에 반박할 도리가 없게 될 것이다.
북의 6자회담 폐기 및 핵보유 문제와 ‘조국통일대전’ 선포 문제를 둘러싸고 북과 중국 사이에 심각한 이견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두 나라 사이에서 그런 외교갈등은 이번에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또 그 두 나라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특별한 일도 아니다. 비록 전통적인 우호관계라고 하더라도 양측의 국가적 이해관계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 외교갈등을 겪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일상사’라고 말할 수 있다. 지난 시기 북과 중국 사이에서는 오늘 양측이 겪고 있는 견해충돌보다 훨씬 더 심각한 갈등도 여러 차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외교갈등을 겪는다고 해서 북과 중국이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저버리는 것은 아니며, 두 나라는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저버리고 싶어도 저버릴 수 없는 ‘숙명적 관계’에 있다.
그렇지만 북을 고립상태에 몰아넣으려는 미국은, 이번에 북과 중국 사이에서 일어난 견해충돌을 전통적 우호관계의 파탄이라고 왜곡선전하여 북을 고립시키려는 의도를 감추지 않고 있다. 중국이 미국의 그런 속셈을 모를 리 없으며, 미국의 그런 속셈을 못 본 척하고 방치할 리도 없다. 바로 이것이 중국이 남측과 한중 정상회담 개최문제를 합의하는 과정에서 북에게 고위급 특사방문을 서둘러 요청한 배경이며, 북의 고위급 특사가 베이징에 도착한 이튿날 중국이 한중 정상회담이 예정되었다는 사실을 발표한 배경이다.
셋째, 중국의 <인민일보> 2013년 1월 24일 보도에 따르면, 시진핑 국가주석은 지난 1월 23일 박근혜 당선인 특사의 예방을 받은 자리에서 “6자회담의 조속한 재개를 희망한다. 중국은 대화와 협상을 통해 당사국들의 관심사가 균형 있게 해결되고 반도의 비핵화와 장기적 안정이 실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비록 넉 달이라는 시차를 두고 있지만, 중국은 자기의 6자회담 재개의사에 대한 동의를 남과 북 양측으로부터 모두 받아내고 싶었던 것이다.
넷째, 시진핑 국가주석은 2013년 6월 7∼8일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오바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게 되는데, 그 회담은 그가 국가주석에 취임한 이후 처음으로 되는 미중 정상회담이다. 따라서 시진핑 국가주석은 첫 미중 정상회담에서 북미관계에 조성된 전쟁위험을 완화하고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다시 협상으로 끌어낼 어떤 현실적인 제안을 꺼내놓아야 할 필요를 절실히 느끼고 있다. 그런 제안을 꺼내놓으려면, 오바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기 전에 우선 북과 의견을 교환해야 하며, 북으로부터 6자회담 재개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야 하였다. 그래서 중국은 북에게 고위급 특사파견을 서둘러 요청한 것이다.
중국의 건의를 받아들인 북의 외교술
위에서 언급한 맥락을 살펴보면, 이번에 남측과 한중 정상회담 개최문제를 합의하는 과정에서 북에게 고위급 특사방문을 서둘러 요청한 중국이 북의 고위급 특사방문에서 기대한 것은 북의 고위급 특사가 중국의 6자회담 재개의사에 동의를 표시해주기를 바라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중국이 북에게 그런 기대를 하지 않았다면, 중국은 북에게 고위급 특사파견을 요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은 자기의 필요에 따라 북에게 고위급 특사파견을 요청하였으므로, 베이징에 도착한 북의 고위급 특사를 최상의 예를 갖춰 맞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룡해 총정치국장이 김정은 제1위원장의 특사로 특별비행기를 타고 베이징 국제공항에 도착하였을 때, 중국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대외연락부 부부장을 공항에 보내 영접하게 하였고, 대외연락부 부장과 회담하고, 정치국 상무위원과 회담하고,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과 회담하고, 시진핑 국가주석을 예방하는 순으로 방문일정을 진행하였다. 중국으로서는 최상의 예를 갖춘 것이다.
중국으로부터 고위급 특사를 파견해달라는 긴급 요청을 받은 북은 중국이 특사파견에서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최룡해 인민군 총정치국장은 2013년 5월 23일 인민대회당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류윈산 상무위원을 만나 회담하면서 “조선은 중국과 함께 조중관계를 부단히 발전시켜나가기를 희망한다. 중국이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 조선반도 문제를 대화의 궤도로 올려놓기 위해 기울인 거대한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 조선은 중국의 건의를 받아들여 관련국들과 대화에 나서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북이 중국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화에 나서기를 바란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북이 최후 결전 태세에 진입한 상태에서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의 병진노선을 흔들림 없이 추구하겠지만, 중국의 건의를 받아들여 중국이 바라는 대화에 나설 용의가 있음을 밝힌 것이다. 이 발언에 담긴 뜻은, 만일 중국의 건의가 없었다면, 북은 대화에 나설 용의를 표명하지 않았을 텐데, 중국이 대화를 재개할 것을 북에게 건의하였기 때문에 대화에 나설 용의를 표명한다는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최룡해 총정치국장의 그 발언은 대화 재개를 요청한 중국의 체면을 세워준 외교적 발언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
최룡해 총정치국장은 이튿날 시진핑 국가주석을 예방하면서 “조선은 유관국들과 공동으로 노력하여 6자회담 등 각종 형식의 대화와 협상을 통해 관련 문제를 적절하게 해결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최룡해 총정치국장이 “6자회담을 통해 조선반도 비핵화 문제를 적절하게 해결하기 바란다”고 말하지 않고, “6자회담 등 각종 형식의 대화와 협상을 통해 관련 문제를 적절하게 해결하기 바란다”고 말한 것이다. 6자회담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발언과 6자회담 등 각종 형식의 대화와 협상을 통해 관련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발언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최룡해 총정치국장이 6자회담 등 각종 형식의 대화와 협상을 통해 관련 문제를 해결하기 바란다고 말한 것은, 6자회담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해결하기 바라는 중국의 입장에 부합되는 게 아니다.
북은 이미 오래 전에 6자회담이 영원히 끝났다고 선언하고, 6자회담에 다시는 참가하지 않겠다고 공언하였으므로 6자회담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또한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의 병진노선을 채택하고, 핵보유국의 지위를 자국법으로 공고히 하였으므로 미국과 중국이 바라는 북의 핵무기 폐기는 북으로서는 상상하지도 못할 일이다.
그렇지만 북은 6자회담 재개를 절실히 바라는 중국의 요구를 외교석상에서 전면 거부할 수는 없으므로, 문제 해결의 방식을 거론하면서 “6자회담 등 각종 형식의 대화와 협상”을 외교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그렇게 해석하는 논거는, 2000년 10월 12일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자신의 고위급 특사로 미국에 파견한 조명록 인민군 총정치국장이 워싱턴 방문 중에 미국 측과 합의하여 발표한 북미 공동코뮈니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북미 공동코뮈니케에는 “쌍방은 조선반도에서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1953년의 정전협정을 공고한 평화보장체계로 바꾸어 조선전쟁을 공식 종식시키는 데서 4자회담 등 여러 가지 방도들이 있다는 데 대하여 견해를 같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4자회담 재개는 당시 미국이 북에게 요구한 것인데, 북은 미국의 요구로 진행하다가 미국의 무성의한 태도로 중지된 4자회담을 재개할 의사가 조금도 없었지만, 고위급 특사를 워싱턴에 파견한 외교활동에서는 미국의 4자회담 재개의사를 전면 거부하지 않는 듯이 보이는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4자회담 등 여러 가지 방도들”이라는 문구를 북미 공동코뮈니케에 집어넣는 데 동의했던 것이다.
2000년 10월의 대미 특사파견에서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 대중 특사파견에서도 북은 6자회담을 재개할 의사가 전혀 없지만, 고위급 특사를 파견한 외교활동에서 중국의 6자회담 재개의사를 전면 거부하지 않는 듯이 보이는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어째든 중국의 6자회담 재개의사를 전면 거부하지 않는 듯이 보이는 외교적 발언으로 북은 6자회담 재개의사에 동의를 표시해주기 바라는 중국의 기대에 외교적으로 부응한 셈이다.
최룡해 총정치국장은 시진핑 국가주석을 예방한 자리에서 김정은 제1위원장의 친서를 전하였는데, 위에서 언급한 최룡해 총정치국장의 외교적 발언은 김정은 제1위원장의 친서 내용을 사실상 대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통적 우호관계에 있는 중국을 대하는 북의 세련된 외교술이 돋보인다.
북은 중국의 기대에 외교적 발언으로 부응함으로써 중국의 체면을 세워주었고, 시진핑 국가주석이 며칠 뒤 오바마 대통령을 만날 때 6자회담을 재개해야 한다고 강력히 요구할 근거를 마련해주었다. 이로써 미국은 중국으로부터 강력한 정치적 요구를 받게 될 상황으로 밀려간 것이다. 전통적 우호관계에 있는 중국을 움직여 전통적 적대관계에 있는 미국을 압박하는 북의 세련된 외교술이 돋보인다.
미국이 직면한 양자택일, 정치적 항복이냐 군사적 항복이냐
외교적 발언은 어디까지나 외교술에 한정되는 것이므로, 최룡해 총정치국장의 외교적 발언을 6자회담 재개의 가능성이 살아났다는 식으로 확대해석하는 것은 북의 의중을 읽지 못하고 엉뚱한 상상에 빠지는 어리석은 짓이다. 고위급 특사의 외교적 발언이 북측 최고영도자의 결심이 바뀌었음을 말해주는 것도 아니고, 북을 이끄는 조선로동당의 정치노선과 북측 정부의 대외정책이 바뀌었음을 말해주는 것도 아니다. 외교술은 외교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상황을 아전인수 격으로 읽기 좋아하는 남측 언론매체들은 중국을 방문한 최룡해 총정치국장의 외교적 발언으로 마치 한반도 정세가 대결에서 대화로 돌아서는 극적인 전환국면에 들어서기 시작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다. 그러나 심지어 미국의 주요 언론매체들과 미국의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도 이번에 북의 고위급 특사가 중국을 방문한 것으로 하여 6자회담이 재개될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2013년 5월 10일 북측 외무성 대변인은 <조선중앙통신> 기자가 제기한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조선반도 정세격화의 책임을 모면하려는 미국 대통령의 궤변을 비난”하면서 “미국이 우리에 대한 적대행위를 그만두고 적의를 버리지 않는 한 긴장의 근원은 없어질 수 없으며 정세악화와 충돌의 위험은 반드시 재발될 수밖에 없다. 미국의 대통령이라면 다른 누구의 <변화>를 칭얼거릴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그릇된 관점부터 제때에 돌이켜보고 교정할 대담성 정도는 가져야 할 것”이라고 따끔하게 책망하였다.
그보다 앞서 북측 국방위원회 정책국은 2013년 4월 18일에 발표한 성명에서 미국이 “진실로 대화와 협상을 바란다면 다음과 같은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는 용단부터 내려야 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전제조건을 제시하였다.
북이 미국에게 제시한 첫 번째 전제조건은, 미국이 북에 대한 “모든 도발행위들을 즉시 중지하고 전면 사죄”하고, “유엔안전보장리사회 <제재결의>들을 철회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북이 미국에게 제시한 두 번째 전제조건은, 미국이 북을 “위협하거나 공갈하는 핵전쟁연습에 매달리지 않겠다는 것을 세계 앞에 정식으로 담보”하는 것이다.
북이 미국에게 제시한 세 번째 전제조건은, 미국이 “남조선과 그 주변지역에 끌어들인 핵전쟁수단들을 전면적으로 철수하고 재투입 시도를 단념할 결단을 내”리는 것이다.
누구나 직감할 수 있는 것처럼, 위에 열거한 세 가지 전제조건은 북이 미국에게 정치적 항복을 요구한 것이다. 세계 정치사에서 미국에게 정치적 항복을 요구하면서 최후 결전 태세에 진입한 나라는 오직 북밖에 없다.
6자회담을 재개하기 전에 북이 먼저 핵무기 포기의사부터 밝혀야 한다고 요구한 미국의 전제조건을 북이 받아들일 리 만무한 것처럼, 미국도 북이 미국에게 정치적 항복을 요구하는 세 가지 전제조건을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 북과 미국의 적대관계에서 대화와 협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어느 한 쪽이 정치적으로 항복하는 길밖에 보이지 않는다. 지금 북에서는 최후 결전 진입태세를 갖추고 모란봉악단과 은하수 관현악단을 내세워 ‘결전의 노래’를 계속 부르는 중이고, 그에 맞선 미국은 북에서 예고한 ‘최후 결전의 날’에 하루하루 다가서는 참으로 고달픈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정치적 항복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쪽이 마지막에 취하는 행동이다.
그런데도 미국이 북의 정치적 항복 요구를 끝내 거부한다면, 미국에게는 북에서 말하는 최후 결전에서 패하여 군사적으로 항복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미국이 대북관계에서 직면한 양자택일은 정치적 항복이냐 군사적 항복이냐 하는 것으로 정해졌다.(2013년 5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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