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과 진보 (110)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마지막 요구마저 짓밟은 핵공갈식 전쟁연습
사람들은 전쟁보다 평화가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지만, 평화가 무조건적으로 소중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민족이 민족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분단체제를 유지해주는 평화, 미국의 핵공갈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평화, 자주적 발전을 가로막은 대미예속에 ‘면죄부’를 주는 평화, 민중이 겪는 민생파탄의 불행과 고통을 끝없이 연장시켜주는 평화, 그런 평화는 결코 평화가 아니다. 그건 가짜 평화다.
진정한 평화는 어떻게 실현되는가? 나라의 통일과 민족의 자주적 발전이 보장되었을 때, 미국의 핵공갈이 한반도에서 사라졌을 때, 진보적 민주주의가 실현되었을 때, 민중이 민생파탄의 불행과 고통에서 벗어났을 때, 바로 그럴 때 진정한 평화가 실현되는 것이다.
그런 진정한 평화를 이 땅에 실현하는 첫 걸음이 바로 민족이 갈망해온 평화협정 체결이다. 평화협정 체결은 민족이 민족으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요구다. 그래서 평화협정 체결이 그토록 중요하고 시급한 정치과업으로 이 민족에게 제기된 것 아닌가.
그런데 누구나 아는 것처럼, 미국은 그 최소한의 요구마저도 거부하였다. 미국은 평화협정이라는 말조차 꺼내지 않고 외면하였으며, 핵공갈식 북침전쟁연습으로 그 최소한의 요구를 짓밟았다. 평화를 요구하는 민족에게 그 민족 전체를 100번 이상 죽일 수 있는 대량파괴무기를 들이대는 핵공갈, 바로 그런 잔인한 핵공갈을 60년 넘도록 지속해온 제국주의국가의 본성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오는 3월 1일부터 선제핵타격연습을 중심으로 하는 북침전쟁연습을 강행하겠다고 발표하였다. ‘키 리졸브’와 ‘독수리’라는 작전명으로 불리는 북침전쟁연습은 해마다 반복되는 것이어서, 이 땅의 대중들이 무감각하게 대하지만 실은 그런 게 아니다. 그것은 전투력을 강화하기 위한 일반적인 군사훈련이 아니라, 이미 작성된 전쟁계획을 임의의 시각에 실전으로 전개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전쟁연습이며, 그 전개양상을 보아도 방어전 연습이 아니라 공격전 연습이다.
평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이 미국에게 위험천만한 핵공갈식 전쟁연습을 중단하라고 목이 쉬도록 외쳤건만, 미국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 땅에서 기어이 전쟁을 일으키려고 결심한 미국에게 전쟁연습을 중단하라고 요구하면 그 요구를 들어주리라고 생각한 것이 제국주의전쟁야욕을 모르는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는지 모른다. 미국은 평화협정 체결 요구를 짓밟은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전쟁연습을 중단하라는 마지막 요구마저도 짓밟고 말았던 것이다.
지난 100년 역사를 돌이켜보면, 알 수 있다. 지난날 민족의 자주독립 요구가 일제의 무력강점으로 짓밟혔다면, 오늘날 민족의 평화실현 요구는 미국의 핵공갈식 전쟁연습으로 짓밟히고 있는 것이다.
주한미국군사령부를 찾아간 굴욕사건
대통령 취임식을 며칠 앞둔 박근혜 당선인이 2013년 2월 22일 ‘키 리졸브’ 준비로 바삐 돌아가는 주한미국군사령부에 나타났다. 지난 시기 노무현 당선인은 주한미국군사령부에 가기 싫었으나 하는 수 없이 그곳에 끌려가다시피 했고, 그 뒤를 이어 이명박 당선인은 자발적으로 그곳을 찾았고, 이번에 박근혜 당선인도 역시 자발적으로 그곳을 찾았다.
일본 총리는 취임에 앞서 주일미국군사령부를 찾아가지 않으며, 독일 총리도 취임에 앞서 주독미국군사령부를 찾아가지 않는데, 유독 이 땅의 대통령만 취임식을 앞두고 주한미국군사령부를 찾아간다. 대통령 당선인의 주한미국군사령부 방문은 관례로 굳어진 듯하다.
대통령 당선인의 주한미국군사령부 방문을 무감각하게 대하는 사람들은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지만, 결코 그런 게 아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직후 주한미국군사령부를 한 차례 비공개로 방문한 적이 있지만, 그것은 대통령 당선인 자격이 아니라 현역 군인 신분으로 비공식 방문한 것이었고, 나중에 대통령 당선인 신분으로는 그곳에 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딸은 대통령 당선인 자격으로 취재진을 대동하고 주한미국군사령부를 공개 방문하였으니, 자기 아버지보다 훨씬 더 굴욕적인 행동을 한 것이다.
대통령 당선인의 주한미국군사령부 방문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괴하고 굴욕적인 관례이며, 대미예속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굴욕적인 행동을 하면서도 굴욕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예속심리상태가 더 절망적으로 보인다.
미국군이 한국군을 참가시킨 북침전쟁연습을 진행하고 있는 가운데 주한미국군사령부에 나타난 박근혜 당선인은 미국군사령관 앞에서 “강력한 한미동맹으로 완벽한 대북 억제체제를 구축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가 말한 ‘대북 억제체제 구축’이란 미국 군부의 시각에서 보면 ‘작전계획 5027’과 ‘작전계획 5029’를 비롯한 북침전쟁준비를 뜻한다. 이것은 대통령 당선인이 주한미국군사령관 앞에서 북침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하자는 식의 발언을 꺼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미국이 북침전쟁을 일으키면, 남측은 무사하고 북측만 망할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하는 것일까? 박근혜 당선인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현실을 배반한 착각이다.
‘키 리졸브’를 왜 가로막아야 하는가?
최근 언론보도을 읽어보면, 올해 ‘키 리졸브’는 한국군이 주도하는 북침전쟁연습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군이 ‘키 리졸브’를 주도할 것이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 ‘키 리졸브’에 참가할 미국군사령관이 한국군 합참의장의 지휘를 받게 된다는 뜻인가?
미국군사령관은 어떤 경우에도 외국군사령관의 지휘를 받지 않는다. 외국군사령관의 지휘를 받는 미국군사령관은 미국군의 명예를 실추시킨 과오를 범한 것이므로 당장 미국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군복을 벗어야 한다. 그런데 올해 ‘키 리졸브’에 참가할 미국군사령관은 그 전쟁연습을 주도하는 한국군 합참의장의 지휘를 받게 생겼으니 이건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키 리졸브’를 한국군 주도로 실시한다는 말은 미국군사령관이 한국군 합참의장의 지휘를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미국군이 한국군을 최전선에 앞세워 전쟁연습을 하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심층적인 군사정보를 가지고 한국군 전투력과 인민군 전투력을 비교하면 한국군은 인민군을 상대로 전쟁을 할 수 없을 만큼 쌍방의 전투력 격차가 크다. 한국군은 지난 60년 동안 미국군사령관의 지휘를 받으며, 미국이 팔아먹는 한 세대 전의 수입무기를 들고, 미국군이 작성한 작전계획에 따라 움직여왔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미국군이 그런 한국군을 최전선에 앞세워 전쟁을 벌이는 경우, 한국군은 종심타격을 받고 궤멸당할 것으로 보인다.
사정이 그처럼 심각한데도 한국군 지휘부는 올해부터 ‘키 리졸브’를 자기들이 주도하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세계 최강’이라고 자처하는 미국군이 뒷받침을 해주니까 자기들이 최전선에 앞장서는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미국은 자기들이 이길 수 있는 전쟁에서만 다른 나라 군대를 뒷받침해주는 것이고, 패전위험이 높아지면 뒷받침을 해주는 게 아니라 전선에서 아예 발을 뺀다. 베트남전쟁이 그런 사실을 잘 말해준다.
그런 속셈을 품은 미국이 한국군을 앞세워 ‘키 리졸브’를 강행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박근혜 당선인과 한국군 지휘부는 직시해야 하는데, 박근혜 당선인이 미국군사령관 앞에서 꺼내놓은 말을 들어보면 너무 심한 착각에 빠져있으니 상황은 절망적이다.
그들의 행동은 그처럼 절망적이지만, 희망은 언제나 진보적 민중에게 있다. 침략전쟁을 반대하고 진정한 평화를 요구하는 민중이 미국의 핵공갈 폭거에 맞서야 한다. 민중이 전개하는 평화운동은 핵공갈식 북침전쟁연습을 일삼는 미국과 싸우는 반미운동이며, 민족의 자주적 발전을 추구하는 자주화운동이다. (2013년 2월 23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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