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0/07

자승자박 뒤에 무엇이 따라오는가?

변혁과 진보 (49)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반면교사는 독일에 있다

가장 긴 좌파정당사를 가진 나라를 손꼽으라면 독일을 손꼽을 수 있다. 현존하는 독일 사민당(SPD)은 이미 오래 전에 우파정당으로 변질되었지만, 원래 그 당의 효시는 19세기 독일의 사회주의정치활동가 페르디난트 라쌀(Ferdinand Lassalle, 1825-1864)이 1863년 5월 23일에 창설한 전독노동자연맹(ADAV)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이 독일을 점령하였던 1946년에 재창당될 때, 독일 사민당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우파정당으로 변질되었다.

그러면 독일 좌파정당들의 형편은 어떠한가? 똑같은 당명을 경쟁적으로 내거는 통에 어느 당이 어느 당인지 헷갈리는, 공산당이라는 간판을 내건 왜소정당이 세 개가 있고, 그 밖에도 왜소한 좌파정당이 세 개 더 있다.

현존하는 독일 좌파정당들을 창당연도 순으로 열거하면, 독일 공산당(KPD, 1968년 창당), 독일 공산당(DKP, 1968년 창당), 독일 맑스레닌주의당(MLPPD, 1982년 창당), 독일 공산당(KPD, 1990년 창당), 혁명사회당(RSB, 1994년 창당), 사회평등당(PSG, 1997년 창당)이다.

존재감 없는 미국 사민당들이 자그마치 19개로 분열된 것에 비하면 좀 덜하지만, 독일 좌파정당들에게는 사분오열과 지리멸렬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좌파 정체성 고수와 독자적 발전, 그리고 계급적 원칙 같은 언사만 남발하는 그 당들은 대중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당기나 붙들고 있는 신세다.

그런데 독일 좌파정당들 가운데 4년 전에 창당된 좌파당(Die Linke)은 다른 길을 걸어왔다. 이전에 동독 집권당이었던 사회통합당(SED)의 후신으로 등장한 민주사회당(PDS)과 독일 사민당에서 분당한 '고용과 사회정의-선거대안(WASG)'이라는 정당이 2007년 6월 16일에 합당한 것이 현존하는 좌파당이다. 

하원(Bundestag)선거 득표율을 살펴보면, 양당 합당의 놀라운 효과를 알 수 있다. 민사당이 단독 출마한 2002년 하원선거에서 얻은 득표율은 4.0%였는데, 이것은 하원 622석 가운데 겨우 2석밖에 차지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민사당과 '고용과 사회정의-선거대안'이 후보단일화에 성공하여 2005년 하원선거에 출마하였더니 득표율이 8.7%로 배가하여 54석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2007년에 그 두 당이 합당에 성공하여 좌파당이라는 단일정당으로 2009년 하원선거에 출마하였더니 득표율이 11.9%로 높아져 76석을 차지하였다. 만일 민사당이 '고용과 사회정의-선거대안'과 합당하지 않았더라면,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정치적으로 고립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독일 좌파당이 그처럼 하원 76석을 차지하였다 해서, 정파집합당 신세를 벗어난 것은 아니다.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처럼 독일 좌파당도 정파집합당이다. 그렇게 말하는 논거는 아래와 같다.

첫째, 좌파당 당원수는 2009년 9월 기준으로 77,000여 명밖에 되지 않는다. 독일노동조합총연맹(DGB) 소속 노동자가 약 700만 명인데, 좌파당 당원이 77,000여 명밖에 되지 않는 것은 노동자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파집합당임을 드러낸다. 
  
둘째, 좌파당의 정파를 열거하면, 반자본주의좌파, 공산주의강령파, 사회주의좌파, 해방좌파, 개혁좌파연대, 민주사회주의포럼, 맑스21-국제사회주의연대, 사회주의대안파 등이다. 이처럼 좌파당에 정파들만 모여있고 정작 있어야 할 노동자 대중은 없으니 정파집합당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당기를 앞세우고 시위를 벌이는 독일 좌파당((Die Linke)

셋째, 좌파당이 노동자 대중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면 다른 사회계층들의 지지라도 받아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좌파당이 하원 622석 가운데 12.2%에 해당하는 76석을 차지한 원내소수당이라는 점은 그 당의 대중적 지지기반이 허약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대중적 지지기반이 허약한 정파집합당이라는 점에서 민주노동당과 독일 좌파당은 같은 처지에 있다. 두 당에게 서로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민주노동당이 중도좌파노선을 걷는 것에 비해 독일 좌파당은 더 '왼쪽'으로 가서 좌파노선을 걷는다는 점이다.

또 하나 다른 점은, 이 땅의 중도좌파당이 민주당에서 분당한 중도우파당과의 합당을 반대한 것에 비해, 독일 좌파당은 사민당에서 분당한 중도좌파당과 합당하였다는 점이다. 민주노동당의 합당반대와 독일 좌파당의 합당성사, 그 두 상반된 선택은 각각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두 진보정당의 선택, 자승자박과 자상자해 

자승자박. 잘못된 선택으로 자기 손발을 얽매는 행위를 뜻하는 말이다. 지금 민주노동당이 그런 꼴이다. 정파집합당인 민주노동당이 국민참여당과의 합당을 반대했으니, 정파집합당 신세에서 벗어날 기회를 스스로 저버린 것이다.

더욱이 국민참여당과의 합당은 물론이고 민주노동당과의 합당마저 반대한 진보신당의 선택은 자승자박보다 더 심한 자상자해다. 지금 진보신당에서 일어나는 탈당사태가 자상자해의 결과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국민참여당과 3당 합당을 성사시켜 각계각층 대중 속에서 '합당 돌풍'을 일으켜야 할 판에, 거꾸로 합당을 반대하면서 고립을 자초하였으니 어찌 자승자박과 자상자해라 하지 않을 수 있으랴!

민주노동당의 자승자박과 진보신당의 자상자해는 이 땅의 진보정치가 미상불 위기에 빠졌음을 말해준다. 이전에 민주노동당이 총선이나 대선에서 초라한 성적을 냈어도, 그것은 진보정치를 위협하는 위기요인으로 되지는 않았다. 앞으로 더 분발, 노력하여 대중에게 다가가고, 대중의 지지를 얻으면, 그렇게 하는 데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진보적 정권교체를 반드시 실현하리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런 희망이 민주노동당을 어려움 속에서 지켜주고 키워온 힘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합당을 반대하고 자승자박과 자상자해를 자초한 최악의 선택 앞에서, 합당을 바라던 그 두 당의 당원들과 지지자들은 허탈감을 느끼고 있다. 누구도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는 현실, 바로 이것이 자승자박과 자상자해가 불러온 위기의 실상이다.
 
그런데도, 이러저러한 구실을 대며 합당을 줄곧 반대해온 일각에서는 진보신당 일부가 탈당하여 민주노동당과 합하면 위기 같은 것은 없을 것이라고 낙관하는 듯하다. 3당 합당을 외면하고 정파집합을 바란 사람이라면 정파들끼리 집합하여 당명이나 바꾸는 것에 자족할 수 있다.

하지만, 대중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파들끼리 집합하여 당명을 바꾼다면, "진보정당은 뭐 좀 다른가 했더니 보수정당과 똑같이 이합집산하는구나" 하는 실망감을 대중에게 안겨줄 것이다. 당명을 바꾼 새로운 정파집합당에 대한 대중의 실망, 바로 이것이 진보정치를 옥죄게 될 위기의 실체다.


반전의 선택이 아직 남아있다

만일 대중에게 실망을 안겨줄 정파집합당이 건설되면, 내년 총선에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겠다는 희망은 물건너 간 것이다. 막연히 추정할 게 아니라, 아래의 선거경험을 돌아보며 꼼꼼히 타산해볼 필요가 있다.

2008년 총선 정당득표율은 민주노동당이 5.7%, 진보신당이 2.9%였다. 그리고 2010년 지방선거 정당득표율은 민주노동당이 7.25%, 국민참여당이 6.65%, 진보신당이 3.13%였다. 그런데 내년 총선에 새로운 정파집합당이 출마하면 어떤 득표결과가 나올까? 그 당은 2008년 총선에서 진보신당이 얻은 득표율 2.9%보다 더 낮은 최저득표율을 얻을 것이다.
  
2007년 대선에서 민주노동당 후보가 얻은 득표율은 3.0%였다. 이것은 그 당 후보가 2002년 대선에서 얻었던 득표율보다 0.9% 포인트가 줄어든 것일 뿐 아니라, 2007년 당시 급조정당으로 출현한 창조한국당이 내세운 후보보다 2.8% 포인트나 낮은 최저득표율이다. 그런데 내년 대선에서 새로운 정파집합당이 내세운 후보가 얻을 득표율은 얼마나 될까? 민주노동당의 2007년 대선참패보다 더 심한 참패를 당하여 3% 밑으로 떨어질 것이다.

흉조가 보인다. 이번에 서울시장 보선을 위한 범야권 단일후보 경선에 나간 민주노동당 후보가 얻은 득표율은 2.28%다. 대중과 언론으로부터 '왕따'당한 것이다. 만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과 국민참여당이 합당하였더라면, '안철수 돌풍'만큼 위력적인 '합당 돌풍'을 일으키며 서울시장 보선판세를 뒤바꿔놓았을 것이다.

△10. 26 서울시장 보궐선거 야권통합경선 결과 (<동아일보> 2011년 10월 4일)

범야권 단일후보 경선에서 이미 나타났고, 10.26 지자체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노동당에게 돌아갈 초라한 결과는, 합당반대로 대중에게 실망을 안겨준 당이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당할 '왕따'를 예고한다.

진보정치의 전후맥락을 읽어보면,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으로 첫 걸음을 뗀 진보정치가 2008년 분당사태로 큰 상처를 입더니, 이제는 합당반대로 대중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내년 두 선거에서 참패하는 게 아니냐 하는 걱정이 앞선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민주노동당은 현 위기가 더 악화되기 전에 정면돌파를 감행할 필요가 있다. 누구나 직감하는 것처럼, 그 당의 정면돌파 비상책은 이 땅의 진보정치 운명을 좌우할 중대한 선택이 될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어떤 비상책으로 위기를 돌파할 수 있을까?

당 안에서 정파별 이해득실 계산은 잠시 뒤로 미루고, 우선 위기돌파에 전체 당원들이 합심전력하여, 진보통합당 건설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진보통합당 건설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합심전력과 위기돌파, 이것이 꺼져가는 희망을 살리는 반전의 선택이다. (2011년 10월 7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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