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과 진보 (106)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지도핵심, 정파집단, 전선체로 구성된다
생물학 지식을 통해서도 사회변혁운동의 존재방식을 설명할 수 있다. 생물학에 따르면, 생명활동을 벌이는 모든 유기체의 기본단위는 세포인데, 세포구조의 성장, 신진대사, 분열, 합성 같은 활동으로 유기체의 생명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세포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세포핵(nucleus)이다. 세포핵은 유전자가 변형되지 않게 유지해주고, 세포조직의 활성, 분열, 유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세포핵이 없으면, 세포가 존재할 수 없고, 세포조직이 없으면, 유기체가 존재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모든 생명체는 세포핵→세포조직→유기체로 구성되어 존재하며 자기의 고유한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다.
사회변혁운동의 활동원리를 그러한 유기체 생명활동에 비유할 수 있다. 세포핵→세포조직→유기체로 구성되어 생명활동이 일어나는 것처럼, 지도핵심→정파집단→전선체로 구성되어 사회변혁운동이 발생하고 성장하고 확대되는 것이다.
유기체의 생명활동에서 세포핵이 중요한 것처럼, 사회변혁운동에서도 지도핵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왜냐하면 세포핵이 유전자 변형을 막아주는 것처럼, 지도핵심은 사회변혁운동의 좌우경적 편향과 변질을 막고 변혁원칙과 변혁노선을 수호하기 때문이다. 또한 세포핵이 세포조직의 활성, 분열, 유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처럼, 지도핵심은 사회변혁운동의 장성, 발전, 계승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지도핵심이 사회변혁운동의 좌우경적 편향과 변질을 막고 변혁원칙과 변혁노선을 수호할 수 있는 것은, 지도핵심이 과학적인 변혁사상으로 무장하고, 오랜 변혁운동과정에서 단련되고 검증되었기 때문이다.
2012년에 쭉정이와 알곡이 추려졌다
그런데 학생운동시기에는 한때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을 위해 자기 청춘을 바쳤다가도, 나이가 들면서 신심과 의지가 차츰 흐지부지되어 소시민으로 전락하거나 보수야당 또는 시민운동에 슬그머니 편입되는 사례를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지금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을 위해 투쟁하는 정치활동가들의 연령분포를 살펴보면, 나이가 들수록 그런 정치활동가들의 수가 급격히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진보정치활동가들이 20대의 혈기왕성한 출발은 좋았으나, 오랜 변혁운동과정에서 단련되고 검증된 지도핵심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중도에 변질, 탈락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우리 변혁운동에서 50대와 60대 장노년층 활동가가 매우 적은 것은 바로 그런 원인으로 하여 생겨난 현상이다.
지금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을 위해 투쟁하는 50대와 60대 활동가들이야말로 학생운동시절부터 30년이 넘는 오랜 기간 동안 흔들리지 않고, 한눈 팔지 않고 투쟁해오며 단련된 투사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회변혁운동을 이끌어 가는 지도핵심은 30여 년 동안 투쟁과정에서 단련되고, 투쟁경력으로 검증을 받은 선진적 진보정치활동가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지도핵심은 각기 자기 정파집단을 이끌고 있고, 그런 정파집단들이 결합하여 하나의 단일전선체를 이루고 있다. 통합진보당이 바로 그런 당적 체계로 결합된 전선체다. 오늘 통합진보당에는 어느 정파집단에도 속하지 않은 당원들도 많지만, 그 당을 창당하고, 실질적으로 끌어오는 지도력은 당연히 정파집단에서 나온다. 이것이 진보적 대중정당의 현실이다.
정파를 무조건 파벌주의 산물이라고 보면서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진보적 대중정당의 현실을 모르는 무지의 노출이다. 정파집단이 무너지면, 진보정당도 함께 무너지게 된다.
그러므로 문제는 정파집단에 있는 게 아니라, 정파집단을 이끄는 지도핵심에게 있다. 지도핵심이 진보정치의 대의와 사회변혁의 원칙을 내던진 야심가로 변심하여 자기 정파를 무모한 당권장악음모에 내모는 경우, 당내분쟁을 일으키는 파벌주의 병폐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2012년 4.11 총선 직후에 터져 나온 통합진보당의 정파대립과 분당사태는 각 정파의 지도핵심들 가운데 누가 진정한 지도핵심이고 누가 비열한 야심가인지를 극명하게 드러내주었다. 정파대립을 불러일으키고 분당사태로 끌어간 비열한 야심가들이 활동가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추악한 몰골을 드러냈고, 온갖 모략과 비방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당을 사수한 활동가들은 진정성을 검증받았다. 평소에는 서로 뒤섞여서 누가 누군지 잘 몰랐지만, 호된 시련을 거치면서 쭉정이와 알곡은 추려졌고, 가짜와 진짜는 판별되었다.
내 서재에 남아있는 학습자료에 얽힌 사연
1990년 후반기 소련 붕괴로 발생한 강한 사상혼란의 ‘여진’이 아직 계속되고, ‘고난의 행군’에 들어선 북의 힘겨운 모습을 바라보며 조국통일에 대한 신심이 마구 흔들리고 있을 때, 당시 유일한 전선체로 존재하던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은 지도핵심이 와해되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다. 일부는 전선에서 이탈하여 정적에게 투항하였고, 일부는 시민운동으로 넘어가버렸다. 전선체의 지도핵심이 그처럼 와해된 비극은, 사회변혁과 조국통일에 대한 그들의 사상과 신념이 무너지면서 생겨난 걷잡을 수 없는 사태였다.
1990년대 말, 전선체의 지도핵심이 와해된 위급한 상황에서 전선체의 지도력을 복구하기 위해 전면에 나섰던 정파가 ‘인천연합’이다. 원래 ‘인천연합’이라는 정파집단은 1989년 인천민주청년회에서 투쟁을 시작하여 10년 동안 인천지역에서 진보운동세력을 키워온 어느 한 활동가를 지도핵심으로 하여 결집된 것이었다. 와해된 전선체 지도부가 ‘인천연합’의 주도로 복구되는 과정에서, 그 지도핵심은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정치위원장이라는 중책을 맡았다.
그런데 그런 중책을 맡은 지도핵심이 뇌출혈로 쓰러져 2003년 4월 13일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한창 일할 나이인 42살에 그가 너무도 뜻밖에 세상을 떠난 것은 무엇으로 메울 수 없는 손실이었다.
지도핵심을 잃은 ‘인천연합’은 자기 진로를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더니, 2012년 통합진보당 분당사태에 주동적으로 가담하였고 결국 탈당하고 말았다. 만일 그 지도핵심이 살아있었더라면, ‘인천연합’은 탈당소동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떠난 빈자리를 아무도 대신하지 못했던 불행한 사태는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의 길에서 지도핵심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과 임무를 수행하는지를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1994년 4월부터 나는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지도부와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고, 지도핵심이 와해되는 사태를 막아보려고 나름대로 애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1999년 초 ‘인천연합’의 주도로 시작된 전선체 복구사업에 나는 각지를 순회하는 강연연사로 동참하였다. 나는 그 과정에서 ‘인천연합 지도핵심’을 만나게 되었다.
2000년 여름 어느 날, 나는 서울에서 인천으로 가는 전철에 ‘인천연합 지도핵심’과 함께 타고 있었다. 달리는 전철 안에서 내 귀에 울려온 ‘인천연합 지도핵심’의 나지막한 음성을 나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전선체의 학습체계를 복구해야 하겠는데, 마땅한 학습자료가 없다”고 하면서 그는 나에게 학습자료를 구해달라고 부탁하였다. 뉴욕으로 돌아온 나는 그가 부탁한 학습자료를 구하여 그에게 전해주려고 2001년 9월 서울로 떠났는데, 인천공항 입국장에서 나를 기다리던 국정원 요원들에게 붙들려 강제로 추방당하였고, 2005년 6월까지 5년 동안 입국하지 못하였다. 그에게 전해주려던 학습자료는 주인을 찾지 못한 채 11년이 흐른 오늘도 내 서재에 아직 남아있다.
2012년 통합진보당에서 일어났던 정파대립과 분당사태를 돌아보면, 전선체를 이끌어 가는 정파집단이 자기의 지도핵심을 중심으로 학습에 열중하여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에 대한 과학적 전망과 불변의 신념을 간직하지 못하는 경우, ‘인천연합’처럼 자연도태의 길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어느 한 순간에도 학습과 사색을 손에서 놓지 않는 열정적인 실력가, 진보적 민주주의와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해 손발이 닳도록 현장에서 현장으로 뛰어다니는 완강한 실천가, 오랜 투쟁과정에서 사소한 동요도 모르고 오로지 진보와 변혁의 한길만을 꿋꿋이 걸어온 올곧은 활동가, 전선체의 이익에 자기 정파의 이익을 복종시키고 다른 정파들과 손잡고 전선을 강화시키는 폭넓은 포용자, 바로 그런 진짜배기 활동가가 전선의 지도핵심으로 나설 수 있으며, 그런 진짜배기 활동가 주위에 당원들이 모여들게 되는 것이다.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이 전진하고 승리하느냐 아니면 퇴보하고 패배하느냐 하는 전략적 승패는 지도핵심에게 달려있다. (2013년 1월 8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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