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7/31

김정은 시대의 개막을 알린 4.6 담화

<연재> 한호석의 진보담론 (220)
통일뉴스 2012년 07월 30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그들은 천박한 상상에 빠졌다

벨기에 브뤼셀에 본부를 둔 국제위기그룹(International Crisis Group)이 2012년 7월 25일 ‘북코리아의 계승과 불안정 위험(North Korean Succession and the Risks of Instability)’이라는 제목으로 작성한 장문의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국제위기그룹은 1990년대 후반 클린턴 정부 시기에 미국 국무부 부장관을 지낸 토머스 피커링(Thomas R. Pickering)이 이사장으로 있는 국제단체이니, 그 긴 보고서는 읽어보나 마나 허구와 궤변으로 꾸며진 것임을 직감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이른바 ‘문호개방’과 ‘체제개혁’으로 북측의 사회주의체제가 변질, 와해되기를 바라는 반사회주의이념에 시선을 고정시켜놓은 국제위기그룹 분석가들이 북측 현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따라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말이 되지 않는 소리를 보고서 형식을 빌어 발표하는 것 뿐이다.

그 엉터리 보고서는 “(북측에서) 변화를 일으킬 두 가지 가능한 요인이 정보유입(information inflow)과 시장화(marketisation)”라고 지적하면서, “북측에서 개혁(reform)과 변화(transformation)의 과정이 매우 긴 기간에 걸쳐 이어질 것”이라는 주장으로 결론을 맺었다. 다시 말해서, 앞으로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북측의 ‘문호개방’은 장기적인 정보유입으로 가능하고, 북측의 ‘체제개혁’은 점진적인 시장화로 가능하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다.

김정은 시대의 개막 이후 북측에서 정보유입과 시장화가 오랜 기간에 걸쳐 차츰 증대되면서 ‘체제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보는 천박한 상상은, 비단 국제위기그룹만이 아니라 자본주의나라들에서 활동하는 다종다양한 ‘북한체제 변화론자’들의 머리 속에 만연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북측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완전무지가 빚어낸 천박한 상상이다. 우선, 북측이 문호를 폐쇄하였다는 주장부터 말이 되지 않는다. 예컨대, <연합뉴스> 2012년 7월 29일 보도에 따르면, 2011년 한 해 동안 중국을 방문한 북측 인민들은 152,000명이며, 중국 국가관광국 자료에 따르면, 2010년 한 해 동안 북측을 방문한 중국인 관광객은 130,000명이다.

미국과 일본 같은 북측의 적대국들에서나 방북하지 못하는 것이고,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북측의 우호국들에서는 자유롭게 북측을 오갈 수 있으므로, 북측이 문호를 폐쇄하고 있다는 미국과 일본의 주장은 자기들의 대북 적대관계를 북측의 문호폐쇄라고 왜곡하면서 세상을 기만하는 것이다. 만일 미국과 일본이 대북 적대관계를 청산하면, 미국인들과 일본인들도 중국인들이나 러시아인들처럼 북측을 오갈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통계수치는 ‘북한체제 변화론자’들이 북측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는 점을 말해주는 객관적 사실들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통계수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북한체제 변화론자’들이 김정은 시대의 개막을 알린 4.6 담화가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북한체제 변화론자’들은 북측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은 많이 하면서도, 정작 북측 언론보도는 꼼꼼이 챙겨 읽지 않는 듯하다. 만일 ‘북한체제 변화론자’들이 4.6 담화를 제대로 읽었더라면, 북측에서 정보유입과 시장화가 증대되어 ‘체제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보는 천박한 상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4.6 담화란 무엇인가?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2012년 4월 6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과 한 담화 ‘위대한 김정일 동지를 우리 당의 영원한 총비서로 높이 모시고 주체혁명위업을 빛나게 완성해나가자’를 이 글에서는 4.6 담화라 한다. 4.6 담화는 북측에서 역사적인 정치회합으로 매우 중시한 2012년 4월 11일의 조선로동당 제4차 대표자회 직전에 있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역사적인 정치회합’을 닷새 앞두고 그 정치회합에서 결정할 최고영도자의 영도방침을 당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에게 제시하였는데, 그 내용을 문헌으로 작성한 것이 바로 4.6 담화다. 최고영도자의 사상과 영도에 따라 움직이는 북측 사회주의체제의 특성을 생각하면, 김정은 시대의 앞길을 전망하는 데서 4.6 담화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4.6 담화를 정독하면, 김정은 시대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전망할 수 있다.

김정은 시대의 영도방침, 4.6 담화에 제시되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4.6 담화를 통해 제시한 영도방침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내용은 아래와 같다.

첫째, 4.6 담화에서 김정은 제1위원장이 가장 중요하게, 그리고 명백하게 천명한 것은, ‘주체혁명위업’과 ‘선군혁명위업’을 계승하려는 자신의 뜻과 의지다. 4.6 담화에 따르면, 주체혁명위업과 선군혁명위업의 계승이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상과 로선을 일관하게 틀어쥐고 철저히 관철해나가”는 것이다.

김정은 제1위원장의 그런 뜻에 따라, 조선로동당은 4월 11일에 진행한 제4차 당대표자회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조선로동당의 ‘영원한 총비서’로 추대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는 4월 13일에 진행한 제12기 제5차 회의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원한 국방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

4.6 담화에 따르면, 당대표자회와 최고인민회의에서 내려진 그러한 추대결정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추모하는 상징적 의의를 갖는 게 아니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상과 노선을 충직하게 관철해나가기 위한 혁명위업계승이다.

북측의 사회주의체제에서 혁명위업계승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 ‘북한체제 변화론자’들은 혁명위업계승을 ‘권력세습’이라고 비난하지만, 원래 세습이란 군주제 봉건주의체제나 공화제 자본주의체제에서 가능한 계급독재(class dictatorship)의 한 형태다.

이를테면, 왕세자 같은 봉건군주의 혈연적 후계자에게 책봉을 통해 독재권력을 물려주는 군주제 세습은 봉건군주제가 입헌군주제로 전환된 이후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지만, 대선후보 같은 특정사회계급의 선출직 후계자에게 선거를 통해 독재권력을 물려주는 공화제 세습은 지금 세계적으로 만연되었다. 혈연적 후계자가 선출직 후계자로 바뀌었고, 책봉절차가 선거절차로 바뀌었을 뿐, 독재권력의 세습이라는 본질은 특정사회계급의 착취적 본질이 바뀌지 않은 것처럼 중세기로부터 수 백 년이 지난 오늘에도 바뀌지 않은 것이다.

군주제 봉건주의체제(제1체제)나 공화제 자본주의체제(제2체제)에서 독재권력의 세습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되는가 하는 문제, 그리고 북측에 성립된 수령제 사회주의체제(제3체제)에서 혁명위업계승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되는가 하는 문제를 논하는 것은 이 글의 주제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어서 다른 집필기회로 미룬다.

둘째, 4.6 담화에서 김정은 제1위원장은 “온 사회의 김일성-김정일주의화”를 조선로동당의 최고강령으로 선포하였다. 북측이 말하는 혁명위업계승에서 가장 중요한 과업은 선대 수령의 혁명사상을 계승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어떤 물질적 실체를 계승하는 것은 그 물질적 실체를 넘겨받는 실제행동으로 나타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사상은 어떻게 계승하는 것일까? 북측에서 선대 수령의 혁명사상을 계승하는 것은, 4.6 담화에 따르면, “온 사회를 김일성-김정일주의화하기 위한 투쟁을 더욱 힘차게 벌려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측 사회 전체를 김일성-김정일주의화하기 위한 투쟁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되는 것일까? 4.6 담화는 이 문제를 세 가지 정치과업으로 해명하고 있다. 4.6 담화에서 김정은 제1위원장이 제시한, 조선로동당의 최고강령을 실현하는 세 가지 정치과업이란, 당의 유일적 영도체계 강화, 일심단결 강화와 옹호보위, 선군혁명노선 견지로 요약될 수 있다. 북측에서는 이 세 가지 과업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혁명업적”이라고 본다.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이 서거한 이후 김정일 시대가 개막되었던 1990년대 후반기에, 북측 외부에서는 김정일 시대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지만, 당시 “나에게서 그 어떤 ‘변화’를 바라지 말라”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말 한 마디가 ‘북한체제 변화론자’들의 무모한 기대를 물거품으로 날려버렸다.

그런데 2011년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거한 이후 김정은 시대가 개막된 오늘, 이번에도 북측 외부에서는 김정은 시대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또 다시 품게 되었다. 그러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룩한 세 가지 혁명업적을 계승하여 조선로동당의 최고강령을 실현하려는 정치방침을 제시한 김정은 제1위원장의 4.6 담화는 ‘북한체제 변화론자’들의 무모한 기대를 또 다시 물거품으로 날려버렸다.

‘전환’이라는 말이 4.6 담화에 여러 차례 나온 까닭

4.6 담화에서 주목하는 것은, 김정은 제1위원장이 전환이라는 용어를 일곱 차례나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특히 ‘결정적 전환’이라는 말을 두 차례 사용하였고, ‘혁명적 전환’이라는 말을 두 차례 사용하였다. 또한 4.6 담화가 있었던 때로부터 아흐레 뒤인 2012년 4월 15일에 진행된 김일성 주석 탄생 100돐 경축 열병식에서 김정은 제1위원장이 한 연설에는 ‘근본적인 전환’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결정적 전환이라는 용어는 “사회주의강성국가건설에서 결정적 전환을 가져오기 위하여서는”이라는 문장에서 나오고, “인민생활향상과 경제강국건설에서 결정적 전환을 일으켜야” 한다는 문장에서 나온다. 또한 혁명적 전환이라는 용어는 “인민생활향상과 경제강국건설에서 혁명적 전환을 가져”온다는 문장에서 나오고, “문화건설의 모든 부문에서도 끊임없는 혁명적 전환을 일으켜 우리나라를 발전된 사회주의문명국으로 빛내여 나가야” 한다는 문장에서 나온다.

위의 인용문장을 읽어보면, 4.6 담화에 나와있는 것처럼 “경제와 인민생활문제를 원만히 해결하여 사회주의의 우월성과 위력을 더욱 높이 발양시키고 사회주의강성국가를 건설하여야 할 중대한 과업”을 수행하는 데서 ‘결정적 전환’과 ‘혁명적 전환’을 일으켜야 한다는 점을 김정은 제1위원장이 강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인민생활향상과 강성국가건설에서 결정적이고 혁명적인 전환을 일으켜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북측에서 말하는 인민생활향상은 강성국가를 건설하는 중대한 과업이다. 물론 북측의 강성국가건설이 인민생활향상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지만, 현 단계에서 인민생활향상이 강성국가건설의 핵심과제라는 점은 명백하다.

조선로동당은 2010년 1월 1일에 발표한 공동사설에서 인민생활향상을 가장 중요한 정치과업으로 제기하였다. 그 뒤를 이어 2011년과 2012년에 각각 발표된 공동사설에서도 인민생활향상이 중요한 정치과업으로 또 다시 제기되었다.

특히 2011년 공동사설은 “인민생활향상을 최대의 중대사로, 최고의 투쟁목표로 틀어쥐고 끝장을 볼 때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 우리 당의 투철한 립장”이라고 지적하였고, 공동사설 제목을 “올해에 다시 한번 경공업에 박차를 가하여 인민생활향상과 강성대국건설에서 결정적 전환을 일으키자”로 정한 바 있다. 또한 2012년 공동사설에 따르면, 북측에서 농업과 경공업은 “강성국가건설의 주공전선”이다. 이처럼 북측에서 농업과 경공업의 발전을 매우 강조하는 까닭은 아래와 같이 설명된다.

소비재(북측에서는 식량과 인민소비품)와 서비스(북측에서는 인민봉사)를 인민들에게 공급하는 북측의 사회주의공급체계는 무상공급과 유상공급으로 구분되는데, 보육 및 교육, 의료, 정양 및 휴양 같은 서비스, 그리고 주택 같은 소비재는 무상으로 공급하고, 식량과 경공업제품 같은 소비재는 유상으로 공급한다.

그런데 북측에서는 아직 농업생산력과 경공업생산력이 고도로 발달하지 못했으므로, 그 두 부문에서 인민들의 수요를 원만히 충족시키지 못한다. 그에 따라 농업부문과 경공업부문에서 소비재의 사적 유통을 부분적으로 허용하게 되는데, 그렇게 허용된 소비재 유통공간을 농민시장(속칭 장마당)이라 한다.

세상이 아는 것처럼, 지난 ‘고난의 행군’ 시기에 북측에서 소비재 생산이 극도로 위축되어 국영상점이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그렇게 되자 소비재를 사적으로 유통하는 농민시장이 자연히 확대되고, 소비재의 비공식 유통(속칭 보따리장사 또는 암시장)도 부분적으로 생겨났다.

그러나 소비재의 사적 유통의 확대, 그리고 소비재의 비공식 유통의 출현은 북측이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시기에 생겨난 일시적인 현상이었으므로, 북측이 농업생산력과 경공업생산력을 차츰 회복하는 추세에 따라 마땅히 사라져야 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북측이 추진한 경제정책은, 농업생산력과 경공업생산력을 끌어올려 국영상점의 유통능력을 전반적으로 확대함으로써 보따리장사를 자연도태시키고 농민시장을 ‘고난의 행군’ 이전의 원상태로 축소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북측이 세운 장기적인 추진계획은 두 단계로 시행되었다.

제1단계로 시행된 것이 2002년 7월 1일에 취해진 사회주의경제관리개선조치(약칭 7.1 조치)다. 국영상점 판매가격(국정가격)을 올려줌으로써 국영상점 판매가격과 농민시장 판매가격의 격차를 해소하였다. 보따리장사를 강제로 금지하지 않고, 2003년 3월 말부터 평양을 비롯한 여러 도시들에 종합시장을 개설함으로써 종합시장이 소비재의 비공식 유통을 흡수하도록 유도하였다. 먹고 살려고 아우성치는 노점상을 공권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철거하는 자본주의사회와 너무 다르다.

국영상점 판매가격이 올라가면 노동자의 생활비도 당연히 올려주어야 하므로, 생활비 인상이 7.1 조치에 포함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고용되는 계급적 착취관계가 완전철폐된 북측에서는 노동-자본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임금지불제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북측 노동자는 자기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판매하여 착취당한 임금을 자본가로부터 받는 게 아니라, 자기들이 일하는 생산단위에서 생산된 가치를 근로실적평가원칙에 따라 공평하게 분배한다.

그렇게 분배한 가치를 현금으로 계상하면 그것이 곧 생활비인데, 생활비 액수는 ‘사회적으로’ 책정된다. 생활비의 사회적 책정에는 각 생산단위의 개별사정이 아니라 국가계획경제의 전반사정이 직접적으로 반영되어야 하므로, 당연히 국가계획경제를 지도하는 중앙기관이 노동자 생활비의 사회적 책정을 담당하게 된다.

한 마디로 말해서, 2002년에 시행된 7.1 조치는 ‘고난의 행군’을 극복한 직후 사회주의공급체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제1단계조치였다. 그러나 당시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한 ‘북한체제 변화론자’들은 북측이 7.1 조치를 취함으로써 마침내 개혁과 개방의 길로 들어섰다느니, 시장경제요소를 받아들여 시장이 활성화되었다느니 하며 허튼 소리를 늘어놓았다.

2002년 7.1 조치 이후 10년, 이제는 2012년 9.1 조치로 진전한다

오늘 북측의 경제현실이 말해주는 것처럼, 7.1 조치 이후 10년 동안 북측은 농업부문과 경공업부문에 대한 국가적 투자를 확대하고, 그 두 부문의 생산현장에서 사회주의경쟁운동과 대중적 기술혁신운동을 추진하여 농업생산력과 경공업생산력을 부단히 증대시켜왔다.

북측은 이처럼 10년 동안 부단히 노력하여 농업생산력과 경공업생산력을 증대시킨 뒤에, 제1단계(정상회복단계)에 있는 사회주의공급체계를 제2단계(심화발전단계)로 끌어올릴 수 있게 되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2012년 6월 28일 당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과 한 담화 ‘우리식의 새로운 경제관리체계를 확립할 데 대하여’에서 바로 그러한 제2단계 경제관리개선조치를 제시하였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제시한 제2단계 경제관리개선조치는 아직 공개되지 않아서,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렇지만, 2002년의 제1단계 경제관리개선조치 이후 발전된 경제현실을 반영한 제2단계 경제관리개선조치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제2단계 경제관리개선조치는, 농업부문과 경공업부문의 생산력이 일정수준으로 정상화된 오늘의 현실에서 국영상점의 공급능력을 더욱 확대하여 소비재의 비공식 유통(보따리장사)을 전면금지하는 한 편, 농촌의 농민시장과 도시의 종합시장을 원상대로 축소하는 조치인 것으로 보인다. 이에 관해서 아래의 정보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교도통신> 2012년 7월 25일 보도에 따르면, 제2단계 경제관리개선조치는 2012년 9월 1일부터 시행될 것이라고 하는데, “잉여생산물의 암시장 판매를 금지하여 국영상점 등의 정규유통경로를 이용하도록 규제하는” 조치라고 한다. 이 보도기사에 나온 ‘잉여생산물의 암시장 판매’라는 것은 보따라장사가 소비재를 비공식으로 유통하는 상행위를 뜻하는데, 소비재의 비공식 유통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것이 9월 1일부터 시행될 제2단계 경제관리개선조치에 포함된 일부 내용인 것이다.

<연합뉴스> 2010년 10월 28일 보도에 따르면,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측 국경도시 남양과 마주보는 중국 국경도시 투먼에 개장한, 1인당 8,000위안 이하의 보따리장사 판매상품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 호시무역시장에 국경을 넘나드는 북측 보따리장수들이 몰려들 것이라는 중국 측의 예상을 깨고 그들의 모습조차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북측에서 이미 2010년 10월에 소비재의 비공식 유통이 축소되었음을 말해준다.

다른 한편, 북측에서 소비재의 사적 유통이 축소되었음을 말해주는 정보는, <자유아시아방송> 2012년 7월 23일 보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보도기사에 따르면, “북한 당국이 주요 도시 곳곳에 국영상점을 대폭 늘렸고 이들 국영상점들이 장마당과의 가격경쟁에 뛰어들면서 손님들이 국영상점에 몰리기 시작했다”고 하면서, “장마당 상인들은 국영상점과의 가격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고 매대와 함께 장사를 포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보도기사는 북측 농촌에서 농민시장이 축소되는 현상만 지적하였지만, 도시의 종합시장도 농촌의 농민시장과 마찬가지로 축소되고 있다.

사회주의경제의 발전원리를 보면, 사회주의가 고도로 발달할수록 소비재의 사적 유통이 사라지고, 국영상점이 높은 수준으로 활성화되고, 사회적 무상공급부문이 확대된다. 다시 말해서, 보조기능을 수행해온 시장마저 차츰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북측에서 말하는 인민생활향상이란 고도로 발달한 사회주의경제의 유통 및 소비부문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현상이다.

지난 해부터 평양에 각종 대형국영상점(남측에서는 대형매장)이 속속 들어서고, 지방에서는 자기 지방의 원료를 가지고 경공업제품을 생산하는 지방산업공장들이 속속 개건확장되는 것은, 북측이 인민생활향상이라는 목표를 달성해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북측에서 추구하는 인민생활향상이란 단순히 농업생산력과 경공업생산력을 끌어올려 사회주의상품유통을 확대한다는 뜻만이 아니라, 증가한 농업생산력과 경공업생산력에 맞춰 경제관리도 사회주의계획경제의 요구에 따라 더욱 계획화, 합리화한다는 뜻이다.

오는 9월 1일부터 북측에서 제2단계 경제관리개선조치가 시행되면, 북측은 사회주의계획경제를 건국 이래 가장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커다란 성과를 가져올 것이다. 북측이 추구해온 사회주의강성국가건설이 올해 2012년에 ‘결정적 전환’을 맞게 된다는 4.6 담화의 내용은, 김정은 시대의 개막과 함께 나타나는 현실발전추세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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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헬기들은 왜 거기에 나타났을까?

[한호석의 개벽예감] (24)
자주민보 2012년 07년 29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서해 5도 분쟁수역에 조성된 국지전 위기
2012년 7월 24일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 한 편이 눈길을 끌었다. 남측 정부 소식통이 전한 말을 인용한 보도기사에 따르면, 황해남도에 있는 태탄공군기지와 누천공군기지에 2012년 5월부터 공격헬기와 수송헬기 20여 대가 전진배치되었다고 하면서, 전진배치의 목적이 서해 분쟁수역에 있는 5개 섬을 점령하는 기습상륙전을 준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연합뉴스>는 같은 내용을 보도한 기사에서 인민군 공격헬기 및 수송헬기가 20여 대가 아니라 50여 대나 전진배치되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지명표기문제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서해 5도 분쟁수역 일대를 가리켜 북측은 서남전선지구라 부르고, 남측은 서북도서지역이라 부른다. 이 글에서는 북측이 언급한 내용을 다룰 때는 서남전선지구라는 지명을 쓰고, 남측이 언급한 내용을 다룰 때는 서북도서지역이라는 지명을 쓴다.

인민군 공격헬기와 수송헬기가 황해남도 공군기지 두 곳에 전진배치된 것이 서해 분쟁수역에 있는 5개 섬을 점령하는 기습상륙전을 준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는 남측 언론의 ‘분석’이 나온 까닭은, 남측 언론매체들이 인민군의 상륙전연습에 관해 이미 몇 차례 보도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인민군의 상륙전연습에 관한 남측 언론보도는 2011년에 두 차례, 2012년에 한 차례 나왔다.

그에 관한 보도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서남전선지구에 주둔하는 인민군 제4군단 특수전 병력의 기습상륙훈련이 2011년 4월 초에 실시되었고, 넉 달 뒤인 8월 말에는 서해 남포 앞바다에 있는 무인도를 점령하는 인민군 육해공군 합동훈련이 실시되었고, 2012년 3월 14일에는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지도하는 육해공군합동타격훈련이 서해 남포 앞바다에서 실시되었다.

인민군의 서남전선지구 군사동향에 관한 남측 언론보도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남측 언론보도에 따르면, 인민군은 황해남도 장산반도 고암포에 공기부양정 60-70척을 수용할 수 있는 공기부양정 발진기지를 2012년 초에 완공하였고, 인민군 특수전 병력 가운데 최정예 병력으로 알려진 해상저격여단 병력 3,000명을 황해남도 과일군 비파곶 해군기지에 배치하였다.

중요한 것은, 서남전선지구에 대한 북측 최고영도자들의 시찰이다. 2011년 11월 1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정은 제1위원장과 함께 서남전선지구를 시찰하였고, 김정은 제1위원장은 2012년 2월 24일에 또 다시 서남전선지구에 있는 인민군 제4군단사령부와 예하 부대들을 시찰하였다.

위에 열거한 서남전선지구 군사동향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남측 언론이 ‘분석’한 것처럼, 서해 분쟁수역에 있는 5개 섬을 기습점령하려는 움직임일까? 이 문제와 관련하여 아래의 정보를 좀 더 읽어보고 판단을 내릴 필요가 있다.

첫째, 2010년 12월 29일 남측 국방부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서북도서방위사령부를 창설하겠다고 보고한 바 있는데, 서북도서방위사령부는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2011년 6월 15일에 창설되었다. 또한 정승조 합참의장은 2012년 2월 9일에 서북도서방위사령부와 예하 부대를 시찰하면서 “적이 도발하면 우리가 계획하고 준비한 대로 현장에서 신속, 정확, 충분하게 응징해야 한다. 도발한 대가가 얼마나 처절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끼도록 대응하라”고 전투지시를 내렸다.

둘째, 2011년 3월 2일 남측 국방부는 서북도서에 군사력을 증강배치하는 계획을 밝혔고, 그에 따라 백령도와 연평도의 군사력이 급속히 증강되었다. 이를테면, 전차, 다련장로켓포 ‘구룡’, 대포병레이더 ‘아서’, 음향표적탐지기 ‘할로’, 코브라 공격헬기, 링스 대잠헬기, 무인정찰기를 새로 또는 증강하여 배치하였고, K-9 자주포진지와 참호 및 교통호를 비롯한 120여 개 군사시설을 강화콘크리트로 요새화하고, 해병대 병력 1,000명을 증원배치하였으며, 백령도에는 공격헬기 격납고를 완공하였다.

셋째, 2011년 3월 2일 남측 국방부는 서북도서지역에서 육해공군 합동훈련을 매년 1-2회 실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에 따라, 서북도서방위사령부는 2011년 10월 27일부터 28일까지 백령도에서 대규모 육해공군 합동훈련을 실시하였고, 백령도에 전진배치한 코브라 공격헬기를 동원한 실탄사격훈련을 2012년 1월과 2월 20일에 연속적으로 실시하였다.

위에 열거한 한국군의 서북도서 군사력 증강조치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한국군이 그 지역에서 군사력을 증강하고 공격적인 군사훈련을 실시하자, 그에 대응하여 인민군도 그 지역에서 군사력을 증강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국군이 서북도서지역에서 군사력을 증강한 때는 2011년 3월 초였고, 인민군이 서남전선지구에서 상륙훈련을 실시한 때는 2011년 4월 초였으니, 1개월 시차를 두고 쌍방의 무력충돌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서북도서방위사령부의 군사력 증강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백령도에 전진배치한 미국산 코브라 공격헬기다. 코브라 공격헬기를 백령도에 배치한 것은 남측 정치권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2011년 10월 4일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국회의원들이 배포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코브라 공격헬기는 육상항공작전에 적합하게 설계된 지상군 군사장비이기 때문에 백령도 상공에서 전개하는 해상항공작전에서는 성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지적에 대해서는 남측 국방부도 인정하였다.

그렇다면 한국군은 해상항공작전에 쓰지 못하는 코브라 공격헬기를 왜 백령도에 전진배치한 것일까? 한국군은 코브라 공격헬기를 인민군의 백령도 기습상륙을 저지할 방어무기로 전진배치한 것이 아니라, 북측 서남전선지구 해안과 내륙을 기습침공할 공격무기로 전진배치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연합뉴스> 2011년 11월 11일 보도기사는 “서북도서 작전개념이 북한의 기습상륙 저지라는 방어적 개념에서, 유사시 북한 해안기지와 내륙지역 일부에 대한 선제타격이 가능한 공격거점개념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다시 말해서, 서북도서방위사령부의 창설과 군사력 증강은, 인민군의 기습상륙에 대비한다는 구실을 내걸고 북측의 서남전선지구를 선제공격하는 국지전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다.

이처럼 한국군이 서북도서지역에 군사력을 증강배치하고 대북선제공격을 상정한 국지전 실전연습까지 강행하였으니, 인민군이 그에 대응하여 서남전선지구에 군사력을 증강배치하고 대응훈련을 실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1980년대 중반 북측이 생산한 공격헬기

<조선일보> 2012년 7월 24일 보도에 따르면, 인민군이 서남전선지구에 전진배치한 헬기 기종은, 소련산 공격헬기 Mi-2의 개량형인 혁신-2, Mi-4, Mi-8 등인데, “대전차미사일 등을 갖춘 본격적인 공격용 헬기인 Mi-24는 전진배치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이 보도기사는 이제껏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중요한 군사정보를 말해준다.

첫째, 인민군이 소련산 공격헬기 Mi-2를 개량한 ‘혁신-2’라는 자국산 공격헬기를 운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연합뉴스> 2012년 7월 23일 보도에 따르면, 인민군은 공격헬기 혁신-2를 1980년대 중반에 생산하였다는 것이다. 북측이 25여 년 전에 생산한 혁신-2는 23mm 기관포 1문, 사거리 4km의 57mm 로켓포 16련장 발사기 2대를 탑재한 공격헬기다.

1980년대 중반에 공격헬기를 자체로 만든 나라는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극소수였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오늘에도 공격헬기를 자체로 만드는 나라는 불과 10개국 미만이다. 군용헬기부문에서 남북의 기술격차는 매우 크다. 1985년 남측의 국방과학연구소가 KM-181 박격포를 만들기 시작하였을 때, 북측은 공격헬기 혁신-2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남측이 개발한 기동헬기 ‘수리온’ 시제품이 첫 시험비행을 한 때는 25년이 지난 2010년 3월 10일이다. 지금 남측은 기동헬기를 자체로 만들지만, 공격헬기는 만들지 못한다. 공격헬기를 자체로 만드는 것은 국방공업기술이 고도로 발달되었음을 뜻한다.

둘째, 군사전문 누리집 <글로벌 시큐리티(Global Security)>에 게시된 자료에 따르면, 북측은 1980년대에 군용헬기를 40여 대에서 300여 대로 늘렸다고 한다. 인민군 군용헬기 보유수량이 1980년대에 그처럼 260여 대나 급증한 까닭은, 인민군이 1980년대 중반에 자국산 공격헬기 혁신-2를 생산하였기 때문이다. 같은 자료에 따르면, 인민군이 보유한 Mi-2는 1990년에 100대였는데 1995년에 140대로 늘었고 2015년까지 139대를 유지할 것이라고 한다.

그 자료에서는 북측이 만든 자국산 공격헬기 혁신-2와 북측이 수입한 소련산 공격헬기 Mi-2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Mi-2라고 표기하였지만, 인민군은 혁신-2를 25년 전부터 생산하기 시작하였으므로 그 동안 낡은 소련산 공격헬기 Mi-2는 개량형 혁신-2로 전부 교체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2012년 현재 인민군이 운용하는 공격헬기 139대는 모두 혁신-2인 것이다.

셋째, 위에 나온 <조선일보> 2012년 7월 24일 보도기사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더 들어있는데, 그것은 인민군이 소련산 공격헬기 Mi-24도 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민군이 공격헬기 Mi-24를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이 남측 언론보도에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소련산 공격헬기 Mi-24는 12.7mm 4렬 속사기관포 1문, 15mm 2렬 기관포 1문, 사거리 4km의 57mm 로켓포 16련장 발사기 2대, 사거리 5km의 전파유도식 대전차 미사일 4기를 탑재하고, 최고 시속 335km로 비행한다. 항속거리는 450km이며, 최고 비행고도는 4.5km이고, 특수전 무장병력 8명이 탑승한다.

그런데 <글로벌 시큐리티>에 게시된 자료에 따르면, 인민군이 보유한 소련산 공격헬기 Mi-24는 1995년에 80대였는데, 2000년에 24대로 급감한 이후 2015년까지 24대를 유지할 것이라고 한다. 공격헬기 Mi-24를 1995년에 80대나 보유하였던 인민군이 왜 56대나 줄였는지에 대해서는 <글로벌 시큐리티> 게시물에 밝혀져 있지 않지만, 군사작전적 가치가 큰 공격헬기를 갑자기 56대나 줄였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다.

또한 <글로벌 시큐리티>에 게시된 같은 자료에는 기종을 밝히지 않고 그냥 ‘공격헬기’라고만 표기한 인민군 공격헬기가 1995년에 140대 있었고 2000년에 84대로 급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의 대북전쟁위험이 고조되었던 긴장된 시기에 인민군이 공격헬기를 무려 140대나 폐기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인민군 공격헬기 140대가 폐기되었다는 <글로벌 시큐리티> 기록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인민군이 공격헬기를 대량으로 폐기한 것이 아니라면, 진실은 무엇일까? 위의 자료를 다시 살펴보면, 1995년에 인민군이 소련산 공격헬기 Mi-24를 80대가 아니라 24대 보유하였고, 북측 외부에 기종이 알려지지 않은 익명의 공격헬기 140대를 보유한 것으로 읽어야 뜻이 통한다. 다시 말해서, 소련에서 수입한 공격헬기 Mi-24는 24대이고, 익명의 공격헬기는 140대인 것이다. 익명의 공격헬기를 140대라고 보는 근거는, <글로벌 시큐리티> 자료에서 1995년에 급감한 것처럼 기록된 공격헬기 56대와 2000년에 급감한 것처럼 기록된 공격헬기 84대를 합한 수량이 140대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북측 외부에 기종이 알려지지 않은 익명의 공격헬기가 북측에서 자체로 생산한 2세대 공격헬기 혁신-3이라는 사실이다. <글로벌 시큐리티>는 인민군이 보유한 익명의 공격헬기 56대가 1995년에 급감한 것처럼 기록하였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며, 북측이 1990년대 중반에 소련산 공격헬기 Mi-24와 같은 급의 신형 공격헬기 혁신-3을 자체로 생산하였다는 뜻으로 고쳐 읽어야 한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군사전문 누리집 <밀리터리 팩토리(Military Factory)>에 게시된 자료에 북측이 소련산 최신형 공격헬기 Mi-28을 수입하였다고 기록된 것이다. 대당 가격이 1,470만 달러나 하는 세계 최강의 공격헬기 Mi-28은 Mi-24의 전투병력 탑승인원 8명을 3명으로 줄이는 대신, 지상공격력을 크게 강화한 것이다. 이를테면, 30mm 속사기관포 1문, 사거리 3km의 20련장 로켓포 발사기 2대, 80cm의 장갑을 관통하는 사거리 6km의 전파유도식 대전차미사일 8기가 Mi-28에 탑재되었다.

최신형 공격헬기 Mi-28은 미국산 공격헬기 AH-64 아파치에 필적하는 세계 최강의 공격헬기이며, 러시아군이 2006년부터 실전배치하기 시작하여 2011년 2월 현재 24대밖에 없다. 북측이 Mi-28을 몇 대나 수입하였는지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으나, 인민군이 세계 최강의 공격헬기를 운용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위에 열거한 정보를 종합하면, 인민군은 1세대 공격헬기 혁신-2 139대, 2세대 공격헬기 혁신-3 140대, 소련산 공격헬기들인 Mi-24 24대와 Mi-28을 포함하여 310대가 넘는 공격헬기를 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에 비해, 한국군이 운용하는 미국산 코브라 공격헬기는 70대다.

공격헬기 이외에도, 인민군은 특수전 병력을 실어나르는 소련산 수송헬기 Mi-8/Mi-17 70대, 중국산 수송헬기 Z-5 40대를 비롯하여 수송헬기 110대를 운용하고 있다. 그에 비해, 한국군은 미국산 수송헬기(CH-47 Chinook) 30대, 미국산 수송헬기(UH-60) 141대를 비롯하여 수송헬기 171대를 운용하고 있다.

또한 인민군은 미국산 소형기동헬기 MD-200 80대를 제3국에서 수입하여 운용하고 있고, 한국군은 같은 기종의 미국산 소형기동헬기를 257대 운용하고 있다.

또한 군사전문 누리집 <콤뱃에어크래프트(combataircraft)>에 게시된 자료에 따르면, 인민군은 소련산 대잠헬기 Mi-14를 10대 운용하고 있다. 그에 비해, 한국군은 미국산 링스 대잠헬기를 25대 운용하고 있다.

위에 열거한 정보를 살펴보면, 인민군은 공격헬기 작전에 주력하고, 한국군은 수송헬기 및 소형기동헬기 작전에 주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목하는 것은, 인민군 공격헬기를 육군이 아니라 공군이 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민군 공군이 운용하는 전투기들이 미국군 정찰위성의 감시망을 벗어나 각지의 지하기지에 주기되어 있는 것처럼, 인민군 공격헬기들도 각지의 지하기지에 들어가 있다. 전투기 지하기지를 건설하려면 지하활주로까지 뚫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공격헬기 지하기지는 활주로가 없어도 되므로 건설하기가 훨씬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군과 한국군은 인민군 공격헬기가 주기된 지하기지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최근 남측 언론매체들이 황해남도에 있는 태탄공군기지와 누천공군기지에 2012년 5월부터 공격헬기와 수송헬기 수 십 대가 전진배치되었다고 보도한 것은, 실제동향은 알지 못한 채 미국 정찰위성이 포착한 극히 부분적인 동향을 말해주는 허술한 정보를 기사화한 것이다.


인민군 공군전술훈련이 급증한 까닭

전투기와 마찬가지로 공격헬기도 운영비가 많이 들어가는 고비용 무기체계다. 다른 운영비는 그만 두고라도, 공격헬기 1대가 한 차례 비행할 때마다 약 2,500달러의 비용이 들어간다. 사회주의군대의 특성상, 인민군 무기운용비가 미국군 무기운용비보다 훨씬 적게 들어간다 해도, 인민군이 310대가 넘는 공격헬기를 운용하는데는 엄청난 비용이 들어갈 것이다. 특히 공격헬기가 소모하는 항공유의 비용이 상당히 많다.

북측이 ‘고난의 행군’을 하던 1990년 중반에는 항공유가 부족해서 전투기와 공격헬기의 비행훈련이 줄어들었다. 북측의 사회주의체제를 무너뜨리려는 미국을 비롯한 외부세력들은 항공유 부족으로 비행훈련을 하지 못하는 인민군 공군이 전투력을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약화되었다고 하면서 그들을 얕보았다.

그러나 전투력이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약화되었다는 것은 고의적인 과장이었다. 당시 인민군 전투비행사들은 컴퓨터화된 모의비행훈련을 더욱 강화하면서 최소 수준의 비행훈련을 계속하고 있었으며, 인민군 지휘부는 모든 것이 어려운 조건에서도 공군력 강화에 지속적으로 힘을 기울였다.

예컨대, 남측 정부 고위당국자가 전한 말을 인용한 <조선일보> 1997년 10월 30일 보도에 따르면, 당시 인민군은 ‘고난의 행군’으로 시련을 겪고 있었는데도, “공군 3대 전단을 6개 사단으로 증편하고, 전술기를 전방배치했으며 공군협동전술훈련도 총 18회로 두 배 이상 늘리는 등 공군력을 강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민군이 그처럼 어려웠던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공군력을 강화하였으니, 오늘에는 공군력 강화에 얼마나 더 많은 힘을 기울이고 있을까? <조선일보> 2012년 3월 29일 보도에 따르면, 2012년 2월 24일 김정은 제1위원장이 서남전선지구에 주둔하는 제4군단 사령부와 예하 부대들을 시찰한 직후부터 인민군 전투기 비행훈련이 급증하였다고 한다.

이를테면, 지난 ‘고난의 행군’ 시기에는 하루에 100회 미만밖에 출격하지 못하던 인민군 전투기들이 요즈음은 하루에 650여 회나 출격하여 “한미 군관계자들을 놀라게 하였”고, 지난 시기 인민군 전투기들은 주말이나 휴일에는 비행훈련을 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주말과 휴일에도 비행훈련을 하고, 한국군이 백령도 북쪽 64km 상공에 임의로 그어놓은 ‘전술조치선(TAL)’까지 여러 차례 남하비행을 하는 바람에 한국군 전투기들이 대응출격을 자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보도기사는 인민군이 지난 시기에 비해 항공유를 두 배나 더 많이 소모하는 것으로 추산하였다.

인민군 공군의 비행훈련이 이처럼 급증한 것은, 인민군 유류공급이 결정적으로 증가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인민군 유류공급이 그처럼 크게 증가한 까닭은, 북측 서해 대륙붕 유전에서 석유가 증산되기 때문인데, 서해 대륙붕 유전의 석유생산에 대해서는 이전에 발표한 나의 글에서 논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재론하지 않는다. 인민군 전투기 비행훈련이 그처럼 급증하였으니, 인민군 공격헬기 비행훈련도 그만큼 급증한 것이 분명하다.

이 글을 시작할 때 언급한 2012년 7월 24일 <조선일보> 보도기사가 지적한, 태탄공군기지와 누천공군기지에 2012년 5월부터 공격헬기와 수송헬기 수 십 대가 전진배치된 것은, 인민군이 백령도를 점령하는 기습상륙전을 위한 준비행동이 아니라, 북측 유전의 석유증산에 비례하여 인민군 공격헬기 비행훈련이 증가한 현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군은 백령도와 연평도에 군사력을 증강배치하고 대북선제공격을 준비하였고, 인민군은 그에 대응한 군사훈련을 실시하면서 전투준비태세를 강화한 것으로 하여 국지전 위기가 더욱 고조되었는 데도, 남측 언론매체들은 인민군 공격헬기와 수송헬기가 황해남도 공군기지 두 곳에 배치된 것을 두고 인민군이 서해 분쟁수역 5개 섬을 기습점령하는 상륙작전을 곧 감행할지 모른다는 식의 ‘억측’을 꺼내놓았다.

한국군이 서북도서지역에서 대북선제공격을 준비한 것은 거대한 화약고에 발화통을 올려놓는 것과 같은 실로 위험천만한 행동이며,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지향한 전민족적인 의사와 염원에 배치되는 호전적 행동이다. 서해 5도 분쟁수역에서 국지전 위기가 조성되었지만, 정전협정 체결 59주년을 맞은 오늘, 평화협정 체결에 대한 전민족적 요구는 더욱 강렬해지고 있다.(2012년 7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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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29

당의 침로는 기층에 있다

변혁과 진보 (86)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악전고투에서 상황반전으로

예상치 못한 '함정'에 빠져 어려움을 겪고 있는 통합진보당은, 정치적 견해가 서로 다른 정파들이 함께 걸어가는 진보적 대중정당의 길이 생각보다 힘들고 어렵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알게 되었다. 이번에 통합진보당이 체험한 것처럼, 정치적 견해가 서로 다른 정파들이 함께 걸어가는 진보적 대중정당의 길은,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추락위험이 불시에 엄습하는 험로이고, 어디서 날아오는지 알기 힘든 돌팔매가 불시에 날아들어 기껏 쌓아올린 공든 탑을 무너뜨리는 붕괴위험이 도사린 험로이기도 하다.

이전에 민주노동당에서는 상상하지도 못한, 충격적이고 고통스러운 여러 경험들을 한꺼번에 겪었다는 점에서, 이번 사태는 통합진보당에게, 특히 통합진보당 자주파에게 심각한 교훈을 안겨주었다.

당 안에서는 국민파가 자주파를 당지도부에서 밀어내고 당권을 장악하기 위해 자주파의 다수 계열에게 제거공세를 집중하였고, 당 밖에서는 민주통합당과 시민운동세력, 그 주변인사들이 국민파의 자주파 제거공세에 적극 가세하였고, 그런 기회를 기다렸다는 듯이 새누리당, 사법기관, 언론계는 '종북청산소동'을 전방위적으로 확대하면서 통합진보당 전체를 무너뜨리려는 와해공세에 광란하였다. 여론몰이를 추동하는 강력한 무기를 틀어쥔 저들의 제거공세와 와해공세는 실로 집요하고 압도적이었다.

사회여론을 움직일 만한 역량도 수단도 갖지 못한 자주파는 저들의 강력한 무기 앞에 맨주먹으로 맞서 힘겹게 싸워야 하였다. 그것은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고 퇴로마저 끊긴 고립상태에서 벌인 악전고투였다. 지난 시기 수구우파세력의 우세한 공격에 맞서 끈질기게 투쟁해온 실전경험에서 습득한 불굴의 투지와 집념이 만일 자주파에게 없었더라면, 역량상 대비가 되지 않을 만큼 불리한 이번 싸움에서 자주파가 완패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이 말해주는 것처럼, 수구우파세력들이 광란하는 '종북청산소동'의 위압감에 눌린 국민파는 '애국가'를 부르는 자기들의 공손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정적들의 공격예봉을 피해 일보후퇴하였고, 그 동안 계속 수세에 몰려 악전고투하던 자주파는 7월 25일에 열린 통합진보당 제2기 중앙위원회를 계기로 우려와 불안의 그물을 걷어내고 상황을 뒤집었다.

당지도부를 장악한 국민파는 당권을 쥐고 있는데도 제2기 중앙위원회를 정상적으로 진행시키지 못할 만큼 위축되었고, 이튿날 열린 의원총회에서 치명상을 입고 말았다. 이로써 상황은 자주파에게 유리하게 반전되었다.

상황이 자주파에게 유리하게 반전되자, 국민파가 당권을 장악한 이후 일방적으로 밀어붙여온 이른바 '중단 없는 혁신'은 자주파의 제동으로 중단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반전에 반발하는 국민파는 집단탈당설, 계속추락설, 내부동요설을 여론화하면서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러나 국민파가 밀어붙여오던 '중단 없는 혁신'은 당의 혁신이 아니라 당의 진보성을 거세하고 진보당을 국민당 아류로 만들어가는 우경화이므로, 자주파가 국민파의 우경화 추진에 제동을 걸게 된 것은 진보와 변혁을 위해 다행하고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통합진보당 안에는 자주파의 정적이 없다

통합진보당에 결집한 자주파에게는 진보와 변혁의 미래가 무엇보다 소중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서도 바꿀 수 없는 진보와 변혁의 미래, 그것을 위해 이제껏 피땀 흐르는 투쟁의 험한 길을 헤쳐온 게 아닌가! 그런 자주파가 이번 사태에서 겪은 체험을 농축하여 진보와 변혁의 미래를 위한 정치적 교훈을 추출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오늘의 교훈은 내일을 위한 가르침이다.

통합진보당 안에서 양대 세력권을 형성한 자주파와 국민파는 이번 사태에서 격렬하게 충돌하였지만, 결코 적대적으로 대립해서도 안 되고 적대적으로 대립할 수도 없다. 이번 사태를 감정이 아니라 이성으로 판단해야 한다. 이번 사태에 대한 이성적 판단은, 자기의 정치적 생명을 끊어버리려는 갈등상대와 겨루되, 그 상대를 정적으로 배격하지 말아야 하며, 거꾸로 진보적 대중정당의 길을 끝까지 함께 갈 동반자로 삼아야 한다는 점을 밝혀준다.

이것은 단지 인내심을 가지고 갈등상대를 포용하는 도덕적 태도만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내분과 외압으로 자칫 깨지기 쉬운 진보연합전선을 끝까지 책임지고 이끌어가는 사회변혁운동의 전략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 말이다.

역사는 말한다.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일제침략세력과 싸워야 했던 항일투쟁시기에, 희생과 고통을 감수하고서도 민족주의자들과의 항일연합전선을 끝까지 책임지고 이끌어간 사회주의계열 항일선열들은 대일항전을 치르며 승리의 8.15를 맞았던 반면, 사회주의자들과의 항일연합전선을 구축하지 못하고 분열과 분산을 거듭하였던 민족주의계열 항일선열들은 고립과 무력감에 사로잡혀 우울한 8.15를 맞았다. 항일연합전선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 민족주의계열 항일선열의 실패와 좌절이 오늘 이 땅의 진보연합전선에서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국민파 상층인사들이 자주파에게 부실선거 책임을 뒤집어씌워 출당시키는 것이 '국민의 뜻'이라는 궤변을 들고 나와 당활동가 두 사람의 정치생명을 끊어놓고 다른 두 당활동가의 정치생명마저 더 끊어버리려고 하다가 실패로 끝났지만, 비록 국민파 상층인사들이 그처럼 자주파를 공격하였어도 국민파는 자주파의 정적이 아니라 진보연합전선이 승리하는 날까지 함께 가야할 동반자다.

이번 사태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처럼, 자주파의 정적은 국민파가 아니라 통합진보당을 와해하려고 날뛰는 새누리당을 비롯한 수구우파세력들이다. 자주파는 국민파로부터 공격을 받아도 국민파와 함께 통합진보당을 끝까지 흔들림 없이 지키고 이끌어가야 한다.


통합진보당의 지도력은 어디서 형성되는가?

진보적 대중정당이 수구우파정당과 다른 점은, 당의 조직적 기초 위에 당의 지도력이 형성된다는 데 있다. 수구우파정당은 당의 조직적 기초가 매우 부실하기 때문에 텔레비전 방송에 얼굴을 많이 내비치는 대중적 인기 위에 당의 지도력을 형성한다.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획득한 대중적 인기를 자기의 존재기반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수구우파정당 상층인사와 인기연예인은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진보적 대중정당을 이끌어가는 지도력은 대중적 인기가 아니라 정녕 당의 조직적 기초 위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수구우파정당 상층인사들이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하여 톡톡 튀는 발언과 행동으로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연기술을 능숙하게 발휘하면 그들의 대중적 인기가 절로 올라가지만, 진보적 대중정당의 지도력은 당의 조직적 기초를 튼튼하게 축성하는 정치활동을 통해서만 형성할 수 있다. 당의 조직적 기초를 축성하는 것은, 당원대중을 조직화하여 기층당조직을 건설하는 것이다.

통합진보당의 기층당조직은 당원대중의 생산현장과 생활현장 속에 축성되는 풀뿌리 조직이다. 그런 풀뿌리 조직이 수많이 생겨날 때 당의 지도력이 기층당조직에 뿌리를 내리고 튼튼하게 형성될 수 있다.

그런데 당원대중의 생산현장과 생활현장 속에 기층당조직을 건설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당활동가들이 그 사업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바치며 헌신분투해야 기층당조직을 건설, 확대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당원대중은 당원명부에만 존재하고 당원대중이 참여하는 기층당조직이 부실하면, 다른 구태정당들에서 그러한 것처럼 통합진보당에서도 뿌리 없는 부평초 인사들이 언론공작에 편승하여 설치게 될 것이다.

다른 구태정당들과 달리, 통합진보당은 당원대중이 참여하는 기층당조직이 뿌리를 내린 새 형의 대중정당으로 거듭나야 하며, 당원대중의 생활현장과 생산현장에서 당의 진취적 동력을 공급받는 새 형의 진보정당으로 부단히 성장, 발전해야 한다.

역사는 또 다시 말한다. 지난 항일투쟁시기에 민족주의계열 항일선열들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그들이 건설한 정당들이 예외 없이 기층은 없고 상층만 있는 기형정당이었기 때문이다. 당원대중은 당원명부에만 있고 당의 기층조직은 없으며, 당지도부를 자처하는 부평초 정객들만 모여앉아 당권경쟁에나 몰두하는 정당은 있으나 마나 한 정당이다.

그러므로 통합진보당의 자주파 당활동가들은 풀뿌리 당원들이 있는 기층으로 내려가 기층을 조직해야 한다. 당원대중의 생산현장과 생활현장 속에 구축되었으나 이번 사태로 허물어진 기층당조직을 하루빨리 복구해야 하며, 그런 기층당조직이 아직 없는 곳에서는 새로 내와야 한다. 그리하여 그 어떤 언론공작에도 휘둘리지 않는 튼튼하고 올곧은 진보정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자주파가 요구하는 당의 혁신에서는 방송국 냄새가 아니라 풀뿌리 냄새가 물씬 나야 하는 것이다.

누가 기층당조직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바치는지 풀뿌리 당원들이 알게 하라. 누가 진보와 변혁의 과학적 전망을 제시하는지 풀뿌리 당원들이 알게 하라. 누가 수구우파세력의 탄압과 협박에도 물러서지 않고 투쟁하여 난국을 정면돌파하는지 풀뿌리 당원들이 알게 하라. 당의 침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기층에 있다. (2012년 7월 28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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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24

모란봉악단, 파격공연으로 '불문율'을 깨다

<연재> 한호석의 진보담론 (219)
통일뉴스 2012년 07년 23일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참신함 돋보인 조선식 전자음악의 새로운 경지

2012년 7월 6일 저녁 평양에서 매우 특별한 음악공연이 펼쳐졌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각계층 인사들과 함께 관람한 모란봉악단 시범공연이었다. 공연제목을 시범공연이라고 한 것부터 인상적이다. 북측에서 새로운 음악연주단이 시범공연이라는 제목으로 첫 공연을 펼친 것은 이번 모란봉악단 공연이 처음이다.

<조선신보> 2012년 7월 15일 보도에 따르면, <조선중앙텔레비죤>이 모란봉악단 시범공연 녹화실황을 7월 11일 오후 8시 15분부터 방영한다고 하루 전에 예고하였는데, 공연녹화실황 방영시간이 되자 평양 거리가 한산할 정도였다고 한다. 모란봉악단 공연에 대한 북측 인민들의 관심이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다.

북측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제1위원장은 “문학예술부문에서 혁명을 일으키기 위한 원대한 구상을 안으시고 새 세기의 요구에 맞는 모란봉악단을 친히 조직”하였고, “정력적인 지도”를 하였다고 한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모란봉악단을 친히 조직하고 정력적으로 지도한 것은, 중대한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이 글의 집필목적은 그 정치적 의미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새로운 악단을 조직하려면, 악단을 이끌어갈 운영진을 구성해야 하며, 연주자, 성악가, 작곡가들을 선발하여 출연진을 구성해야 하며, 무대장치, 무대음향, 무대동영상, 무대조명, 무대의상 등을 전담할 제작진을 구성해야 하며, 공연무대에 올릴 노래들을 선곡하고 편곡하여야 하며, 각종 악기를 구비해야 하며, 출연자들이 상당한 기간 동안 공연연습을 하여야 한다.

창단준비는 그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므로, 모란봉악단의 경우에도 넉 달 정도의 준비기간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모란봉악단을 친히 조직하고 정력적으로 지도하였다는 말은, 위에서 언급한 창단준비과정을 직접 지도하였다는 뜻인데, 시간을 역산하면 2012년 3월에 창단준비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시범공연이 끝났을 때, 김정은 제1위원장은 관람석에서 일어나 출연자들에게 축하박수를 보내며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 그들의 공연성과를 치하하였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음악공연 출연자들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 매우 잘하였다고 치하한 것은 은하수관현악단 공연에 이어 모란봉악단 공연이 두 번째다. 북측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제1위원장은 “오늘 공연이 2시간이 넘게 진행되였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고, 또 보고 싶은 심정이라고 하시면서 기분이 대단히 좋다고 기뻐하시였다”고 한다.

전자음악은 전자악기만이 낼 수 있는 독특한 음색과 풍부한 음향으로 음악을 형상하는 현대음악의 대표적인 형식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퇴폐음악을 연주하는 도구로만 쓰이던 전자악기를 북측 음악연주에 도입하여 혁명적이고 인민적이고 민족적인 노래들을 조선식 전자음악(Korean style electronic music)으로 연주한 북측 최초의 전자악단은, 1985년 6월 4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도로 창단되어 북측 인민들 속에서 음악열풍을 불러일으킨 보천보전자악단이다.

27년 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도로 창조된 조선식 전자음악은, 오늘 김정은 제1위원장의 지도로 창단된 모란봉악단에 의해 새로운 경지에 올라섰다고 말할 수 있다. 조선식 전자음악의 새로운 경지라는 말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담겨있다.

북측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제1위원장은 모란봉악단 시범공연을 관람한 직후 악단 지도성원들에게 “공연의 주제와 구성으로부터 편곡, 악기편성, 연주기법과 형상에 이르는 모든 음악요소들을 기성관례에서 벗어나 대담하게 혁신하였다”고 평가하였다고 한다.

모란봉악단이 기성관례에서 벗어나 대담하게 혁신한 것은, 특색있는 악기편성이다. 모란봉악단은 전자바이올린 3명, 전자첼로 1명, 전자건반악기 2명, 전자기타 2명, 피아노 1명, 드럼 1명, 색소폰 1명, 성악가 5명을 포함하여 모두 16명으로 구성된 전자악단이다. 전자바이올린과 전자첼로를 중심으로 하여 다른 전자악기, 피아노, 드럼, 색소폰을 배합한 악기편성양식의 참신성을 보여준다. 전자바이올린과 전자첼로는 서양현악주법에 정통한 연주자만이 손에 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서양고전음악부터 현대대중음악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악연주형식을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최첨단 악기다. 그런 최첨단 악기의 등장이 공연의 참신성을 더해주었던 것이다.

음악정치의 계승과 조선식 전자음악의 혁신

이전에 보천보전자악단과 왕재산경음악단에는 전자바이올린과 전자첼로가 없었고, 전자기타와 전자건반악기와 드럼만 연주하였는데, 그 두 악단이 공연한 전자음악은 성악가들이 부르는 노래의 반주용으로 주로 연주되었다. 다른 한 편, 2009년 5월 30일 조선식 팝스오케스트라(pops orchestra)로 창단된 은하수관현악단은 민족악기와 서양악기를 중심으로 하고 전자기타와 드럼, 방창을 가미하여 경음악풍의 배합관현악을 연주한다.

그런데 모란봉악단은 전자음악으로 편곡된 경음악곡을 연주하기도 하고, 성악가들이 전자음악반주에 맞춰 노래하기도 하고, 경음악 연주와 노래를 배합하기도 하는 등 새롭고 대채로운 공연을 선보였다. 이번 시범공연은 1부와 2부로 나누어서 진행되었는데, 총 연주곡 26곡 가운데, 경음악곡이 13곡, 경음악과 노래를 배합한 연주곡이 3곡, 중창곡이 10곡이었다. 은하수관현악단 성악가들은 배합관현악반주에 맞춰 벨칸토(bel canto)창법으로 노래하는데 비해, 모란봉악단 성악가들은 전자음악반주에 맞춰 대중가요창법으로 노래한다.

모란봉악단 공연출연자가 모두 여성들이라는 점도 이채롭다. 전자건반악기, 전자기타, 드럼으로 편성된 보천보전자악단의 경우, 악기연주자는 남성들이었고 성악가는 여성들이었는데, 모란봉악단 연주자는 모두 여성들이다. 모란봉악단 선우향희 악장은 원래 만수대예술단 삼지연악단에서 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해왔다. 그녀가 바이올린을 독주하는, 이전에 나온 <유투브(Youtube)> 동영상을 보면, 세계 정상급 연주에 손색이 없을 만큼 뛰어난 기량을 가진 연주자임을 알 수 있다. 그런 그녀가 이번에는 전자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악장으로 공연무대에 섰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모란봉악단 시범공연을 관람한 직후 악단 지도성원들에게 공연성과를 평가하는 자리에서 선우향희 악장의 실명을 거론하며 “정말 잘한다”고 치하하였다. 북측에서 최고영도자가 공연출연자들 가운데 특정인의 실명을 거론하여 치하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다.

공연무대형식도 매우 특별하였다. 동영상 무대배경은 대형 기둥처럼 생긴 아홉 개 화면으로 분리되어 시각적 박진감을 주었다. 또한 화려한 무대조명을 역동적으로 비추면서 때때로 레이저조명도 동원하였고, 공연무대 바닥에서 위로 쏘아올리는 불꽃장치까지 등장하였다. 이러한 공연형식은 북측 음악공연사상 처음 있는 파격적인 공연형식이다.

모란봉악단 시범공연은 세계 전자음악계를 지배해온 미국식 전자음악의 패권에 조선식 전자음악의 ‘도전장’을 던진 것이었다. 음악적 감흥이 전자음악으로 표현되고 소통되는 전자화시대에, 모란봉악단의 조선식 전자음악공연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창시하고 발전시킨 음악정치에 더욱 현대화된 조선식 전자음악을 도입함으로써 음악정치의 지평을 전자화시대의 감각에 맞게 더욱 넓혔다고 말할 수 있다.

모란봉악단 시범공연의 개막곡은 민요 ‘아리랑’을 전자음악으로 편곡한 ‘경음악 아리랑’이었다. 2012년 3월 14일 프랑스 파리에서 공연한 은하수관현악단의 ‘배합관현악 아리랑’을 지휘한 남측의 정명훈 음악감독이 “정말 아름답게 편곡된 아리랑”이라는 찬사를 보낸 적이 있는데, 이번에 모란봉악단이 연주한 ‘경음악 아리랑’도 그에 못지 않게 훌륭하게 편곡된 ‘전자음악 아리랑’이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아리랑’은 우리 민족음악을 대표하는 명곡으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으며, 전 세계 음악애호가들과 음악선율로 소통하는 국제공연무대에서 연주되는 민족음악의 대표곡이다. 모란봉악단이 민족음악의 대표곡을 조선식 전자음악으로 연주할 때, 동영상 무대배경에는 한반도를 중앙에 둔 세계지도가 펼쳐지고, 푸른 물빛 담긴 백두산 천지와 눈부신 해돋이를 맞은 동해 아침노을이 나타났다. 이러한 시청각적 전개에는 무슨 뜻이 담겨져 있을까?

김정은 제1위원장이 공연 직후 악단 지도성원들에게 “주체적 립장에 확고히 서서 우리의 음악예술을 세계적 수준에서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한 것과 한반도를 중앙에 둔 세계지도가 펼쳐지는 가운데 백두산 천지와 동해 해돋이를 비춰주는 동영상 무대배경 앞에서 모란봉악단이 민족음악의 대표곡 을 연주한 것을 연결시켜 생각하면, 조선식 전자음악을 세계무대에 진출시키려는 김정은 제1위원장의 전략구상을 읽을 수 있다.

모란봉악단, 파격공연으로 ‘불문율’을 깨다

모란봉악단 시범공연 보도가 나오자마자 세계 각국 언론의 놀란 시선이 집중된 곳은, 시범공연에서 외국곡들을 연주한 장면이었다. 이전에 보천보전자악단도 가끔 외국노래를 연주하곤 하였지만, 외국곡을 조선식 전자음악으로 연주한 것은 모란봉악단 공연이 처음이다. 이전에 보천보전자악단 성악가들은 경음악풍으로 편곡한 북측 가요를 주로 공연하면서 이따금씩 외국곡을 한 두 곡 정도 부르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란봉악단은 그런 기성관례에서 과감히 벗어나 파격적인 모습으로 등장하였다. 조선 경음악곡을 3곡밖에 연주하지 않은 대신, 외국 경음악곡은 11곡이나 연주한 것이다. 모란봉악단이 연주한 조선 경음악 3곡은 ‘아리랑’, ‘예쁜이’, ‘그 품 떠나 못살아’였는데, 그 가운데서 ‘아리랑’과 ‘예쁜이’는 악단 전체가 연주한 곡이고, ‘그 품 떠나 못살아’는 현악4중주로 연주한 곡이다.

북측 음악계가 지켜온 음악공연 선곡원칙을 생각하면, 모란봉악단이 외국 경음악곡을 11곡이나 공연한 것은 실로 파격이다. 물론 모란봉악단의 외국곡 연주는 성악가들이 출연하지 않고 전자음악선율로만 선보인 것이지만, 외국곡을 주로 연주하였다는 점에서 선례를 찾을 수 없는 사상 최초의 사변이다.

북측 언론은 김정은 제1위원장이 공연 직후 악단 지도성원들에게 “우리 인민의 구미에 맞는 민족고유의 훌륭한 것을 창조하는 것과 함께 다른 나라의 것도 좋은 것은 대담하게 받아들여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보도하였는데, 김정은 제1위원장의 그런 구상과 의도에 따라 모란봉악단이 시범공연에서 외국곡을 무대에 올린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모란봉악단이 연주한 외국곡들 가운데 미국 대중음악이 여러 곡 들어있었다는 점이다. 북측이 미국 대중음악을 공연무대에 올리고, 그 공연실황을 전국에 방영한 것은 상상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일이다. 물론 모란봉악단이 미국 대중음악을 공연할 때, 우리말로 번역된 연주곡명을 알려주고 ‘외국곡’이라고만 소개하였으므로, 평소에 미국 대중음악을 전혀 접하지 않은 북측 인민들은 미국 대중음악 연주곡을 들으면서도 그것이 미국 대중음악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조선중앙텔레비죤>이 시범공연 닷새 뒤에 전국에 방영한, 모란봉악단 시범공연 실황을 담은 1시간 40분 길이의 동영상이 <유투브>에 게시되었는데, 거기에는 아래에 열거한 외국곡들을 연주하는 장면이 나온다.

‘챠르다쉬(Czardas)’는 헝가리(북측에서는 현지어 표기원칙에 따라 마자르)의 전통춤곡이다. 또한 ‘집씨의 노래(Zigeurnerweisen)’는 19세기 말 스페인의 전설적인 바이올린 연주가이며 작곡가인 파블로 드 사라사테(Pablo de Sarasate)가 작곡한 명곡이다. 모란봉악단은 ‘챠르다쉬’와 ‘집씨의 노래’를 전자음악으로 편곡하여 연주하였는데, 원래 그 두 곡은 서양고전음악으로 분류된다.

모란봉악단이 연주한 ‘정통’ 경음악곡들 가운데는 프랑스 경음악곡이 4곡 포함되었다. ‘싸바의 여왕(La Reine de Saba)’, ‘장미빛을 띤 메뉴에뜨(Menuet)’, ‘뻬넬로뻬(Penelope)’, ‘별의 쎄레나데(Serenade de l'etoile)’ 같은 경음악 명곡들이다.

모란봉악단이 서양의 유명한 경음악곡들을 자기 식으로 편곡하여 공연한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지만, 미국 대중음악을 공연무대에 올린 것은 놀라운 일이다. 모란봉악단이 연주한 ‘이제 곧 날아오르리(Gonna Fly Now)’는 미국의 영화음악 작곡가 빌 콘티(Bill Conti)가 작곡하고 미국 영화 ‘록키(Rocky)’에 삽입한 주제곡이다. 영화 ‘록키’는 미국에서 1929년부터 해마다 한 차례 진행되는 아카데미 국제영화제에서 3개 부문에 걸쳐 수상할 정도로 유명한 영화였고, 그 영화의 주제곡인 ‘이제 곧 날아오르리’는 미국인들의 귀에 아주 익숙한 유행가다.

또한 모란봉악단이 연주한 ‘나의 길(My Way)’은 1967년에 프랑스에서 유행한 대중가요 ‘여느 때처럼(Comme d'habitude)’을 미국의 대중가수 폴 앵커(Paul Anka)가 전혀 다른 내용으로 노랫말을 바꾼 유행가인데, 미국의 정상급 대중가수 프랭크 시내트라(Frank Sinatra)가 불러 지금까지 미국인들의 인기를 모으는 유행가 중의 유행가다.

그런데 <조선중앙통신> 2012년 7월 7일 보도기사를 읽어보면, 모란봉악단이 위의 외국곡 8곡 이외에도 다른 외국곡을 3곡 더 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시범공연 닷새 뒤에 전국에 방영한, 모란봉악단 시범공연 녹화실황을 찍은 1시간 40분 길이의 동영상에는 위의 3곡이 나오지 않는데, 녹화영상편집과정에서 빠진 것으로 보인다.

보도기사에 노래제목만 나온 외국곡들은 아래와 같다. ‘결투(The Duel)’는 팝음악(pop music)이고, ‘승리(Victory)’는 랩송(rap song)이고, ‘달라스(Dallas)’는 컨츄리음악(country music)이다. 거기에 더하여, ‘세계동화명곡묶음’이라는 제목의 연속곡으로 연주한 노래 12곡도 미국 아동만화영화의 주제곡들이다.

이처럼 모란봉악단이 미국인들이 즐겨 부르는 유행가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팝음악과 랩송과 컨츄리음악까지 공연무대에 올린 것은 파격을 넘어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북측의 주체음악은 북측에서 작곡된 혁명가요, 생활가요, 민요풍 가요 그리고 현대적으로 편곡된 우리 민요를 중심으로 발전해왔는데, 이번에 모란봉악단 시범공연에는 미국 대중음악이 여러 곡 포함되었다. 이처럼 특별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위에서 논한 것처럼, 모란봉악단 창단을 준비하던 나날에 악단 지도성원들은 시범공연에서 연주할 곡들을 선곡하였을 것인데, ‘공연금지’가 불문율처럼 정해진 미국 대중음악을 악단 지도성원의 자체적 판단과 결정에 따라 공연종목에 넣지 않았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왜냐하면 북측의 문화예술정책과 사회적 분위기에서 미국 대중음악을 공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을 생각하면, 모란봉악단 시범공연에 미국 대중음악을 포함시킨 전례 없는 파격적인 조치는 김정은 제1위원장의 결정과 지시로만 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유격대형 문화사절단이 공연무대 펼치고 싶어하는 곳

김정은 제1위원장은 왜 미국 대중음악을 공연종목에 포함시킨 것일까?

첫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음악정치를 계승한 김정은 제1위원장은, 조선식 전자음악을 혁신시키고 발전시켜 세계무대에 내세우려는 전략구상을 하였던 것이다. 은하수관현악단이 2012년 3월 14일 프랑스 파리에서 프랑스 음악애호가들의 절찬 속에 공연함으로써 조선식 배합관현악을 세계무대에 진출시킨 것처럼, 이번에는 모란봉악단의 조선식 전자음악을 세계무대에 진출시키려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식 전자음악이 세계무대에 진출하려면, 모란봉악단이 세계 전자음악의 중심지인 미국에 가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북측과 미국의 문화교류를 추진해온 미국의 민간단체 ‘글로벌 리소스 서비스(GRS)’가 조선국립교향악단을 미국에 초청하여 순회공연을 하려는 계획을 추진 중인데, 미국 국무부의 ‘옹졸한 반대’에 가로막혀 더 이상 진척되지 않고 있다. 모란봉악단이 미국 공연무대에 서려면,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대중음악을 연주할 줄 알아야 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모란봉악단의 미국 대중음악 연주는 조선식 전자음악을 세계무대에 내세우려는 김정은 제1위원장의 전략구상에 따라 마련된 시범연주였던 것이다. 공연제목을 창단공연이 아니라 시범공연으로 정한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모란봉악단 시범공연은 그 악단을 미국에 보낼 준비를 끝냈으니 이제는 미국이 북측에게 문호를 개방하라는 강력한 신호인 것이다.

둘째, 북측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제1위원장은 공연 직후 악단 지도성원들에게 “전승절에 즈음하여 모란봉악단 공연을 진행”하라고 지시하였다고 한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체결한 날을 북측에서는 “미제의 침략을 물리친 전승절”이라 한다. 북측에서는 해마다 6월 25일부터 7월 27일까지 한 달 기간을 ‘반미공동투쟁월간’으로 정하고 북측 인민들에게 반미계급의식을 교양해왔다. <조선중앙통신> 2012년 6월 29일 보도에 따르면, 올해 ‘반미공동투쟁월간’에 즈음하여 중앙계급교양관을 참관하는 수많은 근로자들이 미국에 대한 “천백배의 복수를 다짐”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김정은 제1위원장은 모란봉악단 대중공연을 올해 ‘전승절’에 진행하라고 지시하였다. 만일 모란봉악단이 시범공연에 올린 곡들을 ‘전승절’ 공연무대에 다시 올린다면 미국 대중음악도 연주하게 될 것이다. 미국과 3년 동안 치열한 전면전을 벌였고, 59년 동안 불안정한 정전상태에 있으며, 미국발 대북침공위험이 계속되는 올해 7월 27일에 모란봉악단의 공연에 미국 대중음악이 포함된다면 그것은 무슨 뜻인가? 그러한 파격적은 음악공연은 2013년 7월 27일에 맞게 되는 정전협정 체결 60주년을 1년 앞두고, 이제 미국이 대북적대정책을 폐기하고 평화협정 체결과 관계정상화에 나서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미국에게 보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친히 지도한 모란봉악단 창단준비과정이 시작되기 직전인 2012년 2월 23일부터 24일까지 중국 베이징에서 제3차 북미고위급회담이 진행되었고, 북미 2.29 합의가 평양과 워싱턴 디씨에서 동시에 발표되었던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지금 대선국면에 접어든 미국은 북미 2.29 합의를 실행하는 문제에 관심을 보이지 않지만, 미국 대선이 끝나면 북미관계 분위기는 사뭇 달라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녕변 핵시설단지 안에 건설 중인 시험용 경수로 공사가 완공시점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서고 있으므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미국 대선 이후 북미 2.29 합의를 실행에 옮기지 않을 수 없는 처지다. 이런 맥락을 생각하면, 모란봉악단은 북미 2.29 합의 실행을 위해 북미관계 분위기를 반전시킬 평화의 선율을 안고 미국을 방문할 공연준비를 이미 끝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국립교향악단이나 은하수관현악단은 연주자만 해도 엄청나게 많아서 해외공연을 나갈 경우 초청자 측이 부담하는 경비가 수 십만 달러씩 되지만, 모란봉악단 연주자는 16명밖에 되지 않으니 경비부담이 확 줄어든다. 음악과는 썩 어울리지 않는 군사용어를 빌려 묘사하면, 조선국립교향악단이 전통악기로 무장한 군단급 문화사절단이고, 은하수관현악단이 전통악기와 일부 전자악기로 무장한 사단급 문화사절단이라면, 모란봉악단은 최고사령관이 명령하면 언제나 어디든지 즉각 출동할 준비태세를 갖춘, 최첨단 전자악기로 무장한 유격대형 문화사절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조선식 배합관현악을 연주하는 사단급 문화사절단이 2012년 3월에 첫 해외공연무대를 펼친 곳이 유럽 관현악의 중심지이며 유럽문화 1번지인 프랑스 파리였다면, 조선식 전자음악을 연주하는 유격대형 문화사절단이 첫 해외공연무대를 펼치고 싶어하는 곳은 전자음악의 중심지이며 유엔본부가 있는 국제정치 1번지 미국 뉴욕이다.

미국 뉴욕 맨해튼 한복판에 있는 20,000석 규모의 초대형 실내공연장 매디슨 스퀘어 가든(Madison Square Garden)에서 모란봉악단이 이번 시범공연에 올렸던 민요풍 노래 ‘녕변의 비단처녀’를 연주한다면, 평안북도 녕변을 우라늄농축의 근거지라고만 알고 있던 미국인들에게 그 고장은 약산의 진달래꽃 만발한 비단처녀의 고향으로 알려질 것이다. 음악은 수 천 마디 외교술이 대신할 수 없는 간결명료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창시하고 발전시켜온 음악정치가 오늘에는 김정은 제1위원장의 “정력적인 지도”에 의해 주체음악의 색다른 선율을 울리기 시작하였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색다른 선율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생전에 그토록 이루려 하였던 북미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실현을 추동하는 박진감 넘치는 전자음악선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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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22

당의 눈높이를 누구의 눈높이에 맞춰야 하는가?

변혁과 진보 (85)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통합진보당 안에서 일어난 이상한 언어현상

이번에 통합진보당 지도부를 선출한 선거결과를 보면, 당 안에 존재하는 양대 세력권의 판세가 시야에 들어온다. 통합진보당 안에 존재하는 양대 세력권이란 이전 민주노동당 출신으로 진보적 민주주의와 자주적 평화통일을 추구하는 정파와 이전 국민참여당 출신으로 진보적 자유주의와 복지사회 건설을 추구하는 정파를 뜻한다. 통합진보당에 다른 소수정파들도 있지만, 그들은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해서 커다란 세력권을 형성하지는 못하였다.

이 글에서는 진보적 민주주의와 자주적 평화통일을 추구하는 정파를 자주파라 부르고, 진보적 자유주의와 복지사회 건설을 추구하는 정파를 국민파라 부른다. 언론에서는 국민파를 '혁신파'라고 부르지만, 그 정파가 주장하는 당의 혁신은 혁신이 아니기 때문에 혁신파가 아니라 국민파라고 불러야 옳다. 그 정파가 주장하는 당의 혁신이 왜 혁신이 아닌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논하게 된다.

이번에 지도부를 구성한 통합진보당 안에서는 자주파와 국민파의 양대구도가 형성되어 힘의 균형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당 지도부가 그러한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조건에서, 통합진보당이 어느 길로 나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통합진보당이 어느 길로 나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다가오는 것은 당의 눈높이를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야 한다는 국민파의 이른바 '혁신론'이다. 국민파가 주장하는 당의 '혁신'이란 통합진보당이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당의 체질을 확 바꾼다는 뜻이다. 국민파의 그러한 '혁신론'은 이 땅의 진보정치운동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우선, 국민파가 쓰는 국민이라는 개념부터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원래 국민이라는 말은 수구우파세력들이 적대적인 사회계급관계를 은폐하려는 의도에서 쓰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제 식민지강점기에 일제침략세력은 식민지조선을 이른바 '황국신민화'하려는 범죄적 의도에서 국민이라는 신조어를 쓰기 시작했고, 8.15 해방 후에는 이승만 극우독재정권이 일제침략언어인 국민이라는 말을 계승하여 그대로 쓰더니,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진 3대 군사독재정권이 그 말을 계승하여 아주 잘도 써먹었다.

다른 한 편, 세계 정당 분포도를 봐도 국민이라는 말은 수구우파정당의 정체성을 드러내주는 특정용어로 널리 쓰이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국민당(National Party)이라는 당명을 쓰는 정당들은 예외 없이 수구우파정당이다. 이전 한나라당이라는 당명도 영어로 번역하면 대국민당(Grand National Party)이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약 40개 나라에 국민당이라는 간판을 내건 수구우파정당들이 있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언어는 현실 속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어떤 말을 누가 쓰는가에 따라서 그 말에 사회정치적 의미가 담기게 되는데, 국민이라는 말도 어느 특정한 사회정치세력이 써온 것에 의해 특정한 사회정치적 의미를 지닌 개념으로 태어난 것이다. 따라서 통합진보당은 그렇게 만들어진 국민이라는 말을 아무 생각 없이 쓸 수 없는 것이다.

이 땅의 진보운동사를 되돌아보면, 1980년대 이후 진보세력은 국민이라는 말 대신에 민중이라는 말을 쓰면서 수구세력의 반민중적 억압과 횡포에 맞서 싸워왔다. 1990년대에 이 땅에는 민중당이라는 진보정당도 있었다. 2000년대에 민주노동당이 창당된 이후부터 이 땅의 진보세력은 민중이라는 말을 더 구체화하여 노동자, 농민, 서민이라는 새로운 말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전부터 내가 쓰는 글들에서는 노동자, 농민, 서민을 포괄하는 뜻을 지닌 근로대중이라는 말이 등장하였다.

이런 진보운동사의 언어사용맥락을 짚어보면,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진보세력이 썼던 민중이라는 말과 2000년대 이후부터 민주노동당이 널리 쓰기 시작한 노동자, 농민, 서민이라는 말이나 나의 글에 등장한 근로대중이라는 말은, 생산노동과 진보정치와 사회변혁의 동일한 주체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다. 두 말할 나위 없이, 민중이라는 말이나 노동자, 농민, 서민이라는 말이나 근로대중이라는 말은 자주파가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이 땅의 진보운동현실 속에서 태어난 말이다.

그런데 통합진보당 창당 이후 국민파가 노동자, 농민, 서민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국민이라는 말을 쓰더니, 당의 내분사태 와중에서는 한 술 더 떠서 국민의 눈높이라는 말까지 쓰고 있다. 통합진보당 안에서 일어난 이러한 언어현상은 그냥 무심히 지나칠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국민파의 정파적 견해가 국민이라는 말쓰임새에 그대로 녹아있기 때문이다.


양극화된 사회에 두 개의 눈높이가 있다

통합진보당의 '혁신'을 말하면서 당의 눈높이를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야 한다고 주장하는 국민파의 견해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설명된다.

첫째, 1948년 8월 분단정부 수립 이후 1992년까지 40년이 넘도록 계속된 극우독재정권의 장기집권과 친미반공주의의 광란은 우리 사회를 전 세계에서 가장 우경화된 사회로 전락시킨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우리 사회가 겪었던 것과 똑같이 동시대에 극우독재정권의 장기집권과 친미반공주의의 광란을 겪었던 대만에서는 2008년 7월 20일 대만공산당이 창당되었고 중국과의 자유왕래가 보장되었건만, 우리 사회는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며, 좌파정당 출현을 법적으로 금하는 수구우파정권의 금압족쇄와 "한국 사회의 미국화"를 외치는 친미반공주의의 세뇌족쇄가 채워진, 지구 위에 마지막으로 남은 '야만사회'다.
 
금압족쇄와 세뇌족쇄가 이중으로 채워진 '야만사회'에서 살아온 근로대중에게 진보의식의 싹이 틀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처럼 근로대중의 사회정치의식이 사상적 세뇌족쇄에서 아직 풀려나지 못하였는데, 통합진보당의 눈높이를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야 한다고 하면 그것은 이 땅의 근로대중에게 채워진 사상적 세뇌족쇄를 용인하라는 소리로 들린다.

둘째, 지금 이 땅의 근로대중이 실생활에서 체험하고 있는 것처럼, 오늘 우리 사회는 1990년대 말 이후 중산층이 차츰 양극분해되면서 부익부 빈익빈이 극단으로 치달아 완전히 양극화되었다. 이런 양극화 현상은 비단 우리 사회에서만 나타난 특수현상이 아니라, 자본주의세계시장에 얽혀있는 세계 각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자본주의의 몰락을 재촉하는 일반현상이다.

양극화된 우리 사회의 사회계급관계를 살펴보면, 한 줌도 되지 않는 초부유한(super-rich) 독점재벌과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궁핍한 근로대중으로 갈라져 사회계급적 모순이 격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그처럼 양극화된 사회에서는 눈높이도 양극화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회정치적 인식활동은 근로대중의 눈높이와 거대재벌의 눈높이로 양극화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오늘 이 땅의 수구우파세력들은 눈높이의 양극화 현상을 애써 무시한 채, 국민의 눈높이라는 말만 쓴다. 예컨대, 2012년 1월 2일 당시 한나라당의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은 비대위 첫 회의를 주재하면서 "항상 국민의 눈높이, 국민의 상식이라는 입장에서 쇄신작업에 박차를 가해 달라"고 말했다.

또한 2012년 5월 16일 새누리당의 황우여 대표최고위원도 최고위원회 첫 회의를 주재하면서 "앞으로 당은 더욱 더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민생을 돌보고 국민의 아픔을 치유하는 데, 우리 약속한 바를 모두 실천하는 데 매진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초부유와 궁핍으로 양극화된 사회에서 독점재벌과 근로대중을 모두 아우른 뜻으로 쓰이는 국민의 눈높이는 실재할 수도 없고 실재하지도 않는 허구적 개념이다. 박근혜나 황우여 같은 수구우파정객들이 말하는 국민의 눈높이는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기만용어다.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들은 국민의 눈높이라는 기만용어를 가지고 말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수구우파정객들의 그런 말장난보다 더 심각한 것은, 통합진보당 국민파가 수구우파정객들의 말장난을 아무 생각 없이 모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구우파정당에서 쓰이는 기만적 유행어를 진보당에서 똑같이 따라 쓰다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통합진보당 지도부는 실재하지도 않는 국민의 눈높이에 당의 눈높이를 맞춘다는 식의 허구적 '혁신론'을 새누리당을 뒤따라 복창할 게 아니라, 독점재벌의 눈높이에 자기의 눈높이를 맞춘 새누리당의 대척점에 서야 할 것이며, 근로대중의 눈높이에 당의 눈높이를 맞춘 진보정치노선을 흔들림 없이 견지해야 할 것이다.

지금 새누리당이 자기의 눈높이를 국민의 눈높이에 맞춘다고 떠들어대는데, 통합진보당마저도 자기의 눈높이를 국민의 눈높이에 맞춘다고 하면, 결국 그 두 당의 정치노선이 갈라서는 경계선은 허물어지고 마는 것이다.

새누리당이 자기의 눈높이를 독점재벌의 눈높이에 맞춰놓고서도 국민의 눈높이에 맞춘다고 헛소리를 떠들어대면, 통합진보당은 그런 헛소리를 따라할 것이 아니라 새누리당이 떠드는 국민의 눈높이는 독점재벌의 눈높이고, 통합진보당은 자기의 눈높이를 근로대중의 눈높이 맞추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과연 어느 당이 근로대중을 배반한 가짜정당이고 어느 당이 근로대중을 위하는 진짜정당인지 진위를 가려보게 해야 할 것이다.


국민당의 변종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진보적 민주주의와 자주적 평화통일을 추구해온 자주파가 지난 10여 년 동안 민주노동당 당기를 들고 열심히 노력하여 구축해놓은 대중적 지지기반은 근로대중 가운데 10%에 이르는 지지기반이다. 통합진보당이 계승한 그 10%에 이르는 대중적 지지율은 여론조사 방식에 따라서 그리고 국면변화에 따라서 10% 아래위로 들쭉날쭉 변동해왔고, 더욱이 이번 내분사태와 외압적 와해공세로 통합진보당의 대중적 지지기반이 상당히 훼손되었지만, 통합진보당이 근로대중 가운데 10%의 지지율을 확보하였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10%의 대중적 지지기반이야말로 통합진보당이 진보적 정권교체를 실현하는 날까지 쑥쑥 자라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성장의 밑뿌리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근로대중 가운데 10%에 이르는 진보적 근로대중의 지지기반이 통합진보당에게는 둘도 없이 소중한 성장의 밑뿌리인 것이다.

통합진보당의 대중적 지지율이 지금은 비록 10%밖에 되지 않지만, 한반도 정세가 평화정세로 전변되고 통합진보당이 더욱 분투하면 10%의 지지율이 20% 선으로 늘어나고 50% 선으로 늘어나는 비약적 성장의 시기가 올 것이며, 또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당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만일 통합진보당이 국민파가 하자는 대로 당의 눈높이를 국민의 눈높이에 맞춘다면, 통합진보당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바뀌고 '국민적 지지율'이 올라가게 될까? 천만의 말씀이다. 통합진보당이 진보적 근로대중의 지지기반을 소홀히 여기면서 자기의 눈높이를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겠다는 말은, 뿌리를 튼튼히 키우지 않고 꽃부터 피우겠다는 소리다.

만일 통합진보당이 자기의 눈높이를 국민의 눈높이에 맞춘다면, 전체 근로대중의 10%에 이르는 진보적 근로대중의 지지마저도 차츰 잃어버리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진보정치의 길에서 한 걸음씩 멀어지면서 진보적 대중정당이 아니라 진보모방적 국민정당으로 변질될 것이다.

그런데도 국민파는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당을 혁신하자"고 주장하면서 당내 행사에서 '애국가'나 부르고 있다. 당내 행사에서 '애국가'를 열심히 불러 국민의 눈높이에 맞춘다고 해서, 당의 대중적 지지기반이 확대되는 것은 아니며, 그런 '애국가' 제창은 그것을 압박한 새누리당과 수구언론에서나 반길 일이다.

실제로 새누리당과 수구언론은 통합진보당 지도부가 당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애국가'를 부르는지 안 부르는지 주시하고 있다가, '애국가'를 부르자 크게 반기며 몇몇 지도부 인사들이 '애국가'를 제창하는 장면을 찍은 현장사진을 언론에 실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통합진보당의 지지기반인 진보적 근로대중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들은 새누리당과 수구언론의 '애국가 제창' 압박공세에 뒤로 밀리는 통합진보당의 나약한 모습을 보고 실망하였을 것이다. 두 말할 나위 없이, 통합진보당에 대한 진보적 근로대중의 실망이야말로 당의 지지율을 끌어내리는 매우 위험한 요소다.

이런 맥락에서 바라보면, 당의 눈높이를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려는 국민파의 '당혁신'에는 통합진보당이 새누리당을 비롯한 정적들과 싸우지 않고 그들과 타협적으로 공존하려는 유혹에 빠진 무능정당으로, 투쟁을 포기한 허약정당으로 전락할 치명적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세계 진보정당사에서 얻는 역사적 교훈은, 당의 좌경적 편향이 진보와 변혁을 망치는 치명적 요인이지만, 당의 우경적 편향도 그에 못지 않게 진보와 변혁을 망치는 치명적 요인으로 된다는 것이다. 새누리당이 국민의 눈높이를 말하면 그대로 따라하고, 민주통합당이 국민복지를 들고나오면 그대로 따라하는 정당은 진보당이 아니라, 진보당을 우경화시킨 국민당의 변종일 뿐이다.

진보정치의 요구와 지향은 분명하다. 통합진보당 지도부는 당의 눈높이를 실재하지도 않는 국민의 눈높이에 맞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지지기반인 근로대중의 눈높이에 맞춰야 한다. 그렇게 하여야 통합진보당이 노동자, 농민, 서민들과 함께 진보정치의 길을 개척해나갈 수 있다. (2012년 7월 21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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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21

2001년 1월 17일, 미국은 '이중족쇄' 채웠다

[한호석의 개벽예감] (23)
자주민보 2012년 07월 20일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비밀전문 폭로로 세상에 드러난 미사일 관련정보

폭로 전문 누리집 ‘위키리크스(Wikileaks)’에 게시된, 주한미국대사관 정치참사 조셉 윤(Joseph Yun)이 작성하여 2009년 3월 13일 본국에 보낸 2급 비밀전문 ‘미사일체계생산에 관한 한국의 통보(ROK NOTIFICATION OF MISSILE SYSTEM PRODUCTION)’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비밀전문에 따르면, 2009년 3월 12일 조셉 윤이 외교통상부 한미안보협력국 부국장으로부터 미사일 생산에 관한 통보자료를 전달받았다. 비밀전문에 따르면, 남측이 통보자료에서 미국에 넘겨준 남측의 미사일 생산에 관한 정보는 아래와 같다.

첫째, 통보는 새로운 미사일지침 3항 (a)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둘째, 미사일 명칭은 NHK-ll PIP다.
셋째, 위의 미사일을 최종적으로 생산하고 조립하는 공장은 대전에 있는 (주)한화(HANWHA Corporation)다.
넷째, 위의 미사일은 2009회계연도에 15기, 2010회계연도에 17기, 2011회계연도에 19기를 생산하게 될 것이다.
다섯째, 2005년 6월 미국에게 기술자료를 통보한 바 있는 NHK-II PIP 블록(block)-A 미사일의 첫 생산은 이미 완료되었다. NHK-II PIP 블록-B 미사일은 아직 개발 중이므로, 이 미사일의 생산일정은 생산이 개시되는 대로 미국에게 통보할 것이다.

위에 인용한 내용은 남측 언론에 알려지지 않은 군사기밀인데, 주한미국대사관 비밀문건이 ‘위키리크스’를 통해 인터넷에 공개됨으로서 남측의 미사일 관련 군사기밀이 세상에 드러나고 말았다. 그 내막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남측이 NHK-ll PIP라는 탄도미사일을 2009회계연도부터 생산한다는 것인데, 남측의 회계연도는 1월 1일에 시작하여 12월 31일에 끝나는 데 비해, 미국의 회계연도(fiscal year)는 10월 1일에 시작하여 이듬해 9월 30일에 끝난다. 위의 비밀전문에서 남측이 미사일 관련 군사기밀을 2009년 3월 12일 미국에 통보한 문건에서 2009회계연도 연간생산량에 대해 언급한 것을 보면, 위의 비밀전문에 나오는 회계연도는 남측의 회계연도가 아니라 미국의 회계연도인 것이다. 이것은 남측 정부가 미사일 생산일정을 통보할 때 미국 정부의 회계연도에 맞춰 통보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니, 그야말로 ‘종미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둘째, 남측은 NHK-ll PIP라는 탄도미사일을 2009년 10월 1일부터 1년 동안 15기를 생산하고, 2010년 10월 1일부터 1년 동안 17기를 생산하고, 2011년 10월 1일부터 올해 9월 30일까지 1년 동안 19기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해마다 2기씩 늘어나는 증산추세를 생각하면, 2012년 7월 현재 이 탄도미사일이 약 60기 생산된 것으로 추산된다.

셋째, 위의 비밀전문에 나오는 NHK-ll PIP라는 미사일은 어떤 미사일일까? <월간조선> 2011년 3월호에 실린 보도기사에 따르면, 남측의 국방과학연구소(ADD)가 2007년에 개발을 시작한 사거리 500km의 지대지 탄도미사일 현무-2B가 있는데, 2009년 말부터 이 탄도미사일을 중부전선과 동부전선에 작전배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보도기사와 위의 비밀전문을 대조해보면, NHK-ll PIP가 현무-2B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넷째, 남측이 “2005년 6월에 미국에게 기술자료를 통보한 바 있는 NHK-II PIP 블록-A 미사일의 첫 생산은 이미 완료되었다”는 대목이 위의 비밀전문에 있는데, 이미 양산과정에 들어간 NHK-ll PIP 블록-A라는 미사일은 사거리 500km의 현무-3A 순항미사일인 것으로 보인다.

다섯째, 위의 비밀전문에서 2009년 3월 현재 개발 중이라고 서술한 NHK-II PIP 블록-B 미사일은 사거리 1,000km의 순항미사일 현무-3B인 것으로 보인다. <월간조선> 2011년 3월호는 한국군이 2010년 중반에 사거리 1,500km의 순항미사일 현무-3C 개발을 끝내고 작전배치하기 시작한 것처럼 보도하였으나, 위의 비밀전문에 따르면, 2009년 3월 현재 한국군은 현무-3C보다 한 급 아래인 현무-3B 순항미사일을 아직 개발 중이었다. 그런데도 <월간조선>은 현무-3B는 물론이고 현무-3C도 개발이 완료된 것처럼 과장보도를 하였다.


국방장관 편지 한 장으로 미국에 넘어간 미사일 주권

어느 나라에서나 자국산 미사일에 관한 정보는 군사기밀로 되어 있는데, 위의 비밀전문을 읽어보면 남측이 미국에게 미사일 관련 군사기밀을 지속적으로 넘겨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상식을 배반하는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남측이 그처럼 미국에게 미사일 관련 군사기밀을 넘겨줄 수밖에 없는 까닭은, 미국이 남측의 미사일 관련 군사기밀을 자기에게 통보하도록 규정해놓은 미사일지침(Missile Guidelines)이 있기 때문이다.

남측이 미사일 관련 군사기밀을 미국에게 넘겨주도록 강제하는 미사일지침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측 언론에서는 미사일협정이라는 잘못된 용어를 쓰곤 하였는데, 관련정보가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면서 이제는 미사일지침이라는 정확한 명칭이 널리 쓰이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미사일지침은 미국과 남측이 대등하게 체결한 협정이 아니라, 명칭 그대로 미국이 남측에게 일방적으로 내려먹인 지침이다.

원래 미사일지침은 1979년 7월 존 위컴(John A. Wickham) 당시 주한미국군사령관이 노재현 당시 국방장관에게 보낸 편지 한 장으로 조작된 것이다. 위컴의 편지를 통해, 미국은 당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개발 중이던 탄도미사일의 사거리를 180km로 제한하고 탄두무게를 500kg으로 제한하라는 지침을 보냈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1979년 9월 노재현 당시 국방장관은 위컴에게 보낸 답장에서 남측이 미국의 미사일지침에 따르겠노라고 약속하였다.

1950년 7월 14일 당시 미국 극동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에게 보낸 이승만의 편지 한 장으로 한국군 작전통제권(그 편지에서는 작전지휘권이라는 용어를 썼음)이 미국에게 통째로 넘어갔던 것과 마찬가지로, 1979년 9월에는 위컴에게 보낸 노재현의 편지 한 장으로 한국군 미사일 주권이 미국에게 통째로 넘어갔다. 지난 시기 을사오적은 나라의 주권을 일제에게 넘겨줄 때 회의하는 시늉이라도 했었는데, 이승만과 노재현은 회의하는 시늉도 하지 않고 그냥 편지 한 장으로 주권을 미국에게 넘겨주고 말았으니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질 일이다.

남측의 미사일 주권을 미국에게 넘겨준 미사일지침은 왜 1979년에 나왔던 것일까? 당시 국내외 정세가 극도로 불리해지자,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1970년대 초반에 NHK-l이라는 이름의 탄도미사일을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개발사업이라고는 하지만, 미국산 탄도미사일 나이키-허큘리스(Nike-Hercules) 로켓엔진을 역설계하여 모방제작하였고, 다른 핵심부품들도 자체로 만들지 못해서 수입하여야 하였다. 이를테면, 추진제로 쓰는 고체연료는 미국에서 수입했고, 관성항법장치는 영국에서 수입했다.

그렇게 만들어낸 미사일 시제품을 1978년에 시험발사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사거리 180km의 탄도미사일 현무-1이다. 이처럼 1978년에 남측이 탄도미사일 시험발사에 성공하자, 미국은 남측의 미사일 개발사업을 요람기에 장악, 통제하기 위해 미사일지침을 주둔군사령관의 편지 한 장으로 확정해버린 것이다. 남측이 주둔군사령관의 편지 한 장에 굴복하여 미사일 주권을 넘겨준 미사일지침은 그 내용이 너무 황당하고 충격적이어서 차마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으나, 그 동안 남측 언론에 간간이 보도된 단편정보를 모아보면 아래와 같은 숨겨진 사실이 드러난다.

미사일지침에 따르면, 남측이 만드는 탄도미사일의 사거리는 180km로 제한되었고, 탄두무게는 500kg으로 제한되었다. 순항미사일을 만드는 경우에도 사거리는 무제한으로 허용되었지만, 탄두무게는 500kg으로 제한되었다.

또한 미사일지침은 남측이 고체연료를 추진제로 사용하는 것도 통제하고 있는데, 발사단계에서 480t 이상의 추력을 내는 고체연료 로켓을 만들지 못하도록 금지하였다. <연합뉴스> 2007년 10월 23일 보도에 따르면, 그 날 육군본부에 대한 국정감사를 실시한 국회 국방위원회에 출석한 유도탄사령관 정인구 소장은 김학송 의원이 “크루즈(순항)미사일은 우리가 개발해도 연료가 액체인가, 고체인가?”고 물었을 때, 액체연료라고 답변하였고, 김학송 의원이 “우리가 발사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다”고 말하자 “액체이지만 충전돼 있다. 발사까지는 약 1시간이 걸린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미사일지침에 따르면, 남측은 신형 탄도미사일을 개발하여 처음 시험발사를 하기 전에 먼저 미사일의 추력, 발사중량, 추진제중량, 동체중량, 생산량, 생산시설 명칭과 위치 등에 관한 군사기밀정보를 미국에 넘겨주어야 한다. 이것은 신형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설계단계에서부터 미국이 철저하게 검사한다는 뜻이다.

서류검사에 관한 예를 들면, 1990년 2월 10일 미국은 남측에게 현무 미사일 기술자료를 내놓으라고 요구하였고, 노태우 군사독재정권은 1990년 10월 8일 외교부 과장 명의로 작성한 현무 미사일 기술자료를 미사일지침을 준수하겠다고 재확인한 문서와 함께 미국에 보냈다.

또한 미사일 시험발사 사전통보에 관한 예를 들면, 주한미국대사관 정치참사 조셉 윤이 작성하여 2009년 5월 21일 본국에 보낸 2급 비밀전문 ‘로켓비행실험에 관한 한국 정부의 통보(ROKG NOTIFICATION OF ROCKET FLIGHT TEST)’는, 2009년 5월 20일 외교통상부 한미안보협력국 박소연이 안흥종합시험장에서 NHK-II PIP 미사일을 2009년 6월 3일에 12번째 시험발사하려는 계획을 미국에게 통보하였던 것이다. 충청남도 태안군에 있는 안흥종합시험장은 국방과학연구소가 제작한 미사일 시제품의 연소시험이나 발사시험을 실시하는 곳이다.

미사일지침은 서류검사만이 아니라 현장사찰도 규정하였다. 이를테면, 미국이 남측으로부터 통보받은 기술자료에 대해 의심이 생기면, 미국의 파견요원들이 남측의 미사일 연구시설 및 생산시설을 예고 없이 불시에 방문하여 현장사찰을 실시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미사일지침에 따르면, 남측이 신형 탄도미사일 시제품을 다섯번째 시험발사한 뒤에, 그리고 열번째 시험발사한 뒤에 미국은 남측이 미사일지침을 위반하였는지를 검증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미국이 미사일 개발사업에 이처럼 족쇄를 채운 대상은 전 세계에서 남측이 유일무이하다. 미국과 남측의 관계가 정상적인 국제관계가 아니라 지배와 예속의 관계라는 사실은 미사일지침에서도 드러난다.


새로운 미사일지침과 미사일기술통제체제 가입

군사독재정권이 물러간 뒤로 등장한 남측 역대 정권들은 자기에게 채워진 ‘족쇄’를 풀어보려고 몇 차례 시도하였다. 그러나 ‘족쇄’를 완전히 풀어버리려는 게 아니라, 무거운 ‘족쇄’를 좀 더 가벼운 ‘족쇄’로 바꾸려고 하였다. 미사일지침 개정요청이 바로 그런 ‘족쇄 바꿔달기’였다.

이를테면, 김영삼 정권이 미국에게 미사일지침을 개정해달라고 요청하여, 개정협상이 1995년 말부터 5년 동안 20여 차례나 진행되었다. 그 결과, 김대중 정권 시기인 2001년 1월 17일에 새로운 미사일지침(New Missile Guidelines)이 워싱턴 디씨와 서울에서 동시에 발표되었다. 새로운 미사일지침에 따르면, 남측이 탄도미사일 사거리를 종전의 180km에서 300km로 연장하도록 허용하였으나, 탄두무게는 여전히 500kg으로 제한하였다.

그런데 새로운 미사일지침이 발표된 바로 그 날, “미국은 새로운 (미사일)지침을 고려하면서 대한민국이 미사일기술통제체제에 즉각 가입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발표하였다. 하지만 가입을 지지한다는 말은 외교적 표현이고, 실제로는 남측이 미국의 요구를 추종하여 미사일기술통제체제에 가입한 것이다. 그런 요구와 추종에 의해서, 2001년에 남측은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 33번째 회원국이 되었다.

미사일기술통제체제는 사거리 300km, 탄두무게 500kg 이상의 탄도미사일 및 관련기술을 제3국에 수출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국제협약으로서, 핵확산금지조약(NPT)과 함께 대량파괴무기 비확산체제의 양대 축이다.

원래 미사일기술통제체제는 사거리 300km, 탄두무게 500kg 이상의 탄도미사일을 생산할 수는 있어도 그런 탄도미사일 및 관련기술을 다른 나라에 수출하지는 못하도록 통제하는 것이었으나, 미국은 1993년부터 미사일기술통제체제 회원국들에게 사거리 300km, 탄두무게 500kg 이상의 탄도미사일을 생산하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물론 미국 자신을 비롯한 영국, 프랑스, 러시아 같은 핵강국들은 미사일기술통제체제 회원국이면서도 그런 규정을 받지 않는 예외에 속한다. 핵강국인 중국은 그 체제에 가입하지 않았다.

2001년 1월 17일 리처드 바우처(Richard Boucher) 당시 미국 국무부 대변인이 국무부 성명으로 발표한 ‘새로운 대한민국 미사일지침(New Republic of Korea Missile Guidelines)’은 “대한민국이 미사일기술통제체제가 규제하는 사거리와 탄두무게를 가진 미사일을 새로운 미사일지침에 따라 보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대한민국이 미사일기술통제체제 규제를 준수함으로써 동북아시아 안보와 세계 비확산 원칙을 동시에 존중하게 되었다”고 명시한 바 있다.

비단 남측만 그런 게 아니라, 미국의 요구에 굴복하여 미사일기술통제체제에 가입한 브라질, 아르헨티나, 남아프리카공화국 같은 미사일 생산국들도 자국의 중거리 탄도미사일 개발사업을 어쩔 수 없이 중도에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2001년부터 남측은 대미관계에서 새로운 미사일지침의 통제를 받는 한 편, 국제관계에서도 미사일기술통제체제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미국이 남측에게 그러한 ‘이중족쇄’를 채운 것은 북미관계의 변화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이었다. 2000년 10월 남측 언론매체들은 미사일지침 개정협상이 타결을 눈 앞에 두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그 보도가 나온 때는 빌 클린턴(William J. Clinton) 당시 미국 대통령의 방북계획이 추진되고 있던 때다. 만일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 직전에 새로운 미사일지침이 발표되었더라면, 당시 추진 중이던 북미 정상회담에 영향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새로운 미사일지침을 만들어놓고서도 발표를 연기한 것이다. 그런데 북미관계 정상화를 반대하는 미국의 수구세력들에게 발목이 잡히는 바람에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계획은 결국 취소되자, 미국은 2001년 1월 17일에 새로운 미사일지침을 발표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정황을 살펴보면, 당시 미국이 북측의 중거리 및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을 중지시키고, 사거리가 300km 이상이 되는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려는 남측의 움직임도 차단하려고 시도하다가, 결국 남측의 미사일 개발사업에 단단한 ‘이중족쇄’를 채웠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미국의 ‘이중족쇄’ 조치는, 미국이 남측의 미사일문제를 남측과의 양자문제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미사일기술통제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국제적인 비확산문제로 생각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지루하게 이어지는 미사일지침 개정협상의 내막

<신동아> 2010년 10월호에 실린 보도기사에 따르면, 이명박 대통령은 2010년 상반기에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에게 미사일지침 개정협상을 준비하라고 지시하였고,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한국국방연구원(KIDA)에게 보고서 작성을 맡겼는데, 한국국방연구원은 2010년 가을에 보고서 작성을 끝냈다고 한다. 그에 따라 미사일지침 개정협상이 이명박 정권의 요청에 따라 2010년 말에 시작되었다. 미사일지침 개정협상은 그 협상을 개시한 때로부터 1년 반을 훌쩍 넘긴 오늘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미사일지침 개정협상은 왜 그처럼 지루하게 장기화된 것일까? 그 동안 간간이 산만하게 보도한 남측 언론보도기사를 간추려보면, 아래와 같은 내막이 드러난다.

첫째, 미사일지침 개정협상에서 미국은 남측이 탄도미사일 사거리를 300km 이상 늘이고 싶으면 탄두무게를 500kg 이하로 줄여야 한다고 하면서 이명박 정권을 계속 압박하고 있다.

그런데 탄도미사일 사거리를 300km 이상으로 늘이면 그에 반비례하여 타격정확도가 떨어지므로, 사거리를 늘이는 것과 함께 탄두무게도 늘여야 탄도미사일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다. 예컨대, 만일 탄도미사일 사거리를 800km 이상 늘이면, 타격정확도는 거의 반감하기 때문에, 사거리를 늘이는 것과 함께 탄두무게도 1,000kg 이상 늘여야 하는 것이다.

2010년 말부터 계속되는 미사일지침 개정협상에서 이명박 정권은 처음에 미국에게 탄도미사일 사거리를 1,000km로 늘이도록 허락해달라고 간청하였다가 미국이 그 간청을 들어주지 않자 나중에는 사거리를 800km로 늘이도록 허락해달라고 한 걸음 물러섰다.

이명박 정권이 탄도미사일 사거리를 800km까지 늘이도록 허락해달라고 미국에게 간청하는 까닭은, 인민군이 전방에 배치한 방사포 공격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한국군 탄도미사일이 인민군 방사포 사거리에서 벗어나려면, 한국군은 비무장지대(DMZ)에서 남쪽으로 150km 떨어진 중부지역에 탄도미사일을 배치해야 한다. 중부지역에서 함경북도 최북단까지 거리가 650km이므로, 한국군이 중부지역에서 북쪽으로 발사하는 탄도미사일 사거리는 800km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군은 이미 사거리 1,000km의 순항미사일을 작전배치하였으면서, 왜 탄도미사일 사거리를 800km로 늘이려는 것일까? 한국군이 작전배치한 순항미사일은 액체연료를 추진제로 쓰는 바람에 발사준비에 1시간씩이나 걸리는 데다가, 발사 뒤에도 시속 800km 정도밖에 되지 않는 매우 느린 속도로 날아가기 때문에 인민군 대공방어망을 뚫지 못하며, 더욱이 무게 450kg 이하의 재래식 탄두밖에 탑재하지 못해서 파괴력이 너무 약하다. 1,000km를 날아간다고 하면서 그렇게 약한 파괴력밖에 갖지 못한 한국군 순항미사일은 군사작전에서 쓸모가 없다.

그처럼 약한 파괴력을 보완하려면, 정밀타격능력이라도 갖춰야 하는데 한국군이 처한 오늘의 현실은 그렇게 녹록한 게 아니다. 사거리 1,000km의 순항미사일이 정밀타격능력을 갖추려면 정치적으로, 기술적으로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를테면, 발사지점부터 타격목표까지 1,000km의 지형을 위성에서 촬영한 3차원 입체영상자료를 바둑판처럼 구획하여 미사일에 내장된 컴퓨터에 입력해야 하는 고도의 기술공정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면, 순항미사일은 미리 입력된 지형을 따라 비행궤도를 수정하면서, 지상으로부터 50-100m 저고도의 수평비행으로 타격목표까지 날아가게 된다.

그런데 지형을 정밀촬영하는 군사정찰위성을 보유하지 못하였다는 데 한국군의 말 못할 고민이 있다. 한국군이 순항미사일을 쏘려면 반드시 북측 지형을 정밀촬영한 위성정찰정보를 미국군으로부터 넘겨받아야 하는 데, 미국군이 그런 고급정보를 한국군에게 넘겨줄 리 없다. 그러므로 한국군이 보유한 사거리 1,000km의 순항미사일은 미국군 허락이 없이는 단 한 발도 쏘지 못하는 것이다.


핵심부품은 미국이 틀어쥐고 있다

2010년 말부터 지루하게 계속되고 있는 미사일지침 개정협상에서, 미국은 사거리를 기존 300km에서 200km만 더 늘여 500km로 제한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명박 정권의 800km 연장간청을 물리쳤으며, 만일 탄도미사일 사거리를 800km로 늘이고 싶다면 그 대신 탄두무게를 500kg 이하로 줄여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 이명박 정권으로서는 사거리를 300km에서 500km로 늘이는 것도 무의미하고, 사거리를 800km 늘이는 대신 탄두무게를 500kg 이하로 줄이는 것도 무의미하다.

그런데도 2012년 3월 12일 <아사히신붕>은 미사일지침 개정협상에서 탄도미사일 사거리를 800km로 늘이는 문제가 거의 합의에 이르렀다고 보도하였고, 2012년 6월 4일에는 <중앙일보>가 탄도미사일 사거리를 연장하려는 남측의 간청을 미국이 받아주어 합의에 이른 것처럼 보도하였다. 그러나 이런 보도는 사거리를 연장하되 500km로 제한해야 한다는 미국의 견해표명을 사거리 연장에 합의한 것으로 오보한 것이다.

왜 이러한 오보가 자꾸 나오는 것일까? 2011년 4월 1일 국제위기그룹(ICR)의 분석가 대니얼 핑크스턴(Daniel Pinkston)이 쓴 글 ‘남코리아의 탄도미사일 사거리(South Korean Ballistic Missile Ranges)’에 따르면, 이명박 정권은 한국군이 강력한 미사일을 개발하여 인민군의 미사일 위협에 대응하고 있는 것처럼 남측 국민들에게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에 그런 헛소문을 간간이 언론에 흘려준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주둔군사령관의 편지 한 장으로 조작된 미사일지침은 협정이 아니므로 사실상 국제법적 구속력을 갖지 못한다. 실제로 미사일지침에는 남측이 그 지침을 준수하지 않겠다고 미국에게 통보하는 경우, 통보시점으로부터 6개월 뒤에 미사일지침이 자동적으로 무효화된다는 조항까지 들어있다. 그런데도 남측이 미사일지침 앞에서 쩔쩔매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까닭은, 모든 종류의 한국군 미사일에 들어가는 핵심부품을 미국이 틀어쥐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남측이 미사일지침을 더 이상 준수하지 못하겠다고 배짱을 부리는 경우, 미국은 남측에 대한 미사일 핵심부품 공급을 끊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작전배치한 한국군 미사일은 핵심부품을 구하지 못해 일정기간이 지난 뒤에 고철로 되어버릴 것이고, 남측의 미사일 생산공장은 가동을 멈출 수밖에 없다. 그러한 사태가 일어나면, 그것은 한국군에게 재앙이다. 그런 재앙을 두려워하는 이명박 정권은 미사일지침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미국이 남측에게 미사일지침을 강요하지 않아 남측이 미사일을 마음대로 개발할 수 있다고 가정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왜냐하면 한국군에게는 작전통제권이 없으므로, 남측이 사거리 800km의 미사일을 만든다고 해도, 그런 미사일을 군사작전에 동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작전통제권이 없는 군대는 미사일 개발권을 가졌어도 소용이 없다. 탄도미사일을 사용할 작전통제권을 갖지 못한 남측이 사거리를 800km로 연장한 탄도미사일을 개발하겠다고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다.

남측과 미국 사이에서 형성된 지배와 예속의 모순관계는 복잡하게 뒤엉켜 있다. 뼛속까지 친미라는 세간의 비난을 받는 이명박 정권으로서는 미사일지침 개정을 미국에게 구걸하는 수밖에 없겠지만, 이 땅의 주권문제를 해결하려면 대미예속의 족쇄를 풀어버려야 할 것이다.(2012년 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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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17

틀린 가설과 좌절된 정책, 어떻게 볼 것인가?

<연재> 한호석의 진보담론 (218)
통일뉴스 2012년 07월 16일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술책을 버리고 정책을 추진한 두 정권

이 땅에 분단정부가 세워진 때로부터 64년을 헤아리는 긴 역사에서 남측 정권이 대북정책을 추진한 시기는 김대중 정권에서 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진 단 10년 동안 뿐이다. 그 밖의 다른 역대 정권들은 예외 없이 반북대결로 일관하였다.

반북대결도 정책적 행위가 아니냐고 되물을 수 있지만, 역대 정권들의 반북대결은 정책적 행위가 아니라 남북관계의 긴장을 이용하여 정권을 유지하려는 정권유지술책이었다. 술책은 어떤 경우에도 정책으로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엄밀히 따지면, 반북대결정책이라는 개념은 성립되지 않으며, 다만 편의상 반북대결정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반북대결을 추구한 남측 역대 정권들은, 한반도 정세가 자기들에게 불리하게 조성되거나 또는 남측 내부에서 사회정치적 모순이 격화되어 정권기반이 통째로 흔들릴수록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반북대결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갔다. 이를테면 박정희 정권의 극렬한 반북대결이나 이명박 정권의 극렬한 반북대결이 그런 경우다.

미중관계가 개선된 것,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이 패퇴한 것, 금 1온스를 미화 35달러로 교환해주고 각국 통화를 달러에 고정시킨 금태환제가 무너진 것, 주한미국군이 대폭 감군된 것 등이 지난날 박정희 정권을 위기에 몰아넣은 요인들이었고, 북측이 핵보유국으로 등장한 것, 2008년에 터져나온 미국발 금융파산사태를 시작으로 세계 자본주의체제가 미증유의 재정파산위기에 빠진 것, 남측 경제가 그에 연동되어 파탄위험에 밀려들어가면서 빈부격차 확대라고 표현되는 사회계급적 모순이 격화된 것 등이 오늘 이명박 정권을 위기에 몰아넣은 요인들이다.

그런데 반북대결에 집착한 정권유지술책을 버리고,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대북정책을 추진한, 분단역사상 처음으로 되는 변화가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 10년 동안에 일어났다. ‘햇볕정책’으로 알려진 김대중 정권의 화해협력정책, 그리고 화해협력정책을 계승한 노무현 정권의 평화번영정책이 그러한 대북정책이었다. 1999년 6월 15일 제1차 서해교전이 일어났고, 2002년 6월 29일 제2차 서해교전이 일어났지만, 화해협력정책과 평화번영정책은 흔들림 없이 추진되었다.

화해협력정책과 평화번영정책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면, 전자가 남북대화에 강조점을 찍었던 것에 비해 후자는 정세안정에 강조점을 찍었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이 정세안정에 강조점을 찍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노무현 정권 시기에 미국의 부쉬 정권이 ‘북한 핵문제’를 걸고들면서 한반도 정세를 위험천만한 긴장상태로 끌어갔기 때문이다.

그런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출범한 노무현 정권은 2005년에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부쉬 정권의 반북대결에 가로막혔다. 북측이 강력한 압박공세로 부쉬 정권의 반북대결책동을 제압하였던, 노무현 정권의 임기 말인 2007년 10월에 가서야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될 수 있었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

대북정책의 의의를 평가하면, 김대중 정권의 화해협력정책은 분단역사상 처음으로 남북관계의 탈적대화를 추진하였고, 노무현 정권의 평화번영정책은 분단역사상 처음으로 미국의 반북대결책동을 따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노무현 정권은 대량파괴무기 확산방지구상(PSI)에서 미국이 꺼내든, 북측과 무력충돌 가능성이 있는 조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남측을 미사일방어체제에 끌어들이려는 미국의 요구를 거부하였으며, ‘급변사태’라고 부르는 내란을 북측에서 유발하여 북측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미국의 ‘작전계획 5029’를 반대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노무현 대통령 자신이 2008년 10월 1일에 열린 ‘10.4 남북정상선언 1주년 기념식’에서 직접 언급한 바 있으며, 주한미국대사관에서 작성되어 본국에 전송된 비밀전문들에서도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화해협력정책과 평화번영정책을 가로막은 ‘보이지 않는 선’

그런데 현실이 말해주는 것처럼, 김대중 정권의 화해협력정책과 노무현 정권의 평화번영정책이 쌓아놓은 성과들은 이명박 정권의 등장으로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화해협력정책과 평화번영정책으로 추진하였던 남북관계개선은 그 이후 어떤 정권이 들어선다 해도 반북대결로 되돌릴 수 없을 것처럼 보였으나, 이명박 정권은 그런 예상을 깨뜨리고 분단역사에서 가장 극렬하게 반북대결을 추구하였다.

화해협력정책과 평화번영정책은 왜 이명박 정권의 반북대결회귀를 저지하지 못하고 좌절하였을까? 이것은 이명박 정권의 반북대결을 극복하고 남북관계개선을 진전시키기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문제이며, 화해협력정책과 평화번영정책의 한계를 인식하는 반성적 물음이다.

경험이 잘 말해주는 것처럼, 화해협력정책과 평화번영정책이 추진한 남북관계개선은 정치대화, 상호교류, 경제협력의 단계까지만 나아갔을 뿐 남북관계개선을 그 단계 이상으로 진전시키지 못하였다. 다시 말해서, 정치대화, 상호교류, 경제협력을 추진하는 길에 넘어설 수 없었던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져 있었던 것이다. ‘보이지 않는 선’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을까?

한 마디로 요약하면, 화해협력정책과 평화번영정책이 넘지 못한 ‘보이지 않는 선’은 전략적 오판의 한계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화해협력정책과 평화번영정책은 반북대결에서 벗어나 북측과 정치대화, 상호교류, 경제협력을 추진하는 적지 않은 성과를 이룩하였지만, 그 정책에 내포된 전략적 오판 때문에 북측이 남북관계개선을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자고 제안하였어도 그에 호응하지 못하고 남북관계개선을 대화, 교류, 협력의 수준에 묶어둘 수밖에 없었고, 정권교체 이후에는 이명박 정권이 대화, 교류, 협력의 성과마저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화해협력정책과 평화번영정책에 내포된 전략적 오판이란 무엇일까? 전략적 오판이란 남북이 정치대화, 상호교류, 경제협력을 일정 기간 동안 추진하면, 북측이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개방’하고 ‘개혁’할 것이라고 예상하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예컨대,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10월 3일 평양에서 진행된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우리는 북측을 개혁, 개방하겠다는 생각이 아닙니다. 중국이나 베트남 예를 봐서도 개혁, 개방이 전 세계의 일반적 추세입니다”고 말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하는 자리여서 그렇게 외교적으로 발언하였지만, 원래 그는 북측이 ‘개방’과 ‘개혁’으로 나아가도록 남측이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2004년 11월 16일 남미 순방길에 노무현 대통령은 수행기자단에게 “북한이 어떻게 개혁하고 시장경제도 받아들이고 그리고 세계를 향해서 개방해서 먹고 살게 도와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우리 한국의 주된 관심”이라고 말했다.

북측의 ‘개방’과 ‘개혁’에 대한 김대중-노무현 정권과 이명박 정권의 차이에 대해 말하면, 전자가 북측이 자발적으로 ‘개방’과 ‘개혁’을 추진하도록 기다리면서 도와주어야 한다고 보았고, 후자는 북측을 강제로 ‘개방’시키고 ‘개혁’시켜야 한다고 보았다는 것이 차이였을 뿐이며, 북측이 ‘개방’과 ‘개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서로 일치된 견해를 갖고 있었다.

남북이 정치대화, 상호교류, 경제협력으로 나아가면 북측이 그에 조응하여 ‘개방’과 ‘개혁’을 추진하게 될 것으로 기대하였던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은, ‘개방과 개혁의 징후’가 북측에서 나타날 때까지 정치대화, 상호교류, 경제협력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고 두 정권의 집권기간 10년 동안 ‘징후’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나 주목하는 것은, 북측의 ‘자발적인 개방과 개혁’에 대한 기대가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대북정책에 들어있는 전략적 오판이었고, 그런 전략적 오판을 내포한 대북정책은 이명박 정권의 반북대결회귀를 저지하기 못하고 좌절하였다는 사실이다.

물론 화해협력정책과 평화번영정책이 정치대화, 상호교류, 경제협력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 원인을 북측의 ‘개방’과 ‘개혁’을 기대한 전략적 오판으로만 국한하여 생각하는 것은 부분적인 이해다. 만일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이 그런 전략적 오판을 하지 않았다 해도, 그 두 정권은 정치대화, 상호교류, 경제협력을 넘어 평화와 통일로 나아가지 못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략적 오판 이외에 또 다른 ‘보이지 않는 선’이 그 두 정권의 대북정책 추진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보이지 않는 선’은 미국이 그어놓은 금지선이다. 미국은 남북관계개선이 자기의 통제를 벗어나 정치대화, 상호교류, 경제협력 이상으로 진척되어 평화와 통일의 국면이 열리는 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전체적 맥락에서 바라보면,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은 전략적 오판이라는 ‘보이지 않는 한계선’만이 아니라 더 심각하게는 미국이 그어놓은 ‘보이지 않는 금지선’ 안에서 제한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글의 길이가 제한되어서, 미국이 그어놓은 ‘보이지 않는 금지선’에 관한 서술은 다른 집필기회로 미룬다.


그들은 왜 가설을 믿게 되었을까?

“일단 개혁과 개방에 발을 들여놓은 북한이 회피하려고 하더라도 체제의 기본적 골격의 개혁에까지 손을 뻗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논리적으로 북한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넘고만 것이다.” 이 인용문은 일본의 ‘북한 문제 전문가’ 스즈키 마사유키(鐸木昌之)가 1992년에 펴낸 책 ‘김정일과 수령제 사회주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서술이다. 그는 그 책에서 북측이 ‘개방’과 ‘개혁’으로 나아가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자기의 가설을 여러 자료를 들먹이며 논증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오늘 북측은 ‘개방’과 ‘개혁’으로 나아가기는커녕 ‘개방’과 ‘개혁’과는 전혀 무관한 선군정치의 길을 가고 있다. 명백하게도, 북측의 선군정치는 ‘개방’과 ‘개혁’에 대한 전면 부정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군정치를 계승한 김정은 제1위원장은 앞으로도 계속하여 북측을 선군정치의 길로 이끌어갈 것이다.

어떤 가설이 20년이 지난 뒤에도 현실로 입증되지 못하였다면, 그 가설은 틀린 것이다. 20년 전에 북측의 ‘개방’과 ‘개혁’이 불가피하다는 가설을 내놓았던 스즈키 마사유키는 20년이 지나도록 자기 가설이 전혀 현실로 입증되지 않은 오류에 대해 무슨 변명을 늘어놓을 수 있을까? 북측에서 ‘개혁과 개방의 징후’가 미약하지만 보이기는 보인다는 식의 억지스러운 변명을 꺼내놓을 수 있을까?

20년 전에 일본인 ‘북한 문제 전문가’만 그러했던 게 아니라, 오늘 이 땅에서 ‘북한 문제 전문가’로 자처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북측의 ‘개방개혁 불가피성’을 믿고 있으며, 그들의 그런 믿음은 북측의 선군정치 현실과 무관하게 수구언론매체를 타고 널리 퍼지며 이 땅의 국민들에게 주입되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북측의 ‘개방개혁 불가피성’에 관한 온갖 잡다한 가설들은 북측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사람들이 아전인수격으로 꾸며낸 낭설이다. ‘북한 개방개혁 가설’이 낭설이라는 점은, 스즈키 마사유키가 그 가설을 자기 책에서 논한 이후 20년 동안 북측에서 펼쳐진 선군정치의 현실이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이 북측의 ‘개방개혁 불가피성’에 관한 ‘북한 문제 전문가’들의 낭설을 믿고 ‘북한 개혁개방’에 대한 기대를 품었고, 그런 기대에 의거하여 화해협력정책과 평화번영정책을 추진하였다는 점이다. 진실을 알지 못하고 낭설을 믿었으니, 화해협력정책과 평화번영정책이 이명박 정권의 반북대결회귀를 저지하지 못하고 좌절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정책수립과정을 들여다보면, ‘북한 문제 전문가’들이 자기들이 만들어낸 ‘북한 개방개혁 가설’을 화해협력정책과 평화번영정책의 이론적 기초로 제공하여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을 전략적 오판에 빠뜨렸음을 알 수 있다. 김대중 정권의 화해협력정책과 노무현 정권의 평화번영정책은, ‘북한 개방개혁 가설’이라는 ‘보이지 않는 선’에 처음부터 발목이 잡혀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물음은, ‘북한 문제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그들이 왜 ‘북한 개방개혁 가설’을 믿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다. ‘북한 문제 전문가’들이 만들어낸 ‘북한 개방개혁 가설’을 파생시킨 이론적 근거를 더듬어 올라가면 이른바 사회주의 필망론에 가닿게 된다. 사회주의 필망론이 ‘북한 개방개혁 가설’을 낳았다고 말할 수 있다.

사회주의에 대한 원인 모를 적대감을 가진 학자들이 주장한 사회주의 필망론이란, 사회주의체제가 내적 모순을 해소하지 못하고 어느 때인가 반드시 ‘개방’과 ‘개혁’으로 대피할 수밖에 없으며, ‘개방’과 ‘개혁’에 의해 사회주의체제가 변질되면 결국 붕괴할 것이라는 논리다. 스즈키 마사유키가 자신의 책 ‘김정일과 수령제 사회주의’를 집필하고 있었을 때, 아닌 게 아니라 동유럽 사회주의체제가 ‘개방’과 ‘개혁’으로 무너졌고, 소련 사회주의체제가 곧바로 그 뒤를 따랐다. 그가 ‘북한 개방개혁 가설’을 논한 그 책의 서문을 1992년 6월 25일에 쓴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가설의 뿌리를 파헤쳐 보면

주목하는 것은, ‘북한 개방개혁 가설’의 뿌리인 사회주의 필망론이 오류에 빠진 허구적 논리라는 점이다. 아래와 같은 논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원래 사회주의 필망론은 파시즘(fascism)을 전체주의(totalitarianism)로 규정한 비판적 인식을 엉뚱하게도 사회주의에까지 연장시킨 술수로 조작된 것이다. 유럽에서 전체주의라는 신조어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20년대에 이탈리아의 자유주의 학자들이 당시 이탈리아에서 베니토 무쏠리니(Benito Mussolini)의 출현과 함께 고개를 들기 시작한 파시즘을 전체주의라는 신종개념으로 설명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렇게 된 것이다. 1930년대에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를 우두머리로 하는 독일 파시즘이 발호하자, 전체주의는 곧 나치즘(Nazism)과 동의어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반공주의에 사로잡힌 학자들이 끼어들어 나치즘과 스탈린주의(Stalinism)을 동일시하는 교묘한 술수를 부리며 반사회주의 악선전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대체로 나치즘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학자들인데, 나치 독일에 대한 적대감을 소련에까지 연장하여 스탈린주의도 배격하였던 것이다. 학자라고 자처하였지만, 그들의 사회주의 이해수준은 무식한 반공주의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다만 그럴 듯한 학술용어를 사용한 것이 무식한 반공주의자들과 달랐을 뿐이다. 그들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나치 독일과 소련은 똑같이 전체주의체제라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전체주의체제의 특징은 국가이념(state ideology)을 인민에게 강제로 주입하여 세뇌하고, 그 규범에서 이탈한 인민을 무자비하게 억압한다는 것이다. 국가이념을 인민에게 주입한다는 점에서, 전체주의는 권위주의(authoritarianism)와 다르다. 권위주의는 인민을 정치적으로 억압할 뿐, 인민에게 국가이념을 주입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런 도식을 그대로 모방한 이 땅의 자유주의 학자들도 북측의 사회주의체제을 전체주의체제라고 부르고, 남측의 반공독재정권을 권위주의정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인간에게 어떤 사상을 강제로 주입하여 세뇌할 수 있다고 말하는 전체주의론자들의 주장은, 비과학적인 인간관에 기초한 오류다. 인간은 어떤 사상을 강제로 주입당하고 세뇌당하는 존재가 아니다. 물론 거짓선전과 거짓선동에 기만당하여 진실과 허위를 가려보지 못하는 우매한 대중들이 있지만, 대중을 기만한 속임수는 한때 기승을 부려도 오래 가지는 못하는 법이다.

인간을 어떤 사상을 강제로 주입당하고 세뇌당하는 존재라고 보는 비과학적인 인간관은, 현생 인류의 진보와 발전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오류에 빠진 것이다. 만일 그런 비과학적인 인간관에 따른다면, 오늘 인류는 고대 노예제 사회의 국가이념 또는 중세 봉건제 사회의 국가이념을 주입받고 여전히 세뇌된 채 살고 있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인류의 진보와 발전은 강제로 주입당하고 세뇌당한 낡은 사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상을 추구해온 사상의 진보와 발전, 바로 그것이었다.

전체주의론자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소련공산당이 소련의 국가이념인 맑스-레닌주의를 소련 인민에게 주입하여 세뇌하였기 때문에 소련이 결국 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련공산당은 맑스-레닌주의로 소련 인민을 교양하는 사상교양사업을 사실상 거의 시행하지 않은 까닭에 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과학적이고 올바른 역사인식이다. 이에 관해서는 바만 아자드(Bahman Azad)가 2000년에 쓴 책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Heroic Struggle Bitter Defeat)’가 실증적으로 설명해주었다.

만일 소련공산당이 맑스-레닌주의로 소련 인민을 교양하는 사상교양사업에 부단히 노력을 기울였더라면, 미하일 고르바쵸프(Mikhail Gorbachev)가 맑스-레닌주의를 폐기하기 위해 조작한 이른바 ‘신사고(New Thinking)’을 비판하고 거부하는 대중운동이 소련에서 일어났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고르바쵸브-옐친 집권기에 소련에서 ‘신사고’에 대한 당원대중과 인민들의 반대운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소련식 사회주의체제에서 인민에게 사회주의국가이념이 강제로 주입되었다는 전체주의론자들의 주장이 현실과 정반대 되는 낭설에 지나지 않은 것임을 말해준다.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가 말해주는 명백한 사실은, 소련식 사회주의체제가 사회주의국가이념을 인민에게 주입한 전체주의체제였기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소련식 사회주의체제가 당원대중과 인민을 맑스-레닌주의로 교양하지 못한 사상적 허약성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개방’과 ‘개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결국 망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체제가 소련식 사회주의체제처럼 ‘개방’과 ‘개혁’으로 무너지느냐 아니면 자체의 발전동력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발전하느냐 하는 문제는, 그 체제에서 사회주의사상교양사업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느냐 하는 기준에 의해 판별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소련 및 동유럽의 소련식 사회주의와 북측의 조선식 사회주의가 매우 큰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화인민당은 케말리즘 사상교양을 모른다


소련식 사회주의와 다른 북측의 조선식 사회주의는, 북측 표현을 빌리면 ‘주체의 사회주의’다. ‘주체의 사회주의’라는 말을 들을 때, 북측에서 주체라는 말이 널리 쓰이니까 그런 표현이 생겨났을 것으로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은 좀 오해가 섞인 생각이다. ‘주체의 사회주의’라는 개념에서 주체는 수령과 인민대중이 상호결합된 관계를 뜻한다. 그러므로 북측이 말하는 ‘주체의 사회주의’는 수령과 인민대중의 상호결합관계 위에 성립한 사회주의라는 뜻이다.

북측의 사회주의체제는 수령과 인민대중의 관계를 무엇보다 중시한다는 점에서 소련식 사회주의체제와는 완전히 다르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처럼, 북측은 건국 이래 지금까지 수령과 인민대중을 일체화된 관계로 상호결합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힘써오고 있다. 북측에서 수령과 인민대중의 상호결합관계는, 북측 표현을 빌리면, “사상의지적 통일과 도덕의리적 단합으로” 일체화된 관계다.

그런데 북측에서 살아보기는커녕 북측에 가보지도 못한 사람들은 수령과 인민대중이 어떻게 일체화된 관계로 상호결합한다는 말인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어느 사회에서 오래 살았다고 해서 그 사회를 잘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예컨대 미국에서 태어나 살다가 죽는 미국인들이 미국 사회를 잘 안다고 말할 수 없으며, 미국 사회에 대한 사회과학적 안목이 있어야 미국 사회를 정확히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미국에서 살아보지 못했고 미국에 가보지도 못했어도 미국 사회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사회과학적 안목을 가진 사람은 그러하지 못한 미국인들보다 미국 사회를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대북인식에서도 똑같은 논리가 성립한다.

북측을 인식하는 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회과학적 안목이란 북측 사회의 본질적 측면을 파악하는 인식능력을 말한다. 설령 그런 안목이 없더라도, 북측이 소련식 사회주의체제와 다르게 수령과 인민대중의 관계를 절대적으로 중시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 반북대결론자들은 북측에서 절대적으로 중시하는 수령과 인민대중의 관계를 ‘개인 우상화’라고 비방한다. 그러나 대통령이 개인이 아닌 것처럼 수령도 개인이 아니며, 이 땅의 청소년들이 인기 연예인에게 열광하는 것을 우상화라고 비난할 수 없는 것처럼, 북측 인민들이 자기 지도자를 열렬히 사랑하는 것을 우상화라고 비난할 수 없다. 북측과 터키의 현실을 비교하면, ‘개인 우상화’라는 비방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오토만제국이 무너지자 터키를 점령한 제국주의연합세력을 물리치고 1923년 10월 29일에 터키공화국을 창건하였고 1938년에 서거할 때까지 터키공화국 제1대 대통령을 지낸 터키의 민족적 영웅이 무스타파 케말 파샤(Mustafa Kemal Pasha, 1881-1938)다.

그에 대한 터키 국민들의 사랑과 숭배심은 그가 서거한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뜨겁다. 이를테면, 터키의 모든 공공건물, 학교교실, 그리고 일반 가정집에 그의 초상화가 정중히 모셔져 있으며, 그가 74년 전에 운명한 바로 그 시각인 11월 10일 오전 9시 5분에는 해마다 터키 전국에서 모든 차량들이 기동을 멈추고 1분 동안 그를 추모한다. 서거 후 74년이 지난 오늘에도 터키 국민들의 사랑과 숭배심이 그토록 뜨겁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런 터키인들은 최고영도자에 대한 북측 인민들의 사랑과 숭배심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 없이 잘 이해할 것이다.

그런데 남측 국민들은 터키 국민들이 케말 파샤를 받드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북측 인민들이 최고영도자를 받드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느낀다. 동일한 현상을 보면서도 왜 그런 차별적 감정반응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러한 차별적 감정반응은, 북측 인민들이 최고영도자를 받드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반북대결선전의 산물이라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다.

물론 북측과 터키의 역사와 현실은 똑같지 않다. 터키 국민들이 무스타파 케말 파샤를 받드는 것은, 우리 선조들이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이순신을 위해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며 받들었던 것처럼, 민족적 영웅을 받드는 영웅숭배인데 비해, 북측 인민들이 북측의 최고영도자를 받드는 것은 ‘인민의 수령’을 받드는 수령숭배다. 영웅과 수령은 지위와 역할이 서로 다르다.
북측의 수령숭배가 터키의 영웅숭배와 다른 차이점은, 수령과 인민대중의 결합관계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이를테면, 케말 파샤는 대통령으로 재직 중에 터키 국민들과 자신을 일체화시키는 정치활동을 하지 않았으며, 그가 1919년에 창건한 공화인민당은 터키 국민을 케말리즘(Kemalism)으로 교양하지 않았다.

케말리즘은 여러 통치이념들 중 하나일 뿐 세계관적 기초를 가진 사상체계가 아니며, 케말리즘을 기치로 든 공화인민당은 지금 집권당도 아니고 제1야당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케말 파샤를 받드는 터키 국민의 영웅숭배가 국가적 전통으로 정착된 것이지, 오랜 기간에 걸친 당의 사상교양사업을 통해 실현된 사회체제가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 국가적 전통과 사회체제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누가 누구를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함께 가는 것이다

터키의 공화인민당과 달리, 북측의 사회주의집권당인 조선로동당은 수령과 인민대중의 상호관계를 일체화시키기 위한 사상교양사업에 당적 역량을 총집중한다. 사상교양사업을 추진하려면 당연히 인민대중을 교양할 사상이 정립되어야 한다. 북측의 사상사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1974년 2월 19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주체사상을 김일성주의로 정식화하고 온 사회의 김일성주의화를 당의 최고 강령으로 제시하였고, 2012년 4월 6일 김정은 제1위원장은 주체사상을 김일성-김정일주의로 정식화하고 온 사회의 김일성-김정일주의화를 당의 최고 강령으로 제시하였다.

사회주의정치제도의 특성상, 당의 최고 강령은 무조건, 최우선적으로 수행해야 할 가장 중대한 임무이므로, 북측에서 온 사회를 김일성-김정일주의화하기 위한 사상교양사업이 얼마나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는지는 북측에 가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북측에서 당이 추진하는 사상교양사업은 인민대중의 머리 속에서만 이루어는 지적 활동이 아니라 인민대중의 생산현장과 생활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체험적 활동이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한평생 끊임없이 계속한 현지지도는 인민대중의 생산현장과 생활현장을 돌아보며 그들과 소통하는 현장정치활동만이 아니었고, 끝없이 이어지는 만남을 통해 인민들이 수령과 자기들이 ‘혼연일체’임을 직접 체험하는 사상교양의 정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 김정은 제1위원장은 바로 그 정수를 계승하여 인민대중의 생산현장과 생활현장을 찾아가는 현지지도의 길을 이어가고 있다.

북측 시각에서 보면, 최고영도자가 인민대중과의 일체화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현지지도를 계속하고, 집권당의 최고 강령으로 김일성-김정일주의가 정립되어 있고, 집권당의 사상교양사업을 1970년대부터 장장 40년 이상 추진해온 풍부한 경험과 성과가 있고, 인민대중의 사회적 관계와 사회적 활동 전반이 김일성-김정일주의를 실현해나가는 방향으로 조직되어 있기 때문에, 북측에서는 ‘개방’과 ‘개혁’을 생각할 필요도 없고 그런 말 자체를 꺼낼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하는 남측에서 북측의 ‘개방’과 ‘개혁’을 거론할 때마다 북측이 강한 거부감을 보이는 까닭을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야 이해하였던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10월 4일 평양에서 개성을 거쳐 서울로 돌아오던 길에 이런 말을 남겼다. “개혁개방은 좋은 것이고, 개성공단이 잘 되면 북쪽의 개혁개방을 유도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저도 좋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북에서는 개성공단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며 못마땅하다고 했다. 개성공간이 잘 되면 북쪽의 개혁개방을 유도하게 될 것이라는 말은 조심성 없는 말이었다. 우리 정부라도 그런 말 쓰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개성공단은 함께 가는 자리지 누가 누구를 변화시키는 게 아니다.”

위에서 논한 내용을 종합하면, 사회주의 필망론은 오류이고, 거기에서 파생된 ‘북한 개방개혁 가설’도 오류이며, 그처럼 잘못된 가설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화해협력정책과 평화번영정책도 남북관계개선을 정치대화, 상호교류, 경제협력 이상으로 진척시키지 못하였고, 이명박 정권의 반북대결로 좌절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남북관계개선을 정치대화, 상호교류, 경제협력 이상으로 진척시켜 평화와 통일을 실현하는 길로 나아가려면, ‘북한 개방개혁 가설’을 폐기하여야 하며 화해협력정책과 평화번영정책의 한계를 넘어선 새롭고 진정성 있는 대북정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그러한 정책수립의 임무는 2013년 2월에 출범할 새로운 정권에게 주어질 것이다. 올해 12월에 실시될 대선에서 이명박 정권의 반북대결을 계승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승리해서는 안 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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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14

유행어로 전락한 경제민주화를 넘어 어디로 가야 하나?

변혁과 진보 (84)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경제민주화라는 유행어가 나돌고 있다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는 경제민주화라는 유행어가 나돌고 있다. 원래 경제민주화라는 말은 이전 시기 민주노동당에서 처음으로 썼고, 통합진보당은 2012년 5월 10일에 채택한 강령에서 경제민주화라는 개념을 계승적으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3년 전부터 민주통합당이 경제민주화라는 말을 차용하더니, 이제는 어이 없게도 새누리당마저 그 말을 따라 쓰고 있다. 이를테면 수구우파 대권주자 박근혜는 2012년 7월 10일 대선출마선언에서 "공정하고 투명한 시장경제질서를 확립해 경제민주화를 실현하겠다"고 말했다. 이 땅의 근로대중을 배반하고 국제독점자본과 국내재벌에 붙어돌아가면서 진보적 민주주의의 길을 가로막는 새누리당 대권주자인 주제에 그 무슨 '경제민주화'를 들고 나온 것은 그야말로 파렴치한 대국민 사기극이 아닐 수 없다.

주목하는 것은, 새누리당 대권주자의 파렴치한 사기극에서 통합진보당을 향해 '위험신호'가 발신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진보정당이 근로대중과 소통하는 고유한 강령적 개념어를 수구우파정당이 슬그머니 먹어버리는 언어잠식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위험신호'가 발신되고 있다는 말이다.

진보정당이 자기의 진보적 언어를 정적에게 잠식당하면, 그 언어로 서술된 정치강령이 잠식당하게 되고, 정치강령을 정적에게 잠식당하면 결국 진보정치의 손발이 묶이게 되기 때문에, 새누리당 대권주자의 파렴치한 언어잠식은 통합진보당이 그냥 무심히 지나쳐버릴 일이 아니다.

물론 그러한 언어잠식현상을 다른 각도에서도 설명할 수 있다. 이 땅의 근로대중을 배반하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새누리당이 느닷없이 경제민주화라는 진보적 언어를 마치 자기들 언어인 것처럼 쓰기 시작한 것은, 이제껏 그들이 쓰기를 기피해온 진보적 언어를 쓸 수밖에 없을 만큼, 오늘 이 땅의 사회경제적 현실이 전면파국에 다가섰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면적 경제파국의 위기가 수구우파정당에게 언어잠식과 유행어 쓰기를 강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지난 시기 민주노동당이 자기의 경제강령으로 삼았고, 그것을 계승하여 통합진보당이 근로대중과 소통하는 경제민주화 강령이, 몇 해 전부터 민주통합당에게 차용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새누리당 대권주자도 쓰기 시작한 마당에, 통합진보당이 다른 정당들과 똑같이 그 유행어를 써서 자기의 경제강령을 서술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통합진보당에 결집한 진보정치활동가들은 경제민주화 강령에 담긴 진보적 의미를 끄집어내어 재해석하고 새로운 언어로 근로대중과 소통할 필요가 있다.


통합진보당의 경제민주화 강령에 담긴 비현실적인 발상

통합진보당의 경제민주화 강령은 "재벌의 소유 경영의 독점해소 등을 통해 독점재벌 중심 경제체제를 해체하고, 불공정 하도급 거래 관행 근절, 대형 유통점 규제 등을 통해 중소기업 및 영세자영업자를 보호육성함으로써, 경제의 민주화를 실현하고 내수 중소기업 주도형 경제체제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이 강령을 읽으면, 경제민주화 강령이 재벌해체라는 뜻으로 규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땅의 재벌기업들은 사회경제활동을 좌우하는 주요산업부문을 독점하고 있는 거대전략기업들인데, 통합진보당 경제민주화 강령은 그런 거대전략기업들을 해체해버리겠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경제민주화는 거대전략기업을 해체하여 중소기업화하자는 것이 아니다. 거대전략기업 자체가 반민주적인 것이 아니라, 거대전략기업을 극소수 대자본가들이 장악해버린 기업소유구조가 반민주적인 것이다.

예를 들면, 대표적인 거대전략기업이 주도하는 반도체, 자동차, 선박, 통신, 금융, 에너지, 철강, 화학 등 주요산업부문은 중소기업활동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자본과 기술과 노동력이 고도로 집약화, 집중화되는 주요산업부문에 거대전략기업이 출현하는 것은 산업의 현대화 발전경로에서 불가피한 일이다. 중소기업은 주요산업부문의 자본, 기술, 노동력의 집약화, 집중화를 실현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러한 경제현실을 무시하고 거대전략기업을 해체하여 중소기업으로 쪼개놓으려 한다면, 그것은 주요산업을 분절화, 왜소화하려는 비현실적인 발상이다. 만일 거대전략기업을 해체해버리면 거기에 연관된 중소기업들까지 연쇄도산으로 망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맥락을 생각하면, 통합진보당의 경제민주화 강령을 재벌해체라는 개념으로 서술할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통합진보당의 경제민주화 강령을 새롭게, 정확하게 서술하는 것이 바로 주요산업 민주화(democratization of major industry)라는 새로운 개념이다.


주요산업 민주화란 무슨 뜻일까?

주요산업 민주화라는 개념은 주요산업의 생산관계를 민주화한다는 뜻이다. 지금 이 땅에서 주요산업의 생산관계는 이른바 '재벌총수'라고 부르는 몇몇 대자본가들이 반민주적으로 지배하고 있지만, 원래 사회적 생산관계는 탐욕스러운 극소수 자본가들이 아니라 생산의 영원한 주체인 근로대중 자신이 민주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사회적 생산관계를 민주적으로 관리하려면, 근로대중이 사회적으로 사용하는 생산수단을 몇몇 자본가들이 사적으로 소유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며, 국가가 사회적으로 소유해야 한다. 또한 사회적 생산관계를 민주적으로 관리하려면, 근로대중이 사회적 가치를 창조하는 생산활동을 몇몇 자본가들이 장악, 지배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며, 생산활동의 주역인 근로대중이 민주적으로 경영하여야 한다.

다시 말해서, 생산관계의 민주화란 생산수단의 국가적 소유와 생산활동의 민주적 경영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말하는 주요산업 민주화란, 한 마디로 말해서, 주요산업부문 생산수단을 국가가 사회적으로 소유하고, 주요산업부문 생산활동을 근로대중이 민주적으로 경영하는 것이다.

통합진보당의 경제강령에는 "물, 전력, 가스, 교육, 통신, 금융 등 국가기간산업 및 사회서비스의 민영화 추진을 중단하고, 국공유화 등 사회적 개입을 강화해 생산수단의 소유구조를 다원화하며 공공성을 강화한다. 또한 공공부문은 경영 민주화, 투명화를 통해 공공기관의 대국민 서비스를 강화한다"고 서술한 대목이 들어있다.

이 문장에서는 주요산업을 '국가기간산업'이라고 표현하였고, 주요산업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국가기간산업 생산수단의 소유구조의 다원화'라고 표현하였고, 주요산업부문 생산활동의 민주적 경영을 '공공부문의 경영 민주화'라고 표현하였다.

위의 경제강령은 진보적 민주주의의 경제강령을 이처럼 다소 모호하게 표현하였으나, 그 기본내용은 주요산업부문 생산수단의 국유화 및 주요산업부문 생산활동의 민주화라는 진보적 민주주의의 경제강령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통합진보당은 유행어로 전락한 경제민주화라는 말로 자기의 진보적 경제강령을 서술할 것이 아니라, 주요산업 민주화라는 새로운 용어로 서술하고, 그 새로운 개념어의 의미를 주요산업부문에서 생산수단을 국유화하고 생산활동을 민주화한다는 뜻으로 규정할 필요가 있다.

 
이전에 주요산업 국유화라는 말로 서술해온 진보적 민주주의의 경제강령은, 주요산업부문 생산수단을 국가적 소유로 전환한다는 의미만 전달할 수 있었고, 국유화된 주요산업부문의 생산활동을 근로대중이 민주적으로 경영한다는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주요산업 민주화라는 더 정확하고, 포괄적인 개념을 정립해야 할 것이다.

지난 시기 민주당은 경제민주화의 의미를 "공정경쟁, 참여경제, 분배정의"라고 밝혔다. 최근에 민주통합당으로 개칭한 뒤로는 거기에 "재벌개혁"을 추가하였다. 이해찬 민주통합당 대표의 최근 발언에 따르면, 경제민주화란 "재벌특권경제를 민생중심경제로 전환하고 재벌개혁을 추진"하는 것이다. 자기의 경제강령을 근로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통합진보당이 재벌해체라는 말을 선택하였다면, 민주통합당은 재벌개혁이라는 말을 선택한 것이다.

이 땅의 근로대중에게는 재벌해체나 재벌개혁이나 똑같은 말로 들릴 것이다. 이것은 통합진보당과 민주통합당의 전략적 차별성이 근로대중의 시야에서 흐릿해졌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통합진보당이 민주통합당에 대한 전략적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도 경제민주화 강령을 주요산업 민주화 강령으로 대체할 필요가 있다.


헌법 제119조 개정을 향하여

주요산업부문 생산수단을 사적 소유에서 국가적 소유로 전환하여 거대전략기업의 소유권을 국가에 귀속시키려면, 경제민주화 조항으로 알려진 현행 헌법 제119조를 진보적 민주주의의 요구에 맞게 개정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주요산업부문 생산활동에서 근로대중의 민주적 경영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현행 헌법 제119조를 진보적 민주주의의 요구에 맞게 개정해야 한다.

주요산업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한 개헌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진보정치세력과 그것을 가로막으려는 수구정치세력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정치투쟁에서 진보정치세력이 승리하는 것을 전제로 삼는 거대한 정치적 변화다. 진보적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진보정치세력이 수구정치세력을 꺾고 승리하지 못하면, 주요산업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한 개헌은 불가능하다.

주요산업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한 개헌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질 치열한 정치투쟁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진보정치세력이 승리하는 것은 말처럼 간단하고 쉬운 일이 아니다.

첫째, 이번에 통합진보당 사태에서 뚜렷이 드러난 것처럼, 지금으로서는 통합진보당이 수구정치세력에 맞서 치열한 정치투쟁을 벌일 만한 능력과 조건을 아직 갖추지 못하였다. 통합진보당에 결합한 사민주의자들이나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주요산업 민주화를 당의 경제강령으로 채택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므로 통합진보당의 최대 정파인 자주파는 진보적 민주주의 경제강령에 대한 태도와 입장을 명확하게 정리하고 서로 단합하여 주요산업 민주화를 당의 새로운 경제강령으로 채택하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당 지도부 개편과정에서 사민주의자나 진보적 자유주의자가 당의 지도부를 장악해서는 안 되며, 진보적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자주파가 사민주의자들과 진보적 자유주의자들과 함께 하고 그들을 끌어가는 융합형 지도체제로 개편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통합진보당의 자주파 정치활동가들은 이미 새누리당의 언어잠식에 의해 경제민주화라는 말이 유행어로 전락하였음을 지적하고, 그것을 대체할 주요산업 민주화라는 새로운 개념을 당원대중에게 제시하여 당 내부에서 그 새로운 개념을 당원대중들이 공유할 각종 토론기회를 이끌어낼 필요가 있다.

셋째, 가짜 경제민주화 강령을 들고 나와 근로대중을 기만하는 새누리당 대권주자의 대선승리를 저지하기 위한 통합진보당과 민주통합당의 강력한 야권연대를 실현할 필요가 있다. 다행하게도, 2012년 12월 대선에서 야권연대세력이 승리하여 2013년 2월에 정권을 교체하면, 재벌특권경제를 민생중심경제로 전환하고 재벌개혁을 추진하는 선에서 경제민주화가 실현될 것이다. 2013년부터 5년 동안 집권할 정권이 재벌개혁을 추진하는 선에서 경제민주화를 실현하는 것은, 진보적 민주주의의 경제강령인 주요산업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준비라고 말할 수 있다.

넷째, 진보적 민주주의의 경제강령인 주요산업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한 개헌은, 재벌개혁을 추진하는 선에서 경제민주화를 실현하게 될 5년 동안의 정치적 준비 이후에 추진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헌법 제119조를 진보적 민주주의의 요구에 맞게 개정하려는 진보정치세력과 그 개정을 저지하려는 수구정치세력의 치열한 정치투쟁이 벌어질 것이다. 그 싸움에서 반드시 이기기 위해, 진보정치세력은 자기의 힘을 꾸준히 길러야 한다.

진보적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정치활동가들이 예상할 수 있는 변혁과 진보의 발전경로를 정리하면, 통합진보당 지도부 개편→야권연대 대선승리→재벌개혁 추진→헌법 제119조 개정투쟁→자주적 진보정권 등장→개헌을 통한 새로운 민주공화국 수립→진보적 민주주의와 자주적 평화통일 실현으로 이어지는, 실로 위대하고 장엄한 사회역사발전의 미래가 시야에 들어온다.

바로 그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험하고 먼 투쟁의 길에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가 자주파 동지들의 눈부신 희망으로, 불꽃 같은 정열로 타오르고 있다. (2012년 7월 13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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