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과 진보 (1)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변혁담론의 열기가 식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진보적 정치활동가들의 노력은 사회적 진보를 실현하는 문제에 집중된다. 그런 노력을 반영하여 "세상을 바꾸자" 또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자!" 같은 구호가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누구나 아는 얘기지만, 세상을 누가 어떻게 바꿀 것인지, 새로운 사회를 누가 어떻게 건설할 것인지를 논할 때, 비로소 구호를 넘어 과학을 만나게 된다. 세상을 바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복잡하고 어려운 과업은 "000은 물러가라!" 또는 "000을 중단하라!"는 구호만으로는 수행할 수 없으며, 반드시 과학을 동반해야 수행되는 법이다. 다시 말해서, 저항은 구호만으로도 가능하지만, 변혁은 구호와 더불어 과학을 동반해야 가능하다. 저항은 과학 없이 일어날 수 있지만, 변혁은 과학 없이 일어날 수 없다. 변혁은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과학적이다. 진보적 정치활동가들이 구호를 넘어 과학을 만나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변혁이 동반하는 과학은 변혁의 과학이다. 변혁의 과학은 사회적 진보를 위한 과학이다. 사회적 진보는 오직 변혁에 의해서만 실현된다. 이전에는 많이 쓰지 않던 진보라는 말을 많이 쓰게 되면서, 어느 때부터인가 진보를 변혁과 떼어놓고 생각하는 풍조가 생겼지만, 원래 변혁과 진보의 관계는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명백하게도, 변혁만이 진보를 실현한다. 지금 형형색색의 진보주의가 등장하여 제각기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변혁을 지향하지 않는 진보 또는 변혁의 요구를 외면한 진보는 진보가 아니라, 사이비 진보다.
변혁의 과학은 세상을 바꾸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변혁담론을 제기한다. 사회적 진보를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이론적 해명은 변혁담론에 담겨져있다. 그러므로 과학적 변혁담론이 풍부하게 발전되어야 세상을 바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진보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이런 이치를 모르는 진보적 정치활동가들은 없다. 그러므로 진보적 정치활동가들이 항상 관심을 쏟아야 하는 것은 변혁담론이다.
그러면 진보적 정치활동가들은 변혁의 과학을 얼마나 진지하게,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까?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변혁담론은 들리지 않는다. 남몰래 골방에 들어가서 공부하는 것일까? 아니면, 높은 수준에 이르러 더 이상 공부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일까?
1980년대 컴퓨터도 인터넷도 휴대전화도 알지 못하던 시절, 한글 타자기로 작성한 문건을 복사하여 변혁의 과학을 공부한 때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치며 수없이 중복 복사하여 전해지는 통에 어떤 문장은 복사과정에서 글자가 희미하게 지워져 읽을 수 없는 대목도 있었다. 그 시절에는 그런 문건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엄중처벌'을 받을 수 있었다. 그처럼 여건이 힘들고 분위기가 삼엄했어도, 변혁의 과학을 공부하는 열의는 뜨거웠다.
그런데 타자기가 아니라 컴퓨터로 문건을 작성하고, 복사기가 아니라 인터넷으로 문건을 전달하고, 공중전화가 아니라 휴대전화로 연락을 주고받는 오늘에는 변혁담론을 찾아보기 힘들다. 20여 년 세월이 흐르면서, 학습열의가 식어버린 것이다.
타자기와 복사기밖에 없던 1980년대에 그토록 바랐던 민주노조도 건설되었고, 그토록 기대하였던 진보적 대중단체들도 생겨났고, 그 시절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진보정당도 건설되어 벌써 10여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사회적 진보의 목적지가 멀어 보이는 까닭이 무엇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변혁담론의 열기가 식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해도 틀린 대답은 아닐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변혁의 과학에 대한 깊은 인식이 없기 때문에, 변혁담론에 무관심해지고, 정책과 대책을 세우거나 전략과 전술을 택하면서 본의 아니게 편향과 오류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개인 대 개인의 관계에서 실수를 저지르거나 과오를 범하는 경우 사과하고 바로잡을 수 있지만, 정적들과 맞서는 정치투쟁에서 편향과 오류가 생기면 실패와 정체에 빠진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민주노동당이 분당사태를 겪으면서 진보신당으로 갈라져 나간 것은 가장 큰 실패경험이었고, 민주노총이나 민주노동당이 지속적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것은 정체상태에 묶여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 실패와 정체를 극복하지 못하면, 진보의 길에서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이명박 정권만이 진보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보적 정치세력 내부에서 발생한 실패와 정체도 그 길을 가로막고 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외부의 침탈보다 내부의 우환이 더 무섭다는 말이 실감 난다.
이런 상황을 두고 어떤 사람은 출구전략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출구전략이라는 표현도 따지고 보면, 진보의 길을 가로막은 실패와 정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의식에서 제기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실패와 정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제기할 때,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는 것은 실패와 정체가 생겨난 원인이 무엇일까 하는 문제의식이다. 원인을 분석해야 극복하는 방도를 찾을 수 있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진보의 길을 가로막는 실패와 정체의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서라도 변혁의 과학을 공부하여야 하는 것이다.
과학적 변혁담론은 무엇인가?
진보를 실현할 바탕을 해명하지 않고, 진보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비과학적인 발상이다. 비유로 말하면, 토양의 성질에 맞는 씨앗을 뿌려야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는 것이다. 그와 똑같은 원리에서, 진보를 실현할 바탕을 해명하고, 그에 맞는 변혁 강령을 추구해야 진보의 길을 열어놓을 수 있다. 진보를 실현할 바탕을 해명하지 못하면, 아무리 애쓰더라도 시행착오를 거듭할 뿐이다. 지금 이 땅의 진보적 정치활동가들이 겪고 있는 실패와 정체는 그렇게 하여 생겨난 시행착오가 아닐까?
변혁담론에서 말하는 '바탕'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단답형으로 직설하면, 그 바탕은 사회성격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사회성격이란 예속성을 뜻한다. 변혁담론에서 쓰는 예속이라는 말은 사회성격을 규정하는 개념으로 쓰인다. 그래서 예속성이라고 한다. 이 땅의 사회성격은 대미예속성이다.
대미예속이 사회성격이라면, 정전상태와 분단상황은 그러한 사회성격에서 산생된 특수한 사회현실이다. 사회성격이 사회현실을 산생하는 것이므로, 대미예속성이라는 사회성격에서 정전상태와 분단상황이라는 특수한 사회현실이 나왔고, 오랜 기간에 걸쳐 유지되어온 것이다.
정전상태란, 방대한 무력이 집결하여 전쟁위험이 고조된 준전시상태를 유지해오는 특수한 사회현실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이런 특수한 사회현실에서 어떻게 사회변혁을 실현할 것인가 하는 물음을 묻고, 그 해답을 찾는 것이 변혁담론이다.
정전상태가 규정하는 한반도 군사정세는 이 땅의 정치상황과 경제현실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이고, 대중의 의식구조에까지 파고들었다. 따라서 다른 나라의 변혁담론과 달리, 이 땅의 변혁담론은 한반도 군사정세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다. 한반도 군사정세를 외면한 변혁담론은 비과학적이고,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을 거론하지 않는 변혁담론도 비과학적이다. 과학적인 변혁담론은 한반도 군사정세를 분석하고, 변혁의 과업과 한반도 평화체제를 수립하는 과업의 상관성을 해명한다.
정전상태는 한반도의 분단상황에 직결된 것이다. 한반도의 분단상황이 정전협정에 규정된 군사분계선에 의해 유지된다는 점에서 정전상태와 분단상황이 직결된다고 말할 수 있다. 정전상태가 군사적인 것이라면, 분단상황은 정치적인 것이다. 정전상태의 정치적 측면이 분단상황이라면, 분단상황의 군사적 측면은 정전상태다.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분단상황은 이 땅의 정치적, 경제적 현실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다른 나라의 변혁담론과 달리, 이 땅의 변혁담론은 분단상황이라는 특수한 사회현실에서 어떻게 사회변혁을 실현할 것인가 하는 물음을 묻고,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 과학적인 변혁담론은 분단상황에서 사회변혁을 실현하는 과업을 해명한다. 분단된 남북관계를 외면한 변혁담론은 비과학적이고, 한반도 통일문제를 거론하지 않는 변혁담론도 비과학적이다.
중요한 것은, 대미예속성이 사회성격으로 굳어지면, 사회체제가 변형된다는 점이다. 명백하게도, 이 땅의 자본주의체제는 대미예속성에 의해 변형된 사회체제다. 다른 나라의 자본주의체제와 달리, 이 땅의 자본주의체제가 변태적으로 형성되고 불구화된 까닭이 거기에 있다.
대미예속성과 무관한 나라들에서 제기된 변혁담론은 이 땅의 사회성격을 과학적으로 해명하지 못한다. 다른 나라의 변혁담론은 자본주의체제 일반에 대해 과학적 해명을 주지만, 대미예속성이 변형시킨 이 땅의 자본주의체제를 해명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사회성격을 개변시키는 문제를 해명하는 변혁담론은 다른 나라에서 수입할 수 없으며, 오직 이 땅의 진보적 정치활동가들이 독자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사회성격을 개변시키는 변혁이 사회체제를 개변시키는 변혁보다 먼저 수행된다는 점이다. 사회체제를 변혁하면, 사회 성격까지 한꺼번에 자동적으로 개변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회변혁에 대한 급진주의자들의 오해와 편견이다. 급진주의자들의 시야에는 사회체제만 중요하게 보이고, 사회성격은 무시해도 좋은 하찮은 부속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회성격이 이 땅의 사회체제를 변태적으로 형성시키고, 불구화시켰음을 생각하면, 급진주의자들의 그러한 견해가 얼마나 비과학적인 것인지 알 수 있다. 변혁의 과학을 깊이 공부하지 않아, 현실에 발을 딛지 못한 급진주의는 승리하지 못한다.
이 땅의 사회변혁은 사회성격을 개변시키는 단계를 거쳐야, 사회체제를 개변시키는 더 높은 단계로 들어설 수 있다. 물론 다른 나라에서 제기된 변혁담론에서도 두 단계 변혁이라는 개념이 제시된 바 있다. 민주주의 변혁을 완수하고 사회주의 변혁으로 이행한다는 변혁담론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두 단계 변혁담론은 이 땅에서 수행할 변혁과업을 전면적으로 해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땅의 사회체제와 마찬가지로 이 땅의 민주주의도 다른 나라의 민주주의와 달리, 사회성격으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다른 나라에서는 1980년대에 이미 사라진 국가보안법 같은 파시스트적 악법이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것, 그리고 중도우파정권이 10년 동안 들어서서 형식적 민주주의를 실현한다고 하면서도 국가보안법을 그대로 존치시킨 것은 이 땅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변형되었는지를 말해준다.
이 땅에서 민주주의적 변혁과업은 사회성격을 개변시키는 변혁과업과 어떻게 연관되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변혁의 과학을 깊이 있게 공부한 변혁담론에서 찾을 수 있다.
현장활동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진보적 정치활동가들은 사회성격을 개변시키는 변혁과업을 올바르게,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변혁담론을 주고받아야 한다. (2010년 9월 2일 작성)