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1946년에 일어난 상승과 고조
사회구성원의 진보성향을 지수(index)로 표시할 수 있을까? 만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높은 '진보지수'를 기록한 시기는 1946년부터 1947년에 이르는 약 2년 동안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분단체제가 고착화되기 직전인 그 시기에 북위 38도선 이북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이남에서도 '진보지수'가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첫째, 1946년 7월 미군정청 여론국이 서울 시민 10,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결과가 역사기록에 남아있다. '어떤 경제체제를 원하는가?'라는 질문항에 대한 응답비율은, 사회주의 70%, 자본주의 14%, 공산주의 10%로 나왔다. 또한 '어떤 정부형태를 원하는가?'라는 질문항에 대한 응답비율은, 대의민주주의 85%, 계급지배 5%, 과두제 4%, 1인 독재 3%로 나왔다.
이념적으로 극히 편향된 시각을 지닌 미군정청 여론국이 실시한 조사결과가 그렇게 나왔으니, 만일 공정한 시각을 지닌 다른 기관이 똑같은 여론조사를 실시하였다면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원한다는 응답비율이 80% 이상으로 올라갔을지 모른다. 이러한 여론조사결과는 당시 남측에서 70-80%에 이르는 절대다수가 대의민주주의에 기초한 사회주의체제를 원하였음을 말해준다. 당시 남측에서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진보적인 분위기가 고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1946년도 역사기록을 보면, 북위 38도선 이남에서 활동하던 진보단체들이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1946년 현재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회원수는 57만4,000명이었고, 전국농민조합총연맹(전농) 맹원수는 331만3,000명이었고, 조선부녀총동맹(여맹) 맹원수는 80만명이었으며, 조선민주청년동맹(민청) 맹원수는 65만6,000명이었다. 4대 진보단체에 가입한 노동자, 농민, 청년, 여성은 534만3,000명이었다.
1946년도 현재 한반도 전체 인구는 1,831만9,000명이었는데, 그 가운데서 약 3분의 2가 북위 38도선 이남에 있었으므로, 당시 남측 인구는 약 1,221만2,000명으로 추산된다. 1,221만2,000명 인구 중에서 4대 진보단체 성원이 534만3,000명이었으므로, 남측에서 조직화된 진보성향 대중은 인구의 43.7%를 차지하였다. 총인구가 아니라 성인 인구에 대한 진보성향 대중의 비율은 약 65%이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한 마디로 말해서, 당시 진보단체의 조직규모와 사회정치적 역량은 오늘날 진보단체들의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막강하였다.
여기서, 위의 통계자료가 말해주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지적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일제 강점기 식민지 조선에서 진보성향은 무자비하게 짓밟혔다. 1925년에 '치안유지법', 1936년에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 1941년에 '조선사상범예비구금령'을 조작해놓은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대중들 속에서 진보성향이 싹트지 못하도록 짓밟았다. 그런데 8.15 해방 후 불과 1년밖에 지나지 않은 1946년에 이 땅의 '진보지수'는 초고속으로 높아졌다.
이처럼 놀라운 초고속 상승현상의 원인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대중에게 잠재된 진보성향은 그것을 짓누르는 족쇄가 끊어져 나가는 해방공간에서 무서운 속도로 상승, 고조되는 것이다. 상승의 속도와 고조의 범위는 평상시에 통용되는 '상식'을 훌쩍 뛰어넘는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남측에서 대중의 진보성향을 짓누르는 '국가보안법'이 철폐되는 경우, 1946년에 일어났던 상승과 고조에 버금가는 정치적 급진현상이 재현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전에 발표한 나의 글에서 논한 것처럼, 민주노동당이 정책연합에 기초한 연립정부 수립을 추진하여 2013년에 연립정부의 이름으로 '국가보안법'을 철폐해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진보지수' 고조기의 사회변혁운동
'진보지수'를 백분율로 측정하는 경우, 그 지수가 70을 넘었던 1946년과 1947년에 북위 38도선 이남에서 사회변혁운동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시 남측의 사회변혁운동은 그처럼 막강한 조직역량과 대중적 지지기반을 갖추었으면서도 뜻밖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진보지수'가 70을 넘었으니, 사회변혁운동이 승승장구하였어야 하는데, 당시 남측의 사회변혁운동은 그렇지 않았다. 무슨 연유가 있었던 것일까?
첫째, 당시 남측의 급진주의자들이 저지른 오류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 1946년 현재 남측에서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응답비율이 10%밖에 되지 않고,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응답비율이 70%에 이르렀으니, 남측의 진보적 정치활동가들은 대중의 그러한 정치적 요구에 따라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중도좌파정당을 건설했어야 한다.
그러나 급진주의자들은 대중의 정치적 요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공산주의를 표방한 좌파정당을 건설하였으니, 1945년 8월 24일 서울에서 재건된 조선공산당이 바로 그 좌파정당이다. 사회변혁운동의 발전단계로 볼 때, 명백하게도 중도좌파정당을 건설해야 하는 시기에, 한 단계를 뛰어넘어 좌파정당을 건설한 것이야말로 조급증에 사로잡힌 급진주의자들의 오류였다.
당건설에서 범한 자기들의 좌편향 오류가 드러나자, 조선공산당 지도부는 좌경적 당건설노선을 수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을 진보통합당으로 합당하라는 요구가 강하게 제기되었는데, 그 요구에 따라 1946년 11월 23일 조선공산당은 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과 합당하였다.
그러나 3당 합당은 조선공산당이 다른 두 당에 심어놓은 '프락치'들을 긁어모아 합당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방식의 합당으로 출범한 남조선노동당은 중도좌파정당으로 변신한 것이 아니라 조선공산당의 후신으로 남아있었다. 당의 '간판'을 1년 3개월만에 바꾸기는 했어도, 당지도부는 이전과 대동소이하였으므로 대중들은 남조선노동당을 10%의 대중적 지지밖에 받지 못하는 '공산당'으로 여겼던 것이다.
급진주의자들이 좌파정당을 건설한 것은 남측 인구 70%를 포괄하는 각계각층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지 못한 실패였고, 정치적 고립을 자초한 것이었다. 사회변혁의 주체인 대중으로부터 겨우 10%밖에 되지 않는 지지를 받으면서 사회를 변혁하겠다는 생각은, 그 때나 지금이나 객관적 현실과 동떨어진 급진주의적 공상이다.
둘째, 남측의 4대 진보단체 지도부가 저지른 오류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 전평, 전농, 여맹, 민청의 각 지도부들은 조선공산당 지도부를 장악한 '쎅트(sect)'의 분열공작을 억제하고 마땅히 진보통합당 건설을 추진하여야 하였고, 남측에서 대중적 지지를 가장 많이 받는 진보적 정치인을 진보통합당의 대표로 내세워야 하였다.
그러나 4대 진보단체 지도부는 '쎅트'의 지시에 맹종하였다. 아마 그들 자신도 좌경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쎅트'의 지시를 옳은 것으로 여기고 따라갔는지 모른다. 혹은 조선공산당 지도부를 장악한 '쎅트'가 4대 진보단체의 각 지도부들에 '프락치'를 잠입시켜 자기들을 맹종하게 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쎅트'의 분열공작을 방치한 채 사회를 변혁하겠다는 생각은, 그 때나 지금이나 백전백패를 예고하는 것이다.
여운형을 다시 보아야 하는 까닭
여기서 8.15 해방 직후 북위 38도선 이남의 정치상황을 말해주는 역사적 사실 가운데 두 가지를 더 거론할 필요가 있다.
첫째, 〈조선일보〉 1947년 7월 6일 부에는 조선신문기자회가 실시한 여론조사결과가 실렸다. 그 여론조사에 따르면, '어떤 국호를 찬성하는가?'라는 질문항에 대한 응답비율은, 조선인민공화국 69.5%, 대한민국 24.6%, 무응답 6.0%로 나왔다. 또한 '어떤 정부형태를 원하는가?'라는 질문항에 대한 응답비율은 인민위원회 71.5%, 종래 제도 13.3%, 기타 10.7%, 기권 4.6%로 나왔다. 이러한 여론조사결과는 당시 남측 사회에서 70%에 이르는 다수가 인민위원회 기반 위에 인민공화국을 세우는 민주건국노선을 지지하였음을 말해준다.
대중의 정치적 요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좌파정당을 건설한 급진주의자들의 주장대로 하면, 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이 아니라 사회주의공화국(socialist republic)을 건설하였어야 하지만, 남측 인구의 70% 이상은 민주건국노선을 지지하였다. 이처럼 절대다수 대중의 요구에 따라 민주건국노선을 관철하려면, 진보적 민주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중도좌파정당을 세워 집권했어야 한다.
둘째, 당시 남측에서 대중의 지지를 가장 많이 받은 정치인은 몽양 여운형이었다. 1945년 10월 10일 우파단체인 선구회가 실시한 여론조사결과를 보면, 여운형에 대한 대중적 지지율은 33%로 나타났는데, 이승만(21%), 김구(18%), 박헌영(16%)을 크게 앞질렀다.
여운형 암살공범들 가운데 한 사람은 월간지 〈말〉 1992년 5월호에 이런 말을 남겼다. "당시 몽양의 인기는 대단했다. 몽양이 종로 YMCA에서 강연을 끝내고 길을 걷는데 길 건너편에 가던 사람들까지 몰려와 악수를 청할 정도였다. 저렇게 인기가 좋은 사람이 왜 이쪽이 아니고 저쪽이냐 하는 것이었다. 해방되고 2년밖에 못 살아도 그 정돈데 만일 그가 6.25 때까지 살았다면 이 나라가 어찌 되었겠는가."
여운형이 그처럼 대중의 지지를 받았던 까닭은 그가 대중의 이념적 지향과 정치적 요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힘썼기 때문이다. 여운형은 당시 남측 인구의 70%가 요구한 사회주의를 실현할 정치인이었다. 또한 여운형은 당시 남측 인구의 70%가 바랐던 인민위원회의 기반 위에서 인민공화국을 세우는 민주건국노선을 실현할 정치인이었다. 또한 여운형은 민족분열을 반대하고 연북합작을 추구한 정치인이었다.
인구의 70%에 이르는 다수가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인민위원회의 기반 위에서 인민공화국을 세우는 민주건국노선을 지지하고, 진보단체의 조직역량이 그처럼 막강하고, 여운형 같은 유력한 정치인이 존재하였는데도, 남측의 사회변혁운동은 결국 좌절하였다.
좌절의 주된 원인은 진보의 가면을 쓰고 진보정당과 진보단체를 장악한 '쎅트'의 준동을 억제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진보정당과 진보단체를 장악한 '쎅트'는 공명심과 출세야욕에 사로잡힌 나머지, 좌우편향으로 갈팡질팡하고 내부분열로 변혁역량을 소진시켰다. 8.15 해방 직후 사회변혁운동이 전진하느냐 후퇴하느냐 하는 결정적 시기에 '쎅트'가 사회변혁운동에 끼친 해악은 치명적이었다.
왜 사회주의가 아니라 진보적 민주주의인가
지금 민주노동당은 강령개정사업을 추진하는 중인데, 강령개정위원회는 사회주의 관련 서술을 민중주체 민주주의 관련 서술로 대체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당 안팎의 좌파들은 민주노동당이 이념적으로 후퇴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민중주체 민주주의는 사회주의보다 '오른쪽'에 있는 정치이념이다. 사회주의보다 '오른쪽'으로 가는 것은 이념적 후퇴가 명백하다.
여기서 제기되는 쟁점은, 이념적 후퇴가 정당한가 아니면 부당한가를 평가하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강령개정에서 사회주의 관련 서술을 민중주체 민주주의 관련 서술로 대체하는 이념적 후퇴를 평가하는 기준은, 당연히 대중의 사상의식 수준이 되어야 한다. 민주노동당은 선진적 노동계급과 정치활동가들이 결집한 전위정당이 아니라 진보성향의 각계각층 대중이 결집한 대중정당이기 때문에 그 당의 강령은 어디까지나 각계각층 대중의 사상의식 수준에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
만일 민주노동당의 강령이 대중에게 진보정치의 전략목표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당 안팎의 진보적 정치활동가들이 자기들의 사상을 검증하는 기준으로 제시되는 것이라면, 민주노동당은 당연히 사회주의 관련 서술을 강령에 포함시켜야 한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강령은 진보적 정치활동가들의 '사상검증 확인서' 같은 것이 아니다. 그 강령은 당의 진보적 정치활동가들에 의해 작성되는 것이지만, 그들의 손을 떠나 각계각층 대중에게 제시되어야 하고, 더욱이 대중 자신의 정치적 요구로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사회여론조사기관에 부탁하여 남측 대중의 사상의식 수준을 객관적으로 측정해볼 필요도 없이, 남측 대중이 사회주의를 자기의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러한 처지에 있는 대중에게 제시하여 대중 자신의 정치적 요구로 인정을 받아야 할 민주노동당의 강령에 대중이 받아들이기 힘든 사회주의 관련 서술을 포함시키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자주파나 좌파나 똑같이 자본주의를 반대하고 사회주의를 지향하지만, 두 정파에게는 차이점이 있다. 자주파는 대중의 정치적 요구에서 출발하여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사회변혁의 단계적 실현을 추구하고, 좌파는 대중의 정치적 요구를 앞질러가며 사회주의를 급진적으로 추구한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두 정파의 차이는 사회변혁을 단계적으로 실현할 것인가 아니면 급진적으로 실현할 것인가 하는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가 두 정파의 정치적 연합을 가로막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동일한 전략목표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두 정파는 정치적으로 연합할 수 있고, 또 마땅히 연합하여야 한다. 자주파는 좌경화를 견제하고, 좌파는 우경화를 견제하는 역할을 각각 수행한다면 그 두 정파의 정치연합은 좌우편향에 빠지지 않고 바른 길을 걸어가게 하는 '촉진제'로 될 것이다.
'진보지수' 저조기의 진보적 민주주의
위에서 논한 것처럼, 65년 전 '진보지수'가 최고조에 이르러 70을 넘어섰던 시기에 이 땅의 진보정치이념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로 구분되었는데, 당시 각계각층 대중은 사회주의를 자기의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였다. 여운형은 대중이 자기의 정치이념으로 인정한 사회주의를 진보적 민주주의라고 불렀다. 여운형에게 있어서 사회주의와 진보적 민주주의는 동의어였다.
그로부터 65년이 지난 오늘 '진보지수'가 10배나 하락하여 7을 오르내리는 저조기에 이 땅의 진보정치이념은 사회주의와 진보적 민주주의로 구분된다. 65년 전에 공산주의라고 불렀던 정치이념을 가리켜 오늘 우리는 사회주의라고 부르고, 65년 전에 사회주의라고 불렀던 정치이념을 가리켜 오늘 우리는 여운형의 명명방식을 따라 진보적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자주파가 제기한 정치이념이다.
그런데 민주노동당 강령개정위원회는 강령에 들어있는 사회주의 관련 서술을 민중주체 민주주의 관련 서술로 대체하려 하고 있다. 이를 두고 좌파들은 자주파가 사회주의를 포기하였거나, 사회주의를 진보적 민주주의로 대체하였다고 비판하지만, 그것은 좌파들의 오해다. 자주파는 사회주의를 포기한 적도 없고, 사회주의를 진보적 민주주의로 대체한 적도 없다. 자주파가 진보적 민주주의를 제기한 것은, 두 단계 사회변혁론에 따라 사회주의에 이르는 경로와 단계를 과학적으로 해명한 것이다. 명백하게도, 이러한 과학적 해명은 65년 전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중도좌파의 진보정치이념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다.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정치이념은 자주파가 창안한 것이 아니라, 8.15 해방 직후 이 땅의 사회변혁운동에서 중도좌파가 제기한 것이고, 대중 자신의 정치이념으로 인정받은 것이며, 여운형에 의해서 명명된 것이다.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정치이념이 그러한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 강령개정위원회는 강령개정작업을 진행하면서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용어 대신에 민중주체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택하였다. 진보적 민주주의를 자주파의 창안물, 전유물로 오해하는 좌파들과 함께 강령을 개정하여야 하므로, 민중주체 민주주의라는 대체용어를 선택하여 논란의 소지를 없앤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자주파의 창안물, 전유물이 아니라 역사성을 지닌 것이라는 사실을 좌파들에게 설명하고, 그들이 그 사실을 용인할 수 있다면, 굳이 용어를 대체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자신을 민중으로 여기지 않고, 또 실제로 민중이 될 수 없는 진보성향의 중산층은 민중주체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선뜻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진보정치를 지향하는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정치이념은 대중에게서 나와서 대중에게로 돌아가는 대중 자신의 것이므로, 강령의 용어도 그런 방향에서 선택하여야 한다. (2011년 3월 17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