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1/25

생의 마지막 순간, 눈동자에 비친 여명

변혁과 진보 (56)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그는 혁명가였다

세계를 미국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친미언론매체들이 무시해버리는 바람에 이 땅의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지만, 오늘 적지 않은 나라들에서 미국과 친미예속정권에 맞선 좌파무장조직들의 전투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 미국은 좌파무장조직을 ‘테러조직’으로 낙인찍고 파괴하려고 하지만, 그들은 국제법상 교전단체(belligerent body)이지 ‘테러조직’이 아니다.

1949년부터 1963년까지 14년 동안 지리산, 태백산, 오대산, 한라산 등지에서 투쟁하였던 이 땅의 빨찌산에 대한 대중들의 기억은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에 머물러 있지만,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오늘도 좌파무장조직들이 전투를 벌이고 있다.

좌파무장조직이 전투를 벌이고 있는 아시아 나라들 가운데서 필리핀과 인도가 첫 손에 꼽힌다. 필리핀의 좌파무장조직 신인민군(New People's Army)은 1969년에 창설되었고, 인도의 좌파무장조직 낙쌀라이트(Naxalite)는 1967년부터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다.

이 땅에서 바라보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남미대륙의 콜롬비아도 그런 무장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제3세계 나라들 가운데 하나다. 남미대륙 서북단에 있는 콜롬비아는 인구가 이 땅의 인구 4,875만 명보다 조금 적은 4,472만 명이고, 국토면적은 이 땅의 넓이 99,720㎢보다 조금 넓은 1,138,910㎢인 나라다.

그런데 2011년 11월 5일 미국 주요언론들은 콜롬비아에서 두 눈을 감지 못하고 숨진 알폰소 카노(Alfonso Cano)의 마지막 사진을 보도하였다. 카노는 누구일까?

1948년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카노는 스무 살 되던 1968년에 콜롬비아국립대학 인류학과에 입학하였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이 땅의 의식 있는 대학생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모순과 궁핍으로 가득 찬 낡은 세상을 뒤집어엎고 새로운 세상을 세우는 꿈을 꾸어오던 카노도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70년대 후반 어느 날, 그의 운명을 완전히 뒤바꿔놓은 커다란 전환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그가 콜롬비아혁명무력(FARC)에 가입한 것이다. 만일 콜롬비아에 친미예속정권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인류학자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미국과 친미예속정권의 억압과 착취에 짓밟힌 콜롬비아의 현실은 한때 인류학자를 꿈꾸었던 청년 카노를 혁명의 길로 불러냈다.

콜롬비아혁명무력에 가입한 그는 보고타 지하조직을 지도하는 정치위원으로 투쟁하던 중, 1981년 어느 날 그의 아파트를 급습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당시에는 아직 밀림의 무장투쟁에 참가하지 않고 도시의 지하투쟁만 하다가 체포되었던 까닭에, 카노는 1983년의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밀림으로 떠난 카노, 도시에 당을 건설하다

출옥한 카노는 어느 날 자기 아내 마리아 유지니아와 어린 아들 페데리코와 영영 헤어지는 눈물의 작별인사를 나누고, 밀림으로 떠났다. 콜롬비아혁명무력이 열대밀림 속에서 벌이는 무장투쟁에 참가하여 총을 잡은 것이다.

대학교육을 받을 기회마저 박탈당한 대원들이 대다수였던 콜롬비아혁명무력에 카노와 같은 대학생 출신 지식인이 입대한 것은 크게 반길 일이었다. 입대 후 그는 콜롬비아혁명군의 사상이론부문과 대외정치협상부문을 담당한 지휘관으로 성장하였다.
 
콜롬비아혁명무력 대원들과 함께 있는 알폰소 카노

그런데 그가 무장투쟁에 나선 때로부터 6년 뒤, 사회주의진영이 맥없이 무너지는 세계사적 대격변이 일어났다. 1990년대 초 이 땅의 운동권이 사회주의진영의 붕괴로 충격과 혼란을 겪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콜롬비아혁명무력도 커다란 사상정신적 충격을 피할 수 없었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카노는 소비에트형 사회주의가 실패하였음을 인정하고, 콜롬비아의 현실에 맞는 남미식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한다고 설파하였고, 스페인 제국주의의 남미대륙 식민통치를 뒤엎고 자주적 민주공화국을 건설한 민족영웅 시몬 볼리바르(Simon Bolivar, 1783-1830)가 제창하였던 자주적 발전의 길을 모색하였다.

카노가 자주적 혁명사상에 눈을 뜬 것은 콜롬비아혁명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적 의의를 지닌다. 불시에 달려드는 ‘토벌대’에 맞서 피어린 전투를 수없이 벌이며 생사경계를 오가는 밀림에서 그가 자주적 혁명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기는 힘들었지만, 볼리바르주의(Bolivarianism)에 기초한 남미식 사회주의는 훗날 베네주엘라의 우고 챠베스 대통령이 1999년에 베네주엘라 헌법으로 제시하기 전에 이미 콜롬비아 열대밀림 속에서 카노에 의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회주의진영이 무너진 뒤에도 좌절을 모른 카노는 10여 년 동안 사상정치사업을 꾸준히 밀고나가 마침내 새로운 유형의 혁명정당을 건설하였으니, 그것이 콜롬비아혁명무력의 정치조직으로 2000년에 창당된 콜롬비아혁명당이다.

알폰소 카노는 볼리바르주의에 기초한 남미식 사회주의를 지도이념으로 제시한 콜롬비아혁명당의 창건자이자 당대표였다. 콜롬비아혁명당을 창당한 직후, 그는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가 콜롬비아에 파견한 미국인 기자와 비밀장소에서 만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담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는 콜롬비아정부가 이 나라의 발전에 참여할 기회를 인민들에게 주지 않기 때문에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투쟁하는 이유다.”

2008년 3월 26일 당시 콜롬비아혁명무력 최고사령관이었던 마누엘 마룰란다 벨레즈(Manuel Marulanda Velez, 1930-2008)가 밀영에서 심장마비로 78세에 별세하였다. 그는 농민 출신 무장대원 48명을 이끌고 1964년 5월 27일에 콜롬비아혁명무력을 창설한 1세대 혁명가다. 무려 47년 동안이나 무장투쟁을 계속해오고 있으니, 혁명1세대의 뒤를 이은 아들과 딸들이 총을 잡았고, 지금은 손자와 손녀들이 그 뒤를 이어 총을 잡았다.

△콜롬비아혁명무력의 청년 대원들 

마누엘 마룰란다가 별세한 직후, 미국과 콜롬비아정부는 콜롬비아혁명무력이 곧 와해될 것처럼 떠들었지만, 그의 뒤를 이어 최고사령관직을 맡은 사람이 알폰소 카노다. 그는 콜롬비아혁명당의 대표이며 콜롬비아혁명무력 최고사령관이었다.

△ 콜롬비아혁명무력 지도부. 앞줄 왼쪽에 안경을 쓰고 구레나누를 한 인물이 알폰소 카노이다. 
앞줄 오른쪽에  어깨에 노란천을 올려놓은 인물이 마누엘 마룰란다 전 최고사령관이다.
대원들이 차고 있는 노랑,  파랑, 빨강색 바탕의 완장은 콜롬비아혁명무력을 상징하는 표식이다.
 
카노는 두껍고 큰 안경알이 들어있는 검은 색 뿔테 안경을 썼고, 여느 60대 남성들이 그러한 것처럼 희끗희끗해진 구레나룻을 길러 지식인 인상을 풍기는 혁명가였다. 그런데 미국 언론에 보도된 그의 마지막 사진을 보면, 그는 구레나룻을 말끔히 면도한 모습이었다. 비합법정당인 콜롬비아혁명당을 지도하기 위해 밀림에서 도시로 나갈 때, 군경의 살벌한 검거망을 피하기 위해 면도를 하였다고 한다.


콜롬비아혁명을 가로막는 주범

이 땅의 진보정치활동가들이 잘 아는 사실이지만, 미국의 정치적 지배와 군사적 개입은 제3세계의 변혁과 진보를 가로막는 여러 요인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변혁과 진보를 가로막는 최대의 결정적인 요인이다. 이러한 사정은 콜롬비아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콜롬비아혁명무장을 진압하려는 불법적이고 야만적인 술책을 썼다.

미국 군부가 콜롬비아에서 혁명세력을 압살하기 위해 극우민병대를 창설한 때는 1962년이었다. 미국은 이른바 ‘라조계획(Plan Lazo)’에 따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포트 브랙(Fort Bragg)에 주둔하는 미국군 특수전부대를 콜롬비아에 밀파하여 콜롬비아군이 극우민병대를 창설하도록 배후에서 조종하였다.

미국 군부의 배후조종으로 창설된 극우민병대는 부패한 콜롬비아군부와 공모결탁하여 양민학살과 마약수출 같은 극악무도한 범죄를 자행하였다. 얼마나 많은 콜롬비아 민중들이 극우민병대에게 학살당했는지 알 수 없으며, 얼마나 많은 콜롬비아산 마약이 해외로 밀수출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도 미국은 그런 콜롬비아정부에게 2000년 이후 2009년까지 60억 달러를 원조하면서 콜롬비아군을 ‘토벌군’으로 육성하였다. 미국의 무기지원을 받은 콜롬비아군은 2002년부터 콜롬비아혁명무력에 대한 집요한 ‘토벌작전’에 매달렸다.

이 글을 쓰는 오늘도, 미국의 국방부, 국방정보국, 중앙정보국, 마약단속청이 콜롬비아에 밀파한 약 300명의 지휘관들이 배후조종하는 콜롬비아의 군부, 정보기관, 경찰, 그리고 현지에서 날뛰는 미국의 사설무장경비업체들은 반미반정부무장투쟁을 지원하는 민중들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은 미국은 자국군대를 동원하여 콜롬비아혁명무력을 진압하려는 직접개입전략에 따라 2009년 10월 30일 콜롬비아 각지의 군사기지들을 미국군이 언제나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미국-콜롬비아 군사협정을 체결하였다.

미국의 그러한 막가파식 무력진압으로 콜롬비아혁명무력은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콜롬비아정부의 추산에 따르면, 2002년 16,000명에 이르렀던 콜롬비아혁명무력이 2011년에 8,000명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특히 미국이 ‘토벌군’에게 넘겨준 블랙호크 공격헬기와 야간투시경은, ‘토벌군’이 밀림에서 벌이는 야간작전에 결정적으로 유리한 작전환경을 조성하였다. 콜롬비아혁명무력 대원들은 공격헬기를 동원한 ‘토벌군’의 야간공습을 격퇴할 대응무기를 갖지 못했다. 7.62mm 기관총, 12.7mm 속사포, 30mm 자동속사포, 70mm 로켓포, 그리고 레이저유도미사일까지 장착하고 시속 278km로 고속비행하는 블랙호크 공격헬기를 소총과 기관총으로 경무장한 콜롬비아혁명무력 대원들이 어떻게 당할 수 있겠는가.


생의 마지막 순간, 눈동자에 비친 여명

콜롬비아 열대밀림에 비가 내리던 2011년 11월 4일, 콜롬비아혁명무력 최고사령관 카노는 공격헬기를 앞세운 ‘토벌군’이 밀영을 기습하였을 때, 공격헬기가 공중에서 난사한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열대밀림에 들어가 혁명의 총을 잡은 날로부터 28년 동안 오로지 콜롬비아혁명을 위해 남김없이 자신을 불태우던 63세 혁명가의 심장은 박동을 멈추었다. 최고사령관 카노와 생사고락을 함께해온 근위대원 네 명도 그와 함께 전사하였고, 또 다른 근위대원 다섯 명은 ‘토벌군’에게 포로로 붙잡혔다.

카노는 비록 두 눈을 감지 못한 채 최후를 마쳤지만, 콜롬비아혁명무력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2011년 11월 15일 누리집 <콜롬비아 리포츠(Colombia Reports)>에 따르면, 전사한 카노의 뒤를 이어 티몰레온 히메네스(Timoleon Jimenez)가 콜롬비아혁명무력 제3대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고 한다. 콜롬비아 정부당국은 히메네스에게 117개의 체포영장을 발부하였으며, 미국 국무부는 그를 체포하도록 제보해주는 사람에게 500만 달러를 주겠다고 현상금까지 내걸었다.

44년 전인 1967년 10월 9일 볼리비아의 유로협곡에서 ‘토벌군’ 병력 1,800명과 맞서 싸우다 전사한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 1928-1967)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에게 목숨을 잃었고, 2011년 11월 4일 비 내리는 콜롬비아의 카우카 밀림지대에서 공격헬기를 동원한 ‘토벌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알폰소 카노는 미국 육군 특수전사령부에게 목숨을 잃었다.

38세에 전사한 체 게바라도 두 눈을 감지 못하고 숨졌고, 63세에 전사한 알폰소 카노도 두 눈을 감지 못하고 숨졌다. 1950년대 지리산 어느 이름 모를 골짜기에서 ‘토벌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이 땅의 빨찌산 대원들도 두 눈을 감지 못하고 숨졌다. 생의 마지막 순간, 그들의 눈동자는 어둠을 뚫고 저 멀리 밝아오는 여명을 응시하였을 것이다. (2011년 11월 24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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